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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류시화 시 2

+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습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주었습니다.

​내 집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습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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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민들레밭에
내가 두 팔 벌리고
누워 있다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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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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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신비의 서를 나는 읽었네
글자 없이 종이 없이 씌어진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저 티벳 성자들의 낯선 세계 속으로
나는 가 보았다.

​흰구름의 길을 헤치고
밀라레빠와 대머리 독수리들의 대화 속으로
그리고 절대의 음악을 나는 들었다.

​연주하는 이도 없이 악기도 없이 울려 퍼지는
신비 시인 파비르의 시에 나는 취했다.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지만
그가 주는 술은 마실 수 있다.

​술잔도 없이 건네주는 그 술을
입 대지도 않고 나는 마신다.

​이 술취한 자의 말을 들으라
삶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다만 덧없는 시간의 화살 속에서
그 화살 쏘는 자를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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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 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 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 때는 이것도 여리디 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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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잠시 시대의 어지러움으로부터
그대의 눈과 귀를 돌려라.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정화되기 전엔
이 시대의 어지러움은 그대의 힘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것.

이 세상에서 그대가 할 일은
영원을 지키며 기다리고 응시하는 것
그대는 이미 이 세상사에
묶여 있고 또 풀려나 있으니.

그대를 부르는 때가 오리니
그대 마음을 준비하고
꺼져가는 불길 속
마지막 불꽃을 위해
그대를 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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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조각을 넣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쌉싸름한 맛을 좋아했지
단순히 그 차이뿐
늦은 삼월생인 봄의 언저리에서 꽃들이
작년의 날짜를 계산하고 있을 때
당신은 이제 막 봄눈을 뜬 겨울잠쥐에 대해 말했고
나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흰꼬리딱새를 이야기했지
인도에서는 새들이 힌디어로 지저귄다고
쿠시 쿠시 쿠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시간 같은 것은 없었지
다만, 늦눈에 움마다 빰이 언 꽃나무 아래서
뜨거운 홍차를 마시며 당신은 둘이서 바닷가로 산책을갔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던 날 우리 이마를 따라다니던 비를 이야기하고
나는 까비 쿠시 카비 감이라는 인도 영화에 대해 말했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차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품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처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냈다는 것
노랑지빠귀 우는 아침, 당신은 잠든 척하며
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아주 잠들어 버리겠지
그저 당신의 찻잔에 남은 레몬 한조각과
내 빈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 단순히 그 차이 뿐
그라고는 이내 우리의 찻잔에서 나비가 날아올라
꽃나무들 속으로 들어가겠지.
날짜 계산을 잘못해 늦게 온
봄을 따끔하게 혼내는 찔레나무와
늦은 삼월생의 봄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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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안개

나에게 길고 긴 머리카락이 있다면 저 산안개처럼 넉넉히 풀어헤쳐

당신을 감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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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지하도 난간 옆에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남자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모두가 타인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그에게
무언의 말을 전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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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의 시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 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의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때 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 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하여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의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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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별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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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頂 스님

무더운 여름,
스님은 오두막 앞을 흐르는 개울에 땀을 씻으러 갔다가 그만 넘어지셨다.
미끄러운 바위에 발을 헛디뎌 뒤로 나동그라지신 것이다.

​위험한 순간!
머리에서 많은 피가 흘렀지만 스님은 끝내 병원에 가지 않고
치료를 하셨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셧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병원을 찾게 되면 내 신분과 거처가 노출되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병원을 찾지 않는 내 고집을 나는 지금까지도
잘한 일로 여기고 있다.'

​사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숨까지도 자유와 맞바꾸지 않으려는
그 정신이 서늘하기까지 하다.

​얼마동안을 머리에 붕대를 붙이고 다니시면서도
끝내 병원을 찾지 않으셨다.

​그 후 스님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거듭 말씀하셨다.
죽음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뒤에서 덮칠 수가 있다.

​죽음은 앞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제고 자신의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고타마 붓다도 임종의 자리에 이르러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생은 덧 없으니, 부지런히 자신을 점검하라.'

​한편 금세기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자.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죽음은 삶의 종합이다.
나 자신이 알고 있거나 주위에 다른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법정스님에 대한 일화들을 돌아볼라치면
그분의 삶이 매 순간 하나의 절정에 근접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스님의 휘파람 소리는 일품이다.
불일암에 머무실 때는아침에 휘파람을 불면
멀리 주암댐에서 날아온 호반새가 오동나무 위에 앉아 화답을 하곤 했다.

​또한 봄에 산을 내려 오시다가 오솔길 복판에 솟아난
대나무 싹을 보면 손으로 뽑으며 이렇게 속삭여 주곤 하셨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너의 길이 아니구나.'
어린 죽순과 호반새와 길가의 구절초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은
생애 후반에 이르러 수많은 동물들과 얘기를 했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연상시킨다.

달라이 라마 역시 비가 오면 길가에 나와 있는
지렁이들을 손바닥에 들어 기도문을 외며,풀섶으로 옮겨 준다고 나는 들었다.

​그러한 성인들이 인간의 역사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쁨이다.

​고백하건데, 법정 스님에 대해 나 자신이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그분과 하룻밤도 한방에서 잠을 자 본 적이 없지만,

​그러한 '참인간'과 함께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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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그치고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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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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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 새벽

시월이 왔다,
그리고 새벽이 문지방을 넘어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만진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냐고
개똥쥐바퀴들이 나무를 흔든다

시월이 왔다 여러해만에
평온한 느낌 같은 것이 안개처럼 감싼다

​산모퉁이에선 인부들이 새 무덤을 파고
죽은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저 서늘한 그늘 속에서

​어린 동물의 눈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 그것을 따라가볼까

또다시 시월이 왔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눈을 감으면 밝아지는 빛이 여기에 있다

잎사귀들은 흙 위에 얼굴을 묻고
이슬 얹혀 팽팽해진 거미줄들

​한때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눈물이 많아졌다

​이슬 얹힌 거미줄처럼
내 온 존재에 눈물이 가득 걸렸던 적이 있었다

시월 새벽, 새 한마리
가시덤불에 떨어져 죽다

​어떤 새는
죽을 때 가시덤불에 몸을 던져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죽는다지만

​이 이름 없는 새는 죽으면서
무슨 울음을 울었을까

시월이 왔다
구름들은 빨리 지나가고

​곤충들에게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리라
곧 모든 것이 얼고 나는 얼음에 갇힌 불꽃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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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노래

벌레처럼
낮게 엎드려 살아야지
풀잎만큼의 높이라도 서둘러 내려와야지
벌레처럼 어디서든 한 철만 살다 가야지
남을 아파하더라도
나를 아파하진 말아야지
다만 무심해야지
올 일이 있어도 벌레의 울음만큼만 울고
허무해도
벌레만큼만 허무해야지
죽어서는 또
벌레의 껍질처럼 그냥 버려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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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수 없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물은 내게 무가 되라 한다
허공을 올려다보면
허공은 또 내게 무심이 되라 한다
허공을 나는 새는
그저 자취없음이 되라 한다

​그러나 나는
무가 될 수 없다
무심이 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나 내 흔적은 남고

​그는 내게 피 없는 심장이 되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둑처럼 밤중에 이슬을 밟고 와서
나더러 옷을 벗으라 하고
내 머리를 바치라 한다
나더러 나를 버리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내게 물이 되라 하나
나는 불로서 타오르려 한다
그는 내게 미소가 되라 하지만
그러나 아직 내 안에 큰 울음이 넘쳐난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라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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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위에 쓴 시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
+ 빈 강에 서서

1
날마다 바람이 불었지.
내가 날리던 그리움의 연은
항시 강 어귀의 허리 굽은 하늘가에 걸려 있었고
그대의 한숨처럼 빈 강에 안개가 깔릴 때면
조용히 지워지는 수평선과 함께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지.
저무는 강, 그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목숨처럼 부는,
목숨처럼 부대끼는 기억들뿐이었지.

​2
미명이다.
신음처럼 들려오는 잡풀들 숨소리
어둠이 뒷모습을 보이면
강바람을 잡고 일어나 가난을 밝히는 새벽 풍경들.
항시 홀로 떠오르는 입산금지의 산영(山影)이 외롭고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슬픔의 시작이었지.

​3
다시 저녁.
무엇일까 무엇일까 죽음보다 고된 하루를 마련하며
단단하게 우리를 거머쥐는 어둠,
어둠을 풀어놓으며 저물기 시작한 강,
흘러온지 오래인 우리의 사랑,
맑은 물 샘솟던 애초의 그곳으로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저물어야만 하는가
긴 시름 끝의 마지막 인사를
끝내 준비해야만 하는가.

​4
바람이 불었다.
나를 흔들고 지나가던 모든 것은 바람이다.
그대 또한 사랑이 아니라 바람이다.
강가의 밤, 그 밤의 끝을 돌아와
불면 끝의 코피를 쏟으며
선혈이 낭자하게 움트는 저 새벽 여명까지도
바람이다. 내 앞에선 바람 아닌 게 없다.
그대여......

---------------------
+ 첫사랑의 강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꼈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들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희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지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
+ 겨울날의 동화

1969년 겨울, 일월 십일 아침, 여덟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내가 아직 이불 속에 있는데
엄마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넌 아직도
잠만 자고 있니!나는 눈을 부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이제 열 살이었다 버릇없는 새들이 담장위에서
내가 늦잠 잔 걸 갖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외박 전문가인 지빠귀새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신발과 지붕들이 눈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붉은 열매들이 있었다 가시나무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그때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가시나무에 앉은 텃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갑자기
어떤 걸 알아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내 삶을 지배하게 될 어떤 것이
작은 붉은 열매와도 같은 어떤 것이 나를
내 생각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겨울의 마른 열매들처럼
바람 하나에도 부스럭거렸다

언덕 위에서는 멀리 저수지가 보였다 저수지는 얼고 그 위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붉은 잎들 좀 봐. 바람에 날려가는! 저수지 위에 흩날리는
붉은 잎들! 흰 눈과 함께 붉은 잎들이
어디론가 날려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해 겨울의
마지막 남은 나뭇잎들이었다

-----------------------
+ 겨울의 구름들

1
겨울이 왔다.
내 집 앞의 거리는 눈에 덮이고
헌 옷을 입은 자들이 지나간다.

​그들 중의 두세 명을 나는 알고
더 많은 다른 얼굴들은 알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소리쳐 그들을 부른다
내 목소리는 그 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저 아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2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챦은 것이었다
밤에는 다만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온갖
부질없이 깊은 생각들에 사로 잡힐 때
늘어뜨려진 가지, 때 아닌 붉은 열매들이
머리 위에서 창을 두드리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희고 창백한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면
겨울의 구름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있었다 등불의 심지만을 들여다 보며
변함 없는 어떤 흐름이 갑자기 멈춘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3
아니다, 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책장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곤 했다,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고
나는 오갈데가 없었다
내 집 지붕 위로
겨울의 구름들이 흘러 가는 곳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오래 불고 조용히 속삭이면서
더 큰 물결을 내 집 뒤로 데리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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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삶이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늘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달아나지 마라.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
그러나 무엇이 참 슬픈가를 생각하라.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것,
그것이 참으로 슬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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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사람

인도인들은 죽어서
갠지스 강에 재가 뿌려지는 걸
크나큰 축복으로 여긴다.

특히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은
목숨이 얼마 붙어 있지 않은
노인들이 인도 각지에서 몰려와

죽기 전까지 적선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번 돈은
화장 비용으로 쓰인다.

구걸하는
한 노인에게 내가 말했다.

당신은 작년에 내가 왔을 때도
구걸을 하더니 아직도 죽지 않고
여전히 구걸을 하고 있군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난 밤마다 죽지만 아침이면
부활한다네.
그걸 난들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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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지는 지금

사랑이 오실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한 사람을 떠나보냅니다

​비록 우리 사랑이 녹아내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해도
그래도 한때 행복했던 그 기억만은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이 사랑
그대가 주었던 슬픔은 모두 잊고
추억의 상자에서 꺼내어
아름다웠노라, 지극히도 아름다웠노라
회상할 수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우리 사랑이 이별로 남게 되어
지금은 견디기 힘든 아픔뿐일지라도
사랑이 오실 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헤어지는 지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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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처럼 내 손

오늘처럼 내 손이 싫었던 적이 없다
작별을 위해 손을 흔들어야만 했을 때

​어떤 손 하나가 내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상처 입게 했다

​한때는 우리 안의 불을 만지던 손을 
나는 멀리서 내 손을 너의 손에 올려놓는다

너를 만나기 전에는 내 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었다

​새의 날개인 양 너의 손을 잡았었다
손안 가득한 순결을
그리고 우리 혼을 가두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내 손이 싫었던 적이 없다
무심히 흔드는 그 손은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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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인의 초상

아침에 할 일이 없는 날은
나도 쓸쓸하더라 할 일 없이
마음 속에 이런 저런 마음만 물밀어 모이고
일어서다 앉다 다시 누워 보는 내 머리맡에
푸른 고양이 한 마리 와서 머물더라
그런 날 아침이면 나도
그 고양이 푸른 몸 안으로
숨고 싶더라

밤에는 또 기다려도 쉬이 잠이 오지 않더라
어두운 지붕과 지붕을 지나
고양이는 가고 오지 않고
누울 자리에 누워 있으면 낮게
누가 내 이름을 부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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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은 비를 데리고

1
바람은 물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새는 벌레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구름은 또 비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나는 삶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달팽이는 저의 집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백조는 언 호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어린 바닷게는 또 바다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아, 나는 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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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붙은 옥수수 밭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은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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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없이 건네지는 술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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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질링*에서 온 편지

지금 지구는 외롭고 바람 부네
사람이 그리워 사람의 마을로 간 것을 파계라 하던가
여기는 별이 너무 많아
더러는 인간의 집을 찾아들어
몇 점 흐린 불이 되기도 하네
히말라야의 돌은 수억 년 전의 조개를 품고 있다지
이 생의 일인데도 어떤 일들은 아득한 
전생의 일처럼 여겨져
꽃 같은 기억, 돌 같은 기억이 너무 믾아
세상이 나를 잊기 전에 내가 나를 잊었구나
농담을 하듯이 살았네
해발 2억 광년의 고산을 넘어와
밤마다 소문 없이 파계하는 별들 보며
전생의 내가 내생의 나에게 편지를 써서
거꾸로 읽어 보네
여인숙 옆 사원에서 들려오는 주문인 듯
네부람바고롭외·······

*다르질링Darjeeling: 인도 북동부 서벵골 다르질링 주 행정구, 시킴히말라야 산맥 남동쪽 기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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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눈을 나는 보았다

눈물로 가득한 눈.
꽃입처럼 눈물을 뚝뚝 떨구는 눈.

​이루지 못한 욕망에 한숨짓는 눈.
눈웃음짓는 눈.
많은 눈을 나는 보았다.

​절망한 자의 눈.
어린아이의 눈.
세상을 초월한 눈.

​그리고 흙으로 채워진 죽은 자의 눈을 나는 보았다.
장님의 움직이지 않는 눈도 보았다.

​짐승의 눈과 곤충의 눈과
내 눈을 들여다보는 어떤 눈,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미친자의 눈도 나는 보았다.

​사랑할 것이 있는 눈과
사랑을 찾아 헤매는 눈

​어떤 눈은 인생을 이미 다 살았고
어떤 눈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
모든 것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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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
+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 
네가 나에게 왔다.
잠긴 마음의 빗장을 열고
내 영혼의 숨결에
수 놓은 너의 혼...
나는 너로 인해 새로워지고
너로 인해 행복했다.
그리고 나 살아있는 동안
너로 인해 행복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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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슬픔이 그대를 부를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 할 수 없을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 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 할때 그 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때
저 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말라

---------------------------
+ 온 곳으로 가는 도중에

누나 이제 그만 바다로 손을 뻗어
배들의 돛을 잡아 올려요

이제 그만 저 반짝이는
섬들을 건져올려요

​멀리 모래사장 위에
개들은 어슬렁거리고

​여름은 얼룩을 남기며
가고 없는데

​이제 그만 누나 우리 얼굴을
얼굴 속에 파묻어요

​태양 저 편 더 많은
태양이 빛나지만

​우리 이마는 차가워 이제
그만 우리 목에 감은 모래의 두 팔을 풀어 놓아요

​망나니들은 모여 칼춤을 추고
바다 위에서 거인과 천사는 싸움을 하는데

우리는 침묵하고
우리 이마 위에는 일식이 드리워지는데

누나 이제 그만 배들의 돛을 잡아올려요
이제 그만 저 반짝이는 섬들을 건져올려요

​우리 온 곳으로 가는 도중에
불꽃나무는 시들고

​나무위 큰곰별은 추워서 떠는데
그런데 누나

​저 구름이 구름 뒤에
뿔 달린 호랑이들을 감추고 있어요 

===================
+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언제나
식기 전에 밥을 먹었었다.

​얼룩 묻은 옷을 입은 적도 없었고
전화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 있었고

​늦도록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날마다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날마다 집을 치웠었다.
장난감에 걸려 넘어진 적도 없었고
자장가는 오래 전에 잊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어떤 풀에 독이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예방주사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누가 나한테 토하고 내 급소를 때리고
침을 뱉고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이빨로 깨물고 오줌을 싸고
손가락으로 나를 꼬집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내 생각과 몸까지도

​울부짖는 아이를 두 팔로 눌러
의사가 진찰을 하거나 주사를 놓게 한 적이 없었다.

​눈물 어린 눈을 보면서 함께 운 적이 없었다.
단순한 웃음에도 그토록 기뻐한 적이 없었다.

​잠든 아이를 보며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깰까봐 언제까지나
두 팔에 안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 대신 아파 줄 수가 없어서
가슴이 찢어진 적이 없었다.

​그토록 작은 존재가 그토록 많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내가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결코 알지 못했었다.

​내 자신이 엄마가 되는 것을
그토록 행복하게 여길 줄 미처 알지 못했었다.

​내 몸 밖에 또 다른 나의 심장을 갖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몰랐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감정인지 몰랐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그 기쁨,
그 가슴 아픔, 그 경이로움,
그 성취감을 결코 알지 못했었다.

​그토록 많은 감정들을..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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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의 꽃을 나는 꺾었다

세상의 정원으로 나는 걸어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 둥근
화원이 있고 그 중심에는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 꽃은 마치 빛과 같아서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나는 둘레에 핀 꽃들을 지나
중심에 있는
그 꽃을 향해 나아갔다

한낮이었다. 그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누구의 화원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그것은
나를 향해 저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듯했다

밝음의 한가운데로 나는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눈부셔 하며
신비의 꽃을 꺾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갑자기
화원 전체가 빛을 잃고
폐허로 변하는 것을

둘레의 꽃들은 생기를 잃은 채 쓰러지고
내 손에 들려진 신비의 꽃은
아주 평범한
시든 꽃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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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서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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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1
나 태양에게 고백할 것이 있네
한때 나는 최고의 시인을 꾼꾸었으나
화살을 맞은 독수리처럼
추락하였다
시인이 될 권리를 갖고 태어나
열 살부터 다락방에서 홀로 우주를 꿈꾸었으나
구름들이 몰려와 내 둥지를
감춰 버렸다
그리하여 나 삼류 시인처럼 거리를 헤메며
수년간 시를 잊고 살았다
누군가 세상의 등록 장부에서
내 이름 석자를
지워 버렸다

2
나 태어나는 날
태양은 일식을 시작하고
꼬리가 여러개인 별똥별이 날아 와
점치는 여자의 눈에 박혀 버렸다
눈 먼 여자의 예언에 의할 것 같으면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었다
태양이여, 내 눈을 멀게 하렴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지 않도록
내 눈이 본 것과 보게 될 것들을 그리워 하지 않도록
태양이여, 내 눈에게 말하렴
눈 먼 자의 지혜를
진정으로 볼 것을 보고 있는 자의 지혜를

3
눈 먼 여자가 나를 따라왔다
눈 먼 늙은 여자가 바다 위를 걸어
나를 따라왔다
태양은 또 다시 일식을 준비하고 있다

=====================
+ 류시화의 새끼 기린 이야기

​기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새끼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일격을 당한다.
키가 하늘 높이만큼 큰 엄마 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직으로
곧장 떨어져 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 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 기린을 세게 걷어찬다.

​새끼 기린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땅바닥에
세게 부딪쳤는데 또 걷어차다니 !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라,
엄마 기린이 또다시 새끼 기린을 힘껏 걷어찬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 기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흔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걷어 차인다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은 가늘고 긴 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 일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엄마 기린이 한 번 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찬다.
충격으로 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난 새끼 기린은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발길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엄마 기린이 달려와
아기 기린을 어루만지며 핥아주기 시작한다.
엄마 기린은 알고 있는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차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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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뒤에 숨은 붉은 열매처럼
여기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는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 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무엇인가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그것
눈밖에 없는 그것이
밤에 별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큰곰별자리 두 눈에 박혀
나를 내려다 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눈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을까

​여기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지고 난 붉은 열매처럼
차가운 공기를 떨게 하면서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떨게 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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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 보니
그 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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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 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 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과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
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잡고 해마다
두꺼비와 가시연꽃과 붉은가슴도요새가 나온다
무당벌레와 흰올빼미도 나온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릎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
+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그 하루를 정원에서 보내리라.

​허리를 굽혀 흙을 파고
작은 풀꽃들을 심으리라.

​내가 떠나간 뒤에도
그것들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 있도록,
아마도 나는 내가 심은 나무에게 기대리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새와 곤충들 또한 나처럼 그 나무에
기대는 것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어쩌면 나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지막으로 흙 위로 난 길을 걸으리

​걸으면서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진실했던 때를 기억하리라.

​아마도 그것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리라.
그 어느 날보다 후회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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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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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버릴 수 있다면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 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내리고
마음은 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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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들은 저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다

사막은 얼마나 생각할 것이 많으면 그렇게
한 생애를 길게 잡았을까

소금은 얼마나 인생의 짠맛을 보았으면 그렇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을까

얼음은 얼마나 고뇌에 차면 그렇게
마음은 차갑게 닫고 있을까

우물은 얼마나 후뢰가 깊으면 그렇게
마음 깊이 눈물을 감추고 있을까

심해어는 또 얼마나 마음을 강하게 먹었으면 그렇게
심해의 압력과 어둠을 견디고 있을까

별은 또 얼마나 말못할 과거가 많으면 그렇게
먼 곳까지 달아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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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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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__________* 50

나무
눈물
들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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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
잠시
홍차
산안개
---------
거리에서
나무의 시
벌레의 별
법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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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치고
새와 나무
시월 새벽
짧은 노래
---------------
그럴 수 없다
눈위에 쓴 시
빈 강에 서서
첫사랑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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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동화
겨울의 구름들
나는 누구인가
부활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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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지금
오늘처럼 내 손
젊은 시인의 초상
구름은 비를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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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람이 아니야
잔없이 건네지는 술
다르질링*에서 온 편지
많은 눈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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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온 곳으로 가는 도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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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신비의 꽃을 나는 꺾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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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의 새끼 기린 이야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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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버릴 수 있다면 
사물들은 저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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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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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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