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안진 시
+ 꿈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 따라
궂은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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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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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 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러운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 빛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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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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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나님
그로 하여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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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처럼 남을 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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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정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랑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은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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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꽃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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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꽃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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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절초
들꽃처럼 나는
욕심 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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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사람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이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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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국화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랏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띠고
마중 나오신 성녀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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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붙이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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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달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 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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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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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기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 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 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 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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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랑
나 혼자서 정리하고
나 혼자서 용서하며
얼었다가 풀렸다가
한 겨울도 깊어갑니다
비바람이건 눈보라이건
나 혼자의 미친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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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의 별
Ⅰ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 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 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Ⅱ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 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Ⅲ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 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Ⅳ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 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Ⅴ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 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 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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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에게
검푸른 어둠
그 먹물 속에서
어여 나오기만 혀어봐아
먹향기 진동할 거야
묵란(墨蘭) 한 대궁 솟아 필 거야
눈 오신 이 겨울이
한 장 화선지로 기다리고 있잖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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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소망 하나
생각날 때 전화할 수 있고
짜증날 때 투정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퇴근길이 외롭다고 느껴질 때
잠시 만나서 커피라도 한잔 할 수 있고
가슴 한아름 아득한 미소도 받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거울 한번 덜 봐도 머리 한번 덜 빗어도
화장하지 않은 맹숭맹숭한 얼굴로 만나도
오히려 그게 더 친숙해 져서
이쁘게 함박 웃음을 웃을 수 있고
서로 겉모습 보다는
둥그런 마음이 매력이 있다면서
언제 어디서 우연히 길을 가다가
은행 가다가 총총히 바쁜 걸음에
가볍게 어깨를 부딪혀서
아! 하고 기분 좋게 반갑게 설레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내 열 마디 종알거림에 묵묵히 끄덕여주고
주제넘은 내 간섭을 시간이 흐른 후에
깨우쳐 주는 넉넉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가끔씩은 저녁 값이 모자라
빈 주머니를 내 보이면서 웃을 줄도 알고
속상했던 일을 곤드레 술에 취해
세상에서 큰소리 칠 줄도 알고
술값도 지불케 하는 가끔은 의외한 면이 있는
낭만스러운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수고스러움을 늘 감사하고
형제들의 사랑을 늘 가슴깊이 새기며
자신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거기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
+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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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해지는 날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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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지는 날에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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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있기에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
+ 그림자를 팔다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웃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퉁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것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지
흉내 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監視者)가
썩어 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 내 넋인 줄 몰랐지
이럴 순 없다고 달려가자
그는 어느새 반대쪽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한 번 더 뒤돌아섰을 때는
출구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고작이었고
잘 가라고 흔들어대는 손들 사이로
한 번 더 눈길이 마주쳤던가
나는 이미 절반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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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지 않은 말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 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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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 가는 길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힌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맨발로
뜨겁게 녹여 가시란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 진 흘려서
자욱 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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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고백
먼 어느 날 그대
지나온 세상 돌이켜 제일로 소중했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당신이라 말하겠습니다
먼 어느 날
꽃잎 마저 어둠에 물들어
별리의 문 닫힌 먼 어느 날
그대 두고 온 세상 기억 더듬어
제일로 그리웠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음성 들리면
나는 다시 주저 없이 그 사람
당신이라 대답하겠습니다
혼자 가는 길 끝에
어느 누구도 동행 못하는
혼자만의 길 끝에 행여 다음 세상 약속한 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겐 늘 안개 같은 이름
당신을 말하겠습니다
당신 사연 내들은 적 없고
내 사연 또한 당신께 말한 적 없는 그리운 이
세월 다 보내고 쓸쓸히 등 돌려 가야 하는
내 막다른 추억 속에서 제일로 가슴 아픈 사랑
있었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내 마지막 한 마디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고백하겠습니다.
================
+ 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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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는 연습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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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홀한 거짓말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
+ 겨울을 기다리며
겨울이 오면
나는
바람이 될 거야
더는 못 참는 침묵에서
더는 못 감출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는 목소리가
밤낮 주야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 거침없이
목놓아 외쳐대는 북풍의 목청이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에
미쳐버린 겨울바람
그 목소리 될 거야, 되고 말 거야.
==============
+ 날마다 서산 간다
나는
올삐미 부헝이 박쥐 호랑이...... 의 친인척
우리는 서로의 소중한 일부라서
낙조를 보러온 구경꾼들 속에
일출을 보러온 내가 있다
졸업이 시작이라는 뜻이 듯이
강물이 끝나는 거기부터 바다이듯이
나의 아침해는 일몰에서 떠오른다
나에게는 서해가 서해(瑞海)이고
서산(瑞山)은 서해보다 더 서쪽에 있다
구경꾼들 의 서쪽보다 더 서쪽인 나는
날마다 서산 간다
서해 간다
일출보러 간다
----------------------
+ 배꼽에 손이 갈 때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 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도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 송년에 즈음하면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 년이 한 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덤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
+ 낙엽 쌓인 길에서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
+ 휘바람을 불어 다오
이 허황된 시대의 한 구석에
나를 용납해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 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망아
휘파람을 불어 다오
-------------------------
+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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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워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려 쌓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주는
사람과 얘기 꺼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
그래서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노라
앞으로 절대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히 느낌표를 채워 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의 재산이라고
우리만이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은 못 되어도 일등은 못했어도
출세하지 못했어도
고루고루 갖춰놓고 살지는 못했어도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었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 영원한
느낌표로 자욱져 있듯이
나도 그대 가슴 어디에나
영원한 느낌표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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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내 청춘의 가지끝에
나부끼는 그리움을 모아 태우면
어떤 냄새가 날까
바람이 할퀴고간 사막처럼
침묵하는 내 가슴은
낡은 거문고줄 같은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이별의 옷자락에 얼룩 지는데
애정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아
때 없이 밀려오는 이별을
이렇듯 앞에 놓고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안을 수 있나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 사랑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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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만 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떤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러운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 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남, 거봉...
새댁네 모두는 아이 아닌 거북새끼를 낳으니
거북처럼 크게 되어 돌아오는 정기 서린 길승지 명당마을
어떤 가뭄에도 풍년농사가 된다는 거북뜸을 들녘으로 농사지어
사는 농촌마을
태풍과 장마에도 거북뜸 올벼는 잘도 익은 풍년
도깨비와 불귀신과 서낭신도 거북을 닮아서
어른 아리 없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지어 보태는 이야기꾼 마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 없어져도
고향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 고향다웁고
알 수 없는 영험스런 힘으로 타관 땅 어디에서도 굳세게 살아
성공하여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로 그런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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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 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떨이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 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 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국소리 기다리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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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봄
키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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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사리
작정
갈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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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구절초
눈사람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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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조각달
가을 편지
아침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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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사랑
약속의 별
절망에게
내 소망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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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가는 소리
착해지는 날
꽃 지는 날에
멀리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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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팔다
말하지 않은 말
세한도 가는 길
아름다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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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한 주머니
침묵하는 연습
황홀한 거짓말
겨울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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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서산 간다
배꼽에 손이 갈 때
송년에 즈음하면
낙엽 쌓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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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바람을 불어 다오
실패할 수 있는 용기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워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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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시인 마당/시인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