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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광규 시 3

+

아득한 옛 조상처럼
늙은 그를 만나려면
물론돈이나 뻑으로 안 된다
냉난방이 된 쾌적한 실내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고운 목소리올 노래하면서
그의  곁에 갈 수는 없다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라도
달려갈 수 없는 곳에
그는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를 만나려면
맨몸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갈밭이나 진흙 길을 땀 흘리며
두 발로 걸어가야만 한다
발이 부르트면 길가에 주저앉고
절룩거리며 고개를 넘어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여울물 옴켜 마시고
이정표도 없는 밤길을 한 발짝 또 한 발짝
무거운 걸음 옮겨놓고
넘어지면 더듬더듬 기어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의 곁에 도달한다면
온갖 지식과 재산 쓸데없고
모든 노래와 기도 필요 없고
마침내 그를  만나 기뻐하는 대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의 곁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끝없는 잠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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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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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뼈

내 몸을 버텨주는 뼈를 
엑스레이 필름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전혀 내 것 같지 않았다
부러진 갈비뼈는 결코
스테인리스 강철이나
플라스틱이 아니고
또한 하느님이 내려주신
영혼의 제목도 아니었다

멸치와 양미리 가루가
몇십 년을 쌓이며
굳어져 자란 뼈를
나는 본 적도 없으면서
너무나 믿어온 것 같다
가루가 모여
굳어진 것은 모두
언젠가 금이 가고 부러지고 부서져
결국 가루가 된다

내 몸을 버텨주는 뼈는
마침내 가루로 돌아가
눈발처럼 허공에 흩날리다가
어딘가 다시 쌓일 것이다
부러진 갈비빼도
언젠가 내 것이 아닌
먼지로 여기저기 떠돌면서
나의 아픔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빼는 부러져 나를 떠나고
봄비는 시장과 거리에도
오래 머무는  사람은 없다
모두 서둘러 지나가버리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가로수 사이로
누구의 것도 아닌 
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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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는 뛰는 심장
가슴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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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19시 30분 서울역 도착
기차 시각표에 적힌 그대로
세련된 상표 붙은 인형들 싣고
서둘러 특급열차 달려간 뒤
초여름 들판에 빈 철로가 남는다

꼬불꼬불 밭둑길 논둑길 따라
타박타박 걸어가는 어린 여학생
하얀 블라우스와 까만 치마
훈풍이 스쳐가고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녀의 앞날
논물에 얼비쳐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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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上行)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두판을 벌이는
낮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으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 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득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가마 울려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땓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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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

일 년에 한 번쯤  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하여
저렇게 커다란 정문을
한가운데 만들어놓고
열두 명의 수위가 밤낮으로 지킨다
<정문 사용 금지>
보통 사람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저 으리으리한 정문을 보아라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게 열려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난 닫혀 있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있는
드나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로막기 위해서 있는
저것은 우리에게 
문이 아니라
벽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저 벽을 
허물어뜨리자

아무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대리석 계단을
없애 버리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화강암 기둥을 
뽑아버리자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저 육중한 쇠문을
부숴버리자

그리하여 없애버리자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저 큰 문을
업애버리고 차라이
거기에다 벽을
만드자들자
그리고 그 벽에다
새로 문을 
만들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문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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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작년 여름에도 그랬었다
매연 자욱한 버스 정류장에서
테레사를 닮은 아주머니는 신문을 팔고
아이들은  고가도로 밑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자전거를 탄다
생선 냄새 비릿한 서울시장 입구
딸기 아저씨 리어카에는
얼룩말이 낳은 알처럼
둥그런 수박들이 가득하다
골목길 막다른 집 홍제옥
과부댁은 자식들과 모여 앉아
커다란 수박을 단숨에 먹어 치우고
다시 헛헛한 땀을 흘리며
개장국을 끓이기 시작한다
작년 이 무렵에도 그랬었다
새로운 여름은 오지 않고
밤에도 깊어지지 않고
변함없는 여름만 가버린다
네모난 수박이 나올 때까지
돌아갈 길도 없이 
여름은 언제나 이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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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당의 차임벨 소리 우렁차게 울리면
나는 일어나 창문을 열고
상쾌하게 심호흡한다
새벽의 대기 속에 풍겨오는
베기가스의 향긋한 납 냄새
건강은 어차피 하느님의 섭리인 것을
수은처럼 하얀 콩나물국에 밥 말아먹고
만원 버스에 실려 직장으로 가며 
나는 언제나 오늘만을 사랑한다
오늘은 주택은행에 월부금을 내는 날

아침 아홉 시 계기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나는
문득 쇠 속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결코 잘못을 모르는 쇠가
나를 때때로 죄인으로 만든다
안전제일로 살아온 사십 평생을
어떻게 뉘우쳐야 할까
참회한다 나는 기도해야 한다

핏발 선 눈에 두툼한 안경을 쓰고
오늘도 나는 쓰레기통을 뒤진다
담배꽁초와 구겨진 낙서
찌그러진 깡통 속에 들어 있을 
음모를 찾기 위해
온종일 쓰레기통을 샅샅이 뒤진다
마침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나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진다
음모가 없는 세상은 믿을 수 없는 것

연리 10%에 상환 기간 15년
원가 계산에 골몰하여 하루를 보내고
저녁때 나는 친구들을 만난다
오늘을 이기고 진 영리한 사내들이 모여
취하지 않기 위해 술 마시고
말하지 않기 위해 떠들어대고

통금 시간에 쫓겨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길 전붓대 옆에 먹은 것을 토하고
잠깐 소주처럼 맑은 눈물 흘리며
뿌옇게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나무 없는 마을에 텔레비전이 끝나면
우리들은 저마다 개들에게 집을 맡기고
씩씩하게 코를 골며 남의 잠을 잔다
안타까운  몸짓으로 낮의 꿈을 꾼다
ㅡ 성난 표정이라도 좋다
노예들아 너희들의 목소리를 들려다오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봐라
너희들의 주인이 누군인가를 ㅡ
꿈속에 들려오는 귀에 익은  소리를
우리들은 잠에서 깰 때마다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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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靈山)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
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
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야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은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
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 간
데없어지고 이미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
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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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쉿!

어둠 속을 달려가는
저 새카만 자동차를 보라
담배를 피우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저 평복의 사나이를 보라
황폐한 땅 위에 번지는 기름 자국을
거리마다 널린 쇳자각들을 보라

유령의 모습을보지 못하는
당신들은 장님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우리를 질식시켜버릴 듯
흩날리는 먼지와 시멘트 가루 속에

유령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당신들은 귀머거리다

어느 깊은 물속엔가 가라안자 썩고 있는
저 시체들의 소리를 들어보라
굴뚝마다 피어올라 하늘을 가득 채우는
저 부서지는 몸뚱이의 소리를 들어보라
꼭 다문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 신음 소리를
나무 한 그루 없는 모래벌판에 울려오는 저 구령 소리를
들어보라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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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무(有無) 1

염료상 붉은 벽돌집
봄비에 젖어
색상표에도 없는 낮선 색깔을 낸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이 색깔
지붕에 벽에 잠시 머문다
슬며시 그 집을 떠난다

보일 듯 잡힐 듯 그 색깔 따라
눈이 좋은 비둘기는
종악이 울리는
아지랑이 속으로 날아간다

날다 지쳐 마침내 되돌아온 비둘기
옆집 TV 안테나 위에 앉아
염료가 지저분한 벽돌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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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二代)

관리들에게도
관복을 입히던 시절
중문 밖 행랑채에는
강 서방 내외가 살았다
어멈은 물을 긷고
아범은 인력거를 끌었다
주인집 일을 거들지만
밥은 따로 해 먹었다

학생들의 교복도 
사라진 오늘
운전기사 강 씨네는
차고에 따린 두 칸짜리
연탄방에서 산다
마누라는 안집의 빨래을 해주지만
밥은 따로 해 먹는다
미스터 강은 메르세테스를 끌고

--------------
그때는

누가 모르겠는가
누구나 느끼고
누구나 겪은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모두가 알면서도 그ㄸ대는
모르는 체했었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아무도 쓰지 못한
그것을 이렇게
우리말로 이야기하고
우리글로 써서
남겼다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제 와서 쉽게 말하지 말고
생각해 보라 당신을 그때
무엇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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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누군가 종로의 버스 정류장을 없애버렸다

멀리서 호각을 불며 누군가
우리의 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우리의 사랑을 엿보고
우리의 깊은 잠을 빼앗아갔다
단란한 가정을 사청굴처럼 뒤지고
애써 가꾼 꽃밭을 짓밟아버렸다
누군가 우리의 맑은 하늘을 더럽히고
우리의 푸른 마을에 철조망을 치고
우리의 넓은 바다에 폐유를 쏟아 버렸다
우리의 진지한 모임을 방해하고
우리의 힘찬 발걸음을 가로막고
우리의 선량한  이웃을 잡아가고
누군가 우리의 등에 총을 겨누고 있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목을 조이고
핏줄에 바람을 넣고
누군가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큰골에 칼을 꽂고
씌어지지 않은 글을 읽고 있다
멀리서 목을 치며 누군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가 초대하지 않은 이  사람은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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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식(未來食)

신선로나 구절판 민어 전과 오이전 같은
전통 한식은 배울 생각도 없었다
쉬어 먹어서는 안 될 각종 식자재를
보기 좋게 뒤섞어 후다닥
데치고 지지고 볶아서
그럴듯한 복합물 만들어낸 다음
메뉴판에는 퓨전 요리로 소개했다
스타 세프들은 아플오 미슐랭가이드에 오를
미래의 요리라 치켜세우고
미식가들은 미래식이라고 격찬했다
뒤따라 시식해보려는 젊은 고객들 줄 섰고
먹어본 사람들은 복통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다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일까
차라리 오늘 먹을 음식이나 잘 만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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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말

미역 냄새 싱싱하게
밀려오는 바닷가
해를 싣고 돌아온
고깃배 닺을 내리고
모래톱에 퍼지는 아침 햇살
밤새도록 바다를 건너와
파도는 섬세하게 부서지며
부드러운 몸짓 끝내고
강아지를 앞세운
어린이와 아낙네들
물을 차며 달려간다
갈매기는 끼룩대며 맴돌고
펄떡이는 도미와
꿈틀대는 장어들
해삼과 소라는 아직도
물속의 꿈에 젖어 있다
생선 값이 얼마냐고 묻지 말고
물가에 널린 바닷말을 
우리의 몫으로 줍자
그리고 깊은 바다의 진주가
먼 도시로 팔려 가기 전에
되돌려 주자
어부들에게 살아 있다는 고기를
고기들에게 숨 쉬는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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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월

언제부터인가
4월은 해마다 오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곳곳에 피어나고
라일락 향기 깊어지면
찢어져 바랜 깃발 다시 펄럭이고
옛날에 다친 허리 뜨끔거린다
멍든 뼈  마디마디 쑤시고
말라붙은 검은 상처에서
피가 다시 흐른다
재발인가 아니면 부활인가
아카시아 꽃 흐드러지게 피고
뻐꾸기 울음소리 구슬픈 날은
못자리 짙푸른 논둑길로 
관을 든 여자들이 지나가고
숲 속이나 길가의 쓰레기터에서
수의도 못 입은 시체들이 일어선다
잠들지 않고
썩지 않고
잊혀지지 않고
세월만 자꾸 쌓여간다
언제부터인가
5월은 해마다 오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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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기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관리가 되려고 했다
관리가 되어 흑색 제복을 입고
권력을 갖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관리가 되어버리자
세금을 낼 시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당직이나 숙직 근무를 하듯
윤번제로 시민 노릇을  하기로 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상인이 되려고  했다
상인이 되어 황제 제복을 입고
돈을 벌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상인이 되어버리자
물건을 사갈 고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조합장이나 번영회장을 뽑듯
고객을 선출하기로 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군인이 되려고 했다
군인이 되어 녹색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마침내 모두들 군이 되어버리자
그들이 지켜줄 민간인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불침번이나 초병 근무를 서듯
병력을 차줄하여 민간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ㅡ 뒤늦게  깨달은 일이지만 이것은 안개의 나라를  표상하는 흑(黑) 황(黃) 록(綠) 삼색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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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보는 사람 없어도
장대를 들고 저마다
공중에서 줄을 탄다
수많은 줄들이 얽히고설켜
앞이 막히면 옆줄로 뛰고
쉴 때도 이리저리 옮겨 앉는다
줄과 줄 사이로
떨어지면 
깊이 모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너무나 많은 줄들이 얽히고설켜
때로는 땅바닥처럼 든든한 것 같지만
한눈을 팔다가
헛디디면
거기서 긑장이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우뚱거리는 몸을 가누며
저마다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탄다

==========
+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허전하다
땅을 덮은 것 하나도 없이
하늘을 가린 것 하나도 없이
쏟아지는 햇빛
불어오는 바람

하늘을 가로질러
낙엽이라도 한 잎 떨어질까 봐
마음 조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견딜 수 있을까
명령을 받고
싹 쓸어버리기라도 한 듯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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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짧은 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 했지
하지만 이것은 너무 단호한 시학 아닌가
드넓은 산하 무수한 잡초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기 마련
의미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나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
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
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
비록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메마른 사막에 감춰진 수맥이라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살려내는
그 짧은 글이 바로 시 아닌가
어려운 시학 잘 모른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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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신 소묘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너그럽고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잔인한 그는
괴로움을 참으며 짐짓
눈물을 감추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
달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가슴 조이는 관중들 앞에서
골키퍼처럼 날쌔게 볼을 잡아내
그는 온종일 일하고
저녁때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통순경이 무서워 차선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쓸 만한 말들을 혼자서 골라 갖고
하얀 침묵의 항아리를 빚어낸 그는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바다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어제의 나뿐이라 생각하며
새벽길을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다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따라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거룩한 짐을 힘겹게 짊어지고
언제나 앞서가는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마다로 그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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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티타

아마도 오십은 넘었을 나이
점퍼를 걸친 사내와 일 바지 입은 아낙네
저수지 물가의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저녁노을 바라본다
이미 오래 함께 살아온
그들의 뒷모습
아무 말 없이
정물처럼 그 자리에 머물다가
차츰 흐려지면서 마침내
어둠의 되어버린 때까지
아쉬운 잔영을 길게 남기면서

===========
+ 5월의 저녁

신록의 바람 타고
우울한 소식
어느 집에선가 들려오는
서투른 피아노 소리

바크하우스는 벌써 죽었고
루빈슈타인도 이미 늙었는데
어른들의 절망 아랑곳없이
바이에르 상권을 시작하는 아이들

신문지에 싸서 버릴 수 없는
희망 때문에
평온한 거리마다 
부끄럽게 나리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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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마당

무엇인가 깨닫기라도 한 듯
까마귀 몇 마리
늙은 소나무 높은 가지에서
우리 마당 내려다 보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오후 내내
그러다가 어느 틈에 날아가버린 것을
까마귀 짖는 소리 끊어진 다음에야
문득 알아차렸다
늦가을 마당에 정든 식구 남겨두고
줄무늬고양이 우리 곁을 떠나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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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고 싶은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
그러나 이상하게도 낮익은 얼굴들이다
내가 모르는 낮익은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어디였던가
병아리 때 모이를 쪼던 유치원 마당이었던가
솜사탕을 사먹던 시골 장터였던가
아카시아 꽃 한창 핀 교정의 벤치였던가
불볕 아래 앉아 버티던 봉제 공장 옥상이었던가
눈물 흘리며 짐승처럼 쫓기던 봄날의 광장이었던가
술 내기 바둑을 두던 숙직실 골방이었던가
간첩을 뒤쫓으며 헐떡이던 산마루였던가
친구를 기다리던 새벽의 구치소 앞이었던가
두부 장수 지나가던 골목길 여관방이었던가
줄담배를 피우던 산부인과 복도였던가
마늘을 싣고 도부 치던 아파트촌이었던가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던 세무서였던가
민방위 교육을 받던 변두리 극장이었던가
흰 봉투를 건네주던 다방의 구석 자리였던가
비행기를 갈아타던 어느 공항 대합실이었던가
고인을 추모하며 밤새우던 초상집이었던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두가 거짓된 기억 헛된 착각이다
우리는 부딪쳤을 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낯선 사람들이 너무 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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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아홉 시

아침 아홉 시
청바지에 점퍼 걸친 젊은
아빠가 양쪽에 하나씩
쌍동이 딸 손목을 이끌고
서둘러 골목길 빠져나온다
두 꼬마가 제각기
조그만 백팩 짊어지고
어린이집 차에 태우어 보내던 엄마는
오늘 왜 안 보이나
세 식구가 재잘거리며
여대생 기숙사 쪽으로 사라지고
땀이 많은 이 동네
아침 출근길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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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과 거울

울퉁불퉁한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이 턱 아래로 내려가고
코가 눈 위로 올라가고
귀가 머리 위로 뿔처럼 솟아오르고
드라큘라처럼 송곳 나기 뻐드러져 나온다
우리의 얼굴이 정말로 그렇게 생겼는가
아니면 이것은 겨울이 잘못된 때문인가

눈이 턱 아래 붙어 있고
코가 눈 위에 달려 있고
귀가 머리 위에 뿔ㅊ럼 솟아 있고
송곳니가 뻐드러져 나온 드라큘라가
울퉁불퉁한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주 반듯한 사람의 모습이 된다
드라큘라의 얼굴이 정말로 그렇게 생겼는가
아니면 이것은 거울이 잘못된 때문인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소원이지만
사람에겐 사람의 모습을
드라큘라에겐 드라큘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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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킴이 나무

이제는 3층 지붕만큼 키가 큰 나무
창밖의 후박나무는 우리 집 전령
5월의 첫여름 향기
탐스러운 꽃송이에 가득 담아 풍겨주고
널따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들려주고
황해바다 건너 불어오는 북서풍
남해릉 거쳐 북상하는 필리핀 태풍
서걱서걱 나뭇가지 흔들어 알려주네
마당을 뒤덮는 넓은 그늘 아래
까치와 비둘기와 직박구리 날아들고
고양이 식구들 마음 놓고 뛰놀게 해 주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말없이 우리를 지켜주는 후박나무
굵다란 줄기와 밑둥 믿음직하네
한집에서 어느덧 반세기를 함께 살았는데
요즘은 마구잡이 주택단지 개발 사업으로
30층 아파트 줄지어 들어서고 있네
언제 갑자기 전기톱으로 잘려 나갈지 몰라
오늘은 바라보기도 마음이 아픈 지킴이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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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마르크스

여보게 젊은 친구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생각하듯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네
문학도 그런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생각하듯 그렇게
논리적을 변모하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는 젊어
아직은 몰라도 되네
그런 것이 아니라고 깨달을 때쯤
자네는 고쳐 살 수 
없는 나이에 이를지도 모르지
여보게 젊은 친구
머릿속의 사랑이 될 수 없다네
우리의 주장이 서로 달라도
제각기 자기 몫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살고
죽어버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우리는 죽어 과거가 되어도
역사는 언제나 현재로 남고
얽히고설킨 그때의 삶을 
문학은 정직하게 기록할 것이네
자기의 몸이 늙어가기 전에
여보게 젊은 친구 
마음이 먼저 굳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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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그런 사람

맞아 
방금 떠올랐던 생각
귓전을 스쳐 간  소리
혀끝에 감돌던 한 마디
그것이 과연 무엇이던가
그래
그것이 맞아
틀림없이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달리 바꾸어 말할 수도 없고
글로 옮겨 쓸 수도 없고
바로
그것을
어떻게 되살려낼까
궁리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

===============
+ 북한산 언덕길

북한산 언덕길 올라가노라면
나무와 수풀 우거지고
산새들 우짖는 계곡에
우람한 저택들 늘어서 있어
달력의 그림 속을 걷는 것 같다
커다란 개가 지키는
이 집들은 대개 문패가 없고
언제나 텅 비어 있다
주인들은 아마 온종일
장터에 나가 돈을 벌고
싸움터에서 피 흘리고
자기의 돈과 힘을 지키느라고
집에 올 시간조차 없는 모양이다
아깝다  비어 있는 큰 집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정작 이런 집이 없구나
집이라면 적어도
지붕은 눈비를 피하고
벽은 바람을 막아야  하는데
집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비바람 제대로 막을 곳조차 없다
그래도 지붕에서 비가 샐 때는
양둥 이를 방바닥에 늘어놓고
한여름 지내고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는
옷을 껴입고
연탄가스와 싸우며
한겨울 난다
마당도 대문도 없을망정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판잣집들
붐비는 골목길은 살아 있다
널찍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북한산 언덕길 올라가노라면
아무도 아름다운 경치 내다보지 않고
아무도 맑은 바람 숨 쉬지 않고
아무도 새소리 물소리 듣지 않고
음산한 저택들만 늘어서 있어 
죽음의 마을을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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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냄새골

오뚝하게 고치고 싶은 코에
콧구멍 두 개 뚫려 있어
새끼손가락으로 후비기도 하고
멋쩍게 콧등을 비벼대기도 했지
코로나 독감 창궐할 때는
온 국민에게 마스크 씌우고
코와 눈과 입 만지지 말라고 했어
그래도 애꿎은 코에 괜히
손이 가게 되었지
코와 귀가 없다면 마스크와 안경
어디에 걸치고 다녔을까
온갖 냄새 소리 없이 맡아주는 코
너무나 당연하게 잊고 살다가
어느 여름날인가 문득
아카시아 꽃내음 사라지고 
된장국 끓는 냄새도 못 맡게 되었지
어디로 갔나 사라진 냄새골
이제는 되찾을 수 없나

------------------------
+ 손가락 한 개의

우연히 마주친 눈길이
나침처럼 한동안 떨렸다
열린 채 닫혀 있는 곳
팽팽하게 가득 채우며
끝없이 깊게 그러나
손가락 한 개 길이로
겹쳤을 때
온 세상이 몸을 뚫고
뜨겁게 지나갔다
지나간 세상의 어느 곳엔가
가버린 시간의 언제쯤엔가
어슴푸레 눈길 멈추고
목매달려
한동안 지났을 때
손가락 한 개의 사이를 두고
땅에 닿을 듯 말 듯 두 발이
차갑게 늘어졌다

----------------------
+ 옛 향로 앞에서

그때라고 지금과 달라겠느냐
누구나 태깔 곱게 잘 빠진
예쁜 향로를 좋아하고
소중히 간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8백 년이 흘러간 뒤
그때의 구름과 연꽃을 보여주는 것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청자상감 유개 향로가 아니다
굽다가 터지고 일그러져
향불 한 번 못 피우고
어느 도공의 집 헛간에서 
발길에 차이며 뒹굴었던
바로 이 못생긴 4각 향로 하나가
그 오랜 세월을 견디며
오늘까지 이 땅에 살아남아
찌그러진 모습 속에
고려의 하늘을  담고 있구나

==============
+ 크낙산의 마음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널려 있는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살쾡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 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 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 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어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
+ 나의 자식들에게

위험한 곳에는 아예 가지 말고
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대로 집에만 있으면
양지바른 툇마루의 고양이처럼
나는 언제나 귀여운 자식이었다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사람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인생이 힘들 무엇이랴 싶었지만
그렇게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수양이 부족한 탓일까
태풍이 부는 날은
집 안에 들어앉아
때 묻은 책을 골라내고 
옛날 일기장을 불태우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
자꾸 찢어 버린다
이래도 무엇인가 남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짓을 못하게 되어도
누군가 나를 기억할까
어쩌면 그러기 전에 낯선 전화가
울려올지도 모른다
지진이 일어나는 날은
집에만 있는 것도 위험하고
아무 짓을 안 해도 의심받는다
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
나는 자식들에 이렇게 말하겠다
평온하게 살자 마라
무슨 짓인가 해라
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
무엇인가 남겨라

----------------------------
+ 매미가 없던 여름

감나무에서 노래하던 매미 한 마리
날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하 거미줄이 쳐 있었구나
추녀 끝에 숨어 있던 거미가
몸부림치는 매미를 단숨에 묶어버렸다
양심이나 이념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회나 변명도 쓸데없었다
일곱 해 동안 다듬어온
매미의 아름다운 목청은
겨우 이레 만에 
거미 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걸리면 그만이다
매미들은 노래를 멈추고
날지도 않았다
유달리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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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를 탄 사람들

책을 든 젊은이들에게서
최루탄 냄새가 난다
대학가를 지나갈 때면
버스를 탄 사람들은
눈을 비비고 
재체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들도 옛날에 학교에 다녔다
병역을 필하고
세금을 납부하고
자식들을 기르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은 평범한 시민들이다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을
그들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각형처럼 모난 꼴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없는
그들은 때 묻은 어른들일뿐이다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아대는 틈바구니로
입을 손수건으로 막은 채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
그들은 실없는 구경꾼이나
무관심한 행인이 아니라
이름은 모르지만 낮익은
그들은 결국 누구인가

================
+ 어느 돌의 태어남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도
돌이 있을까
아득한 옛날부터
홀로 있는 돌을 찾아
산으로 갔다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
늙은 소나무 밑에
돌이 있었다
이끼가 두둑이 덮인
이 돌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가

2천 년인가  2만 년인가  2억 년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다면 이 돌은
지금부터
여기에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이 돌은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
+ 이사장에게 묻는 말

가슴 가득히 훈장을 단 당신은
담배를 피우며 회고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는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당신이
파이프를 한 대 더 태웠더라면
오늘이 조금 달라졌을까

아침마다 승마를 하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면서
요즘도 당신은 퇴역 4성 장군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적 아니면 동지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복덕방 김 영감은
적인가  동지인가
오너드라이버가 된 이 과장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미스 박은
도서관에 가득한 저 학생들은
과연 동지인가 적인가
공관장의 정 서방은
생산부의 최 기사는
거동이 수상한 저 청년들은
적인가 동지인가
거리에 정거장에 백화점에 넘치는
저 많은 사람들은
그리고 지금은 이사장이 된  당신 자신은
도대체 동지인가 적인가

-----------------------------
+ 태양력에 관한 견해


1년이 365일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 짧다
시작한 일을 계속하기엔
계속하던 일을 끝내기엔
아무래도 너무 짧다
내게 힘이 있다면
세월을 다스릴 힘이 있다면
오늘부터 당장 달력을 고쳐
3년에 한 번씩
새해가 오도록 하겠다

(새해를 맞이하여
한 사람은 위와 같이  생각했고
다은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생각했다)

1년이 365일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 길다
시작한 일을 계속하기엔
계속하던 일을 끝내기엔
아무래도 너무 길다
우리에게 뜻이 있다면
지구를 돌릴 뜻이 있다면
오늘부터 당장 힘을 합하여
1년에 세 번씩
새해가 오도록 할 수 있다
1년에 세 번씩
새봄이 오도록 할 수 있다

--------------------------------
+ 나무처럼 젊은이들도

동짓달에도 날씨가 며칠 푸근하면
철없는 개나리는 노란 얼굴 내민다
봄이 오면 꽃샘추위 아랑곳없이
진달래는 곳곳에 소담스럽게 피어난다
피어나는 꽃의 마음을
가냘프다고
억누를 수 있느냐
어두운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뿌리의 힘을
보이지 않는다고
업신여길 수 있느냐
땅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꿈을
나무처럼 젊은이들도
힘차게 위로 솟아오르고
조용히 아래로 깊어지며
밝고 넓게 퍼져 나가기를
그러나 행여 잊지 말기를
아무리 높다란 나뭇가지 끝에서
저 들판 너머를 볼 수 있어도
뿌리는 언제나 땅속에 있고
지하수가 수액이 되어
남모르게 줄기 속으로 흐르지 않으면
바람결에 멀리 향냄새 풍기는
아카시아도 라일락도
절대로 피어날수 없음을

===================
+ 쓰레기 치우는 사람들

당신들은 우리를 전혀 모른다
쓰레기 치우고 받은 돈으로
눈 오는 날은 소주 한잔 걸치고
적금 들어 3년 뒤 
리어카 한 대 사서
엿장수나 고물 장수 차리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래된 잡지나 헌 신문지
버리는 빈 병이나 쇠토막까지도
몇 푼의 강냉이로 바꿔 가고
저승의 골목길 지키고 서서
송장의 금이빨 노리는
그들과 우리는 전혀 다르다
세상의 모든 욕망 끝나버린 곳
돈이 죽어버린 쓰레기터에서
우리는 연탄제를 흙으로 돌려보낸다
주인 없는 신발짝과 피 묻은 넝마
썩은 생선 가시와 찢어진 비닐 조각들
모두가 정답게 힘께 어울려
바람에 흩날리고 비에 젖으며
고향으로 떠나가는 쓰레기터
이승의 마지막 벼랑에서
역겨운 땅 위의 냄새 모닥불로 태우는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
엿장수나 고물 장수 가위 소리에
한가한 봄날의 권태를 듣고
되도록 쓰레기터를 멀리 피하여
은행으로 가는
교회로 가는

당신들은 우리를 전혀 모른다



___________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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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상행
새 문
수박
---------
오늘
영산
유령
유무1
-----------
이대
그때는
누군가
미래식(未來食)
--------------
바닷말
사오월
삼색기
줄타기
--------------
가을 하늘
그 짧은 글
물신 소묘
파르티타
----------------
5월의 저녁
늦가을 마당
만나고 싶은
아침 아홉 시
-----------------
얼굴과 거울
지킴이 나무
늙은 마르크스
바로 그런 사람
---------------------
북한산 언덕길
사라진 냄새골
손가락 한 개의
옛 향로 앞에서
----------------------
크낙산의 마음
나의 자식들에게
매미가 없던 여름
버스를 탄 사람들
------------------------
어느 돌의 태어남
이사장에게 묻는 말
태양력에 관한 견해
나무처럼 젊은이들도
-----------------------------
쓰레기 치우는 사람들

____________

김광규 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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