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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사과
안동 다녀오는 길에 문경에 들려
가을빛 환한 사과밭에 간 적이 있었다.
맛보기로 내놓은 두어 조각 맛보고 나서
주인의 턱 허락받고
벌레 먹었나 따로 소쿠리에 담긴
못 생긴 사과 둘 가운데 하나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지.
입에 물린 사과,
입꼬리에 쥐가 날 만큼 맛이 진했어.
베어 문 자국을 보며 생각했지.
사과들이 이 모두 종이옷 입고 매달려 있었는데
이놈은 어떻게 벌레 먹었을까?
주인 쪽을 봤지만
그는 다른 고개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어.
혹시 이 세상에서 진짜 맛 들려면
종이옷 속으로 벌레를 불러들일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제 몸 덜어내고
벌레 막은 과일 소쿠리로 들어가야 하는가?
초가을 볕이 너무 따가웠다.
상자 하나를 차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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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가텔 5
이 한 세상
노래 배우는 새처럼 왔다 간다.
목소리에 금 가면
낙엽 지는 나무에 올라
시를 외우다 가겠다.
기다렸던 꽃이 질 때
뜻밖에 혼자 남게 될 때
다저녁때 예고 없이 가랑비 뿌릴 때
내 삶의 관절들을 온통 저릿저릿하게 했던 시들,
마음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운 떼기를 기다리고 있다.
단 시는 아님.
외우다 또 고치려 들면 어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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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생
책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했어.
서달산 산책길을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 걷다가
혼자가 아닌
겨우살이 둘이 올라 사는 나무를 만났지.
숙주에게 너무 부담 주는 기생寄生은
서로에게 안 좋다지만,
때마침 곤줄박인가
둘 중 더 큰 겨우살이의
조그만 반투명 황록색 열매를 쪼아 먹고 있었어.
좀 끈적끈적하겠지만 맛있게.
숙주 참나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지.
미리 와 자리 잡은 기생자가 뵈지 않을 때도
내 위에 내려앉지 마라
손사래 치던 세상의 숙주들이여,
내가 한평생 같이 살고 그나마 남기고 갈 건
힘들지만 기생시키고 또 스스로 기생한 일들.
이 한생 살고 세상에서 나갈 때
반투명 열매 맛있게 쪼아 먹는 새를 보게 될까?
반질반질 부리에 몸 콕콕 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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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나기
아침 최저 기온 영하 13도,
발코니가 채도(彩度)를 낮췄다.
어깨 계속 높이던 소철,
시퍼린 몸 톱을 휘두르던 알로에,
옥수수보다 더 넓고 푸른 잎 자랑하던 문주란,
다들 몸 추스리고 광도 줄였다.
겨울이다. 적적하다. 온다는 눈 내리지 않고,
늘어나는 건 책장에 오르지 못하고
탁자와 주변에 수북이 쌓이는 서적뿐.
이제 우두커니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건가?
우두커니라? 어디선가 바람이 빠지는 소리,
머리 흔들어 막아보려 고개를 드니
발코니가 술렁이고 있다
안 보인던 제라늄 몇 송이 새로 나타나
빨간 모자 쓰고 춤추고 있고
잎 계속 떨어뜨려 죽더라도 햇빛 받으며 죽으라고
며칠 전 거실에서 내논 고무나무가
저녁 해 향해 잎들을 번쩍 쳐들고 있다
그렇다
지금은 반기며 사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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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아신스
ㅡ이상희 시인에게
원주에 둥지 틀고 사는 후배 시인이
코로나 확산세 뚫고
히아신스 한 다발을 보내왔다.
비닐 옷 벗기고 꽃병에 담아 탁자에 올리자
바로 이때다!
꽃들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가,
확 터지는 향기, 정신이 어쩔 어쩔.
발코니 창문을 열어줘도
나갈 염을 않는다.
가만, 발코니에 내놔야 할까 보다.
꽃병에 손을 내밀자
꽃들이 손대지 말라는 듯 허리를 고쳐 세운다.
'지금 우리는
단 한 번 주어지는 한창 삶 살고 있어요!'
단 한 번 주어지는 한창 삶이라?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도통 희미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게 있긴 있었겠지.
히아신스에겐 그게 바로 지금이군.
심호흡을 한다.
매해 몇 번 만나는 국화 향기,
잘 씻긴 하양이나 노랑이라면
히아신스 향기는 무게 살짝 입힌 은빛.
찬찬히 허파에 넣는다.
감각들이 바빠진다.
다시 심호습을 한다.
허파꽈리들이 무겁게 열렸다 닫히고
숨에 무게가 실린다.
그 누군가가 한창 삶 사는 걸 건드리지 않는 일은
이 우주에 몸 담고 있는 모든 동승자의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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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를 맞다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갑작스런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
'이마를 짚어봐.'
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겨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야 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
이마에 손 얹어보니
열이 있는 듯 없는 듯,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
일어나 커피포토에 불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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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 어느 날
코로나 흐지부지되는데도 그냥 집콕하다 보니
아파트에 벗꽃이 만발,
날리는 꽃잎도 한둘 있었다.
오래만에 휴대폰 꺼내 들고 꽃을 찍으며
아파트 동남 편에 붙어 있는
조그만 삼일공원에 올랐다.
공원이 온통 환한 꽃
휴대폰 속까지 환해졌겠지.
꽃 찍으며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아
이빨 새까맣게 버찌 따 먹던 시절로 돌아갔다 내려오
는데
바람이 이는가, 시야 가득 꽃잎들이 날려 왔다.
두 손 내밀어 받았다.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잘 잡히지 않았다.
이런! 애써 내밀지 않는 머리에
꽃들이 스스로 내려앉는군.
이거 괜찮네.
꽃잎 계속 내려앉는 머리를 들고
열에 떠 꽃 속을 돌아다녔다.
현관 앞에서 머리를 털려다 그냥 들어가
엘리베티커 오름 버튼을 누른다.
하늘이 씌워준 한환 관 머리에 쓴 채 샤워에 드는 사람
이 세상 이 봄에 몇이나 될까?
끄트머리가 확 돋보이는 시 쓴 느낌으로
화관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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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색빛으로
몸 다 내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여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마음먹고 다시 둘러보면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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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운대 그 나무
후배 시인이 벼르고 벼르다 다녀왔다고 보내 준
몰운대 사진 몇 장.
그중 마음 앗긴 건
그동안 더 거무튀튀해진
벼락 맞고 윗동 잘린 벼랑 끝 나무 사진.
15년 전인가
반대편으로 돌아가 슬쩍 안아보려다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칠 뻔
삶의 끄트머릴 미리 보게 한 나무.
세수하다 문득 손을 멈춘다.
비누 묻은 두 손등에
얼키설키 드러나는 검푸른 정맥들.
엄지손가락에 오른 놈도 있다
흐름 제대로 안 보이고 합류점 분명치 않아
건널 자리 찾기 힘들었던,
그래도 건넜던,
내 삶의 얽히고설킨 강물들.
건너면 노래가 되곤 했지,
아픈 노래도 있었지만,
정맥들이 바로 그 강물을 닮았어.
손에 묻은 비누를 물로 씻는다.
정맥들이 더 도드라진다.
갑에 놓인 비누를 끌어다 잡는다.
미끄러져 세면대에 툭 떨어진다.
언젠가 삶이
비누처럼 미끈 떨어져 나갈 때
이 정맥들을 뽑아 고르게 퍼서
몰운대 그 나무에 걸어줬으면.
벼랑 위 경치가 하도 뛰어나
떠가던 구름도 흐름 멈추고
구름이길 그만둔다는 정신 몰운대.
벼랑 아래 오가며 올려다보면
줄들이 건들건들 기이한 나무.
보라고 세운 것치곤 너무 후지다?
그래? 후진 가을 방금 건넜어.
건너긴 건넜는데 노래가 없다?
이제부턴 속으로 노래하라! 몰운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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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트막한 담장
동네 서달산 산책길 오르내리며
이 골목 저 골목 골라 걷던 곳에
다세대주택들이 빼곡 쳐들어왔다.
지나가며 슬쩍슬쩍 넘겨다보면
조금씩 색다르게 꾸민 조그만 꽃밭들이
나 여기 있네! 하던
야트막한 담장들,
낮은 대문 지붕에
애완동물처럼 앉아 있던 엄청 큰 호박,
오가며 서로 낯익히던 강아지들 고양이들,
다 사라졌다.
목청 별나게 좋던 새도.
산책길에 하나씩 점등되던 조금씩 다른 등불들,
눈 내리면 현관 앞에서
대형 눈사람처럼 웃던 몇몇 조그만 눈사람들까지
모두 주섬주섬 포대에 담겨
추억의 다락방에 쌓여 있게 되었다.
다시 꺼내더라도 윤기 다 휘발되어
전처럼 만지듯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옛 책 뒤적이다 끼워두고 잊었던 단풍잎 만나듯
꽃 대신 남새 심으며 마지막까지 버티던 집 낮은 담장에
가랑잎 하나쯤 얹혀 있을까?
바람이 일면 빨갛게 곤두서 바르르 떨기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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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날리는 눈발
평생 책들과 얽히고 설켜 살아왔지만
이즘 와서 책과 만나는 일이
풍 빠졌다 아뿔싸 기어 나오는 허방다리 되었다.
시력 저하로 읽는 속도 확 줄기도 했지만
책을 한번 들면
약 들 시간 약속 시간 같은 게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다.
약도 어디 한두 가진가.
며칠 전,
미뤄뒀던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다가
약속 시간 한참 놓치고 서둘러 집을 나섰지.
내려갔던 엘리베이터 다시 타고 올라와
허둥지둥 마스크 찾았어.
그리고 바로 오늘 아침,
약 들 시간 꽤 남았다고 후배 하응백이 보내 준
물고기들이 유머러스하게 자기소개하는
묘한 산문집을 읽다가
화급히 마스크 집어 들고 집을 나서
막 와 닿는 마을버스 잡아타고 전철역에 갔지.
아차, 혈압약! 이 강추위에!
그 버스로 되돌아오며 휴대폰으로
시력 빠지니 약 찾아 먹기도 힘드네 어쩌구 하며
허방다리에서 기어 나왔어.
이러다 어느 날
풍 빠졌다 그만 기어 나오지 못하게 되겠지.
쳐들었던 두 팔 내려지고
영결식장 딸린 병원으로 데려갈 거야.
데려가지 전, 잠깐!
혼술하던 술병과 읽던 책 두어 권 품에 안고
지금처럼 창밖에 흩날리는 눈발을 보게 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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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는 은행나무
가을도 이제 끝물이군.
이름 같은 걸 아끼다 친구의 딸 못 도와줘
친구 크게 섭섭게 하고
이틀 동안 헝클어진 마음 안고 살다
발코니에 나가니
불타는 은행나무들이 나타났다.
주차장 건너 잎 거의 떨군 벚나무 위 축대가
온통 황금 불길, 황반변성 걸린 눈에
네 그루 금나무가 불타고 있었다.
노랗고 쪼그만 불티 하나 튀기도 했지만
저처럼 한 색감 한 모양새로 질박하게 타는 불
본 적이 없군.
남은 내 삶에도 혹시 불길이 댕긴다면
저렇게 탔으면!
그 생각 읽었다는 듯
샛노랗게 타는 큰 불덩이 하나 던지듯 날아와
어 어 하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와닿기 바쁘게 활활 타는 불
헝클어진 마음을 정신없이 태워주네.
태워라, 마음 텅 비게.
불 속에 흰 댕기 같은 게 어른거려 들여다보니
매듭 하나가 활활 타는 불 속에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태워! 그래도 꼿꼿이 버틴다.
그 버팀 생각을 웃돌아 언뜻 스치는 말 새겨보니
'섭섭함은 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묻는다.
'분노도 타는데 섭섭함은 안 타나?'
'분노는 분노, 섭섭함은 고인 물, 물꼬를 트게'
맞다! 하듯, 축대 위 불길이 한 번 펄럭였다.
불타는 은행나무여, 다음번 친구들 모임엔
아낀다고 30년 감춰두고 잊어버렸던 명풍 술
이틀 전에 구한 것처럼 들고 나간다.
덧붙일 말 같은 거 없다.
아끼려 들다 섭섭게 한 게 어디 사람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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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삶의 돌쩌귀
ㅡ 정선 도원의 시인 전윤호에게
봄비 맞자 꽃들 다투어 속을 열고
나비와 벌 들이 바삐 오가고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 활짝인데
코로나 거리두기도 반쯤 풀렸는데
시가 도통 안 써져 입맛 싹 가셨다고?
입맛 꺼지면 코로나가 옆에 있건 말건
시가 써지건 말건
살맛 없지.
삐걱대는 문 돌찌귀에 기름 치듯
시인 삶의 돌쩌귀 한 번 손보는 게 어때?
'앞으로 서 같은 다신 안 쓴다!'
모르는 새 사는 일이 매끈할 거다.
가라앉은 입맛이 돋아날 거다.
며칠 지나면 시 쪽에서 먼저 궁금해
모르는 척 곁에 와 서성일 거다.
시도 시인도 아프긴 아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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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기차게 당긴 곳
인터뷰 도중 물어 왔다.
오래 사시면서 여행도 많이 하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가
선생의 마음을 가장 기차에 당긴 곳입니까?
괭이갈매기들 정신없이 나는 강화 펄에만 가도
바다 안개 불현듯 밀려와
해와 섬과 갈매기를 한꺼번에 삼키고
물소리만 남겨
그곳을 밑바닥부터 바꾸기도 하는데,
물소리만 남고 앞이 안 보이는 풍경이
그 어느 풍경보다 마음 더 조이게도 하는데,
어떻게 세상 어느 한 곳을 딱 짚어
마음 가장 기차게 당긴 곳이라 할 수 있겠는가?
며칠 전 집 발코니에서 홀린 듯 내다본
다른 세상 불길처럼 정색하고 샛노랗게 타오르던
은행나무들이 떠올랐다.
머뭇머뭇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답했다.
내 살고 있는 그렇고 그런 늙은 아파트도
해마다 두어 차례
멍 기차게 때리는 공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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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에베소에서 만난 젊은이
이십 년 전 터키 에베소에서
노래하듯 원 달러 원 달러 건강한 목소리로
사진첩 내밀던 젊은이
팔고 갈 때 보니
관광객들 앞에선 봬주지 않던 절름발
심하게 절름절름.
지금 생각해도 그 청년
탁자 한 귀퉁이에 아슬아슬 놓인 찻잔 같다.
살 사람들 앞에서 그만큼 절름 절름댔으면
사진첩 몇 권씩은 더 팔았을 텐데.
하나 그게 바로 인간이
자기 삶 사는 법도 아닌가?
숨을 잠시 멈춘다.
무언가에 마음이 주춤주춤.
나는 초년 고생도 불고 다니는 사람,
지난날을 헤집다가 그 젊은이 만나면
찻잔보다 마음이 먼저 엎질러진다.
=====2>
+ 눈물
이번에는 안구주사 후 허술한 세척?
병원에서 돌아와자 까칠까칠하던 눈 쓰리기 시작
계속 눈물 쏟아낸다.
삼 년 전인가 같은 주사 맞고 저녁 늦게까지
눈 쓰리고 눈물 한없이 흘러나와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는 난리 쳤지.
몇 차례 검사 끝에 진료비 세게 물고
치료는 진통제 단 한 방울, 그냥 견뎌보자.
마음 진정시키려 침대에 누워 생각한 게
눈물이 영어로 뭐더라?
영어로 이 한세상 먹고 산 셈인데
이 입에 닳고 닳은 말 어디 갔지?
뇌를 구석구석 뒤져봐도 뜨지 않네.
이 눈물, 번역 깜도 못 되나?
하긴 언제부턴가 마음 다부지게 먹고
눈물을 멀리 또 멀리하며 살았어.
전에는 신문 읽다 나도 몰래 눈에 물기 차올라
시야가 온통 눈물 세상 되기도 했지.
이즈음은 티비에서 비쩍 마른 아프리카 아이가
눈 동그랗게 뜨고 입 흡반처럼 내밀며 배고프다 울어도
눈시울이 발맞춰 동하지 않네.
가만, 이 김에 눈물을 다시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면
이 눈물쯤 제물에 처리되지 않을까?
그만!
눈 귀 허리 다 불편하고 괴질 아직 횡행하는데
진 땅 마른 땅이 어디 따로 있어?
메모지 꺼내 적는다.
Bo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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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문
엄청 크고 넉넉한 장원莊園도 갑갑해
폭설 쌓인 눈길, 마차 타고 기차역으로 달려가
82세 생을 마친 톨스토이,
그 나이에 아파트 한구석에서 코로나 집콕 시작,
오래 미뤄뒀던 톨스토이까지 꺼내 읽으며
2년 이상 버티다가
봄꽃 질 때 나서니 지문이 없어졌다.
새 여권 신청하며 검색기에 엄지 올려놓고
아무리 눌러대도 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스크 벗어 들고 승강이 끝에 수속을 마친다.
찜찜하다.
손가락에 묻은 스탬프 액 물티슈로 지우며
생각을 헤치듯 구청을 나온다. 햇빛이 왈칵.
가만, 나도 모르게 세상 여기저기 찍어놓고 갈 물증을
지워버리고 살게 됐어.
홀가분하지.
느낌들을 가볍게 밀며 걷는다.
간판들이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게 읽힌다.
거꾸로도 읽힌다.
잠깐! 막 건너려는 길 건너편에
붉은 손바닥 불이 켜진다.
잠시 걸음 멈추고 생각해 보자고?
그래, 그래, 알겠어. 하긴 그렇기도 해.
톨스토이 문학을 한마디로 새긴다면
'지워버린 지문이 너를 인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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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세번
시력 청력 계속 줄고
기억력, 감탄, 섬뜩하게 졸았지만
삶이 나에게 준 것 아직 많이 챙긴 채
83번째 생일 맞고 또 몇 달 지났다.
아직 산책하다 길섶에서
철 한참 지난 꽃이 얼굴 방끗 내밀거나
마스크 쓰고 만나도 아는 길고양이 피하지 않고
다람쥐도 피하는 척만 하는 걸 보고
사는 것은 제때제때 사는 법 깨치는구나,
하면서도 별 감흥 없이 지나치곤 하지.
하지만 기억력과 감탄은 한탄 속에 산다던가?
방금 깨알 글씨 영어 사전에 확대경 들이대고
앉은자리에서 낱말 하나를 세 번째 찾았어.
이런 걸 기억력이라 달고 다녀!
쯧쯧 하다 정신이 번쩍,
내가 이 세상에서 대놓고 혹하는 말
'삼세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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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다?
ㅡ 미국에 사는 시인 친구에게
외롭고 외롭다는 메일 받았다.
누이동생 별세가 충격이었겠지만
무더운 플로리다 집을 두고
아들이 가까이 사는
시원한 미시간주 여름용 콘도에서
긴소매 옷 입고 산책하며 외롭다는 너,
너의 서울 친구들은 코로나 4차 유행에
반소매 입고도 무덥게 사람 못 보며 산다.
이 코로나 겁박 세상에 우리 나이 또래치고
외롭지 않는 자 얼마 되겠나?
어디부터가 남보다 더한 외로움이고
어디까지가 그런 외로움 아니지?
하긴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혼술 30분 하는 것보다
외롭다고 속 한번 터는 게 편킨 하겠지.
그동안 네가 나보다 따뜻한 시 써왔으니
코로나 거리두는 세태에 짜증 더 나기도 하겠어.
하나 외로움을 징하게 느낀다는 건
바깥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는 거 아니겠니.
우리 삶의 끈, 한번 획 잡아당기면 그만 끝!인데
속 쓸쓸함 잠시 내비치지 않고 있다 가는 게 어때?
========
+ 건성건성
코로나 집콕,
반년 넘어서서 책들이 멀어지고
쇼팽과 드뷔시가 한데 물소리 되었다.
입맛이 나가고
건성건성이 집 안에 자리 잡았다,
라고하고 싶지만 뵈지는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음無音의 둔주곡이다.
오후 두 시, 꽃에 물을 준다.
꽃의 표정도 건성건성, 마스크 꺼내 쓰고 나간다.
후덥지근 장마철 아파트 단지
두 바퀴 돌고 와도 집 안의 표정 그대로다.
건성건성, 이건 고장 난 슬픔 같지만
슬픔이라면 새게 할 수나 있지.
참다 참다 땜질 자국 찾아내 납 조각 떼며
죽을 쑤든 엎어버리든 마음대로 해! 하면
새기 시작했어.
건성건성은 소리도 빛도 땜질 자국도 없다.
세 시, 꽃병에 물을 준다.
왜 또? 하지 않고 꽃이 물을 받아 마신다.
잘도 마시는군, 미소 지으려는데, 넘친다!
손수건 꺼내 들고 탁자에 넘친 물 훔치려다 멈칫,
떨어진 꽃잎 하나가 물길을 절묘하게 막고 있다.
중력이 맞서네.
혹시 물 막겠다고 미리 여기 떨어진 건 아닌가.
떨어진 장소아 놓인 각도를 보면
예측하고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아 그 꽃잎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꽃잎 또 하나
물 하고 관계없이 건성건성 놓여 있다
후 부니 뒤집힐 듯 뒤집힐 듯 한 뼘쯤 물러간다.
다시 분다. 이번엔 반 뼘쯤 물러가 버틴다.
한 번 더 분다.
이번엔 흠칫흠칫 하다 만다.
계속 버티네! 하긴 버팀만으로도
이 코로나 세상에 남아 있을 격 갖춘 게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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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9월
ㅡ 후에 수원행 강화행을 같이한
최동호 김왕노 이인행 시인에게
안과 예약 빼고
코로나가 2020년 9월의 하루들을 몽땅 뜯어 갔다.
8월 마지막 날 저녁 대치동 카페 M 약속이 뜯겨 나가자
손곡 소주로 흥취 돋우던
한 달에 한 번 사당동패 회식,
가성비 높은 새 와인 맛보던
한 달에 한두 번 문학과 지성사 모임,
10일, 2월에 정했던 춘천도서관 강연,
12일, '소나기마을'의 아버님 20주기 추모제,
17일, 8월에 정한 강서도서관 강연,
24일, 고교 동창들과 넷째 번 목요 모임.
그리고 '아 그 가을 저녁!이 될 뻔한
최동호와의 수원 양고기 약속,
줄줄이 다 뜯겨 나갔다.
긴 장마와 몇 차레 태풍 끝에 찾아온
깨물어주고픈 9월 한 달이
허수아비 하나 심드렁 서 있는 텅 빈 발 되었네.
(추신 : 9월 말미에
코로나 투정하며 면도하다 턱 벤 자국, 그것도 이틀 연속,
마스크가 가려주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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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상 텃밭
아내와 이웃들이 상추 고추 깻잎 조금씩 가꾸는
아파트 옥상 텃밭,
어제 까치들이 날아와 몇 곳을 엉망 만들었다.
올라가 보니 푸성귀 상당수 뽑아버리고
흙 속에서 놀다 갔다.
부리로 깻잎 고추 줄기를 뽑고
흙에 몸을 비벼 댔겠지.
보이느니 하늘 아래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까치들의 하루하루가
흙에 몸 좀 비벼보고 싶은 나날이 아니었을까?
까치들의 접근 막는다고
아내와 이웃들이 박아논 나무젓가락들 보며
잠깐 까치 마음이 됐다가 내려왔다.
다음 날은 까치들이 나무 젓가락 몇을 뽑았다.
까치 둘은 아직 미련이 남은 듯 옥상 난간에 비켜 앉아
다시 젓가락 심는 아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사람들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지겨워
진흙 찜질하러 달려가고
젊은 까치들이 코로나 퍼뜨린다 야단맞으며
나이트클럽을 기웃대지 않은가?
까치와 나무 젓가락 들을 번갈아 보며
먹먹한 마음 비비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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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파랑길
이 코로나 끝날 때
이 땅의 길들 가운데 그중 긋는 획劃이 분명한
해운대 오륙도에서 고성 화진포에 이르는 저 해파랑길,
그 길 두어 토막을 무작위로 짚어 걸으리.
고개 넘으면 포구, 포구 벗어나면 해송 숲,
자잘한 섬 같은 거 거느리지 않은 담담한 해변,
기대 않던 곳에서 날아오르는 하얀 물새들,
어스름 때면 멀리서 또 가까이서
바다의 별들처럼 불빛 해 달기 시작하는 고깃배들.
엄청 큰 붓으로 동해 물을 콱 찍어
일필휘지 필력 있게 그은 길을
처음 만나듯 눈 챙겨 뜨고 걸으리.
사람은 어디 있냐고?
저 앞 고개 위 바다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사람,
멀리서 보고 걸어가 나란히 서서
슬쩍슬쩍 곁을 살핀 한 시간 가까이
몸짓 한 올 내비치지 않고 동상처럼 서 있다.
그의 가슴에
동해가 통째로 들어와 어깨춤을 추고 있으리.
그 춤 슬쩍 빌려 어깨에 두르고
해파랑길 걸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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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갈까 말까?
ㅡ2020년 봄, 코로나바이러스에게
9시 15분,
외출복 겹치고 마스크 꺼내다가 멈칫,
이 만날 약속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탁자 위에 구겨진 신문이 눈에 뛴다.
편치 않다.
펴준다.
드러나는 머그잔 자국,
커피 마실 땐 신문이 바로 퍼 있었구나.
퍼기만 해도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산책길 저펀에
허옇게 그려져 있는 저 허전한 그림,
다가가며 퍼보면
땅에 발 굳게 딛고 꽃 피운 백목련들,
한창이었어.
생각이여,
지금 현관에 서 있는 나를 한번 펴보게.
'코로나 한창이라 나갈까 말까 하고 있군.'
그래? 나갈까 말까?
'마스크 잊지 말게.
둘 다 마스크 쓰고 만나면
코로나와 서로 모르는 채 지나칠 수도 있지.
둘 중 누군가가
제물에 멈칫멈칫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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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달산 문답
기온 36.6도, 기상청 체감온도 40도,
괜히 돌고 있는 선풍기를 끈다.
말 잘 안 듣는 에어컨 수리기사는 내일에야 온다는데
참다 참다 보니 정말 무덥다.
휴대폰 열어보니 14시,
이 코로나 4차 대확산 판에 어디로?
동네 뒷산에 오른다.
표고 180도 안 되는 서달산
갈림길에 이르자 등에 땀 줄줄이 흐르고
더위 아지랑이가 여기저기서 아른아른.
현충원 사당문으로 갈까 상도문으로 갈까?
그냥 여기서 서성댄다? 그건 더 무덥네.
깜짝! 서너 발자국 앞 더위 아지랑이 속에서
박새 하나가 훌쩍 뛰어올라 날아간다.
그가 뛰어오른 자리에
지난날 『벽암록』에 빠졌을 때 만나곤 했던
마음속 은자隱者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갑다.
'마침 잘 왔네, 이 찜통더위에
걸터앉을 데마저 없다. 어떡하지?'
ㅡ 견딜 견 자지.
'바로 뛰고 모로 뛰어도 견딜 수 없을 땐?'
ㅡ 훌쩍 뛰게.
내 입에서 나도 몰래 주문이 흘러나온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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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새의 죽음
산책길에 죽은 참새를 만났다.
길 가장자리.
주변에 낙엽 몇 장 얇은 눈에 붙여 있고
한 뻠 남짓 원형으로 눈이 녹고 있는 곳,
앙증스레 두 발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굶다 갔니? 얼다 갔니?
사는 게 너무 답답해
목숨 옜다 길에 놔두고 간 건 아니니?
삼십 년 전 동해안 겨울 솔숲길에서
죽은 참새를 만난 후 처음이었다.
그 참새, 참 가볍도 깨끗했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김으로 불어주기도 했지.
혹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아니고
추위나 배고픔으로 숨 거둔 새에게
온기 담긴 입김 한번 불어주자는 게 아니었을까?
이번에는 코로나 마스크를 쓴 채
내려다만 보았지.
웅크린 발가락들에
요새 보기 힘든 것이 묻어 있군.
이런, 이 새는 생흙 세상에서 왔다!
뭐라고?
그래 그래 알겠어.
별것 아닌 일에 감탄한다 이거군.
하지만 이 온통 콘크리트와 코로나 세상에서
죽은 참새 발가락의 생흙!
겨울 산책길에서
보고 또 보고 싶은 꽃을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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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을 향하여
바람으로 치면
산들바람처럼 살자.
*
집집이 설치미술 내걸던 빨랫줄들이 사라졌다.
참새들의 발가락과 가을 햇빛이 퇴화할 것이다.
*
같이 살던 사람들이 세상을 빠져나간다.
하나씩 뜯겨 나가는 내 삶의 랜드마크들.
새치기해 슬쩍 세상 뜨는 후배들도 있다.
코로나 거리두기 닥치자
사는 게 견디기 힘들 만큼 헐렁해졌다.
*
코로나 창궐 속에 한층 더 정교해졌다는 AI,
잘 나갈 때 인간의 딴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언젠가 그대도 하던 일 다 내던지고
훌쩍 자리 뜨고 싶을 때 올걸.
*
더 고칠 것이 없다 할 때
마침표가 사라진다.
*
이크, 밟을 뻔,
디디려던 발 바로 밑에 청보라 상큼 제비꽃,
다시 보면 옆으로 또 뒤로
풀 바람에 실려 고개 갸웃갸웃 청보라 보석들!
바닥은 우리가 채 밟지 않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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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파편들
4인끼리만!
오랜만에 식당에서 아들 내외 손주들과 식사,
모르는 사람들끼리보다도 더 떨어져 앉아.
*
보고 싶은 사람 수 줄기 시작하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8년 전 세상 뜬 친구 김치수, 꿈에 나타났다.
나 그 글 읽었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거냐?
대답 대신 지공다스* 한 병 내밀었다.
마스크 없이.
*
집콕의 극치는 역시 혼자 있음.
그 있음에 외로움 하나라도 빠뜨리면
혼자 없음.
*
오래 집콕하며 고이는 생각.
왜 나를 미워하는 자를 꼭 미워해야 하는가?
미워하기, 그건 너무 쉬운 일인데.
*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온다.
혼자 있음.
혼자 없음.
지내다 보니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
마지막 시 쓰기 딱 좋은 저녁이 올 것이다.
*비평가 김치수가 유학한 프랑스 론 지방 특산 와인, 가성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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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드레 만에 집을 나서니
코로나 집콕하다 여드레 만에 집을 나서니
눈 가늘게 뿌린 땅에 거대한 영지버섯처럼 붙어 있는
맨홀 뚜껑부터 반갑다.
흑백 마름 옷 깔끔하게 차려입고 걸어 다니는
까치도 반갑다.
별생각 없이도 즐겁게 오르내린 서달산 하고는
눈인사를 하자.
어제는 후배가 아내를 잃었다는 문자를 받고
전화로 봉투 부탁만 하고 말았지.
오늘 아침,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마스크 꺼내 쓰고 집을 나선 내가 반갑다.
하늘에선 구름이
정교하게 입 하나를 만들고 있다.
무슨 말을 할까?
무슨 말을 하든!
모르는 사이에 버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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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2월 24일(목)
ㅡ 최동호 이승원 김왕노 김광호에게
겨울날치고도 쌀쌀한 2022년 2월 24일 9시 30분.
후배 문사들이
코로나 하루 확진 16만 명 쓰나미 뚫고 와
새로 뚫린 보령 해저터널 보러 갔다.
서해안 고속도로
낮게 뜬 가벼운 구름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1시간 걸리던 길을 10분으로 바꾼 터널!
대천에서 스며들어 단숨에 안면도로 빠지니
안면송安眠松들이 채도 낮추며 침착하게 맞았다.
차 타고 그냥 지나치던 꽃지 해변.
카페 테라스에 앉아
설탕으로 알고 과자 녹인
구수한 얼그레이 마신다.
코로나 겨울에 사람 별로 없다.
해변에는
바닷물이 일정 간격으로 끌고 나간 모래 금들,
처음엔 엉금엉금, 중간에는 쭉쭉,
물가에 가선 흐지부지,
태어남의 일생들이 새겨져 있다.
그 뒤로 구름 몇 덩이 둥둥 뜬
딱 한 줄 수평선.
젊은이 두 쌍이 테라스에 올라와
마스크 벗고 커피를 마신다.
봄날 같은 얼굴들, 맑고 쨍쨍한 목소리들,
모르는 새 테라스가 환해진다.
가만, 바다와 모래밭 구도가 바뀌고 있다.
바다에서 물새들이 날아오고
물이 들어온다, 물이.
곧은 금 굽은 금 가리지 않고
앞서 긋다 만 금부터 먼저
물결이 금들을 지우고 있다.
흔적도 없이.
나의 금도 이렇게 지워지리라.
긴장할 거 없다 몽상도 없다.
그어진 금 거두고 새 금 긋는 거다.
모래밭보다 내가 먼저 젖는다.
=====3>
+ 까치
간밤에 눈이 꽤 내렸군.
현관 나서기 바쁘게 까치와 만났다.
덮인 눈 댓 걸음 앞에서
나를 향해 고개 살짝 쳐들고 있는 그를 보자
미끌! 멈칫!
눈길 첫걸음을 바로잡았다.
걸음 다스리느라
까치 서두르지 않게 한 거 잘했다.
그 누구보다도 우아한 흑백 옷 차려입고
옷 같은 데 마음 쓰지 않는다는 듯 늘상 걸음으로
한 발 두 발 눈길 조심히 걷는 나보다
대여섯 걸음 앞서 흰 눈 위를 걷는다.
냄새와 소리가 없는 조그만 그림이 걷는 것 같다.
옷차림처럼 말이 적고
비둘기처럼 친근하게 굴지 않지만
일부러 피하지도 않는다.
혹시 저세상에도 새가 있다면
입구에서 멈칫, 까치가 나를 맞진 않을까?
저세상은 이 세상과 정반대라고 하는데
어깨 꾸부정 천천히 걷는 나를 까치가 뒤따르며
괜찮다 괜찮아, 가슴만 좀 펴고, 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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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달
닷새 전만 해도 제철 과일처럼 싱싱했던 그
아차 하는 순간 세상 밖으로 나갔다.
사는 동안 내가 말빚 톡톡히 진 친구.
빈소에서 쐬주 몇 잔 하고
돌아와 독주 두 잔 거푸 들이켜도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뜬금없이 창가에 앉아있는 밤.
깜빡 정신 차려보니
하늘에 조각달 하나 박혀 있다.
눈 비비며 더듬ㄴ는다.
오래전, 그래 참으로 오래전 어느 가을밤
아무리 해도 마음이 마음에 잡히지 않아
밤하늘 올려다봤을 때 처음 만난 조각달,
그 달이 전처럼 양끝 날카롭게 세우고 묻는다,
'너 지금 뭐 하고 있지?'
대답 궁해 머뭇거리자
'그는 지금 한 점 혼볼 되어
태양풍을 타고 있다.
지구에서 그와 두 번 세 번 헤어지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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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야꽃
초여름 어느 날
발코니의 다른 꽃들 모두 깜빡 사라지자
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상체 푹 숙이고 있던 넝쿨
숙인 꽃대에서 슬그머니 고개 쳐드는 호야꽃.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슴에 조그맣고 빨간 별 새긴
30여 송이 흰 꽃들의 단단한 묶음.
보며 볼수록
다연발 로켓포 모형이다.
우크라 전쟁 때문인가, 꽃을 두고 로켓포라니!
생각을 녹이려고 꽃잎을 어루만진다.
나긋해 보이는 손톱보다 작은 꽃 이파리들
옆에 버티고 선 고무나무의 손바닥 크기 잎보다
더 두텁고 단단하다.
제 꽃잎 문질러대고 모르는 척 즐기는 꽃도 있네.
호야꽃 노랫조로 응답:
'이런 꽃이라도 피워놓아야
이 억지와 폭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노래할 수 있지.
다연발 꽃 포는 성대도 되네.
들어보게
'세상 사람들 뭐라 말 해도
꽃이 노래하다 죽어야 열매가 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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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
가만, 근자에 아파트와 빌라 들 가득 들어서
둘러볼 골목 별로 남지 않았군.
살던 아파트 지척,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끝물 나뭇잎들 날리는 서달산에 오르리.
낮비 잠시 뿌렸는지 하늘과 숲이 밝다.
하직 인사 없이 헤어진 다람쥐가 나를 알아볼까?
약수터에 전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떠 있을까?
그런 호사스런 생각은 삼가기로 하자.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길에 굴러 들어온 돌멩이는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 보내고
서달산 능선 길을 아끼듯 걸으리.
벤치 하나, 둘이 서로 얽히듯 서 있는 나무,
약수터가 지나간다.
하늘에 샛별이 돋는다.
이 별 뜨면 가던 걸음 멈추고
무언가 맹세하곤 했지.
참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이제 그만 바닥을 지울 때까지.
=========
+ 서울 소식
ㅡ 미국 의사 됐던 고故 김창영에게
예술원 회원 구술채록총서에 넣을 사진을 찾아
책꽂이 장 속에 던져뒀던 사진 봉투들을 꺼내 뒤적이다가
우리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만났지.
둘이서 들르곤 하던 술집 골목에서
키 훨씬 큰 네가 흘낏 한눈파는 사진이었어.
이제 너와 내가 아는 서울에서
한눈팔고 싶은 골목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사직동 골목이었지, 아마.
사진 속 우리 뒤 손바닥만 한 담장 빈터에서
간질간질 샛노랗게 웃던 민들레도
골목길 담장 뒤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삶의 속내는 하얗다고 일러주던 목련도
다 갔어.
20년 전인가 네가 모처럼 고국에 들렀을 때
마음먹고 청진도 골목을 돌아다니며
한 집에서 소주 두 잔씩,
마지막으로 들른 집이
해장국 전문 '청진옥'이었던가?
거기서는 석 잔씩.
그 해장국집들과 빈대떡집들도
골목 입구에 고층 빌딩 선 뒤
다 문을 닫거나 숨어버렸어.
지금 네가 온다면
너도 나도 이제 오르막 걷기 좀 힘들어졌겠지만
같이 북촌에나 올라가볼까.
깨끗이 다듬어진 골목길들이 관광 사진 같다고?
그래도 하늘에 낮달 비스듬히 걸리면 예스럽지,
이런!
8년 전인가 네가 미국에서 세상 뜬 걸 알면서도
지금 열심히 이 글 쓰고 있구나.
---------------
+ 슬픈 여우
지난 삼십몇 해 수시로 오르내린 서달산 산책길
허리 뻐끗해 정형외과 드나들고 코로나 겹쳐
두세 철 묵혔다 올라가 보니
오르내리며 눈인사 주고받던 다람쥐 나무에
다람쥐 없고
멧새 집 하나가 지어지고 있었다.
알은 체하기도 전에 날기부터 하는 멧새,
여기에도 새가 있네 하며 그냥 지나치게 되겠지.
그러나 지나치고 지나치다 언젠가 서로 눈 맞으며
다람쥐처럼 정든 사이 되진 않을까?
정이 들면
다람쥐가 멧새로 환생했다 할 수도 있겠지.
이 생각 참 마음에 든다.
하나 세상 뜰 때 윤회, 그런 게 있다 해도 나는
귀여운 다람쥐나 멧새로 태어나지는 못할 것다.
혹시 꼬리 감추고 나다니는 여우로나 될까 몰라.
어두울 녘 혼자 산길 가는 사람 앞에
예쁜 색시로 나타나 홀리는 대신
도로표지판이나 슬쩍 바꿔
사람들을 안 가본 데로 가보게 하는 여우.
이 여우 같은 놈! 소리 벌써 들리지만
그런닥 열받는 여우 봤어?
안광 낮추고 킬킬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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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쟁이넝쿨
건물 벽에 그어지는 균열은 건물의 상처겠지.
서달산 올라가다 걸음 멈추게 하던 빌라 콘크리트 벽에
번갯불 형상으로 그어지기 시작하던 금,
금년엔 담쟁이넝쿨 검푸른 잎들이 기어올라
가려주었다
상처 가려주는 삶은 남는 삶이겠지.
잎 색깔도 보는 눈 편하게 검푸르네.
걸음 멈추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
오늘, 나도 모르게 걸음 멈췄다.
상처가 있던 바로 그자리
검푸른 잎들 속에서
잎 하나가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조금 지겨운 무대에서 혼자 독백하듯
표 나게 타고 있었다.
떼려던 걸음 멈춘다.
상처가 타고 있군.
그동안 뵈지 않게 잘 가려졌다고 믿은 내 성처들에게도
빨간 잎들이 나타나 타고 있지 않을까?
재치 있게 처리한다고 꼼지락거리다가
크게 덧난 마음의 상처도 있었지.
어정쩡한 비유라 느끼면서도
혹시 누가 나를 보고 있지 않나 뒤 한번 둘러보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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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바람 친 후
후배가 어렵게 첫 손녀 봤다는 문자 뜬 저녁
푹풍이 거세졌다.
밤새 바람과 비가 격하게 몸부림치며
펜션으로 달려들었다.
비바람이 문 박차고 들어올 기세에
잠이 들락 말락 했다.
혹시 그의 손녀가 맞게 될 폭풍이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늦결혼 아들 5년만의 경사라는데,
그러다 아침,
검은 구름 아직 하늘에 남아 있고
채 나가지 못한 물이 마당 군데군데 고여 있지만
펜션 앞 해송 두 그루 매끈하게 몸 털고 있다.
마당에 쓰러진 자전거를 다시 세운다.
비바람 맞아 더 깨끗하다.
지붕의 풍향계는 고개 더 꽃꽂이 세웠다.
멀리서 오고 있는 금빛 가을이 보일 것이다
이 시로 축하를 대신한다.
===========
+ 어떤 동 짓날
무슨 꿈이 이래?
새벽꿈에 질질 끌러다니다 눈떠보니
아직 밤이다.
일곱 시가 홀쩍 지났을 텐데
동향 창도 아직 캄캄이다.
눈뜨면 아침! 시동 걸 둥지 며칠 남았지?
사흘, 나흘?
이런, 언제부터 동 짓날 보채는 몸이 되었나?
일기예보에 따르면 이번 동짓날 사당3동엔
바람이 불다 말다 할 것이다.
까치와 비둘기 들이 아파트 현관까지 날아와
땅을 쪼다 갈 것이다.
저녁엔 서달산
나무들이 높이 쳐들고 있는 빈 가지에
빨간 해가 걸릴 것이다.
동짓날답겠지.
하지만 바로 4년 전
이번처럼 보채던 날은 아니었지만 바로 동짓날,
그 빨간 해를 눈부시게 바라보던 다람쥐 하나가
가까이 다가가도 꼼짝 안 했어.
내가 그만 섰지.
순간 위험하다! 소리가 들렸어.
누가 왜 위험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지.
다람쥐 하나가 나무 아래 서 있었어.
목숨보다 더 한 것이 앞에 있다는 듯
내가 열 걸음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고개를 해 쪽으로 향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
내가 덩달아 환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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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을 멈추다
몸과 마음 고단해 조금 늦게 나선 산책길,
해 아직 남아 있을 하늘 쪽을
뭉게구름이 두텁게 막고 있다.
어린 시절
친구 집 방구석에 무얼 가리고 있던 병풍처럼
하늘 한편을 가리고 있다.
전에 가렸던 것은 어린 나와 가까웠던 아이의 몸,
등 오싹해도 병풍 뒤가 궁금했지.
지금 구름이 가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허둥허둥 날고 있는 늦둥이 기러기 몇?
오늘 하루를 잊지 말자는 듯
천천히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아니면 지평선에 튕겨 어쩔 줄 모르는 해?
생각을 멈춘다.
엇박자 되더라도 가림 없이 살자, 가
일찍이 내가 택한 길이지만
가릴 게 도통 없는 삶은 또 얼마나
접어서 골방에 세워둔 병풍처럼 슴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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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되게 즐기기
옛사람들, 특히 조촐히 살았다는 옛사람들은
달 아래 홀로 거닐다가 혼자 거문고 타는 걸
최상의 즐거움을 삼았다지만
속되게도 나 혼자서는 잘 즐기지 못한다.
곁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살아 있는 어떤 것 하나라도 대면할 수 있어야
마음 붙이지.
금년 건 다 피웠군,
발코니 한구석으로 치우려 하자
잠깐! 꽃대 하나 쑥 내밀며
앙증스런 꽃 피워 올려 손을 멈추게 하는 실란.
저녁에 귀가할 때
현관 의자 팔걸이에 납작 엎드려
누굴 기다리는가, 조으는가,
다가가도 날아갈 염 않던
양 날개에 동그랗고 검은 무늬 하나에 해 단
회갈색 나방,
그가 화들짝 내 얼굴로 날아오른다.
조그만 만남이라도 산 것과 마주치면
생짜 삶이 화끈하게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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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을 노래하다
병원 몇이 서로 바투 자리 잡은 등대처럼
불빛 보내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지난 반년간 오라는 신호 보낸 병원 외래만도
안과 가정의학과 이비인후과 치과
이번엔 정형외과.
병원 예약이 식사 약속을 넘본다.
하긴 꽃잎 흩날리는 봄날 병원에서 태어나
눈발 휘날릴 때 병원에서 문상객 맞는 이즈음,
어지러운 세상일 머리 한번 가로젓고
살던 곳에서 그냥 잠들긴 어렵게 되었다.
황반변성으로 병원 간 김에
마침 안구주사 거르게 되어
마음먹고 다른 과들을 둘러봤다.
환자 두셋이 앉아 기다리는 과도 있고
어떤 과는 세일 마트처럼 웅성대기도 했다.
자리 양보하고 일어서는 젊은이도 있었다.
쫓기듯 밖으로 나왔다.
꼬리 막 거두는 초겨울 햇빛.
어둑한 도로는 차들로 메이고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
젊은이 하나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걸어가며 두리번대지 마시오!
두리번대든 앰블런스에 실려 가든
오래 산다는 건 병원 오가는 일,
어느 날 병원에 닿으며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시작되겠지.
서른 번 변주 하나하나가 노래와 춤의 간이역들
그 어느 하나에 혹해 미리 내리지는 않을 거다.
마지막에 다시 뜨는 무지개 같은 주제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내릴 거다.
서른 번 변주시켜도 계속 민낯 내미는 고통들과도
병원 오가며 형님 아우 하게 됐거든.
* 바흐가 불면증 앓는 골드 베르크 백작을 위해 작곡한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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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나라 다녀온 후배
오랜만에 다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그는 막 백 나라째 다녀왔다고 했다.
직장 일 하고도 나이 칠십에
틈틈이 찾아본 나라가 백이라.
백 나라라니!
인천 노을과 가까운 강화 노을만 해도
들어갔다 나오는 느낌 서로 다른데,
입에 맞는 칵테일 모히토도
고장마다 차이 나게 빚는다던데.
백 개의 색다른 노을과
노을마다 입맛이 다른 술을 맛보았다니!
'풍경들이 서로 겹쳐지기도 했겠지.'
'그렇지요.
안개 낀 나폴리의 루치아 성당 언덕을
정처 없이 걸었더니
이태원 언덕이더군요.'
'혼난 곳은 없었소?'
'패스포트와 현금은 한꺼번에
소매치기당한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딘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백 나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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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을 그리워 말게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가 지팡이에 눈 주기 전
다보탑과 석가탑을 한 번 더 만나보자고
마음 미리 띄워놓고 경주 백일장 심사 갔습니다.
행사장 부근에 불국사가 있었지요.
하난 주최 측이 신경주역에 내린 나를 차에 싣고
곧장 토함산 고개 넘어 감포 횟집으로 가는 바람에
행사 날은 기차 시간 남기고 할 일 빠듯해
못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못 보니 더 보고 싶었겠지요.
서울에 돌아온 늦저녁
오래전에 책장 맨 아래 칸에 끼워뒀던
불국사 소개 사진첩을 꺼냈습니다.
대웅전 뜰 양편에 알맞게 사이 두고 서 있는
서로 짜임새 아주 다르지만
각기 아찔하게 기품 있는 두 탑!
한 탑은 식어가는 마음 고쳐 달궈주고
한 탑은 그 마음에 초롱불 달아주곤 했지.
탑들의 원력이 해를 붙들고 있는지
대웅전 잎들이 환했습니다.
두 탑이 이중창하듯 말했지요.
우릴 다시 보기 위해 불국사에 올 필요는 없네.
벌써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 한참씩 나눈 데다
언젠가 쌍탑돌이도 했지 않은가.
곤한 여행 끝에 사진까지 꺼내 들다니!
(목소리 조금 낮추며) 그리움을 그리워 말게.
나는 목에 힘을 주어
그래도 보고 싶은데, 했지요.
그들의 응답: 마음만으로 족하이.
대웅전 앞뜰 불빛 낮추고 가네.
=====4>
+ 혼불
모시 촉감으로 흐르던 발코니의 귀뚜리 소리
언제 그쳤지?
노랑 빨강 단풍잎 하나씩
바위 틈새로 래프팅 시키던 티비.
화면 비우고 사라졌다.
빛바랜 노박덩굴 열매를 보석처럼 달고 30년 이상 버텨온
목 길쑴한 음각 연꽃무늬 황동 화병도 갔다.
인도 콜카타, 저녁 물속 같은 골목에서 건져 온 건데.
둥치까지 초록색 나무 위에 뜬 쪼그맣고 빨간 해를 향해
해보다 더 큰 새들이 한 줄로 날아가는
장욱진 그림 복사품도
다음 세상 황혼까지 가득 채워
뭐 더 들일 자리 아예 없앤
마크 로스코의 마지막 그림 복사품도
다 자리 떴다.
그래, 알고 있어.
바흐의 푸가와 가야금산조를 번갈아 울려주던 오디오도 갔지.
치밀하게 짠 듯한 그들의 탈주, 섭섭하지만,
나한테도 살던 데서 탈주하고 싶었든 적
어디 한두 번인가.
그대들, 그동안 남보다 열 더 받고 산 자와
같이 살아준 거 정말 고맙네.
이제부턴 내가 없는 곳에 가서
홀가분하게들 살게.
새벽잠 곤히 든 아내 일부러 깨우지 말자.
갓 들인 고무나무가
엽록소 빠지는 이파리 계속 떨어뜨려
엊그제 아내와 함께
별 받아보라고 발코니로 옮겨줬지.
그새 한숨 돌렸나?
처졌던 잎들을 훌쩍 위로 쳐들고 있다.
가만, 구닥다리 내 강연 광고가 벽에 비뚜로 걸려 있군.
의자 어디있지? 뵈지 않네. 그럼 식탁 의자는?
이런! 바로 옆에 의자 두고 의자 찾고 있구나.
삶의 굴레 벗어나고도 제때 자리 못 뜨고
어정대다 들키는 이 민망함!
이러다. 이 세상 제대로 뜨지 못하고
거실 장식장 뒷등 같은 데 안 보게 올라붙어
혼자 타다 꺼지는 조그만 혼볼 되진 않을까?
쉰네 해 같이 살아준 아내의 혼잣말 새삼 귀담아듣고
왜 여태 그걸 모르고 살았지, 하게 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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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불 2
잘 안 보이게 장식장 뒷등에 올라붙어
생각을 태우다 간다.
당연한 저것으로 받아들였던 정말 고마웠던 일들
듣기 좋게 말하고 나 편케 챙긴 일들이
남 좋게 해준 일들 앞에 줄지어 서 있다.
이들의 조그만 창 하나하나에서
누군가 빼꼼빼꼼 내다보고 있다.
나다.
아리고 저리다.
생각을 태우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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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바다
사람은 커녕 소나무 하나 달랑 서 있는 섬도 없이
지나가는 배도 없이
물새들만 날던 바다가 꿈에 거푸 나타나
마음먹고 그곳 다시 찾은 적 있었지.
텅 빈 마을 다 된 곳
살구꽃이 혼자 귓것처럼 핀 집 앞에 차를 세우며
그냥 돌아갈까 생각도 했어.
허리까지 풀 차올라 길 잘못 든 느낌 드는 자드락길을
걸어
언덕을 넘자
파도 잔잔하고 환하 한 바다,
하얀 새들이 날고 있었어.
그중 한 마리는 어중간 잿빛,
외따로 날았지.
그가 날쌔게 물을 박찼지. 이번에도 허탕.
이것 보게, 그가 가까이 가자
뵈진 않지만 자기들이 친 금 안에 들지 말라는 뜻
흰 새들이 슬슬 피하는 게 아닌가.
그 새는 다시 금 밖으로 나왔지.
몇 해 만인가? 어젯밤 꿈에
그 바다 다시 떴어.
새 하나 날지 않고 물결도 자는 바다.
검은 펄 한가운데 박힌 흰 스티로폼 상자 위에
잿빛 새 하나 외발로 폼 잡고 있었지.
상자 앞에서
잡게발 높이 치켜든 조그만 농게들이
마음 놓고 기어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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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명
극락전에 맴돌던 호랑나비가
꿈속까지 날아와 춤을 췄지만
극락을 꿈꾼 적은 없었다.
삼인칭들끼리 모여 사는 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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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락눈
몸이 전 같지 않아 술 확 줄이고
오랜만에 하룻밤 보낸 민박집 아침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눈을 공중에 날리기도 하고
툇마루 앞으로 모이게도 한다.
참새 몇이 마당에 내려와
싸락눈 알갱인가 흙인가 쪼다 가고
바람이 방향을 다시 바꿨는지
툇마루에 걸터앉은 나한테로 눈발이 날려 온다.
싸락눈 알갱이들이 오른편 손등에 앉아 올라앉자
탱글탱글 감각들이 간지럽게 태어난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천천히 두 번 세고
휴대폰 꺼내려고 훅 분다.
폰 꺼내 들자 받을 사람이 깜빡,
싸락눈이 사람을 가지고 노네.
건성으로 폰 든 손등이 허전해
날아오는 싸락눈을 다시 받는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그만!
전화받을 사람이 떠오른다.
그의 십팔번 노랫가락도 뜬다
그동안 혼자 즐기는 일 죄 날린 줄 알았더니
휴대폰 든 손이 들썩들썩.
이 지구 한 귀퉁이 조그만 툇마루에
누군가 용케 걸터앉아 조놀고 있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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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계
오래전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때
4년 동안 산 경희궁터 옛 서울고 관사,
대형 방공호 가는 길에 해시계가 있었다.
반듯한 대리석 판에 박은 청동 구조물 그람자가
밥 먹을 시간 아직 남았어. 일러주곤 했지.
대리석에 도랑처럼 번지는 녹 얼룩 보며
시간을 붙들고 놀기도 했어.
더 늙으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데
해그림자 보며 밥때 기다리던 아이 되진 않을까?
방금 새에게 찍혔지는지
해시계 위로 빙빙돌며 내려오는 매미 날개 하나,
그 날개에 새겨진
한 날아다닌 삶의 시작과 끝을 한눈에 보여주는
줄무늬 들여다보다
조심스레 해시계에 올려놓고
혹 불어 다시 날리는 아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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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울타리
삼 년 전엔가 새로 올린 아파트 곁을
무심히 지나가다가
아 향내!
금속 줄 성글게 친 울타리 안팎으로 장미들이
장맛물 불어나듯 피어 있었다.
오래된 게 가구부터 마음 펀케 하지만
삼십 년 넘게 정든 내 아파트 콘크리트 담장보다는
새 아파트 꽃 울타리가 더 마음에 든다.
시멘트 담 기어올라 피었다 곧 사그라드는 나팔꽃이 아닌
날이 갈수록 흥취 돋우는 장미들의 축제!
그걸 보러 일부러 돌아가기도 했어.
그래, 축제에는 끝이 있지.
얼마 후 지나다 보니
꽃 다 지고 잎들만 남았어.
별 볼 일 없어졌군, 하며 그냥 지나치려다
잎 사이를 슬쩍 들여다봤지.
울타리 속으로 얼핏 뵈는 분홍 꽃, 배롱나무꽃?
저건 뭐지?
빨갛고 파란 꽃신 한 짝은?
푸들 한마리 나타나 꽃신 냄새 맡아보고
별것 아니라고 나를 보며 꼬리 흔들며 가네.
꽃 울타리엔 속이 있었어,
속이 있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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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잃은 새
우유 같은 안개가 창밖에 가득 낀 날
늦세수하고 방에 들어오니
머리와 목이 까만 새 곤줄박인가?
창턱에 앉아 있었다.
유리 한 장 사인데 바싹 다가가도
그의 포르필 꿈쩍 않네.
안갯속에 길 잃고 헤매다
뇌에도 안개가 꼈나?
하긴 길 잃고 정신없이 날아다녔으며
모처럼 앉게 된 곳에서 꿈쩍하고 싶지 않겠지.
근데 하필 왜 내 집 창턱?
오래된 아파트,
집집이 창틀에 꽉 창 새로 해 달아
달리 앉을 곳 찾기 힘들었겠지.
나도 76년 전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서울,
오자마자 길 잃고 안갯속처럼 헤맸어.
오전부터 처음 보는 길을 걸었는데
저녁에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
당신 흔지 않던 탑골공원 벤치.
얼마나 반갑고 반가웠던가!
거기서 숨 바로잡고 이모님 댁 찾았어.
그 후 길 잃고 헤마다 만난
벤치, 정거장, 카페, 인간의 품,
나의 삶 처처에 박혀 있는 반가움들이여,
그대들 하나하나가
길 잃고 정신없이 헤맬 때 사는 끈 새로 잡게 한
따끈따끈 손길들!
새가 안개 쪽으로 몸을 돌린다.
생각을 잠그며 거실로 간다.
아기 새 빼고 길 잃어보지 않은 새 어딨어?
잘 감기지 않아 찻물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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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이 빈 나무
잘 아는 고교 동창 둘이 세상 뜬 다음 날
러닝머신 조금 더 조금 더 타다 척추협착증 도저
바깥출입을 며칠 못 했다.
거실 의자에 앉아
지난 신문이나 뒤적이다 깨닫게 된 게
이제 이 몸 나이테 꽉 차 터지기 시작한 나무,
살펴보니 잘 안 뵈는 속도 한참 비었다.
올빼미 한 쌍쯤 들어와
몸 절반 크기 얼굴 끄덕끄덕
말없이 주인들처럼 살았으면.
하지만 서달산 오르는 길의 집들
모두 빌라로 바뀌어
알 만한 새들 다 도망갔으니
어디서 올빼미를 모셔 온다?
언제부턴가 창밖에 장대비 펴 붓고 있다.
속이 빈 몸에 장대비, 아 생각난다,
이십 년 전인가
차 몰고 지리산을 한 바퀴 돌다
갑작스레 닥친 푹우에 와이퍼 있으나 마나
차 세우고 들어간 가게 옆에 서 있던
속이 빈 고목나무, 비 그쳐 나오자 그 속에서
새 한 떼가 나 몰라라 튀어나왔어.
가만, 장대비 마주하는 내 속도 그냥은 아니군.
세찬 빗줄기에 몸 둘 곳 몰라하던
조그만 세 몇이 들어와
몸들을 녹이며 토닥토닥 거리지 않나?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마음 다 잡는 놈도 있고
벽을 콕콕 쪼아대는녀석도 있다.
잡새들! 다시 보니
아, 세월에 밀려 내팽개쳐진 나의 잡생각들!
신문 읽다가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던 놈까지.
잡생각이면 어때?
새든 생각이든 모질게 펴붓는 비바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가려주는 일,
살아 있는 자면 해줄 만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혹시
내 속보다 나무 속이 더 넓고 편치는 않을까?
생각을 달랜다.
인간의 마음을 접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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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 큰 노을
가을날 태안에 일보러 갔다가
큰 노을을 만났다.
섬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점점 굵어지던 붉은 수평선
하늘과 바다를 조금씩 덮어가다가
확 풀린다.
바다를 날던 새들이 하늘 속을 날고
바다 한가운데
길고 넓은 새 물길 하나 태어나
하늘보다도 더 밝게 출렁거린다.
달아날세라 꽉 붙잡고 놓지 않던 생각들
멀리 떠나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생각들이
다 같이 옷 붉게 해 입고
밝은 물길에 뛰어들어 어깨춤 춘다.
마음이 빈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이때다!
이 노을 한 장 떠가지고 쾌히 떠날 채비 하니
이런! 한두 장으로 떠나기엔
너무 환하고 장쾌한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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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에 깨어
지난밤 간신히 잡은 게 '모범택시'였지 아마,
한밤에 깨어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40년 전 LA로 처음 문학강연 갔을 때
뒤풀이 자리에 모인 이십여 분에게
하고 싶은 말씀들 하시라 하자
부산 마산 광주 목포 대전 서울
떠나온 고장과 얽힌 사연 들 각인각색이었으나
타고 온 비행기 이름만은 하나같이
노스웨스트, 아니면 팬 아메리카,
지금은 없어졌지만
나도 그 둘을 번갈아 타고 미국 오갔지.
어떤 이는 항공사 이름을 먼저 대기도 했어.
'저는 팬 아메리캅니다.'
50여 년 전
미국 아이오대 창작 프로그램에 가서 8개월 묵은
기숙사 겸 오피스텔 이름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처음 타고 미국에 온 배
'메이 플라워.'
누군가 나에게 무얼 타고 서울에 왔나 물으면
뭐라 답하지?
협궤철도 황해남부선은 생각난다.
앉아 있기도 힘들었던 만원 열차,
그러나 세상눈 채 뜨기 전 초등학교 일년생 때 일이니
검은 천에 흰 해골 깃발 휘날리는
해적선 타고 왔다 하면 어떨까?
해적들이 웃겠지.
한밤에 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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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갈색 점 하나
이중창 속 바깥 유리에
흑갈색 점 하나 붙여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아 다시 보니
조그맣게 말라버린 날벌레.
쬐끄만 날개 반쯤 펼친 채 붙어 있다.
나갈 틈을 찾다 찾다
유리에 붙어 한 점 흑갈색으로 마를 때까지
그 날개를 얼마나 간절히 폈다 접었다 했을까?
세상 뜨기 전 날벌레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탓하진 않았을까?
쬐끄만 머릿속으로
엄청 큰 생각들이 들락날락 했겠지.
생각 떨치려고 몸을 떨기도 했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 꽉 막힌 두 유리창 사이로
죽음이 환하게 통트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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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연인이다」
이즘 와서 지난날 생각에 한참씩 잠기곤 한다.
잘못한 일들 알고 당한 일들이
턱들을 세우고 앞에 나란히 서는 거다.
새로 얽히는 일도
제때 풀지 못하고 허둥대는데
지났다고 잊어버렸던 일들까지 불쑥불쑥 나서서
다시 봐달라니!
버리려던 A4 용지 자투리 잘라내고
학을 접다 헛접고
종이까지 말썽이네! 신경 곤두세웠지.
그냥 놔두면 될 일에 마음 쓰는 게 바로
모든 일에 내 남 탓하는 늙은이의
마른 외로움 아닌가?
티비를 켠다,
채널을 돌린다. 정지!
「나는 자연인이다」
'자연인'들이 올라가 사는 산수,
데자뷔인데도 놀랍고 신선하다.
나무 풀 물 그리고 바람 소리 속에 그들은
목숨을 끝장까지 몰고 갔던 병마의 기억이나
디디고 살던 땅이 통째로 꺼졌던 실패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던져두고 산다.
조그만 삽 또는 낫을 들고
실제로 해 뜨고 물 흐르는
산수화 속을 오르내린다.
그들은 나에게 말한다.
외롭다는 생각 같은 거 나올 틈 없이
이렇게 산 오르내리며 사는 게 그저 좋을 뿐,
이 세상 끝장까지 가봤다는 게
자랑이 아닙니다.
자랑은 외로운 자들의 몫이지요.
아 나보다 한 수 위!
그들이 좋은 약초 모아 잘 달인 차를 마실 때
허브차로 목을 적시며 마음 가다듬는다.
자연이여,
표고 180도 안 되는 동네 뒷산을 표 나게 오르내린 나를
행여 그대의 사람 속에 껴주진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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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풀이 자리에서
지방 강연 끝낸 후 뒤풀이 자리에서 그 지역 신문기자가
거반 빈 잔에 ㅐ맥주 새로 부어주며 물었다.
혹시 돌아가실 ㄷㄷ때 하실 말씀
준비된 게 있습니까?
강연 끝내고 돌아가며
남기고 싶은 말 있느냐 묻는다 생각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청중의 반응도 참 좋았고.'
대답하자 아차! 기ㅏ자의 얼굴에 자금시
그런 질문 아니라는 표정이 그어졌다.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다시 답했다.
'살아 있는 게 아직 유혹일 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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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군 내면 펜션의 하룻밤
악몽이랄까, 꿈자리 계속 뒤숭숭해
오랜만에 찾아 들어온 홍천군 내면의 한 펜션.
티비 끄고 휴대폰 놔두고 밖에 나오니
하늘의 별들이 새삼 가깝다.
풀벌레 소리도 바로 지척.
그동안 이들 생각 별로 않고 지내왔는데
이처럼 가까이서 벅찬 공간 만들고 있었구나.
밤하늘에 구멍 송송 뚫고 빛나는
도시의 별들보다 더 분명하고 정다운 별들,
쉼표 같은 거 다 잊고
목숨 다해 노래하는 풀벌레들,
별똥별 하나 금을 끝까지 그으며 내려온다.
오랜만에 한바탕 눈 부시고 귀 부셨으니
계속 이어지는 정처없이 헤마다 뭉개지는 꿈
오늘 밤에 엔 그 어떤 꿈이 오더라도
별빛 듬뿍 받고 풀벌레 소리 속을 담담히 걸어
커피와 시가 있는 아침에 가닿을 거다.
_______* 59
.봄비를 맞다
=====1>
단 사과
바가텔 5
이 한생
겨울나기
------------
히아신스
봄비를 맞다
사월 어느 날
오색빛으로
-----------------
몰운대 그 나무
야트막한 담장
흩날리는 눈발
불타는 은행나무
---------------------
시인 삶의 돌쩌귀
마음 기차게 당긴 곳
터키 에베소에서 만난 젊은이
===2>
눈물
지문
삼세번
외롭다?
-------------
건성건성
어떤 9월
옥상 텃밭
해파랑길
-----------------
나갈까 말까?
서달산 문답
참새의 죽음
바닥을 향하여
---------------------
코로나 파편들
여드레 만에 집을 나서니=
2022년 2월 24일(목)
===3>
까치
조각달
호야꽃
그날 저녁
------------
서울 소식
슬픈 여우
담쟁이넝쿨
비바람 친 후
-----------------
어떤 동 짓날
생각을 멈추다
속되게 즐기기
병원을 노래하다
------------------------
백 나라 다녀온 후배
그리움을 그리워 말게
===4>
혼불
혼불 2
그 바다
묘비명
-------------
싸락눈
해시계
꽃 울타리
길 잃은 새
----------------
속이 빈 나무
태안 큰 노을
한밤에 깨어
흑갈색 점 하나
-------------------
「나는 자연인이다」
뒤풀이 자리에서
홍천군 내면 펜션의 하룻밤
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