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
남녘 들판에 곡식이 뜨겁게 익고
장대 같은 빗줄기 오랫동안 쏟아진 다음
남지나해의 회오리바람 세차게 불어와
여름내 흘린 땀과 곳곳에 쌓인 먼지
말끔히 씻어갈 때
앞산의 검푸른 숲이 짙은 숨결 뿜어 내고
대추나무 우듬지에 한두 개
누르스름한 이파리 생겨날 때
광복절이 어느새 지나가고
며칠 안 남은 여름 방학을
아이들이 아쉬워할 때
한낮의 여치 노랫소리보다
저녁의 귀뚜라미 울음소리 더욱 커질 때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있다
여름이라고 생각지 말자
아직도 늦여름이라고 고집하지 말자
이제는 무엇인가 거두어들일 때
-----------
+ 고향
등이 굽은 물고기들
한강에 산다.
등이 굽은 새끼를 낳고
숨막혀 헐떡이며 그래도
서울의 시궁창 떠나지 못한다.
바다로 가지 않는다.
떠나갈 수 없는 것
그리고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곳
고향은 그런 곳인가.
------------
+ 그손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뼏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
+ 달력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 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 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
+ 한여름
모내기 시작될 즈음 조촘거리던
비가 아주 멈추어버렸다
하늘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동안
산골짜기와 우물가 물기 바싹 마르고
논바닥 쩍쩍 갈라지고
강줄기 흔적도 사라졌다
마을에서는 기우제 소문이 떠돌고
하지가 지날 때까지 두 달 넘게
가뭄이 계속되었다
매미들도 더위에 목이 쉬고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한밤중
문득 산개구리 우는 소리
뒤이어 지붕에서 창밖에서 마당에서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가족들 옆자리 더듬어보고
무슨 비밀이라도 전하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밖에
비가 오시나 봐
안타까운 일기예보 아랑곳하지 않고
초복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시작된 늦장마
하룻밤에 느닷없이 3백 밀리미터 내리퍼붓고
아담한 소읍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흐르는 물길 왜 막히고 넘쳤을까
또다시 하늘만 탓하는 여름
----------------------
+ 고요한 순간
창밖의 후박나무 가지에 앉아
귀가 먹먹하게 울어대는 매미들
숲에서 날아온 맷비둘기가
잽싸게 낚아채
채마밭 건너편으로 물고 갔다
매미의 다급한 비명 소리
금방 뚝 끊어지고
고요한 순간이 뒤따랐다
여름내 듣지 못한
짧은 침묵 들려주면서
----------------------
+ 까만 목도리
어디 있나 찾을 때마다
장난 삼아 둘째 음절에 악센트를 주었던
나의 부드러운 목도리
영하 15도. 뺨이 얼어붙던 겨울날
어두운 산자락 길 걸어 올라가
워밍암 운동틀 돌리고 내려왔을 때
등산점퍼 속에 걸쳤던
목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밤길
나 혼자 걸었는데
어디서 흘러내렸나
오던 길 되돌아가 살펴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목을 잃어버리지 않고
목도리만 없어져 다행이지
그것은 결국 내 목에
두르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떠나가 버린 것
도대체 무엇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분실과 더불어 느닷없이
나를 찾아온 손재수
반갑지 않은 친구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린 놈
따스했던 그 까만 목도리
--------------------
+ 늙은 소나무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서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
+ 나뭇잎 하나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녹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
+ 나비 두 마리
빨래 말미도 없이
한 달 내내 쏟아지는 장맛비에
주황색 능소화
아깝게 뚝뚝 떨어졌다
검은 구름 동쪽으로 몰려가며 겨우
앞산의 모습 나타나고 잠시
비가 멎었을 때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니 하얀
나비 두 마리
안쓰럽게 나풀나풀
잡초 우거진 채마밭으로 날아간다
장마철에 잘못 태어나
축축하지 않니
해도 못 보고
꽃도 못 보고
금방 땅으로 떨어질 듯
서투르게 나풀나풀 날아가는
하얀 나비 두 마리
풋사랑 이루지 못하고 비 맞으며
사라지는 어린 영혼들인가
--------------------
+ 나 홀로 집에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
+ 교대역에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
+ 담쟁이의 봄
애초에 이 담쟁이는 뒷마당 벽돌담으로
기어 올라갈 태세였다네
가을마당걷이 끝나면 이 덩굴풀
잡초로 뽑혀 죽거나
겨울에 얼어 죽을 것 같아
마당 구석에 굴러다니던 화분에
옮겨 심고 그 곁에
나뭇가지 하나 꽃아 주었지
서재 창틀에 들여놓고 겨우내
물 한 모금씩 주었더니 이 덩굴풀
화분보다 두 배쯤 부쩍 자라서
이제는 창가 한 귀퉁이에 어엿하게
제자리를 차지했다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주춤해지면
한번 와서 보려나
벌떡 일어서는 담쟁이덩굴에
새봄이 깃드는 모습
-------------------
+ 멧돼지 생각
두 자리와 바람모지를 지나서 자락길
내려올 때 왼쪽 산비탈에서 갑자기
네발짐승 한 마리 튀어나왔다 어둑한
저물녘이라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었다
놈은 나를 힐끗 쳐다보고 유유히
길 건너 동네 쪽 언덕길로 사라졌다
그날 밤 아랫마을 남도식당에 느닷없이
멧돼지 한 마리 출몰하여 저녁 먹던
손님들 혼비백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잡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구청 녹지과에서 엽사들 고용하여
길목을 지켰으나 그 후에도
포획되거나 사살되었다는 뒷소문
듣지 못했다 도망갔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무관심하게 나를 힐끗 바라보고
먹거리 찾아 마을로 내려간
멧돼지가 언젠가 다시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요즘도 거기 지나갈 때면
혼자 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
+ 목불의 눈길
동남아 어느 공항 면세점에서 샀지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부처의 얼굴
곱슬머리에 길게 늘어진 귀
눈을 내리뜨고 깊은 생각에 잠겨
보는 이의 마음까지 그윽하게 감싸주는
목불(木佛)의 두상
나의 서재 창가에 놓아둔 지
벌써 몇 해가 지나갔나
오늘따라 잘 풀리지 않는 글 쓰다가
한밤중 빗소리에 문득
창 쪽을 바라보니 나무부처의 눈길이
말없이 나를 마주 보고 있지 않은가 마치
오래 기다리던 눈길과 마주치기라도 한 듯
얼른 부처 앞으로 다가가
그 눈을 들여다보았지 그런데
형광등 착시 현상이었나 부처는
여전히 눈을 내리뜨고 있었지 어쩌면
내가 바라보지 않을 때만 이 목불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는 쓰기 싫은 글 혼자 쓸 때도
콧구멍 후벼대거나 요란한 하품
삼가야 할 듯
----------------------
+ 무정한 마음
치킨 배달 오토바이도 끊어지고
메밀묵 아웃도 이미 지나갔다
편의점 창백한 엘이디 형광등과
자동차 블랙박스 파란 불빛만
어둠을 지키고 있는 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홍제내 골목길로
배 볼록한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
정확하게 약속을 지키려는 듯
새로 태어날 생명들만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시간
온 동네가 코를 골며 잠들었는데
낙은 솜이불 뒤척이면서 왜
그대만 혼자 깨어 있는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도
들어본 지 오래되었다
아무리 눈 감고 귀 막아도
새카만 침묵에 빠진 잠
무정한 마음
끝내 다가오지 않는다
조간신문과 우유 배달이 올 때까지
선하품만 가끔 보내올 뿐
===============
+ 빛바랜 사진
녹슨 조미료 양철 상자에 담긴
흑백 사진 몇 장
"엄마"라고 써놓은 누런 봉투 속에
유학 떠난 젊은 엄마 사진
몇 장 들어 있다
몇십 년 전 눈이 부시도록
환했던 엄마 모습
어린 딸은 이 사진들 소중히 간직하고
몰래 꺼내보았을 것이다
가슴 막히는 그리움 때문에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절망 때문에 훌쩍거리며
눈물을 참고 또 참았던 안타까운
모습도 떠오른다
아득히 멀어져 간 시간의 흔적
돌이켜보니 이제
늙은 애비의 가슴도 답답해진다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은 빛바랜 사진들
차라리 불태워버리고 보지 말까
아니면 남겨놓고 갈까
---------------------
+ 생각의 사이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 소리 없는 힘
설악산 울산바위 오른쪽으로 쳐다보며
동해바다로 달려가 하염없이
수평선 바라보는
눈에는 보는 힘이 있지
스마트폰 온종일 들여다보는
소몸비들이 갖지 못한
부드러운 힘이 있다네
악보도 읽을 줄 모르면서
토카타와 푸가 듣고 또 듣는
귀에는 듣는 힘이 있지
알아듣기 어려운 강연
끝까지 듣는 청중에게도 그 지겨움
견뎌내는 힘이 있다네
대하소설이나 그리스신화
또는 난해한 시점 끝까지 읽어내는
독자에게는 끈질긴 독파력이 있지
한번 시작하려면 멈추지 않는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
+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갯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니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
+ 어느 가을날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골목길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동네 사람들이 탐내던
우리 집 감나무
큰 가지가 어느 가을날
뚝 부러졌다
주황색으로 익어 가는 그 탐스런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
+ 여름날 새벽
경북 영천은 섭씨 40도까지 올라갔고
서울도 매일 35도를 오르내린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지 3주일
밤새도록 열대야에 시달리고
새벽녘 앞집 애기 우는 소리에
눈 뜨면 창문 밖 대나무 숲에서
매미 우는 소리 요란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비지땀 흘리려나
아파트 신축 공사만 아니라면
창문이라도 열어놓을 수 있으련만
견딜 수 없는 찌통더위에
북녘의 얼음 비는 또 얼마나 녹아내릴지
-------------------
+ 연통 속에서
바닷가 나무 없는 벌판에
직각으로 꺾어진 시멘트 건물
겨우내 비워둔 방
석유난로 연통 속에서
새끼참새 우짖는 소리
짚가리도 처마도 없고
아무 데도 깃들 곳 없어
바람 막힌 연통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음산한 서북향 연구실에서
난롯불도 못 피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창가를 서성거린다
연통 속에서 함석을 긁는
새발짝 소리 안쓰러워
===============
+ 작은 사내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그들은 어서 빨리 늙지 않음을 한탄하며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파티에 나가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아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
+ 조개의 깊이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러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어날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 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 죄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
+ 좀팽이처럼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
+ 호박 그 자체
뒷산에서 자란 호박 덩굴이 옆집
담을 넘어 들어오더니 밤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끝에 연두색 호박을 매달아 놓았다
호박은 공중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켜졌다
밖에서 담을 넘어 들어왔으니
옆집에서 심은 것은 아니지......
그러니까 긴 골프 우산 손잡이를 담 너머로 뻗쳐서
호박을 끌어다가 따 먹을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누구에게 들키지 않는다 해도
시쳇말로 다툼의 여지는 있겠지 이를테면
옆집 영감이 투털거리는 소리를 피할 수 없을걸
요즘도 호박 도둑이 있는 모양이여......
늦장마 지나가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 요란한
오늘도 옆집 밤나무 가지에 매달린 호박을
바라본다 따 먹고 싶은 욕심일랑 몽땅 버리고
짙푸르게 익어가는 호박 그 자체만 바라볼 수는 없을까
가을이 가버리기 전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 4월의 가로수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 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
+ 난간 없는 계단
산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에
크고 작은 돌들이 저절로 쌓여 들쭉날쭉
층진 언덕길 생겨났겠지
이것을 흉내 내어 직립원인들
동굴로 가는 계단 만들었겠지
거기를 오르내리며 때때로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기도 했지만
네발 달린 짐승들은 거침없이
아래위로 뛰어다녔지
산비탈에 층층으로 논발 일구고
하늘로 올라가는 아득한 사닥다리 세우고
바다로 내려가는 가파른 절벽에
걸어서 오르내리는 벼랑길 만들고
이제는 움직이는 계단 위로
위험하게 뛰어다니는 우리들
올라갈 곳만 바라보다가
내려갈 곳 잃고
이리저리 뒤엉켜 몰려다니다가
-----------------------
+ 달팽이의 사랑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 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 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 대장간의 유혹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
+ 모래내 언덕길
무악제 넘어 북쪽으로
통일로 한 구간 내려가다가
홍제동 삼거리에서 좌회전
급경사 비탈길 올라가면
옛날에 화장터 넘어가던 길
땅이 질척대고 미끄러워서
후사경 힐끗 바라보면
언제 올라탔나 뒷좌석에
하얀 상복 입은 여자 앉아 있었지
깜짝 놀라 갑자기 브레이크 밟으며
당황하던 비탈길
학교와 도서관 아파트와 쇼핑몰 들어서며
이제는 소란스럽게 행인들 봄비는 곳
모래내 언덕길
--------------------
+ 서문밖 여울
크낙새 꼭대기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모아서
목을 축이려면
줄지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땅으로 잦아들 물은 없다
가파른 비탈길
쉬엄쉬엄 내려와 돌계단 아래
옹달샘 하나
표주박으로 떠먹기에도
너무 얕게 고여서
아래로 흘러갈 물 전혀 없다
한 달을 가물어
억새풀도 누렇게 바스러지고
흙먼지가 폴싹거리는 골짜기에
물 흘러간 자국도 없는데
뒷전 앞마당에 내려오면
이끼 낀 우물
서문 밖으로 나서면
어디서 왔나 가느다란 여울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라보지 않아도
혼자서 흘러간다
-----------------------
+ 세 바퀴 자전거
뒷바퀴 두 개 가운데
오른쪽이 부서졌다
세 번째 바퀴가 찌그러져
앞바퀴와 왼쪽 뒷바퀴만으로 굴러가지 못해
나머지 두 바퀴로 달려갈 수 없어
다수결도 아무 소용없어
마당 한구석에 버려진 채
비 맞으며 녹슬어가는 우리 집
세 바퀴 자전거
아이들이 탈 수 없는
세발자전거
버리기 아깝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집안의 노숙
-----------------------
+ 쓸모없는 친구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빚 갚을 돈을 빌려 주지도 못하고
승진 몇 전보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아들 딸 취직을 시켜 주지도 못하고
오래 사귀어 보았자 내가
별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눈치챘을 터이다
만나면 그저 반가울 뿐
서로가 별로 쓸모없는 친구로
어느새 마흔다섯 해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 어린 게의 죽음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 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 태어나지 못한
깊은 땅속뿌리로부터
수액을 타고 힘겹게 올라와
갑갑해 몸부림치다가 꽃망울 터뜨리고
장맛비 내리기 전에 서둘러 열매 맺었을까
골짜기 흘러내리는 시냇물처럼 먼 길 돌아서
바다에 이르러 태풍이 되었을까
안타까월라 별별 뉘우침도 쓸모없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귀여운 아이를
아깝게 버려진 슬픈 목숨
-----------------------------
+ 아니다 그렇지 않다
굳어 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장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을 ㅉ는다
굽힘 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랑스런 후배
온몸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어
우리의 잃어버린 이상을
새롭게 가꿔가는
그의 힘찬 모습을 보라
그렇다
적선동에서 쓰러진 그날부터
그는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우리의 앞장을 서서
달려가고 있다
------------------------------
+ 어느 선제후의 동상
한때 그는 이 나라를 다스리던 막강한 선제후였다.
지금도 시청 앞 광장 한가운데 아득히 높은 곳에서 그는 이 도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동상을 올려다보면, 누구나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높이 135 미터의 원주 위에 저 육중한 구리 덩어리를 올려놓은 당시의 기술도 놀랍거니와, 그 오랜 세월을 비바람 속에서 의연하게 수직으로 서 있도록 만든 옛사람들의 솜씨 또한 뛰어나지 않은가.
하지만 저것은 역사의 가혹한 유물임에 틀림없다.
새들이 콧잔등에 똥을 깔겨도 눈 한번 깜빡거리지 못하고, 발이 저리고 겨드랑이가 가려워도 손가락 한 개 움직이지 못하고, 저 아슬아슬한 기둥 꼭대기에서 몇 백 년을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엄청난 재력과 부역을 동원하여 스스로의 형벌까지 마련해 놓은 위대한 선제후여.
-----------------------------------
+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무명 바지저고리
흰 적삼에 검은 치마
맨발에 고무신 신고
나란히 앉아 있는
머슴애과 계집아이
사랑스럽지 않은가
착한 마음과 젊은 몸뚱이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이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곳마다
땅에는 온갖 꽃들 피어나고
지붕에는 박덩이 탐스럽게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히고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가득하네
팔을 꽉 끼고 함께 뭉치면
믿음직한 두 친구
뺨을 살며시 마주 대면
사이좋은 지아비와 지어미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너와 나의 어버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태어났지만
슬기로운 머리와 억센 손으로
힘들여 이룩한 것 많지 않은가
어느새 여기에 와 앉아 있네
우리의 귀여운 딸과 아들
===================
+ 생각보다 짧았던 여름
샅바를 넓적다리에 걸고
힘 겨루는 한마당 한복판에서
그는 한때 씨름꾼이었다
상대방을 모래판에 힘차게 팽개치고
호기롭게 외마디 고함지르던 그는
젊었을 때 이름난 승부사였다
환호 소리 진동하는 씨름판 등지고
혼자서 골목길로 사라지는 어제의
늙은 장사를 누가 알아보는가
지나간 봄은 아름다웠고
여름은 생각보다 짧았다 어느새
인적 없는 들판에 어둠이 내리는데
가을은 걸어서 간다 해도
다가오는 겨울은 어떻게 맞으리
--------------------------------
+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갖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 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장수나 생선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 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
+ 일요일에도 자라는 나무
후박나무 밑으로 굴러온 감 한 개
저절로 땅속에 묻혀 싹트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커지면서
담벼락보다 높게 자랐고 올해는
주황빛 열매 주렁주렁 매달렸다
온종일 살펴보아도 어느 틈에
줄기 굵어지고 잎 돋아나고
꽃 피고 열매 맺는지
자라나는 짧은 순간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추녀 끝보다 웃자란 후박나무가
아래서 올라오는 어린 감나무에게
슬며시 하늘 한 모퉁이 비켜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쟁반보다 넓은 후박나무 잎에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 서로
어울려 빗소리 화음 내면서
귓가에 울려올 때까지
나무들이 아름다운 목금 소리
미처 듣지 못했다
비록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듯해도
어느새 20년 동안
사계절 밤낮 가리지 않고
주말도 쥐지 않고 끊임없이
무성하게 자라나
일요일 아침마다 창밖에서 수런거리며
잠든 마음 흔들어 일깨워주는
우람한 갈잎나무
풍성하고 믿음직한 그 모습
언제나 변함없이 보고 싶구나
-------------------------------
+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CD에 담긴 오페라 아리아 대신
바로크 현악 되살리고 싶어
음악당 103호 입구에서
청중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관상용 고무나무 한 그루
눈높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지만
물기 없는 관엽식물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 대신
부드러운 귀를 가진 사람들
그 앞에 줄지어 서 있네
생김새와 옷차람 모두 다르지만
착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 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________________ * 45
때
고향
그손
달력
---------
한여름
고요한 순간
까만 목도리
교대역에서
----------------
나뭇잎 하나
나비 두 마리
나 홀로 집에
늙은 소나무
-----------------
담쟁이의 봄
멧돼지 생각
목불의 눈길
무정한 마음
------------------
빛바랜 사진
생각의 사이
서문밖 여울
소리 없는 힘
------------------
안개의 나라
어느 가을날
여름날 새벽
연통 속에서
-----------------
작은 사내들
조개의 깊이
좀팽이처럼
호박 그 자체
-----------------
4월의 가로수
난간 없는 계단
달팽이의 사랑
대장간의 유혹
--------------------
모래내 언덕길
세 바퀴 자전거
쓸모없는 친구
어린 게의 죽음
--------------------
태어나지 못한
아니다 그렇지 않다
어느 선제후의 동상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
생각보다 짧았던 여름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일요일에도 자라는 나무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