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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마 ~

마종기 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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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혼자서 오래 앉아
빈 마음, 빈 생각의 즐거움을 아는가.

해는 종일토록 원두막 위에 누워
갓 자른 풀잎의 신랑이 되고

한여름 논가에 소나기 치듯
발랄히 내보이는
돌의 손깃,
돌의 몸짓이여.

누이야, 이 밤에는
혼자 있는 즐거움을 아는가.

밖으로는 비와 바람을 모는 어두움,
천둥의 고함에
젖은 여름은 찢어지고
땅밑으로  땅 밑으로 숨어 흘러서
돌은 숨이 차다.

그 아침자리에 새로 씻긴 것
의젓한 돌이여, 돌의 몸짓이여.

지나간 냇물가에
고이 낳은 풀이.
누이야, 하루 사는 즐거움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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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답  
  ㅡ데일 마이어 씨에게

기관총 사수여
파란 눈 스무 살 한국 동란에 와
기관총 사수여, 은인이여,
그러나 올드 랭 자인은 우리 애국가가 아냐.
그 민요가 내셔널 엔심은 아냐.
戰火의 서러움 10년 이상을
고아들을 키워 시집 장가 보내준
기관총 사수여, 친구여,
양갈보 아직도 있고 거지도 있고
똥지게가 수도의 복판을 아직 누빌지 몰라도
당신의 미소 있는 질문만이 전부는 아냐.
선거 부정, 돈 부정도 제기랄,
아직 있는 모양이지만
유태놈같이 유태놈같이라도 달리자.
싸이나이 시막에라도 나가, 삼천 리만 달리자.
외국에 살아도 치사해지지 말자고
내 대답이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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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ㅡ동생 훈에게

외국에 가서야
어엿한 독방을 가질 것이다.
소개된 사진같이 독방에는
한 개의 침대와 한 개의 책상.
乾坤離坎은 잘모르지만
내 나라의 국기를 하나 붙이고
독방의 문을 잠그고서야 비로소
혼자 지껄이는 자유를 누릴 것이다.

이사를 가도 20년 같은 방,
대학 때 술김으로 정치를 말하면
나는 사람 뼈를 챙겨들고 친구에게 갔었지.
흔한 시험 중에는 얼씬 못 하던
동생은 이제 조간의 기자,
나는 군의관 삼 년,
이제  사랑스런 방해물을 떠날 것이다.

돌아다보면 모두 모이지.
널려 있는 전공의 비구상,
몰래 배운 담배 연기,
빈 밤에 듣던 라디오 음악

앙상한 주먹으로 친 방구들
옆머리로 들이받던 벽의 후회,
도배를 하면 간단히 달라질 것이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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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1
   ㅡPouline Koner 씨에게

나도 당신의 무용 같은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의 동작이
깊이 가슴에 담아
그 무게로 고개를 숙여버리던
그때는 봄이던가, 가을이던가.
당신이 존경하는 화가의
그 무리한 표정으로
나도 층층대를 올라가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당신의 무용.
소리 없는 음악,
그래도 충만한 당신의 무용만큼
안부 없는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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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2

1
당신은 시종
맨발로 무용하지만
우이 어머니,
겨울눈도 뿌리는데
구제품 구두를 사 신고
출퇴근 버스에 밟히면서
꿈같이 꿈같이 무용만 아는 어머니.

2
不隨意 근육이 수축한다.
위궤양을 앓던 대학 시절.
우리의 막간은 길고
모든 계획은 뿌리뽑았다.
당신이 올린 두 팔에 모이는
수만 메가 볼트릐  靜止然.

3
무대를 올리기 전에
상면의 시간가 장소를 확정할 것.
조염의 시가지를 벗어나는,
이렇게도 좁았던
생활의 반경을 벗어나는
천사들의 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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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내 어린 바다만은 안다.
출렁이는 선율과
그 속에서 가벼운 사랑을 실습하는
빛나던 어린 눈동자를 안다.

항상 말없이 걷던 해안가여
좁은 길목을 빠져나온 하늘이여,
너무 조용하면 
힘껏 돌을 던져
바다의 말을 귀에 담자.

또 한 번, 또 한 번 튄다.
바다의 말을 귀에 담자.

2
어느 첫새벽에
아직 덜 깨인 눈으로 서서
어두움과 그 정작에 떨던 내 몸,

늙은 고깃배의 어지러움으로
바다는 새벽마다 점잖아지.

나도 어느 밤을 자고 나면
이렇게 점잖게 늙어 있을까.

이제는 멀리
떠나 있는 바다,
나보다는 휠씬 더
자란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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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경   

안정한 부부에게
불안정한 눈 내린다.

내 전공의 책장에는
다시 정리되는 함수론.

떠나  살면서 
더욱 깊이 느낀다.

군대에서 보낸 난세의 처신을
시집간 손 밑의 누이는
아직 손짓하지만,

참으로 인생을 절약하는 자의
말없는 관계 속에
밤새 눈 내리는구나.

기억에도 희미한 그 해의 暖冬(난동).
떠나는 어깨에 쌓이는 눈,
의미 없이 들리던 후기의 사중주
오, 밤새 눈 내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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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4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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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5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의 마음이 아니고
육신이었지.

약지 끝에 묻은 하늘,
육신에 젖어 있는
백목련 그늘.

밤에 항상 헤어지고
낮에 책임을 배워

우리가 젊었던 날에는
높은 길이 보였다.

이제 쉽게 단념한 이에게
오는 평화로움.

경사(傾斜)의 목,
측면으로 보이는 손목,
오는 평화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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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가 6

내가 그를 배웅해주고
도시로 들어섰을 때
도시는 비어 있었다.

이런 일은 없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바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들 돌아간 모양이다.
사람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사랑에서
모두들 떠나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씩
혼 자 차 마시는 법을 배우고
혼자 웃는 연습도 해야지,

내가 그를 배웅해주고
도시로 들어섰을 때
꽃은 시들어 있었다,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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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8

이 이상 안 보여서야 어찌나.
분간이 서지 않는 우리의 관계,

처음에 내가 사랑한 건
눈이다, 가슴이다.

멀리 서서 그림 보듯이
눈을 가늘게 뜨면

비구상의 공간, 그 배경으로
가을비 음산하게 스며들고
남아 있는 밤.

아직 초조히 남은 사랑을 위해
너는 진한 물감을 던져라.

물감이 화면을 휘젖는다.
우리의 젖은 날들이 살아난다.
다시 기다려지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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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9

1
전송하면서
살고 있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 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
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人肉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 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
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우리의 속심은
깊이 물 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만남을
물어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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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10

1
이렇게 어설픈 도시에서 하숙을 하는 밤에는 윌트 디즈니의 만
화 영화를 보자. 하숙이 허술해서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난로를 때
는 이 국장이 격에 어울리지.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나도 메뚜기가
되어보면, 밖에는 눈이 그칠 새 없이 내리고 혼자 보고 혼자 오는
발이 시리다.

2
도서관을 돌다가 무심결에 호흡기 내과 책 한권을 뽑았더니, 겉
장에는 알케이 알렉산드리아의 시인이 있고 칠필로 쓴 ㅡ 보스턴,
메사추세ㅔ츠, 1879년 8월 2일은 날씨가 흐렸다. 흐
려진 철필 글씨, 무덤 속에 있는 내과 의사 알렉산드리아 氏의 손자
국을 유심히 본다. 1966년을 내 책에 기입하고 나도 훌륭한 내과
의사가 될 것이다.

3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쓸쓸한 친
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 엽서로는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태 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그만 키운 뒤, 조용히 가
라앉은 목소리로 헤서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
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6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6개월의 사
랑, 6개월의 세상, 6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6개월의 상
심을, 6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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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11

1
아무도 없는 곳에서
슬그머니 웃는 이유를
누가 알까.

중위 월급
월부로 산
자수정 반지.

청춘은 그냥 일주일,
기상은 오전 여섯시 십분.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아직
조용해지는 이류를
누가 알까.

2
그렇게 어려웠던 일
이제는 도로 쉬워지고
친구놈 아들을 어르다
토요일 오후를 보내면
일요일에는 비,
술을 마셔도 비가  오고

주머니에는 남은 여독이,
주소를 쓰다 지운
빈 엽서가.

그렇게 어려웠던 일
이제는 밤낮으로
도로 쉬워지고.

3
불쾌지수 높을 때는
중학교 반장의
지리부도를 보자.

어릴 적의 평온이여,
구라파의 지리부도를 보자.

국경선을 빈번히 넘어다니는
방랑자의 낮잠,
여러 음성의 잎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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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13

1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약간의 미모와
약간의 애교와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봄날의 이불.
그리고는 흩어지는 꽃잎으로
그 이름을 떠날 것이다.

2
한때는 구기도 공부도 좋아하고, 한때는 포카도 술도 연애도, 한
때에는 음악도 회화도 시도 소설도, 그리고 결혼도 의사도 죽음도 좋
아했지만 결국 한 50년 만이라도 몰입될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도 아는 놈만 안다. 번연히 오래 못 살 환자의 비밀, 멋모
르는 대면의 술잔, 그리고 다음번의 목차를, 적은 소외감을, 세상에
도 모르는 놈만 모른다. 잠자리에서도 소홀한 한 목숨의 경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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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14

이제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때로 강물을 막아서면
소리치며 미련으로 흐르던 물결,
향방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사랑했다.
기억하라 강물의 대화,
강물의 시야, 그 은은한 힘을,

이제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강은 마침내 마르고
강물은 스스로 목숨을 놓고
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강은 자취를 감추고
강길을 따라 경사지가 남으면
주위의 몇 사람이 길을 가면서
잠깐 동안 목마름을 느낄 것이다.
상상했던 사랑을, 그 싱싱한 인연을.

그래도 언젠가는 모두 잊을 것이다.
이곳에 강이 있었던가
이곳에 강이 있었던가
그러나 잠깐 다시 경사지를 바라보라.
아직 사랑할 수 있는 강의 이름을
빛나던 강물 소리를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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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銀河)

수없는 빛들이 하나의 물결처럼 흔들려 의심하리만큼 희
고 맑고 소중한 기적을 일으키고 아직도 황홀함을 모르는
게 그 표정을 다스린다.

그들은 얼마나 먼 거리에서 서서 서로를 부르고 있는 것
일까. 그 어느 정점에서야 기쁨이나 슬픔이나 막막함의 언
어를 소리쳐볼 것인가. 수백 세상을 다 통하여도 아직 모자
라는 은하의 시야, 더욱 섬세한 시야.

정지된 시간 속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한꺼번에 씻어
버린, 가장 희고 맑고 또 조용한 기적을 일으키는, 미더운
대지는 그 밤하늘에  끝없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나씩 흩
어졌다. 그러나 하나 웃지 않는 정결한 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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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ㅡ우주인  닐 암스롱에게

음지의 도로에 서서
양지의 당신을 환영했다.
와파카나타, 오하이오, 인구 7천,
당신 금의환향의 날에 나도 있었다.
음지의 작은 나라 노란둥이도
인파 속에, 환호 속에, 색종이 날림 속에
눈을 크게 뜨고 당신을 보았다.
양지의 미소를, 오픈 카 퍼레이드를
토요일 오후에 도착해서
나도 당신의 손을 쥐어보았다.
수백 년 당쟁과 석 자 수염의 얼굴로
허리가 꾸부러진 코리언이
악수를 나누고 우주를 생각했다.
대원군을 생각했다.
남원 효기리를 생각했다.
생각했다.
본과 3학년
남원 효기리, 또는 이곳 저곳에서 만난
홍수에 흙물 마시고 떠내려간 아이야
횟배에 장이 막혀 죽은 아이야
우리의 첫인사는 환호성이 없었지.
네 손을 쥐고 할말이 없던
나는 결국 미국으로 뺑소니쳤구나.
다음번에는 뺑소니라도 쳐라.
바보야,
삼천리 강산에도
말라비틀어진 어린 바보야.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사를 미차면
나는 와파카나타 한길에서
갈 곳이 막막하게 먼 것을 느낀다.
바보야, 천하에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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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서향의 한 병실에 불이 꺼지고
어두운 겨울 그림자
낮은 산을 넘어서면

부검실은 차운 벽돌,
뼈를 톱질하는 소리로 울려도
이것은 휘날래가 아니다.

나는 처음 해부학에서
자연스런 생명을 배웠다.
거기에 추위가 왔다.

막막한 청춘의 잠자리에서
나는 자주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은 시간의 화려한 현기증.

들리니, 포기한 키 큰 사내의
쓸쓸한 임종,
들리니, 이것은 휘날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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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축

착한 신자는 모든 길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음악을 믿지 않았어야지
그것은 멀리서 남의 것이 되어
눈이 맞으면 눈인사나 하고
그 기회도 없으면 잊어버릴 일이지.

결혼 전에 산 전축은
아직도 마흔의 활기에 차 있고
햔악의 실내악을 모으다가
휘셔 디스카우의 노래를 듣다가
고국에 있을 때는 고개 돌리던
술을 마시면 이미자도 듣지만

내 전축은 협심증이 있다.
한 악장만으로도 가끔
만년의 느린 꿈 꾸듯
가슴이 아파서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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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목판을 사서 페인트 칠을 하고 벽돌 몇 장씩을 포개여 책장을 꾸
몄다. 윗장에는 시집, 중간장에는 전공, 맨 아랫장에는 저널이나 화
집을 꽃았다. 책을 뽑을 때마다 책장은 아직 나처럼 흔들거린다. 그
러나 책장은 모든 사람의 과거처럼 온 집안을 채우고 빛낸다.

어느 날 혼자 놀던 아이가 책장을 밀어 쓰러뜨렸다. 책장은 희망
없이 온 방에 흩어지고 전쟁의 뒤끝같이 무질서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전한 자세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
는 안전하지 않다.

나도 벽돌을 쌓고 책을 꽃아 다시 책장을 만들었다. 아이는 이후
에도 몇 번이고 쓰러뜨리겠지. 나는 그때마다 열 번이고, 정성껏  또
쌓을 것이다. 마침내 아이가 흔들리는 아빠를 알 때까지, 흔들리는
세상을 알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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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
  ㅡ동규에게

1
샤워를 끝내고 플로리다산 오렌지 주스에 스크램블드 에그, 초
록빛의 신년도 쉐보레로 출근하고, 환자를 보고, 정액 주사를 주고,
세마나에 나가 주절대고, 시집 안 간 간호사가가 눈짓으로 조르면 피
임약 처방이나 써주고, 저녁에는 잭 베니의 만담을 듣고 골프 중계
를 보고, 그러나 아무리 주접을 떨어야 엽전은 엽전이다.

요즈음 아들놈은 미국 시민답게 악센트가 나보다 정확하다. 주
말이면 칵테일 만드는 재미로 파티를 열고, 파티에 가고, 아니면 42
가에 있는 나체 영화 구경을 가고,  혹은 에이리호 근처로 밤낚시를
가고, 경마잡이를 가고, 가고 가고 오고 오고, 그러나 아무리 주접
을 떨어야 사우스 코리언은 사우스 코리언이다.

내가 흥분파가 아닌 것은 너도 알지. 그래서 아예 의과를 택한
것도 너는 알지, 중동 사태가 블랙 파워가 서로 옳다구나 연기를 피
워도 내게는 천리 밖 남의 얘기다. 그러나 이 지방 신문 제50면쯤에
난 서울발 간첩 침투 소식은 나를 흥분시킨다. 흥분하다가 지지리
도 못난 이씨 조선을 원망한다. 원망하다가 세계 지도를 물끄러미 
새겨보고 체념한다. 체념하다가 내가 갑자기 강대한 청년이 되는
틀림없는 생시에 꿈을 꾼다.

2
딴 나라에 삼사 년, 살다 보니까
조용한 게 무척 좋다.
새벽 두시 반 술집을 나서면
친구도 나라도 아무것도 없다.
초저녁에 잠든 아기와 아내를
새벽녘에 돌아와 보면
문득 가여워진다.
하나 살아 있는 자의 가여움은
백 변을 당해도 허영인 것을을, 
요즈음은 모든 게 멀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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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3

찾아가 보았다. 한여름의 카리브해, 끈적한 해변의 육체들이 깔
끔한 우리 남해에 어찌 비견인들 하랴, 그만큼 거만한 마음으로 도
박장 불빛을 보고 스트립  쇼나 보고 돌아왔다.

저 이탈리아 독일의 거렁뱅이 이민, 그 손자금 되는 환자를 본
적이 있다. 내 외국 생활 첫해의 인턴 때였다. 코리아, 코리아가 어
디 있더라, 푸에르토리코 근처 카리브해 어디쯤이지, 그 거랭뱅이
손자쯤 되는 촌놈의 건방진 목소리는 왜 그렇겟 신경을 건드렀을 
까.

쓸개 빠진 놈같이, 백정도 창자도 다 빠진 허깨비같이, 그야말로
카리브해에서 건너온 한국인같이 술이나 마시며 돈이나 벌며 환자
나 보며 이렁저렁 외국서 살자면 얼마든지 산다.

내 나라에서도 그 갑충이들, 외제차나 얻어차고 거드럭거리고,
거부의 나라의 거부의 집보다 더 비싼 집을 짓고 사는 갑충이를 안
보고 속 편하게 한세상 살려면 얼마든지 산다.

얼마든지  산다. 그러나 돌아가신 내 선친의 마지막 下書ㅡ 조국
에서 가난하게 사느 것만도 애국하는 태도라 생각한다고 하신, 또
박이 박아 쓰신 그 아버지는 외고집인가, 지금도 윤기 있는 머리털
같이 가난한 아버지.

차라리 한국은 카브리해 한복판에서 북이나 두들기고 살거라.
이놈 장단, 저놈  칼춤에 등이 터진다. 큰 나라  속에 햇볕 못 보았
거든 차라리 한국은 카리브해 한복판에서 물장구나 쳐라.

ㅡ그러나 사흘 만에 거만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사주
신 옷을 입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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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문

바람아, 너는 잠으로 쉽게 단념하는구나.
얼마 전 밤에는 소리내어
창문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하더니
다음날엔 온 천지가 낙엽만 쌓이고
바람은 저 높은 하늘에서
초로의 손을 흔들었지.
네 목소리는 잔등의 한기.
잠자는 겨울 나무의 戰調한 꿈.

너는 참으로 쉽게 참는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쉬고
드디어 예고 없이 내리는 細雲.
네 피부는 저 깊은 겨울의 배면,
생시일 수가 없는 일을, 바람아
나는 때때로 과거처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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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금

합풍류 떠나
혼자추는 가야금.
산조가 운다.

누군들 안 기다릴까봐
비취빛 하늘에 두 손 씻고
열 손가락 밑에서 
몸을 떤다.

여보, 여보시오,
낮은 대문 잠가주오.

남향의 한낮에
무릎 밖으로 세상은 열려
고개를 놓았다.
햇살을 고르는 가야금.
산조가 운다,
늦은 오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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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망록 1
   인간계에서 천상에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그리고 휘렌체에서 의롭고 건전한 겨레한테로 온 나는
    ㅡ 단테의 <신곡> 중에서

나 방향을 잃고 친구는 부모를 한 해에 잃어, 실의가 비
구름 일듯 무연히 덮고 있을 때, 우리는 봄길을 헤치고 불
현듯 불혹의 연세에 불치의 병을 앓는 우리의 고등학교 선
생님을 찾았다. 죽음이 한 절반만큼 노후한 산장에 걸터앉
고, 우리의 선생님은 건곤(乾坤)을 누비시듯 책을 읽고 계
섰다. 잔잔한 죽음이 책장 사이로 물결치고 있었다.

인생은 결국 책입니까.
아니다.
인생은 사랑이다.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다.
아니다. 
우정이다. 아니다.

인생은 고독이다. 그 투쟁이다.
아니다.
피다. 허무다, 전쟁이다, 종교다,
아니다, 아니다.
그러면 인생은 오히려 평법,

아무것도 아니면
술이다, 노래다, 여자다.,
아니다.

인생은 열광이다.
열광에의 기다림.
열광에의 서성거림,
그리고 열광에의 미련.

오래 기다리다 이제 떠납니다. 젊은 날 우리의 진심은
너무나 조용하고 깊었습니다. 외국어보다는 더 눈이 빛나
청춘을 이야기해주시전 존경하는 고등학교 선생님은, 죽음
의 좁은 난간에서 우리를 배웅해주시며
웃으셨다. 열광은
어디 있는가.

눈보라치는 우리의 계절, 세상이 살아온 거리를 헤치면
서 나는 열광을 찾아보리라. 옆에서 친구는 손을 쥐며 대답
했다. 열광은 이미 우리 몸에서 자라고 있다. 열광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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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망록 3

오 내 피, 내 아기를 언 땅에 묻은 뒤, 흰 보자기로 뜰 아래 흙을
퍼담아 낮에 쓰다듬고 밤에는 가슴에 껴안고 젖 물리는 여인, 젖무
덤 흰 가슴에 매일 흩어지는 흙, 철문ㄴ의 병실, 병명이 붙은 모성애.

나는 오랜 불면 끝에 가위눌린 잠이 들면 꿈에는 죽은 친구를 만
나서 반갑고, 골목길 술집에서 같이 찬 술을 들이켜다 잠이 깨면 아
직 남아 있는 뼈아픈 숙취, 막막한 높이의 폭설, 내가 몇 해 만에 인
천에 갔을 때도 바닷물이 내게 와서 말해주었지, 친구여  소리 없는
시간에 도착하여 잔잔히 녹아주어라.

지금은 언 땅에 비
상이 내리고, 목이 긴 군화로 하숙집에 들어서
면, 냉돌에 밤 기차 소리 흔들리고 내가 지켜본 많은 죽은 이들  하
나둘 모이기 시작하네. 밤새 내리는 체온, 아침결이 되면 내 가슴에
도 문득 남아 있는 흙, 손 위에 넉넉한 평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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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감

내 소싯적 장난감은
2차 대전 끝에
쓰레기가 되고
6.25 사변에는
호박죽을 먹고
진흙을 뭉게고 놀았다.
그리고 허기차 쳐다보는
여름 하늘 구름.

내 아가야,
어깨가 늘어져 퇴근하는
아빠를 맞는 아가야.
네 눈읏음은 이제
유일한 내 장난감이고
나는 네 장난감을 굴리는
빈 풀밭이다.

네가 잠든 후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빈 풀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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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학

1966년의 내 통계학은
50여 명의 살인
20여 명의 사망 진단.
숨겨두는 모습 기다려보자면
사람들은 모두 같아,
참으로 외로워 보이더라.
한 줄씩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지지.

내 1960년의 외국은
자각의 손도 마비되어
이제는 시그마의 기호도 몸에 감춘 채
이 실증의 거리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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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어릴 때는 무조건 王이 되고 싶었다. 더 넓은 태평양을 지배하
는 조금 자라면서 해저 이만 리의 이야기에 쏠리고 그리고 외국어
시험에서는 대양의 생화학적 응용을 해석하고 떠났다. 이제 사만
척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평양.

내가 고국을 떠나고 태평양도 고향을 떠났다. 태평양은 조용한
눈을 가진 임산부, 결별의 편지를 읽은 후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여
인, 원거리 시력 무한대의 기억은 내 새벽의 꿈을 깨워 약수를 전해
준다. 나의 흩어진 신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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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노래

1
몸에 좋은 우유 마시고
몸에 나쁜 당신의 수집음.

나는 너무
두서없이  시작했다.

모든 인파로부터의 자유,
모든 자유로부터의 도피.

2
돌아서던 얼굴을 기억하냐, 가을아.
세월은 유수라지만

과수원 사과나무 낙엽 밑에
감추어둔 우리 것을 기억하냐, 가을아.

모두들 돌아간 뒤에도
가을은 익어서 머물고 있었다.

나는 열중했다,
세월은 유수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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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방

19세기의 촛대에 불을 밝히고 윤기 있는 生木의 책상을 빼면, 시
인의 방은 씨암탉의 모이주머니, 샤갈 선생의 진주가 있는 씨암탉
이다. 버밀리온색의 작은 눈.

그래서 선생은 몇 해 불란서의 우체국장을 지내고 지금은 죽어
서 고향에 돌아가 닭을 치고 있었다. 시인의 방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엽서, 시인의 방은 구라파의 묘한 우표다.

어느 땐들 우리는 은둔자의 표정을 존경치 않을 때가 없었지만,
어두운 여름  새벽  산길에서 혼자 눈뜨면 온몸에 이슬을 맞는 은둔
자의 흐려진 감각을 ㅡ기억 중에서도 시들어가는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우리는 한때 세상을 빛나게 하던 중독증을 가지고 있다.
샤갈 선생의 엽서난 자갈돌 두 개. 나는 그러나 아직도 따뜻한 나의
시인의 용도나 궁리해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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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 수업
  ㅡHans Carossa에게

고백합니다.
나이 삼십 되어도 잦은 꿈속에서는
초조한 시험, 답안지 작성뿐.
언제 인류를 위해 내가 죽고
언제 역사의 무리를 일으켜
혁명의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한
고행자의 오로움조차 소리 없고

고백합니다.
하룻밤 술 마신 날 후회하고
소설책 한 권에
분망대며 전공의 책상에 앉던.
내 수업 시대에는
전지로 맥박을 만들고
원자물리학을 뱃속에 심어도
사는일은 매일처럼 어려워지는 것을.

고백합니다.
공원 한끝의 서양식 묘지.
묘지 앞에 시들은 꽃송이.
당신의 시들은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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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밤

토요일에 마신 술은
일요일에 일어나 떠나가리.
끝끝내 회상은 병이다.
자정에 끝나는 대하.

아버지의 부고는
전보 한 장으로 끝내고
나도 아버지가 되고 보면
인생은  참 간단하구나.
정확히 계량되는
저 바람의 양만큼
내 신체에 묻은
당신의 피.

창밖에서는 때 아니게
낮은 음성의 나뭇잎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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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형식

이국에 도착했을 때
내게 남은 것은 흔들리는 몸뿐이었네.
이제는 정신의 어느 곳에서도
낙화의 소리 그치고
남은 향기의 대화여.

영주권을 얻고 기뻐서 울던
모국어을 하던 이방인들 사이에서
내게 남은 것은 적막한 이별뿐,
열병 속의 봄날은 다시 가고
초여름의 순진한 그늘,
외딴 나라에서의 헤어짐.

나야 역대의 정치는 모르지만
경제와 살인의 한국 신문에서
一日 四面의 신음 밖에서
이해하자, 인간의 좁은 비교학을,
이 과학적인 아픔을.

지나간 사랑은 신경통이다.
6월의 낡은 오렌지를 씹으며
한적한 공항의 인사
마른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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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1

겨울은 어떻게 오던가.
빈 뜰에 이른 어두움 내리고
빛나던 강물 소리 그치고
그 뺨에는 하얀 성에.

의정부행이었지.
뜻밖에도 눈이 내릴 때
마지막 밤 버스에서
흔들리던 요한 묵시록,
밤새 눈을 맞는 
孝婦利川徐氏墓地.

선종하는 노인의 잔주름 끝에도
한 줄씩 조용한 눈물.
그 눈물의 속도처럼 아직
겨울은 혼자서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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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하늘

심원한 곳으로부터 나부끼는 소리는, 푸르고 큰 모습이
되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숱한 산 새들 다 쌍지어 날리고 난 산은, 드디어 하늘에
다아 사라지고, 우울을 애써 이겨낸 발걸음.

한때는 아쉬웁게 나를  목마르게 하던 것이, 이제는 부질
없는 사소한 나머지 기억도 언젠가 저 흰 꽃잎처럼 날아가
버리겠지.

충혈된 고통을 누르며 애써 울기를 참는 기억의 하늘,
내 분신이 되어 살아있는 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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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버지는

내 아버지는
아직 젊으시다.

추운 밤 길목에 서서
늦은 누이동생
애인처럼 기다리신다.

내 아버지는 머리가 훤한 반백색,
아직 아직도 젊으시다.

오늘쯤 눈이 오려나 흐린 날씨면
말없이 브람스에 귀 기울이셔.

(그때 메뉴흰은 열다섯 살,
카페가 있고 땅콩과 홍차,
젊음을 보낸 나라는 하늘이 흐렸지.)

저기 어머니를 불러 앉히시고
"그렇지?"

처음 만난 부끄러움같이
서로 눈감고
브람스에 귀 기울이셔.

첫눈이 온다.
어두운 초저녁에 첫눈이 온다.

나는 친구랑 밤길을 걷고
남은 아버지.
혼자서 술잔이나 기울이신대ㅡ
아버지 젊으실 땐, 아니 참,
아직 젊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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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의 소나타

1
놀란 눈을 하고
귀 기울이다가, 귀 기울이다가

흰 눈밭에 새겨놓은
좁은 발 솜씨인가.

페달에 힘을 준 채
저음의 질긴 뿌리를 내리는가.
눈을 감았다가, 오래 감았다가
잃었던 먼곳을 찾아가는 건가.


조금씩 숨쉬어내는 하얀 공기로 깊은 눈 속을 뚫으리,
이제는 무엇들 하고 있을까. 얼마만큼 가다 보면 숨기다가 

눈 뜨는 꽃봉오리다. 두 눈이 열리고 길을 내는 소리다
그 눈길 달려가는 노랫소리다. 

노래가 눈을 안고 춤추는 풍경, 눈 위를 뒹구는 시원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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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도해 인상

1
죽순을 아는가.
햇빛 얼굴 씻는 소리를  아는가.

죽순을 아는가.
다시 반복되는 연한 파도소리는
누가 나즉이 받아 부르는가.

반쯤 오르던 새 풀잎이
왜 귀 기울이는 모습을 하는가.

2
남쪽 다도해의 아주 작은 섬,
사람은 더 안보이고
하늘만 보이고

연둣빛 바다의 숨소리
밀려나온 조개껍질.
밝게, 맑게, 웃고 있는
작은 섬의 시민들.

벗은 몸 바다에 담가
바다 되어 웃는다.

3
조그만 기다려다오.
나도 육신의 순을  보고 싶다.

청신한 몸의 향기, 
향기의 시작을 보고 싶다.

다도해 작은 섬을 아는가,
죽순을 아는가,
분해되는 내 육신의 축제,
방황하는 사랑을 아는가.

===========
+ 두개의 일상

익숙지 못한 저녁 이후에는
거파잔에 뜬
바흐으이 음악을 마신다.

서양에 몇 해 와서야
진미를 감촉하는
요원한 거리.

그만한 거리를 두고
가물에 피부가 뜬
전라도 한끝의 전답이
묵은 신문에서 살아나와
갑자기 내 형제가 된다.

죽으나 사나 형제여,
당신의 그림자는 길고 여위다
그 변치 않는 그림자를
황급히 주머니에 쑤셔넣고
천장이 높은 파티에 참석한다.

구겨진 내 그림자을 꺼내어
잊어버린 깃발같이
흔들어본다

두툼한 부피의 주머니를,
내 그림자의 음악을
요즈음은 불편하도록 실감한다.

-------------------
+ 루오의 원화

나는 보았네.
첫번째 루오의 원화 앞에서
서울 구석에 남아 있는 청년기.
고전적인 망막 세포.
나는 보았네.
화폭 위의 먼지,
먼지 위의 침묵,
내 고자의 실리 없는 사랑을,
죽고 사는 것이 이렇게 지척이면
그 목소리 분명히 귀에 들려도
구태여 슬픔도 허영으로 들리겠네.
나는 보았네.
어릴 때 모아둔 그 많은 나의 영토.
이제 흔적 없는 내 소유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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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개의 인상

1. 앙리 룻소(Henri Rousseau)

앙리 룻소는 또
촛불 옆에서 졸고 있구나.

1890년의 의상을 입고
사진사의 재치를 흉내내더니

그는 또 잠 속에서
웃고 있구나.

난시가 된 짐승들이 
숲속에서 잠들면

조용한 정원의 철문을 열고
길들인 외길의 그늘을 보라.

유모어의 그늘이
압도하는 신화,
여인의 죽음 앞에서
나는 또 졸고 섰구나.

2. 루오(G.Rouault)

이제 나는 돌아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는 하나

나도 처음에는
말 위에 이 소녀 같은 자세로
살고 싶었던 게지.

꿈꾸듯, 꿈꾸듯
다가오는 말굽 소리.

종각은 멀리 보인다.
당신의 기도는
내 눈물임을,

당신의 색깔은
내 불빛임을.

3. 드빗시(Debussy)

당신 어머니의 그림자는
아직도 학같이 길군

물빛에 은근히
젖은 영상은

무료하게 지나가는
젊은 날 바람.

그러나 이런 오후에
낮잠이 든 목신을 보면

당신의 육체는
아직도 포유류로군.

외로움도 사랑인 척
심중에 남겨두고

입술이 익어서
착한 사내로군.

--------------------
+ 정신과 병동

비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
둑님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
는 수물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품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
지겹지 않고, ㅡ.

까운 입은 삐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
+ 조용한 기도

1
우리의 얼굴을 꾸밈없이 내보일 때
그 끝에 보이는 황홀함과 따뜻함이여.

한 손에 해골을 들고
내 얼굴의 향긋한 내음을 맡는다.

막막함도 잊고 웃고 있는 어제,
웃고 있는 내 얼굴, 친구들 얼굴,
너무나도 섬세한 백토의 조각품,

근육을 한 개씩 분리할 때마다
어느 여름날 저녁의 바닷물 소리,
기억에 남아 있는 고운 목소리.

지금 소녀는 얼마나 시원할까,
흩어져 누워 있는 때묻은 소녀의 웃을
나는힘들여 찢고 있다.

2
나 지금 정들어 입고 있는 옷도
천천히 모르게 헌 옷이 되게 하소서.

때가 되면 주저없이 새옷을 마련하고
가볍게 활개쳐 날으게 하소서,

먼 거리를 나래 치며 오르는
비상의 신비한 기쁨 누리게 하소서.

해부대 앞에서 눈감은 소녀같이
나를 부리소서, 시작하게 하소서.

-------------------
+ 초겨울 주변

겨울은 맨 먼저
혼자 쓸쓸히 
내 팔장에 오고

조용히 바람 소리 내고
손바닥에 흘러내린다.

내가 좋아하던 나그네는
벌써 빗장을 걸고
잠이 들었지.

때없이 허허로움은
늦저녁 긴 그림자 같다.
그림자 밟고 가는 구둣소리 같다.

용기가 없어도
오다가다 인사를 하자.
본적도 주소도 같은 시내에세
고개를 들면

나는 추위에 
몸을 살핀다.

-------------------
+ 해부학 교실 1

다시 사는 환희에 들떠
넘쳐나는 개선가.

여기는, 먼 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눈먼 몇십 대의 할
아버지 때부터 시작하여, 아직까지도 우리의 감격을 풀지
못하는 나약한 꽃밭.

여기는 또 조용한 갈림길, 우리는 깨끗이 직각으로 서
로 껶어져 가자, 다시 돌아다볼 비굴한 미련은 팽겨쳐버
리자.

갑자기 너는 무엇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 오
래 부끄러워 눈길을 피하던, 영원한 향수가 젖어 있는 어머
니의 젓가슴, 너는 다시 우리를 낳아준 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면, 우리는 고운 매듭을 이어주는 숨소리를 음미할 때
마다, 살아 있는 보람이 물결 일어 넘쳐나는 개선가를 불러 준다.

여기는 먼 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생멸으ㅢ 온기를 감사
하는 서정의 꽃밭.

--------------------
+ 해부학 교실 2

참, 저 애 좀 봐라.
꼬옥 눈 감고 웃고 있는
흰 꽃으로 가슴 싼 저 애 좀 봐라.

여기가 무덤이 아닐 바에야
우리느 소리 없이 울지도 못하는데

한 세상 가자고 하다가
끝내는 모두 지쳐버린 꽃.

네 살결이 표백되어
하나씩 외로운 척 흩어져가고
수집어 눈 못 뜨는 소녀야, 말 해봐라.

전에는 종일 산을 싸들고,
꽃 따먹고, 색깔 있는 침을 뱉어
저 냄새, 내리는 햇살 냄새에
너는 웃기만 했지.

우리는 두 손
너는 웃기만 했지.

참, 저 애 좀 보라.
그래도 볼우물 웃고
우리는 차거운 손바닥 위에
헤어지는 아늑함을 가르쳐주는
저 애, 꽃순 같은 마음 소리 들어보아라.

=============
+ 다섯 개의 변주

1. 겨울

갑자기 언 강,
그 진폭이 너무 넓다.
화음 좋은 실내악.

얼음 위로 피는 꽃 보다.
푸르던 강 희게 얼었다.

'댓잎 자리 본' 옛날 애인은
독한 사랑이었구나.

얼음   위에 편히 누워
눈을 감는다.

잠깐 사이 등심을 울리는
물소리, 물소리.

화음 좋은 실내약,
떨리던 손만큼 깊다.

2. 봄

임신을 한
착한 처녀는
봄에 빨간 오바를 벗고
떨면서 두려워하면서
남은 옷을 벗는다.

봄의 두 팔이 만드는
바람의 동심원.

떨어진 실과의 몸
찾을 수 없고
봄의 진한 향기만
주위에 화사하다.

3. 여름

긴 여름을 열어놓고 불안한 두 다리, 강가에서는 온종일
솔잎의 말소리 듣고, 은빛 조개껍질로 빈형을 고친다. 나는
아무 병도 고쳐주지 못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이제는 병 없다 해주세요, 다 나았다 해주세요, 8년째  폐
를 앓는 젊은 여인이 홍정을 하잔다.
나는 의사가 되지 말았
아야지.

눈에 선 한 마리 새가 근처에 내린다. 찾아갈 곳이 없는 
연대에 외방인 대하듯 나를 보는 새야, 큰 강물 사
이로 작은 강 여럿이 흐르고, 강물 보고 손 흔드는 새를 본
다. 흥정하던 여인이 숨어버린 여름 강.
 
4. 가을

갈 길은 지천이어도
마음은 떼없이
나그네로다.

분만 대기실에서는
피톡신 떨어지는 소리로
궁합과 팔자를 맞추고
웃는 사람도 없다.

분만은 가벼운 산책,
가을에 노를 젖는 여인이다.

약속의 땅에 도착한
샤갈의 그림은 꿈이었구나.
맑은 꿈이었구나.


5. 두번째 겨울

수소를 호흡하고
사는 사내는
수소의 질량만큼
몸이 가볍다.

나는 정성 분석을 잘 배우고
정량을 익히지 못한 채
분석을 끝냈다.

수소는 스스로
체온을 주지 않고
겨울에 당신을 만나면

수소는 당신의 온기를 빼앗은 뒤
결혼할 것이다.
너무나 위험하게
수소는 다가와 예언한다.

핵. 핵.
휴존, 휘션, 컨휴전,
다시 핵핵.

두번째 겨울은
잠깐 사이에 우리에게 와서

죽고 사는 헤어짐이
다시 어려워질 것이다.

------------------
+ 선열의 진혼가
 ㅡ 4월혁명 때 죽은 친구에게

그날은 하늘과 땅이 환성을 울리고
산과 바다가 요동을 쳤네.

우리는 물결되어 크게 흐르고
젊어서 뜨거운 피를 물결에 쏟아
때 묻고 녹슬은 자유를 닦았네.

그날은 우리들만 태양을 우러르고
자유와 진리의 엄숙한 표정을 보았네.

아, 그러나 그날은
바로 내 친구들,
우리 친구들의 형과 동생이
피를 쏟고 요절한 날,
무식한 총구 앞에 쓰러지던 날.

피 묻은 까운을 입은 채 나는 보았네.
총에 맞은 몸을 흔들어대며
ㅡ나는 가야 합니다. 친구들이 기다려요.
ㅡ난 용감했어요. 지지 않았어요.
그 한마디 남기고 웃으며 갔다.

목매인 소리나마 진혼가를 불러주마.
젊어서 억울한 젖은 무덤 주위에
철 따라 고운 꽃도 가꾸어주마,
십 년 후, 혹은 이십 년 후,
피 흘리며 죽어갔던 그 큰 길을 걸을 때
마지막 남겼던 그 말들을 기억하고
우리의 두 눈을 다시 씻게 해다오.

기수들이여,
앞장섰던 우리의 소망들이여.
고개 숙인 소리로 진혼가를 불러주마.
고이 자거라, 웃으며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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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도시에서

희상만으로 사는 당신이 되었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몰라.
클리블랜드 시 4가의 한쪽 보도
걸어가는 한 여행자의 어깨,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그림자
후회하지 않을까 몰라.

천하에 이미 이웃은 없고
화려한 귀국의 날도 지나고
남아 있는 빌딩의 벽에 기대이면
오래 지켜오던 당신의 인생도
인생도 천천히 가라앉는 소리 들리고.

문명의 내막에  서서
당신의 실없는 웃음을 볼 때
그 웃음에서 바람 소리 들리고
당신의 회상이 마지막 손을 흔들 때
그러면 후회해도 확실히 말해야지,
클래블랜드 시 4가의 취한 저녁
한 작은 이별의 노린 노래로.

----------------------
+ 이상한 고별사

나 이제 떠나려 하네.
고별의 음악을 듣던 시대는 가고
그 쓸쓸한 집착의 실연조차
멀리 미워할 힘이 없네.

고개를 숙이면 아직 노래는 들리네.
내 의식의 적은 가지는 꺾이어
때때로 흘린 피를 어찌 아깝다 하리.
이제 永世의 고립을 머리에 달고
마지막 이십대의 두 다리로 서서
고별을 말하려 하네.

가여운 영혼의 친구여.
흑색 토스킹으로 양복을 지어 입고
피부에 따뜻한 내복을 입어도
나는 모처럼 광대의 미소로
외국어와 모국어를 섞어 떠들며
돌아서면 혼자 잠자리에 들으리.

나는 자유롭게 세상을 미워하고
무심히 오만의 의상을 흔들어보였지.
과거래야 기껏 떠돌기뿐이었지만
느지막한 靑雲이 지켜서서 보면
나 할 수 없이 떠나려 하네.

=============
+ 저녁 들길에서

그 어느 곳에 먼 노을을
즐기지 않을 이 있으리.
그 어느 곳에 늦은 깨달음을
용서하지 않을 이 있으리.

수많은 방황 끝에 경건한 제사에 도착한
내 젊음이 약한 시선도 탓하지 않으리.

조용히 불 꺼져가는 저녁 무렵
누구도 이 말없는 애태움을
그리워하지 않을 이 있으ㄹ.

그리고 마침내 남은 육신이
밤에 멀리 혼자일 때
나는 나를 지켜준 모닥불의 온기를
이 들길에 고이 묻고 떠나리.

---------------------------
+ 겨울에 그린 그림

1
내가 아직도 청청히 젊어서
겨울에 그린 그림은
이태원, 삼각지를 지나
한남동을 기웃거린다.

나는 그 돌다리도 기억한다.
내가 그린 나무는
자유의 손을 잃고 말았지만

적산가옥은 아직도
습기찬 벽에 빨래를 걸고
어깨를 옴추르고 쳐다본다.

2
병실에서 습기차 죽은 푸른 여인에게, 그 이발사는 울면
서 입 맞추고 봄이 씻겨가는 날, 나는 떠나면서 손을 흔들
었다. 내가 군모를 쓰고 대열 속에 발 맞추어 돌아왔을 때,
이발사는 머리를 기르고 벽을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이
틀 종일 눈을 부비며 또 부비며 그 이발사는 벽을 보
고 있었다.

-------------------------
+ 나도 꽃으로 서서

소담스런 꽃병에
나도 한 가지 꽃으로 서서

감빛의 꽃병
감빛의 연연한 노래 속에 서서 보면

우리는 지금도 
끝없는 이주민이었구나.

엄마는 꿈 속을, 구름 속을
엄마는 음악 속을,

그리하여 엄마는 적막 속을 헤매는
끝없는 이주민이었구나.

다정한 친구여, 보려무나.
살얼음 속에
떨고 섰는 비석,

그 비석 앞에서 나는
미진하고 사소한 생활을
고백 해야겠다.

지금 모든 것은 나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
웃으며 지나가는 세월 앞에서 꺼져가고 있다.

보려무나, 친구여,
비에 씻긴 하늘에서
노을은 피어나 우리를 놀래듯
그간에 나는 꽃으로 서서
보고만 있었구나.

나로 한가지 꽃으로 서서
생각없이 흔들려보면

우리는 지금도 
끝없는 이주민이었구나.

-------------------------------
+ 꽃잎을 여는 시간에는

정원의 작은 꽃들이
천천히 그 꽃잎을 여는 시간에는
오래 헤어졌던 생음악,
그 막막한 백발의 휘날림이
당신의 아침과 낮을 버리고
항구에 도착하는 시간에는.

당신은 마침내 들을 것이다.
저녁에 돌아오는 조심스런 발소리를.
우수의 계절에 내리던 눈 녹고
죽음이 우리 사이에서 자유로워지면
약속과 사랑을 들을 것이다.

밤에는 바람이 세게 분다.
으깨진 응급 환자가 들어온다.
천천히 그 꽃잎을 놓아주는 환자,
풀어진 눈, 풀어진 사랑,
나는 돌아서서 손을 부빈다.
등에 식은땀, 꽃잎의 목례,
밤에는 바람이 세게 분다.


______* 56


대답
독방
무용 1
-------
무용 2
바다
설경
연가 4
-------
연가 5
연가 6
연가 8
연가 9
-------
연가 10
연가 11
연가 13
연가 14
------
은하
인사
임종
전축
------
책장
편지 2
편지 3
후문
------
가야금
비망록 1
비망록 3
장난감
--------
통계학
태평양
가을 노래
시인의 방
-----------
의사 수업
토요일 밤
6월의 형식
겨울 이야기 1
-------------
기억의 하늘
내 아버지는
눈의 소나타
다도해 인상
-------------
두개의 일상
루오의 원화
세 개의 인상
정신과 병동
------------
조용한 기도
초겨울 주변
해부학 교실 1
해부학 교실 2
---------------
다섯 개의 변주
선열의 진혼가
어느 도시에서
이상한 고별사
---------------
저녁 들길에서
겨울에 그린 그림
나도 꽃으로 서서
꽃잎을 여는 시간에는

___________

마종기 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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