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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아 ~

임영조

임영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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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오독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은자가 몸소 나와 배밀이하랴
쉬파리 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육두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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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꽃

핸들 잡고 차 몰다 본다

가을볕에 선명히 드러난 내 손

드문드문 손등에 핀 꽃들을 본다

이젠 탐욕도 열도 식는 나이에

어느 날 문득 크고 작게

혹은 흐리거나 진하게 핀 꽃

누가 심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피어나 짙어지는 꽃이다

난생처음 보고도 서로 친한 듯

그래도 왠지 마주 보기 어색해

모르는 척 짐짓 외면하고 싶은 꽃

내 살이 그만 흙과 친하려는지

꽃 색깔도 흡사 흙빛 닮았다

마음에 보푸라기 일어나듯

손등부터 넌지시 번지는 무늬

내 생의 말미에 댄 끝동 같은 꽃

하! 나는 여태 이 꽃을 보러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왔구나!

내 몸의 허허로운 양달에

이승에서  마지막 피워보는 꽃

하나 왠지 섭섭하고 쓸쓸한

그래서 내보이기 싫은 꽃

누가 파종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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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꽃 패설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 주고받길래
온통 벌게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까지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런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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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연가 

볼장 다 본 4월도 막가는 하순
나무들 모두 꽃잎 진 상처마다
메롱메롱 푸른 혀를 내밀어
내 하초에도 용용 약 오르는 날
홀연 다시 만난 여자여
노란 파라솔 생글생글 돌리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까지 찾아온
늦바람 난 시골뜨기 꽃이여
아직도 너는 화사하고 젊구나
늘씬한 키에 눈웃음 삼삼하고
간드러진 사투리도 여전하구나
그게 언제였더라?
고향의 동구밖 고샅길에서
남몰래 가슴 두근 마지막 본 게
나는 인제 네 출신을 묻지 않으마
네 아픈 과거도 묻지 않으마
이번 생만으로도 나는 지쳤다
그리하여 네 깊은 씨방 속
그 아늑한 어둠 속에 들어가
간절하고 빛부신 은유로 남고 싶다
내 가슴속 허허로운 뒤란엔
똑 너 닮은 딸 하나 낳아놓고
마실 가듯 이승을 뜨고 싶다
육신을 허물어 중심에 들듯
하얀 털모자 벗어 흔들며
너와 함께 두둥실 세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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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꼬마리씨 하나

멀고 긴 산행 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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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등짝에 해조음 문신 알록달록한
간고등어 한 마리가 점잖게
가스레인지 그릴 속에 누워 있다
불꽃이 온몸을 지글지글 구워도
오늘 같은 다비를 기다렸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다
평생을 무슨 공부로 수신했길래
시뻘건 연옥에서도 고등어는
열반에 들듯 태연할 수 있을까
파란만장 난바다를 헤쳐온 생이 못내
서럽고 억울할 텐데, 육신을 어찌
저토록 마음 편히 보시할 수 있을까
뻣뻣한 몸이 똑 서슬 퍼런 칼 같다
이판사판! 너 아니면 나 죽기식
피비린내 파다한 복수를 꿈꾸는 칼?
죽어서도 몸가짐 의젓한 고등어가
설마 누구를 찌를 마음을 먹었으랴
그렇게 본 내 마음이 멋쩍다
다 익은 살을 곧 뜯어먹을 나보다
등급이 몇 수쯤 위라는 생각
그래서 이름까지 고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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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아래서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 사이 시들시들 검붉게 져도
또 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매미도 목이 쉬어 타는 말복에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는 한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갈을 견뎌온 나는
석 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수사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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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척 없는 봄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에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건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락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 없이 멋대로 발랑 까진 십 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이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배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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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한여름 뙤약빛 아래
하반신이 불구된 아이들이
눈부신 부채춤을 펼친다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싱글벙글 어울려 손에 손잡고
안쓰럽게 돌아가는 화련한 원무

나는 지금 넔나간 사람
너희들의 황홀한 율동을 보며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내 멀쩡한 사지가 부끄럽구나

오냐, 오냐. 장하다
사무치는 슬픔까지 꽃이 된다면
노래쯤은 한 박자 느려도 좋고
동작이야 이따금 틀려도 좋다

저 죄없는 어린것들을
세상에 보내 천형을 내린 것은
신의 마지막 실수였을까? 아니면
스스로 아픈 곳을 채우게 하는
눈물겨운 경이를 시험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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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우리들의 글쟁이 P 씨는
눈도 없고 입도 없다
귀도 없고 코도 없이
오직 촉 하나로 버틴다

깨어 있는 혼과 함께
또박또박 심지를 박아가듯
하얀 벌판을 내닫는 苦行
그의 하혈은 푸르거나 검었다

글을 쓰는 자세는 늘
엄숙하고 삐딱해
더러는 좀 건방져 보이지만
지체는 본래 고매한 書生
교활한 자의 은폐된 혀를 보면
서슬 푸른 캉이 되어 빛난다

조심해! 우리는 요즘
이미 뱉어버린 말보다
혀끝에 숨은 말이 두렵다
화려한 번개 뒤에
내려치는 벼락처럼

절망을 희망과 바꾸기 위해
어둠을 파내다가 지친 밤
문득 수혈을 기다리는
이 시대의 고독한 書生
P 씨의 혈액형은
O형일까? AB형일까?
아니면 Rh마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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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눈에 찰까
하는 짓이 내내 여리고 순한
열댓살적 철부지 아들만 같다
계절은 어느새 저렇게 자라
검푸른 어깨를 으스대는가
제법 무성해진 체모를 일렁거리며
더러는 과격한 몸짓으로
지상을 푸르게 제압하는
6월의 들녘에 서면
나는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
가슴속 기우를 이제 지운다
뜨거운 생성의 피가 들끓어
목소리도 싱그러운 병성기
저 당당한 6월 하늘 아래 서면
나도 문득 퍼렇게 질려
살아서 숨쉬는 것조차
자꾸만 면구스런 생각이 든다
죄지은 일도 없이
무조건 용서를 빌고 싶은
6월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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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장항서 열여섯에 시집와
팔 년 만에 홀로 되신 당숙모
두 남매를 청정하게 키워내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치마폭에 번지는 가을이 붉다

깃을 치던 새들이 둥지를 뜨듯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살고
고향집에 혼자 사는 당숙모
자식들이 함께 가서 살재도
나는 예가 좋다며
무거운 산이 되어 요지부동이더니

하늘 높아 햇빛 부신 이 가을
가난한 낯술에 취해
왠지 기분이 좋아
온종일 벌게진 얼굴로 주정하듯
주정하듯 혼자 웃는 당숙모
아직도 정정하신 말년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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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날리며

연을 날린다
눈 오는 설날 아침
바람이 잘 드는 언덕에 올라
맑은 꿈을 배접 한 연을 띄운다

내 가슴 속 얼레에 감긴
오랜 연모의 질긴 실꾸리
하얀 그리움 스르르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연을 날린다

당기면 당길수록 달아나는 새
끊길 듯 이어지는 정처럼
가늘한 인연의 실 끝을 물고
하늘 멀리 가물가물 치솟는 새여
내 몸 속 핏줄까지 물고 가다오

서설이 내려도 추운 이를 위하여
진정 외롭고 슬픈 이를 위하여
시린 손 호호 불며 얼레를 풀면
한 마리의 상서로운 학같이
튼실한 현을 차고 뜨는 내 사랑

아직도 소식없는 그대여
내가 띄운 연을 보거든
먼 그대 안부를 묻는 줄 알라
내 사무치는 그리움 모조리 풀어
그대 사는 하늘로 띄운 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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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는 배후가 없다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의 동지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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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 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3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란한 부활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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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위하여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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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바라

청계사 극락보전 삼신불 앞에
낯선 새떼들 왁자지껄 붐빈다
네가 곧 부처다
네 마음이 절이다
아무리 일어줘도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신 부처는 문뜩 우담 봐라!
스스로 이마 찢고 꽃을 피웠다
앞뜰 냉이 꽃다지도 덩달아 피고
저 아래 마을에선 입이 싼
풀잠자리 웃음소리 자지러지고
오늘도 무사히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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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를 위하여

살다 보면 문득
나를 잊고 싶을 때가 있다
급행열차 선반에 얹어놓고
꾸벅꾸벅 졸며 가다가
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
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또
나를 살살 유인해
어느 으슥한 술집으로 끌고가
진탕 술이나 먹이면서
주정하듯 함부로 지끌이는 불평과
입 밖에 낸 적 없던 저주까지도
곰곰 새겨듣고 싶을 때가 있다

말이 말을 구속 하거나
재떨이 같은 세상에
꽃씨 부리듯 시를 쓰고 있음을
자각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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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하수인이다

어둠 속에 갇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적의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분신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주목받고 싶은 자의
가장 절실한 믿음은 
최후의 만용일까?
의외의 죽음일까?)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관속에 누워 있지만
한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찬스를 노리고 있다
빛나는 출세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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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어느덧 사십 년 지나
골동품 다 되가는 자물통 하나
묵비권을 행사하듯 늘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뜻 맞는 상대와 내통하면
언제든 찰칵!
꼭꼭 잠가둔 마음을 푼다
천성이 너무 솔직하고 순진해
안 보여도 좋을 속까지
모조리 내보이는 자물통 하나
가슴속에 싸늘한 뇌관을 품고
保守냐? 改革이냐?
목하 고민 중인 자물통 하나
남의 집 문고리에 매달려
알게 모르게 녹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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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를 끓이며

삼복염천 열탕에
비쩍 마른 지체들이
훌렁 벗고 들어앉아 속 끓이더니
마침내 스멀스멀 온몸을 푼다

바로 이땔까 싶게
淨한 마음 기울여
녹차를 따르면 금새
청화잔에 두둥실 만월이 뜬다

먼 산이 우러니듯
비릿한 웃음이 고여
잔 가득 달무리가 번진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런 날은 부디
가슴속 빗장을 풀고 오라
그늘을 지우듯 루즈도 지우고
뜨겁고 진한 그리움이 아니면
목마른 눈빛 하나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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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찾기

출구를 찾는다
한가닥 희망과 만나기 위해
오늘도 낯선 길을 헤맨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가도 가도 출구는 안 보이고
어느덧 하루해가 저문다

혹시나 이 길일까 싶어서
미궁 속을 조심조심 더듬어가면
눈앞을 가로막는 아찔한 절벽
그 까마득한 정상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먼저 와
흰 수염을 만지며 바둑을 두고 있다

___인생의 지름길은 없나요?
___그걸 알면 누구나 詩를 쓰게!


문득 돌아보면 아뿔싸
애초부터 잘못 든 길이잖아?
그래도 후회는 마라
바로 가든 모로 가든
갈 데까지 가보면 안다

저물녘에 당도하는 오솔길
어차피 혼자 가야 할
그 쓸쓸한 길 하나 찾기 위해
우리는 한평생을 그토록
허둥지둥 바쁘게 달려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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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

그게 아닌데
정말 그게 아닌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때 안다는데
철석같이 믿어온 내가 어리석었지
햇빛 부신 지난 봄
화단가에 돋아난 새싹을 보며
틀림없이 국화싹일 거라고
가을에는 꽃 몇 송이 피워줄
국화싹일 거라고 믿어왔더니
키만 멀쑥 자라서
배신의 등을 보인 쑥이라니
예끼,
이 후레자식!
나는 오늘 속죄하듯
겉 다르고 속다른 쑥대를 위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가슴을 치며
빈속이 뒤집히는 꿈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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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판매기

동전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즉시
척척 알아서 작동하는 수전노

돈만 주면 언제든
제 몸속 피까지 파는 사내
그러나 받은만큼 내줄 뿐
덤도 없고 에누리도 모른다

저 낯두꺼운 배금주의자
그가 폐수를 쏟듯 매양
우리들의 빈 컵을 채워준 것은
한 잔의 달콤한 선심
어딘지 좀 꺼림칙한 어둠이었다

알고 보면 네나 내나
자존심이 금가고 혼나간 기계
도시의 한켠에 방치된 채
아무나 눌러도 되는
그래서 얼굴이 닳아 윤나는
한 대의 뻔뻔스런 자동판매기

누굴까?
내 입에 푼돈을 넣고
날마다 제멋대로 조작한 자는
내게서 무엇을 뽑아갔을까?
양심일까? 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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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이 시대의 희한한 聖資
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주었다
밖에서 묻혀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었다

그는 聖職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온 약점을 말없이 닦아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生을 마치는
이 시대의 희한한 聖者

나는 오늘
그에게 按手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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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山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女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牲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生을 키우듯
외로운 섬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잘 했다가
문듟 그대 잠 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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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유월 햇빛 뜨거운 과수원에는
상견례를 막 끝낸 풋내기들이
평화로운 집회를 열고 있다

이따금 푸른 잎 뒤로
은폐된 주먹을 불쑥불쑥 내밀며
풋내 나는 구호를 외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돌팔매를 겨누고 있다

그래 던져라,던져!
보호색 깔고 안주하다가
너무 딱딱해진 고정관념은
가차 없이 깨뜨려야 돼

간밤에는 비바람 심하게 불고
그때 타락한 녀석들은
머리통이 깨어진 체 버려져
부질없이 썩어가는 급진주의자
(익기 전에 떨어진 건
과일이 아니다)

지나 보면 알리라
앞날이 아직 창창한 자는
한여름 햇빛과 천둥 번개 속에서
얼마나 부대끼고 견뎌야
비로소 단물이 드는가를

지난해 이상난동 때문에
올농사는 병충해가 극심할 거라고
과수원 주인은 지레 걱정하면서
농약을 독하게 살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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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절기

밖에는 지금
건조한 바람이 불고
젖은 빨래가 소문 없이 말랐다
생나무가 마르고 산이 마르고
도시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사람들은 늘 갈증이 심해
내뱉는 말끝마다 먼지가 났다
가슴이 마르니까 눈만 커진 체
안부를 물어도 딴전이나 부리며
저마다 귀를 빨리 닫았다

저 멀리 좌정한 산이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하자
온 마을엔 별의별 풍문이 돌고
긴장한 나무들은 손을 들고 떨었다

세상은 이제
누군가 불만 댕기면
활활 타버릴 인화성 물질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날은
단 한 방울 눈물도 보이지 말고
자나 깨나 조심
오나가나 입조심
어쨌거나 요즘은 환절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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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

쩔쩔 끓눈 삼복염천
섬 남 변두리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듯 좌판을 벌여놓고
아무튼 열심히 사는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남이야 뭐라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질펀한 맨땅에 퍼질러 앉아
호호호호 샛노란 웃음도 파는
억척스러운 점례를 보았습니다
더러는 상스러운 이웃과 함께
객쩍은 농담도 좀 주고받으며
아등바등 온몸으로 기어가
아픈 삶을 움켜쥐는 덩굴손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헤어진 지 스물여섯 해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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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란꽃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눈이 와서 조용한 겨울
참 고고한던 女流의 시를 읽는다

세월의 한켠에 비켜서서
칼끝이 푸른 절개를 지켜
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그녀의 눈부신 개화

누구의 사족이나 발문도 필요 없는
저 청정한 변신을 보며
옳거니!옳거니!
나는 다만 무릎을 칠 뿐
허튼 말은 일체 삼가고 싶다

그리고 허락한다면
가장 후한 값으로
그녀의 속 깊은 슬픔
온갖 불행까지 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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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

전생에 지은 죄 중에
또 무슨 업보가 남아
무서운 능지를 당해야 하나

한물간 이 나이에
빼앗길 무엇이 남아
남루한 생에 종지부를 못 찍고
무조건 용서빌 듯 살아야 하나

한때는 나도
제법 튼튼한 갑옷에
가볍고 멋진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기도 했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며
혁명을 꿈꾸기도 했는데

아, 이제 나는
손발이 달아나고
목이 비틀린 채
잔등으로 춤을 추는 피에로
사람이 무섭다

제발 살려달라며
정말 살고싶 다며
치욕스러운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밥줄을 끊고
내내 잠들고 싶다
말세로 초토화된 땅
그 절망의 아침에
환생하듯 조용히 눈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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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이 내렸다
모드들 세상 잊고 잠이 든 사이
계엄을 선포하듯 눈이 내렸다
천황폐하 만세!
맹목의 가미가제식으로
하얀 복면의 인해전술로
겁 없이 뛰어내린 자살특공대
그들은 온 마을을 덮치고
천지를 장악한 채 길을 막았다
함부로 날뛰지 마!
다시는 일으나지 마!
허공을 가르는 채찍소리로
사방을 난폭하게 매도하였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패자
그의 군림은 왜
저토록 위대하고 눈이 부실까?
늙은 제설차 한대가
전갈처럼 엉금엉금 기어와
눈덩이를 힘껏 밀어내지만
정작 밀어낸 것은
꽁꽁 얼어죽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르고 있으리
저 추운 압제 밑에선 지금
새로운 부활을 꿈꾸는 자의
은밀한 역모가 감행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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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오독
저승꽃
동백꽃 패설
민들레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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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꼬마리씨 하나
고등어
배롱나무 아래서
대척없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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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만년필
6월
가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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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날리며
갈대는 배후가 없다
3월
고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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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바라
권태를 위하여
성냥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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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를 끓이며
미로 찾기

자동판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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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과수원
환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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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
한란꽃
풍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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