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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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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 6 + 콩 풀벌레나 차라리 씀바귀라도 될 일이다 일 년 가야 기침 한번 없는 무심한 밭두렁에 몸을 얽히어 새끼들만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서 손을 뻗쳐 저 하늘의 꿈을 감다가 접근해 오는 가을만 칭칭 감았다 이 몽매한 죄 순결의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마른 몸으로 귀가하여 도리깨질을 맞는다 도리깨도 그냥은 때릴 수 없어 허공 한 번 돌다 와 후려 때린다 마당에는 야무진  가을 아이들이 뒹군다 흙을 다스리는 여자가 딩군다 ------- + 소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슬픔 끝내 입 다물고 떠나리 마지막 햇살에 떨고 있는 운명보다 더 무서운 이 살 이끌고 단 한 번의 자유를 위해 머리에 심은 뿔, 고목처럼 그대로 주저앉히고 보이지 않는 피의 거미줄에 걸린 흑인 오르폐처럼 떠나리 어쩔 수 없..
문정희 시 5 + 가치 음식값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었다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는 신용카드보다 크기가 더 작았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오는 동안 손때가 묻어 외관은 갈수록 볼품을 잃어갔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때가 묻고 구겨져도 그 가치는 휘발되지 않았다 ----------+ 고백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일회용 컵 같아 자신 없어서 눈빛 마주 보며 고백 못하고 파도만이 알 수 있게 바닷가 난간에 목까지 자오르는 사랑을 적었으리라 "내 꺼니까 손대지 마" ---------- + 노화 노화는 삶의 나뭇가징서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쓸쓸한 거리로 지는 일이다 노화가 정지할 것 같아 낙엽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다 --------- + 동면 자연의 대지가 프로젝트를 완수하여 긴 휴식에 들어가면 나도  그대의 마음으로..
문정희 시 4 + 길 손을 잡자, 그대여 처음엔 시계처럼 두근거리며 다가서던 너 그렌데 어쩌자고 서른도 막바지에 여기  날 세워두고 새끼들까지 주루루 매달아 놓고 이렇게 뒷발길로 차버리는 거냐? ------- + 별 내가 별을 부르면 별은 아름답고 슬픈 응답을 보내온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선 채로 지상의 별이 된다 발 하나가 되고 별 둘이 되고 큰 별 하나로 함께 부서진다 -------+ 새 새는 죽어서 무엇이 되는가 그의 날개는 자유가 되고 깃털은 부서져서 햇살이 되는가 하늘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적막이 되고  날카로운 부리는 아름다운 칼이 되는가 그의 울음은 무엇이 되는가 아침마다 나의 잠을 깨우던 그 슬픈 울음 새는 죽어 바람이 되고 그 울음은 남아 우리들의 오랜 시간이 되는가 --------+ 섬 홀로 마시는 ..
마종기 시 6 + 무용 5 몸을 움직일 때마다 깊고 진하게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고통받고 있는 것 알면서도 평화는 돌아와주지 않던 무용수의 절망을 본 적이 있어. 몸부림칠수록 작아지고 어두움이 두껍게 칠해지던 무용수의 꿈을 본 적이 있어. 두 팔을 높이 울렸다. 두 손을 폈다. 머리를 치켜들었다. 온몸을 흔들었다. 어둡다, 어둡다. 흔들다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무대의 전면이 흔들리고 소름끼치게 무서운 무용수의 자유를 본 적이 있어. 두 눈에서는 불빛이 뻗던 자유의 뜨거운 얼굴을 본 적이 있어. -------------+ 비밀 1 나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밀은 죽을 수가 없으니까 오래 숨막히게 숨겨온 비밀은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몸을 빠져나와 꽃에게 갈 것이다. 꽃잎이 아니고 ..
마종기 시 5 + 돌 누이야, 혼자서 오래 앉아 빈 마음, 빈 생각의 즐거움을 아는가. 해는 종일토록 원두막 위에 누워 갓 자른 풀잎의 신랑이 되고 한여름 논가에 소나기 치듯 발랄히 내보이는 돌의 손깃, 돌의 몸짓이여. 누이야, 이 밤에는 혼자 있는 즐거움을 아는가. 밖으로는 비와 바람을 모는 어두움, 천둥의 고함에 젖은 여름은 찢어지고 땅밑으로  땅 밑으로 숨어 흘러서 돌은 숨이 차다. 그 아침자리에 새로 씻긴 것 의젓한 돌이여, 돌의 몸짓이여. 지나간 냇물가에 고이 낳은 풀이. 누이야, 하루 사는 즐거움을 아는가. ------------ + 대 답     ㅡ데일 마이어 씨에게 기관총 사수여 파란 눈 스무 살 한국 동란에 와 기관총 사수여, 은인이여, 그러나 올드 랭 자인은 우리 애국가가 아냐. 그 민요가 내셔널 엔..
마종기 시 4 + 개꿈    ㅡ 친구 김지수의 부음을 들은 뒤 가까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서둘어 문상 가는 길에 길을 잃었다. 해메 다니다가 날이 어느새 어둡고 캄캄 칠흑 같은 밤에 길도 안 보이는데 풀 죽어 내 쪽으로 오는 다른 친구를 만났다. 좋은 글을 쓰는 말수 적은 이 친구는 문상 대신 배를 타고 이민을 간단다. 그러고 보니 어깨에 가방을 지고 있다. 한밤에 더구나 비까지 내리는 이 시간에 어디로 왜 이민을 가느냐고 막아섰더니 친구들 하나 둘 죽고 돌아가며 아파서 가슴이 시러 살기가 힘들어서 간단다. 목이 답답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개꿈 속에서 개 모습으로 한숨을 쉰다. 이민 가는 친구가 사라진 어두운 쪽에서 눈에 익은 대머리 한 사람이 다가온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리운 내 아버지다. 반가운 ..
마종기 시 3 + 신설동 밤길 약속한 술집ㄷ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 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지. 스며들다가 내가 젖어버린 먼 길. 젖어버린 나이여, 오랜 기다림이여,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날들은 모여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리니 이 밤길이 내 끝이라도 후회는 없다. 거칠고 메마른 발바닥의 상처는 인파에 밀려난 자책의 껍질들, 병든 나그네의 발에 의지해 걸어도 개울물 소리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은 추위마저 안심하고 인사하는 구수한 밤의 눈동자가 빛난다. 편안한 말과 얼굴이 섞여 하나가 되는 저 불빛이 우리들의 술집..
마종기 시 2 + 산행 2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을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 길. -------------+ 상처 1 1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