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탁번 시
+ 봄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동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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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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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 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 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 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울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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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 내가 왜 좋아?
- 그냥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 내가 왜 좋아?
- 그냥
나도
이 말 한번 해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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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 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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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나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에헴, 아빠는 어릴 때
잉크가 어는 방에서 공부를 했다!
아빠는 이글루에서 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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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
미아리 삼양동 산비탈에서
삭월 셋방에 살던 신혼시절
주인여자는 대문으로 출입하고
내 가난한 아내는
담벼락에 낸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쪽문을 열고 부엌을 지나
대여섯 평 좁은 방에서
신혼의 단꿈을 꾸며 살았다
뚱뚱한 주인여자의
짜랑짜랑하는 열쇠소리에 주눅이 들어
사랑을 나눌 때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몇 년 후 장위동에다
전세방 끼고 대출받아서
스무 평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와 나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열쇠고리에 달린
대문 열쇠, 현관 열쇠, 방 열쇠를 보면서
아내는 함박웃음을 웃었다
열쇠고리를 짜랑짜랑 흔들며
당당하게 대문을 따고
우리집을 맘 놓고 드나들었다
열쇠가 늘어날수록
아내의 허리도 굵어지고
아들 딸 낳아 살다가
10년 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 아니라
열쇠 꾸러미를 분양받은 것 같았다
현관 열쇠, 방 열쇠, 장롱 열쇠, 싱크대 열쇠
화장실 열쇠, 다용도실 열쇠, 장식장 열쇠
그것도 각각 네 개씩이나 되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든 아내는
열쇠에 맺힌 한을 풀었다는듯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토록 자랑스럽던 열쇠도
세월 따라 하나하나 사라지고
이제 아파트도 오피스텔도
디지털 키와 카드 키로 다 바뀌었다
제 집 문을 열 때는
열쇠를 구멍에 찔러 넣고
홱 돌려야 제 맛인데
손끝으로 번호를 톡톡 누르니까
꼭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 같다
열쇠란 열쇠는
몽땅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일까
이순의 저녁나절도 아득히 흘러간 오늘
아내의 방을 여는
사랑의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통 생각나지 않는다.
삭월 셋방 가난했던 그 시절엔
대문을 따는 열쇠는 없었지만
밤마다 사랑의 방을 여는
금빛 열쇠가 나에게 있었는데
이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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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좃나게 내려 부렸다니까!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 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좇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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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새
우리 혼인생활 30년에
밑줄 그을 만한 뜨거운 사랑 없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를 만한
기쁨 없었지만
아내여 미운 아내여
다음 생에서 또 만나
하늘을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날개를 접고
가을 논에 흩어져 있는 햅쌀을
냠냠냠 쪼아먹는
기러기 눈빛을 한
철새나 될까 몰라
아내여 미운 아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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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밭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 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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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강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댓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얀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댓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의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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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처
정월 대보름날 윷놀이 하다가
눈깜짝이 한 씨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그만 쓰러졌다
사람들이 놀라 일으키자
ㅡㅡ뭐여? 왜들 이려?
한마디 하고는 다시 쓰러졌다
동 트자마자 일어나
개 혓바닥같이 생긴 괭이를 들고
논꼬 보러 가던
동네에서 제일 바지런한
조쌀한 한 씨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한 씨 삼우제 날
동네사람들이 모여
경로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가뭇가뭇한 한 씨 얼굴이
술잔 속에
눈부처인 양 언뜻 비쳤다
이승 저승이
입술에 닿는 술잔만큼
너무 가까워서
동네사람들은 함빡 취했다
ㅡㅡ잔 안 비우고 뭐 해유?
한 씨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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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치미
감곡에 사는 여자들이
꽃 피는 원서헌에 놀러 왔다
국수 말아 점심 먹고
술기운이 노을빛으로 물들 때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내 옆에 선 여자가 살갑게 말했다
-이래도 되죠?
내 팔짱을 꼭 꼈다
-더 꼭!
사진 찍는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때면 나는
마냥 달콤한 생각에
폭 빠진다
-나랑 사랑이 하고 싶은 걸까
헤어질 때
또 팔짱을 꼭 꼈다
나는 살짝 속삭였다
-나랑 同寢이 하고 싶지?
속삭이는 내 말을 듣고
그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치미 먹고 싶으세요?
허허, 나는 꼭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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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밭
텃밭에 마늘 두 접을 심었다
친환경 유기농 퇴비와
복합비료를 잘 뿌려주고
육쪽 마늘을 정성껏 심었다
마늘밭이랑에 비닐을 씌우지 않고
솔잎을 긁어다가 덮었다
겨우내 눈 쌓인 마늘밭을 보면서
비닐 대신 괜히 솔잎을 덮어
마늘이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솔잎을 헤치며
강보에 싸인 아기 손가락 같은
여린 마늘싹이
하나도 죽지 않고 쏙쏙 돋아났다
금빛으로 빛나는 마늘밭을
아침마다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꽃샘추위 매서운 날
농사짓는 초등학교 동창이 왔길래
마늘밭 자랑을 한참 했다
- 야, 마늘밭 좀 봐! 너무 멋지지?
허지만 녀석은 싱겁기만 하다
- 마늘밭이 다 그렇지 뭐!
우리가 주고받는 엉뚱한 말에
앞산 진달래가
꽃봉오리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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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냄새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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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포늪
우포늪이 토해 내는 울음소리를 듣고
귀 밝은 하늘이 내려왔다
그 후 하늘은
1억 4천만 년 동안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영 않고
우포늪에서 살고 있다
흰뺨검둥오리 알이
하늘빛을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미하는 실잠자리들이
물수제비 그리며
우포늪을 간지럽힌다
먼 북극의 빙하가
늦잠 자는 하늘을 깨우느라고
바다로 툭 떨어진다
산란하는 붕어가
물풀 사이로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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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커피
옛날다방에서 그냥 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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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연기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 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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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잠
하늘은
지금도 하늘빛 하늘인데
오작교(烏鵲橋) 까치 비추던
나의 사랑은
광(光) 케이블 다 끊어졌고나
나 이제 그냥
운주사 와불(臥佛) 옆에 나란히 누워
깜깜한 잠에 빠질까 하니
세상의 연인들아
발소리 죽이고 지나가게나
나 이제 그만
한 점 구름 배처럼 타고
저승의 하늘을 저어 갈까 하니
은하계의 뭇 별들아
별빛 아예 비추지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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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어리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ㅡ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화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ㅡ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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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승강장
태백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자작나무 숲이 손 흔드는
삼수령을 지나면
고령지배추밭이 하늘보다 푸른
태백시 삼수동 상사미 마을에
야릇한
버스승강장이 하나 있었다
'버스승강장 권상철집 앞'
근처에 딱히 표시할 만한 것이 없어
개울 건너 토박이 농부의 이름을 딴
버스승강장 팻말이
길가에 앙바틈히 서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찾아간 상사미 마을
권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이름으로 바뀐
버스승강장을 보자
가슴이 찡해졌다
'버스승강장 권춘섭집 앞'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유산인 듯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한
버스승강장 팻말이
검룡소 물 흐르는 개울가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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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잎 앞에서
연잎에 내리는 여름 한낮 빗방울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그리움 따라
연잎마다 크낙 한 손바닥 하나씩 펴고
호수 위에 떠다니는 내 마음 손짓하네
물결 따라 일렁이는 푸른 연잎을 보면
내 눈빛 잠자리 겹눈처럼 밝아지지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때 그 입술은
예쁜 연꽃 봉오리로 아직도 숨어 있네
이른 아침 연잎에 내리는 이슬방울인 듯
마주 보며 피워 올린 첫사랑의 꽃봉오리!
아무도 모르는 물밑 아득한 깊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연꽃!
연잎에 내리는 저녁나절 빗방울인 듯
아직도 눈에 밟히는 그리운 얼굴아
잔잔한 호수 물결 지는 듯 다시 일 때
서늘한 연잎 위에서 푸른 눈썹 떠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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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 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 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냐?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의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가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술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 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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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별에서
너는 어느 별에서 태어났기에
이토록 무서운 광속으로 다가와서
나도 모르는 나의 생애를 불 밝혀 놓고
눈물빛 핏빛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가
겨울 철새 모두 떠난 한강 물결
봄이 오는 소리 선연한 노을 아래
물속 깊이 숨은 누치 보이지 않고
하늘 멀리 떠난 나의 아기는
깃 하나 남기지 않고 나를 울린다
흰 수염 가득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기고 또 잠기지만
아아 또는 오오
이러한 모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내 운명이 벼랑 끝에 홀로 서는 소리
무좀으로 썩어가는 새끼발톱까지도
너의 별에서 날아온 사랑의 빛 앞에
까뒤집어져서 탄로가 났다
나는 전생에서부터 은닉했던 증거 앞에
모두 모두 자백하였다
너의 별이 내뿜는 사랑의 빛은
1초에 우주를 일흔 바퀴씩 돌면서
나의 전생에서부터 오늘 한강 물결까지
완전하게 발가벗기고 있다
오오 자백의 황홀과 나체의 쾌락으로
너의 별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곳에서 살고 싶다
죽고 싶다!
--------------------
+ 죽음에 관하여
1
왼쪽 머리가
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
나뭇가지 휘도록 눈이 내린 세모에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나는 넘어졌다
하루에 링거 주사 세 대씩 맞고
설날 아침엔 병실에서 떡국을 먹었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가
첩자처럼 병실을 드나들었다
수술받다가 내가 죽으면
눈물 흘기는 사람 참 많을까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비로소 저를 미워할까
나는 새벽마다 눈물지었다
2
두통이 가신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듯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뜩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
+ 명사산(鳴砂山)
명사산(鳴砂山) 아득한 모래바람 속에서
긴 잠을 주무시는
혜초 스님을 월아천(月牙泉)으로 모셔다가
서울에서 가져온
마늘쫑 고추장 깻잎 안주 삼아서
곡차 몇 잔 마신다
스님의 잠동무 아주 잘 해온
사막의 계집들도 불러내어
꼭두서니빛 꽃을 피우는
낙타초 가에 앉혀두고
스님한테 옛 사직(社稷)의 흥망을 아뢴다
즈믄 해 동안 잠동무하면서
스님한테 살가운 간지럼 많이나 태운
양젖냄새나는 위구르 계집과
말젖냄새나는 흉노 계집이
정말 갸륵해
월아천(月牙泉) 옥빛 물로 옥가락지 만들어
모래울음 보채는 손가락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준다
-----------------------
+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 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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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가까운 山
더 가까이 보이고
먼 山
더 멀리 보인다
참새 똥 뒤집어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
+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 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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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밤
기차
그냥!
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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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열쇠
폭설
철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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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
겨울강
눈부처
동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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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밭
밥냄새
우포늪
그냥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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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연기
사랑의 잠
벙어리장갑
버스승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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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 앞에서
토요일 오후
너의 별에서
죽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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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鳴砂山)
사랑 사랑 내 사랑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시인 마당/시인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