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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광규 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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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 조상처럼 하얗게
늙은 그를 만나려면
물론 돈이나 빽으로는 안 된다
냉난방이 된  쾌적한 실내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면서
그이 곁에 갈 수는 없다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라도
달려갈 수 없는 곳에
그는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를 만나려면
맨몸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갈밭이나 진흙길을 땀 흘리며
두 발고 걸어가야만 한다
발이 부르트면 길가에 주저앉고
절록거리며 고개를 넘어
저녁 노을을 바라보다가
여울물 움켜 마시고
이정표도 없는 밤길을 한 발짝씩
무겁게 걸음 옮겨놓고
넘어지면 더듬더듬 기어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의 곁에 도달한다면
온갖 지식과 재산 쓸데없고
모든 노래와 기도 필요 없고
마침내 그를 만나 기뻐하는 대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의 곁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끝없는 잠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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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2

요즘도 그를 그리워하는사람이 꽤 많다.
일찌기 감옥에서 젊은 날을 보내고, 만주로 건너가 일본 관
헌에게 쫓기던 그는 고량주 한잔 제대로 마신 적 없고, 집에
도 소식 한번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먼 앞날을 생각하는 마음 변함 없
던 그가 총탄에 쓰러진 저 벌써 반 세기,
오늘도 살아 있다면 그는 80객 할아버지가 되어, 경로 우
대증을 가지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우리를 손자처
럼 사랑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를 말단 부하나 사병, 또는
단순한 소비자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일찌기 그는 군포역에서 어느 지주집 소작료인 줄 알고 공
출미를 가로챘다가 왜경에게 붙잡혀 혼이 났었다.
해방이 되자 검은 안경을 쓰고 다니며 자기의 전파를 자랑하고, 적산을 불하받아한 밑천 잡았다. 6.25 동란 때는 기름
장사로, 4.19 이후에는 쌀장사로 돈을 벌고, 세상이 바뀔 때
마다 부동산을 사들였다.
내가 이 재산을 죽어서 가지고 가겠느냐고 그는 입버릇처
럼 말한다. 여러 가지 보약을 많이 먹었을 테니, 앞으로도 
그가 오래 살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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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40호 짜리 그 거대환 유화를
누가 모를 것인가
너무나 유명한 그 작품을
모두들 오랫도안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그림이 아니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조금만 수채화 하나를
어느 소도시의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오롯한 기쁨에 잠겨
혼자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그림 하나가
소문도 없이
나의 눈길을 따라
마음속으로 들어왔음을
누가 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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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 따라
돌우물 할머니 산소에
성묘 가던 길

봄 가뭄에
진흙먼지 날리는
삼십 리 길을
고무신 신고
타박타박 걷노라면
그림자 밟힐 때쯤
풀무골에 닿았지

소달구지 지나가는
객주집 마루에 걸터앉아
잠깐 다리를 쉬며
아버지는 막걸리를 들고
나는 감주를 마셨지

길섶의 종달새
포르륵 머리 스치며
아지랭이처럼 나른한
졸음을 노래하던 곳

꼬리 물고 떠오르는
온갖 기억 덧없어
오늘은 가족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달려가는
아스팔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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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

산등성이 비탈에
키 작은 참나무 한 그루
눈 비바람에 웅이지고
오가는 손찌검에 시달리며
벌써 몇 백 년인가
그 자리에 뿌리박고 서 있다
돌도 쇠도 믿지 않고
오직 사람만 믿어
종달새 노래 아래
나무 한 그루 심고
아무런 다툼 없이
살피로 삼은 옛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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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

일 년에 한 번쯤 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하여
저렇게 커다란 정문을
한가운데 만들어 놓고
열두 명의 수위가 밤낮으로 지킨다
<경문  사용 금지>
보통사람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저 으리으리한 정문을 보아라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게 열려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닫혀 있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있는
드나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로막기 위해서 있는
저것은 우리에게
문이 아니라
벽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저 벽을 
허물어뜨리자

아무도 밟지 못하게 하는
이 대리석 계단을
없애 버리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화강암 기둥을
뽑아 버리자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저 육중한 쇠문을
부숴 버리자

그리하여 없애 버리자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저 문을
없애 버리고 차라리
거기에다 벽을
만들자
그리고 그 벽에다
새로 문을
만들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문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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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祭

가을 아침 안개 낀
들판에 누런 볏단들
어깨 비빈다
건너 마을 멀리서
마당질하는 소리

바싹 마른 솔방울로
향로불 지피고
산신제 소나무 아래
강신주를 뿌린다
오대조 할아버지
흙으로 돌아간 자리에
풀이 돋고 잎이 시들기

백오십 년
가을 봄 거슬러올라가
늘어지게 축문을 읽고 
삼헌에 첨작을 끝내면
퇴주가 한 대접

다섯 분상 음복하고
낮술이 거나해져
쓰름매미 울어대는
두멧골로 내려온다
어렸을 적 초가지붕에
불타던 빨간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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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

오랫동안 활주로를 달리다가
손 흔드는 환송객들을
몇 번씩 뒤돌아보면서 
구식 프로펠러 비행기는
힘겹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초가집 굴뚝 연기처럼 나지막하게
감돌며 천천히 멀어져 갔다
헤어지면 또 만나겠지
잠깐 활주로를 달려다가
땅을 차고 점보제트기는
힘차게 솟아오른다
시커먼 매연과 폭음을 남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미련  없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때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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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눈 덮인 뒷산 참나무 끝에서
들짐승 울음소리 들려오면
겨울밤
마을 갔다 돌아온
아버지 기침 소리에
싸리문 빗장이 걸리면
뜨겁게 군불을 땐
온돌 바닥에 몸을 구우며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아이들은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자동차 소리 시끄럽고
가로등 환한 아파트촌의
겨울밤 
난방은 잘 들어오고
스틸 도어는 굳게 잠겼지만
까닭 없이 자꾸 두려운 마음
전화가 울려올 때마다
초인종  소리가 날 때마다
불안해지는 애비를 믿고
식구들은  혼곤하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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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내 기

할아버지가 열여섯 살 때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선산 김씨댁 딸을 맞아들여 삼남사녀를 얻고,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다음, 미스 정과 결혼하여 
한 가구의 세대주가 
되었듯이

이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여 하루가 시작
되고, 퇴근하여 술 한잔하고 집에 와서 신문 보고 발 씻은
다음 잠자리에 들어가 하루가 끝나듯이

또는 마이크 실험이 끝나고 개회사로 시작되어, 국민의례
애국가 봉창 회장 식사 내빈 축사 결의문 낭독 만세삼청 폐
회사로 단합 대회 행사가 막을 내리듯이

모든 일이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순서대로 진행된다면 세
상은 얼마나 평온할까.
그런데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면서 계속해서 살다
보면 인생은 시작과 달리 그 끝이 자주 들쭉날쭉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기틀을 잡은 분이었는데,
아주 오래 살았다.
할아버지가 작고한 뒤 삼 년 만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집안에서 가장 나이 든 어른이 되었다. 마치 아버지
의 위에 하늘이, 아버지의 아래 땅이. 아버지의 뒤에 죽음이, 
아버지의 앞에 우리 가족이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살다가 어머니가 먼저 사망하여 계모를 맞아 들었고 그다음에는 아버지와 큰형이 한꺼번에 급서 하여
집안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이 혼란은 오래되자 정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모든 일이 시작은
쉽고, 끝내기가 어려운 것 같다.
순서대로 끝내기는 마음대로 안 되고, 스스로 끝내기는 더
욱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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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울 림

무너진 초가집 몇 채 남기고
모두들 도시로 떠나 버렸다
비록 메마르고 거친 땅이지만
평당 만원이면 싸지 않은가
(우선 사놓고 보자)
시민 아파트를 지어 볼까
쾌적한 전원도시를  건설해 볼까
공업 단지나 관광단지를 앉혀 볼까
고속 탄환열차를 운행해 볼까
미래의 우주 공항 기지를 만들어 볼까
벌써 측량대가 꽂혔다고
소문은 어느새 바람보다 빨리 퍼진다
복덕방이 수없이 들어서고
고급 승용차가 줄지어 몰려들고
땅값은 금방 열 배로 튀어 오른다
평당 십만 원이면 괜찮지 않은가
(후딱 팔아 치우자)
뒤따라 모든 소문이 자취를 감추고
변함없이 버려진 땅에서
세금만 더 많이 징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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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넥타이를 매고
두 눈을 똑바로 뜬
그의 정면 상반신을
나는 많이 보았다
(앞에서 똑바로 본다면
누가 그를 모를 것인가)
그는 가끔 옆모습을
보여 준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을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띄어 어느 날
그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말없이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의 뒷모습도
누군가 보고 있겠지)
요새는 그의 앞모습이
낯설어지고 구부정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
오래된 거울을 볼 때처럼
내가 문득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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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니

귀찮은 것
빼어 버리지
충지만 생기고
어금니를 괴롭히는
사랑니는 빼어 버려
철이 들면 무엇해
씹지도 못하는 걸
(의사의 말은 언제나
의학적으로 옳다) 
하지만 빼어 버리는 것도
고치는 것일까
(겁 많은 환자에겐 으레
어리석은 고집이 있으니까)
잠 못 자게 괴롭히는
미운 이빨을 그래도
나는 버리지 않을 테야
비록 귀찮은 사랑니지만
내 몫의 아픔을 주는
내 몸의 일부인 것을
내가 아니면 누가
씹으며 지그시
참을 수 있겠어
간직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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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心 電 圖

가을바람을 타고
 잠자리들 날아오른다
나뭇잎들 떨어져도
돌아갈 곳 없는
텃새들이 자지러진 울음소리
서리가 내리고
날이 일찍 저문다
눈발이 흩날릴 때쯤
철새들의 노래도 그치고
겨울 산은 한밤이 되어
어둡다 답답하다
땅은 깊이 잠들어
해가 떠도 깨어나지 않는다

텃새들이 수다스런 지저귐이
다시 꽃을 피우면
산비둘기 울 때마다
마을이 조금씩 밝아지고
뻐꾸기와 꾀꼬리 노래할 때는
산이 온통 환해진다
쓰르라미와 풀벌레 소리
물처럼 쏟아지는
여름날 한낮이 되면
나무들의 힘찬 맥박에
땅이 두근거리고
가물거리는 기억 속으로
어제 본 나비가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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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오늘은 코카콜라 대신
꿀을 마신다
바위틈에서 샘솟는
차가운 맹물을 마신다
합성수지 표주박으로
한 바가지 가득 떠서
오랫동안 잊었던 물
마시는 법을 배운다
맑은 물에 나뭇잎 틔우고
마음 나누던 사람들
가 버린 지 오랜 샘터에서
오늘은 석유 묻은 손으로
물을 마신다
돈을 내지 않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차가운 맹물을 혼자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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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후

경주로 가는 길가에는
미루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거린다
매미가 울어대던 날들
아득한 햇빛이 쌓여
황금이 된 왕관에는
오랜 중력을 견디며
신라의 나뭇잎들이
아직도 매달려 있다
천 년 전에도 그러니까
지금처럼 나무가 있고
바람이 불고
왕관이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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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깨 비

온종일 온갖 모습을 보여 주고
온종일 온갖 소리를 들려주는
그것 앞에서
언제나 앉아 있는 사람은
온종일 보고
온종일 들을 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다

혹시 전기가 나간 어느 날 밤
촛불을 켜놓고 깨닫게 될까

그것이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았고
아무 모습도 보여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의 귀를 막아 왔고
자기의 눈을 가려 왔고
마침내 자기의 꿈을 빼앗아 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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홰나무

밤마다 부엉새가 와서 울던 그 나무를 동네 사람들은 홰나
무라고 불렀다.
홰나무는 우물가에 넓은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두레박이
없어지고, 펌프가 생기고, 뒤이어 공동 수도가 설치되었던
그 자리에 얼마 전에는 주유소가 들어섰지만, 홰나무는 오늘
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6.25 때는 홰나무 아래 폭격 맞은 군용 트럭의 잔해가 오랫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고철 장수가 쓸 만한 부속품들을 뜯
어간 뒤,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그 커다란 쇳덩어리
는 3년 가까이 시뻘겋게 녹이 슬다가 마침내 해체되어 사라
졌다.
홰나무에도 파편이 몇 개 박혔는데, 그 쇳조각들은 차츰 녹아서 수액으로 흡수되고, 그 자리에 웅이가 생겨났다. 언제
부터인지 거기에는 자연보호 팻말이 붙여 있다.

홰나무를 바라보면 지금도 그 거대한 나무를 만지고 싶고,
그 나무에 기대고 싶고, 기어 올라가고 싶고, 때로는 그 나
무의 뿌리나 가지가 되고 싶어 진다. 그리고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하거나, 택시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부끄러운 느
낌이 든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저 홰나무이고, 예나 이제나 
한자리에서 서 있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
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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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열매

개나리
진달래
활짝 핀 날은 해마다
흐리고
바람불거나
비 나린다
꽃은 떨어져 짓밟히고
향기는 젖어 독가스처럼 퍼진다
날이 개면
봄은 이미 가 버리고
농약 뿌린 나뭇가지마다
똑같은 열매가 달린다
짓밟힌 꽃과 떨어진 열매는
썩어서 오히려
거름이 된다고 하자
가을에 익은 탐스런 열매는
그러나 누가 따먹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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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놓기

스무 해 넘도록 피운
담배를 몇 개비 갑 속에
남겨 놓은 채
제법 여유 있게 끊어 버렸다

아직도 못 갚은 빚이 있고
끝내야 할 일이 많은데
가족과 약속과 사랑
남겨 놓은 채
아쉽게 이승을 떠나듯

유언을 생각하기 전에
마시던 포도주 반 병쯤
남겨 놓은  채
이제 마지막으로
술을 끊어야겠다

목술 걸고 잡은 힘과 돈도
얼마쯤 남견 놓은 채
이처럼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떠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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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코스

새벽에 출발했다
아무래도 이 산은 하루에 넘기   힘들 것 같다
그동안 앞서 떠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뒤따라오던 사람이 나를 앞지르기도 한다
내가 떠난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
젊은 목소리로 떠돌어대며 어느새
저 아래 계곡을 올라오고 있다
오후 두 시쯤 산꼭대기에 이르니
해는 벌써 기울기 시작하고
내려갈 방향을 잡기 힘들다
캄캄한 밤중에나 도착할 수 있을지
길도 없고
절도 보이지 않고
내려간 이들의 소식도 전혀 못 들었다
갈수록 깊고 험한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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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장구와 꽹과리
징과 북이 어우러지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소리

길놀이 한판 끝나면
청바지 입은 아이들은
탈춤을 배우고
안경 쓴 어른들은
뉴스워크를 읽는다

스물 다섯 해 동안 변함없이
아이들은 자꾸 젊어지고 
어른들은 점점 늙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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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비 엠

지금은 20세기의 4 사반기
정보 산업의 시대다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리면
온 세상이 컴퓨터에 들어간다
전자두뇌의 힘으로
적의 동태을 파악하고
납세 예상액을 계산하고
정밀 제품을 만들기도 한다
전지전능한 컴퓨터는
모르는 것이 없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나의 신조까지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디자인도 산뜻한 이 전자두뇌를
움직이는 것은 그러나
첨단 기술과 외국 자본이라가 보다
소리 없이 반도체를 흐르는
국산 전기의 힘이다
자료를 입력할 힘이 없거나
정보를 출력할 힘이 없다면
아는 것도 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리면
<힘이 곧 아는 것>이라고
나의 신조를 고쳐서
컴퓨터는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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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구두

1301호 문 앞에 오늘은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다
뒤축이 비뚜로 닳고
허옇게 코가 벗겨진
저 낡은 구두는 틀림없이
그가 신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젊었을 때
어렵게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늙은 아내를 잃은 뒤
그는 억지로 시골을 떠나
아들 집으로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뉴타운 고층 아파트 구석방에서
죄진 듯 말없이 살게 되었다
손주들은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고
며느리는 빨래를 하기 귀찮아하고
아들은 바빠서 만날 수도 없었다
밤마다 텔레비전을 끝날 때까지 보았다
아침에는 뒷산에 올라가
지갑에 든 천 원짜리 세어 보고
농협 저금통장을 들여보기도 했다
낮에는 13층 베란다에서
우리에 갇힌 여원 동물처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승강기에서 누군가 만나면
얼른 눈길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이 아파트에서 열 달쯤 살았을 것이다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낯익은 그의 구두가 오늘은
1301호 문 밖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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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큰 하늘

흔히들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직업이란 결코 본인이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막벌이꾼이나 노점상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돈깨나 있
고 공부깨나 했다는 위인들도 스스로 원하는 직업을 갖고 살
아 가기는 어렵다.

예컨대 식품 제조업으로 성공한 이ㅇ팔 씨는 국회의원에 출
마했다가 낙선하여 재산을 모조리 날렸다. 그는 대명식품 사
장으로 만족했어야 한다.
그러나 경찰 출신으로 문교상이 되는 수도 있고, 직업이 원
래 의사였던 사람이 혁명가가 되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꿔 놓
을 수도 있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가 정치에 손을 댄 것
이  반드시 잘못이라고만 할 수 도 없다.

기자를 직업으로 삼았던 김문ㅇ 씨는 신문사를 쫓겨난 뒤
생계를 위하여 출판사에 취직했었다. 그런데 책을 만들어 돈
을 번 그 출판사가 전자 산업에 뛰어들어 홀딱 망하는 바람
에 그는 또 직업을 잃었다. 한번 선택했다가 여러 번 잃는 것
이 그에게는 직업이 되고 만 셈이다.

ㅇ홍섭 씨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부지런한 농민이었다. 염소도 기르고, 특작물 재배도 하고,
유실수도 심어 보았으나 예기치 않았던 가격 폭락으로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농토마저 공업 단지에 수용되었으므로, 그
는 요즘 도시 변두리에서 연탄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

박ㅇ호 씨는 어느 모로 보나 상인으로 대성했을 사랑이다.
하다못해 잡화상이라도 한 군데 차렸어야 옳다. 그런데 왜 하
필이면 가장 그 답지 않게 대학 교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
작 훌륭한 훈장이었던 그의 동료는 본의 아니게 중도에서 대
학을 떠나야만 했었는데.

명예로운 군인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
정을 좌우하다가 마침내는 민주주의의 반역자가 되어 버리는 
경우는 특히 남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탁월한 정치학자나 유능한 경영인이 무능한 관리나 부패한
행정가로 전락하는 예는 동남아 지역에서 자주 발견된다.
좋은 작품을 쓰던 시인이나 작가가 어떤 이념의 추종자가
되거나 특정한 종교의 신자가 된 다음부터 아예 어떤 운동가
나 지사, 또는 광신도로 변신에 버리는 수도 물론 있다.
위와 같은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리에 있어야 할 사
람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 생업에 종사하다
가 일생을 마치는 수가 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도 결국은 넓고 큰 하늘의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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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그는 1897년 라인란트에서 태어났다.
25세 때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에 가입, 4년 만에 나찌스의 베를린 대관구지도관이 되었고, 나찌스 기관지 <아느리프>의 편집국장으로 6년간 활동하였으며, 1933년 히틀러
가 집권하자 국민 계몽 및 선전 담당 장관이 되었다.

검열, 금지, 수색, 압수, 분서, 연행, 구속, 투옥, 처형 등
을 통하여 그는 문학. 예술. 언론. 방송. 영화 등 거의 모든 문화 공보 분야를 획일적으로 탄압. 통제하였다
그는 또한 유태인 박해의 선봉이기도 했다.

독재자에 대한 그의 충성과 피시즘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했던가 하는 것은, 히틀러가 유언에서 그를 수상으로 임명해 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45년 제3 공화국이 패망하자 그는 베를린에서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그는 자기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이 세상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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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거리

자하도 계단에서 동전을 구걸하던 외다리 노인, 가로수 밑
에서 오징어와 땅콩을 팔던 아주머니, 육교 위에 엎드려 콧
물을 흘리던 앵벌이, 골목 입구에서 해삼과 멍게, 돼지갈비
와 막소주를 팔던 포장마차 아저씨, 은행 신축 공사장 옆에
서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던 장님 부부, 모두들 갑자기 자취
를 감추었다.

그들이 사라진 휑뎅그렁한 거리에 사복  경찰들이 서성대고, 
백화점 앞에는 성경과 십자가를 든 젊은 전도사를 세워 놓았다.

청소부들은 밤 아홉 시에 출근하여 밤새도록 쓰레기를 치우
고 길을 쓸었다.
눈에 띄게 깨끗해진 거리로 몰려다니며 외국인들은 사진
을 찍고 쇼핑을 했다.
그리고 고급 호텔에서는 저녁마다 호화로운 리셉션이 열렸다.

집이 없는 사람들, 빚을 얻을 수도 없는 사람들, 하루 벌
어 하루를 살다가 거리에서조차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올림
픽 복권을 더 많이 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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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농부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고
노래하기 위하여
당신은 고향을 떠나 왔습니까
아직도 시골에는 우직한 농민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알려 주기 위하야
당신은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까
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농촌 관광 기사를 쓰면서
도시 생활을 저주하고
시골을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택한 일입니다
정말로 당신 다운 시인이 되려거든
차라리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 어머니만 남아
메마른 땅에 농약을 뿌리고
돼지를 길러서 밑지고
비닐하우스를 세우는
시골로 돌아가
논밭을 매고
경운기를 몰고
면서기와 싸우고
억울해 한숨짓고
오래된 유행가를 부르십시오
스스로 시인과 농부가 되어
땀 흘리며 노래할 때
당신의 삶은 곧 시가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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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씨의 직업

우리 동네 ㅇ씨는
직업이 무엇일까

집 앞에 유달리 환한
방범등이 달려 있을 뿐
출퇴근이 분명치 않고
길에서 만날 수도 없이
그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동네 입구에
<ㅇ喪家>라는 화살표가 나붙자
좁은 골목 가득히 검은색
관용차들이 몰려들었다
눈빛 날카로운 인물을 한 명씩 태운
고급 승용차들이 사흘 동안 꼬리를 물고
왔다가
곧 되돌아갔다
택시를 타고 오거나 걸어서
문상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 이제야 알겠다
ㅇ씨의 직업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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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찾아서

공기를 조화시키는
서울 빌딩에 들어가서
잠깐 더위를 피할 수는 있다
혹시 남산 근처라면
매미가 울어대는 한여름
나무 그늘 밑에 들어서서
잠깐 햇볕을 필할 수도 있다
산그늘을 찾고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붕 위에서
나무 위에서
구름 위에서
밤에는 지구의 저쪽에서
잠도 자지 않고
이글거리는 저 해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숨 막히고
참을 수 없어
도저히 더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땡볕 아래서 불타
마음만 소금처럼 남겨 놓고
몸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까
할 때쯤 남녘에서
태풍이 불어오고
바겐세일이 또 시작되고
우리는 다시 해를 찾아서
현장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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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동 친구

중년이 넘도록
홀어머니 모시고 이제는
머리칼 희끗희끗해진 저 친구

모친상 상징을 옷깃에 달고
쇼핑하러 나와 오늘은
아내와 둘이서
넥타이를 고르고 있구나

저 친구 내외가 결혼한 뒤로
저렇게 홀가분한 모습
환한 얼굴은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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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언덕길

북한산 언덕길을 올라가노라면
나무와 수풀 우거지고
산새들 우짖는 계곡에
우람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어
달력의 그림 속을 걷는 것 같다
커다란 개가 지키는
이 집들은 대개 문패가 없고
언제나 텅 비어 있다
주민들은 아마 온종일
장터에 나가도 돈을 벌고
싸움터에서 피 흘리고
자기의 돈과 힘을 지키느라고
집에 올 시간조차 없는 모양이다
아깝다 비어 있는 큰 집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정작 이런 집이 없구나
집이라면 적어도
지붕은 눈비를 피하고
벽은 바람을 막아야 하는데
집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비바람을 제대로 막을 곳조차 없다
그래도 지붕에서 비가 샐 때는
양동이를 밑바닥에 늘어놓고
한여름을 지내고
벽틈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는
옷을 껴입고
연탄가스와 싸우며
한겨울을 난다
마당도 대문도 없을망정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판잣집들
붐비는 골목길을 올라가노라면
아무도 아름다운 경치 내다보지 않고
아무도 맑은 바람 숨 쉬지 않고
아무도 새소리 물소리 듣지 않는
음산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어
죽음의 마을을 가는 것 같다

=============
아이들의 결정

이곳이 비록 바닷가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만 분교라
하더라도, 전투기들의 연습 작전 목표가 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느닷없이 시커먼 비행 물체가 곤두박질쳐 내려올 때는 가
슴이 섬뜩해지고, 그 폭음 때문에 수업이 몇 번씩 중단되곤
한다.
가르치는 어른이나 배우는 아이들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
다.

이 것을 막아 보려고 관계 요로에 몇 차례 진정했으나, 아
무런  성과도 없었다
어른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샘솟는 희망이 있어, 오늘은 먼 나라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정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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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내며

지방 옆 사진틀 속에서
늙지 않는 조상이 웃고 있다
자손을 닮은 혼백이 둘
시접과 술잔
왼쪽에는 국수 오른쪽에는 떡
푸짐한 술안주는 둘째 줄에 있다
닭찜은 가운데 어적은 동쪽 산적은 서쪽
그 앞에 탕이 세 그릇
넷째 줄에는 간장을 가운데 두고
김치와 나물 양편에 촛대
왼쪽 끝에는 포 오른쪽 끝에는 식혜
마지막 줄은 어린 손자들을 위하여
동쪽의 대추와 서쪽의 밤 사이에
오화당 산자 강정 다식 들
제상 가득히 진설해 놓고
분향에서 사신까지
제사를 지내며 살펴보니
오래된 가례일망정
요즘의 절차와 다를 바 없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큰 행사인데
이것을 깨닫기에 40년이 걸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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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초소에서

하루에 두 차례씩
부풀어 오르는 갯고랑
건너편은 충청도 당진 땅이다
나문제기 망둥이 모두 물에 잠기면
떨어져 나간 맞은 쪽은
갈 수 없는 고향이 된다

시멘트를 비벼 바른 새마을 길로
돼지를 실은 경운기 지나가고
텃밭에는 온통 특작물 하우스
앞마당의 송아지와 닭들 한가롭고
뒷동산 소나무 위로
왜가리 몇 마리 날고 있구나

물이 빠지면 지저분한
개펄로 건너편과 이어지는
이쪽은 경기도 평택 땅이다
나뉘지  않은 땅으로는
아무도 숨어 들어올 수 없으므로
갯가의 소금내만 멀리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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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표 또는 가위표

미리 주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끝난 다음에 주는 것이
우리의 예의 아닌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들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터진 수도관을 고치고
막힌 하수구를 뚫고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고
새로 지은 집을 재어 보고
도난 사건의 현장에 출동했다
그들이 말없이 돌아간 뒤 그러나
수압이 약해 물은 나오지 않고
길바닥으로 구정물이 넘쳐흐르고
계량기는 엄청나게 돌아가고
준공필증은 나오지 않고
도둑은 낮에도 나타났다
사람들의 말이 옳았다
시작하기 전에 받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누구나 떳떳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예의를 지키는 것이 옳은가
관습을 따르는 것이 맞는가

===============
솔고개를 넘어서

1
안 된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아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그것을 위하여
그는 일생을 살았다

그것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고
부모와 인연을 끊고
아내와 헤어지고
자식을 버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감옥에고 몇 차례 들어갔었다
아무것도 두려워 않고
오직 그것만을 믿으며
평생을 버티었다
 
남들은 그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그들이 별을 담고
기업체의 대표가 되고
돈 많은 집과 사돈을 맺고
한 나라의 권력을 잡기도 하는
바로 그럴 나이에
그것을 위하여
그는 죽은 것이다

2
멀리 북녘에서 달려와 멈춘
솔고개 산 중턱 양지바른 자리에
벌써 몇 년 전인가
그는 조그만 무덤이 되었고
그것은 키 작은 비석이 되었다
북한강이 넓게 퍼져
조용히 흐르는 곳
그가 태어난 동네에서
꼬마들은 게릴라전 흉내를 내고
강변 유원지 모래톱에서
군인들은 도장 훈련을 한다

생전에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이 휴일을 맞아
오늘은 새 옷 입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들고
솔고개 그의 무덤가로 야유회를 왔다
고인의 이름도 모르고
묘비도 사치스럽게 여기는
그들은 무덤가 잔디밭에서
돼지고기를 구어 먹고
축구를 하고
사성 뒤에다 오줌을 누고
소주병을 깨뜨려 버렸다
그들이 쓰레기를 버릴 곳마다
억새풀이 시커멓게 우거져서
어느새 그의 무덤을 가린다

----------------------------
옛 선비를 생각함

내가 앉았던 이 자리에도
언젠가 누가 앉겠지
생각할 때부터 어렴풋이
그 소문이 들려왔다
몇 천년을 두고 끈질기게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재산과 가족과 목숨을 버리고
그 소문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리고 뼈만 남은 두 손으로 소중히
그 소문을 믿는 노인들을 보면
그 파다한 소문이 한갓
거짓말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살지 않는다면
그 소문만 쫓아
언제 어디를 떠날 수 있으며
떠나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에도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되겠지
느낄 때마다 공허하게
죽은 뒤를 약속하는
그 소문 대신
이미 죽어 버린 옛 선비가 떠오른다
이마가 넓고
키가 컸던 그 선비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거문고를 타면서
유장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를 좋아하고
시를 사랑했던 그의 가난한 생애가
평범한 기록으로 남아
오늘도 나를 침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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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상속의 노래

제각기 이 세상에 태어나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입장료를 내고
오후 7시에
세종문화회관에
모인다 무대 위에
체구와 음성과 분장과 의상이 다른
네  사람의 남녀가 등장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딸은 아버지를 잃어서 슬퍼하고
아들은 재산이 생겨서 기뻐하고
사위는 장자 상속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며느리는 보석상에 진 빚을 갚아 달라고 호소한다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제 나름대로 절박한 사연을
노래하는 이 장면은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고
1980년대의
서울과
전혀 다른데
오랫동안 박수가 나올 만큼
감동적인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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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기르는 일꾼

도급기로 벼를 훑고
도리깨로 이삭을 털고
길마에 실어 나른 적도 있었다
요즘은 탈곡기로 나락을 털고
경운기로 거두어들인다
거울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대신
비닐하우스에 특작물을 재배한다
두엄보다 비료를 사다가 쓰고
농약을 많이 뿌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러 식구다
하늘은 아버지
땅은 어머니
밭은 아들
논은 딸
소와 돼지와 닭과
소나무 참나무 이류나무들 데리고
못 박인 손으로
눈 비바람 가리며
순박하고 억세게  살아간다
모두가 한마음 한 몸뚱이
상사도 부하도 없고
명령도 복종도 없고
누구에게 굽실거릴 것도 없다
주말에 잠깐 달려와
무덤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땅값을 계산하고
죽어서야 흙의 품에 돌아와
잊었던 혈육과 만나는 사람들은
도시의 고층 아파트에 갇혀
저마다 혼자 외롭겠지만
우리는 목숨을 기르는 일꾼
예나 이제는 다름없이
온 가족이 한울타리
한마을에 모여서 산다

===================
그가 뚱뚱해지는 이유

그는 교도소에서 10년간 복역한 바 있다.
감옥 속에서 내다보던 바깥세상은 비교적 자유롭고 또한 적잖은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출옥하던 날은 눈이 내렸다
정든 죄수들, 그리고 낯익은 옥리들과 헤어져 옥문을 나설
때, 그는 거의 무표정했다.
가슴속에는 그래도 막연한 희망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낯선 옥리들
이 되었고, 약삭빠른 모범수들이 되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깥세상 전체가 그에게는 감옥이 될 것이다.

이제는 더 나갈 수 있는 바깥조차 없었다.
교도소에 다시 들어갈 자유마저 잃어버린 그는 집안으로,
방안으로 , 아내의 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세상을 벗아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안으로 들어가려면 자신의 몸이 자기보다 더 커야
만 했다. 그는 자꾸 뚱뚱해졌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뚱뚱해지면 자기도 그만큼 커지므로, 
그는 아직도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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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우리가 죽더라도

당신이 아니더라도 김형
죽어야 할 사람은 많다
이웃을 억눌러 괴롭히고
형제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말끝마다 평화를 내세우며
총칼을 들이대는 사람들 이 세상
곳곳에서 흥청거리고 있지  않느냐
그날 초여름 비 개인 날
뻐꾸기 소리 맑게 들리던 아침
당신이 깨어나지 못한 것은
죽음의 가스 때문만이 아니다
지나간 반 세기의 아픔
함께 겪고
4백 억의 빛을 걸머진 채
최루탄과 구호들 가운데서
힘겹게 늙어 가는 우리들의 무관심도
당신을 조금씩 죽인 셈이다
빛깔도 냄새도 없이
발목을 휘어 감고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라오는 세월의 거품을
끝내 벗어날 길은 없지만
보라 당신의 뜻을 펼치고
이어가기 위하여
젊은 물결이 밀려오고 있지 않느냐
김형 우리가 죽더라도
태어날 사람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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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나 가방을 든 경우

1
살기가 괜찮은 사람들은
대개 자기 차를 가지고 있으므로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않고
맨손으로 다닌다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일수록
겨울에는 옷을 두둑이 껴입고
그래도 추워서
어깨를 웅숭그리고
항상 무엇인가 들고 다닌다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붐비는 버스나 전철 속에서 시달리고
가까운 거리는
아예 걸어 다닌다
신발이 빨리 닳고
옷이 쉽게 해지고
금방 배가 고파져서
살기가 어려운 이 사람들은
비록 겉모습이 초라해 보여도
대중 음식점이나 소매상을
자주 드나드는
중요한 손님들이다

살기가 괜찮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값비싼 상점이나
외국 바이어들이 묵는
고급 호텔 입구에서는
보따리를 든 손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2
부지런히 공부하는 믿음직한 학생은
항상 책가방을 들고 다닌다
옷차림이 때로는 허술해 보여도
들고 다니는 가방 속에는
사전과 도시가락이 들어 있어
묵직하고 불록하다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다니는 학생일수록
대개 겉모습은 말끔해 보여도
머리와 가슴속이
텅 비어 있어
위험하고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지하도 입구에서는
부지런한 학생이 든 
묵직한 가방을
위험하게 여기고
불록한 가방을 든
믿음직한 학생이
의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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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그 가운데
는 꼭 알아야 할 일도 있고, 또 몰라도 될 일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에 공장을 짓고 최
신 전자 제품을 생산해 냈다. 어머니는 늙은 시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번 돈으로 골동품을 수집하고, 부동산
을 매입하고, 투자 금융 회사에 드나드느라고 어머니는 너무
바쁘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한 반에 70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은 제 자식처럼 돌보면서
열심히 가르쳐 준 국민학교 때 선생님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는데, 모두가 중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성적이 나빠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남편이 외국에서 고생하는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말했다. 그래도 친목계에 부지런히 나
가면서 집을 늘리고 자동차 운전까지 배워두었다. 남편이 돌아날 날만 기다리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그 집 
아들이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간 것을 나는 몰랐었다.

누이는 봉제 공장 직공으로 하루에 3교대로 일한다. 잔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잠자기도 바쁘다. 연애할 시간도  없다.

형은 무역회사 세일즈맨으로 하루 14시간을 뛰어다니고,
밤에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꿈 없는 잠을 잔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틈도 없다.
누이가 만들고 형이 판매하는 제품들이
그렇게 싼 값으로
팔리는지 나는 몰랐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게 된다면, 세상은 오히려 재미없고, 살맛이 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할 일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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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비망록

여권과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어둔 것은 그래도 천
만대행이었다
고속전철에 짐을 옮겨 싣는 이삼 분 사이에 가죽서
류가방이 없어졌다. 경찰에 신고하느라고, 기차 두
대를 놓쳤다. 도난품 명세서를 작상하기에 시간이 걸
었기 때문이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끄집어낼 물건들
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험회사 손해사정 팀도 휴대품 목록을 요구했다.
품목과 수량은 그럭저럭 기입할 수 있었지만, 물품 가격과 구입 시가를 기억해기는 힘들었다.
통째로 잃어버린 가죽서류가방과 싸구려 카메라
및 상비 약품은  비교적 최근에 산 것이라, 대략 비슷
한 내용을 적어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컨대 일기장과 비망록, 사진촬영필름, 행사 
계약서와 여행경비 증빙서류, 각종 수집 자료와 명함
모음 등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분실물이었
다. 특히 자잘한 생활 일정이 담긴 탁상 캘런더, 관찰
과 느낌과 단상의 토막들을 직어둔 비망옥이 없어진
것은 내 생애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나는 잃어버린 다
음에야 깨닫게 된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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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 풍경화

남한산 능선을 가로질러 고압전류
윙윙 바람 가르며 흘러가는
송전탑 들어섰을 때
백두대간 정기를 끊어버린다고
할아버지는 진노하셨지요
오래된 수목화 한지를 군데군데 뚫고
송전탑 우뚝우뚝 솟아오르며
고층아파트들이 산과 들과 물가를 점령했을 때
아버지는 사라져 가는 고향 정경
유화 속에 담아 간직했습니다
아들은 비즈니스맨
동남아와 남미 출장을 다녀와서
그곳에는 송전탑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고
철강제 수출을 걱정했지요
증손자들이 그린 크레파스 풍경화 속에는
그러나 산천초목처럼 자연스럽게
송전탑과 아파트가 줄지여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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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이 많은 나라

화산이 많은 나라
사람들은 부동산처럼 화산을
소유하고 있다
유황열탕 수증기 뿜어대는 호수 주변에
신경통 위장병 류머티즘 부인병 피부병에 좋다는
노천 욕장 만들어놓고
98도씨 온천수에 계란을 삶아서 판다
곳곳에서 유황연기 뿜어대는 고원 지대에
화려한 호텔들 즐비하고
가파른 산비탈과 아찔한 대협곡 가로질러
로프웨이로 관광객들 실어 나르고
만년설이 쌓인 정상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어제 다시 폭발할 줄 모르는 휴화산을 밑천으로 아슬아슬하게 시간의
돈을 버는 나라
부글부글 지하수가 끓어올라 넘칠락 말락
뜨끈뜨끈한 바위를 골라 밟으며
떼 지어 몰려다는 원숭이 떼
없어도 좋다
보여줄 것 없어서 마음 놓고
가난하게 살 수 있는 곳
그립다 화산이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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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덩굴의 승리

대추나무와 후박나무, 단풍나무와 감나무가 몇십
년 동안 뿌리내리고 자라온 뒤뜰 장독대 근처에, 담
쟁이덩굴이 느릿느릿 기어 왔습니다 벽돌담보다 더
높이 자라서 제각기 품위를 뿜 내는 큰 키 나무들이
담쟁이덩굴을 측은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뱀처럼
땅바닥이나 담벼락을 기어 다니고, 혼자서 설
수 없는 담쟁이가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담쟁이에게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
다. 한 곳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큰 키 나무들의 영역,
뒤뜰을 떠나서, 벽돌담을 타고 넓은 앞마당을 지나서,
대문을 넘어서 집 밖으로 나가보려는 소망이지요.
뒤뜰 벽돌담으로 기어올라간 담쟁이는 덩굴손의
빨판으로 벽돌 사이의 흠을 단단히 붙들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벽면에 붙
어서 지나가려니까, 중력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
지요, 장독대와 앞마당 대문  사이의 벽돌담 중간지점
까지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리며 밑으로 처져 내려온
담쟁이는 땅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서 머
리를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상승곡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기어올라갑니다.
온갖 안 간함 끝에 담쟁이덩굴은 마침내 앞마당 대
문 지붕 위에 도달했습니다. 그동안 삼 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붉은 벽돌담 한가운데 담쟁이 줄기가 갈색
의 현수선을 굵직하게 남겨놓았습니다. 뒤뜰의 큰 키
나무들이 지붕 위에 올라온 담쟁이덩굴에게 부러운
경탄의 몸짓을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하늘을 향해서 우뚝우뚝 선 이 고고한 큰 키 나무
들과 달리, 담쟁이덩굴은 느린 속도로 넓게 퍼져가면
서, 모든 땅과 벽과 지붕을 남김없이 뒤덮고, 결국
온 동네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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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른베르크의 별

밤마다 북녘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처음에는 이름 모를 붙박이별인 줄 알았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불빛
나중에는 그것이 중세의 고성인 줄 알았다
그러나 슈테른베르크 산봉우리에 올라가 보니
그것은 산정에 구축한 반짝이는 별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고
산정에서 빛나던 고성의 불빛
꺼져버리고 말았다
차리리 가보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마음속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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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하우젠 일기

정방형 마당을 건너가는 데 자그마치
삼 분이 걸린다 이토록 넓은 안마당
한가운데 위풍당당한 플라타너스 한 그루
이 거대한 수목을 둘러싸고 임대아파트
칠 층 건물이 ㅁ 모양으로 서 있다
우람한 나뭇가지들 산지사방 뻗어나가고
여기저기 시커먼 옹이와 틈새의 상흔
밑동이 두 아름이나 되고
수령은 백 년이 넘었다고 한다
나뭇잎 흔드는 바람 소리에 귀가 먹먹
하지만 장터와 한길의 소란스러움 삼켜준다
이 늙은 활엽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터전 일찍부터 가꾸어놓고
오늘도 클라인하우젠 사람들
아침 여섯 시에 빵 사러 가고
부지런히 일터에 나가 하루를 보낸다
온종일 비어 있는 평화로운 거처
창문에 하나 둘 저녁불이 켜질 때까지
비둘기 다람쥐 검은 지빠귀 들과 함께 온종일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아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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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고 부드러운 어둠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어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어둠 속을 바라봅니다
가로등만 드문드문 깨어 있을 뿐
모두 잠들었습니다
불 밝힌 방 안에서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즐길 때도 있지만
캄캄한 창밖을 혼자서 내다보지는 않지요
우리를 둘러싸고 또 한 겹의
어둠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까맣고 부드러운 어둠
아득히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빛의 고향
일찍이 우리가 태어난 곳
이 어둠 속에서
창 안을 들여다보면
어둠의 품에 안겨 아기처럼
잠든 우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낯익은 얼굴이 거기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만납니다
밝은 낮에 잃어버린 것을
거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_______ * 51



1과 2
그림
봄길
--------
살피
새문
시제
이별
-----------
겨울밤
끝 내 기
땅 울 림
뒷모습
------------
사랑니
심전도
옹달샘
천년 후
----------
허깨비
홰나무
꽃과 열매
남겨놓기
------------
당일 코스
사물놀이
아이 비 엠
낯익은 구두
-----------------
넓고 큰 하늘
믿을 수 없는
시월의 거리
시인과 농부
----------------
ㅇ씨의 직업
해를 찾아서
효자동 친구
북한산 언덕길
------------------
아이들의 결정
제사를 지내며
해안 초소에서
공표 또는 가위표
-----------------------
솔고개를 넘어서
옛 선비를 생각함
유산 상속의 노래
목숨을 기르는 일꾼
-----------------------------
그가 뚱뚱해지는 이유
김형 우리가 죽더라도
보따리나 가방을 든 경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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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비망록
크레파스 풍경화
화산이 많은 나라
담쟁이덩굴의 승리
--------------------------
슈테른베르크의 별
클라인하우젠 일기
까맣고 부드러운 어둠

___________

 

김광규 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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