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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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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시 +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 등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 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 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이 되..
이형기 시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 + 등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 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 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이 되어 함께 살..
이승훈 시 2 + 가뭄 서리태 콩을 심자 하니 물이 없다고 뻐꾸기 애절하다 가뭄이 몇 달째 이어지니 밭에는 흙바람이 분다 비틀어지는 풀을 갈아서 엎어놓은 거친 기다림 뻐꾸기 목청 따라 눈이 먼 콩 눈 어느 노여움이 비의 가슴에 땡볕의 솥을 걸었나? 할 수 있는 한 가뭄의 마음 달래고 짐대라도 마을 어귀에 모시고 귀한 손님 맞아야 하지 않을까? 늑골에서는 핏물이 고이는데 한 마지기 비탈밭에서는 눈물 자국도 희미하다 ---------- + 가을 하아얀 해안이 나타난다. 어떤 투명도 보다 투명하지 않다. 떠도는 투명에 이윽고 불이 당겨진다. 그 일대에 가을이 와 머문다. 늘어진 창자로 나는 눕는다. 헤매는 투명, 바람, 보이지 않는 꽃이 하나 시든다. (꺼질 줄 모 르며 타오르는 가을.) ---------- + 격언 난 시..
이승훈 시 + 강 문득 돌을 던진다 아마 나를 던진 것이리라 그대 뜻이라면 할 수 없지 중얼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누가 알랴 -------- + 너 캄캄한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만 났을 때도 캄캄했다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났고 캄캄한 밤 허공에 글을 쓰며 살았다 오늘도 캄캄한 대낮 마당 에 글을 쓰며 산다 아마 돌들이 읽으리라 ------- + 닭 물고기가 되기도 하고 통곡이 되기도 한다 아니다 닭은 몰려오는 비행기 저렇게 굶주리는 비행기 하아얀 닭은 하아얀 물고기 하아얀 통곡 온통 고독하다 비행기가 몰려온다 굶주림이 몰려온다 나는 방 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러면 방안에 가득 차는 하아얀 닭 들이 밤새도록 푸드득거리고 나도 덩달아 푸드덕거린다 ------- + 숲..
오탁번 시 # 오탁번 시 + 봄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동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 +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 + 기차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
유안진 # 유안진 시 + 꿈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 따라 궂은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 +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임영조 임영조 시 -------------------------- + 화려한 오독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은자가 몸소 나와 배밀이하랴 쉬파리 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육두문자로 ------------------------- + 저승꽃 핸들 잡고 차 몰다 본다 가을볕에 선명히 드러난 내 손 드문드문 손등에 핀 꽃들을 본다 이젠 탐욕도 열도 식는 나이에 어..
이성선 이성선 시 + 풀잎의 노래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상에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늘에 꽃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대 안에 돌아와 계시니 신의 음성이 계시니 깨어 노래하는 자와 함께 있다 그대를 버리지 못하여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등을 켜 주니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높고 찬란히 사는 별을 본다 하늘에 몸 바치고 살아가는 자여 사랑을 바치는 자여 그대 곁에 내가 있어 깊은 밤 풀잎 되어 운다 ------------------------------ + 유년기의 자화상 학질을 되게 앓던 날 새벽 할머니는 정한 뽕잎 하나 따서 정낭 귀틀에 깔고 그 옆에 나를 앉혀 혀로 뽕잎을 세 번 핥게 하신 후 다시 나를 업고 해 뜨는 봉우리 까마득한 바위 끝에 앉히고 내 머리 위에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