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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남조 시 5

+ 마법


살과 뼈를 지나도
자국 없는 햇빛
사람 마음의 은밀한 행선지도
이를 알아낸다면
그건 마법이리
누구라도
이 재주에 이른다면
그는 마법사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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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효

진홍 안주를 묻힌
인허가의 인(印)을 내가
찍지 않았으니
그대 죽음은 무효이다
저만치 사라지는 검은 장례차에
그대가 탔을 리 없다

광막한 동서남북에
날개 없는 바람 자욱하고
그대와 나에겐
은고리 금고리가 겹겹 감겼는데
가거나 오거나를
그대 어찌 
혼자 정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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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진실이 무엇인가 묻기에
모른다고 했다
거듭 묻기에 동일한 대답을 했다
기어이 대답해라
무엇이 진실인가
모르는 것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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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내 구겨진 문서는
백군청군의 운동회처럼 부산하더니
저물녘엔 낙엽 더미 아래 고요하다
더 은밀한 문장은
한밤의 내 불면이며
아침에 펴 보니
글씨 없는 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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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3

솔기 없는 이불을 
빛의 가위로 실금 하나 열어
노을이 길게 누워 온다
노을이 이런 말을 한다
그대도 쉬고 싶거든
예 와서 누워라

이 말이 좋다
삶의 세월 다 저문 이 시절엔
누워 벗하며 멈춘 바람처럼
함께 쉬자는 말이 어질어질 황홀하다
음성 없는 기도 같고
성서의 행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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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4

사막이여
당신은 영험한 의사이니
나를 고쳐 주십시오
명징한 거울이니
나를 비춰 주십시오
헐렁한 관용이니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궁무량이시니
나를 채워 주십시오
푸른 새날로 오십시오
그러나 아무것도 안 주신들
당신을 바라보렵니다
당신의 고독
그 쪼개진 한 조각이
내 평생의 노래여서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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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5

아트막이 부유하는
사막의 풀뿌리들
가루, 가루로 씨앗을 떨구는구나
꿈속인가
아슴한 휘파람 소리

날아라 풀씨들아
몸 시린 소금밭에도 부스스
씨앗 떨구어라
배고픈 이가 하늘에 구하던
성서 속의 그 음식으로 
솰솰 뿌리거라
한데 저분 누구신가
늙은 전사처럼 지치고 허리 굽은 
저분이 
우리 하느님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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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6

사막엔 지도가 없다구요
바람의 날갯짓이 사막의 지도입니다

사막엔 물이 없다구요
사막의 몸을 뚫어 
지구 저편까지 이른다면
아무 곳이든 사막의 혈관이며
사막은 오장육부 모두가
수로(水路)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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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 17

사막은 거대한 책입니다
억만 줄 억만 글씨를 담아
이 책을 엮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사막의 은수자들은
사막 큰 어망에 낚아져
단순한 몰아(沒我)로
복자의 생을 누렸습니다

사막은 무량한 글씨의
보물 창고입니다
하여 누구도 이 책을 
다 읽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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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城主)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
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
그가 되었다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
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
당신의 고독은 깊어 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
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
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
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
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
겸허히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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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4

그는 어릴 때부터
춥고 무섭고 외로웠다
자라면서 다른 사람들도
춥고 무섭고 외로워함을 알았다
멈추지 않는 눈물처럼
그에게
말과 글이 솟아났다
그는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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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수십 년 잘 지낸 이들이
그간의 세월을
어수록 밋밋하게 지껄일 때
하느님이 옆에 오셨다
너희들 그때 그 애들이지
고작 몇십 년인데
그런저런 말을 하느냐
나는 무량 시공에서
세월의 수레를
홀로 돌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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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한밤의 제사
통한과 그리움으로 
쏟아 내는 눈물

이상하다 사람의 상심이
죽음도 넘을 듯이 간절해도
하느님의 고요
생령의 적막함이
더 어른이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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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2

침묵이다
공기처럼 투명하고
이슬처럼 증발하는 침묵이다
봉화의 불씨이면서
미풍도 밀어내는
모순의 침묵이다
맨발로 구만리를 걸어가는
형벌이다
누구도 다치지  않으려는
일념의 핏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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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어이하나 어이하나
희망 없는 희망에 손 흔드는
이 사람 저 사람과
그다음 사람들
어이하나 어이하나
내가 희망이야 희망이야
감미롭게 노래하는
허공의 종이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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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햇빛이 아름답다
아슴한  옛 시절과 이후의 무궁 세월
더 있다면 더 있는 그때에도
햇빛은 아름다우리니
이런 풍요
정녕 누가 주시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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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마을

어느 꽃은 화사하고
어느 꽃은 순박하고
어느 꽃은 가련하다
깊은 산, 돌밭, 벼랑 위의 꽃들

이것 봐
꽃은 아니 피웠어도
흑요석의 꽃씨 쌓여 가는
사람 마음 안의
꽃덤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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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 9 

나무들아
출석을 부를 테니 대답해 주렴

비 맞는 나무
물 그림자 나무
바람막이 나무
안개 덮인 나무
벼랑 위의 나무
다섯 나무 불렀더니
다섯 시인 대답한다

까치집 나무
연실 걸린 나무
어깨동무 나무
쌍둥이 나무
이름 새긴 나무
다섯 나무 불렀더니
동화책 다섯 권

오지의 나무
이정표 나무
나룻배 나무
외딴섬 나무
구약 시절 나무
다섯 나무 불렀더니
여행자 다섯 분

기둥, 서까래 된 나무
창틀 나무
머리빗 된 나무
몸 뚫어 피리 된 나무
종이 된 나무
다섯 나무 불렀더니
명인 다섯 대답한다

모세의 십계명 나무
광야의 나무
만년설에 뿌리 둔 나무
묘비나무
교수목 나무
다섯 나무 불렀더니
철학 책 다섯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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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병

그리움 지나
그리움에게 간다
하늘 먼 포장에도
그리움이라 쓰여 있다
온 세상에 
그리움이란 글씨만 가득하다
나쁜 병이다
이런 병 걸리면
죽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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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심술

누군가 칠판에 글씨 쓰곤
지워 버리고 떠났는데
다른 누군가가 와서
지워진 글씨 자국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이런 일이 독심술인가
저희끼리 쓰고 지워도
다시 읽어 내는
이런 재주 있으면 안 되지
저희 둘만 속마음을 알아내는
이런 행복 용서 못 해
절대 절대 안 돼
질투의 화롯불에 화상 입어
내가 죽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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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될 일

내가 왜 이러나
굶주린 들짐승처럼
너를 해치려 한다
오히려 네가 사자처럼 포효하며
내 명줄을 끊어 다오
태풍 속의 연기처럼 지워 다오
그도 저도 아니라면
함께 죽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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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새벽의 시인 윤동주는
한국 현대사의 으스름 첫새벽에
28년 생애를 살고 갔다

하늘과 땅 사이
샘물과 푸성귀와 종소리까지도
그 이름 '식민지'이던 때
죄 없는 죄수복을 입고도
그는 풍요로웠다
차갑고 습한 시멘트 바닥에서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한
감성의 재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면
그의 시 <십자가>는 
시인의 영혼을 관통한 
진실이었다

그의 탄신 100주년에
꽃과 가시로 엮은 시의 면류관에
뼈와 손톱으로 비문을 새기노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윤동주'
이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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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할 일

오래된 도시는 숙연하다
유구히 울려온 악기엔 영계의 기류
옛 조상들의 하느님이
오늘의 우리 하느님이시니
그 가장 좋아라

비행기 타고
하늘 위의 하늘을 보는 일
동화 속의 동화 아닌가
우리가 
이 풍요를 공평하게 나누니
절을 올릴 일이어라
여러 번 절할 일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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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소리

그간 바람이 모두 헛되고
마지막 하나 남은 소망이
비로소 가능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요샛말로 대박이리
모두 떠나고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가 진정한 친구 거나
영원한 반려자라면
더욱 대박이리

임종의 기도가
하늘 살결에 고루 퍼지면 가앙가앙
종소리 울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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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을

다시 가을입니다
긴 꼬리연이
공중에 연필그림을 그립니다
아름다워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복입니다

가을엔 이별도 눈부십니다
연인들의 가슴앓이도
지금 세상에선 수려한 작품입니다
다시 만나라는 나의 축원도 
가을이어서
진심의 한도에 닿았습니다

그간에 여러 번
가을이 다녀갔는데
또 가을이 수북하게 왔습니다
이래도 되는지요
빛 부시어 과분한 거 아닌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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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길

분간 못 할 깊은 곳입니다
태풍 같은 힘이 휘감아 당깁니다
집들이 성냥처럼 포개져 있고
누구를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고통의 칡넝쿨에 감겨
아픈 사람뿐입니다
의사도 몸이 아픕니다
하면 다른 곳으로 가 보렵니다
어디엔가 불 밝힌 집이 있겠지요
못 찾으면 초원에서 잠자고
내일의 태양 아래
내일의 길을 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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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사랑

새봄의 전령
매화가 피었습니다
매화는 첫새벽 샘물 위에
이슬 설풋 얹히듯이
고요히 피어납니다

매화는 
꽃이면서 정신입니다
눈 그치면 꽃피자 꽃 피자고
스스로 기운 돋우는
용맹한 분발입니다
가장 오래 머무는 꽃도
마음속 날마다의 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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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유사

그대 온다면
죽음에서도 깨어나리
그대 안 온다면
먼 산울림과 흐린 그림자에도
가슴 설레며
수백 번 허깨비 놀음으로
하세월 보낼 테지

기어이 오지 않는
아주 훗날엔
괜찮다 괜찮다고
낯선 산수도 여기저기 바라보며
한 세상 살 만했다고
세월이 유수요
유수가 세월이더라고
혼자 말하리

적극 적막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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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된다

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막의 밤의 행군처럼
길게 줄지여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슬 같은 희망이
내 가슴 에이는 구나

사랑 된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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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하늘은 높디높고
바람 부는구나
바람은 낮은  음정의
음악이구나
솰솰 햇빛가루 내리는구나
슬픔조차 감미로운 
손님이구나

나무의 손가락들
서로 살결 닿으며
저리 흔들리는구나
모두 이상하구나
많이 많이 이상해서
못 견디겠구나
슈크림처럼 녹아 버리거나
울어 버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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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우성

첨단 과학, 어쩌란 말인가
지구는 어지럽고
사람은 낯설어하고
신은 우려하신다
70억 넘는 사람과
생명체들이 원하는
식량과 약품과 무기와 그러고도
외롭다 사랑받고 싶다의
이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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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거울

신화 속의 신령한 새가
천상의 축복을 전한 후
사람이 창조의 풀무를 돌려
문화가 
풀밭처럼 자랐다

예술과 과학이 싹트고
사람의 희노애락이 천만 줄기의
글로 아름답게 그려졌다

<문학사상>이
오백 오십 다섯 권의 
책의 탑을 세운 그 앞에서 

문학은 
시대의 거울임을 절감한다
세계사를 배경으로
국격과 인격, 이념과 과제를
깊이 생각해 본다

신화 속의 신령한 새가
오늘도 오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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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에게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
새벽이 온다 빛이 온다 바라볼 때
동터 오던  태양

그대를 연인으로 여겼더라면
춥고  의지 없던 낮밤
산 첩첩 물 늠실늠실의 젊은 시절을
덜 울고 덜 불붙어 좋았을 텐데
햇볕 쪼이는 의자에 앉아
그대이구나 그대 가득하구나며
내 마음 충만했을 텐데

내 나라 불 꺼지고
치욕의 그물로 휘감겼을 때
무얼 그러느냐
한 시절의 안개요 소낙비일 뿐이라고
유구한 조국을 믿고 축원하게 해 주던
젊고 지혜로운 태양이여

사람은 누구나
단명한 중생이지만
살아 한 세상 죽어 기나긴 세월에도
그대를 바라보리라
영원한 태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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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손자가  어른 되고
좋은 할아버지 되는 거 보고 싶다
달나라까지도 다녀오는 후세대를
영화를 보듯 보고 싶다
세상이 색종이처럼 갈아 끼워지는 변모와
그 시대마다의
치열한 갈구는 무엇이며
하느님께선 평안하신 지

내 한평생 살고 난 후엔
투명인간이 되어
더욱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공기처럼 평화가 가득하기를
오로지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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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성귀밭

이 며칠간  시를 씁니다
흐린 글씨의 낡은 메모지도
구김살 펴면서 살펴봅니다
그날이나 오늘이나
나의 글은
캄캄하고 배고픕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미세한 수분이어도
여린 부 물방울 귀하게 모아
푸성귀 밭  한 둘레를 길러 내어
아름다운 이들의 식탁에
선물 주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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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날개

삐걱거리는 내 뼈는
몸 안의 자잘한 사슬이며
허허로운 모래밭에
내 순정의 파편들이 쌓이고
그 위에
질펀한 노을

애련하구나
늙는 일 서툴러서
깃털 줄어도 더 줄어도
날아오르려 애쓰는
내 노년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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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도

풍성이 은혜 주셨는데
비어 있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솔숲의 솔잎만큼
기도말을 드렸는데
주님께서 받으셨는지요

저의 기도는
연필심첨럼 허약하여
하늘 가는 중도에서 여러 번
부러졌을지 모릅니다
그러한들  솔숲의 솔잎들이
하늘 아니 어디를 바라보겠습니까
저의 기도도
그처럼 단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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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와 모래

바위가 바수어져
모래가 되기까진
2억 년의 세월을 요한다
빛과 바람과 시간이 힘을 모아 주면
그리된다 한다
사람보다 칠백만 배의 
고령자이다

하느님이 바위에게
부서지면서 살아라
부서지더라도 살아라고
풀무를 돌리시며
2억 년 동안 지켜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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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이 어인 폭풍인가
하늘을 가르는 천둥 번개
누가 이 거센 불을 붙였는가
왜 이리 추우면서 따스한가
슬프면서 기쁜가
절망적이면서 희망 만발인가
아아 내가 
사랑의 묘약인가를
삼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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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주님

주님께선
지평이 안 보이는 무량의 광야이며
영혼이며 심장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이 쇠못으로 뚫리고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 하셨으나
한 모금의 물도 못 마신
나의 주님 만민의 주님을
어어하리까 어이하리까

수난의 주님께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속죄와 치유를 간구하며
홀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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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右盗)의 비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양옆에
두 사형수가 함께 처형되었다
주님이 오른편 죄수의
신심을 읽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내가 나에 물었다
주님 곁에서
우도처럼 죽을 수 있겠는가
나는 불가능을 능히 알았다
그러나 동트는 새벽녘에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주남의 고통
그 한 부스러기가
안개와 눈물로
평생 같은  긴 밤을
몽롱하게 나를 적시더니
이 대답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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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빛을

이 겨레  깊은 밤 한 줄기 빛에
문 열어 대답하니 은혜로워라
진리의 말씀이신 우리 구세주
목숨 바쳐 따른 이들 장하여라

용맹한 신앙을 강물로 이어
복음의 큰 바다에 이르렀으니
주님의 참 생명과 충만한 평화
온 세상의 모든 이와 나누리라

기도와 사랑으로 서로 만나고
주님의 크신 영광 하늘에 바쳐
온 노리 성령으로 거듭나리니
축복의 땅 주님 찬양 다함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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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하늘이 내리시는 부신 햇살이
충절의 큰 사적을 말없이 말씀하네
나라 뺏긴 천지간에 
나라 찾을 큰 뜻 세워
그 한 몸  황황히 불로 사른 윤봉길 의사여
광복의 기맥이 그 불기둥 위에
드높이 솟았어라

열백 번 거듭나도 오직 이 하나
순국의 그 장한 의지 불변하여라
원통하고 욕된 세월
내 나라의 기를 품고
마침내 새 역사를 불러온 윤봉길 의사여
조국의 청사에 그 이름 유구하리
아아 윤봉길 의사여

----------------------
저문 세월에

누군가 만경창파에
튼실한 배를 띄우고
햇무리 어른거리는 뱃전에
나를 얇게 실어 준다면
오죽이나 송구하고 안전하련만

아니야 그 아니어도
하늘의 묵시와 땅의 신비에
미숙한 말과 글을 비치며
고맙고 은혜롭게 
나 살아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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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책을 읽는다
책갈피 사이사이로 흐르는
사념의 혈류

나의 글은 어떤가
외출복을 차려입은 말들은
세상에 내보내고
상처 깊거나 죄의식에 멍든 말은
늑골 갈피 속에 묻어 둔다
덧없어라 옷 없어 세상에 못 나가고
늙어 버린 말들

글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묻고 더 생각한다
문학이여
내 한평생 길 가고 또 가도
출발 지점에 
다시 와 있구나

-----------------------
좋은 것 무량

하늘은 높디높고
흰 구름과 푸르른 산들
음악 넘치고
바람 여럿 오가는구나
나누어도 나누어도 남는구나
닫힌 문 옆에
열린 문 있구나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구나

---------------------
사랑하게 두라 

사랑하게 두십시오
더 깊이 더 오래
사랑하라 하십시오
사랑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사랑하라 하십시오
사랑하는 그 자체가 이미
사랑의 보상이며
사람 세상에선
사랑 이상의 가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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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없는 사랑

사랑엔 낭비가 없다
더 많이 주었다면
그 풍요로 이미 보상받았다
그 사람 있었기에 
불 꺼진  한 세월이  밝고 따뜻했다고
그리 알 일이다

사랑엔 계산법이 없고
순수와 관용이라는
열쇠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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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9 

성녀시여
오늘도 당신의 거주지는
순교의 현장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당신의 그분은 구세주 되셨는데
당신은 이천 년 줄곧
물이 고이지 않는 우물이며
돌꽃 돌이끼만 무성합니다
어쩌자고 당신은
오늘도 내일도
사랑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런 여자들의 
우두머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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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세상 아기

깊은 산중에 
벗 없는 어린 소녀가 살았다
할아버지 지금 캄캄하지?
그 아이가 눈 감고 말한다
지금은 환하지 맞지?
눈을 뜨고 말한다

그 아이는
숫 굽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
눈 감으면 캄캄하고
눈 뜨면 환한 경치가
유일한 놀이였다
그 아이의 음성이 내게도 들려온다
아주머니 캄캄하지?
할머니 지금은 환하지?

아가야 네 말 맞다
할머니는 눈 뜨면 밝아서 좋고
눈 감으면 무섭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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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 나의 아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내 심장 나의 아가
너 거기 있지 맞지,
겨자씨보다 작은 나에게
영혼과 호흡이 와 있었다
이 말도 맞지,

사과 크기의
생명 피 주머니
너를 마음이라 부른다
마음 있어 내가 사람으로 살았다
한밤중 꿈속에서도
네가 함께 있었다
이 말 맞지,

바람 멈추듯
어느 때 내 숨결 그리되어도
말라서 바싹한 심장 안에
핏방울 몇몇 맞겠지,
내 심장 나의 아가


______________ * 51

마법
무효
문답
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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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3
사막 14
사막 15
사막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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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7
성주
시인 4
세월
--------
적막
침묵 2
허공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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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마을
나무들 9
나쁜 병
독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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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될 일
윤동주
절할 일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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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을
내일의 길
매화 사랑
세월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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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된다
이상하다
이 아우성
책과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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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게
투명인간
푸성귀밭
노년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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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도
바위와 모래
사랑의 묘약
수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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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의 비유
이 땅에 빛을
윤봉길 의사
저문 세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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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좋은 것 무량
사랑하게 두라 
낭비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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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9 
환한 세상 아기
내 심장 나의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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