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
우리는 비속한 날에도
비속하기 짝이 없는 밤에도
비속한 말은 하지 않는다
밤마다 안드로메다 대성운이 있다
다음날 어딘가에 최고급의 낮달이 있다
둘의 산책에서
아내가 이런저런 일상을 이야기할 때에도
내가 이런저런 일상을 이야기할 때에도
처조카 결혼식 부좃돈 이야기를 할 때에도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 목숨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속한 말은 하지 않는다
어쩌다 치사한 배신이다
치사한 중상에도
건설업자의 천박한 사기에도
비속한 말의 화풀이로 말하지 않는다
그따위 비속한 것들을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왜냐
사랑의 주술이 꽉 막혀버리니까
말은 화학물질이다
말은 씨이고 꽃이고 하염없는 다음 생의 열매이다
비속한 말은
비속한 물질이다
싫어하는 타고르
그대가 하나는 옳다
세계는 진짜로 고상하다는 것
세계는 재앙으로
잔악으로
무엇으로 추락하고 있으나
기어이
우주의 시로 상승하는 날이 온다
보시라
먹구름장의 날이
하얀 새털구름의 날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비속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의 단독적인 품위 깨어 있다
우리의 유치한 명예 또한 꼿꼿하게 일어서 있다
왜냐
사랑의 존엄이 꽉 막혀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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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라사대
시경 국풍 가라사대
금슬상화(琴瑟相和)라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어우러짐이시여
이것도 사절하거니와
유림의사
부부싸움은 하루를 넘기지 말 것
이것도 사절하거니와
전해오는 말씀
해로동혈(偕老同穴)
살아서 같이 늙고
죽어서 같이 묻힐 것
이것도 단연 사절하거니와
우리는 이런 퀴퀴한 뒷방 말씀 없으셔도 되거니와
부엌도 침대도 함께 있는 곳
쎅스도 책도 함께 있는 곳
내 친구 루이스 랭캐스터
내 친구 부인 로이스 랭캐스터가 둘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홍적세 이래 둘이 아니거니와 적나라하게 둘의 하나이
거니와
어떤 뒷날 고슴도치들의 잣새들의 퀴퀴한 고전도 사절하
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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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정사론
이제 불초소생이 입을 열 차례입니다
랑케라는 사람이
역사가는 늙어야 한다고
누구한테 보내는 편징에서 말했습니다
행여 원숙과 교활이 그것이라면
저녁 어스름 노새인지 나귀인지 모르듯
그것이 그것이라면
역사가든 아니든 꼭 늙어야 할 까닭은 없겠습니다
돌이켜보건대
동양 삼국 근세에서는 총각 때부터
공자왈 맹자왈로 팍 늙어버렸습니다
한반도에는
대섬(竹島)이 열 이상입니다
충남 서산 앞다 보령 앞바다
전북 군산 앞바다
전남 영광 신안 앞바다 진도 고흥 앞바다
경남 통영 앞바다 굽돌아 대나무섬이 두둥실두둥실 떠있습니다
솔섬(松島)이 일곱 섬으로 그 뒤를 따릅니다
오늘따라 동양화 사군자 중에서 죽(竹)군자를 골랐습니다
대 그림 한 폭의 여백 적막 충만
이런데도 어린시절 고향집 대숲을 떠올립니다
영영 그 속에서 나가기 싫은 적이 있었습니다
죽림칠현 사연을 들은 것은 훨씬 뒤었습니다
인도 중부 죽림정사(竹林精舍) 대나무들은 사나웠습니다
살벌하게 피에 주린 가시들한테
걸핏 찔리기 십상이었습니다
2천5벽여년 천 마가다국 부자 가란타가
부처님께 그 대숲을 몽땅 바치고
국왕 밤비사라 폐하가 절을 지어 바쳤습니다
그 밤비사라의 왕위를 빼앗긴 채
그 대숲 절간의 골방에 유페되었습니다
어쨌거나 떠돌이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절의 부처님이 되신 이래
몇 소년비구들이 더러 대나무 가시에 피를 흘렀습니다
슬픈 사성제(四聖諦)였습니다
중국 죽림칠현 대나무들은 주로 맹종죽(孟宗竹)이었습
니다
봄날 죽순을 안주 삼았습니다
천축의 대보다는 어련무던 덜 사나왔습니다
그 대숲 속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웠으나
위진(魏晋)의 묵객이야
들어갔다 나왔다
나왔다 들어갔다
권세에 맞서 여러 토막으로 칼 받아 죽거나
그런 독한 북방기질보다는
느른한 남방기질로 살아 있거나 했습니다
혜강 상수 완적 산도 유영 완함 왕융 그네들께서
공자 따위 홑이불로 내치고 노장을 방석으로 즐기고
에끼에끼
예교 따위 저버리고 여봐라 권세 따위 비웃어
노소 없이 너나들이 탁 터버렸습니다
슬픈 무위(無爲)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성당成唐 이백이 첫 장안 포부 버리고
조래산 대숲으로 들어가
권커니 잣거니 취중의 시흉 낭자하였습니다
슬픈 신선놀이였습니다
일본 관서 대나무숲들이야 가는 데마다 울창합니다
성큼 아열대 숲인지라
안개 짙고 습기 진한지라
싹 베어내면 곧 웃자리 울울창창합니다
그런 대숲 안에
죽순요리 마흔 두 가지 비릿비릿 슴슴한데
다꾸앙(擇庵) 법사 앉아 있으면 적광寂光 깃들고
검객이 숨어들면 달빛에 칼날이 번쩍입니다
한 발짝 나가보아라
거기 할복 자결 사세구四世句 한마디
거기 십년마다 피바람 일어납니다
슬픈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고려 대나무숲은 그윽하고 따스합니다
왕대도 솜대도 죽순대고
조릿대 시누대 무슨 대 다 품행 방정합니다
고려라고 일곱 묵객 없겠습니까
명종 신종 연간 무신란 판
강호로 떠나
청담에 묻히니
이인로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이
중국 죽림칠현 본떠
해좌칠현海左七賢으로 자칭하니
그네들의 모임이 바로
죽림고회竹林高會였습니다
고려 대나무숲 아늑자늑합니다
그 대숲에 바람이 들면 그 대숲 바람소리 정녕 무욕입니다
이 풍류 이어져서
조선시대 당쟁 사화의 피범벅 난장 떠나
죽림과 청담파가 명멸하였습니다
슬픈 산림 사람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대나무의 보편성을 손꼽아보겠습니다
대나무 속 텅 빈 줄기 안에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들어 있습니다
대나무 마디마디는 단호 분명합니다
바람 불면 휘어져 바람소리 자욱합니다
동양 계절풍지대 여러 나라에서
대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절개를 뜻합니다
한번 푸르면 언제까지나 푸릅니다
심지어 대나무는 꽃조차도 아끼고 아끼다가
한번 피면 너도나도 온몸으로 피워대고
다음날 말라죽어버리고 맙니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은 온통 죽은 대나무 무덤이 되고 맙니다
슬픈 옥쇄玉碎입니다
이런 오싹오싹한 대나무의 생과 사를 아울러
대나무의 특성 내지 특수성도 있어야 합니다
저 인도 왕대 중국 왕대숲이여
저 일본 왕대숲의 밤이여
여기 한반도 남녘의 왕대여 시누대여
그대들 각각의 땅으로 하여금
그대들 각각의 특성이 사뭇 결연합니다
죽순맛도 다릅니다 대바구니도 다릅니다
중국 태공망의 대나무 낚싯대와
신라 말 서해안 어린아이 최치원의 낚싯대 다릅니다
이런 특수성 저편의 보편성이란
저편 보편성 이쪽의 특수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보편성이 특수성의 희석인가 해체인가
아니면 특수성의 상위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특수성으로 회귀하는가
또 그것이 아니라면
뭇 특수성 각자의 존엄 불허
하나의 원리로 통합한 일원론인가
결국 역사마다 역사의 악역이던 그 험악한 제국의 보편
성인가
다양성 오라
특수성 오라
그대들의 세계가 진정한 세계인 것
어서 오라
그리하여 세계 각처의 대나무들이 아닌
대나무 특수성 연합 이루어지이다
한반도 남녘 담양 대나무숲으로 갑니다
저런
저런
일년 만에 다 커버리고 맙니다
풀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라고
대의 덕을 칭송하는 묵객 있어
섬에도 대바람소리가
파도소리에 에워싸여 밤을 새웁니다
내일 영문학의 아내 집에 두고
국문학의 아내와 함께 담양 대나무숲으로 가렵니다
거기 가서 아내의 국문학으로
대숲 안에 잠기노라면
내 전생의 영문학도 거기 와 놀고 있겠습니다
불초소생이야 아내의 뒤란에서 사운대는 대나무 한 개이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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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에서
보르헤스 부인 고다마 보르헤스 가끔 생각나
작은 키에
큰 키 남편의 팔을 끼고
빠리 쎄느 강 기슭을 걸어가면
그 며칠 지나
스위스의 며칠 지나
혼자된 고다마 보르헤스 생각나
내가 그녀한테 불가으이 속담을 말하자
스치는 옷소매 인연도
삼생 인연이라는 것
하물며
이 세상의 부부 인연
오백번 이상이나 부부 인연 이후라는 것
다음 세상에서도
위대한 보르헤스를 만나시겠다 말하자
안 만날래요
안 만날래요 하고
단호히 말했을 때
나는 웃었다
내 아내도 웃었다
그녀도 멋쩍게 웃었다
그녀랑
누구랑
누구랑
일주일을 지내면서
로마와
가톨릭과
유대와
무엇과
무엇이 층층층을 이룬
꼬드로바 문명화석으로
내 근대의 단순한 문명을 뉘우쳐
시를 읽고
발제를 하고
새벽 두시까지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고
다음날 토론하고
또 먹고 마시고
박수소리 일주일을 보내면서
네로으 충신이다가
쎄네카가 태어난 곳에서
쎄내카의 말 한마디 떠올리기도 하며
일주일을 지내면서
아침 식탁에서
나는 아내한테 묻지 않았다
당신도
다음 세상에서
나 안 만날레? 하고 묻지 않았다
로르까네 집 따위
로르까 무덤 따위 두고
꽈달끼비르 강 건너
오리브 산비탈
그라나다로 가는 길 깨달은 바
당신은 응축이고
나는 확산이고
다음 세상 따위 전혀 없을 것 오직 한 세상일 것
그것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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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
1984년 가을
아내가 몸속에 아이를 담고 있을 때
새로 잇대어 지은 방
휑한 방
불빛은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샘솟는 것
샘솟는 불빛 밑
둘의 밤이면
서로 책을 읽어준다
그녀가 읽고
내가 읽는다
언제 그녀의 입이 내 귀
내 귀가 그녕의 입어었던가
마침 일본 이회성이 보내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아내가 읽는다
아내의 정신이
내 육체가 된다
님 웨일즈가
옌안 토굴의 김산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강한 눈빛에 끌려간다고 말한다
대장정 이후의 토굴 속
흐린 석유등불 밑
김산의 눈빛에 불빛이 튀겨
그 불빛이 님 웨일즈의 눈빛이 된다
언어 이전의 언어인 일치의 눈빛
그 강렬한 것
그러므로 거꾸로
약하디약한 것
아내가 몸속의 아이와 함께 나를 본다
『아리랑』의 첫머리는
어느새 어중간에 이르렀다
밤 이슥
딱따구리 울음소리가 힘찼다
힘차게 어둠을 찍어대니
어둠이 아픈 새벽으로 뒤척였다
아내의 몸속에서 아이가 잠들었다
내일 아침
또 발길질을 하리라
그 다음날 그 다으날
아내가 읽고 난 데서부터 내가 읽었다
아내의 귀는 내 귀보다 더 깊다 열 길 밑이나 더 깊다
뒷날 나는
님 웨일즈의 표창을
한국 정부에 청원했다
한국에서 리영희 백낙청이랑
일본에서 오오에 겐자부로우 이회성 등이랑이었다
표창할 듯하다가 말았다
뒷날 나는 황사 진한 날
마오의 「옌안문예강화」 몇장을 읽다가 던져버리고
오래 잊었던 『아리랑』을 찾아 읽었다
지난날의 밤이 억울한 듯 다시 왔다
나 혼자서도 차츰 아내의 입 차츰 아내의 귀였다 봄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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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전화
아내의 목소리가 왔다
오다니
오다니
이 행성 밖의 다른 행성에서 그 목소리가 광년의 빛으로
왔다
심청으로 던져지고 싶었다 깊은 달밤의 인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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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본 이후
파두의 밤길이었습니다
돌아온 호텔 객실 TV
CNN도 BBC도
온통 북한 핵문제였습니다
여기까지
여기 이베리아 반도까지
십년 뒤에도 물고늘어질
나의 운명 한반도의 난제가 와 있습니다
끌끌 혀를 찬다고 될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아, 언제나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
언제나 음식타령이나 하고 날씨타령이나 하고
축구타령이나 하고 살 수 있을까
다음날 아내와 함께
라베르다테 거리를 걸어서
산착장 꼬베르씨우 광장까지 내려갔습니다
우리도 그냥 관광객이 되었습니다
비둘기떼 대신 갈매기들이
천년의 관습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옛날옛적 저 오이쎄우스가
여기까지 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바람 피우고 도망가버린 뒤
버림받은 여자의 분노로
온통 땅이 일곱 언덕으로 갈라졌습니다
옛날옛적의 옛날옛적인 오늘
아내는 바깔라우 요리를 청하고
나는 막 도착한 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떠나는 배를 생각했습니다
저 16세기 말 젊은 까몽이스가
궁정에서 쫒겨나
북아프리카 싸움터 병졸로 떠나는 배였습니다
돌아올 수 없구나
돌아올 수 없구나 하고
자신의 목숨을 씹어삼키는 배였습니다
어쩌다 희극 「쎌레우쿠 왕」탓이기도 하고
왕실 후궁에게
감히 뜨거운 시를 보낸 탓이기도 하였습니다
까몽이스
까몽이스
북아프리카 싸움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습니다
애꾸눈 병줄로 살아남아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았습니다
인도양 건너
인도 고아에서 보초병 노릇이었습니다
남지나해 건너서
중국 마카오 보초병이었습니다
고국은 아득하고 아득했습니다
고국의 언어만이 필사적으로 자신이었습니다
동양의 느린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 세월이 헛세월이 아니어서
본국 왕 조앙 3세 승하로
새 왕이 즉위한 뒤
까몽이스 추방령이 풀려났습니다
멀고먼 귀국의 뱃길 몇번인가 울었습니다
새 왕의 위로를 받으며 다시 궁중 신하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왕 승하로 쫓겨나
오직 가난 속에서 시의 날들을 살았습니다
초 토막 촛불이 다하면
기르는 고양이 눈빛으로 시를 썼습니다
마침내 웅장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디스」가 완성 되었습
니다
까몽이스
그는 뽀르뚜갈입니다
뽀르뚜갈
그것은 까몽이스입니다
어느덧 새월은 세월 노릇을 어김없이 해오고 있었습니다
487년 뒤
한국의 한 묵객인 나는
아무리 촛불이 혼전만전이라도
그 촛불 버리고
아내의 눈빛으로 시를 씁니다
1988년인가 1999년인가
그 이래
아내의 잠 속의 잠든 눈빛조차도
어둠이다가 빛입니다
깨어 있는 그 눈빛으로
내 오장육부의 캄캄한 속속들이
거기에 시들이 꼬막에 꼬막 살점으로 들어찹니다
시의 시작은 이렇게 어둠이다가 빛입니다
최고의 서쪽으로
아내의 하루가 간다 내 하루가 울며불며 간다
------------------------
+ 다시 국제전화
정전이다
서울과 런던의 시차
여덟 시간
내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목소리가 왔다 아내의 목소
리다
코베트가든 인도인으 셋방에서
안성 마정리 집 2층까지
아내의 바다 밑 고래들 잠재우는 목소리가 왔다
불이 들어왔다 남쪽 바닷가의 소금들이 반짝이리라
무릎 상처가 낫는다
벌써
이른 딱쟁이가 부끄러이 앉았다
아내의 환한 불빛이 들어왔다
내일 아침 세상의 모든 이름들에게 소금 같은 단호한 꽃
이 피리라
=======
+ 일몰
최고의 서쪽으로
아내의 하루가 간다 내 하루가 울며불며 간다
-----------
+ 변신
자고 나자
나는 나의 아내였다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이었다
유토피아 여기
-----------------
+ 사적인 신
저 호모싸피엔스싸피엔스의 누구
저 사라진 네안테르탈의
누구
저 선사새대의
누구
누구
그때의 신은 시였다 아흐 시이고말고
그러다가
이놈의 역사시대의 누구
이때의 신은 권력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어둠의 자유를
나의 자유로 삼아야 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내 근원이
어둠속에서 태동한다
밤새도록
어둠의 태아가 꿈틀댄다
그렇고말고
신이 시였을 때가
내 몸의 어딘가에 박혀 있는
선사의 기억 속에서
나는 자유이다
몇백만년의 선사가 갔다
몇백만년 뒤
몇천년의 역사가 있다
아제 나의 신은 아득하지 않다
기껏
오백년 앞의 세종과
기껏
삼십년 뒤의 이상화
나의 신은 지극히 사적인 신이다
나의 신은 지극히 내적인 태극의 거기이다
세종
이상화 둘이다
먼통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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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우버 해협
사적 여행 몇번
빠리에서 깔레에 갔다
빠리는 먼 곳이 없고
깔레는 먼 곳이 있었다
강풍이었다
깔레는 먼 곳이 있었다
깔레에서 배를 탔다
파도쳤다
파도쳤다
순결의 분노로 파도쳤다
선실 밖으로 나왔다
파도 속에서
강풍 속에서
옷자락 깃발이 찢어지게 휘날렸다
옷 속의 몸 쓰러지며 춤추었다
파도자락이 덮치고 덮쳤다 옷자락이 젖어버렸다
얼린 차령이가
파도 기둥에 에워싸여
강풍 속에서
소리쳤다
순결의 분노로 소리치며 춤추었다
어린 딸의 광기가 처음 나왔다
엄마와
아빠는 기쁨 속에서
놀라움이 두려움이 솟구쳤다
영국 백아 벼랑이 달아나고 있었다
도우버에는 더 먼 곳이 있었다
강풍이 갔다
아무도 수습할 수 없는 적막이 있었다
캔터베리 히당 첨탑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셋은 광기를 잊었다
춤도
파도도 까마득 잊었다 입 다물었다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풍경 속의 양 몇마리를 보았다 잠든 순결이었다
런던 빅토리아 역은 먼 곳이 없었다
아내에게 정든 곳
나는 아내의 곳에 정이 들었다
장차 살 곳인 줄 모른 채
하나의 꾸러미를 받았다
기차 차장이 주는 어린이 선물 연필 한 다스가
무엇인가를 쓰기를 그리기를 기다렸다
아내의 옛 기숙사에 갔다
거기 가서 문턱에 앉아보았다
나는 아내의 과거였다 인문의 충족이 왔다
하지만 아내는 나의 과거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나
과거 이전
나의 야만의 처음이었다
나는 레쎌가에서 동서남북 없는 철부지였다 사랑 안은
그렇다
===============
+ 모월 모일某月 某日
모월 모일
화와 함께 살다
모월 모일
화와 함께 살다
모월 모일
화와 살다
모월 모일
화와 살다
모월 모일
화와 함께 살다
모월 모일
화와 함께 살다 아직 죽지 않았다
------------------
+ 말라가에서
진리가 슬프다고
진리가 파랗게 슬프다고 말한 사람 있지
아냐
그보다 먼저
맨 먼저
사실들이 슬퍼
사실들이 무지무지 시뻘겋게 타는 노을로 슬퍼
사실일까
네안데르탈의 핏줄 영영 끊어졌을까
사실일까
호모싸피엔스싸피엔스 핏줄만이
철갑을 두르고
끊어지지 않았을까
기어이 끊어지지 않고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사실일까
저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지나
끊어져도 그만
끊어지지 않아도 그만인 핏줄 이어
토기 구워
거기 밥 담아 먹기에 이르기까지
핏줄 이어
이 지경의 핏불 어디까지 와
어디까지 가
어디의 어디쯤에서
뚝 끊어져버리고 갈까
사실일까
현생인류 지나
현대인류 지나
어디의 어디의 어디쯤에서
괄시하던 버러지에게나 맡기고
영여 핏줄 끊어져버리고 말까
꿈 설친 나그네
여기에 있다
서부 지중해
그 많고많은 파도소리 쌓이는 곳
말라가에 와 있다
말라가 망루 밑 야외식당
아내는 돌연 아내가 아니고
나도 누구였다
아내의 시간은 인류사의 시간이었다
끊어진 네안데르탈의 핏줄이
아내의 몸 안에서
몇십만년 긴 시간의 고열로 허공이 녹아내린다
진리로 사실도 필요없다
슬픔도 필요없다
사랑은 언어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언어가 필요없다
아내가 청한 요리가 과분하게 나왔다
포도주 로삐스 에르마노스 한 병도
긴 그림자를 달고 나왔다
나의 핏줄은 호모싸피엔스싸피엔스의 핏줄일까
사실일까
돌창을 던지면
돌도끼로
생고깃덩어리를 자르던 핏불일까
사실일까
끙끙 앓던 중상의 네안데르탈의 핏줄 아닐까
나는 당돌하게 아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아내의 시간
그 시간의 먼 상류로
그 시간의 캄캄한 하류도 모르고
지금의 사실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곳
내일의 말라가가 몇십만년 전의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는
그곳
-----------------------
+ 아직 가지 않은 곳
사랑을 정의하렵니다
주저하며
사랑을 정으하렵니다
박새가 가지에 앉았다가
방금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분리되지 못합니다
기어이 두 사람이
한 사람의 돌입니다
사랑을 정의하려 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사랑을 정의하렵니다
태고 이래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사랑을 정의하지 않으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정의되지 않으므로 비로소 사랑입니다
무수한 정의들 이전
무수한 정의들 이후
사랑은 그냥 먼 사랑입니다 먼 곳입니다
먼 곳이 있습니다
갈 곳이 있습니다
사랑은
더 많은 갈 곳입니다
저 수평선이 사랑입니다
저 수평선 너머가 사랑입니다
도달할 수 없는 도달이
오늘밤도 사랑입니다
빅써
못 간 레나 강변
낮선 거리에서
빠른 북국 사투리 속에서
가방을 풀고
하룻밤 옷을 걸고
남국의 음식을 먹는 것이 어설프도록 사랑입니다
회고컨대
이십몇개국 도시들을 함께 갔습니다
예측컨대
더 남아 있는 곳을 함께 갈 것입니다
상화와 함께
내 75세 85세도
나는 일만 미터 상공의 나그네일 것입니다
잠들기 전
나는 상화와 함께
갔던 곳을 손꼽아
갈곳을 손꼽아
밤 이슥이슥합니다
수탉 옆의 암탉이 봉새의 알을 낳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상화는 나와 함께
또 지도를 그립니다
천년의 도시를
천년의 도시와 마을이 이어지는
주체가 아닌 객체의 지도를 그립니다
사랑이 주술이듯이 오랜 목적지들의 오랜 상호 주체의 여
행이 사랑입니다
--------------------------------
+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wj 1963년 1964년 1965년 가을쯤
그때 자주 고개 돌렸던 곳
고개 돌리면
있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것
이상하구나라는 말이 나의 말이던 곳
2010년 가을
라면을 먹다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곳에
내가 있는 것은
내가 없어야 할 곳에
내가 있는 것
이상하구나라는 말이 또 나의 말인 곳
왜 네가 나를 아직까지 사랑하는지
왜 나는
네가 없을 때마다 적막한지
왜 적막한 독감인지
왜 적막한 말라리아인지
왜 라면 먹고 나면 정처없는 한숨이 나오는지
이상하구나
모레는 네가 올 것이다
모레까지
하루 이상이 남아 있다
모레의 푸른 하늘이 올 것이다
이상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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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즈엔드
가족은 정숙한 영국 기차를 탔다
모든 것이 완만하다
19세기 같다
8세가 같다
편지의 안아부가 기다랗다
풍경들이
창밖에 고대 숙여 아직 빅토리아시대로 잠겨 있다
내 마음도
조금
성급 따위를
몇십년 만에 실례를 무릅쓰고 내보냈다
조금
성급 따위도 나보다 앞서
아주 서서히 물러갔다
배추들을 뽑은 뒤의 배추밭이 완만하고
배추밭 다음 목장 한쪽 양들의 동작이 동작이 아닌 듯 완
만하다
콘월 반도
플리써스에서
작은 거짓거리 트루로에 갔다
거기서
이층버스를 타고
펜잔스로 가는 길
아직 육 백년 전 술집이 있다
외딴집 2층
강술 한잔 뒤
펜잔스
버지니아 울프네 별장 근처에서 별이 총총한 잠을 잤다
랜즈앤드 꽃
대서양이 서슴지 않고 시작되는 곳
땅이 끝나는 곳
여기 와서
가족이 머리칼들에 무작위의 천막 바람이 누누이 왔다
그러니 파도소리가 느릭느릿 확대되다가
파다소리가 더 느릿느릿 축소된다
가족은 가족 이전부터 다시 가족을 유구하게 시작한다
사랑은 반사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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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시한 날
너무 크구나
너무 오래 크구나
사랑
몇천년부터
줄곧 커다랗구나
사랑
오늘 아침에도 누가 커다란 사랑을 커다랗게 말한다
사랑이야 정작 크지도 작지도 않을 터
그러나 오늘 아침 멍청한 한 한마디
사랑은 그것이 정녕 사랑이라면
적은 사랑일 것
남극 팽귄 어미가 새끼에게
자연 그것일 것
남극까지 갈 것 없이
우선 과부가 산 너머 홀아버에게
자연일 것
봄일 것
봄의 독새풀 빛
여름
가을의 단풍잎새
겨울일 것
추워서 서로 부둥켜안길 것
조금씩 세월의 거리에서 꾸벅꾸벅 졸음이 잦아질 곳
내 밥이
누구의 굶주림인지
가만히 헤아려볼 것
내 술이
누구의 설움인지
문득 술 깨어나 깨달을 것
내 삶이
행여나 누구의 죽음과
뒤바뀐 건 아닌지
사뿐사뿐 의심할 것
여기 미움만도 못한 식어버린 미움만도 못한
지지리 못난 사랑
오늘은 어제의 못난 핏줄
내일은 오늘의 정신 또랑또랑한 핏줄
이런 오늘과 내일 사이로
시사한 날
시시한 사랑일 것
바라건대 내 사랑이
한구에서 가장 시시한 사랑으로 낙후되고 말아야 할 것
꼴찌 포구의 한 쌍 갈매기 그것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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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의 밤
민용태 번역의 로르까 「꼬르도바」를 언제 읽어보았더라
그 숨가쁜 시 읽고
소주 먹었던 밤이
80년대였더라
90년대였더라
그 밤만 달랑 남겨져
그 밤의 로르까 아이 밴 나머지
그 시 속의 꼬르도방에 왔다 나는 괴조물이 아니다
꼬르도바는
나에게 먼 곳
로르까에게 죽음이 기다리는 곳
멀고 먼
고적한 그곳 꼬르도바
나에게
내 발길이 닿지 않을 곳 먼곳
기어이 발길 닿아야 할 곳
여기에 왔다
공산당원 꼬르도바 시장 주최의 후한 만찬이 끝났다
새벽 세시였다
어리벙벙 별들이 다 떠서 기울어갔다
그 만찬의 사석
보르헤스 미망인 고다마 보르헤스가
죽은 보르헤스와 함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아내와 나는 어렴풋이 알아챘다
누구에게 무엇이 되는 것
누구에게 무엇이 되지 않는 것
씨앗과 토양
씨앗과 천후
씨앗과 씨앗 속으 ㅁ아무도 모를 무위라는 것
세 사람의 누구도 그것을 입밖에 내보이지 않았다
로르까의 집과
로르까가 처형된 밭뙈기와
로르까의 무덤 따위에 대해서도 쉽사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누가 혼자 넘겨질 때를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혼자 남겨져 가슴속에 담아둔얼굴을
홀쩍홀쩍 그리워하는 때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날
꼬르도바의 거리에 자본주의 일렬종대 해신으 손님이 많
았다
만나기 전의 아내가
내가 모른던 아내가 거기 있었다
사랑 이전 거기 가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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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잔이 넘치나이다
젊은 날
제주 앞다
그 늠름한 만월 달빛 출렁출렁 넘치는 밀물에
최소한
그 만년 이후까지 갈
그 존엄의 밀물에
내 막다른 몸 던져 맡겨버리려 했나이다
허리에 유달산 돌 매달아
영영 흔적 없어져버리려 했나이다
그 우연한 달밤 바다 복판의 죽음이
온 세상의 찬란한 삶들보다 나 홀로 찬란했나이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술 못 깨어나 구차하게 살아왔나이다
그러다가
삶의 저녁 어스름
사랑하올 그대가
차려 내온 그릇마다
그 숨 벅찬 밀물의 만찬이었나이다
이전부터
이미 넘쳐
어쩔 줄 모르게
엎지를 뻔하며
가까스로 지상의 술잔으로 놓였나이더
무엇이건
사랑하올 그대의 것은
모조리 모조리
넘치나이다
내 운명 몇곱절로 넘어 분에 넘치나이다
단 한번도 넘치지 않은 잔이 없었나이다
어찌할 바 모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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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이유 없이 갠 날이어요
누가 올까요
이유 없이 갠 날
몇달 전의 눈보라이거나
몇달 뒤의 궂은비이거나
그런 날들 마다하고
이토록 갠 날
누구의 넋으로 올까요
생 너머
사 너머 바람 한점같이 무자취로 올까요
슬쩍 풀끝 하나 건드리며
누구네 자취로 왔다가 갈까요
아니어요
누가 오는 것
누가 왔다 가는 것 아니어요
당신 만나기 전의 어느날이 이유없이 당신의 날이 된 오
늘이어요
왔다 갈 오늘이어요
오늘이란 오늘
다 어느날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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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며
아흐
아흐
이런 사통팔달ㄹ로 꽉 막힌 나라의 나에게
기다리는 사람 있다
이런 허무맹랑한 꿈의 나에게
해 지는
산바람 내려오면
침 고요히 삼키며 숨 삼키며
아직 제 둥지에 오르지 않고
또 한 바퀴
또 한 바퀴
빙빙 제자리걸음의 원을 도는 비둘기가 있다
1980년대 신군부시대에도
내 자오선의 세월은 간다
벌써 여덟시 반
전화가 없으므로 전보가 온다
오늘도 전보 두 군데
나는 술 마실 자유밖에 없어도
술 마시지 않고
초저녁 상현달을 본다
낮에 보이지 않는 것이
밤에 보이는 것
어디 너뿐이냐
벌싸 아홉시 지났다
을지로 3가역에서
3호선을 갈아탔으리라
충무로역 지났으리라
도르프만이 천박하다고 비웃던
충무로역 인조 암벽 지났으리라
옥수역 지났으리라
교대역 지났으리라
남부터미널에서 버스 떠났으리라
고속도로
기흥
오산 지났으리라
안성 인터체인지 나왔으리라
공도 지났으리라
이제 동산 입구에서 내렸으리라
9시 45분
나에게 기다리는 사람 있다
이토록 밤이 저쪽에서 이쪽까지 미해결로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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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각앞에서
내 70년대는 씨앗이었습니다
내 80년대는 싹이었습니다
1983년4월
아직 쌀쌀할 때
전두환의 때 호헌철폐 이전의 때
전후좌우
팍팍할 때
나에게 아무도 모르는 설렘이 뉘우쳐 솟아올랐습니다
바람 부는 종각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자동차들이
멈췄다 오고
멈췄다 갈 때
마침내 밤하늘 파란색 웃옷 입은
그가 급히 차에서 내렸습니다
새벽하늘 속의 깊은 곳이 내려왔습니다
저 북극성 쪽
한낮에는 없는
그곳의 한 곳을 대신한
푸른 하늘의 한 부위가
그의 몸으로 내려왔습니다
그의 하늘을 비추어낼 먼바다의 주저하는 밀물이
나의 마른 땅에 긴급으로 들어왔습니다
더이상 그 무엇도 필요없습니다 사흘을 굶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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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부끄러움
삼십년의 가시버시인 우리
아직도 부끄럽습니다
두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당신 앞에서
내 속옷 갈아입지 못합니다
내 앞에서
당신 앙가슴 아무렇게나
내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내 노골적일수록 끝끝내 노골적일 수 없습니다
삼십년의 가시버시인 우리
아직도 사랑은 끝으로부터 아득한 처음 다음 어느 가녘
입니다
가만히 엿보자니
돼지 암컷수컷도 서로 부끄러워합니다
어린 멧비둘기도 사춘기 뒤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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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일
지금 나는
조금도 모호하지 않습니다
확실합니다
조금도 애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대를 똑바로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느
명료하게
조금도 오차 없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대와 만날 수 없는 날들을 생각합니다
그대와 영영 헤어져
또다시 그대와 만나지 못하는 날들의 거리를 생각합니다
백령도와 마라도가 만나지 못하는 것
북도칠성의 누구도
북두칠성의 누구를 만나지 못하는 것
지금 나는
그대와 만나지 못하는 날
그날밤의 별들의 심연을 기억합니다
지금 나는 무능의 눈물밖에 이것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갑 속의
그대 사진밖에 없습니다
그대 아직 돌아오지 않을 때
기다리는 나의 뼈마디들이 실재에서 부재 쪽으로 자꾸
흩어져갑니다
후일이 오고 있습니다
--------------
+ 타고르
그대의 할아버지도 마하트마이고
그대의 아버지도 마하트마였다
그대의 가계는
신의 혈족이었다
함부로 싫어할 수 없었다
그대의 시는 기도이다
그대의 시는 찬송이다
함부로 싫어했다
그제도
어제도 싫어했다
오늘 오전도 싫어했다
그러다가 오늘 오후에
그대 한마디를 도저히 싫어하지 못하고 온전히 받아들
였다
나 없는 그대
그대 없는 나는 무이다
오늘 오후 그대의 그대가
곧 나의 그대였다
저 서쪽 어느 오아씨스의 경전 이쪽
화엄경 몇개의 품 이쪽
그대의 이쪽
나의 대림동산에
늦게 솟은 나의 샘물이었다
그동안 나는 터무니없이 무였다
그대로서
나는
몇십년 동안 무가 아니었다
그대로서
나는
몇십년동안 무가 아니었다
오늘밤 그대는 나로서
그대의 나일까
그대의 넋은 내 식도일까 위일까 긴 소장 대장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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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목소리
시차의 시간이
어디에서
어디로 온다
아내의 여서 모서리 충실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온다 사
랑이다
어느 한 곳에서
아내의 해가 지는 목소리가 온다 사랑이고 사랑이다
이 목소리이면 다이다 다른 것은 없다
내 귀가 갑자기 먹먹하다
이어서
내 눈 못 뜬다
이 어둠이면 다이다
어디서 달 뜨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다
-------------------------
+ 남겨둔 시베리아
이제 2년이 남았습니다
10년 전부턴가
9년 전부턴가
어느 방송사에서
15일쯤의 시베리아 기행 청탁이 있었습니다
가겠다는 말이
입안에서 나오려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곳만은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젊음이 전혀 없던
젊은날 이래의 내 꿈이 시베리아 여행이었습니다
오래 남겨둔 여행이었습니다
몇해 전부터 이 여행을
아내와 함께 가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슬며시 아내한테 떠보았습니다
아내의 동의는 호응의 무인이었습니다
이제 2년이 남았습니다
아내의 정년 기념이 될 것입니다
오랜 내 꿈이 아내의 꿈으로 건너갔습니다
시베리아 타이가
시베리아 툰트라 지나면서
아내의 말을 솔깃솔깃 들을 것입니다
나의 몸에는 벌써 많은 감탄사가 들어 있습니다
벌싸 바이깔을 지나갑니다
몇날며칠의 자작나무 사이 지나
우랄입니다
우랄 서쪽입니다 운명이나 혁명이 보일 것입니다
이제 2년이 남은 아내의 시베리아입니다
시베리아 이후가
아내와 나에게는
다른 사랑의 시원일 것입니다
지구상의 사상들이여 맹신들이여
그따위 다 가버린 어는 삶일 것입니다
마침내 살균되지 않은 땅에서
다른 삶들 속의 삶으로
다시 싹틀 사랑의 시원일 것입니다
=======
+ 지각
스무살의 사랑 내 것이 아니었다
소월이나 네루다의 것이었다
스무살도
서른살도
사랑보다
허무가
허무에 앞서
죽음이 내 것이었다
내던져도
깨어지지 않는 양재기가 미웠다
통금시간 직전
내가 미웠고
내 앞의 누가 미웠다
가장 유능한 미움으로도 죽음을 버리지 못했다
쉰살 지나
네가 사랑하는
내가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참을 수 없어
내가 너를 더 먼저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착각의 내일이 바로 닥쳐왔다
화살들 퍼부었다 막을 수 없는 불화살들 쏟아졌다
식민지 36년의 굶주림 끝
나 자신의 학대
분단 몇십년의 만취 끝
나 자신의 저주
사랑은 너무 늦게 내 몸에 박힌 화살들이었다
바야흐로 이전의 나 없애버렸다
너로서 영혼은 화살 없이 바람이고
나로서 사랑은 화살 없이 바람소리이다
보라 늦은 것은 피 흘려 일찍 늦은 것
--------------
+ 크레타
더이상 푸르를 수 없다
푸르러도
푸르러 더 푸르러
나는 네 뒤에서 침묵을 묻었다
눈도 오지 않았다
비도
가랑비도 철저하게 오지 않았다
푸르러
더 푸르러
나는 네 앞에서
침묵을 파해쳤다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
푸르러
푸르러
더이상 사랑의 극단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
푸르러
푸르러
------------------
+ 네가 화낼 때
네가 화낼 때
나는 사흘이나 나흘이나 죽어버린다
밥맛 없이
밥 먹는다
네가 화날 때
몇달 만에 화낼 때 손가락으로 식탁을 똑똑 두드릴 때
이 세상 전체 캄캄하다
숨죽인다
도망갈 데 없다
장자 남화경(南華經)에도
숨을 데 없다
아무도 모르리라
화장실에서
내 오줌도 바로 숨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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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겨울옷을 벗었다
나는 아직도 벗어냐 할 것이 있다
봄옷을 벗었다
벗을수록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한밤중
내 껍질이 벗겨지는 꿈속
아파도
아파도
피 흘리며 아파도
아파서 외쳐대는 내 꿈속의 비명도
벌거숭이가 아니다
고향을 떠나도
가야산을 떠나도
동해 서해를 떠나도
한라산을 떠나도
서울을 떠나도
베를린을 떠나도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벗어도
벗어도 떠나버려도
응애응애 울어대던
내 탄생의 벌거숭이가 아니다
그 탄생조차 벌거숭이가 아니다
배추밭에 나비 오리라 장다리꽃에 벌 오리라
안성을 떠나도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나는 카르마로 너에게 간다
너의 남극으로 간다
너는 나를 몰라보는 내 팽귄이다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사랑할수록
사랑할수록
나는 토할 것도 없이 절망한다
언제까지나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
+ 백년 뒤
그리도 길고길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문자의 소설이 있다
그리도 시골 아가씨네 쏘네트 목소리 담긴 시가 있다
토마스 하디의 시 「1967」은
시골에서
대초로 나온 뒤 같다
그의 새언 1867년에
백년 뒤의 1967년을 노래한다
백년 뒤의 오늘
내가 살아 있지 않다는 것밖에 노래할 수 없다고
노래한다
나도 덩달아 노새로 나귀로 헛발질하며
2011년 2월 어느날
2111년 2월 어느날쯤 그때를 노래한다
아래와 같다
백년 뒤의 오늘 나는 황공하옵게도
내 아내였던 그이의 방에 걸린 풍경화이리라
그이의 밤과
그이의 새벽꿈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내려다보리라
잠든 신 잠든 삶의 그이를
지극히 아득한 귀의로 아득한 방황으로
아침 새소리 이슬 털릴 때까지 내려다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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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의 신부
5월의 신부를 본다
다음해
5월의 신부를 본다
다음해
다음해
다음해
다음해 5월의 신부를 본다
1983년 5월 5일 이래
해마다 5월의 신부를 본다
아니다
미리미리
2189년 5월 신부를 본다
어떤 저승도 필요없다
기어이 해골의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5월의 신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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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눈빛
딸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공중파 방송을 본다
TV 화면이
당신의 눈에 들어오다가
당신의 눈빛에 막혀나간다
틀림없이 당신의 눈빛은 아주 오래된 조상의 직관이다
또 직관은 다른 행성의 혼이다
배가 별의 별빛이
25광년 전의 것
25광년 저쪽 어디에서
몇십년 후의 것
지금의 것이
아무런 거리를 두지 못하는 눈빛
밤이 깊어저 밤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였다
딸의 전화가 왔다
당신의 눈빛이 우주의 어디로부터 와서 서반구의 딸에게
간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당신의 자궁 밖에서 냇물의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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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편지
1974년 겨울
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긴 아침 강물의 편지였습니다
황량한 수렛길에서
그것을 옷깃 여미고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딴전의 술만
마셔댔습니다
1979년 긴 편지를 몇통 째 받았습니다
어디 하나
허술한 생략 따위 남을 수 없는
확고한 오뇌의 불면이 잠겨 있었습니다
나는 거리의 불온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편지 이전과
편지 이후와 함께
그때의 사랑은 측면이 아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지칠 줄 모르는 정면이었습니다
기어코 1983년 결혼 이래
아내의 긴 편지와 좀 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온갖 사실들은 추상의 그림자였습니다
달은 현실이고 달밤의 나는 환각이었습니다
이윽고 내 늦은 편지가
하나씩 하나씩
밤나무 저쪽 너도밤나무로
오랜 아내의 긴 편지를 조금씩 달아오지 시작하였습니다
저문 날
한 자 한 자는 내 서투른 봉헌의 상형문자였습니다
감히 나일 강의 신성문자이고 황하의 구조적 주술문자
이기를 바랐습니다
황홀경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나의 편지는 아내의 편지
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이 나는 아내의 오른손이고 왼손이었습니다
==========
+ 공전(公轉)
아내의 둘레를 돌 때마다
나는 빛난다
아내의 둘레를 돌 때마다
나의 한쪽이 빛난다
아내의 빛으로
나의 다른 한쪽이 캄캄하다
나는 아내의 위성이다 내 운명이다
운명이란 문거
운명이란
우주의 제도 아닌가
나는 아리안이 아니다 나는 내 아내의 형식이다
-----------------
+ 나의 잠언
몇만년이 지나갔다
더이상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는 반벙어리로 사랑할 따름이다
사랑하므로
몇만년 뒤
가을이 더 가을이 아닐 것이다
겨울이 더 겨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 전
나는 몇십년 동안 내 각시를 기역도 니은도 없이 디귿도
없이 악기도 없이 은벙어리로 사랑할 따름이다
--------------
+ 지각타령
아버지 생각이 늦은 저녁에 온다 와서 가지 않는다
내 진정한 시작은
왜 언제나 저녁인가
왜 부질없는 미네르바인가
역설이 역설이 아니라
왜 귀가가 출가인가
왜 저녁인기에 새벽 성욕이 깨어나는가
왜 나의 새벽은 너무 늦게 오는가
나의 마흔살 넘어
석가의 샛별이 왔다
나의 쉰살 넘어
새벽의 시가 날마다 왔다
돌아다보면
지난날은 늘 저녁이 먼동 트는 아픔이었다
나의 서정시도 너무 늦었다
이하가
랭보가 죽은 뒤에야 해골로 녹아버린 뒤에야
아무것도 모르고
늦은 서정시로 떠내려왔다
이광수의 시조 두어 개
노자영의 화려한 잡문 서너 개
그리고
사변 전 신석정의 시 몇개가 다였다
중학교 1학년 국어책에서
처음으로 「광야」를 일고 무서웠다
사변 전 밤길에 주운
한하운의 가도 가도 황톳길
그뿐이었다
앞서 여덟살 사당의 훈장 중얼기리시건
시경인지 무엇인지
한두 번 들은 것 그뿐이었다
이백도
샤를르 드 보들레르도 통 몰랐다
어디선가 서정주의 애비는 종이었다를 서당개로 보았다
그뿐이었다
휠씬 뒤
최인훈의 입에서
임화의 「네거리의 순이」를 들었다
1950년대 후반
김형이 슬쩍 구조주의를 말하면
내 앞에서 구조를 말하지 마
나는실존이댜
자, 실존의 술 받어라고 소리쳤다
내 이십대 불교도
명봉 운허의 화엄경 사절하고
효봉의 임제선에 놀다가
휠씬 뒤
환속 사십세에야 십지품을 만났다
자택도 늦었다
백색전화도 늦었다
누구는 모든 것이 콜록콜록 일찍 왔으나
나는 모든 것이 중얼중얼 늦게 옸다
그놈의 원수 같은 근대도
너무나 늦게 왔다
앙가부망도 늦었다
예순살의 여권도 늦었다
은행구좌도 늦었다
자전거도 늦었다
창비시신도 늦었다
사회구성체론도 늦었다
난테없는 석좌교수도 늦었다
아메리카도 늦었다
베를린도 늦었다
하나의 우정도 늦게 왔다
명예 박사학위들도 늦었다
책들도 늦었다
커피도 녹차도 차모마일도
90년대 후반ㅇ데야 나에게 왔다
사랑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된 사랑의 삶 여기 있다
사랑의 깃발 늦게 펄릭인다 늦게까지 펄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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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기억 속에서
아내의 기억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비 온다 눈 퍼붓는다
12년 전의 아내
서운산 은적암 뒤
조릿대밭과 산길을 올라간 뒤
12년 전으로 돌아가 있다
여기야
여기야
25년 전의 아내
내가 입었던 윗도리를
23년 전의 그날로 돌아가 또렷이 알고 있다
아내의 기억은 지상에서 솟아오른다 천상은 밑장이다
36년 전 갔던 식당도 틀림없이 잊고 않고
그 식당의 오후에 자세히게 돌아가 있다 아내는 과거의
세부(細部)이다
아내의 기억은 사랑이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
내 기억을 꺼내온다
그 사랑 어느 기슭에 잠긴
내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온다
사리진 카스피 해의 기억들
사라진 아랄 해의 기억들
그것들을 꺼낼 때
비로소 나에게도 내 전생이 있다
미래가 현재인 아내
확신컨대
방황 뒤 긴 회의 뒤 확신컨대
아내는 내 열두살도
비 오다 만 내 사후 6주기 오후도 이미 신내려 알고 있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
나는세상에 나가려 한다
섬마섬마 뒤
아장아장 나가려 한다
아, 젖내음!
======
+ 풍경
상화의 기능은 불가능에서 나온다
상화는 자연이다
상화의 인위야말로
계절의 이행이다
상화는 원칙이다 아니 자연법의 원리이다
상화는 강원도다
거기서 흘러나온다
나는 하류 기슭
천년 뒤의 양수척(楊水尺)
저녁 강물 위로 가마우지 내숭 떨며 건너온다
나는 낚시절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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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 수첩
천상에서 부부는
두 천사가 아니라
하나이 천사라고
누가 말했다
스웨던보르그가 그랬나
나는 아니야
지상에서 상화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누가 말할까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내가 불가불 말해버린다
여기 단서가 반드시 있다
지상에서 상화와 나는
혈연적이지 않다
몇번의 생을 혈연적이다가
이제 단호히 혈연적이지 않다
한번의 생 이전부터
이념적이었다
우주 에너지 이데올로기 그것
지상의 이데올로기 아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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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합니다
고조 할머니
진실로 이상합니다
증조 할머니
진실로 이상합니다
아홉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
진실로 이상합니다
당신의 손자며느리하고 손자하고의 사랑 이상합니다
이상하고 이상합니다 한밤중 깨어나서 못 믿을 사랑입니다
날이 갈수록 이별 불능이여 천년의 하루여 구름 생명의
천녕의 모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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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처음이다
아직도 파릇파릇 떤다
아직도 가슴
콩닥콩닥 뛰논다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모르고
아직도 까불어댄다
아직도 별은 헨다
별 헤다가
일흔 개쯤 헤다가 그만둔다
아직도
아직도
바람 불면 뛰쳐나간다
삼십년의 삶 헛되이
아직도 편지를 보낸다 벌벌 떨며 받는다
아직도 얼음 녹으며 얼음 얼며 그립다
함께 있어도
먼 나라 몇개 저쪽
하늘 속 비행운 한줄 그립고 그립다 끝이 외롭다
아직도 토라진다
낱말 하나가 다이다
아직도 돈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아직도 똥 얘기 남의 얘기를 하지 않느다
아직도 처음이다
아직도
처음의 처음이다
삼십년의 삶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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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집
아직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대 어릴 적
돈암동 개울 건너 그 집
삼선교 지나
동도극장 지나
돈암동 전차종점 못미쳐
다락방과
높은 장독대 있는 그 집 자리
아직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대 어릴 적 외갓집
서대문 밖 홍제동 지나
광산으로 백토로 부자 된 외갓집
대문 중문 안중문 지나
토방 축대 높은 안채
지금 그대로인지 아닌지
아직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모네 집
6.25때 폭격으로 죽은 이모네 집
살아남은
이종사촌 오빠 어니
전쟁고아 된 집
긜고 정릉 집
아직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대의 돈암국민하교
그대의 광화문 호박밭여고
그대의 신촌
대학생 시절의 다방
그대의 어디어디
그곳에 가서
그곳에 가서
그대의 지난날을 사랑하지 않으면
지금의 사랑이 하현달 밤 이지러질 것이므로
꼭 그곳에 가서
그대의 지난날까지 악쓰면 사랑해야 하건만
아직도
아직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올가을에는 늦가을에는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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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산
저 히말리야 일동은
손톱만큼도 과시가 아니다
아나푸르나
안나푸르나 제2봉
그 밑에 내가 있다
저 히말랑야 때문에
나는 죽어라고 가장 낮다
어서 아내한테 돌아가 실컷 엎드리고 싶다
엎드려 내 오래된 우물 밑바닥으로 낮을 대로 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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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버시
씨리아 다마스쿠스 교회
무함마드 마을의
어느 가시버시
아침
눗세
몇달 만에
함께 누워
그 깜깜한 방 안
둘의 몸이 떨어져 있더니
눗세의 몸에서
군청색 빛이 났다
야심의 눈에
그 빛이 가득 들어와
형언할 길 없는
어떤 기쁨의 눈물이 된다
오호라 빛눈물이라
눈물빛이라
야심의 몸이
눗세의 몸에 들어가지 않고
그 포옹만으로
그 애무만의 사랑으로
이런 기쁨의 빛 기쁨의 눈물이라니
허나 몸에 몸이 들어가나
그 빛 자취 없이 사라졌다 허허허 슬픔으로 기뻤다
알라 없는 여기
새벽 세시인가 세시 반인가
아내의 고른 숨소리에
어둠이 가고
멀리 군청색 빛이 온다
네시인가 네시 반인가
숨소리의 빛이 새로 잠들어오는 내 눈에 와 어둠의 눈물
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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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백자 마리아상
어디 가서
조선 후기의 가마에 불 넣던 건달 하나가
몰래
남한산성 밑 주막의 주모한테서
천주 믿는 노릇 올며다가
야소의 어머니 마리아상을
눈썰미 좋아
몰래
구워내다가
제 접방살이 뱡구석에 숨겨두었다 함
아베마리아가
기어이 조선에까지 와서
어찌어찌 숨겨져 있다가
오늘 전시장의 어중간에 모셔져 있다함
숨겨져 있다가
숨겨져 있다가
그런데 이 마리아상
서유럽 동유럽에서는 어마어마한 권세였다는 것
착잡하기도 할사
어떻게 그대만이 원죄가 없느가
어떻게 그대만이
그 숨막히는 성교 한번도 없이
숫처녀의 몸으로
아이 배었는가
과연 하늘의 아드님이라
하늘하고
하늘의 별하고 있다가
아이 베었는가
온 유럽 천지 그 중세 몇백년이나 내내
화가
음악가
건축가
조각가들이
그 성모 마리아상으로부터 풀려난
오늘이 얼마나 허망이던가
어떻게 군대도 군대만 아니라 높고낮은 벼슬아치도
어떻게 그 귀족 작위 오르는 데도
길드에도
장터 목에도
거기 들어갈 때
거기 들어가 속해 있을 때
반드시 처녀수태 확신을
백번이냐
골백번이나 맹세해야 했던가
그런 마리아야
죽은 아들 내려저 묻힌 뒤
그 아들 시신 앞에서
삐에따 마리아 된 뒤
몇사람의 무식한 젊은이들 따라
저 다마스쿠스 어디로 스며들어
그 그리스 땅 어디 예페쏘스 어디 스며들어
거기서 살다가 눈감은 뒤
그 성모 마리아의 고독으로부터 비참한 삶으로부터
뒷날의 권세반열 으뜸의 성모신앙에 이르렀던 것
이천여년 뒤의 오늘
동아시아 반도에 거룩할사 모셔져 있다 함
전시장 문 닫을 시간 오후 다섯시 지나서야
한밤중 어둠속에서
조선백자 마리아상 하얗게 하얗게 빛나는 시간이
오고 있다 함
나야 흥청대는 강남 비싼 술집 거리에는
어림도 없이
남부터미널 막차 탔다
그렇다 일체 권세 없이 타율 없이
숫처녀로
아이 베는 여인 있어야겠다
새로 있어야겠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모독한 순결 있어야겠다
이 대담무쌍한 성개방의 세상 한 곳에서
푸른 하늘의 무죄로 푸른 하늘의 동정으로
호젓이 아이 배는 여인 있어야겠다
상화! 너도 혼 같은 무 같은 아이 하나 낳아!
상화 마리아!
나는 그저 삼줄 건 집 조심스러이 대문 열고 닫는 행랑아
범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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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
그곳에 수선화가 모듬모듬 피어 있듯이
새끼제비 주둥이
수선화꽃 피어 있듯이
그곳에 이끼가 끼어
한낮에도 어젯밤의 반지름이 남아 있듯이
그곳에 고사리들이 수군수군 모여 살고 있듯이
아무도 몰래
고사리 울음소리를 듣는
땅속 고사리 뿌리들이 쓰라린 어미로 살고 있듯이
그곳에 억새꽃들 휘날려 어디로 떠나는 듯이
그곳에 갈매기똥의 흰 바위가
밤이나 낮이나
파도소리에 선잠 깨는 듯이
나는
목마르다가
목마르다가
아내의 앞고
아내의 뒤에서
사뭇 서정과 서사의 경계를 넘었다
담 넘었다
울 넘었다
재 넘었다
56억 7천만년 중에서
30년을 넘었다
샘물 무지무지하게 깊어 태초같이 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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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배처럼
후딱 과거가 되고
후딱 과거가 되고
내일 모레도 바로
오늘이다가
어제가 되고
눈멀도록 사랑할수록 사랑의 시간 다 가져가는 사랑
축배처럼 후딱 여기가 저기인 빈 축배 사이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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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국어로 살면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일본인의 뿌리」가 말합니다
오늘의 일본인은
2천 4백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민족의 후예라는 것
오늘의 일본어는
옛 한반도 북부 고루려어가 변화된 것
이어서
오늘의 남북한에서 쓰는 한국어는
고구려어보다 신라어에 가깝다는 것
하기사 우랄알타이어계 교착어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봄인지 가을인지 짝짜꿍 노릇입니다
교착어 한국어는 2천년의 언어입니다
낱말과 낱말이 눌어붙습니다
부사 구애 없이
조사 구애 없이
낱말 과 낱말이 뜻을 만들지 못합니다
쌀밥도 아교됴 필요없이
절로 찰지고 저절로 딱 눌어붙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언어의 끝까지 구석구석까지 다 드러냅니다
산맥의 능선드이 높고낮을지언정
끝내 끊어지지 않고
따로따로 돌아앉아 고립되지 않고 예나제나 붙어 있습
니다
이런 교착어를 모국어로 살아오면서
이런 모국어의 운명으로 죽어가면서
어디 하나
교착할 데 없이
어디 하나
교착할 소재 하나 남김없이
교착 이전의 밀착인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캄캄한 밀착인
사랑이 있습니다
결코 물러서지 못하는 상화의 사랑
이 있습니다
단 한번도 미워한 적 없는
단 한번도 싫어한 적 없는
단 한번도 식어버린 적 없는
단 한번도 지겨운 없는
하루하루 깊어지는 해저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직도 남은 해저가
얼마나 깊어야 할지 모르는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라크 침략에 분노하다가 돌아온 밤에도
틀림없이 사랑합니다
아, 고대 바빌로니아의 사랑이 분노처럼 여기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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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삼스러운 아침
살구나무 가지들
아직 살구꽃이 피기 전입니다
마음속으로
미리 피어나
추운 꽃샘바람을 저마다 각각으로 견디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도 저마다 각각이 아니었던가요
오늘 아침 새삼스럽습니다
새삼스러이
하나가 간을 꺼내어
하나의 마음에 비추어줄 때
다른 하나 또한 가만히 몸의 구석
조그마한 쓸개를 꺼내어
하나의 마음에 비추어 답할 때
두 마음이 그렁그렁 숫난이 숫내기 열어 합하고 맙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벼랑에 길 낼 수 없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자갈밭 명아주 한 뿌리 없이
알거지로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나와
또 하나
서로 뒤바뀌어
네 쓸래가 내 것 되고
내 간이 네 것 되어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숨지는 날
그날 아침인듯 오늘 아침입니다
그대의 밥이여 오줌이여 내 부끄러움으로 감출 수 없는
남은 오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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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
5월에 시작했네
5월에 시작했네
그날밤 마지못해 비가 오고 말았네
그렇게
5월에 시작하고 말았네
3월도 아닌
4월도 아닌
5월에 시작했네
5월의 어린이로
5월의 잎새들로
물러설 뒤도 없이
철모르는 어린이로 시작하고 말았네
죽어도 좋아
5월의 저승 이승
풍덩 빠져 시작하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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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그가 부엌에서 시금치나물을 부치다가
뉴스를 들으러
라디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불멸이다
그가 테라스 탁자에 앉아
조간신문을 뒤늦게 읽는다
무심의 순간으로
새가 지나간 뒤의 하늘을 본다
불멸이다
그가 꽃밭에 물을 주다가
멍멍이집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가 여러번 울린 전화를 받는다
숭고하다
상대방이 정식으로 순응한다
그가 하던 일을 한다
모든 하루하루 속
단 하루도 천박하지 않다
불명이다
불멸의 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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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어코 말한다
거짓말같이
무슨 우레 터져도
무슨 천벌의 번개칼 꽃혀도
기어코 벼락 맞아 말하고 만다
네 발등 두 손등
네 콧등
네 오로라 같은 마음 가녘
사랑 아니고도
한덩어리 거짓 없구나
어쩌자고
어쩌자고
돌아갈 데 지수화풍
이리도 참되고 마느냐
두 세기에 가래 걸쳐
네 사랑으로
이제 나 같은 것도 나도
백분의 일은 진눈깨비 맞으며
네 곁에서 참되고 만다
바라옵건대
네 참딘 그림자로
무척무척 흐린 날에도
없는 네 그림자로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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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네시아의 밤
합환의 예의를 말하렵니다
폴리네시아
토로브리안드 섬
남십자성 밑
그 섬들의 어느날 밤
내외 한 쌍 포옹의 예의를 말하렵니다
포옹 한 시간쯤 뒤로
그 내외 조상의 영이 깃들어
그 합환의 복을 내려주시는 예의를 말하렵니다
은은한 포옹
은은하기 짝 없는
두 내외 생체의 진자가 일어나
그 내외의 밑에 자글자글 모여드는
예의를 말하렵니다
이로부터
그 내외의 깊이깊이 드리고 바다자올 두 기쁨이
무슨 기쁨인지 통 모르는 데까지 이르는
드높은 예의를 말하렵니다
오늘밤 저도 난데없이 바람나
불료 이취경쯤을 펼쳐보며
제 아내와의 합환이
혹여 부처 근처에 이르는
예의를 덩달아 말하렵니다
근대의 모든성(性)들의 밤이여
발기
삽입
사정으로
일본군 위안소 그것으로
양키의 공주촌 그것으로 망치지 않는
예의를 새삼 말하렵니다
사랑은 그리고 사라의 성은
결코 권력이 아닌 누구의 질서가 아닌 예의를 말하렵니다
근대 이전의
근대 외외의 미개의 정지
드디어 별수없이 도의 경지에 드는
그 폴리네시아의 밤을 감히 말하렵니다
내일밤 저도 제 아내인 부처 근처에
손톱 깎고
발톱 깎고
성스러이 다가가는 폴리네시아
시늉의 예의를 말하렵니다
밤은 지극히 긴긴 예의입니다
_________ *56
산책
가라사대
죽림정사론
꼬르도바에서
--------------
아리랑
국제전화
리스본 이후
다시 국제전화
-------------
일몰
변신
사적인 신
도우버 해협
--------------
모월 모일
말라가에서
아직 가지 않은 곳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
렌즈엔드
시시한 날
꼬르도바의 밤
내잔이 넘치나이다
-------------------
어느날
기다리며
종각앞에서
오래된 부끄러움
-----------------
후일
타고르
그대의 목소리
남겨둔 시베리아
--------------
지각
크레타
네가 화낼 때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
백년 뒤
5월의 신부
당신의 눈빛
아내의 편지
-------------
공전
나의 잠언
지각타령
아내의 기억 속에서
-----------------
풍경
회색 수첩
이상합니다
아직도 처음이다
----------------
그 집
설산
가시버시
조선백자 마리아상
-----------------
고백
축배처럼
모국어로 살면서
새삼스러운 아침
--------------------
동요
일상
기어코 말한다
플리네시아의 밤
시인 마당/시인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