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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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 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 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 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 뒤에 숨어 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 몸이 되어 함께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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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적막강산(寂寞江山)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日常)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모(日暮).....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면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正座)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淸明)과 불안(不安)
기대(期待)와 허무(虛無)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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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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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1.
머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 오는 우리들의 체온......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2.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와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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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로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 움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 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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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綠陰)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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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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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 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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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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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가에서
물을 따라
자꾸 흐를라치면
네가 사는 바닷말에
이르리라고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편지하듯 이렇게
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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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편지
구식이긴 하지만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수동이든 전동이든
편리한 타자기론 한숨이 배지 않아
쓸 수 없는 편지
그래서 꼭 쥔 연필 한 자루
입 맞추듯 때때로 침을 묻혀가면서
글씨야 예뻐져라 또박또박
또박 또박이 제깍제깍으로 바뀌어
밤을 새는 편지
답장은 없다 다만 창밖에
스산한 찬바람이 낙엽을 굴린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쓰는 편지
그것은 타자 쳐서 사진식자로 인쇄하는
홍보용 인사장이 아니다
일대일이다
이쪽도 혼자 저쪽도 혼자
실은 저쪽한테 묻지도 않고 이쪽이 혼자
또박또박 제깍제깍 밤을 새우는
지금도 창밖에는
답장 없는 스산한 찬바람
낙엽이 굴고 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쓸밖에 없는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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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상정사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 내 작은 가슴을 고이 스쳐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뚝뚝 져버린 듯이
한없이 나를 울리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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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모스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면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는 육신
머리를 막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리 섬 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였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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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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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겨울의 눈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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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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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_______________ *18편
길
등
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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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그대
낙화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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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호수
강가에서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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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정사
코스모스
비 오는 날
그해 겨울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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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인 마당/시인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