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
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
같이 늙어 가는 사람아,
들리냐.
바닷바람은 속살같이 부드럽고
잔 물살들 서로 만나 인사 나눌 때
물안개 덮인 집이 불을 낮추고
검푸른 바깥이 천천히 밝아왔다.
같이 저녁을 맞는 사람아,
들리냐.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새로웠다.
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느냐,
끊어질 듯 가늘고 가쁜 숨소리 따라
피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졌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
거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
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
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
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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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새들은 아침잠도 없구나.
동이 터오는 기미만 보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우리를 부른다.
그 푸른 목소리
몸을 높이 올리면
지상의 먼 거리도
손가락 사이에서 보이고
눈을 바로 뜨면
자유의 모진 아우성도
아름답게 보인다.
둘도 하나로 보인다.
그러니 어디에 있으면 어떠랴.
우리들의 예감이야 하나밖에 없지.
사방이 막히고 어두워도
오늘도 그 불 같은 목소리.
새들은 기미만 보고도
우리들의 게으름을 일깨워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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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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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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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꽃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
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 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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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
1
돌아왔구나, 하고 친구가 말했다.
오래도록 나가서 떠돌며 살더니
이 일 저 일 털어내고 맨손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나를 잡아준다.
그런데 나는 정말 돌아온 것일까.
나 살던 동네도 모습 찾기 힘들고
알던 사람들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2
그날은 저녁부터 밤새 비가 내렸다.
소름 끼치게 혼자 있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체질인 것을 알았다.
어떻게 남보다 많이 젖지도 않고
속내의 나를 모두 보일 수 있으랴.
그날은 떠난 날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숨쉬는
신선하고 정결한 단어를 찾으려고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낚싯줄을 던졌다.
3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왠지 밤잠을 설쳤을 뿐이다.
얼굴과 머리는 늙어 낙엽으로 날리지만
한 평 침대에 누운 저 꽃 잠 깨기 전에
재갈 물린 세월아, 모두 잘 가거라, 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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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하느님.
나를 이유 없이 울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눈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죽어서는
그들의 눈물로 지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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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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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집
물고기의 집은 물,
새들의 집은 하늘,
내 집은 땅, 혹은 빈 배.
물고기는 강물 소리에 잠들고
새들은 달무리에서 잠들고
나는 땅이 식는 몸서리에 잠든다.
평생 눈 감지 못하는 물고기는
꿈속에서 두 눈 감고 깊이 잠들고
잠자는 새들의 꿈은 나무에 떨어져
달 없는 한밤에 잠든 나무를 깨운다.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내 집은 땅의 귀,
모든 소리가 모여서 노는
내 집은 땅의 땀,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과 번민과 기쁨과 열 받기.
행복한 상징의 속살을 지나고
긴 산책에서 돌아오는
내 집은 땅, 지상의 배,
저항하는 지상의 파도에 흔들리는
내 집은 위험한 고기잡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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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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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舞踊(무용)
-Pouline Koner 氏에게
나도 당신의 舞踊(무용) 같은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의 動作(동작)이
깊이 가슴에 남아
그 무게로 고개를 숙여 버리던
그때는 봄이던가, 가을이던가,
당신이 尊敬(존경)하는 畵家(화가)의
그 無理(무리)한 表情(표정)으로
나도 층층대를 올라가
訪問(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당신의 舞踊,
소리 없는 音樂(음악),
그래도 充滿(충만)한 당신의 舞踊만큼
安否(안부) 없는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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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빛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혀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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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빛 6
물이 깨어져서
많은 물방울이 된다.
물이 깨어져서
많은 자식이 된다.
물방울은 작지만
많은 자리가 넘치게 차고
色이 온몸에 번진다.
자식은 부모보다
빛나고 아름답다.
물의 아버지가 깨어지지 않으면
빛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물방울이 낮은 곳에 모이면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제일 낮다.
물의 몸이 움직이는 저 깊은 속,
나이 들어가는 물빛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서늘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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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니 이야기를 들었을까.
-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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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비
참 멀리도 나는 왔구나.
산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강물도 흙이 되어 흐르지 않는다.
구름은 사방에 풀어지고
가까운 저녁도 말라 어두워졌다.
그대가 어디서고 걷고 있으리라는 희망만
내 감은 눈에 아득히 남을 뿐
폐허의 노래만 서성거리는 이 도시.
이제 나는 안다.
삶의 사이사이에 오래된 다리들
위태롭게 여린 목숨조차 편안해 보이고
그대 누운 모습의 온기만 내 안에 살아 있다.
하늘은 올라가기만 해서 멀어지고
여백도 지워진 이 땅 위의 밤에
차고 외로운 잠꼬대인가
창밖에서 떠는 작은 새소리,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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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명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건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
+ 가을산
내가 옛날에 바람의 몸으로
세상을 종횡으로 누빌 때
높고 낮은 것도 가리지 않고
치고 안고 뒹굴고 다닐 때
산은 자꾸 내게서 눈을 돌렸지
이제 들리지 않던 소리 새로 들리고
소리들 모여 사는 낮은 산에 싸여
한평생의 저녁은 이렇게 오던가
푸른 구름의 너그러운 나그네 말이 없고
그 백수의 풍경만 나를 채우네
오, 가을 산에 모인 빛,
죽은 나뭇잎의 찬란한 색깔,
그 영혼의 색깔,
숨어살던 내 바람까지
오색의 춤판이 되어 돌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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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한
살아 있는 말 몇 마디 나누고 싶어서
날씨처럼 흐릿한 몸이 더워 올 때도
너는 이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고
창 밖에는 어디서 보내 온 반가운 소식,
간절한 눈발이 눈 시리게 하누나.
주위의 집들이 다시 숨기 시작하고
젊은 나무들이 앞장서 걸어 나온다.
세상이 떠다니던 모든 간절한 것들은
피곤하게 젖은 마음을 눈 위에 눕힌다.
네 모습은 아무리 더듬어도 만져지지 않고
나도 체온을 내리고 부서져 몸을 눕히랴.
누워서도 간절한 바람소리 들리냐,
바람에 섞여 오는 진한 목소리 들리냐,
나도 멀리에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언제 추위를 이겨냈다는 신호등 켜지고
해석하기 어렵게 지워진 벽화의 주위,
간절한 것 몇 개 남아 떠날 차비를 한다.
--------------
+ 낚시질
낚시질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平生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中年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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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아리
작은 호수가 노래하는 거
너 들어봤니.
피곤한 마음은 그냥 더 잠자게 하고
새벽 숲의 잡풀처럼 귀 기울이면
진한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물이 노래하는 거 들어봤니?
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첼로 소리인지 아코디언인지.
멀리서 오는 밝고 얇은 소리에
새벽 안개가 천천히 일어나
잠 깨라고 수면에서 흔들거린다.
아, 안개가 일어나 춤을 춘다.
사람 같은 형상으로 춤을 추면서
안개가 안개를 걷으며 웃는다.
그래서 온 아침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우리를 껴안는
눈부신 물의 메아리
=========
+ 밤 노래 4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오르는 몇 개의 구름.
밤에는 단순한 물기가 되어 베개를 적시는 구름.
떠돌던 것은 모두 주눅이 들어 비가 되어 내리고
내가 살던 먼 갈대밭에서 비를 맞는 당신.
한밤의 어두움도 내 어리석음 가려주지 않는다.
--------------
+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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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회
1
드뷔시의 등에
눈이 또 내린다.
1950년대의 막역한 친구들이
골방의 외로움을 털고 일어나
백합을 본다.
젊은 여자는 대체로
동양이고 서양이고
나신이 더 매력적이지만
백합보다 어린 금발의 꽃을
나는 고정시킨다.
2
청년이 된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크가
음악회장을 빠져나와
바이올린 모양의 정구채로
창창하게 정구를 친다.
나는 결정적으로 대결한다
--------------
+ 自畵像
흰색을 많이 쓰는 화가가
겨울 해변에 서 있다.
파도가 씻어버린 화면에
눈처럼 내리는 눈,
어제 내린 눈을 덮어서
어제와 오늘이 내일이 된다.
사랑하고 믿으면, 우리는
모든 실체에서 해방된다.
실패한 짧은 혁명같이
젊은이는 시간 밖으로 걸어나가고
백발이 되어 돌아오는 우리들의 꿈,
움직이는 물은 쉽게 얼지 않는다.
그 추위가 키워준 내 신명의 춤사위.
========6
+ 아침 출근
이를 닦는다.
지난밤을 닦아낸다.
경황 없이 경험한 꿈들을
하얗게 씻어낸다.
모든 밤의 장식을 씻어낸다.
밥상 앞에서도
허황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동작으로
숟가락에 담는 현실.
출근, 출동 혹은 충돌!
하루의 모든 충돌이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상처가 만져지기 시작하는
우리들 나이의 이마.
피 흘리지 않고 모든 충돌이
불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
+ 여름 편지
무모한 여름이여.
꽃들은 여기저기서
책임도 지지 못할
임신을 하고,
풀도, 나무도, 나도
여름이면 도둑처럼
지붕 위로 올라갔었다.
지붕 위의 하늘은
몇 개쯤이던가.
애매한 맹세를 은근히
사방에 흘리면서
날개 빠른 새가 되어
사방을 들뜨게 했다.
아, 정말 들뜨게 했다.
모든 약속이 아름답게
향기처럼 우리를 울렸다.
궁색한 여름이여.
우리가 믿은 하늘은
구름처럼 희고
트럼펫 소리는 높고 낮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잠속에 내린 소낙비가
여름을 적시고
피부에 남은 물기가
차갑게 외면할 때까지
우리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파랑새도 굴뚝새도
돌아가야 할 길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해부터
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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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의 강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어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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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의 눈
가을이 첩첩 쌓인 산속에 들어가
빈 접시 하나 손에 들고 섰었습니다.
밤새의 추위를 이겨냈더니
접시 안에 맑은 이슬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슬은 너무 적어서
목마름을 달랠 수는 없었습니다
하룻밤을 더 모으면 이슬이 고일까,
그 이슬의 눈을 며칠이고 보면
맑고 찬 시 한 편 건질 수 있을까,
이유 없는 목마름도 해결할 수 있을까.
다음 날엔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이슬 대신 낙엽 한 장이 어깨에 떨어져
부질없다, 부질없다 소리치는 통에
나까지 어깨 무거워 주저앉았습니다.
이슬은 아침이 되어서야 맑은 눈을 뜨고
간밤의 낙엽을 아껴주었습니다.
ㅡ당신은 그러니, 두 눈을 뜨고 사세요.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위도 보세요.
다 보이지요? 당신이 가고 당신이 옵니다.
당신이 하나씩 다 모일 때까지, 또 그 후에도
눈뜨고 사세요. 바람이나 바다같이요.
바람이나 산이나 바다같이 사는
나는 이슬의 두 눈을 보았습니다. 그후에도
바람의 앞이나 바다의 뒤에서
두 눈 뜬 이슬의 눈을 보았습니다
=========
+ 잠시 전에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땀이 되어 나를 비집고 나온다.
표정 순하던 내 얼굴들이
물이 되어 흘러내려 사라진다.
내 얼굴은 물의 흔적이다.
당신의 반갑고 서글픈 몸이
여름 산백합으로 향기로운 것도
세상의 이치로는 무리가 아니다.
반갑다. 밝은 현실의 몸과 몸이여,
아침 풀이슬에서 너를 만나고
저녁 노을 속에 너를 보낸다.
두 팔을 넓게 펼치면, 어디서나
기막히게 네가 모두 안아진다.
언제고 돌아갈 익명의 나라는
지금쯤 어디에서 쉬고 있을까.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 또, 떠나고 -.
-------------------------
+ 축제의 꽃
가령 꽃 속에 들어가면
따뜻하다.
수술과 암술이
바람이나 손길을 핑계 삼아
은근히 몸을 기대며
살고 있는 곳.
시들어 고개 숙인 꽃까지
따뜻하다.
임신한 몸이든 아니든
혼절의 기미로 이불도 안 덮은 채
연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깊이 잠들어버린 꽃.
내가 그대에게 가는 여정도
따뜻하리라.
잠든 꽃의 눈과 귀는
이루지 못한 꿈에 싸이고
이별이여, 축제의 표적이여.
애절한 꽃가루가 만발하게
우리를 적셔주리라.
------------------
+ 토요일 밤
토요일에 마신 술은
일요일에 일어나 떠나가리.
끝끝내 회상은 병이다.
자정에 끝나는 대화.
아버지의 부고는
전보 한 장으로 끝내고
나도 아버지가 되고 보면
인생은 참 간단하구나.
정확히 계량되는
저 바람의 양만큼
내 신체에 묻은
당신의 피.
창밖에서는 때 아니게
낮은 음성의 나뭇잎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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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에서
길고 황망한 객지 생활을 떠나
도착한 나라여.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린 나이에
지척이 어두운 장님이 되고
항구에는 해묵은 파도만 쌓여 있구나.
새벽 출항의 뱃머리들은
이제 다, 잘들 있거라.
고통은, 말 많은 사랑 중에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을
씻어버린다고 했지.
씻기고 찢어진 항해의 뒷길.
바람에 휩싸인 가로등 몇 개만
귀환을 기억해주는구나.
고통만이 희미하게 불빛이 되어
얼굴 없는 사랑을 비춰주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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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아득한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 오르는
화가 마띠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 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 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에 부쳐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냄새 가볍게 껴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흐리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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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 속에 누워서 한 백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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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이야기
겨울은 어떻게 오던가.
빈 뜰에 이른 어두움 내리고
빛나던 江물 소리 그치고
그 뺨에는 하얀 성애.
의정부행(議政府行)이었지,
뜻밖에도 눈이 내릴 때
마지막 밤 버스에
흔들리던 요한 계시록,
밤새 눈을 맞는
효부리천서씨지묘(孝婦利川徐氏之墓)
선종하는 노인의 웃음 끝에도
한 줄씩 조용한 눈물.
그 눈물의 속도처럼 아직
겨울은 혼자서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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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에서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 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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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구래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 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속 깊이 숨은 것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 몸의 상처를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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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그리기
당신이었군.
아직도 기다려 준 이.
가위 눌린 꿈 속 헤맬 때
창백한 미명의
창 밖에서 우는.
조금씩 더 번져가는
단순한 소리의 울림이여.
촉감이나 몸짓으로
그대를 사귀지 않았다.
당신이었군.
아직도 기다려 준 이.
가보지 못한 혼백의 나라에서
몸에 맞는 빈방을 찾으리라.
공기의 파도를 타는
확신의 표정.
꽃잎의 끝이 천천히
그 색을 버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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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그리기 4
1.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외롭겠지만
마침내 혼자 살기로 결심한 나무.
지난 여름은 시끄러웠다.이제는
몇 개의 빈 새집을 장식처럼 매달고
이해 없는 빗소리에 귀기울이는 나무.
어둠 속에서는 아직도 뜬소문처럼
사방의 새들이 날아가고,유혹이여.
눈물 그치지 않는 한 세상의 유혹이여.
2.
요즈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나무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큰 가지가 잘려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잠시 눈을 주는 산간의 바람도
지나간 후에야 가슴이 서늘해온다.
인연의 나뭇잎 모두 날리고 난 후
반 백색 그 높은 가지 끝으로
소리치며 소리치며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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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그리기 5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혼자서 멀리 떠나야만
길고 편한 잠 이룰 수 있는 것 알면서
땅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낙엽이 있다면 어쩌겠냐.
바람은 밤낮으로 거칠게 불어대고
겨울이 되기 전에 땅이 되어야 하는
약속의 시간을 어긴다면 어쩌겠냐.
언제 우리 마음을 완전히 풀어놓고
언제 인연의 수갑을 두 팔에서 풀어놓고
정신 없이 밀린 잠을 잘 수 있으랴.
마지막 날의 그림을 그린다.
마무리하던 나무를 지우고, 그 위에
모든 색깔을 다 지우고
짧고 간단한 향기를 그린다.
편안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나무 곁에 서 있는 향기가 되겠지.
여기 있다고 말할 것도 없고
생각도 없이, 만질 것도 없이
밤낮으로 보고만 있으면 편안하지 않겠냐.
지나간 날들의 많은 영혼이 돌아오면
우리들의 빈집을 그냥 내어주고
가방 가득히 들고 다니던 사랑도
우리들 긴 잠 속에 놓고 오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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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해년(己亥年)의 강(江)
슬픔은 살과 피에서 흘러 나온다.
기해(己亥) 순교(殉敎) 복자(福者) 최창흡
이 고장의 바람은 어두운 강(江) 밑에서 자라고
이 고장의 살과 피는 바람이 끌고 가는 방향(方向)이다.
서소문(西小門) 밖, 새남터에 터지는 피 강(江)물 이루고
탈수(脫水)된 영혼은 선대(先代)의 강(江)물 속에서 깨어난다.
안 보이는 나라를 믿는 안 보이는 사람들.
희광이야, 두 눈 뜬 희광이야,
19세기 조선의 미친 희광이야,
눈 감아라, 목 떨어진다, 눈 떨어진다.
오래 사는 강(江)은 향기 없는 강(江)
참수(斬首)한 머리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한 나라의 길고 긴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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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불의 율동
─잭슨폴락 전시회
많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것보다 더 아픈.
황홀하고 어지러운 밤낮의 취기에서
뛰어나가 헤매며 머리 부딪혀 피 흘리는
맹목의 밤벌레의 울음처럼, 착각처럼
허기져서 목숨 털어내는 날개들의 춤.
한순간에 타 죽어 버리는 순교의 폭발처럼
뜨거운 열망의 거부처럼, 절망의 혼돈처럼
너무도 대상이 없는 도시를 채워가는 길.
어려운 길들의 생애처럼, 버려진 기도처럼
그 길에서 떨어져내린 침묵처럼, 우수처럼
별들이 환한 밤에는 두 손에 느껴지는 네 몸.
숨어 사는 작은 꽃의 소용돌이 흐트러짐.
내일은 또 다른 색깔의 아픔이라고 했던가,
누워 있는 넓은 화폭에 다시 붙는 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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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에서
목욕탕에서
물이 물을 씻는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물을 비빈다.
당신의 부드러운
몸을 비빈다.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겨울에 보이는
육신(肉身)의 굴곡(屈曲).
명확(明確)히 보이지 않는 외로움.
목욕을 마치면
비 마르는 주일(主日) 오후(午後)에
명륜동(明倫洞) 골목을 빠져 나가는
무지개같이,
다섯 색깔 정도의 무지개같이
가볍고 산뜻한 현기증(眩氣症)같이.
물이 물을 씻는다.
투명(透明)한 물이
투명(透明)하지 않은 물을
비빈다.
시간(時間)의 과거(過去)와 지금이
속살거리는 목욕물 소리,
내 육신(肉身)의 모든 부분이
차고도 투명한 물이 다시 되어
명륜동(明倫洞) 2가(街)나 3가(街)에 내리는
한겨울의 눈.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지금 체중(體重)에도
남아 있는 온기(溫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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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묵시록
잠에 빠져서, 잠의
긴 강을 헤엄치며 허우적거리며
벽 한 구석을 더듬어 만지다
문을 열고 얼결에
꿈의 빈 방으로 들어서는 것은
그 공간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신기하여라, 내 잠 속에 가득한 생명.
꿈으로 들어가는 많은 길,
세상의 생사와는 관계없는 교유(交遊)가
나를 할 수 없이 숨차게 하네.
우리가 믿고 있는 진정은 어디쯤인가.
이 꿈과 저 꿈을 밤새 오가며
언제서야 당신 방을 발견할 수 있을지
그 기대 속에 오늘도 잠을 설치느니
녹슬어 가는 희망, 흔들리는 편견이여.
늘 밝고 아름다웠던 이 세상의 소문은
지상의 마지막 잠에서 당신 방을 찾는 것,
반가움의 긴 포옹으로 함께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은 얼마나 반갑고 화려할 것인가,
우리는 또 얼마나 힘차게 뛰어 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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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긴 江
며칠 동안 혼자,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 사이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가는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깊고 여유 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몸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 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법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 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갑옷의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빛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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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길들이기 3
여자의 젖꼭지는 젖먹이들의 명줄이지만,
남자의 젖꼭지는 무슨 소용일까. 쓸데없는 남자의
젖꼭지는 염색체의 결함 때문이라는군.
인간이 처음 수태 되었을 때는 모두가 여자라는 거야
수태 후 몇 주일이 지나서 갑자기 중간에 남성이 된다는 거지.
그 후의 아홉 달은 호르몬이 남자를 완성시키지만, 처음 있던
젖꼭지는 다 지우지 못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었다구?
우리 사이에 있는 손과 입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웃고
두 얼굴이 하나 되어
피카소의 그림처럼 예쁘다
반쯤 비어 있는 사람이 예쁘다.
다리와 다리가 껴안고
둥근 피부와 굴곡의 피부가 섞인다.
남자는 처음에는 여자였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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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길들이기 8
사람이 죽는 순간 21그램의 몸무게가 줄어든단다. 무거운 어른도 마른
여자도 똑같이 동전 다섯 개의 무게가 죽는 순간에 줄어들고,
영화에서는 그것을 사랑의 무게라고 했다. 살아 있을 때는 사랑할 수 있지만
죽으면 사랑은 딴 사람에게 가버린다. 그러면 그 21그램은 생명의 무게도 될까.
죽는 순간에 몸을 떠나는 생명, 몸을 떠나는 무게, 옆에서 누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영혼의 무게다.
몸이 죽으면 살아 있던 영혼이 죽은 몸을 떠난다. (아니면 그냥 탈수 현상인가.)
사랑이든 생명이든 영혼이든
죽은 사람의 몸에서 풀려나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무게여,
멀리 또는 가깝게 공중을 오가다
숨소리로 만나면 뭉개여 구름도 되고
겨울의 너에게는 눈발 되어 날린다.
그렇구나, 뼈저리게 그리운 무게여
내리는 비를 보면 빰부터 젖고
눈밭을 지나야 네 몸에 이른다.
사랑이든 생명이든 영혼이든
한번쯤 혼자가 된 너를 만나고 싶다.
혼자 있는 시간도 만나고 싶다.
눈썹 긴 야생의 노란 들꽃들,
나이 들어 마디마디 아픈 두 손을 가리고
이제 알겠다, 왜 저 꽃이 흐느끼고 있는지
바람 같은 형상으로 스쳐가는 것 보며
아쉬운 한기로 왜 고개 숙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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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날의 질문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겨울바람에 피부가 터진
말채 나무가 대답도 없이 웃는다.
꿈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환갑 넘은 바람 몇 개가 일어나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게으른 열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며
낮은 하늘을 흔들어댄다.
이 추위를 보내면 한 세월이 가고
하얀 말채 나무 꽃이 온몸을 덮는다니
그때면 내 뻣속에 감추었던 우수의 철책 거두고
정처 없던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지.
늙은 새 한 마리가 날갯짓 멈추고
얼어버린 하늘을 겨우 넘어가는가,
하늘이 늙은 새를 안아주고 있는가.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완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는 것도
빈 말채 나무에서는 보이지 않고
맑고 푸르른 유혹의 발걸음이
겨울이 끝나는 날처럼 따뜻하구나.
===============
+ 그레고리안 성가
새벽부터 장대비 내리는 휴일,
오래 계획했던 일 취소하고
한나절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다.
장엄하고 아름다워야 할 합창이
오늘은 슬프고 애절하게만 들린다.
창문을 열면 무거운 풍경의 빗속으로
억울하게 참고 살았던 혼들이 떠나고
그 몸들 다 젖은 채 초라하게 고개 숙인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여, 이제 포기하겠다.
당신이 떠나는 길이 무슨 인연이라고 해도
라틴어로도, 또는 어느 나라 말로도 거듭
용서해달라는 노랫말이 아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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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고리안 성가 2
저기 날아가는 나뭇잎에게 물어보아라,
공중에 서 있는 저 바람에게 물어보아라,
저녁의 해변가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갈매기 몇 마리, 울다가 찾다가 어디 숨고
생각에 잠긴 구름이 살 색깔을 바꾸고
혼자 살던 바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해변에 가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다.
파이프 오르간의 젖은 고백이 귀를 채운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짜가운 아멘의 바다,
밀물결이 또 해안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나도 낮은 파도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멈추고 석양이 푸근하게 가라앉았다.
입다문 해안이 잔잔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도 떠도는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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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고리안 성가 3
중세기의 낡고 어두운 수도원에서 듣던
그 많은 총각들의 화음의 기도가
높은 천장을 열고 화음을 만든다.
하늘 속에 몇 송이 연한 꽃을 피운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멀고 하염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끌고 긴 차표를 끊는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심을 빠져나와
빈 강촌의 햇살 눈부신 둑길을 지난다.
미루나무가 춤추고 벌레들이 작게 웃는다.
세상을 채우는 따뜻한 기적의 하루,
얼굴 화끈거리며 지상의 큰 눈물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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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꽃으로 서서
소담스런 꽃병에
나도 한 가지 꽃으로 서서
감빛의 꽃병
감빛의 연연한 노래 속에 서서 보면
우리는 지금도
끝없는 이주민이었구나.
얼마는 꿈 속을, 구름 속을,
얼마는 음악 속을
그리하여 얼마는 정착 속을 헤매는
끝없는 이주민이었구나.
다정한 친구여, 보려무나.
살얼음 속에
떨고 섰는 비석
어질도록 고운 비석 앞에서
나는 사소한 모든 생활을
고백해야겠다.
퍼붓는 눈보라 속에서, 뙤약볕 속에서,
낙엽 속에서 눈발 속에서
비석은 그 오래인
묵시와 염경.
지금 모든 것은 나에게 멀어져가고
있다. 웃으면서 쳐다보는 거울 앞에서,
하나씩 죽어가고 있다.
보려무나. 다정한 친구여,
비 씻기운 하늘에서
마침 노을은 피어나 우리를 놀래듯이
그간에 나는 꽃으로 서서
보고만 있었구나.
나도 한 가지 꽃으로 서서
기꺼이 흔들려 보노라면
우리는 지금도
끝없는 이주민이었구나.
=================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봄밤에 혼자 낮은 산에 올라
넓은 하늘을 올려보는 시간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별들의 뜨거운 눈물을 볼 일이다
상식과 가식과 수식으로 가득 찬
내 일상의 남루한 옷을 벗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밤,
별들의 애잔한 미소를 볼 일이다.
땅은 벌써 어두운 빗장을 닫아걸어
몇 개의 세상이 더 가깝게 보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느린 춤을 추는
별밭의 노래를 듣는 침묵의 몸,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당신,
맨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오랫동안 별을 싫어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인지 너무나 멀리 있는 현실의 바깥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안쓰러움이 싫었다. 외로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부 산맥의
높은 한밤에 만난 별들은 밝고 크고 수려했다. 손
이 담길 것같이 가까운 은하수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 맑은 별들의 숨소리도 정다웠다.
사람만이 얼굴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옛날에는 아무데서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
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요즘음, 사람들
은 더 이상 별을 믿지 않고 희망에서도 등을 돌리
고 산다. 그 여름 얼마 동안 밤새껏, 착하고 신기
한 별밭을 보다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죽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기
도 했다.
사랑하는 이여,
세상의 모든 모순 위에서 당신을 부른다.
괴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아라
순간적이 아닌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게도 지난 몇 해는 어렵게 왔다.
그 어려움과 지친 몸에 의지하여 당신을 보느니
별이여, 아직 끝나지 않은 애통한 미련이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사는 기쁨을 만나라.
당신의 반응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나도 당신의 별을 만진다.
__________ * 54
길
새
가을
갈대
--------
깨꽃
귀향
기도
기적
--------
내 집
대화
무용
물빛
-------
물빛 6
박꽃
밤비
변명
--------
가을산
간절한
낚시질
메아리
----------
밤 노래 4
방문객
음악회
자화상
-----------
아침 출근
여름 편지
우화의 강
이슬의 눈
-------------
잠시 전에
축제의 꽃
토요일 밤
항구에서
---------------
가을, 아득한
강원도의 돌
겨울 이야기
과수원에서
---------------
꿈꾸는 당신
그림 그리기
그림 그리기 4
그림 그리기 5
----------------
기해년의 강
들불의 율동
목욕탕에서
밤의 묵시록
------------------
이 세상의 긴 江
잡담 길들이기 3
잡담 길들이기 8
추운 날의 질문
--------------------
그레고리안 성가
그레고리안 성가 2
그레고리안 성가 3
나도 꽃으로 서서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__________
마종기 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