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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아 ~

이승훈 시 2

+ 가뭄

서리태 콩을 심자 하니
물이 없다고 뻐꾸기 애절하다
가뭄이 몇 달째 이어지니
밭에는 흙바람이 분다
비틀어지는 풀을 갈아서
엎어놓은 거친 기다림
뻐꾸기 목청 따라 눈이 먼 콩 눈
어느 노여움이 비의 가슴에
땡볕의 솥을 걸었나?
할 수 있는 한 가뭄의 마음 달래고
짐대라도 마을 어귀에 모시고
귀한 손님 맞아야 하지 않을까?
늑골에서는 핏물이 고이는데
한 마지기 비탈밭에서는
눈물 자국도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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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아얀 해안이 나타난다. 어떤 투명도 보다 투명하지
않다. 떠도는 투명에 이윽고 불이 당겨진다. 그 일대에
가을이 와 머문다. 늘어진 창자로 나는 눕는다. 헤매는
투명, 바람, 보이지 않는 꽃이 하나 시든다. (꺼질 줄 모
르며 타오르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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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언

난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당신도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우린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니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거야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우린 빈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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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너는 거기 있구나
옛날처럼 내 상처
다스리며 말없이 서 있구나
가을 해 부서지는 길거리에
사금파리 울음 감추고
너는 나를 맞는구나
술 마시고 보낸 밤들
훌훌 털고 10년 만에 문득
버스 타고 내려가면
너는 들국화처럼 피어 있구나
화만 나던 날들이었다고
너와 마주앉아 말하면
모든 화 말끔히 씻기며
눈 내린 겨울 아침
마후라를 하고 찾아가던
골목에 너는 아직도 서 있구나
몸은 야위었지만
하얀 스웨터를 입고
커단 눈으로 웃으며
나를 맞는구나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옛날에 너를 버린 건 나야」
나직이 말해도 너는 웃고만 있구나
가을 해 너무 고운 아스팔트에
말없이 서 있는 너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아
옛날 골목 찾아가면
있는 건 너의 흔적뿐
오오 고향에 있는 건
언제나 고향의 흔적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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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누

비누를 보면 보는 것이고 만지면 만지는 것 손을 씻으면 손을 씻는 것 발을 씻으면 발을 씻는 것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겨울 저녁 난 시를 쓰네 비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네 문득 비누가 다가와 나를 만지네 나는 비누 속으로 사라지네 나도 물거품 비누도 물거품 벗어날 길은 없네 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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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비로소 웃을 수 있고 한가롭게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비가 와도 비가 와도 비
를 맞을 수 있고 서점에 들러도 마음
이 가벼울 수 있고 책들이 한없이 맑
아지는 걸 볼 수 있게 된 건 투명한 책
들 앞에 두렵지 않게 된 건 모두 어제
네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기 때문
이야 네가 있는 곳! 따뜻한 곳! 그곳
으로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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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호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란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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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장미의 흔적 지우고
그 자리마다 장미 옷매무새로
치자꽃이 앉았다.

가는 빗줄기 보드랍게 내리니
어린 사마귀가 바늘보다 커서
잎사귀 뒤로 부끄러워 숨는다

장미꽃 필 때 몰랐던 그 마음
치자꽃 피면서 꿈결이란 걸
구름 꽃 피어나듯 하얀 향기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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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그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는 책상이
많았습니다
그는 책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의자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가 의자에 앉자
그만 의자가 부서졌습니다
[이런 개새끼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학생들이 마악
웃었습니다
그는 공부할 게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그만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젠 끝난 거야]
그리고 그는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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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月

이 신발 너에게 주고
가리라
일월(日月)이여 이 옷도 너에게
주고
눈 내리면 눈도 주고
가리라
흐린 가을 저녁
찬비는 내리고
일월(日月)이여
있음은 무엇이고
없음은 무엇인가
언제나 벼락이 있고
멀쩡한 대낮에 비가 오네
그러므로 일월(日月)이여
좀 더 닦아야 하리
이 책상도 닦고
벽도 닦고 거울도 닦고
가으내 아픈
이 팔도 닦고
책 속의 글자들
오오 글자들도 닦아야 하리
가을 가고
겨울 오는 아침에
눈이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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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그런 날 그런 날 그런 날
따뜻한 해가 나고
만나는 사람마다 웃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잘 익은 빵을 먹고 파전도 먹는 날

하염없이 해만 나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종일 잠만 자는 날
시도 푸닥거리도 없는 날
절규도 신음도 저주도 사기도
배신도 허위도 없는 날

그런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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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

그는 고개만 끄덕인다.
가는 게 좋냐고 물어봐도 끄덕이고요.
돌아올 것이라고 해도 끄덕입니다.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고 해도
끄덕입니다.
어쩌란 말이냐
언덕 위로 강바람이 불어옵니다.

개망초 끄덕입니다.
한발 물러서 있던 금계국이 무더기로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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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역

어제 저녁어제저녁 사랑에 도달한 나는 어제저녁 너라는 역에
도달한 나다 너라는 역에 금잔화 불타는 작은 역에 금
잔화만 불타는 너의 몸에 너의 가슴에 너의 눈에 너의
코에

지금도 도달한다 사고가 극한에 네가 있다 너라는 몸
이 있다 덧없는 순간들이 진리다 이 덧없음 속에 활활
타는 금잔화 속에 포옹 속에 눈물 속에 죽음과 삶 속
에 저무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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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

들판의 시간에 일몰의 시간에
불이 꺼진 시간에 바람의 시간에
너의 이름을 부른다

추위의 시간에 해가 지는 시간에
창백한 시간에 망설이는 시간에
기인 시간에 혼자 잠드는 시간에
사슬의 시간에 감옥의 시간에
너의 이름을 부른다

헐벗은 시간에 잿빛 시간에
모래의 시간에 비탄의 시간에
백지의 시간에 연필의 시간에
사막의 시간에 난파한 배들의 시간에
무덤의 시간에 자갈의 시간에
너의 이름을 부른다 겨울 저녁

추운 의자의 시간에 운명의 시간에
너는 운명이다 흩어진 책의 시간에
죽은 햇살의 시간에 하염없는 시간에
나였던 것들을 불러 본다 너의
이름을 불러 본다 따뜻했던 오후를 불러 본다
소리쳐 본다

눈발의 시간에 모자의 시간에
나이도 없고 추억도 없는 시간에
계절도 없고 해방도 없는 시간에
해가 지는 시간에 너를 위한 시간에
광기의 시간에 죽음의 시간에
홀로 남는 시간에
모든 길이 지워지는 시간에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세상이
눈에 덮이는 시간에 바람의 시간에
약속 없는 시간에 계단의 시간에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된다
너의 이름은 하나의 길이다
너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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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방

당신의 방엔
천개의 의자와
천 개의 들판과
천 개의 벼락과 기쁨과
천 개의 태양이 있습니다.

당신의 방엘 가려면
바람을 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 당신의 방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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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사랑

그러나 말에 사무치고 말이 가는
곳에 사무치고 말의 헤맴에 사무
칩니다 말의 원한이 아니라 말의
사랑이 뼈에 사무칠 때 우린 깨
어납니다 말을 사랑하십시오 인
간이 아니라 말에 사무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해가 지고 밤이 옵니다 말에 사
무쳐서 말을 여의고 사라진 말
속에 불을 켜십시오 아니 불이
당신을 켭니다 말에 사무칠 때
말은 사라지고 사무침만 남습니
다 사무치는 인생을 사십시오 사
무치는 사랑, 사무치는 슬픔, 사
무치는 리듬, 사무칠 때 깨어 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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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됐다

이 빠지고 머리 빠지고 팔 병신이
다 된 늙은이가 떨리는 손으로 시
를 쓰는 건 후세에 웃음거리나 되
기 위해서다 가도 가도 바람만 부
는 봄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지
만 소매 안엔 개구리가 울고 누가
싼 값에 사라! 봄날 저녁 허리 아
파도 허허 웃으며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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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춘몽

어느 날은 길바닥 돌멩이가 웃고
길바닥 길바닥도 웃고 나무도 웃
지만 길바닥에 지는 저녁 햇살도
웃는다 마음대로 웃어라 모두가
한바탕 꿈이다 이 도둑놈들아! 웃
지 말고 집에 가서 술이나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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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기차

저녁 기차를 타고
눈발이 날리면
너와 함께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
언제나 생각 뿐이지
사는 게 지겹다고
말은 하지만 한번도
떠날 수 없었어
저녁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없었어
오늘도 저녁
기차를 보면
그동안 살아온 게
치사해 더러워
지겨워 역겨워
거적을 쓰고
살아온 것만 같아
엄살이 아니야
오늘도 저녁
기차를 보며
손을 흔든다
저녁 기차는
들은 척도 않고
오늘도 칙칙퍽퍽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도 저녁 기차는
가느다란 아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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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검의 빛

자주 다니던 길에
멀리서 보니 걸레 조각 버려졌다
빛나게 박박 문질러대던 기억
필요할 때만 찾아
호강했던 그 고상한 생활
흐린 공기가 머무르는
바퀴 자국 바람처럼 지나간 새벽
멈추고 살피니
지금은 온기도 없고 근육도 없이
우리 집 마당에서 가끔 보았던 그 고양이
누가 그 목숨을 걸레로 바꾸었던가?
치솟는 주검의 빛
뚝 그쳐볼 수 있었던
그 순간으로 달려가고픈
이 먹먹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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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안으면

너를 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바람 불던 저녁도 사라지고
무슨 정신도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병든 거리도
소리 없이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불안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마흔 개의
어둠이 사라지고
너의 얼굴에
나를 묻으면
마흔 개의
감옥도 사라지고
우울도 사라지고
만성 신경증에 시달리던
밤들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손을 대면
나의 손도 사라진다
이젠 네가 있으니까
이젠 네가 나이니까
너의 가슴에
텀벙 뛰어든다
그래서 이젠
너의 얼굴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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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찾는 것

여름날 오후
헌 책방에서
네가 찾은 건
책이 아니다
땀을 흘리며
네가 찾는 건 너의
마음인지 모른다
여름날 오후
모자를 쓰고
먼지 속에서
네가 부지런히 찾는 건
시간인지 모른다
흘러간 시간
헌 잡지를 뒤지며
헌 잡지에 문득
코를 박는 건
너의 가슴을
박는 건지 모른다
길 모퉁이 허름한
책방에서 오늘도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손과 가슴과
부르튼 입술은
달리던 버스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헌 책방으로 달려가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얼굴은
문득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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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을이다

피는
불이 되고

불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풀풀 날린다

시간이
딸꾹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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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놈의 시

용기도 없고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다
눈도 없고 코도 없다
밑 빠진 나날 입도 없다 입도 없다
아아 사랑했던 너의 얼굴도 없고 기차도 없고 다리도 없고
건너야 할 다리도 없고 오늘도 없다
오늘도 없는 것들을 위하여 시를 쓴다
시를 어떻게 쓰나
망할 놈의 시를
쓸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없는 얼굴이 나를 감싸면 없는 해가 생기고 없는 풀이 생기고 없는 시가 생길 테니까
없는 내가 마침내 없는 기차를 타고 없는 너를 찾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걸 믿고 살아온 게 말짱 애들 장난 같고
그런 걸 믿고 살아온 게
망할 놈의 시 
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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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밤

꿈이란 무엇이며
어둠이란 무엇이며
혁명이란 무엇인가
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밤이란 무엇인가
쓸쓸한 사람 곁에 누워 있는
비쩍 마른 나는 무엇이며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 내리는 밤
문득 들리는 네 가슴의
시냇물 소리란 무엇인가
치욕이란 무엇이며
추위란 무엇이며
생활이란 무엇인가
어둠 속에 불을 켜고
잠이 안 와 돌아눕는
이 외롬이란 무엇이며
어둔 창을 열고
약을 먹는 나란 무엇인가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어둠 속에 잠시 타오르는
불빛 불빛 같은 것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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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기 1호

초원처럼 넓은 강의실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백묵 가루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그리움을
하늘로 띄웠으나 교수라는 나
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
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너를 위하여 미열을
견디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너라는 애초부터 알 수 없던
고향 대신에 머언 창 너머 지나
가는 솜덩이 같은 기차만을 지
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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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글쓰는 사람

난 글쓰는 사람
불행이여 우린 실컷 싸웠다
난 위대한 작가가 아니야
난 위대한 시인도 아니야
난 글쓰는 사람
난 글을 사랑하는 사람
난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
언어여 우린 실컷 싸웠다
이제부턴 휴식이다
재를 재떨이에 털고
난 입에 담배를 물고
이 글을 쓴다
난 글쓰는 사람
난 언어가 있기 때문에
난 언어와 노는 사람
난 당신과 노는 사람
나의 병은 글쓰기 나의 병은
나의 건강 오늘도 글을 쓰고 지치고
언어여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애인, 나의 정부, 나의 천국
나의 지옥, 나의 숨결, 나의 가슴
나의 가슴의 흉터, 나의 섹스
서지 않는 섹스 오 내 사랑,
나의 항구, 나의 결핍, 나의 몸
이유는 없다
난 그냥 글 쓰는 사람
난 그냥 걷는 사람
난 그냥 사랑하는 사람
매미가 울고 햇살이 내리고
나무가 크고 차들이 지나가듯이
그냥 글쓰는 사람
난 글쓰는 사람
내가 쓴 글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
이 글쓰기가 나를 낳고
나를 키우고 나를 병들게
하고 나를 나이 먹게 한다
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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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난 날은

너를 만난 날은
날개 달린 날이다
현실이 사라지고
다른 현실이
태어난 날
그러니까 그날은
초현실의 날이다 훨훨
새가 날아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만신창이가 되어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문득 가을이 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필연의 날이다
머리에서 손이 빠져나오고
다리에서 얼굴이 튀어나오던
허리에서 설탕이 쏟아지던
불안 비참 치욕 따위가
지루하고 맥이 없던 날들이
모조리 일어나 빛이 되던
아아 내 어깨 쭉지에
문득 날개가 돋던 날
너를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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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의 삶

죽은 듯이 살았다
빛나는 것은 없었다
하염없이 살았다
땅에 침을 뱉었다
한번 더 뱉었다
머언 데로 한없이
가까운 데로 달려갔다

오오 죽음이 다 된 삶
나를 떠나게 하던 삶
내가 떠나던 삶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삶
내가 기도한 삶
그토록 커다랗던 삶
그토록 커다랗게 나를 가둔 삶
내가 크게 크게 가두었던 삶

시방 여름 대지에서
만나면 외면해야 할
흐린 날들의 삶
비린내 투성이 삶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던 삶

저 삶이 하루종일
연기만 나는 삶이
허나 영원히 사랑했던 삶이
나를 영원히 사랑했고
내가 영원히 사랑할 삶이
시방 이렇게 불탄다
삶은 삶 속에 나를 가두고
나는 내 속에 삶을 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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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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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밤이 좋다

허나 밤이 좋다
악몽만 있는 밤이
창백한 망치로 두드리는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밤이
나는 좋다
그래도 나는 밤이 좋다
꿈속에 떠 있는 밤
의식 없는 밤
나는 밤의 주인은 아니지만
밤의 주인은 떠난 지 오래다
몇 번이나 돌아누우며
바람 소리만 들리는 밤
아무도 없는 밤
한번도 꿈꾸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밤
과거만 있는 밤
코도 없는 밤
코만 있는 밤
지남철도 없는 밤
이 구부러진 밤이
나는 좋다 횔더린의 궁핍한
시대도 미래도 모조리 잠든 밤
불빛도 불빛도 죽은 밤
비행기도 없는 밤이
나는 좋다
누가 뭐래도 좋다
영혼 따위가 없는 밤
몽상 따위가 없는 밤
악몽만 있는 밤 한없이
식어가는 육체만 있는
이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이 밤이
나는 좋다
너무 좋아서
이윽고 나는 밤을
꽉 깨물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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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들의 명상록

2층 아파트에서 짐을 싸다 말고 베란다로 가서 마당에 침을 뱉는다.
그때 아파트로 들어서던 남자의 머리에 침이 떨어지고
그가 쳐다보며 욕을 한다.
“미안합니다.” 말하고 돌아와 짐을 쌀 때
키가 큰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누구세요?”
그녀는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말한다.
“난 며칠 절에 가서 쉬려고 그래요.”
내가 말하자 “저도 그래요.” 처음 보는 그녀가 말한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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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잘 되어간다

제자들과 함께 들린 인사동 어느 술집 그 집에도 멸치가 없었다. 동우, 동옥, 경아, 지선 등등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멸치가 없군! 내가 말하자 동옥아 네가 나가 사와! 동우가 시키자 동옥이가 말없이 일어나 나갔지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이상하군 동옥이가 강릉으로 간 거 아니야? 아니 멸치 사러 순천으로 갔나? 내가 말했지 순천은 그의 고향이다 한참 지나 동옥이가 들어온다 동옥아 너 강릉까지 갔다 온 거야? 누군가 물었지만 그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멸치를 한 주먹 꺼내놓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선생님 멸치 파는 가게가 없어 한참 헤매다 어느 술집엘 들렀어요 그 집엔 멸치가 있다는 거야요 그래서 맥주 한 병과 멸치를 달라고 했죠 맥주만 마시고 돌아올 때 멸치를 주머니에 넣고 왔어요 모두들 하하하 즐겁게 웃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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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던 날의 대화

여자:다시 태어난다면
무얼 하고 싶어?

남자: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게 죄야

여자:그러니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그땐 물새만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

여자:그래 그런 화가
물새만 찾아다니는

남자:언제나 물새만 그리는

여자:밥은 누가 먹여 주고?

남자:그렇군 다시 태어나면
밥 걱정이나 없었으면

여자:한세상 물가에서
오리 뻐꾸기 귀뚜라미

남자:뻐꾸기는 물새가 아니야

여자:왜 아니지?

남자:어째서 뻐꾸기가 물새야?

여자:내가 물새라면
물새가 되는 거야

남자:그렇군 원칙은 없으니까

여자:다시 태어나면 정말
무얼 하고 싶어?

남자:시인은 괴로워

여자:편안한 시인도 있지

남자:그럼 시를 못 쓰지

여자:다시 태어나면

남자:언어는 골치가 아파

여자:과연 우린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남자:난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여자:그건 나도 그래

남자:나무를 봐

여자:봄이 오려나 봐

남자:벌써 봄이 온다고?

여자와 남자 멍하니
창 밖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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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파 위치에 대하여

난 쏘파 위치만 바꾸며 세월을 보낸다고
시를 썼다 이런 나를 두고 허혜정은 쏘파
의 배치에 집착하는 편집증은 기이한 것
이며 쏘파는 어떤 위치에 있어도 화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은 자아를 <나>라
는 쏘파에 이르게 하려는, 끝없는 나라는
주체의 공간에 배치하려는 노력이며 결국
쏘파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틈새를 만
드는 일이며 채워 넣는 일이며 세계의 틈을
열고 구멍을 메꿔넣는 일이라고 말한다
(허혜정, 「타이어 또는 말 아래의 공간」,
『현대시학』,1997.10) 과연 그렇도다 쏘파
를 옮기며 세월을 보내는 것은 틈새, 어디
에도 없는 나를 만드는 일이다 허혜정의
글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나도 이승훈의 시
를 분석한다 그의 시에서 위치 바꾸기를
강조하면 위치는 입장이고 시각이고 중
심이다 그는 끝없이 중심에서 벗어나기,
이탈을 꿈꾼다 그리고 입장은 서는 일이다
서야 한다 그의 몸도 추억도 페니스도 시
체처럼 시체처럼 서야 한다 시체를 잡아
먹으며 서야 하지만 또 위치는 정하기이며
그것은 흐름을 파괴하고 무를 파괴하고 이
흐름의 파괴, 고정이 의미를 낳는다면 그
가 쏘파 위치를 바꾸며 세월을 보내는 것
은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을 상징하
고 거리엔 바람이 불고 겨울저녁 그는
시체처럼 고요히 고요히 고요히 움직인다
쏘파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있는 틈새
또 다른 동굴이다 오오 동굴! 이 동굴을
들고 그러나 이 동굴에 대해선 말하지 맙
시다 그의 시에 대해서도 쏘파에 대해서도
글쎄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말한 건 수선
소 여인 갑자기 바바리 한쪽 팔 길이가
기인 것 같아 (아내 몰래) 들고 간 나를
보면서 이 추운 저녁 아파트 앞 지하상가
수선소 여인은 글쎄 신경이 너무 예민하다고
그냥 입으라고 돌려보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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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의 아저씨

오늘부터 난 아저씨야
가벼운 가벼운 여름이야
아저씨는 지나가는 아저씨
웃는 아저씨
난 겨울 한강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니야
난 고개를 숙이고 웃는 아저씨
작은 목로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
아름다운 당신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난 당신 아저씨야
당신 애인이 아니라 당신 아저씨
이름 없는 아저씨
모자를 쓰고 마포 삼겹살집에 앉아
이룬 것도 잃은 것도 없는 황혼 아저씨
비 아저씨
빗물 고인 아스팔트나 바라보는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지 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마
난 아저씨가 좋아
끄노 아저씨도 있지
프랑스에서 시를 쓰던
기인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아저씨
인생을 반납한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그동안의 먹구름도 천둥도 모조리 한강에
버고 온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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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벤취에 앉아 쉰다

1.
나는 설렁설렁 지나가네.
"어디 가요?" 사람들은 묻지만
쓰윽 못 들은 척하고 설렁설렁 지나가네.
내가 매달렸던 운동 기구엔 다른 남자가 매달리고,
어깨 아픈 사람은 오시오.
나는 부근 벤치에 앉아 쉰다.
뚝길로는 사람들과 개들이 오고 간다.
햇볕도 오고 간다.
구름도 오고 간다.
뚝길을 오고 가는 구름들, 나는 설렁설렁 지나가네.​

​2.
잠자리가 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사람 가는 길에 잠자리가 나네.
가던 길 멈추고 서서 잠자리 나는 것 보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는 잠자리.
아니 길을 여는 거겠지.
잠자리 잠자리 길을 열고 길가엔 돌무덤이 있네.
여름 해여 내려라.
돌무덤은 말이 없고 잠자리는 날고
나는 하늘 보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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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봄날 오후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따신 해
이마에 받으며
서 있던 너
병든 네 옆에 얌전히
자고 있던 고양이
봄날 햇살 속에
말없이 서 있던
네가 보던 건
먹빛 슬픔
바람 속을 지나가던 열차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후리지아
오늘도 쌀가게 앞에 네가
있을 것만 같아
나는 고양이 한 마리 사러
시장으로 간다
후리지아는 너의 이름
후리지아 옆에 잠들던
고양이도 너의 이름
먹빛 슬픔 속에
오늘도 작은 마을
햇살 내리는 골목
어느 쌀가게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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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가을
격언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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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사랑
암호
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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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日月
그런 날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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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역
너의 이름
당신의 방
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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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됐다
일장춘몽
저녁 기차
주검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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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안으면
네가 찾는 것
또 가을이다
망할놈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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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밤
풍선기 1호
난 글쓰는 사람
너를 만난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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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의 삶
풀잎 끝에 이슬
허나 밤이 좋다
광대들의 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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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잘 되어간다
봄이 오던 날의 대화
쏘파 위치에 대하여
난 당신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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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벤취에 앉아 쉰다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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