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멋 부리던 가야산 시절
세상이 곧 만다라라 아는 척 했건만
이제
내 늙어빠진 핏줄 사무쳐
다시 아는 척 하느니
온통 나 에워싼 티끝 억조로
겨우 나를 벗어나느니
부디 어리석어라 더 어리석어라
나무가 되었다가
잔 짐승이 되었다가
또 무엇이 무엇이 되었다가
하늘 그물 여기저기 숭숭 뚫려 내 집이 많기도 하느니
가거라
가노라면 길도 누구네 집이란다
--------
+ 강도
반도는 늘 손님이 오는 곳이다
대륙에서 오고
바다에서 온다
그들이 손님이라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순 강도들
------------
+ 강설
천년 전 나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다
이 둘의 귀로 함께 귀 기울인다
한밤중 눈 내린다
소리없이
소리없이
귀 기울인다
-----------
+ 극악
저 사람이
저 지옥이 고개 숙인 사람이
저 수삽한 사람이
저 고분고분
그 누구한테도 거스른 적 없는 사람이
네기미시팔 그런 욕 하나도 몰라
저 장대비 그대로 맞은 순하디 순한 사람이
1950년 9월 12일
그날 밤 저 혼자
원당부락 남녀노소 서른아홉 명을
삽등으로
몽둥이로 쳐 죽인 사람이란다
저 사람이
다 죽이고 나서
뒷산 솔밭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절하고
사라졌던 사람이란다
======
+ 긍지
오늘 나에게는 절도 없다 사당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밤거리 네온사인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조상의 화살촉들이 내 발다닥 밑에서 아직껏 부르르 떤다
----------
+ 기쁨
저 섬들이
다 가라앉아
휑
빈 바다로 되어 버렸다가
몇백 년 뒤
기어이
기어이
가라앉은 그것들이
옛 이름 잊어버리고
다시 솟아나
빈 다도해 그 바다로 우르르 돌아오는 날
오늘
쇠갈매기야
네 새끼 둘 곳이 여기 있구나 나도 여기 있구나
-----------
+ 귀가
며칠 전 야내의 꿈 속에서
썩은 송곳니가 빠졌다
오늘 나는
여의도 오종우 맨션치과에 가서
내 오래된 동무 어금니 둘을 뺐다 생시이다
아내는 나의 앞이고 나는 아내의 뒤이다 무척이나
좋아
집에 오니
너 새빨간 글라디오라스
-----------
+ 달밤
이제까지
너와 함께
살았다
아니
이제까지
너한테
너무 많이 얻어먹고 살았다
달하
어머니는 돌아가섰다
누나는 어디로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
달하 나는 뻔뻔스러운 건달이다 이제 너 팍 져버려라
======
+ 먼동
교산 허균의 두 다리 두 팔에
각
각
각
각
네 마리 황소를 매어
사지 찢겨 죽는 형장 3분 4분쯤의
그 통痛 어디 갔나
9.28 수복 직후
도망가다 사로잡힌
면 인민위원장
우익의 몰매 맞아 죽어가는
그 10여 분간의 짓이겨진 고깃덩어리 통 어디 갔나
70년대 초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
원산폭격
물 고문
전기 고문
통닭구이 고문으로 죽어간
최씨의 탄광굴 속 같은 깜깜한 통 어디 갔나
이런 통들이
신새벽 깨어나
내 잠자리의 손님으로 느닷없이 와버렸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입 속
혓바닥이 없어졌다
먼동 텄다
------------
+ 무제
배고픈 아이 울었네
아픈 아이 울었네
엄마 잃은 아이 울었네
나도 따라 울었네 오늘도 나 일흔셋으로 우네
-----------
+ 봄비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시는 듯
아니 오시는 듯
오시나부다
어느 아기의 귀가
이 봄비 오시는 소리 들으시나부다
봄비에 젖어든 땅
그 땅 속
잠든 일개미들이 자다 깨어
어수선하시나부다
이제 막 깬 알에서 나온 어린 일개미들이 깨어나
이 세상이
무서운 줄을 처음으로 아시나부다
봄비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로지 내 무능의 고요
죄스러워라
---------
+ 어둠
비가 왔다
온 누리 잎새들이 실컷 씻겼다
새롭다
이는 바람도
산과 들도 씻겼다
새롭다
썽큼썽큼 먼 곳이 와 있다
한낮 모든 그놈들이 싹 쓸어 숨었다
이런 곳
누구의 곳 나의 곳
한 소경이 동에서 서으로 걸어간다
=======
+ 짝통
짝통
이 낱말을
내 사전에 올리리라
무섭구나
나는 누구의 짝통이냐
구 누구는
누구의 짝통이냐
밤길 철새
연달아 가는
이 상호텍스트의 한 낱말을
내 원시어사전에 꼭 올리리라
짝통은 진짜의 꿈 아니냐 그 지긋지긋한 진짜로부터
의 해방 아니냐
------------
+ 출타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휴전선 짐승들에게
달마을 덕보에게
미안하구나
바람 부는 날
나는 제일모직이라는 걸 입고
집을 나선다
개들아 악발이로 악발이로 젖어대어라
나 또한 거지이거나 도둑이거나
그 중의 하나
-------------
+ 평화 1
눈부셔라
저마다
저마다 생활일 것
흐린 날
빨랫줄의 빨래들이
아주 천천히 마르는 생활일 것
이 눈부신 빨래 천천히 마르는 날
어디에서도
포성이 들린 적 없을 것
마구
쏟아부어
퍼부어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지껄이는
헛바닥이 없을 것
문학이 소재 없는 위기에 처할 것
아니
문학이 소재에 낮설어질 것
생활일 것
--------------
+ 평화 2
바그다드 외곽기지
스텔스 F-117 전폭기에 장착된
다단계 폭탄에게
27년 전
한국 7공수 11공수
그대들이
일찍이 달밤이었고
길 가녘
꽃이었고
이슬이었던 때를
기억하며 사는 곳
만년의 무기들
그대의 어머니인 흙으로
돌아가며 사는 것
처음으로 일어선
아기인
그대에게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어머니인 마을에 다시 태어나는 것
어즈버 인간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인간인 것
=======
+ 평화 3
피이스
라는 낱말에서
나는 피 묻은 사체를 본다
피이스
라는 낱말에서
나는 한밤중 포탄이
작열하는 광경을 본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불꽃놀이라고 환호했던가
피이스
라는 낱말에서
나는 침략과 수탈을 본다
피이스
라는 낱말에서
석유를 본다
피이스
라는 낱말에서
중앙아시아 미공군기지를 본다
우리는 다른 낱말을 찾아야겠다
누구도 쓰지 않고 있는
오래된
가장 새로운 낱말을 찾아내야겠다
아니 죽은 말 산스크릿의 '산티'를
말레이시아의
'기타'를
그 고요 평화를
그 우리 모두의 평화를
또한 한국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보다
먼저 죽는 것
그 태평성대의
아침 평화를
----------------
+ 평화 4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곳
그곳을
평화라 한다
초겨울
남은 잎사귀들 진다
퇴근하는 처녀들
종종걸음 친다
그곳을
평화라 한다
소가 우는 곳
누가 잘 모르는
산골짝 꽃다지
원추리꽂 시드는 곳
그곳을
평화라 한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곳
그곳을
평화라 한다
아직도
옛날장이 서는가
시끌덤벙
그곳을
평화란 한다
굶주림이
밥이 무엇인지 모르는 곳
그곳을
평화라 말한다
오늘밤 나는 늦게 돌아와
밥상 앞에 앉아 있다
마음 밍밍해서
여보
술 한 잔 하자
--------------
+ 평화 5
이곳으 평화는
그곳의 전쟁
그곳의 침략
그곳의 학살
그곳의 고통
그곳의 폐허가 아니다
이곳의 평화는
그곳의 평화이다
그곳의 평화는
이곳의 다른 평화
그럴 것이다 평화의 오고 감 평화의 다름
-----------
+ 평화 6
오직 누구의 평화만이 평화이다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평화가 아니다
저 전북 군산 어은동 밭두렁 장다리꽃
그 꽃에 내려앉은 나비가
나의 평화이다
오직 평화는 하나하나이다
========
+ 평화 7
3천 년의 마을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마을
3년에 한 번쯤 심심풀이로
욋논과 아랫논 물꼬싸움의 마음
동구 밖 주막
사홧술 막걸리 한 사발의 마을
이 마을에서야
아무나
아무개나
아저씨이고 아우이고 숙모이고 누이였다
벌쏘인 순철이 형이었다
그 평화밖에는
나에게 평화가 온 적이 없다
나야말로 평화의 적이었다 나의 입에 재갈 물려라
--------------
+ 평화 8
나는 전생 뒤에 살아았다
폐허에 풀 우거졎
밤새 벌레소리가 찼다
다음날
나는 풀피리도 볼 줄 몰랐다
저 초토 흙구덩이로
어디선가
잔 짐승 거지가 돌아왔다
거지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죽이고 죽은 마을 굴뚝에서
놀라워라
저녁 연기가 쭈뼛쭈뼛 올랐다
나는 거기 보며
엎드렸다가 일어났다
평화란 누가 누구를 죽인 뒤인가
아니다
평화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없는 삶
그것은
번역할 수 없는
몇 줄의 시
사투리
평화란 너의 집이고 나의 뜰이다
평화란 해골의 웃음인가 해골의 두 눈인가
아니다
-----------
+ 확인
천년 전 나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다
이 둘으이 귀로 함께 귀 기울인다
한밤중 눈 내린다
소리없이
소리없이
귀 기울인다
----------
+ 회상
이전부터 가을이 천 번이나 왔다 갔단다
악아
악아
나도
옛날에는 배냇웃음 웃었단다
======
+ 효봉
두 아이가 논다
한 아이가
나중의 효봉이다
평안도 두메 낫닭 울다
아무래도 다른 한 아이는 누구일지 모르겠다
----------------
+ 향수鄕愁
벌써 산딸나무 나비꽃들도 연달아 진다
섬마섬마
두 다리로 일어선 아기 기쁨
엄마 기쁨
아서라
이 기쁨이 어쩔 수 없는 타락의 처음 아니뇨
어서 돌아가고 싶다
두 다리에서
네 다리로
두 발에서
네 발로
내 고향 맷돼지
내 고향 처량한 달밤이후
내 고향 빈 배 보이는 할미산 할미꽃 사이
어린 도마뱀의 사려 깊은 네 발
그 재빠른 기쁨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다
-------------
+ 거미집
아무렇게나
아무렇게나가 아닌
툭!
공중에 제 몸 툭 던져
길을 내는 이
길 내어
집 한 채 조용조용 짓는 이
서모이거나 계모이거나 또는 양모이거나 그도 아니
거나
간밤 이슬 주렁주렁 싸늘한 보석의 집
빈 집
이 불쌍한 것들아
걸핏하면
생모 찾는 것들아
----------------
+ 그리움
잠 깨어
천둥소리 나머지를 듣는다
어버님 세상을 떠나신지
40년이 되어간다
어머님이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어온다
천둥소리 뒤로 비가 온다 그제서여 잎사귀들 후두둑
깨어난다
========
+ 그 무덤
싸래기눈 내린다 천안 아우내쯤
팥죽색 순대 가득 들어앉은 순대식당들 쪼르르 서 있는
두 팔 들고
나란히 나란히 줄 서 있는
초등학교 아이들
서넛씩 터울로 둔 분주한 아낙의 식당들 서 있는
그 순대식당 건너
올 듯
올 듯
흑성산 한 자락 내려와 서 있는
야트막한 밭두렁 위
거기 합장묘 속
해골 두 분께서도
세상의 싸래기눈 서럽게 내리는 것 느끼시는지
몇 마디 파적이시라
나 목포쯤 가고 싶어유
목포 노적봉 올라
자디잔 섬들 바라보고 싶어유
듣자 허니
서해안고속도로가 쭈욱 나 있다는데
나 윤선도가 여자 셋 불러다가 시조 짓던 곳 가고 싶
어유
여수 오동도 동백꽃 보고
동백꽃 지는 것 보고
삼천포로 건너가
늑도
마도 백사장
밤 이슥히 내려앉는
몇백 광년의 별볓 속에 서 있고 싶어유
나 추자도에 건너가고 싶어유
저기 가 물구나무 잘 서는 어느 아낙 뱃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싶어유
새로 태어나고 싶어유
새로 태어나
글 따위
순 거짓투성이
글 따위 통 모르고
낫 놓고
기역자 모르고 살아가구 싶어유
그 수염 모자란 윤선도도 모르고 살고 싶어유
---------------
+ 그 아비
딸이 오는 날
제라늄화분 여섯이
일제히 꽃들을 피웠다
딸이 가는 날
늙은 내 손가락 씀뻑 벴다
------------
+ 낙안읍
숨이 길었다
전라남도 송주군 낙안읍에 어찌어찌 가게 되어
거기
간밤이 마침 제삿날 밤이었던 듯
대물림 옥비녀 꽂은
저 종조모님 혼령쯤 다녀가신 듯
초가집
그 집 이웃
옹기
종기
모듬살이 이어오는 것 보았네
내년 삼월 삼짇날 앞뒤로 오실 제비의 먼 길
하늘에 나 있는 것 보았네
박 한 덩이 두둥실
초가집 지붕
그 잔등 굽은 물매라든지
어리수굿 철 들어 그윽이 떨군 치마라든지
알딸딸한 겨울 아침
큰 놈 작은 놈 다 나와 매달린
처마 고드름들이라든지
한낮
그 고드름을 녹아 주며
몇 방울씩 남은 설움인 듯 낙숫물 지는 소리라든지
묵은 뉘우침 같이 되새겨지는
낮닭 우는 소리에
무슨 일이여 하고 돌아다보는 어린아이의 뒤통수라
든지
저 건너 운암산자락 데면데면한 사돈같은 적막이라
든지
그런 것들을
순 공짜배기로 보았네
보고 돌아왔네
-----------
+ 너에게
걱정 마라
또 바람이 분다 바람에 빈 가지들 뛰논다
=======
+ 니나노
목포 삼학도에 갈거나
제주도
제주도 서귀포에 갈거나
10년 병석에 누워 있는 오영호의 꿈 속 간데없이
긴 니나노
-------------
+ 동굴 밖
강원도 정선 비룡동굴 천장 종유석마다
거기 매달린 박쥐들의
그 태연자약의 한 평생이라니
이 사실이 알려지는 건 큰 잘못이다
동굴 밖에서는 흰 머릿수건 쓴 할멈 혼자
황기를 팔고 있다
황기 한 다발 1만 원
에누리 없다
그것이 동굴 안으로 알려지는 건 더욱 큰 잘못이다
---------------
+ 두 사람
동산은 49제 법상에 올라
이제 신원적新圓寂 무림거사는
틀림없이 왕생극락하였노라
라고 설하셨다
일동이 기뻐마지 않았다
효봉은 49제 법상에 올라
신원적 대원보살 자녀들의 효심이 지극하노라
허나 이로써
대원해가 바로 왕생극락한 것이 아니로라
라고 설하셨다
일동이 시무룩하였다
자 어느 쪽이 맞을까 나더러 묻지 마 다 틀려 버렸어
------------
+ 무등산
그날 저녁 퇴근 남편을 기다리다가
총소리에
사뭇 걱정이 되어
남편이 오는 길목에 나가 있다가
어이 어이없이
마구 갈겨대는
전두환 부대의 총알에 맞아
쓰러져 버린 젊은 아내
그 아내의 뱃속
일곱 달짜리 아기
엄마 죽지 마
엄마 죽지 마
뱃속에서 발길질하다가
끝끝내
그 뱃속 목숨 놓아 버린 아가의 이 세상에
무등산 있다
그로부부터 어언 24년
오늘 나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언저리에 서 있다
산 한 자락이 조금 보인다
========
+ 미인송
아직 백두산 기슭에는
훤칠훤칠한 미인송이 울창합니다
아직 금강산 기슭
만물상 가는 길에도
훤칠훤칠한 미인송이 울창합니다
그 소나무숲 속
그 소나무 바람소리 들으면
백년의 귀 새로 번쩍 열립니다
그 미인송이 남으로 내려오며
아직 치악산 기슭
옛날 왕실 장례 관목이었던
황장목이 됩니다
그 황장목재 춘양촌에 모이므로
일러 춘양목이 됩니다
훤칠훤칠한 미인이라
백두산 미인송이라 합니다
금강산 이래
아예 금강송이라 합니다
동해 남쪽 울진에도
금강송 저희들끼리
밤새도록 동해 파도소리 얼씨구 절씨구 듣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움입니다
진정코
이 나라의 아름다운 심신입니다
심봉사의 눈 새로 뜨여 내 딸 심청입니다
그러나 이 미인송 종자가
따로 있어온 것이 아닙니다
어느 지대에서는
소나무 줄기 곧아야 죽어 버리지 않습니다
어느 토양에서는
소나무 가지가 행여 가로지르면
당장 살아갈 수 없으므로
굽은 소나무
막 자라는 소나무 하나하나
놀라며 제 허리 곧게 솟아났습니다
너도나도 살기 위하여
곧게 곧게 솟아났습니다
이렇게 천년이 지나자
그것이 미인송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황장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아주아주 아름다움이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겨울 미인송 숲 속
거기 있으면
태초 기운 다 받아
우리네 오명 씻어냅니다
우리네 야욕 녹아냅니다 화톳불 꺼진 추위로 일어섭
니다
제군과 나
이런 숲 속으로부터
그 청청한 미인송 솔바람소리로
이곳과 저곳 여러 골짝 속속들이 채워져서 있습니다
-------------
+ 신새벽
어디에도 시시한 것 귀살스러운 것
하나 없다
어림없이
신새벽
대화퇴* 복판
불쑥 솟아오른 대궐 귀신고래
아무도 없다
대궐 머리통에서
힘껏 물보라 뿜어낸다
황홀 팟쇼
귀신고래 끝자락 휘어
딱
바다 뱃때기 내리치고는
바로 가라앉아 버린다
아무것도 없다
바다는 또 칠흑 소경의 바다이다 새로 먼동 움튼다
*대화퇴 : 동해 울릉도 밖의 난바다 한군데.
-------------
+ 아버지
조기반찬을 집어 먹으면
아버지가 보기 싶었다
단풍나무 산딸나무 밤나무 후박나무 벗나무의 낙엽
을 쓸면서
아버비를 꿈 속에서 보기 싶었다
추운 날에는
내일은 따뜻할 게야
고개 들어
코가 찌익찌익 막히면
괜찮다
내일모래는 어슨 듯이 나올 게다
왜정시절
쌀독에 쌀 없으면
오늘밤 자고 나면
쌀이 올 게다
딸뜨면 너훌 거릴 긴 소매 아니고도
덩실
덩실
학춤을 오래 추시던 아버지
호박꽃 속 벌인 듯
그 춤을 숨어서 보시던 어머니도 보기 싶었다 달이
기울었다
희디흰 젓가락 같은 팔다리의 어릴 때부터
나에게 와 버린
수많은 내일들
가당치도 않은 신명들
순전히 아버지의 것이던가
38국도 대림동산 구금다리 내려오며
나는 또 내가 아니다
어버지인가
뒤돌아다 보았다
------------
+ 이 세상
저 연못
바야흐로 연꽃들 한창이구나
저 연못 속
무지무지한 생과 사 한창이구나
이 세상은 어머니만이 아니다 결코 아버지만이 아니다
=============
+ 중복기中伏記
중복 여름 복판입니다
뒷산 솔밭
버꾸잡이 소나무에
늙은 똥개 매달렸습니다
고래고래 소리 질러댑니다
바야흐로 몽동이질을 시작합니다
똥개 비명
똥개 비명
이렇게 몽둘이로 실컷 패대어야
고기 맛나지
고기가 오지고 고소하지 안 그래
똥개 늘어졌습니다
늘어진
똥개 밑에 검불 놓았습니다
똥개 숯검정 꿈틀꿈틀댑니다
어 그놈 명줄 한번 질기구나
뭉둥이 홱 던지고 난
박승만 영감
히죽이 웃었습니다 어금니는 틀니입니다
가마솥 김 뭉게구름 피어납니다
코 구멍들
벌룽벌룽댑니다
마침내 삶은 개 다리 한 짝
두둥실 건져 올렸습니다 하늘이 뚝 멈춰 있습니다
환태야 이리 와
너도 한 점 맛보거라
승만 영감
저만치 정희내 집 함석대문 앞에서
침 꿀깍 삼키는
두충머리 우삼이 녀석도 부릅니다
혹시나 이런 물큰 인심이
6 . 25 우와 좌를
9 . 28 좌와 우를
그 이래 무엇이 무엇 무엇을
뭉둥이로 패 죽인 그 인심 아니었나
앞산 위 뭉게구름이 생겼습니다
이리와 한 점 맛보거라 어서
--------------
+ 태종대
태종대에는 눈물이 없다
사람들아 여기 와서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드려라
---------------
+ 한낮 님
왠일이신가 푸른 하늘님 어디에도 구름님 아니 계시다
빈 산딸나무님 가지에 앉아
흔들리시는
참새님
사뭇 여기저기 돌아다보셔야 하는
참새님
내 마음님
내 마음님
이미 마당님은 저승님이시다
내 마음님
내 눈님
내 코님
내 입님
내 귀님
내 살갖님
총 6근 도무지 철딱서니 없도록
어쩌자고 마당님의 여기적기 돌아다보신다 쯔쯔 불
쌍하시다
---------------
+ 가을 답장
가을이 왔습니다
키 작은 우체부가 다른 곳으로 잘못 갔다가 온
편지를 전하고 두런거리며 갔습니다
문 밖에서
아주 오랜된 것들이
이름도 붙이기 전의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돌맹이도 다지고 다져진 애움길도 그랬습니다
하늘
온갖 의문들이 사라졌습니다
하늘 밑
곧 떨어질 단풍잎새들에게
남아 있는 생이 눈썹 밑 새롭습니다
추수 뒤
벤 벼 그루터기에
돋아나 어린 벼포기도 새롭습니다
단풍나무 그림자가 곱절 길어졌습니다
그 대신 내 넋이 무겁습니다
번뇌들과
천 가지 허영 이것으로
어떻게 이 가을을 맞이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넋 가벼워서야
10만억 국토 지난 저승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가을이 왔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다행한 적이 있었던가요
가을이 왔습니다
아무것도 뉘우칠 것이 없습니다
타버린 재
가벼울 바람이 봅니다
내 머리카락이 두런두런
깨어납니다
바람 한 점이
진 잎새들 뒤집어 말합니다
네 말은 무엇이냐고
네 말은 사랑이냐고 사랑의 허망 아니냐고
부끄럽습니다
사랑은 오늘이 아니라 늘 지나간 것입니다
불붙은 연탄 아궁이가
밤새 그 뜨거운 사랑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도 누구의 오늘이자
곧 누구의 어제입니다
나는 구절초꽃 한 가지 볼 수 없도록
감히 눈을 뜨지 못합니다
세상이 소경 하나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산등 억새꽃과
그 아래 방아다리 둔덕 옻나무 새빨간 잎새
그리고 개장면 들판이
함께 어둠으로
나의 해답이 됩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더 이상 올데갈데 없습니다
=========
+ 나무노래
장자 소요유
8천 년을 봄으로
8천 년을 가을로 사는 나무
참죽나무님이 계시더군
장자 소요유가 아니라
실지로
3천 년을 산 삼나무님이 계시더군
실지로
6천 년을 살고 가신
에온나무님
아니 7천 년째 살고 계신
삼나무님이 계시더군
그러니 옛 장자 소오유의 참죽나무님도
공연히 지어낸 것만은 아니더군
과연 우리나라 옛 말씀에도
소요유에 질세라
키 3백 리
둘레 2천 아름
나뭇가지에
나무 우듭지에
열 개의 햇님이 달려 빛나는
부상나무님
뽕나무님이 계시더군
그 나뭇가지 3천세계를 다 덮고
그 나무향기 9만 리를 다 덮어 버린
저 태백산 신단수님이 계시더군
아니
아니
그리 크고 크신 나무님과 함께
우리 3천 리 산야
어린 소나무
어린 잣나무님
어린 박달나무님 단풍나무님 참나무님 자라나는 언
저리에서
너도 나도
그 어린 나무님으로 함께 하고저
우리 모두 지랄 같은 옷 벗어 버리고 수레 버리고
한 구루 나무님으로 살고저
저 아래의 개발프로젝트
굴삭기 불도저 트랙터
이런 것들로부터 가장 먼 곳의 나무님으로 살고저
------------------
+ 독도에서
네 이름을 부르러 왔다
네 이름을 불러
세상 아득히
너의 천년을 전하려 왔다
동해 독도
---------------
+ 또 너에게
바다 밑
고기 떼
바다 위
갈매기
내 고향은 허허 이렇소이다
----------------
+ 비닐봉지
쪽파 두 단 담아온
검정 비닐봉지
괜히 바람 한 자락에 날아올라
저 혼자 춤추더라
울 넘어 시시부지 가버리더라
어머니
==========12
+ 새끼 넙치=
방금 낚시바늘에 걸린
새끼 넙치의 절망
그 절망으로
물 위에 떠오르며
퍼덕이는
그 절망 속의 희망
오늘 친구의 아들에게 친구의 안부를 물었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퍼부어댈 욕이 있다
-----------------
+ 여기 저기
이것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
저것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
또
저것에 이름이 붙어 있구나
목마르구나
한 사람의 거짓
만 사람에게 퍼져나가
허위단심 참이 되었구나
바람의 똥
여기
눈빛과 눈빛 사이
숨찬 마음으로
쌓인 이름들
다 소용없구나
저기
꽃 한송이 외롭다
---------------------
+ 오끼나와
온통 태풍
그러나 태연자약 아기가 태어나는 곳
태어나
힘껏 울어대는 곳
근원
이 아기 엄마의 뜨거운 양수 속으로
나도 들어가
그 아기 쌍둥이로 태어나는 곳
빨랫줄에서 날라간 빨래들
휠휠휠
바다 저승 건너가거라
온통 태풍
---------------
+ 자살바위
제주 사라봉
사라봉 옆
별도봉
별도봉 뒤
낭떠러지
여기 선바위
자살바위
여기 서서 한라산을 획 돌아다본다
여기 서서
제주해협 낙종의 소멸을 획획 앞으로 본다
전혀
제주 신구간 1만 8천신이 가고
1만 8천신이 또 온다
==========
+ 쪽지 하나
옛 고운 최지원께서
돌이 말할지도 모르고
거북이 돌아다볼지 모르는데
어떻게 글로써
산을 빛나게 하고
개울을 아름답게 하리오
도리어 숲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시냇불에게 무안을 당하지 않겠느뇨
라고 쓰거운 약 같은 혀를 내둘러 말하섰을 때!
이에 앞서
얼른
산은 눈부셔 빛나고
개울 또한
에미와 아기인 듯 어여쁘디 어여쁘도록 총총 회돌아
흐르더이다
시의 강호 제군
올해 며칠쯤
시와 시 아닌 것
다 놔두고
빈 손이시라
방금 숨진 송장의 빈 손이시라 그 뒤 불현듯 살아나
시라
-----------------
+ 풍경놀이
춘천 베어스타운에서
새벽 3시 반쯤 깼다
다시 잠들었다
7시 반에 깼다
박미현 부장이 8시에 오기로 했다 오고 있을 것이다
창 가득 산들이
하늘과 호수 사이에서 문을 열고 있다
추운 산들
겹겹인데
제 가끔 흩이었다
그 아래로 겨울나무들이
아침 안개를 조금 일으키고 있다
그 아래로
도무지 추운지 모르는 오리들을 호수 전체가 띠우고
있다
이런 때 만물의 이름들이 헛되지 않을 까닭이 없다
----------------
+ 하령에게
웬일로 바람 잔다 풀들의 울음 뚝 그쳤다
새끼도랑물 소리
새끼도랑물 소리 서로 속삭인다
바다 그 배래
아직 어디인 줄 몰라
쓰지 않은 시가 휠씬 더 시이다
---------------
+ 혜초사문
10대 소년 밀교승 혜초사문을 따라가면
내 마음도 별 수 없이 텅 텅 비어 버린다
고국으 왈가왈부 홀쩍 떠나
바닷길
천축에 가서
다섯천축 가서
모진 다섯천축 뒤
카쉬미르 산길 숨차 서른 살을 넘었나니
막막 타클라마칸사막 모랫길
거기 발끝
수박씨 하나 떨어졌다가
수박떡잎 나 있는 가을을 맞아
눈물 한 방울도
또한 어는 놈의 내생조차도 없었나니
회오리 솟는 거기쯤 텅 빈 세상에서
그는 오지 않았나니
============
+ 먼지의 노래
라오스
중국 월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정글에 꽉 둘러싸인
라오스
나도 라오스
미쳐 버린 개발도상국가의 하루하루에 포위되었다
천만다행인 건
옛 무성영화 낡은 필름 돌아
부챗살 아침햇살에 춤추는 먼지들
내 넋의 티끌들
얼마나 필사적인가
어디쯤
바다넘어
저 눈썹 진한 아열대 오끼나와 동쪽 상공
거기 부푼 침묵 속
태풍의 눈이 곧 태어나리라
기다린다
내 한반도의 기나긴 선과 악 한 번쯤 태풍 순회가 모
조리 데려가리라
그리고 먼지이거라 먼지의 춤이거라
-------------------
+ 선유도에서
천년 전
아홈 살짜리 최치원이
아버지 임지에서 태어난 신동으로
시를 읊었던 곳
천년 후
열일곱 설 호성이
육지의 전란 건너
호롱불로 시를 찾던 곳
다음날 저녁바다
온통 불지르고
혼자 울었던 곳
고군산 선유도
오늘밤 이 선유도의 이 집 저 집
처마 끝 등불이 와 있구나
저 건너
장자도
선시도
뜨믄뜨믄 등불이 와 있구나
25년 전 큰 바람 때
한꺼번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들 제삿날
25년 전
가오리 박대 쭈구미 백조기 따위밖에
모르던 어린 것들
어느새 퀴퀴한 어른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빼다박아
헛기침 인기척도
어깨쭉지도 빼다박아
자정 이슥 사신辭神하고 돌아서서
적이 하늘 어둠 쳐다보는 것도 빼다박아
동물들 하나하나 떠나가누나
천년 전과 천년 후 한통속인 듯
밤바다 저쪽 사뭇 시 읽는 소리인듯 무슨소리 들리
누나
------------------
+ 어느 자화상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국경이 있다
그 국경 언저리
오도가고 못하는 무국적자가 있다
그 단어들의 사생아인 시인
-------------------
+ 황해 앞에서
1만 년을 이 황해 가슴과 함께 살아온
뭇 조상 피 받아
황해는
내 고향
내 고향의 고향입니다
1만 년을 이 황해 넋과 함께 살아갈
아득한 자손으이 내일들로
황해는
내 세계의 처음 입니다
오늘 황해 파도소리 앞
나는 한 척의 통통배입니다 암컷 수컷 수평선이 달려
옵니다
==============15
+ 기성복 가게 앞=6
48년 전
바람 없는 봄밤 정릉 청수장 골목길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오늘 안성시장 건너편
기성복 가게 앞을 지나가다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 생떼 같은 아기 울음소리로
48년 전 정을
그 아기 울음소리를 다시 들었다
얼른 미모사꽃 한 다발을 사들었다 우연은 필연이다
---------------------
+ 나그넷길 몇 개
거두 절미
저 고대의 소년
혜초의 바닷길 몇 만 리 끝 아휴 살아 있었다
동천축 나루에 올라
택 없이
다섯 나라 떠돌아
서천축 간다라
설산
파미르고원
해골의 모랫바람 타클라마칸
기어이
당나라 장안에 이르기까지 아휴 살아 있었다 돌아오
지 않았다
그 일생의 왕오천축국전은 무엇인가
저 저승의 돈황 막고굴 밀교의 어둠 천년
그 굴 속 잠들었던
왕오천축국전은 무엇인가
1323년 5월 25일
익재 이제헌은
원나라 황제의 노여움 불러
귀향살이 떠나 버린
하늘가
티벳 사캬로
귀향살이 떠난 버린
충선왕을 구하려 애를 녹였다
그 사캬에서
겨우 청해성 도스마로 옮겨드렸다
원나라 복속국 고려의 산하는
밤마다 잠자리 뒤척였다
그러다가
고려 송도엥서 북경으로
그곳에서 시으로 서으로
저 옥문관 넘어
붉은 바위
검은 바위 도스마에 갔다
나귀 타고 가다가
걸어갔다
고된 몸 깨어나면
노숙천막 안에서 시를 지었다
걸어갔다
걸어갔다
말라빠진 충선왕을 알현하고 울었다
조선 후기
고산자 김정호
조선 방방곡곡 가고 갔다
산에 가
산을 재고
물을 재고
골짜기를 쟀다 시시콜콜히 마을을 쟀다
범과 곰 스라소니
고비를 넘겼다
금강산 구룡연 물의 깊이를
삼줄 이은 칡넝클줄로 쟀다 스물여섯 척이었다
비바람 때리는
백두산 천지에도 몇 번
바다 건너
한라산에도 올라
네 바다의 길이를 쟀다
이 필생의 나그넷길로
드디어
삼천리 강역 대동여지도를 이루어냈다
어느 곳도
어느 곳도
고산자의 지친 행로 아닌 곳 없이
가고
가고
또 가므로
드디어
나라의 온몸
나라의 온몸 핏줄을 이루어냈다
아 삼천리 조선
그 뒤 옥방에 갇혔고
그 뒤
이승의 나그넷길에
저승의 나그넷길을 더했다
1920년대 이극로는 숫제 무일푼으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공산당대회에 참석했다
돌아오는 길
두 다리 걸음품 팔아
그곳에서 바이칼호 돌아
몽고사막
쓰러지며 일어나며
내몽고사막
북경
사주
상해에 이르기까지
절뚝거리며 왔다
무르팍 뭉개져 버리며 왔다
고대 이래 이런 지극한 길들을
시시껄렁한 내가
감히 흉내내고 있다
자동차 앞자리 타고
기차 타고
14시간 비행기 타고
나그넷길 조상의 붕정만리 그 길들을 흉내내고 있다
허나
내 소원 하나 반드시 있다
장처 두 발로 걷지 않고
네 발로
산등허리 타고
네 다리로
강 가슴 타고
구름 배 타고 가는 듯
온 몸둥아리
내달려 가는 것
일필휘지 꼬리 소리치는 것 그것
-----------------------
+ 또 하나의 무덤
ㅡ 문산 아산 이동복의 무덤
한강과
임진강이
허어
허어 오랜만에 만나는 듯 만나는 곳
조강
조금 더 가면
예성강을 만나는 곳
분단국경
거기라면 좋겠다
바람 속
돛을 올리고 싶다
돛 올려
가고
가
저 황해도 장사곶 끝 인민군 초소 언저리
거기라면 좋겠다
해 지는 수평선의 허리 휘인 묵언
한 배 가뜩 실어다가
한반도 남북 정치의 각처에
두루
나눠 주고 싶다
며칠 동안만이라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면 좋겠다
살아
별 볼 일 없던 이동복의 꿈으로
바야흐로
황해 낙고 묵언 한창
---------------------
+ 만장봉*에서
내가 한 말
이미 누가 한 말이었다
한 팔 휘두르며
내가 외쳐댄 말
이미 누가 한 말이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나의 말은
어디 있느냐
내 울음조차도 누구의 울음이었다 철두철미 나는 없다
* 만장봉: 서울 근교의 북한산의 한 봉우리.
==============
+ 산수유꽃 핀 날
어린 왕
어린 조카인 왕 내쫒아 버리고
왕이 된 사나이
조선 세조
당신은 마마가 아니라
오직 나으리일 뿐이라고
끝까지
끝까지
세조더러 나으리하고 부른
성삼문의
그 등짝 찌직찌직 지져대는
달군 시뻘건 시고챙이 고문의
아픔
찌직찌직 타들어가는
역한 살 냄새 친국 고문의
그 아픔
오늘
너무 일찍 피어난 산수유꽃에 다가가 있다가
돌아섰는데
그 무지무지한 아픔의 4백 년 전 하늘이더라
어쩌자고
그때의 역한 살냄새의 맞바람이더라
-------------------------
+ 나옹이 나옹에게
저 하얀 구름은
저 하얀 구름만한
세상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네
저 태산준령은
저 태산준령만한
세상의 아픔을 보지 않네
저 청산리 벽계수는
저 벽계수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긴 긴 강물만한
세상의 굶주림을 보지 않네
저 달은
저 넓고 넓은 달밤 같은
세상의 온갖 욕망을 보지 않네
저 연꽃은
저 연꽃 다음해의 연꽃은
세상의 야만 판치는 레바논을 끝끝내 보지 않네
다 버리고
그냥 보숭보숭 구름이고 싶지
산이고
물이고 싶지
입 달리지 않은 달이고 싶지
어머나
저 꼭대기 쌍둥이바람꽃이고 싶지
담벼락 밑
닭벼슬 맨드라미고 싶지
그러지 마 해탈은 통곡일걸 어설프다 어설픈 미소 아
닐걸
-------------------------
+ 부치지 않은 편지
어느 누구의 손아귀도 사절합니다
숱한 생멸 속
지난 세월 한 번도 거를 줄 모르고
꽃들은 절로 절로 피었습니다
내 잠든 어리석음도 함께
흩뿌린 노랫소리 개나리꽃들이었습니다
그런 노래 저만치서
벙어리같은 백목련꽃들이었습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뻐꾸기소리 날 저물어
모든 빈 곳의 말없는 결핍 한 군데도 없습니다
지난 세월 해마다 어김없이 와야 하는 겨울이었습니다
추운 나뭇가지 밑은 손님처럼 조심스러웠습니다
다른 흔들림과 더불어
흔들리는 떡갈나무 가지들
아가위나무 가지 끝 장구채 우듬지들이
공중으로 설장구치며 뛰어다녔습니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어떤 아기인지
이 세상은 조금도 쉬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십 년 고향은 몇십 년 타향의 앞이었습니다
누가 물어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
였습니다
다만 떠도는 것이 아니면
그래서 떠도는 자의 노래가 아니면
끝내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도리어 고아 같은 산들을 길러냈습니디
이윽고 배 한 척 없이도 바다에 이르러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나의 고독이 나의 자유였습니다
오 수많은 이야기 속에 사람들의 길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누가 치지 않은 종일지라도
어느 옛 종소리가 돌아와
상기 새로 울리고 있었습니다
먼 마을들이 한층 더 가까이 와 두런두런거렸습니다
울음을 꾹 참았습니다
수많은 오류들이 반짝이는 물살로 떠내려 갈 때
오직 갈잎으로 억새가지로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무상이란
이 세상의 온갖 애칙이었습니다
애착의 착각이었습니다
저 세상조차도 이 세상이 만든 가여운 헛개비였습니다
갖가지 흥망성쇠들이
갖가지 곡절들이 갖가지 사연들이 아직껏 오고가는
철새들이
무상이기는커녕 항상이었습니다
가령 나의 어머니는 85세의 여름에
아들 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제삿날밤은 어떤 패설도 욕설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신령이 와 있는지
인기척으로 촛불이 흔들렀습니다
한밤중 제사는 결국에는 나의 제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살아 있으므로 죽은 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로 둘의 역할
다음날 지붕에는 기러기똥이 떨어져 있었으며
문 밖으로는 제상의 여러 길로 가는
하나의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30년 이상 많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깃발들이 휘날리며 찢어졌고
빨래들이 기구하게 빨랫줄에서 영영 날라가기도 하
였습니다
분노는 땅이었고 고통은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나 역시 바람없이 살 수 없었습니다
바람도 나 없이 바람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상이 곧 극한이었습니다
지난 세월 눈보라치는 날이 고스란히 쌓여있는
겨울 시베리아가 내 본적이였습니다
때로는 눈 덮인 광야 올데갈데없는
굶주린 짐승들의 절망인가 하면
때로는 보리밭으로 묵묵하게 눈 덮여 청청하였습니다
아직껏 몽고반이 지워지지 않은 아이들의
날리던 연 하나가 하늘 속으로 날라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모자랄 때
신들이 우세두세 함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신드이 하나둘 떠나 버린 썰물개펄입니다
그러나 봄은 반복은 아닙니다
봄밤 불빛 몇 개 떠 있는 바다의 커다란 어둠
여기저기 남몰래 동백꽃 피는 시간이었습니다
오 한 마리 말에 담긴 몇천 년의 시간일진데
내 얼굴을 바꿔줄 친구가 저 하얀 갈매기 울름소리
같은 미지로부터 날라오고 있습니다
---------------------------
+ 어느 날 저녁 한때
참아라
3천 년 전의 연꽃 씨앗 하나
땅 속 어디
꼭꼭 숨어 박혀 있다가
웬일로 세상에 나왔단다
이 씨앗을 지성으로 싹 틔워
마침내 밤이슬 함초롬한
3천 년 만의 연분홍 연꽃 겹겹으로 피어났단다
이쯤의 오래고 오랜 생명 침묵의 꽃 뒤인가
내 아내의 목소리가
마당 저편에서 어둑어둑 들려왔다
재철이네 무가 아주 달아요 올해 무는 맵지 않아요
여보
================
+ 순임이가 생각난다
어제 저녁때
10여 년 전 경기도 대학원
내 연구실 조교이던
인창중학교 국사교사 김진우가
그의 약혼녀 옹혜선과 함께 인사 나누리 왔다
11월 2일 정오
갈현동 뷰웨딩홀이 식장이라 한다
그날 아침
차를 보낸다기에
아니다 그곳이라면 지하철 3호선이 있다
차 없이도 된다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맞는 주례사를 해야 한다 정성을 들여야겠다
오늘 아침 6시 지나
1951 년쯤의 고향 풍경이 왔다
순임이 오빠 상태가
국민방위군으로 떠나는 날
순임이 어머니가
없는 쌀한 홈 구해다가
고봉쌀밥 한 그릇을
상태에게 막일 때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그 집
정작
순임이는
빈 배 꼬르륵이며
떠나는 오빠 서러워하며
닭똥눈물 떨구던
그 새벽녘 순임이가 생각난다
그 새벽녘 순임이의 배고픔이 생각난다
지금 살아 있을까
나보다 서너 살 위였으니
살아 있으면
일흔여섯이나 일곱
문득 그동안 멀리 멀리도 가 있던
나의 죽음이
순임이 생각에 뒤이어 따스하게스리 왔다
깨닫노니
죽음이야말로
어머니의 허공쯤인가
순임이 어머니가
성님
성님
성님
우리 성님
하고 좋아허던 내 어머니도 공찌로 생각난다
오끼나와의 무덤들은
다
어머니의 보지 모양이지
죽어
다시 돌아가는 어머니의 그 보지 속이지
----------------------------
+ 삼천포 마도횟집에서
시인 박재삼이 소년 시절
일본 동경 변두리 빈민굴에서 돌아와
사환 노릇을 하던
사환 노릇으로
수업시간 종을 치던
그러다가
한 교사의 눈에 들어
그 학교 학생이 되었던
삼천포고등학교의
교장과
교감
교사들과
그 학교 국어교사인
시인 김은정과 더불어
마도횟집 감성돔회를 먹게 되었는데
마침 날은 저물고 바다도 어둑어둑 떠나가는데
감성돔이란 놈
이 놈은 수커 암커으로만 고정되지 않고
때로 수컷이 암컷 되고
암컷이 수컷 되는데
딱히 성 전환을 할 까닭이 있으며
바로 성 전환을 해버리는
감성돔일 터
무릇 인간이라는 너 나도
오늘은 암커이다가
내일모레는 수컷이다가
또
암컷이다가
그렇게 성 전환해 가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그 얼마나 환장할 잔치 아니겠느뇨
감성돔회 먹고 난 나
어재는 암컷이던 나
오늘은 수컷인 나
풍덩
깜깜한 바다에 빠져 헤엄쳐 가는
한 마리 그 감성돔 누나이고저
-----------------------------
+ 미륵반가좌사유상의 오늘
아득히
50억 7천만 년 뒤에 오실
마이트레야를
아득히
56억 7천만 년 앞으로 불러내
꿈
마이트래야 반가좌사유상의 달밤
어찌 이다지
어찌 이다지 꽃 지도록 고요하냐
푹풍이여 오라
이 고요 모조리 가져가거라
그대의 사유는 너무 요염하다
어찌 이다지 어여쁘냐
암흑이여 오라
이 숨막히는 어여쁨 다 지워 버려라
아득히 56억 7천만 년의 오늘
나의 생은 물결친다
______* 75
집
강도
강설
극악
-------
긍지
기쁨
귀가
달밤
--------
먼동
무제
봄비
어둠
--------
짝통
출타
평화 1
평화 2
--------
평화 3
평화 4
평화 5
평화 6
--------
평화 7
평화 8
확인
회상
-------
효봉
향수
거미집
그리움
----------
그 무덤
그 아비
낙안읍
너에게
---------
니나노
동굴 밖
두 사람
무등산
----------
미인송
신새벽
아버지
이 세상
----------
중복기
태종대
한낮 님
가을 답장
-------------
나무노래
독도에서
또 너에게
비닐봉지
-------------
새끼 넙치
여기 저기
오끼나와
자살바위
-------------
쪽지 하나
풍경놀이
하령에게
혜초사문
-------------
먼지의 노래
선유도에서
어느 자화상
황해 앞에서
----------------
기성복 가게 앞
나그넷길 몇 개
또 하나의 무덤
만장봉에서
------------------
산수유꽃 핀 날
나옹이 나옹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어느 날 저녁 한때
-------------------------
순임이가 생각난다
삼천포 마도횟집에서
미륵반가좌사유상의 오늘
_________
고은 시 6
시인 마당/시인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