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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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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2 ㅡ 시 모음 + 꽃 내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 풀 나는  맹장을 달고도 초식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동물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정맥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신호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네 아름다운 혼인 것냐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맑은 ..
기형도 시 1 ㅡ 입 속의 검은 잎 ---Ⅰ---- + 그 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서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 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 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  서 육체로 넘어 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 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류시화 시 5 + 잠나를 치유해 준 것은 언제나 너였다 상처만이 장신구인 생으로부터 엉겅퀴 사랑으로부터 신이 내린 처방은 너였다 옆으로 돌아눈 너에게 놀란 내 귀, 세상의 소음을 잊고 두 개의 눈꺼풀에 입 맞춰 망각의 눈동자를 봉인하는 너, 잠이여 나는 다시 밖으로 돌아와 있다 밤에서 밤으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얼굴의 윤곽을 소멸시키는 어둠 속으로 나라고 하는 타인은 불안한 예각을 가지고 있다 잠이 얕은 혼을 내가  숨을 곳은 언제나 너였다 가장 큰 형벌은 너 없이 지새는 밤 네가 베개를 뺄 때 나는 아직도 내가 깨어 있는 이곳이 낮설다 때로는 다음 생에 눈뜨레도 하는 너, 잠이여 ----------- + 보리나는 이제 말하련다. 보리여 내가 태어난 나라를 나는 잘 모른다 마타리풀 지천에 피어 있는데 붉은..
고은 시 6 + 산책 우리는 비속한 날에도 비속하기 짝이 없는 밤에도 비속한 말은 하지 않는다 밤마다 안드로메다 대성운이 있다 다음날 어딘가에 최고급의 낮달이 있다 둘의 산책에서  아내가 이런저런 일상을 이야기할 때에도 내가 이런저런 일상을 이야기할 때에도 처조카 결혼식 부좃돈 이야기를 할 때에도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 목숨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속한 말은 하지 않는다 어쩌다 치사한 배신이다 치사한 중상에도 건설업자의 천박한 사기에도 비속한 말의 화풀이로 말하지 않는다 그따위 비속한 것들을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왜냐 사랑의 주술이 꽉 막혀버리니까 말은 화학물질이다 말은 씨이고 꽃이고 하염없는 다음 생의 열매이다 비속한 말은 비속한 물질이다 싫어하는 타고르 그대가 하나는 옳다 세계는 진짜로 고상하다는 것 세계는 재앙으로..
고은 시 5 + 집 멋 부리던 가야산 시절 세상이 곧 만다라라 아는 척 했건만 이제  내 늙어빠진 핏줄 사무쳐 다시 아는 척 하느니 온통 나 에워싼 티끝 억조로 겨우 나를 벗어나느니 부디 어리석어라 더 어리석어라 나무가 되었다가 잔 짐승이 되었다가 또 무엇이 무엇이 되었다가 하늘 그물 여기저기 숭숭 뚫려 내 집이 많기도 하느니 가거라 가노라면 길도 누구네 집이란다 -------- + 강도 반도는 늘 손님이 오는 곳이다 대륙에서 오고  바다에서 온다 그들이 손님이라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순 강도들 ------------ + 강설 천년 전 나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다 이 둘의 귀로 함께 귀 기울인다 한밤중 눈 내린다 소리없이 소리없이 귀 기울인다 ----------- + 극악 저 사람이  저 지옥이..
고은 시 4 + 무덤화장하지 않으리 풍장하지 않으리 티베트 아리 됫산 조장하지 않으리 그 누구한테도 늙은 구루한테도 맡기지 않으리 반야심경 사절 내가 씻기고 내가 입히고 내가 모셔놓고 난 뒤 내가 못질하리 내 울부짖음과 내 흐느낌 담아 엄중하게 못질하리 내가 흙 파내여 내가 묻으리 작은 벗들 일깨워 세우리 여기 사랑이 누웠다고 감히 천년쯤 뒤 나비도 강남제비도 이 무덤 속 백골 알 수 없으리 --------------- + 아내의 잠거기 간다 아내의 잠 속 어느 곳 지금의 소쩍새가 아닌 태초의 소쩍새가 운다 지금의 소쩍새가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마저 태초인 소쩍새가 운다 사랑은 시원을 시도한다---------------- + 오늘 아침오늘 아침 다 헛되고 싶습니다 진실로 살구꽃 가득히 피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살구..
류시화 시 4 + 원 사람들은 저마다 자가 둘레에 보이지 않는 원을 그려 가지고 있다 자신만 겨우 들어가는 새둥지 크기의 이 원을 그린 이도 있고 대양을 품을 만큼 흑등고래의 거대한 원을 그린 이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 들어올 동심원을 그린 이도 있다 다른 원과 만나 어떤 원은 더 커지고 어떤 원은 더 작아진다 부서져서 열리는 원이 있고 부딪쳐서 더 단단해지는 원이 있다 나이와 함께 산처럼 넓어지는 원이 있고 오월붓꽃 하나 들여놓을 데 없이 옹색해지는 원이 있다 어떤 원은 몽유병자의 혼잣말처럼 감정으로 가득하고 어떤 원은 달에 비친 이마처럼 환하다 영원히 궤도에 붙잡힌  혜성처럼 감옥인 원도 있고 별똥별처럼 자신을 태우며 해방에 이르는 원도 있다 원을 그리는 순간 그 원은 이미 작은 것 저마다 자기 둘레에  원 하나씩..
류시화 시 3 + 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 + 별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