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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마 ~

마종기 시 2

+ 산행 2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을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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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1

1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2
그렇다. 젊었던 나이의 나여.
평생 도망가지 못하고 막혀 있는
멀리 누워 있는 저 호수도
물풀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오래 짓누르던 세월의 불면증을
몇 번이나 호수에 던져 버린다.
머리까지 온몸이 젖은 채로
잠시 눈을 뜨고 몸을 흔든다.
연한 속살은 바람에 씻겨
호수의 살결이 틈틈히 트고 있다.

3
어디였지?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호수도, 바람도, 다리도
대충 냄새로만 기억이 날 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끔
귓속의 환청의 아우성
아무도 우리를 말릴 수 없다
상처의 나이의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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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2

오래 먼 숲 헤쳐온 피곤한
상처들은 모두 신음 소리를 낸다.
산다는 것은 책임이라구.
바람이라구, 끝이 안 보이는 여정,
그래. 그래 이제 알아들을 것 같다.
갑자기 다가서는 가는 바람의 허리.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알지?
겨울밤 언 강의 어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숲의 상처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 것인가,
지워버릴 수 없는 그해의 뜨거운 손
수분을 다 빼앗긴 눈밭의 시야,
부정의 단단한 껍질이 된 우리 변명은
잠 속에서 밤새 내리는 눈먼 폭설처럼
흐느끼며 피 흘리며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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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4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려주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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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5

나이 탓이겠지만 요즈음에는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피가 많이 흐른 것도 아니고
심하게 다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상처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세포들은
자꾸 머리를 부딪히며 소리 죽여 운다.

나이 탓이겠지만 남들의 상처도
전보다 쓸데없이 더 잘 보인다.
피부를 숨긴 공포의 빠른 도주도
가슴까지 흔들며 분명하게 보인다.
무자비한 욕망이 표정 죽이고
우리 사이에 집과 공장을 짓는다.

나는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기적의 알약은 커지기만 하고
주위를 날아다니는 공기의 입들이
사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떠들며
살충제의 바람을 만들어 주위에 뿌린다.
그래도 피나지 않는 마지막 것을
언제나 두 손에 들고 사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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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6  

집 없는 새가 되라고 했니?
오래 머물 곳 없어야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야 진심에 골몰할 수 있다고.
설레는 피안으로 높이 날아올라
구름이 하는 말도 들을 수 있다고.
이승의 푸른 목마름도 볼 수 있다 했니?

잎 다 날린 춥고 높은 우듬지에서
집 없는 새의 초점 없는 눈이 되어야
우리 사이의 복잡한 넝쿨이 풀어진다 했니?
망각의 틈새에서 적적하고 노쇠한 뼈들이
몇 개쯤의 상처는 아예 손에 들고 살라 하네.
외지고 헐거운 삶의 질곡을 완성한다고,
욕심 부릴 유혹의 금줄을 쓸 수 없게 한다고.

문을 열면 나를 맞아준 것은
질서 없이 도망간 흔한 변명 뿐,
수척한 추위에 떨며 나를 안아주었네.
노을이 붉어질수록 깊이 잠기는
저녁 근처의 너는 벌써 새가 되었니?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
아프지, 그게 오래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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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경

안정한 부부에게 
불안정한 눈 내린다. 

내 전공의 책장에는 
다시 정리되는 함수론. 

떠나 살면서 
더욱 깊이 느낀다. 

군대에서 보낸 난세의 처신을 
시집간 손 밑의 누이는 
아직 손짓하지만, 

참으로 인생을 절약하는 자의 
말없는 관계 속에 
밤새 눈 내리는구나. 

기억에도 희미한 그 해의 暖冬. 
떠나는 어깨에 쌓이는 눈, 
의미 없이 들리던 후기의 사중주 
오, 밤새 눈 내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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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어떤 시선에서는 빛이 나오고
다른 시선에서는 어두움 내린다
어떤 시선과 시선은 마주쳐
자식을 낳았고
다른 시선과 시선은 서로 만나
손잡고 보석이 되었다

다 자란 구름이 헤어질 때
그 모양과 색깔을 바꾸듯
숨 죽인 채 달아오른 세상의 시선에
당신의 살결이 흩어졌다

어디서 한 마리 새가 운다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는 저 새의 시선
시선에 파묻히는 우리들의 추운 손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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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가 4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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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가 9

1
전송하면서
살고 싶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시체들 속
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
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 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 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의 내부는
깊이 물 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웃음을
물어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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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12                                                  
1
이렇게 어설픈 도시에서 하숙을 하는 밤에는 월트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나 보자. 하숙이 허술해서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온돌을 때는 이 극장이 격에 어울리지.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나도 메뚜기가 되어 보면, 밖에는 눈이 그칠 새 없고 혼자 보고 혼자 오는 발이 시리다. 친구야, 총천연색의 메뚜기가 되어 살자.

2
도서관을 돌다가 무심결에 호흡기 내과책 한 권을 뽑았더니, 겉장에는 알 케이 알렉싼드리아의 싸인이 있고 철필로 쓴... 보스든 메서츄세츠스에 1879년 8월 2일. 1879년 8월 2일은 날씨가 흐렸다. 흐려진 철필글씨, 무덤 속에 있는 내과 의사 알렉싼드리아의 손작국을 유심히 본다. 냄새라도 맡아서 코에 기억해 두자. 1966년을 내 책에 기입하고 나도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것이다.

3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지나가던 친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엽서로는 연상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테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만 키운 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헷세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육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육 깨월의 사랑, 육 개월의 세상, 육 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육 개월을, 육 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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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가 13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약간의 미모와 
약간의 애교와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약간의 요리와 
봄날의 이불. 
그리고는 흩어지는 꽃잎으로 
그 이름을 떠날 것이다. 


한때는 구기도 공부도 좋아하고, 한때는 포카도 술도 연애도, 
한때는 음악도 회화도 시도 소설도, 그리고 결혼도 의사도 
죽음도 좋아했지만 결국 한 50년 만이라도 몰입될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도 아는 놈만 안다. 번연히 오래 못 살 환자의 비밀. 
멋모르는 대면의 술잔. 그리고 다음번의 목차를, 적은 소외감을. 
세상에도 모르는 놈만 모른다. 잠자리에서도 소홀한 한 목숨의 경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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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매

비엔나 오페른 링의 시월 저녁.
걸어가는 가늘고 낮은 바람 사이로
한 나그네가 다른 나그네를 알아본다.

철새도 아닌 새들까지 다 어디로
부산하게 떼지어 날아 가버리는 시간,
아무 이야기라도 눈자위를 적시고 마는
낯모를 골목길을 오래 헤매면서도
나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꽃과 나비의 세월 다 지나고
마지막 떠나는 새들에게 먹히기 위해
더 진한 색깔로 하나씩 열매를 장식하는
그림자도 지워버린 나무의 지혜여
천하가 도도히 헛것으로 향해 간다는
음침한 소문 속에서도 열매를 익힌다.

혹은 환갑을 한두 해 남긴 김광규 시인이
혼자 장바구니 든 채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오페른 링의 길고 미지근한 저녁 미소가
내게는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열매의 땀방울이여,
욕심을 버리려고 몸을 터는 이 계절의 나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될 수 없고
보이는 몸은 영원한 몸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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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서향의 한 병실에 불이 꺼지고 
어두운 겨울 그림자 
낮은 산을 넘어서면 

부검실은 차운 벽돌, 
뼈를 톱질하는 소리로 울려도 
이것은 피날레가 아니다. 

나는 처음 해부학에서 
자연스런 생명을 배웠다. 
거기에 추위가 왔다. 

막막한 청춘의 잠자리에서 
나는 자주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남은 시간의 화려한 현기증. 

들리니, 포기한 키 큰 사내의 
쓸쓸한 임종. 
들리니, 이것은 피날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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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맑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에서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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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가.
깊은 산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정 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아직 잠들지 못한 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는가.
폭설을 핑계 삼아 기대고 다가서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서로를 만지는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큰 눈꽃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것이 무서워진다.
저녁이 내리는 우리들이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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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성북동의 가을, 간송미술관에 찾아가
조선 중기의 잔잔한 그림들에 머리 숙이며
해진 종이 냄새 속에서 눈 맞는 새도 보고
잡은 학을 놓아주는 여유로운 시대도 만난다.
이 진한 향기의 꽃은 어디에 피어 있기에
어지러웠던 내 평생이 기다림에 지쳐
이름 모를 나무 되어 옷을 벗는가.
유혹이여, 대낮에 눈 뜨는 어린 하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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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의 피

내가 갈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죽은 듯 살아 있고
살아 있는 듯 몸을 흔들며
죽어 있기 때문이겠지.

죽고 사는 것이 같이 잘 섞여서
죽은 갈대가 산 것과 같이 노래하고
산 갈대가 죽은 갈대를 안고 춤추네.

평생 동안 한눈만 팔고 살면서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것 다 가게 하고
손 흔들어 보내면서 웃고 있네.

아끼기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팔목 한번, 어깨 한번 만지지도 않는구나.
만지고 싶어라, 날아가는 흰 갈대꽃!
매일 흘리는 피도 아무에게 보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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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도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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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도 2

1
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만한 자도 살피소서.
어리석게 실속만 차리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아픔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2
내가 눈물을 닦으면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의 노래다.
노래 속의 기쁨이다.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저 멀리 다음해까지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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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노래

눈이 오다 그치다 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직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 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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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묘지

피붙이의 황량한 묘지 앞에 서면
생시의 모습이 춥고 애잔해서
눈 오시는 날에도 가슴 미어지는구나.

살고 죽는 것이 날아가는 바람 같아
우리가 서로 섞여서 어디로 간다지만
그 어려운 계산이 모두 눈이 되어 내려서
오늘은 긴 눈발 속에 아무도 보이지 않네.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두 손에 눈을 받아도
소식 한 장 어느새 눈물 방울로 변하고
귀에 익은 침묵만 세상의 주위를 적시네.

내 눈이 공연히 시려오는 잿빛 하늘
눈이 와서 또 쌓여서 비석까지 덮는다.
움직이는 슬픔이 움직이지 못하는 슬픔을 만나
깨끗한 무게로 서로를 달래주는구나.

그렇다. 우리는 도저히 헤어지지 않는다.
네 숨결은 묘지 근처의 맑고 찬 공기,
하늘이 더 낮게 내려와 우리는 손을 잡는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바람이 자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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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이유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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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송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나는 왠지 그저 눈물부터 나네
눈물 흘리는 내 마음 한 개로
간절한 꽃 한 송이 만들어 당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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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1
날자.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헤매고 부딪치면서 늙어야지.

(外國은 잠시 여행에 빛나고
이삼년 공부하기 알맞지
십년이 넘으면 外國은
참으로 우습고 황량하구나.)

자주 보는 꿈 속의 나비
우리가 허송한 시간의 날개로
바다를 건너는 나비,
나는 매일 쉬지 않고 날았다.
節望절망하지 않고 사는 表情표정
절망하지 않고 들리는 音樂음악.

2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몸으로
비가 오는 날 저녁
한국의 港口항구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낯선 길에 서 있는 木蓮목련은
꽃피기 전에 비에 지고
비 맞은 나비가 되어서라도
그 날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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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풍경

새 한 마리 작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나뭇가지 작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새가 날아 가버린 후에도 나뭇가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떨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혼자 흐느껴 우는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풍경이 혼자서 어두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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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바다

다른 바다를 찾아가리라. 
해안선에 줄 서 있던 소나무는 
바람의 소금기에 장님이 되고 
바다가 아직 살아 있느냐고 묻는다. 
방조제가 깔리고 네가 떠나고 
열에 들뜬 파도 소리가 떠나고 
나이 들어 자주 깨는 밤에는 
바다가 아직 살아 있느냐고 묻는다. 

다른 바다를 찾아가리라. 
젊어서 수줍게 들었던 첫 뱃길은 
착각처럼 어둡게 늙어가고 
짙은 바다 안개만 주위를 감싼다. 
옷 벗은 정적이 따뜻하다. 
어렵게 팔을 벌리는 소나무. 
바다가 살아 있다고 몸을 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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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꽃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죄 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 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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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집


바다의 눈물이 밤에도 보인다. 
한 세월 떠돌다가 돌아온 후에 
내가 들었던 가늘고 낮은 한마디, 
밤잠 설치는 바다의 뒤척임이 
그 소리 끝에 만드는 빛, 
해안의 모래가 더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살 속을 헤맨다. 
오래된 언덕이 낮아지고 
죄 없는 손이 용서받는다. 
 

생각에 잠긴 늦은 아침나절, 
벗은 몸을 반쯤 가리고 누운 
바다의 나신을 껴안고 싶다. 
화가 듀피의 아네모네같이 가볍게 
돛단배보다 큰 나비가 
바다보다 큰 꽃잎에 앉는다. 
나비의 무게로 출렁거리는 바다의 집, 
바다 비린내 몇 개 증발해서 
장난감 같은 구름을 하늘에 남긴다. 
 

오늘은 여느 날보다 
수평선이 더 굵어졌다. 
바다의 뒤쪽에서는 
비가 내리는 모양이지. 
편안하던 물결이 해안에만 오면 
왜 그리 힘들여 목숨을 놓아버리는가. 
바다도 기억력이 좋다는 
부서진 파도의 작은 변명, 
낯선 풍경 속에서 
낯익은 당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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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아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 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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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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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물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 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 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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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나라

하루종일 봄비가 의심하는 세상을 적신다.
사람이야 언제 어디서고 죽게 마련이지만
외국의 봄날 흐리게 허물어진
동생이 저녁까지 봄비 되어 울고 있다.

비는 내려서 땅에 스며들고
스며서 땅 사이로 사라지는 침묵.
해직당한 고국을 그리워하던
적막 강산이 눈물 사이로 보인다.
온몸이 젖어서 두 눈을 크게 뜨는 너.
(혹은, 나.)

비는 왜 이렇게 소리치며 밤새 오는지.
빗소리 듣다가 풋잠 잠시 들고
또 언뜻 잠 깨어 다시 듣는 빗소리
집 밖의 사방에는 벌써 수상한 미명.
춥다.
너도 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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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用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이디오피아에서, 소말리아에서
중앙아프리카에서
굶고 굶어서 가죽만 거칠어진
수백 수천의 어린이가 검게 말라서
매일 쓰레기처럼 죽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에서
오늘은 해골을 굴리고 놀고
내일은 정글 진흙탕 속에 죽는 어린이.
열 살이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고
열두 살이면 기관단총을 쏘아댑니다.
멜 살바돌에서, 니카라과에서
중앙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해 뜨고 해 질 때까지 온종일
오른쪽은 왼쪽을 씹고
왼쪽은 오른쪽을 까고
대가리는 꼬리를 먹고
꼬리는 대가리를 치다가 죽고.
하루도 그치지 않는 총소리,
하루도 쉬지 않는 殺人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어디 있습니까.

이란에서, 이라크에서,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에서, 시베리아 벌판에서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남들의 슬픔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남들이 고통 끝에 일어나면
감동하여 뒷간에서 발을 구릅니다.
어느 시인이 쓴 투쟁의 노래는 용감하지만
내게 직접 그 고통이 올 때까지는
어느 시인이 쓴 위로의 노래는 비감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
그러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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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긴 질긴 내 그림자가
팔 잘린 고목 하나를 키워놓았어.
봄이 되면 어색하게 성긴 잎들을
눈 시린 가지 끝에 매달기도 하지만
한세월에 큰 벼락도 몇 개 맞아서
속살까지 검게 탄 서리 먹은 고목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은 힘 지친 잉어 한 마리
물살 빠른 강물 따라 헤엄치고 있었어.
정말 헤엄을 치는 것이었을까,
물살에 그냥 떠내려가는 것이었을까.
결국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한 채
잉어 한 마리 눈시울 붉히며 지나갔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모두 그랬어, 어디로들 가는지.
고목이나 잉어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뚝심이 없었던 젊은 하늘에서
며칠 내 그치지 않는 검은색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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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부르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운문의 목소리로 이름 불러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
시치미떼고 옆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가문 밤에는 잠꼬대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늙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목소리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을까.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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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지 않다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잃고 헤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의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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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의 外國  2

안락한 外製 소파에 틀고 앉아
안락하지 못했던 東學의 傳記를 읽는다.
헐벗은 백년 전 전라도, 충청도 땅에
볼품없이 씻겨 가는 人骨을 본다.

외국에 나와서 보면 더욱 힘든다.
삿대 없이 흐르던 가난한 나라,
흙먼지에 얼굴 덮인 竹槍의 눈물,
그날의 선조가 야속한 官軍이 아니고
감투 눌러쓰고 돌아앉던 兩班이 아니기를.
한여름 냉방 장치의 응접실에서
문득 얼굴에 흙칠을 하고 싶다.
돌아앉아 숨죽이던 그 양반의 버선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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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


불란서 영화였던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를 찾아 헤매던 처녀는 예뻤다. 몸과 마음이 모두
자유롭기 위해 등짐을 지고 떠난 처녀는, 思想에서
도, 社會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공부에서
도, 친구에게서도 벗어나려고, 끝까지 혼자 헤매다
가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가슴에 넘치게 안고 웃었
다. 그리고 완전무결한 자유의 추위와 배고픔으로
겨울의 어느 들판에서 얼어 죽었다. 나도 한때는 거
기서 얼어 죽고 싶었다.

불을 꺼버린 들꽃의 얼굴이 몇 개 보였다.
죽은 후에도 날리는 긴 머리카락의 신음,
입고 있던 마지막 옷과 장식을 풀어 날린다.
그대 떠나가는 들판의 의심스런 어두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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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年의 안개 

올해도 비가 그치면서
市街는 안개로 덮였다.
길고 어두운 우리들의 중년이
방향 없이 그 속을 날고 있었다.

----- 소소한 것은 잊으세요.
----- 중년의 긴 꿈은 무서워요.

우리들의 視程 거리는 일 분.
반백의 세상은 안개처럼 간단하다.
녹슨 칼은 몸 안에 숨기고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고개를 돌리고
목에 칼칼하게 걸리는 몇 개의 양심.

----- 멀리 보지 마세요.
----- 중년의 절망은 무서워요.

조롱 속에 살던 새는 조롱 속에서 죽고
안개 속을 날던 새는 죽어서
갈 곳이 없어 안개가 된대요.

바람의 씨를 뿌리던 우리들의 갈증은
어디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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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가는 길

1
날씨 때문에 호남 쪽 여행을 취소하고
친구 넷, 하룻밤 아무 데나 가자며 떠난
늦은 오후의 춘천 가는 길.
이 낮은 산이 저 낮은 산으로 이어지고
산과 산 사이를 다듬어 채우는 비안개.
산 밑을 따라가는 강줄기 사이에서
구질스런 풋정만 신음 소리를 내는구나.
옛날인가, 아버지의 산소도 지나온 지 오래고
경춘선 정도의 기차가 동행의 기적을 울리네.
내 친구 의사 짐에게는 흥겹게 캠프 케이지로 가는 길.
오래 구겨진 몸으로 춘천 가는 길.

2
안녕하세요, 당신
몇 장의 바람이 우리를 지나간 뒤에도
상수리나무는 깊이 잠들어 코 고는 소리를 내고
우리도 그렇게 태평한 하룻밤을 가지고 싶네요.
돌아다보면 지나온 길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몸 저리는 아픔이겠지만
낯선 풍경 속에서 아직도 서성거리는
안녕하세요, 당신
그 어디쯤, 생각과 생각 사이의 공간에서
귀를 세우고 우리들의 앞길을 엿듣고 있는
같은 하늘 아래 근심에 싸인 당신,
당신의 탄식이 문득 우리를 불 밝혀주네요.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화를---
너에게 주노라, 너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는,

--------------------
피의 생리학 
 
1
핏줄 속에서
산불이 자주 난다.
사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긴 잠을 깨운다.
아름답고 뜨거운 피,
언제나 우리들의 앞길을 막는 피
길 잃은 피가 커진다.
커진 피가 오래 마찰하는
조상들의 산불이 탄다.

​2
적혈구와 백혈구가 서로 싸우는 광장에 나가면 온몸이 어두워진다. 싸우지 말자고 웅성대는 우리들의 피의 찌꺼기, 혹은 혈소판.

피의 찌꺼기는 작다. 피의 찌꺼기는 많다. 흘러다니는 피의 찌꺼기는 모양이 제가끔이다. 쉽게 뜨는 피의 찌꺼기는 의견이 비슷하다.

피의 찌꺼기는 아프고 억울한 상처를 아물게 한다. 많은 피의 찌꺼기가 죽고 또 죽어서 상처를 아물게 한다.

--------------------
노르웨이 폭포

네 얼굴과 내 얼굴이 겹치고 엉겨
한 개의 얼굴이 되는 곳을 아느냐.
내 목숨과 네 목숨이 서로 붙자고
한 개의 숨소리만 내는 곳을 아느냐.

우리가 살아온 길과 물을 모두 모으면
사무치게 오래된 흐린 항구가 되느니
가난한 마을 작은 집의 나이 든 아내를 보면
그 긴 여행을 어찌 젖은 과거라고만 부르리.

나도 한때는 정상만 주시하며 뛰었다.
병풍같이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산들
흔들며, 고개 저으며 흔한 눈물도 흘렸지만
그 슬픔 다 씻어내고 폭포를 덮어가는 무지개.

그 무지개 몇 개 주머니 속에 간직하는 동안
폭포는 두 손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네.
영성의 시원한 물로 세례를 받는 이 아침,
어디서 본 듯한 소리 내 혼을 넓게 열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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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다니는 노래

허둥대며 지나가는 출근길에서
가로수 하나를 점찍어두었다가
저문 어느 날 그 나무 위에
새 둥지 하나를 만들어놓아야지.
살다가 어지럽고 힘겨울 때면
가벼운 새가 되어 쉬어가야지.
옆에 사는 새들이 놀라지 않게
몸짓도 없애고 소리도 죽이고,
떠다니는 영혼이 아는 척하면
그 추운 마음도 쉬어가게 해야지.

둥지의 문들 열어놓고 무엇을 할까.
얼굴에 묻어 있는 바람이나 씻어줄까.
조건을 달지 않으면 모두가 가볍군.
우리들의 난감한 사연도 쉽게 만나서
당신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도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지 웃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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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얼굴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 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는 먼 길의 끝의 평화,
네 간절하고 가난한 믿음이 우리를 울린다.

오늘은 날씨가 맑고 따뜻하다
하늘을 보니 네 얼굴이 넓게 떠 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몇 개로 보인다.
너 같이 착하고 맑은 하늘에
네 얼굴 자꾸 넓게 퍼진다.
눈부신 천 개의 색깔, 네 얼굴에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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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시편 1

1
네가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높은 빙산이 녹아 흐르는
연둣빛 물소리밖에 없었다.
네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분홍빛의 밝고 진한 잡초 꽃*들이
산과 골을 덮으면서 피어났다.
그리고 바람이 늦게 도착했다.

분홍 꽃들이 바람과 춤추고
가문비나무들은 그늘 쪽에 서서
장단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다.
왁자하던 꽃들이 잠잠해지자
저녁이 왔다. 정말이다.
네가 여기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소리밖에 없었다.

2
당신은 머리를 잠시 들어
주위를 살폈을 뿐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와서야 파란 하늘이 생겼다.
정말이다. 지난날의 솜 덩어리들
하늘 밑에 구름도 생겼다.
잡초 꽃들이 고개 한 번 숙인 것 같은데
양쪽으로 분홍빛 길이 만들어졌다.

저 높은 끝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로
당신이 화해를 하자며 다가왔다.
정말이다. 잡은 당신의 손이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걸어가야 할 남은 길이
옛날같이 다정하고 확실하게 보였다.

fireweed ~

알래스카의 들과 야산에 세 계절 동안 피는 진한 잡초 꽃을
그곳 사람들은 '파이어위드fireweed'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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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시편 4

빙산을 그 위에서 보면
모두 접시 같다.
접시에는 아직 날아보지 못한
큰 바람들이 앉아 있다.
깨우지 마라, 접시 속의 창백한 시절,
빙산의 만년 얼음 속에서만 사는
저 작고 검은 곤충, 무너진 기대들.
한 마리씩 이끼에 엎드려 없는 듯이 산다.
두 눈 뜬 저 추운 집착을 깨우지 마라.

여름이 와도 곤충은 날지 못하고
우리와 동갑 나이가 되어도 떠나지 못한다.
여섯 개의 언 다리와 언 목을 움직이면
외로웠던 얼음이 주저 없이 깨어진다.
떠날 준비를 서두르는 바람이 옷을 입는다.
마을에 몰려오는 얼음 녹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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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溫柔)에 대하여

온유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 사람 빈집 안의 작은 불꽃이 
오늘은 더욱 맑고 섬세하구나. 
겨울 아침에 무거운 사람들 모여서 
온유의 강을 조용히 건너가느니 
주위의 추운 나무들 눈보라 털어내고 
눈부신 강의 숨결을 받아마신다. 

말과 숨결로 나를 방문한 온유여, 
언 손을 여기 얹고 이마 내리노니 
시끄러운 사람들의 도시를 지나 
님이여 친구가 어깨 떨며 운다. 
그 겸손하고 작은 물 내게 묻어와 
떠돌던 날의 더운 몸을 씻어준다. 

하루를 마감하는 내 저녁 속의 노을, 
가없는 온유의 강이 큰 힘이라니! 
나도 저런 색으로 강해지고 싶었다. 
불타는 뜬구름도 하나 외롭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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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있는 풍경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
흐린 아침 미사중에 들은 한 구절이
창백한 나라에서 내리는 성긴 눈발이 되어
옷깃 여미고 주위를 살피게 하네요.
누구요? 안 보이는 것은 아직도 안 보이고
잎과 열매 다 잃은 백양나무 하나가 울고 있습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을 닦고 있는 나무,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내가 몰입했던 단단한 뼈의 성문 열리고
울음 그치고 일어서는 내 백양나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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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미사

하늘에 사는 흰 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함께 섞여서
겨울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을 에워싸는 하느님의 문신,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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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금이라구?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을 되새기면서
그해에 나는 가슴 깊이 금광을 하나 넣고
무서운 법이 많았던 내 나라를 떠났어.
침묵은 금이라니까 나도 한번 빛나고 싶어
어둡던 사람들 피해 밖으로 나돌면서
압박과 설움에 뒤엉키고 기어올랐어.

침묵은 금이고 틀림없는 것이라니까
참 오랫동안 금광의 큰 가슴만 믿고
누가 뭐라고 해잘거려도 나는 침묵했어.
내 꿈이 매 맞고 발길질당했던 시절,
가엾게 질려버린 청춘을 던져주고 받은
침묵이 금이라는 무슨 공맹자 말씀!

그 금광이 폐허가 된 것을 알아버린 때는
길어진 방황, 나라 밖의 세월이 물경 35년 후,
금광이 너무 오래 가슴에 묻혀서였나,
숨통이 막혀서였나, 침묵은 아직도 금이라구?
맑은 새소리도 운치의 풍경도 사라진 폐광,
가슴속의 금광은 큰 구멍 하나로 남고
나는 자주 빈 기침만으로 아침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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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술하고 짧은 탄식

1
산소 근처의 이슬은
중천의 햇살에도
다 마르지 않았다.
고국같이 높은 하늘이
깨끗하게 가고 있구나.
아마 네가 살고 있는 곳.
너무 맑고 멀어서
가을에는 가슴이 더 시리구나.

2
며칠 전에는 네 묘지 근처에
내가 묻힐 작은 터를 미리 샀다.
가슴 펴고 고국에 묻히고 싶기야
너와 내가 같은 생각이었지만
혹시 나도 그 소원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네 근처가 나을 것 같아서,
책을 읽든, 술을 마시든,
아니면 그냥 싱겁게 싱글거리든,
다시 한번 네 가까이에 살고 싶어서.

3
꽃이 져야 열매가 보이듯
네가 가고 난 후에야
네 온기가 느껴지는구나.
네가 가고 난 후에야
네 친구가 보이는구나.
네가 가고 난 후에야
내가 얼마나 네게 기대고 살아왔는지!

4
그래, 길어야 십 년, 이십 년,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가더냐.
그때 만나서 놀기로 하자.
그간에 어쭙잖게 너를 글쓰니까
네 인상이 오히려 흐려지는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
그냥 내 가슴의 중심, 기억의 뜰에서
네 착한 성품과 시달린 혼 쉬게 하겠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게 있어라.
그래, 길어야 십 년, 이십 년,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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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심장에서 메아리까지

우리들의 슬픔은
그늘이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사랑,
옛날에 옷 벗은 우리들의 상처도
메아리다.

오늘은 그늘에서
비가 잠을 잔다.
잠 속에서도
우리들의 몸 속이 젖는 소리.

젖은 나이의 보도 위에
우리들의 낙엽이 흙이 된다.
내 심장에서 흙까지
오래 울리는 당신의 메아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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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상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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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 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_____ * 55


산행 2
상처 1
상처 2
상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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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5
상처 6
설경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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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4
연가 9
연가 12
연가 13
---------
열매
임종
전화
폭설
--------
풍경화
갈대의 피
겨울 기도
겨울 기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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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노래
겨울 묘지
꽃의 이유
꽃 한 송이
-------------
나비의 꿈
남은 풍경
다른 바다
담쟁이 꽃
-------------
바다의 집
바람의 말
비 오는 날
쓸쓸한 물
---------------
비오는 나라
시인의 용도
어느 날 문득
이름 부르기
---------------
익숙지 않다
일상의 외국 2
자유주의자
중년의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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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가는 길
피의 생리학
노르웨이 폭포
떠다니는 노래
--------------------
맑은 날의 얼굴
알래스카 시편 1
알래스카 시편 6
온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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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있는 풍경
눈 오는 날의 미사
침묵은 금이라구?
허술하고 짧은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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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심장에서 메아리까지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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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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