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
어렸을 적에 뚝섬 근처에서
헤엄치고 보트 타고 얼음 지치던 한강
다리를 건너 요즘은 출퇴근한다
낙동강은 고속버스나 KTX 편으로 건너 다녔지
강물에 손 한 번 담가본 적 없다
그래도 한강보다 낙동강이 길다는 것
알고 있지
젊은 날에는 설악산 대청봉에도
몇 차례 올라갔었고 울산바위
꼭대기에서 속초 앞바다도 바라보았다
지리산은 승용차에 실려 지나갔을 뿐
천왕봉에도 아직 못 올라갔다
그래도 설악산보다 지리산이 높다는 것
알고 있지
강도
산도
인터넷에 뜨니까
---------
+ 달밤
한가위 달빛아래
유리창에 비치는 후박나무
그림자 보았나
가을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나무
가지와 잎사귀 들 수런거리는
소리
들어보았나
꼼짝 않고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어
혼자서
창문 앞에
앉아 있었나
아니면 나뭇잎들 사이로 들여다보는
달과
둘이서 한밤
새우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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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미
서울에서 프랑크프르트로 날아가는
국제선 이코노미 클래스 칸에서
국적 없이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
비행기를 타고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파리 한 마리가
기내식 냄새를 맡고
비즈니스 클래스 칸으로 날아간다
널찍한 아등칸과 비좁은 삼등칸을 거리낌 없이
오고 가는 파리 한 마리
좌석벨트를 조여 매고 앉아서 나는
광활한 구름 벌판을 내려다본다
고도 10,000미티 상공을 함께
날아가고 있는 파리와 나의
돌연한 공존이 떠오른다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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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길
혼자서 산길을 올라갑니다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맹이와 잡초 들
산비탈에는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들
청설모와 다람쥐가 나는 듯이 오르내리고
맷비둘기와 산까치 들 짝을 부르고
골짜기 물소리와 그윽한 숲 냄새
멀리 산봉우리 위로 떠도는 구름
어느 산이나 오솔길은 비슷하지요
등산객이 많은 곳 아니라 해도
싫증 나지 않는 한적한 산길 곳곳에
흙과 돌과 풀과 나무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들 동행으로 벗 삼고
아내와 남편으로 아련히 감돌다가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그 소리 알아듣지요
==========
+ 생사(生死)
방독면 쓴 방역요원들이 계사에
사정없이 분무기로 소독약을 뿜어대고
닭과 오리 수천 마리를 비닐백에 잡아넣어
한꺼번에 살(殺) 처분한다
조류독감 때문이다
출입통제산
바깥의 냇가에는
어디서 날아왔나
청동오리들 한가롭게 무자맥질하면 놀고
백로 몇 마리 한 발로 서서
명상에 잠겨 있고
---------
+ 소리
경광등 번쩍이며 달려가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
골목길에 쌓인 한낮의 고요를
산산조각 깨뜨린다
세상을 비집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 울음소리와 달리
어떤 목숨인가 닳아버린
땅의 톱니바퀴에서 향방 없이
튕겨져 나가는 아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까마득하게 떨어져 나가는 두려움이
날카로운 비명으로 울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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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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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북행
인왕산 너머로 해가 지는 초저녁
꼬불꼬불 골목길 지나
통인동에서 적선동으로 이어지는 길
아직도 기와집 몇 채 비스듬히 서 있는 한 길가에
커다란 간편을 단 한정식 집 생겼고
옛날에는 연인들이 구석자리에서 만나던 빵집
지금은 유리벽으로 환하게 안이 들여다보이는
카페로 바뀌었다
케이크와 콜라를 탁상에 놓고
장난치며 떠들어대는 소년 소녀 들
고등학교 시절 내 친구들과 너무나 닮아
나도 돋보기안경을 벗고 슬쩍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누구의 아들딸인가 묻고 싶었다
========
+ 밤바다
집어등 눈부시게 바다를 밝히는 한밤중
어선들 주변으로 떼 지어 몰려드는
오징어와 갈치 들 앞 다투어
줄줄이 갑판으로 잡혀 올라온다
깊은 물속 어둠을 헤치고 다니던
물고기의 날카로운 눈도 아무 쓸모없이
빛의 꾐에 흘려서
죽음의 불빛들 찬란하게 반짝이는
수평선의 아름다운 야경
--------------
+ 새 이웃
A동 12층 3호가 팔린 모양이다
베란다 창문을 떠어내더니 요란한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었다
천장과 벽과 바닥을 모조리 뜯어내고
거실과 침실과 부엌과 화장실을 개조하는
건축쓰레기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저 많은 붙박이장과 부엌설비와 조명가구
들이
40평짜리 아파트에 들어 있었단 말인가
놀라울 따름이다
두 달 걸려 공사가 끝났다
엄청나게 많은 새 가구와 새 집기가
새로 고친 아파트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넓은 바깥세상 바꾸는 대신
새로 이사 온 이웃 사람은
좁은 집 안을 몽땅 뜯어고치고
안으로 들어가 (인터넷 홈쇼피를 이용하는지)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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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천년
이라크 전쟁 뉴스가 주요 TV에서 온종일
스포츠 방송처럼 실시간 중계된다
홈쇼핑 채널에서는 24시간
상품 광고가 계속된다
미사일 발사, 대규모 공습, 야간 폭격, 탱크 진격,
민간인 사상ㅇ, 종군기자 죽음, 백악관브리핑....
여성 내의, 귀금속, 옥돌침대, 운동기구, 식료
품....
민주화 교수 구속 수감, 북핵 관련 6자 회담, 자살
폭탄공격....
러닝머신, 남도고추장, 캐나다 이민상품...
후세인 대통령 체포, 이라크 파병 반대. 미군기지
이전 반대
무기 구입 반대.....
홈쇼핑 시청 거부....
21세기는 벌써 시작되었고
20세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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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오래 써온 수첩이었다
가족들이 음력 생일과
진셋집 옮겨다닌 날짜
친지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은행계좌와 신용카드 번호 따위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십 년 넘게 지니고 다녀
모서리가 하옇게 해진
이 가족수첩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평생 간직해온 수첩이나 주소록을
잃어버리는 날이 온다
신경질을 부려도 허망한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
한 생애의 후반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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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체통
신촌 로타리 혼잡한 오거리
자동차와 보행자 뒤엉킨 난장판
5개 대학 재학생들과 맵시 있는 선남선녀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북새통에 끼어
건널목을 지나고
이곳 이곳 두리번거리며
편지 한 통 부치려고 우체통 찾아
헤매는 저 노인을 보세요
머리가 허옇게 세고 검버섯이 돋았지요
큰길 모퉁이와 골목길 입구마다 서 있던
빨간 우체통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데
보도와 차도 가리지 않고 쫓기듯
밀려가는 행인들 저마다
핸드폰 걸며 너무 바쁘게 지나가네요
오래 생각하며 천천히 쓴 편지
봉투 한구석에 정성껏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갖다 넣고
모래 들어갈까 글피에 들어갈까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어요
이어폰 귀어 꽃고
쉴 새 없이 문자질 하면서
갈 길 재촉하는 청소년들 붙잡고
우체통이 어디 있는지
묻기조차 힘든
저 후줄근한 어르신을 보세요
낡은 밤색 점퍼에 헐렁한 코르덴 바지를 입었지요
머지않아 우체통처럼 사라져버릴
저 20세기 인간을 보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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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봄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
다리 가느다란 여중생이
유진상가 의복 수선 코너에서
엉덩이에 짝 달라붙게
청바지를 고쳐 입었다
교복치마를 짧게 줄여달란다
그렇다
몸이다
마음은 혼자 싹트지 못한다
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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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나무
일주문 앞 개울가에
앉은뱅이 팽나무 한 그루
세발낙지 물구나무선 모습으로
사백오십 년을 버텨온 고목
다섯 개의 목발을 짚고
서 있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위로 자라는 대신 옆으로 퍼지면서
시커먼 바위가 된 딱딱한 몸뚱이
세 아름이나 불려왔구나
못생긴 덕택에
위엄 있게 살아남아 오늘까지
달 마을 지키는 팽나무
정승 댁 송덕비보다 신령스러워
--------------
+ 효자손
우체국 앞 가로수 길에
아낙네가 죽제품 좌판을
벌어놓았다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와 키와 죽침 따위에 섞여
효자손도 눈에 띄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황급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그 조그만 대나무 등긁이를 하나
사 왔을지도 모른다
노인성 소양증만 남고
물기 말라버려 가려운 등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장난 삼아
간질간질 긁어주던
고사리 같은 손
이 작은 효자손이 어느새 자라서 군대에 갔다
옆에는 나직한 숨결마저 빈자리
어둔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며
빨리 떠나라고
핸드폰 거는 소리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는 손
벽오동 잎보다 훨씬
커다란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
==========
+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
+ 겨울 아침
얼어붙은 새벽 네 시 아직 캄캄한데
하늘로 열린 천장 창문 밝히면서
빵 굽는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밀가루 반죽을 나르는 분주한 모습
전조등 부릅뜨고 눈길을 달려가는 화물차들
임대아파트 창문에 하나 둘 불이 켜지면서
조금씩 어둠이 녹아내립니다
가로등 불빛도 차가운 전철역 입구에서
계단을 쓸고 있는 청소부
두툼한 목도리로 얼굴 감싸고
출근길 서두르는 근로자들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
어둠을 밀어내는 덕택에 힘겹게
겨울 아침이 밝아옵니다
------------------
+ 난초의 꽃
삼 주일이나 방을 버어둔 사이 탁상의
난초 꽃이 피었다
졌다
바싹 마른 꽃대만 남고
꽃들은 바닥에 떨어져 까맣게 말라버렸다
아무도 없는 사이에 내 방에
왔다
간 것이다
아까워라
함초롬한 그 모습
내 눈으로 보았어야 하는데
공들여 피워낸 난초의 꽃
그윽한 향기
홀로 감돌다 사라졌구나
집안을 돌보지 않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가장처럼 민망해서
죽은 꽃들은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도 목마름 견디며 난초 잎들
파랗게 살아 있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난초를 바라볼 수 없었다
-----------------
+ 남김없이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보던
그 위대한 지휘자는 평생을
호텔에서 살았다고 한다
취미는 제트기 조종
결혼도 하지 않고
애인만 자주 바꾸었다고 한다
후회 없이 자기의 생애를 살고
재산이나 자손 대신
장엄한 미사곡과 방대한 교향곡들을
레코드와 카세트와 CD에 담아서
남김없이 후세여
전했다고 한다
==========
+ 몸의 소리
몸을 전혀 못 느끼고
내 몸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오래
살아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어름니가 옥씬거리고
눈앞이 흐려지고
속골치가 아파지면서
참을 수 없이 기침이 터져 나오고
바른쪽 늑골이 뜨끔거리고
왼쪽 허리가 걸리고
팔다리가 쑤셔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괴질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다양한 삶의 증세지요
정신이 멀어져 가는 자리에
몸뚱이 혼자 주저앉아 조금씩
안으로부터 무너지는 소리
송도음(松濤音)처럼
나의 귀에 들려옵니다
--------------------
+ 물의 모습 3
물이 흐릅니다 불편하게
흘러서 움직입니다
걷거나 뛰거나 달려오지 못하지요
멈춰 서거나 주저앉거나 쓰러지지 못하지요
때로는 용암처럼 뿜어 나오고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펄펄 내리는 눈이 되고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되고
폭포가 되어 까마득하게 떨어져 내리고
낮은 곳마다 고여서 연못 만들고
아름다운 땅 위의 풍경
잔잔히 비추다가 아래로
넘쳐흐르고
바위처럼 단단하게 얼었다가
봄볕에 녹으면서
다시 흐릅니다
물은 세월처럼 흐릅니다
한겨울 나뭇가지 끝에 올라가 앉아
온 세상 하얗게 물들이기도 하지만
수풀과 산과 도시를 태우는 시뻘건 불길
물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지요
어떤 질주가 물보다 빠릅니까
성난 파도 산더미처럼 몰려와
단숨에 바닷가 휴양지 휩쓸어버리고
소리 없이 물러가기도 합니다
한가롭게 출렁거리다가 느닷없이
돼 달려들기도 하지요
바퀴도 없이 날개도 없이 오늘도
물이 흐릅니다 여전히 불편하게
흘러서 움직입니다
-------------------
+ 법인의 집
그 건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드넓은 영국식 공원 옆에 있는
우아한 유켄트슈틸 별장
한때 부유한 은행가가 살던 그곳에
지금은 동물보호협회가 자리 잡고 있지요
너도밤나무와 보리수가 하늘 높이 자라고
비둘기와 날다람쥐 분주하게 숲 속을 드나들고
풀밭에서 암젤의 노랫소리 영롱하게 울려오는 곳
백여 년을 한곳에서 서 있다 보니 마침내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가 된 지붕
추녀 끝과 창문턱마다 장식처럼 촘촘히
날카로운 쇠못이 박혀 있지요
도독을 막기보다는
비둘기들이 날아와 앉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곳에서 함루로 똥을 깔기지 못하도록)
뾰족한 쇠못을 거꾸로 박아놓은 것입니다
숲에서 날아오른 새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창문턱에 사뿐히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깃을 다듬는 모습
귀여운 줄 모르는 가엾은
법인이 사는 집이지요
------------------
+ 짧은 예언
TV와 멀어지는 나이가 되어 이제는
매일 보던 9시 뉴스도 지루합니다
이라크 전황 보도를 빼놓고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정치인들은 여야 극한 대립
남북관계는 제자리걸음
부정부패는 나날이 액수가 커지고
미국은 구형 전투기 구입 압력
일본은 심심하면 독도 영유권 주장
중국산 어류에서 납덩어리 검출
BMW를 몰다가 음주운전으로 걸린 연예인
세상이 달라진 것 없으니
일기예보밖에 볼 것이 없지요
그러나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이 짧은 예언에 인색합니다
비가 올까 눈이 내릴까
몇 마디 듣기 위해 오늘도
긴 뉴스와 재미없는 광고를 시청하다가
TV를 켜놓은 체 잠들고 맙니다
==========
+ 책의 용도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딜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
+ 남긴 이야기
빚이나 세금 및 범칙금은 말할 나위도 없고
지식이나 관습이나 예의도 모조리 잊어버리고
마른 북어의 지느러미처럼
바스러져야지
수많은 외국어 단어나 까다로운 법조문
그럴듯한 잠언이나 경구
치솟은 국제 유가와 인상된 택시요금 따위를
기억해야 무엇 하랴
등기권리증이나 유서는 물론
냄새조차 남기지 말고
살았던 흔적 모두 지우고
소리 없이 죽어 있는 노린재처럼
아무도 모르는 주검으로
버려져야지
남김없이 까맣게
잊혀져버린 다음에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남을 테지만
--------------------
+ 든든한 여행
여행 도중에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두 눈이 멀거나
두 귀가 전혀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입으로 먹거나 말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잃었을 때
두 팔의 손목 이상 또는
두 다리의 발목 이상을 잃었을 때
등뼈를 움직일 수 없거나
가슴이나 뱃속의 장기를 심하게 다쳐서
누군가 평생 곁에서 돌보아주어야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정신이나 신경 계통에 극심한 장애가 남아
혼자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만
백 퍼센트의 후유장해보험금을 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험금은 못 받게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대신 거대한 보험회사 건물과
무수한 보험회사 직원들이
우리의 여행을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
+ 문자 메시지
신규보험 가입도 받지 않는 나이
예순다섯 살
정년퇴직할 나이까지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 그 친구
그는 결코 맨손으로 오지 않는다
맥아더 회고록으로부터
안방극장 연속극 비디오까지
수상한 각종 강장제를 비롯하여
중국산 인삼절편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품목을 들고
나를 찾아온다
할부금이 끝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다음 물건을 월부로 안긴다
서른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친구에게
계속해서 읽을 수 없는 책을 팔아
마침내 책이라면 진절머리나에 만든 그 친구
친구라는 끈질긴 직업을 그는
평생 바꾸지 않았다
많이 걸어 다니는 덕택에
건강은 걱정 없다고 억지로 웃던
그 친구의 부음을 문자 메시지가 전한다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슬픔을
나는 간단히 삭제해버린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
+ 비 오는 주말
워낙은 네 식구였다
비 오는 주말에는
서울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내려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몸이 아파 거둥이 힘들고
딸과 어머니만 비옷 입은 채
밭일을 한다
땅바닥이 질척거리고
옷이 축축하게 젖어도
흙을 고르는 호미질에 섞여
도란도란 모녀의 말소리 평화롭다
걱정거리 많아도
손님이 없어서 홀가분한 듯
---------------------
+ 배추꼬랑이
녹그릇 제기마저 공출당하고 걸핏하면
B-29 떴다고 공습경보 요란하던 시절
시래기죽으로 저녁을 때운 날은
아홉 시면 배가 고파져서 한밤중에
뒤뜰 광에서 촛불 밝히고
배추꼬랑이 깎아 먹었다
흙냄새 어두캄캄하게 풍겼지만
고소하고 맛있었지
땅속에 뿌리박고 탐스런 통배추
길러낸 배추꼬랑이
그때는 순무처럼 날로 깎아 먹었다
이렇게 일제 말기를 견디고
육이오 동란을 거쳐
독재정치 사십 년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 온갖 세월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힘들게 자식들 키우고 가르쳐서
청장년 세대로 길러냈는데
한평생 고생한 보람 없이
이제 와서 잘못 살았다 욕먹고
환갑도 되기 전에
등 밀려 일자리 떠난 퇴직자들
된장국에도 넣지 않고 요즘은
김장 쓰레기로 버려지는
배추꼬랑이 신세가 되고 말았나
---------------------
+ 백지 앞에서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늦된 첫 시집을 냈으니까,
돌이켜보면, 결코 조숙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졸시 <내가 내일 죽게 된다면>을 이미 삼
십 대 후반에 쓴 것 또한 사실이다.
그 후 삼십여 년을 더 살아, 환갑을 넘기고, 정년퇴
직도 했다. 이제 진짜 '유서'를 준배해야 할 때가 다
가오는 것 같다. 하지만 몇 해째 벼르기만 하면서,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저 백지 앞에서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온갖 기억
과 상념 속에 잠길 뿐이다.
그렇다면 시 쓰기가 유서 작성보다 쉬웠단 말인가.
유서보다는 차라리 시를 몇 편이라도 더 남겨야 하지 않을지.....
어쩌면 아무것도 남기자 않는 것이 깨끗하자 않을까.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은 백지를 과연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 산 아래 동네
해마다 뒷산에 소쩍새 찾아와
여름내 밤새도록 목쉰 소리로 울어댑니다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부엉이도 밤이면 청승맞게 울어대지요
꾀꼬리와 뻐꾸기는 낮에만 노래 부르고
장끼는 언제나 느닷없이 꿩꿩 우짖습니다
뒤꼍 장둑대 옆 깨진
오지항아리 뚜껑에 모이를 뿌려주면
눈치 빠른 비둘기와 까치와 참새 들
앞 다투어 밥그릇으로 날라듭니다
까마귀와 직박구리도 소란스럽게 끼어들지요
할머니와 어머니가 주시던 개밥은
요즘 아내와 딸아이가 챙겨줍니다
복실이는 반가우면 꼬리 흔들고
밥 주는 식구에게는 혀를 날름대지요
개밥을 넘보던 옆집 고양이가 때로는
혼쭐이 나서 도망가기도 하지요
철 따라 노래하고 울어대고 멍멍 짖고 야웅거리는
저들을 우리는 새와 개와 고양이라 부르지만
여름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철새와
낯익은 텃새와 정든 집짐승 들
새 아파트 따라 옮겨 다니지 않고
몇 백 년 수십 대를 이어가며
산 아래 동네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민등록 없어도 산에서
집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 동네 이웃들 아닐까요
===========
+ 세발자건거
찹쌀을 곱게 빻아 뿌려놓은 듯
눈 덮인 고은산 언덕길을
새발자전거 타고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온다
어느 때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
미쳐 멈춰 서기도 전에
인왕시장 좁은 골목으로 달려 들어간다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여자가
한약재를 썰고 있는 약방을 지나서
요즘 전혀 본 적 없는 미군
흑인 헌병이 서 있는 모퉁이를 지나서
겨우 멈추어 서자 골목길
저쪽으로 마침 아내와 딸이 지나간다
만날 약속도 없이 그저
손짓하며 쫓아가려니 두껍게
잠긴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옆 골목으로 돌아가 보니
둘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다
만날 계획도 없이 무작정
양계장에 갇힌 닭처럼 이리 저리 헤매는데
바로 맞은쪽에서 그들이 오고 있지 않은가
잠든 얼굴에 지나가는 미소
본 사람 아무도 없겠지
예측할 수 없는 길을 이렇게 셋이서
오락가락한다 때로는 운명처럼
만났다 헤어지기도 하고 말없이
그리워하다 더러는 속으로 미워하고
서로 무관심한 척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굴러가는 세발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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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트슈타트*
좁은 길가의 낡은 호텔
비좁은 로비에 널린 짐무더기
덩치 큰 서양인들에게 너무나 작은
사각 탁자를 둘러싸고
노랑 파랑 빨강 간이의자들
낯익은 손님 몇 명은
아침 일찍 떠나갔고
새로 도착한 투숙객들
관광지도를 들여다보며
레닌이 살던 집을 찾고 있다
사백 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곳
중세의 포식이 깔린 언덕길을 걷다가
츠빙글리 동상 앞에서 사진 찍고
벨뷔 호반에서 눈 덮인 알프스 원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3박 4일쯤 지나면 그들도
떠나갈 것이다
무수한 고인들의 발자국 남기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이 찾아올 곳
온 세상의 낮과 밤
자기 눈으로 보고
중앙역 근처의 골목길까지
제 발로 걷고 싶은 욕망
차곡차곡 쌓이고 다져진 알트슈타트
리마트 강변의 오래된 도시
*알트슈타트-'오래된 도심'을 뜻하는 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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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금요일
맑게 갠 하늘
단풍이 울긋불긋 먼 산을 물들이고
은행잎이 노랗게 보도를 뒤덮는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금요일
가을의 향기로운 유혹 뿌리치고
서울에서 백리 길 달려와
안산 캠퍼스 연구실에 들어앉아
밀린 논문 젖혀놓고
시를 쓴다 온종일
쓰다가 찢어버리고
고쳐서 다시 쓰고
결국은 한 편도 막음 하지 못한 채
퇴근길에 오르면
고속도로와 국도와 간선도로
승용차와 버스와 화물트럭
모두 뒤엉커 막히는 저녁길
백 리를 가다 서다 반복하면서
언제쯤 멈출지 알 수 없는
여생의 하루를 이렇게 보내고
쓰다 만 시 몇 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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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둡기 전에
걸어 다녀도 시간이 넉넉했던 시절
그때를 아무리 그리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값비싼 승용차도 고속전철도 마찬가집니다
직업에 상관없이 출퇴근하는 데
한두 시간씩 걸리고 때로는
자동차 고치느라고 오후 내내
정비센터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도 합니다
시간의 바퀴는 보증수리도 안 되지요
주말이면 식구들과 세탁물 찾아오고
할인매장에 가서 장 보는 것도 큰일입니다
도심에서는 차 세울 곳 찾기 힘들고
주차비도 여간 비싸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나 기다리는 시간만 자꾸 이제는
그나마 남은 시간 점점 줄어듭니다
퀵보드 타고 가볍게 스쳐가는 아이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동안 어비이들은
잠도 안 자며 맹렬한 속도로 뒤쫓아오는
시간의 바퀴 피해보려고 백미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속페달 밟아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주행차선을
양보하고 천천히 갓길로
들어섰다가 인테체인지 진출로 따라
내려가야지요 어둡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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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공원
오래간만에 모처럼 하늘이 갠 오후
밑동보다 높이가 스무 배쯤 됨 직한
느티나무 줄지어 늘어선 공원에서
남녀노소가 겨울 아침 짐승들처럼 햇볕을 쬔다
노인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꼬마들은 그네와 시소에 매달리고
힙합바지 청소년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뚱보 아줌마가 자기보다 더 큰 개를 끌고 간다
수풀 사이 길로 중년 부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
가는
순간 이 공원 풍경이 잠시
커다란 안경을 통해서 보이듯
두 개의 자전거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몇 백 년 묵은 성당의 첨탑이나 화려한
번화가의 북적임 없이 햇빛에 반짝이며
굴러가는 앞바퀴 속에서
빛바랜 흑백사진에 담긴
세월의 앞뜰과 뒤뜰이 보인다
그네 타던 꼬마가 중년이 되어
큰 개를 끌고 지나가는
몇십 년 후의 갠 날도 언뜻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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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파트
안산고개 마루턱에서 독립문 쪽으로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 내려다보인다
꽃샘추위 지나가고
목련꽃 활짝 피는 며칠 사이에
죽순처럼 솟아올랐구나
ㅡ 아, 우리 아파트다!
ㅡ 평당 3,500만 원짜리야.
ㅡ 세금이 얼마나 나올지...
지나가는 등산객 몇 사람이
우리를 힐끗 쳐다본다
아파트 공화국의 수도를 둘러싼
산등성이 길 걷다가 우리는 앞으로
신축 또는 재건축 아파트를 모도
우리 아파트라 부르기로 약속했다
아무에게도 해로울 것 없는
우리 가족의 말장난이다
우리에게 비록 아파트 한 채도 없지만
그때부터 어디를 가든지 우리 아파트
없는 곳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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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손자의 꿈
증조부는 풍채가 뛰어난 한량이었다고 한다. 평생
공부만 했다니, 팔자도 좋은 분이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초시 한 번 못 하고, 결
국 학생부군으로 천수를 다했다. 그분의 한문 필적이
담긴 한지는 다락방 천장의 도배지로 색이 바랠 때까
지 남아 있었다.
그분의 증손자들 가운데서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먼 촌 동생인데, 나이 사십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공부만 한다. 학문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미
국에 가서 MBA를 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때늦게
유학준비학원에 다니며 '유에스비즈니스로우'를 배
우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한문 실력만큼 손자가 영어를 잘하는지,
들은 바 없다. 손자의 영어 실력만큼 할아버지가 한
문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출세를 해서 돈을
벌려고 공부하는 점에서는 조손이 닮았다.
한문을 쓰던 증조의 꿈이 영어를 쓰는 증손자에
이르러 마침내 현실로 이뤄지길를 기원할 뿐이다
------------------
+ 태평양 건너==5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는 국내선
기내식이 끝나자
플라스틱 나이프와 스푼, 일회용 컵과 냅킨, 먹다
남은 음식들
구분 없이 한꺼번에
비닐자루에 쏟아 넣는다
창밖으로 시베리아처럼 광막한 풍경
비행기로 몇 시간을 날아가도
인적 없는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아직도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
석유가 쏟아져 나오는 땅
그 많은 인디언 원주민 모두 없애버리고
북아메리카 대륙을 선점한 카우보이들
저마다 총 들고 다니며
보안관 노릇 바쁘다
국내 여행 중에도 몇 차례씩 시간이 바뀌고
분리수거나 재활용이란 말이 낯선 곳
지금은 북핵 회담과 자유무역협상과 쇠고기 때문
에 겨루고 있지만
반세기 전에 우리 땅에서 피 흘리며
함께 싸웠던 혈맹
유, 에스 달러의 고향
전쟁 구호물자 부대에 찍혔던 표지처럼
한 손으로 악수를 해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광활한 합중국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오고 갈 수 없는
머나먼 대륙
태평양 건너
우리의 수많은 천지와 동포들이 이방인처럼
그곳에 살고 있어 언제나 우리와
가까운 나라
============
+ 핸드폰 가족
현대시 강습회 1박 2일
첫날 저녁때 교육원 숙소
휴게 코너 기둥 뒤에서 누군가
전화 거는 젊은 목소리
ㅡ 오늘은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아빠하고 자야지
이 닦고 발 씻고....
저 여성 강습생은 조그만 핸드폰 속에
온 가족을 넣고 다니는구나
부럽다 어리고 작아서 따뜻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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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다리 선인장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 층계참
벽감에 놓아둔 볼품없는
게 다리 선인장
끝마디가 가려운 듯하더니
3월 하순 소리 없이
연분홍 꽃 가녀리게 피어나
한 송이 두 송이
수줍게 계단을 밝히고
그윽하게 번지는 생기
집 안에 가득
가족밖에 보는 사람 없어도
게 다리 마디마디 끝에서 퍼져 나오는
소박한 아름다움 때문에
도자기 화분에 담긴 외래종
라벤더의 화려한 향기가 오히려
천박하게 느껴지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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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여운 돌고래
회색 몸통에 하얀 배가 볼록하고
까만 눈 언저리에 우스운 주름살까지 결들인
귀여운 돌고래 깜보
부드러운 우단으로 만든 아기 돌고래보다
얼룩덜룩 색깔도 천박한
플라스틱 로봇 장난감을
아기들은 더 좋아합니다
호텔 베이커리에서 사 온 치즈 케이크보다
골목길에서 파는 떡볶이를
꼬마들은 더 좋아합니다
부유하고 명망 높은 집안의 자녀들보다
만화방이나 전자오락실 개구쟁이들을
아이들은 더 좋아합니다
놀이보다
군것질보다
제 또래 친구들보다
재미없는 것들을 어른들이 좋아하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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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잎새들
한여름 지나면 플라타너스 가로수
나뭇잎들 피곤하다
여름내 땡볕에 그을리고
장마철 바바람에 생채기 나고
먼지와 매연에 시달리면서
그래도 가을이 올 때까지
열매가 익을 때까지
참고 견딘다
낙엽으로 떨어져 길에서 밟히다가
쓰레기 수거차에 실려가
마침내 흙을 돌아갈 때까지
찬바람에 흔들리며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채
힘 빠진 두 손을 놓지 않는다
늙어가는 부모들처럼
세상을 떠나려 하자 않는다
==============
+ 면장갑 한 켤레
북한산 단풍 냄새 풍기는
등산용 륙색 겉주머니에
면장갑 한 켤레 들어 있었다
어느 주유소에서 주었나
회색 면장갑 한 켤레가 우연히
유럽 대륙까지 짐에 묻어와
음습한 날씨에 찬 손을 감싸주었다
오페라 극장 맞은쪽 하숙집 문을 여닫고
도시순환선 전찻간 손잡이를 잡을 때
슈피탈 거리 한국학과 교실을 드나들고
율리우스 마이늘 슈퍼에서 빵과 포도주를 사 올 때
털장갑이나 자죽장갑 못지않게
손끝을 따스하게 해 주었다
버리면 그대로 쓰레기가 되었을
싸구려 면장갑 한 켤레가
다섯 손가락 마디마디
눈 많고 바람 찬 비엔나의 겨울을 간직한 채
프랑트푸르트, 모스크바, 울란바토르,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잡동사니에 섞여 굴러다니가
없어져버렸다
------------------------
+ 오래된 친구들
돈을 얼마씩 거둬가지고
폐암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두 차례나 흉곽절개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주사와 약물에 시달려
해골과 뼈대만 남은 초췌한 몰골로
그 친구는 힘없이 우리 손을 잡았다
병구환에 지친 아내에게 그래도
자랑스럽게 우리의 돈 봉투를 건네주면서 그는
우는 얼굴로 웃었다
차 한 잔을 되도록 천천히 마시며 우리는
환자를 위로했고
눈물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폐암의 증후와 병세애 관하여 그는 이제
전문의처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우리도 머지않아 저렇게 되겠지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속담을 여기서는 할 수 없었다
앞서 가는 친구를 찾아본 것이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괜히
허튼소리를 지껄이면서 껄껄거렸다
그러나 헤어지는 뒷모습은 모두가
흰머리 꾸부정한 노인들이었다
----------------------
+ 이대목의 탄생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진 커다란 잎이 벽오동
과 비슷해서, 이 화초를 우리 집에서는 그냥 벽오
동이라고 불러왔다. 여름에는 바깥에 내놓고, 겨울에
는 거실에 들여놓으며, 이 벽오동을 길러온 지, 어느
새 삼십 년이 넘었다.
올봄에도 4월 말에 뜰로 내놓고, 우유와 녹차 찌꺼
기로 거름을 대신했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잎이 시들
어 떨어지더니, 하지가 지나도록 새잎이 돋아나지 않
았다. 식물도 늙으면, 죽는구나, 그래도 혹시 되살아
나지 않을까, 틈나는 대로 쌀뜨물도 주고, 화분의 잡
초도 뽑아주었다.
거무튀튀한 줄기만 남은 화분을 마당 한 귀퉁이에
놓아두고 보려니, 마음이 언짢았다. 이것이
무슨 조
짐일까. 속으로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나 자신이
신병을 확인하기 싫어서, 종합검진을 받으려 병원에
가기를 꺼리는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오늘, 대서를 앞둔 초복날 아침에, 벽오동
밑동의 줄기에서 연초록 이파리가 작은 주먹을 펼치
듯 돋아나고 있지 않는가. 대추나무를 타고 올라간 늦
깍이 능소화가 주황색 꽃송이를 뚝뚝 떨어뜨리는 칠월
중순에, 때늦게 벽오동의 유복자가 태어난 것이다.
끈질긴 생명의 경이와 환희를 보여준 이 화초의 본명
을 찾아주기 쉽지 않아, 우선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대를 이어 되살아난 나무, 이대목(二代木)이라고.
----------------------
+ 잠깐 동안 정전
TV가 갑자기 꺼졌다 느닷없는
정전 때문에 오래간만에
연속극도 끊어지고 온 집안이
모처럼 캄캄하고 조용한 저녁
거북하게 코를 높인 탤런트의 인조 눈물 대신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방정맞게 달려가고
행인들 지껄이는 소리에 섞여
골목길에서 개 짖는 소리
옆집 아줌마가 퍼부어대는 악다구니
깊어가는 가을밤 귀뚜라미 노래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웃과
동네의 소식 들려왔다
탈북자 일가족이 선양에서 붙들려
북으로 강제 송환되었다는 기사도
오래간만에 촛불 켜놓고
구겨진 신문 한구석에서 읽었다
소리 없는 소식들은 그러나
이십 분도 채 못 되어 끊어지고
냉장고 다시 붕붕 거리며
온 세상이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
+ 청단풍 한 그루
물 한 번 주지 않았다
타이어 고무줄로 뿌리를 칭칭
동여맨 채 바싹 말라버린
어린 나무 한 그루
신축 건물 외벽과 시멘트 블록 담 사이
마른땅에 되는대로 꽂아 놓고
준공검사 끝나자마자
시공업자는 서둘러 철수했다
그리고 긴 가뭄
비 한 번 오지 않았다
봄이 되어도 꽃 필 줄 몰라
죽은 줄 알았다
4월이 가고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쌀알처럼 작은 꽃과 연녹색 잎
한꺼번에 돋아났다
강인하구나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광야의 꿈 키우며
제 몫의 삶 지키는
청단풍 한 그루
------------------------
+ 해협을 건너서
광활한 산자락에서 이백 년간 평화롭게
살아온 마을
돌연한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목조건물 이 층집 지붕 몇 개만
땅 위에 남겨놓은
대지의 폭력에 동의할 순 없지만
눈앞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용암 자국 뚜렷한 산봉우리
뒤돌아보며 갈매기들과 함께
시마바라 만을 건넜다
망망대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버스와 화물차와 승용차 만재한 페리선을
일엽편주처럼 흔들어대는
엄청난 물을 보고 바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와 산
물과 불을
대안 없이 수락하며
무기력하게 해협을 건너서 우리는
겸손하게 여행을 계속했다
-----------------------
+ 움직이는 성곽
주차빌딩에서도 보인다
북악산과 인왕산
우람한 도심의 고층빌딩 성곽
바겐세일 애드벌룬가 전광판
그림엽서 같은 배경을 등지고
내려다보면 다닥다닥 붙어선 상가 건물들
부끄러운 시멘트 옥상
낡은 냉각탑 주변에 플라스틱 물통과 맥주 박스
엘피지통과 부서진 의자들 나뒹굴고
굴뚝 옆에는 벗겨놓은 마네킹 몇 개
어지럽게 버린 진 폐품들
널려 있는 지붕밑은 서울 쇼핑몰
난리가 난 듯 붐비는 인파
화려한 매장과 주차장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끊임없이 고객들
실어 나른다
움직이는 것을 그러나
선남선녀들이 아니라 그들이
구입하는 상품들
작을수록 값비싼 명품도 있고
운현궁보다 더 큰 아파트
여의도보다 더 넓은 아파트
그 가운데 있다
주차할 곳 한 군데 찾은 것만 해도
나에게는 다행이지만
-------------------------
+ 하얀 눈 푸른 물
바닷가에 함박눈 밤새껏 내려
아침 풍경 온 세상이
하얀 땅 푸른 바다
모래통에 무릎까지 쌓인 새하얀 눈
코끝이 싸해질 만큼 짙푸른 바다
인적 없는 해변에 혼자 남긴
발자국
하늘과 땅과 물과 바람이 온통
한 사람을 위한 풍경으로
얼어붙은 순간
몰려오다가 멈춘 파도 소리
들려오기도 전에 알아들은 듯
색깔은 바래가지만
살았던 시간 속에 뚜렷이 찍혀
이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아까운 배경
하얀 눈 푸른 물
==================
+ 그라마와 더불어 2
어떻게 들어갔는지
하얀 욕조 안에 그라마 한 마리
수많은 발버둥거리며
아무리 기어 올라오려고 해도
반들반들한 욕조의 중간도 못 미쳐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쉴 새 없이 기어 올라오다가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오다가
멀어지고
빨갛게 약이 올라
어쩔 줄 모릅니다
아무래도 저 안에서 죽어버릴 것 같아서
꺼내여 틈새로 사라져 버립니다
무게도 없이
부피도 없이
그리고 소리도 없이
벽을 기어 다니다
때로는 머리맡에 툭 떨어져
선잠을 깨워놓고
쓰레받기를 찾으러 간 사이에
장 밑으로 숨어버립니다
결코 귀여운 미물은 아니지만
더불어 살겠다는 것이지요
--------------------------
+ 비둘기들의 행방
안산 중턱 팔각정 앞마당에
내려앉은 비둘기 때
등산객 발걸음을 막고
부산하게 먹이를 주워 먹던
맷비둘기들 모두
어디로 갔나
아프가니스탄이던가
공습이 시작되던 때부터 갑자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네
양솔밭에서 멋쩍게 구구구 울어대던
비둘기 소리
다시는 들리지 않네
텅 빈 비둘기 집에 거미줄 치고
물그릇과 모이통 녹슬어 나뒹구네
누가 이 새들을 죽어버렸나
다투기 싫어하는 등산객들
아무도 묻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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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장생보다 오래
십장생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들은
아내를 구타 치사한 남편
정부와 짜고 남편을 독살한 아내
양녀를 상습 성폭행한 의붓아비
전실 자식을 학대하다가 굶겨 죽인 새엄마
멀리서 찾아온 친모를 대문 앞에서 쫓아 보낸 아들
상속이 끝날 때까지만 부모에게 효성스런 딸
밥값을 못 벌어온다고 시아버지를 집에서 몰아낸
며느리
외손주 보러 온 장모를 집 밖으로 끌어내 사위
아기를 뺏고 생모를 죽인 심부름센터 직원
훈련병에게 인분을 먹인 중대장
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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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의 이 층집
숙박비가 비싸서 정들지 않는 호텔을 나와, 언덕
위의 이층 집을 찾아갔다.
페인트 칠이 벗겨진 나무 창틀 너머로 동해 바다
한 자락 보이고, 중남미의 옛 노래가 LP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시골 다방, 맛없는 커피가 나오는 그 다
방이 아직도 있는지.... 가슴 두근거리며 언덕길 올
라와 보니,
늦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볼도저가 그 일대를 헐어내고 있었다. 개발지역에
편입된 모양이었다.
집들이 무너질 때마다 흙먼지가 눈앞을 가리고, 소
음 때문에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살점이 잘려나
가는 듯한 비명이었다.
어떻게든지 저것을 막았어야 하는데... 머지 안
아 등대보다 더 높은 고층빌딩과 파도
소리를 막아버
리는 위락시설이 들어서겠지. 바다는 내려다보는 것
이 아닌데....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부정맥 현상은 한동안 가라
앉지 않았다.
_________* 56
강산
달밤
멀미
산길
-------
생사
소리
춘추
강북행
----------
밤바다
새 이웃
새천년
어느 날
-----------
우체통
이른 봄
팽나무
효자손
-------------
가을 거울
겨울 아침
난초의 꽃
남김없이
--------------
몸의 소리
물의 모습 3
법인의 집
짧은 예언
---------------
책의 용도
남긴 이야기
든든한 여행
문자 메시지
----------------
비 오는 주말
배추꼬랑이
백지 앞에서
산 아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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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발자전거
알트슈타트
어느 금요일
어둡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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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공원
우리 아파트
증손자의 꿈
태평양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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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가족
게 다리 선인장
귀여운 돌고래
마지막 잎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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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갑 한 켤레
오래된 친구들
이대목의 탄생
잠깐 동안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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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단풍 한 그루
해협을 건너서
움직이는 성곽
하얀 눈 푸른 물
----------------------
그라마와 더불어 2
비둘기들의 행방
십장생보다 오래
언덕 위의 이 층집
__________
김광규 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