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덤
화장하지 않으리
풍장하지 않으리
티베트 아리 됫산
조장하지 않으리
그 누구한테도 늙은 구루한테도 맡기지 않으리
반야심경 사절
내가 씻기고
내가 입히고
내가 모셔놓고 난 뒤
내가 못질하리
내 울부짖음과 내 흐느낌 담아
엄중하게 못질하리
내가 흙 파내여
내가 묻으리
작은 벗들 일깨워 세우리
여기 사랑이 누웠다고
감히 천년쯤 뒤
나비도 강남제비도
이 무덤 속 백골 알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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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잠
거기 간다
아내의 잠 속 어느 곳
지금의 소쩍새가 아닌
태초의 소쩍새가 운다
지금의 소쩍새가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마저
태초인 소쩍새가 운다
사랑은 시원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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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오늘 아침 다 헛되고 싶습니다
진실로
살구꽃 가득히 피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살구꽃의 숨결숨결 우러러봅니다 오로지 행복입니다
가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 몇번이나 속고 싶습니다
살구꽃 구름 아래
그대를 우러러봅니다
차라리 여기가 아닌 어디이고 싶습니다
이토록 고개 들 수 없는 행복입니다
다른 세상 아닌 이 세상이여 죄송하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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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5월이었습니다 그다음 6월이었습니다
석곡대 석곡 꽃송이 피어왔습니다
더 가노라면
잔 어수리 흰 꽃들 피어왔다 피어갔습니다
이런 날인데요
해설피
바람 을스산스럽습니다
이제야 가만가만 알아버렸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부족입니다
사랑은 자못
사랑의 부족입니다
나 어쩌지요
수십년 전 그날로
오늘도 나는감히 사라의 떨려오는 처음입니다
다라미질 못한 옷 입고
S를 만나려 가는 길입니다
허나 나 아직도 이 세상 끝 사랑을 잘 모르고 가기만 하
며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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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곳
이떤 새는 한 번 울고 죽는단다 왜 그러는지 모른단다
대나무는
한 번 꽃 피고 죽는단다
잣나무는
한 이십년쯤 자라나
겨우 잣을 맺는단다
삶 또는 죽음
그런 곳에 가
며칠쯤 머물며 푹 썩어버린 눈물에 젖고 싶구나
사랑은 반드시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
상화와 나는
아직도
아직도
갈 곳이 있다
오호츠크 바다
그 알류샨
북아프리카 앞바다 카나리아 제도
상화와 나는
나라 이름만 다시 보아도
땅 이름만 보아도
사 이름 월출산만 보아도
여기 가야지
여기 가야지
상화와 나는 갈 곳이 있다
동백꽃 지는 여수 돌산도
돌산도 건너
거문도
백도
들딸기 널린
서시베리아
거기 가
사흘쯤 머물고 싶다
상화와 나는
죽은 뒤에도 함께 갈 곳이 있다
저세상 십만억 국토 지나
거기 가
한생을 함깨인 듯 아닌 듯 또 지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이전에 갔던 곳 이후에 갈 곳
머루나무 다래나무 설킨 비탈
푹 익은 술의 겨레붙이로
동틀 무렵
술 깨어나
또다시 떠나고 싶다
언제까지나 천지바보인 사랑 가고 가는 졸본부여 나그네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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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증考證
그는 내 자취를 찾아나섰다
섣달 그믐
혹한
폭설
그는 지난날의 나를 찾아나섰다
나중의 해인사가 먼저이고
통영 송광사가 그다음이었다
한밤중에야 닿은
송광사 삼일암
방장 구산이 밥 먹어주었다
두 잔씩이나 차를 먹어주었다
묵은 사과를 먹어주었다
팔에 연비를 떠주었다
이름도 하나 달아주었다
그는 똗 하염없는 자취를 찾아나섰다
1977년
그는 영일만 호미곶에 가 있었다
날뛰는 파도 앞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마시고 쓰러졌다
서울에서 달려온
외사촌동생이 다독여 재웠다
그는 나의 희더운 자취에 도취했다 나의 미래에 도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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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밤
잠든 새 깨어나
화르르화르르 날아오르나
떠난 넋들
무엇하러 어룽져 오시나
이도 저도 아니다
지금 하마정 전부에 달빛이 온다 태고로부터 온다
하마정 전부가 달빛을 불러
달빛이 온다
하마정 건너
여기까지 슴차 달빛이 온다
어쩔 수 없다
2층 노대 여기에 태고의 둘이 있다
여기까지 달빛이 오고 만다
아래층 어린 포드들이
늙은 포도넝쿨에 달려 있다
어쩔 수 없다
둘이 얼싸안는다
달빛 무덤
달빛 구렁
둘의 나선이 온몸의 시설들을 가동한다
태고의 둘이
태고의 하나가 된다
찬 달빛이었다 뜨거운 달빛이었다
둘의 이승이
기어이 한몸뚱이의 정령이 되고 만다
숨넘어갔다
숨넘어갔다
달빛 오열
달빛 신음
그리고
달빛 기쁨
달빛 기쁨의 슬픔
아래층 포드들이 알알이 울었다
달빛 통곡
벌거숭이 둘의 나신이 가만히 정지된다
어느덧
달빛은 저만치 가 있다
어쩔 수 없다
둘이 현재로 돌아왔다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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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모종
가뭄 꼬리에 비 오셨다
하늘이
하늘님이셨다
말이
말씀이셨다 다 임이셨다
아내는 희디흰 앞치마같이
초록저고리
다홍치마같이
머리 가르미 동백 기름같이 아주까리기름같이
쪽찐 옥비녀같이
가슴 떠는 초승달 눈썹같이
예스러이 마당에 나오셨다
꽃모종
어린 해바라기 옮겨 심으셨다
어린 코스모스 옮겨 심으셨다
서러울 수도 없는
아직 괴로울 수도 없는
어린 분곷 과꽃 맨드라미 봉선화
여기에다
저기에다 심으셨다
꽃모종 뒤
아내가 입을 달싹이셨다
먼저 죽겠다고
이어서 내가 입을 달싹이셨다
내가 먼저 죽겠다고
슬퍼하라고
슬퍼하라고 말씀하셨다
비 오신 땅님께서 하늘님인 양 높으셨다 더 어린 꽃님들
그보다 높으셨다
=======
+ 담임
얼마나 내 시라는 것이 진실이었던가
얼마나 내 시라는 것이 거짓이었던다
얼마나 내 떠돌이 날들으이 밤하늘
그 잠들 줄 모르는 행각이
거짓투성이 그 비탈이었던가
오, 후회의 무효여
얼마나 내 후회가 진실의 그 가장자리였던가
이쯤이었다
이쯤이었다
밤 이슥히 돌아온
밀물 위
뱃고동소리
다 받아들여
진실을 아늑자늑 가르쳐준 사람
진실이 무엇인가를
언제
그홑옷 같은 진실이
다른 진실을 막어버리는가를
새벽 우렛소리 날아오를 때
그 먼지투성이 벙거지 쓴 진실이
어떤 알몸인가를
대낮 길바닥
사금파리 박혀
날아오르지 못할 때
그때
진실이 무엇인가를
복숭아나무 가지로
송장 때리듯
울며 보채는 백일해 아기 끝내 잠재우어 파괴하듯
초등학교 6학년
고등학교 3학년이듯
그렇게 조곤조곤히 가르쳐준 사람
운명의 여름 가을 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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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발화(同時發話)
자주 둘의 입에서
하나의 말이 나와버린다
화곡 속의 화기애애한 단역들
이구동생 그대로
아니
어느 생에서
둘이 짰던 새금파리 두쪽 나눠가진 합심 그대로
십년 뒤 그대로
같은 말이 나와버린다
여기가 좋겠다
여기가 좋겠다
이 둘이 하나로 나와버린다
돌아오는 길에 사오겠다
돌아오는 길에 사오겠다
이 둘이 시시하게 하나로 나와버린다
오늘은 어제이다
이제는 오늘이다
긴 번민의 행렬이
북인도 바하르 주 평원을 기어가는
일백십사 칸 화차의 긴 완행 끝
거기서 내려버려라
세상에 널린 약속들 너머
여기가 좋겠어
여기가 좋겠어
이 둘이 하나로 나와버린다
끝끝내 하나로 나와버린다
여기가 좋겠어
-------------------
+ 배드민턴
커다란 때가 오리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몽땅 먹어치운
우주 진공으로부터
커다란 때가 오리라
배드민턴을 친다
아주 작은 때가 오리라
작은 먼지춤
작은 티끝춤
작은 아메바춤과 함께
사랑이 오리라
사랑의 아데올로기가 쭐레쭐레 뒤따라오리라
배드민턴을 친다
상화 누리
상화 나라
상화 바닷사 거기
상화 파도쇨 수북수북 쌓여 드높으리라
밤 오렌지등 켜놓고
하얀 새 분주하다
포릉
포릉
하얀 새가 날아간다 날아온다
때가 오리라
이승도 저승도 없는 때가 와서
하얀 새의 아이들
어디로 데려가리라
포릉
포릉
--------------------
+ 나무 심는 날
이득환네 경운기 타고
재 넘어
삼암리로 나무 사러 간다
이득환 셋째아들이 재철이란 놈도 함깨 간다
큰 하늘 밑
털
털
털
털
경운기 탄 얼굴이 떤다 웃음이 떤다
상암리 가서
산당화
자목련
백목련
철쭉 서너 뿌리를 산다
영산홍은 없었다
아이고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상화를 부르팍에 앉히고
탈탈탈탈
동선으로 돌아온다
길 가녘
각시풀을 본다
구름을 본다
멈춘 구름은 어른이고
멈춘 구름 뒤로
바쁜 구름은 아이이련다
대추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도 함께 돌아온다
돌아와
이득환과 함께 그것들을 심고 복돋운다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다짐한다
상화를 바라보며
상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너 번 다짐한다
뿌리 내려 자라는 이것들 옆에서
울음으로
노을로
너를 엉엉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날 저문다
저 남쪽 바다 위
제비들 떨어져 죽어가며 오고 있으리라
=======
+ 백지
당신의 십년 뒤
당신의 일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둘러
나의 일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름밤 별들이 모조리 죽어 울어댑니다
아기들
아기들
몇백 광년 전
죽은 아기들의 저승이 이승의 밤입니다
다음날 백지의 허무
거기에다
나는 한마디를 겨우 씁니다
그 한마디의 무모한 어디
지상의 구두점 하나도 기필코 사랑일 것
이미 백지의 사막 아닙니다 사랑은 그 이외입니다
------------------
+ 호명(呼名)
대림동산 입구
먼지 쓴 가문비나무 중앙분리대 양쪽으로
십년째의 포장도로를 지나
개나리골을 지나
볼품없는 해송이
오리나무와 함부로 어울려보는
뒤숭숭한 비탈을 지나
거기 누구의 자취도 모르는 장미골에 이른다
잘못 접어들었을까
아닐까
거기 무슨 달이 떠 있겠는가
커다란 눈 뜬 어둠속
언덕배기 내려가며
상화야
상화야
상화야
상화야
이렇게
목청껏 불러대면
마침내
내 머리 정수리 위에서
숨었던 달빛이 기어이 나타난다
상화야
상화야
------------
+ 허사
상화는 명사가 아니다
동사이다
펄펄 살아
여기에 있지않고
저기에 있나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나
아니 어디에 있나
나에게 상화는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아, 나에게
상화는 허사(虛辭)이다
불러도
불러도
그가 없다
못 견디는 것이
견디는 것
방황이
방황이 끝나는 것
왜 나는 배고픈가
왜 목이 마른가
아, 상화는 어디에 있나
여기 있어도
여기 있어도
어디에 있나
----------------
+ 번개우레
한밤중 모든 제도들 모든 법칙들 가버렸다
번개 친다
이 번개 극광의 찰나
네 젖가슴이 드러났다
네 배가 드러났다
네 입 코 눈썹 네 이마가 모조리 드러났다
우레 친다
오 네 이승의 완벽이여
=======
+ 첫눈
1984년 12월 19일 아침
첫눈이 내렸어
첫눈이라는 말
서른 번쯤
마흔 번쯤 쓰고 싶었어
쓰지 않았어
내가 살아온 몇 십년 따위 몽땅 내버리고 싶었어
방금 젖 땐
얼뚱아기이고 싶었어
아냐
다 자라나서
열여섯살 계집애이고 싶었어
첫눈이 내렸어
모든 형용사
모든 부사
그런 것 없는
순 가난뱅이이고 싶었어
첫눈이 내렸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수많은 마음 가버렸어
사랑밖에 할 것이 없었어
첫눈이 내렸어
돌아가
돌아가
열일곱살 머슴애이고 싶었어
1984년 12월 19일 아침
첫눈이 내렸어
첫눈이 내렸어
내가 상화를 불렀어
아냐
상화가 나를 불렀어
사랑밖에 없었어 온종일의 치매로 이럴 수밖에 없었어
--------------
+ 자전거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에서
초례마치고
한강가에서
하룻밤 자고
안성 대림동산으로 왔다
상화 남편은 얼간이
상화는 철부지
축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백만원 얼마
상화
상화 남편
둘이 지닌 것 털어
집을 샀으니
화곡동 집 팔리지 않고
억지로 집을 샀으니
이백만원 얼마 이것으로 살아야 했다
마음속 화수분이라
무어나 차고
무어나 넘쳤다
마음 밖 가난이라
전화도 없다
전화 걸려면
십분쯤 가서
고개 너너 관리사무소 전화를 빌려야 한다
믿음사에서도
문익환도
전보로 급래급래를 알려왔다
이백만원 얼마는 곧 동났다
안성장에 가
빗자루 사고
삽도 호미도 샀다
개수대 그릇도 샀다
빈털터리인데
창비에서 원고료가 왔다
살았다
살았다
무턱대고 자전거 한 틀을 샀다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 잡했다
삼단 자전거 바퀴살이 찬란했다
오르막 허위허위 올랐다
내리막 어질어질 내려갔다
다음날부터 상화가 학교버스 내리면
입구에 나가 있다가
얼른 자건거에 태우다
집이 가까워오는 동안
상화는 맨드라미인 듯
옥잠화인 듯
과꽃인 듯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동료 교사 하나가 결강한 이야기
강의실 학생들의 눈빛 이야기
욜리씨즈 이야기
부총장 면담 이야기를 한다
상화 남켠은
장미골 모서리를 돌 때
오늘 쓴 시 이야기를 한다
상화는 누이인 듯 누나인듯
상화 남편의 서투른 이야기를 듣는다
자전거 바큇살에 끼인 풀이 떨어져나갔다
해가 구름 속에 나온다
이 사랑이 나중까지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 아닌 것
상화는 안다
상화 남편은 안다
집에 오니 무슨 전보가 또 와 있다
-------------
+ 춘당지
1974년 10월 창경궁 춘당지
이 자그만한 못
오래 억울한 듯
오래 억울하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져버린 듯
이 자그만한 못
여기
아무도 모르는 척
가루 한 척 떴다
거루 탄 두 사람 떴다
이른 단풍이 와 있고
저문 단풍이 아직 오지 않았다
배 저어
한 바퀴 돌고
못사 너럭에 걸터앉았다
한 사람은 그대로 앉았고
한 사람은 벌렁 누워 하늘을 보았다
우연 당연
아이의 풍선 하나가 두둥 떠올라
하늘 속으로 가고 있었다
영혼이 간다고 누운 사람이 말했다
해설피 두 사람은 일어났다
창경궁 문밖으로 나오니
거기에
허구의 버스와 택시들이 오고 있었다 가고 있었다
사랑은 감히 한 시기가 아니라 한 생애 그다음까지이리라
-----------------
+ 한강하류
시내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내렸다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마른밭
마른 풀 내음 속을 걸었다
강 하류는 으리으리하다
행주산성의 그림자가 행주산성이고
행주산성이 행주산성의 그림자였다
으리으리하다
상화는 마음속에서
다 허(許)하고
다 답(答)하고 있으나
백년의 묵언 숙연하다
잘못 자란 수수가
풀밭에 황새로 꿈속 투루미로 서 있다 앉아 있다
서까래로 서 있고
들보로 앉아 있다
뱀도 벌레도 없다
강 하류는
누구한테도 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 상화의 머릿속
꽉 찼으므로 어떤 것도 없다
기어이 내부의 묵언이 외부의 먼 소음보다 더 으리으리
하다
강 하류는 상류의 기억이 전혀 없다
=========
+ 여수(旅愁)
문황의 하룻밤
지친 꿈속
그녀의 웃음을 보았다
다음날
명사산 비탈
오로지 사랑의 무(無)로 사랑이거라
-----------
+ 일몰
해가 져도 좋아 안 져도 좋아
나
그대와 함께 있다
둘도 아닌 하나도 아닌
그대와
나
------------
+ 임신
그해 8월 아이 섰다
그해 9월 11일 아이 선 것 알았다
1984년
이것만으로
고봉밥이고
고봉술이고
고봉뚱이다
하늘 어느 곳도 공터가 없다 꽉 찼다
아, 올데갈데없는 행복
하늘 속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가
꿈틀꿈틀 만들어지고 있었다
옛 거문고 아닌
비올라 아닌
시베리아 타이가 발랄라이까 아닌
이 죽은 벗의 섹소폰 아닌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아이가
구름 한점 없이도 도레미파 만들고 있다
아, 증거인멸 할 수 없는 기쁨
아내의 뱃속에서
아이 손가락이 자라나고 있다
쇠붙이나
나무나
흙부스러기나
짐승으이 살이 아닌
무슨 악기가 솔라시도 자라나고 있다
눈과 귀와
어린 허파의
발가락
발가락 발톱의 악기가
오늘의 어제로
어제의 오늘로 먼 내일의 바닷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는 겨우 원고지 열 장 쓰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와 아내를 본다
2층으로 올라가
또 열 장을 쓰고 내려와
아내의 배를 만져본다
아내의 뱃속을 밤 지새우는 바닷속 악기를 만져본다
하루 백 장이면 열 번을 내려온다
그해 10월 11월 12월은 가을인지 몰랐다
-----------------------
+ 오동꽃 지는 날
오동꽃 지는 날
보랏빛
보랏빛
연보랏빛 흩어진 죽음돌로
나의 삶이 어지럽다
하지만 죽음은 아예 소리 없다
보랏빛
보랏빛
나는 그를 추억하는 사랑을 거절한다
나는 그의 역사를 쓰는 사랑을 거절한다
그가 죽으면
장사 지낸 뒤
나도 순무식으로 뒤따라 타버려야 한다 묻혀야 한다
그는 내 앞이고 나는 그의 뒤이다
모든 벼랑이 나를 원한다
나에게는 내일도 아프리카도 없어야 한다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나는 그의 발등 가까이
팽이로 돈다
팽이로 쓰러진다
나는 나 스스로 그의 부속이다 보랏빛 순장의 죽음은 소
리 없다
=======
+ 약력
어머니는 나를 낳은 뒤
한 달에 며칠씩 앓아누웠다
앓아누워
피를 쏟았다
앓은 뒤
피 묻은 속곳을 빨아 햇빛벙어리 뒤안에 널었다
할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꼴로 먹걸리에 취했다
소를 도둑맞았다
도둑맞은 외양간에 소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주정뱅이 막걸리를 입에 대지 않
았다
새도 구름도 필요없이
오래오래 멍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꿈속이었다
이런 날들의 수십년이 한꺼번에 파도쳐 가버렸다
도저히
도저히
내게 올 수 없는 것이 와버린 것 나으이 아내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
그뒤로는 아내가 다시 나를 낳았다
도저히 함께일 수 없는 것이 함께인 것
나의 어머니인 아내
--------------
+ 그 불안
마흔두살 헤겔이 스물여섯살의 약혼녀한테
정중한 글월을 보낸다
나의 사랑은 없습니라고
이것은 이념일까
세상은 이념이라고 말하고
정작
자신은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불안 그것이
사랑의 불안 아닐까
옛 글월을 상하 사내가
상황에게 읽어준다
아니에요
그것은 누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잉에요라는 이의가 없다
당신의 사랑이므로
나의 사랑이에요라는 정정이 없다
상화는 웃을 따름이었다
상화는
상화 사내한테
동해 삼척 갈매디의 비상이었다 원숙이었다
그렇구나 나의 사랑은 뒤로 뒤로 사랑이므로 사랑의 어
둠이구나
-----------------
+ 어떤 이름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 이름은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이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운명은 나의 소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내 이름은
그 이름을 만난 수 없습니다
상화
막 돌팔매를 던져버린 내 빈손이
이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늦었습니다
저쪽에서 누가 슬피슬피
돌팔매에 맞았습니다
상화
-----------------
+ 아부심벨
다시 가야 한다
상(上)이집트
거기
다시 가야 한다
거기
룩소르에 가서 돌아오지 않을 듯 가야 한다
아부심벨에 가야 한다
가서 람쎄스 2세 앞에서 서 있어야 한다
네페르타리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몇천년을 흥한 곳
몇천년을 망한 곳
망한 뒤
그리스가 오고
아랍이 온 곳
밤마다 공허가 오는 곳
거기 가서
상화의 사막을 펼쳐야 한다
나의 취한 별 떨거지
밤새도록 내려와야 한다
일백년 이내
거기 가서
상화는
어쩔 수 없이 신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 고왕조의 호호백발 사제가 되어
하루 몇
번 요통으로 엎드려야 한다
=========
+ 수유리
현재는 현재 뒤에서 천년이다
흠 하나 없는 햇빛이
비 온 뒤 내려왔다
마침내
아픔 다음
기쁨이었다
1983년 5월 5일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
큰 나무들이 섰다
느티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후박나무
그 밑으로 촘촘한 바느질 잔디가 깔렸다
신부 어머니 조덕순
신랑 어머니 최점례
주례 함석현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축도 문재린
사회 리영희
이효재가
미국에서 작곡한 신랑의 시 노래를 들려주었다
박용길
김석중
박영숙
이종옥 들이
제천 송홧가루 떡을 하고
오색 음식을 장만했다
부랴사랴
안기부 6국 직원이
축의금 몇푼 가져왔다
신부의 제자가 사진 찍었다
신랑의 천지가 사진 찍었다
신부신랑이 입을 겨를 없던
사모관대 원삼 족두리를
박형규 내외가 못 입은 것 뒤늦게 입고 사진 찍었다
신랑 고은
신부 이상화는
그곳에서 어서어서 달아났다
한강 기슭 내려다보며
완성은 종말이 아니다
해는 우연으로 우연의 후예인 필연으로 새로 떠오를 것
이다
-------------
+ 신우염
그가 입구까지 걸어가야 한다
입구에 가
알맞게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아홉시 반 첫 강의시간에 맞추게 된다
벌써 며칠째
그가 입구까지 걸어가지 못한다
신발굽이
길바닥에 놓일 때마다
몸이 무너지는 듯
몸이 무너져내리는 듯
아직 자전거도 없다 리어카도 없다
빼빼 마른
그의 남편이 업고 가야 하낟
넘어질 듯
자빠질 듯
오르막 장미골 지나
내리막 대령집 지나
구멍가에 지나
입구에 이르러서야
업은 남편이
업힌 아내한테 숨차 말한다
당신 팔다리 없어도 좋다
살아 있기만 해
이렇게 두 눈 뜨고
꼭 살아 있기만 해
살아있는 지옥이 휠씬 더 좋아
세상천지 누가 물어본다
십년 뒤
십오년 뒤에도
이렇게 벙어리로 귀머거리로 누구에게 말할 테냐고
--------------------
+ 어떤 술주정
반포아파트
최정호의 저녁 초대
서정두와 한창기
그리고 나
나와 함께 간 상화
불란서 술 화려하다
접시 음식들도 서로 찬란하다
바야흐로 서정주의 주정이 시작된다
깐죽깐죽
한창기를 못살게 군다
자네는 왜 그렇게
하관이 쭉 빠져버렸나
자네는 아조아조 궁상이로군 천하궁상이로군
서정주는
한창기가 브리태니커인 줄도
뿌리 깊은 나무인 줄도
어느 나라 부통령 단골인 줄도 모른다
암 모르고말고
최정화가 마지못해 입을 연다
한창기가 마지못해 입을 닫는다
나는 불가불
서정주라는
한창기라는
근엄한 턱 최정호라는
이 각각의 취기를 사절한다
상화에게
가만히 나가자 한다
나오자
비 오지 않은 거리가
비 오는 꿈을 꾼다
반포상가 거리에서 택시를 탄다
잠수교 건너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간다
몽땅 깨어버린 뒤
다시 취하기 시작한다
이전도
이후도 사절한다
사랑은 한밤중의 관념 그곳으로부터 이탈한다
---------------------
+ 아내의 퇴근
주 3일 강의 충만
대강이란
대강대강이란
그에게 배반이다
조금 일찍 들어간다
조금 늦게 나온다
오후 네시쯤
아내가 통근버스에서 내린다
나의 자전거에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세상에
부족한 것
부러운 것 거의 없다
저쪽 관리사무소 직원이 바라본다
개가 바라본다
뻐꾸기소리 잠시 쉬며
뻑뻑한 오리나무 가지에서 뻐꾸기가 몰래 바라본다
그해 여름
김우창이 나에게 말하였다
짤막한 것이야
군소 신이에게 맡기고
단떼『신곡』같은 것을 쓰라고
도라지 몇뿌리를 들고 있는 꿈
누가 파랑새 한 마리를
손에 쥐여주는 꿈
그 꿈 다음날
나는 아내의 뱃속 도라지꽃한테
파랑새한테
단떼 신곡을 몰래 맹세하였다
아내는 내 맹세를 알아차렸다
집에 온 아내가
가방을 내려놓고 말했다
단떼 신곡 아니라
당신의 신곡을 쓰라고
모르겠다
내일도 모래도
나는 아내의 퇴근시간에 대어
동산 입구에 가 있다
가 있으리라가 아니라
가 있다
내셍(來生)이란 지금 당장이다 내 자전거이다
=========
+ 비(悲)
꿈속
어린시절의 동무 봉태던가
지리산 세석평전
키 작은 진주사람 이수문이던가
아니
군산중학교 음악교사 최동규 선생이던가
미술교사 곱슬머리 안태환 선생이던가
누구던가
꿈속
그 누가 나에게 와 멱살 잡고 외쳐대기를
슬피 울어라
슬피 울어라
너 왜 이제 울지 않느냐
네 눈에
눈물 한방울 없으면
너는 너일 수 없다
울어라
네가 울지 못하면
구름도 꽃도
천년의 붉은 종소리도
다 시든단다
도둑놈들도 다 죽는단다
울어라
울어라
네 애끓는 슬픔만이
비로소 하늘의 슬픔에 아득히 닿는단다 울어라
꿈 깼다 식은땀 등짝이 좍 젖었다
어둠속
눈 뜨지 않았다
카루나라는 낱말이 못박혀왔다
싼스크리트어
카루나
슬픔 사랑의 슬픔 먼 슬픔 비(悲)
이어서
마이트리라는 낱말이 왔다
마이트리
미트라라는 낱말에 닿아 있다
동무 형제 기쁨 희망 자(慈)
카루나는 아기 아프면 엄마 아픈 것 불행 변혁
마이트리는 아기 옹알이 엄마 행복 태평성대
어둠속
이 누더기 낱말풀이 몽땅 지워버렸다
으슬으슬 춥다
이불자락을 당기다가
눈 떠
옆을 보았다
먼둥빛 아내의 잠든 아내의 호수 오싹오싹 깊다
----------
+ 독백
이제는 하나도 비장하지 않구나 숨지듯 숨쉬는구나
생과 사 하나라는 것
이제 거짓이 아니라는 곳
이게 날이 날마다 마침내 참이라는 것
새벽 네시쯤 잠 깨어
잠든 그대의 얼굴 희뿜히 본다
이제는 하나도 무섭지 않구나
사와 생이 하나라는 것
이게 둘이 아니라는 것
어린이 가고 없는
어린이 놀이터인 듯
그대가 생이고 내가 사라는 것
새벽 다섯시쯤 개가 짖는다 이슬들 눈뜬다
---------
+ 사랑
사랑이 뭐냐고
문기초등학교 아이가 물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한 나머지
지나가는 새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내가 커서 할일이라낟
돌아서서 후회막급
사랑할 때 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고
왜 대답하지 못했던가
그 아이의 어른은 내일이 이미 오늘인 것을
왜 몰랐던가
저녁 한천가
한 사내의 낚싯줄에 걸려버린
참붕어의 절망이 내 절망인 것을
왜 몰랐던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
+ 손전등
나는 선무당이다 살아온 날들 설익은 밥 같은 날들이었다
무엇 하나 들어맞지 않았다
점(占) 불능
에드워드 싸이드
『문화제국주의』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찾아도
『오리엔탈리즘』 옆에ㅓ도
그것은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온무당이다
용케
용케 그 책을 단박에 찾아낸다
뉴욕의 싸이드가 기뻐한다
스톡홀름에 누워 있는 곧 죽을 싸이드가 기뻐한다
아내는 내가 잃어비린 물건을
용케 찾아낸다
아내는 내가 고장앤 물건도
용케 고쳐놓는다
내가 떨어뜨려 못쓰게 된 손전등을
용케 고쳐놓는다
고쳐서 반짝 불이 들어온다
비 퍼붓는 밤
대문 계단 내려갈 때 계단의 발등이 환해진다
아내의 뒷모습 보아라
거짓 없이
아내의 앞모습 보아라
누구의 불의도 부정도
거기 없다
아내가 무섭다
훔칠 수 없다
속일 수 없다
숨길 수 없다
아내가 죽으면
나는 도둑놈이 되기 전 사기꾼이나 뭇엇이 되기 전
먼저 텅 빈 논 허수아비로 순 알거지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일이다
=======
+ 단언
돌아오는 길
남부터미널에서
대림동산 입구까지의 버스 50분 혹은 55분
니체가 무엇을 아편이라 했던가
맑스가 무엇을 아편이라 했던가
둘이 돌아오는 길
이 나라의 두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함께 돌아오는 길
이 길의 50분 혹은 55분 그것이 아편이다
아편이고말고
아내는 단호했다 아내가 주체이고 내가 객체였다
살아 있을 때 함께 있어요
아내는 단호 했다
영원은 없어요
절대로
영원 따위는 없어요
아내는 단호했다
살아 있을 때 살아 있을 뿐이에요
죽을 때까지 함게 있어요
누가 먼저 죽을 때까지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는 눈물이 차서
풍경이 없어졌다
아내의 단언이 내 몸속 십이장에 총알로 박혀 있었다
영원 따위 내생 따위 여기 없어요
-----------
+ 편지
천 권의 해석
천 권의 설명을 떠나는 것처럼 떠난다
구름 하나 없다
만년의 인력
만년의 중력을 떠나는 것처럼 떠나버린다
두 잠자리가 뿔붙어
한 잠자리가 떴다
온통 푸른 하늘이므로 아무것도 필요없다
옛사람은 푸른 하늘 푸른 하늘이라 쓰고 아이고 아이고
라고 읽었다
나는 아내에게 푸른 하늘의 편지를 쓴다
무식하게
그리움이 외로움이라고
외로움이 그리움이라고 쓴다
-------------
+ 벚꽃
벚꽃 피어나느라고
밤이 그토록 눈 뜨고 있었나보다
벚꽃 피어나느라고
추운 밤이 다하여 그토록 가슴 아프게
먼동 트었나보다
벚꽃 피어나느라고
벚꽃 우르르 우르르 피어나느라고
저 땅속 뻗어내려간 뿌리들까지
저 하늘 속 나뭇가지들 우듬지 끝까지
봄날이 간다 힘이란 힘 다 바쳐버려
더 무슨 힘으로
세상의 재난 막아서겠느냐
벌써 병충해로 오도 가도 못하며
벚꽃 지는 날
징징 울지도 못하나보다
올해 꽃 피느라
내년 꽃 피느라
내 목숨의 힘 다 바쳐버려
몇십 평생 살 것을
몇년인가
몇년 반인가 살고 말아야 하나보다
벚꽃 밑에서 나는 고개 들었다 고개 숙인다
당신 나 안 만났으며
하고 고개 숙인다
당신 나 안 만났으면
힘이란 힘 다 바치지 않고
숨 느린하고
걸음 느른할 텐데
당신 나 아닌 누구 만났으면
하고 고개 숙이다 고개 번쩍 들어올린다
아, 벚꽃 지고 있다
---------------
+ 함박눈
함박눈이 내린다
까마득하고 까마득한 날들 이래
몇백억 7백억의 삶
몇백억 7백억의 죽음 위에
함박눈이 내린다
그 많은 삶과 죽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다친 짐승이
어딘가에서 눈을 맞고 있으리라
그 짐승 근처에서
그대 이름 부르다 만 내 혈혈단신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눈을 맞는다
======
+ 배반
이렇게 깊을 줄이야
온몸으로
등불을 비추어도
겨우 발 앞일 따름
이렇게 깊은 곳일 줄이야
아내의 몸
아내의 얼
겨울밤 아내의 꿈속 어느 지하 거기
내려가도
내려가도
이렇게 바닥 모를 칠흑일 줄이야
아무리 돌팔매 던져도ㅛ
그 돌팔매 떨어지는 곳 툭! 소리 들릴 수 없는 곳
아, 아내의 세계여
아내의 어느날의 무한이여
차라리 이건 배반이 아니고 뭐냐
내려가도
내려가도
마지막이 없구나 바닥이 없구나 절망의 연재이구나
----------
+ 입산
산으로 간다
더 깊이
산으로 간다
거기밖에 올 데가 없어서
거기밖에 실컷 올 데가 없어서 간다
산으로 간다
더 깊이
산으로 간다
거기 저 혼자서 피어 있는
외딴 산벚꽃 피어 있는 산으로 간다
거기 가
쌓아둔 울음 한짐 다 풀어놓고
가비야히
가비햐히
나비로
두견새로 돌아와야 한다ㅏ
사랑하기 위해서는
산으로 가
더 깊이
산으로 가
내 누누한 것들 다 보내드리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한다
싹 돋듯
열매 맺듯
처음부터 다시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
산으로 간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산으로 가
한나절로 한철을 삼아도 좋아
울어버리고
주어버리고
가난할 대로 가난해진 빈 몸으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몇만번째의 처음으로 만나는 그이를
그이 다음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산으로 간다
-----------------
+ 어느 선언
나의 사랑을 선언하노라
의무 없는 가을이여
권리 없는 봄이여
혹한이여 폭염이여 나의 동지여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나는 사랑했던 어제와
사랑할 내일이 없는
나의 사랑을 선언하노라
나는 무한으로 사랑하지 않고
찰나의 비애로 사랑하노라
나는 우주로 사랑하지 않고
우주의 세포로 사랑하노라
나는 산상의 종교로 사랑하지 않고
산기슭이 미신으로 사랑하노라
나는 거석으로 고인돌로 사랑하지 않고
돌맹이의 환희로 사랑하노라
나는 시베리아로 사랑하지 않고
시베리아의 풀로 사랑하노라
나는 그라운드제로로 사랑하지 않고
일엽편주로 사랑하노라
독재여 자본이여 나의 오랜 동지여
나는 해석으로 사랑하지 않고
불가사의로 사랑하노라
누구의 불가사의로
누구의 불가사의로 사랑하노라
어쩔 수 없노라
어쩔 수 없노라
이제 나는
스스로 조상이며
스스로 자손인 누구의 고독으로 자랑할 수밖에 없노라
나의 사랑을 선언하노라
-----------------------------
+ 떠도는 나라의 부부
나라라는 것이 꼭 한 군데만 있다더냐
한 군데의 나라도
그 나라 다음
다른 나라였고
또 다른 나라 아니였더냐
아예 한 군데의 나라 작파하고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저기에
모레는 또 저기에 나라 펼치는 우리 아니었더냐
저 사막에 가 사막국가이고자
저 초원에 가 초원국가이고자
대륙국가이고자
해상국가이고자 해저에 용궁국가이고자
저 창전 속의 허공국가이고자
오, 나는 사막국에서는 모래이고
초원국에서는 풀이거라
대륙국에서는 흙이나 바위이고
해상국에서는 파도소리이거라
허공국에서는 구름이거라
너는 사막의 회오리이고 비이거라 엇비슷이 산이고 수평
선이거라
너와 나의 나라란
여기 있다가
저기 있다가
또 저기 있는 나라 아니더냐
대지 저 창천의 밤 철새 가고 가지 않더냐
바람 자다 깨다 오지 않더냐
======
+ 계산
오늘 2010년 10월 20일
이 세상에는 계산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다
자연의 은혜를 환산하니
연간 4.1 달러라 한다
그 가운데서
숲의 은혜가 연간 4조 달라라 한다
이 자저러지는 쪽물의 하늘
이 하늘은 얼마짜리인가
서울 간 아내
기다려지는 저녁
해 기우는 동안
점점 커지는 것
점점 확실해지는 것
아내의 은혜는 얼마짜리인가
아, 아직 소금이 안된
신안군 임자도의 어이할 줄 모르는 밀물자락은
얼마짜리인가
-------------
+ 골백번
재회인지 몰라
희미한
아련한 어느 삶
그대와 나는 젖형제였는지 몰라
아니 누가 먼저 나온 줄 모르는 쌍동이였는 몰라
한어미의 가슴
한젖으로 쥐암쥐암 자라나
그대는 앞서거니 나는 뒤서거니였는지 몰라
하나는 바다를 건너가고
하나는 바람과 바람 나누어지는 산기슭을 헤맸는지 몰라
헤매다가
헤매다가
어느날 오다가다 스치다가
불현듯 뒤돌아보며
어렴풋이
어렴풋이 바다 저쪽을 몰라보았는지 알아보았는지 몰라
그대와 나에게는
한어미의 젖냄새의 기억이 혹시나 하여
맞아
맞아
이 내음이야 하고 다시 만났는지 몰라
잠 깨어
한밤중의 무서움 같은 외로움 같은
먼 날들 지나
네 목소리 들으며
네 눈썹 보며
맞아
맞아
그대와 나는 쌍둥이었는지 몰라
젖형제였는지 몰라
이 세상에서의 가시버시란 그냥 속칭 엄컷수컷 늘어붙는
것 아냐
오백 생의 가시버시라니
오백 생 이상의 가시버시 끄트머리라니
그보다
더 골백번 잘백번 한어미 젖 물었던
한핏줄의 원수인지 무엇인지 몰라
그러다가 설미쳐 생피붙은 것인지 몰라
그대의 나다
나의 그대나
아냐
몇백 생 따위 전혀 없이
이번 한번
단 한번뿐인
젖내음 따위 전혀 없이
맨 처음이자 맨 끝장 이것인지 몰라
----------------------
+ 저녁 요구르트
아직 녀석이 안 돌아온 저녁
둘의 식탁
마즙 한 잔
물큰한 구운 토마토 서너 조각
쩌둔 찬 고구마 반 토막
무엇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아내가 요구르트를 가져왔다
아!
행복의 탄식 하나가 나와버렸다
내 행복이란
누구의 행복 한쪽이
나에게 오 것인 줄 알아버렸다
나는 누구의 생(生) 한쪽이거나
나는 누구의 사(死) 한쪽이거나
----------------------
+ 고추잠자리 일기
9월이라 하늘이 몇번이나 크가
거리낄 것 없이
고추잠자리
뿔붙은채
거리낄 것 없이 떠다닌다
하늘이 낮달을 묻어둔 채 가만히 눈 뜨고 있다
구름 하나 오지 않는다
뿔붙은 한 쌍밖에 아무도 없다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
방 안의 그가 나온다
하늘 전체가 사랑이다 너무 큰 사랑이다
=======
+ 귀로
서울 나들이다
금요일 강의 뒤
두어 가지 일 보고 남부터미널에 간다
아내도 오전 강의 뒤
서울에 와
볼일 몇가지 보고
유럽에서 온 내 인세 이체하고
남부터미널에 온다
둘은 7시 15분 버스를 탄다
지난 삼십년 동안
가을 논들이 턱턱 줄었다
아파프 위로
물류창고 위로
첨단부품 공장 위로
팍 저문 하늘에 바쁜 헬리콥터가 건너간다
저녁은 원인 없이 서러움이 들어맞는다
저녁은 이유 없이 외로움이 딱 들어맞는다
끝내
저녁은 외로움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외로움이 되어 딱 들어맞는다
아직 떠나지 않은 철오리 서너 마리가 건너간다
아내는 신중하디신중하게 입을 연다 그 말이 나오다 만다
죽어서 함께 있어요
이렇게 함께 있어요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튼다
삶의 다음에 삶은 없다
버스는 전용노손에서 일반노선으로 옮겨 달린다
나는 입속에 답한다
맞아
맞아
이데아는 없어!
이데아는 만년의 가설이야!
아내의 손이 나의 손이다
물론
나의 손이 아내의 손이다
삶의 이쪽에
죽음의 저쪽이 서로 손잡는다
-------------
+ 몽유도
정녕 그날밤 꿈속이었습니다
천둥 쳤습니다
천둥번개 쳤습니다
둘의 벌거숭이
바아흐로 천둥번개 쳤습니다
내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대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오로지 욕설 퍼부어대고 싶었습니다
방성대곡이고 싶었습니다
숨막혔습니다
숨막히다가 숨 터져나왔습니다
천둥 쳤습니다
둘의 벌거숭이 천둥번개 쳤습니다
둘의 벌거숭이
먹구름장
하늘 꼭대기 솟아올랐습니다
솟아올랐습니다
솟아올랐습니다
또 솟아올랐습니다
솟아올라 떨어졌습니다
오로지 산산이 부서져 신음조차 흩어져버리고 싶었습니다
둘의 벌거숭이 나태와 성급으로 식어왔습니다
아프리카 에렉투스의 별빛들을 꿀꺽 삼켰습니다
----------------
+ 나의 행복
세상의 불행이
천분의 일로 줄어들었는지
만분의 일로 불어났는지 모른다
각국의 정치는 반복일 뿐
정치 이후의 정치는 오지 않는다
나의 행복은 고독하다
해가 뜬다
나의 행복은 백원어치도
백만원어치도 아니게
아침이슬이 빛난다
나의 행복은
돈 있을 때
돈 없을 때 전혀 없다
정오의 해
그뒤의 햇빛에
오후의 그늘이 깊다
나의 행복은 그냥 무인지경의 흙이다
나의 행복은 법구경이나 공관복음 따위가 아니라
그냥 새다 여러 새소리다
나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그냥 풀이다
그냥 대기 속의 중력이다 해저 수압이다
새야 날아라
심해어 백 마리 천 마리 너희들도
그 어둠속 맹복으로 노련하디노련하게 헤엄쳐오랴
언제부터 언제깍지
내 행복은 네 행복의 문이다
삐걱!
문이 열린다 해가 지리라 해가 머뭇머뭇 뜨리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 행복 몇십억분의 일이리라
----------------
+ 회상 이후
꼭 읽고 싶었던 책을 샀을 때
사서
대번에 열일곱 장 열여덟 장 읽어갈 때
꿔모뤄의 『이백과 두보』
아직 읽지 않은 대목을 덮어둘 때
꼭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났을 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뒤늦게 깨달을 때
그 사람과
1950년 조치원에서 청주까지
1951년 군산에서 남원까지
1955년 비행깃재에서 정선읍내까지
1959년 거창에서 가야까지 야로까지
함께 걸어갈 때
검정 고무신 바닥에 구멍나며
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를 때
함께 꺼므꺼므한 골짝 시냇물
손바닥으로 떠먹을 때
함께 어젯밤보다
그젯밤보다
더 커다란 오늘밤 별덩어리들을 우러러볼 때
엉엉 울부짖고 싶을 때
자, 드시라요 더 드시라요
이런 말 말고
저 금성이나 수성 목성 근처에서 내달러온
필생의 별빛들이 뚫고 오는
그 광막한 어둠과 함께
이 가난한 밤의 어둠 이슥할 때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어둠속의 별로 내려와
어쩌다 사로 바라볼 때
온갖 시시한 것들 하나하나
시시할 수 없이
엄연할 것
그리하여
혼하다흔한 '사랑해' 말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서
참고 참 고 참았다가
천분늬 이 실수로 나와버린 말
'사랑해'로
너에게 말할 때
네 귀가 들어버리고 말았을 때
상화!
너는 어디 있느냐
우주 낭떠러지의 어디에 가 있느냐
여기 있는 상화! 그러나 여기 없는 상화!
============
+ 칠장사에서
웬 완만함이 나의 것인가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
웬일로 세상의 바쁜 것들 실컷 잠들었구나
고마운 지고
고양이 게으름인가 해설피 검둥이 녀것 늘어진 낮잠인가
하던 일손 놓아버린다
아내 촐싹여
어디
이월쯤이나 가자
칠장사쯤이나 가자
몇해 만에 굽이쳐 칠장사에 갔다
가니
다 저녁 저녁예불 때
사마기 종을 울린다
다음
다음 사미가
북을 울린다
다음
묵어를 두둑두둑 울린다
운판을 땡땡 울린다
아침 33천 서른세 번 종을 울렀을 터
저녁 28수 스물여덟 번 종을 울린다
종소리
온 세상 목숨들을 위해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울린단다
북소리 짐승들을 위해 울린단다
북어소리 물속의 고기들을 위해
운파노리 공주으이 세들을 구제하기 위해 울린단다
아내가 말한다
지상의 나무들과 풀들을 위해 천상의 별들을 위해
둘의 몸을 울리자고
과연 그대로 아내의 몸과 내 몸 속에서 샛별이 절로 울린다
어둑어둑 숲들이 절로 울린다
---------------------------
+ 너는 먼 근원이다
최소한으로
쵀대한으로
내 사랑은 인류학적일 것
밤에 카모마일 차를 마실 때
너는 이 세상의 너로 그치지 않는다
너는 지금의 너
지금의 나의 너로 그치지 않는다
너는 몇백년 전의
몇천년 전의 너로 그치지 않는다
아랄 해
카스피 해의 너로 그치지 않는다
저 유대신화
아담의 뼈 한 개로
흙 한줌으로 만든 이브가 아니라
내 사랑 이전부터
너는 인류학적일 것
저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 어디에서
파낸 화석
인류의 조상이 여자였음을
그 여자로 하여금
나자가 태어났음을 깨달을 때
너는 다음의 아프리카 싸바나의 너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그녀이다
또 그녕이다
그녀의 피
또 그녀의 원소 스며내려
너의 핏속에서
먼 근원으로부터 내가 9개월 만에 7개월 만에 태어났다
기어이 내 호르몬은 네 흐르몬이다
너는 내 어머니의 무한이다
--------------------------
+ 성도착에 대하여
변신은 신화가 아니다 허구가 아니다
오전의 허구는
오후의 사실이 되고 만다
알아버렸다
반드시 지구는 변신의 행성일것
떠나는 길에 몰랐던 것
돌아오는 길에 알았다
빈 가방에 담긴 옷들을 알아버렸다
나는 사랑할 때 여자가 된다
도저히 남자로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사랑에 덜컥 뛰어들었다
나는 십년 전보다
더 여자다
나는 이십년 전보다 더 여자다
나는 나를 바꾸지 않으면
내 신체와
내 영혼과
내 부모의 성을 바꾸어
아버지가 어머니가 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후천적인 멍텅구리로 알아버렸다
1990년 대 후반
나는 까치들이 늘어난 마정리에서
술 안 마시고 알아버렸다
나는 물레를 돌려야 한다
바람 부는 날
바람 불다가
바람 자는 날
바람 잔 죽음의 기슭에서
아낙의 물레를 돌리며
긴 이야기의 실을 자아야 한다
두잠 자고 난
어둠속의 누에들로
암컷과 수컷이 바뀌어야 한다
나는 황소로서는
수사자로서는
장끼로스는
수제비로서는 수갈매기로서는
아 안전(眼前)에 신천지가 개(開)하였도다
나는 암컷이로다
나는 계집애로다 계집의 자궁이로다 땅이로다
밑도끝도 모르는 바다 용궁의 입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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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내가 되어간다
언제였다
아직 싸락눈짓 없을 때
아직 가루눈짓 없을 때
아내와 함께
덕봉리 위 형제봉을 바라보았다
기어이 싸락눈짓 하고 말았다
아내의 옷이 추워 보였다
저문 형제봉이 애매모호하게 멀어져갔다
마음에 무엇이 가득히 쌓여 몇층의 마음이 되었다
오늘은 아내가 서울에 갔다
몇가지 볼일이 밀려 있었다
나 혼자 라면을 먹고
확실한 시각으로
극명한 실재의 형제봉을 바라보았다
마음에서 무엇인가를 쌓여 있던 것들이 쑥 빠져나갔다
나는 텅텅 비어 아내가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아내가 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알았다
지금 아내가 없이
내가 아내로 나와 함께 서 있다
대문 밖에 누군가 빈 사이다병을 놓고 갔다
그것을 치운 뒤
아내를 기다리는 일이
내 착각의 시작이었다
나는 아내가 되어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조국의 휴전선은 여기서 멀고 가까운 한 누구의 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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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아내의 잠=
오늘 아침
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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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고증
달밤
꽃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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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동시발화
배드민턴
나무 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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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호명
허사
번개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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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자전거
춘당지
한강하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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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일몰
임신
오동꽃 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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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그 불안
어떤 이름
아부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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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
신우염
어떤 술주정
아내의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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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悲)
사랑
독백
손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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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
편지
벚꽃
함박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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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입산
어느 선언
떠도는 나라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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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골백번
저녁 요구르트
고추잠자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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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몽유도
나의 행복
회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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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에서
너는 먼 근원이다
성도착에 대하여
나는 아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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