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 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 비
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성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 새
거센 바람 속에
새가 난다
날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득이는
저 혼신의 날개짓이
넓은 강
건널까
저 거센 힘과 파닥임 사이
아슬한 균형 박차고
기어이 날아갈까
날아
못 가고 몸 솟구쳐 이름 없는 새
오른다
바람의 숨막히는 쇠그물의 끝을 향해 작은 새
피 묻어 오른다
유연한 포물선 아니라
예리한 비수로 파랗게 날 서
수직으로, 온몸을 던져 수직으로
솟구쳐
바람의 멱통을 쪼아, 쪼아
피투성이 육신을
쪼아
살아
건널까 작은 새
죽음의 바람을 뚫고 넓은 강
몸은 벗어 장사지내도 그 예민한 부리
살아 건널까
저 새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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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
야마하 150
부다당 들이밟으며 쌍,
탑동 바닷가나 한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
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바다한테
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
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
부다당 부다다다당
내리꽂고 싶은 거지
깡소주 나발 불듯
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쌍,
========
+ 거울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쫓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
----------
+ 귀가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
+ 나비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치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
+ 노년
먼 데서 바람이 오니
굴참나무 잎새도
실핏줄이 아리어
가을걷이 지나간 자리에
새떼 무심타
장 속에 미리 사둔
양말 두 켤레
올 추석엔 아이들
돌아올 것가
저만치 빈 논가에
전봇대 하나
========
+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
+ 목포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나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 가리라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내고 흰 목을 젖히며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쁜 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 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
+ 별사(別辭)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면 나는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인적 드문 소로길 스적스적 걸어
날이 저무는 일
비 오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으로 꼴똘히 서 있기도 하는 일
다 공부라고 하면 좀 낫지요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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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밤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돼 형, 요새는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오마넌은 내야 돼
알었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이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와 비닐 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미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여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집 장 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싸며 푼수 주모(50세)가
빈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을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 시부적 떨어나졌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
+ 빈 방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별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
+ 서귀(西歸)
날 잊지 말아라 노래 부르네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나 이승의 연(緣) 다하여
먼 길 가는 날
살쩍 고운 귀밑머리 흰 목덜미
그대 두고는 차마 못 가
자욱마다 소나기 오리
울고불고 몸부림치리
그래도 아마 나 시치미 떼리
시치미 떼고 휘파람 불리
한사코 무덤덤히 가서
한번도 뒤 안 돌아보리
머리털 한 오락 안 빠뜨리리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을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
+ 약혼
꽃처럼 곱던 시절은 다 갔구나
까칠한 네 얼굴을 보니
지난 몇 해가 어제만 같다
다 그런 거라고 나는 능청을 떨지만
손쉽게 다 그럴 수는 없는 거였지
꽃같이 여리던 시절도 이제 다 가고
험한 세상없이 살자면
튼튼한 몸뚱이 밖에 믿을 게 없다
오직 말할 것은
굳세거라 마누라야
저 세상 갈 때까지 한 솥밥 먹으며 부대껴 보자고
마른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날
실없이 나는 눈물 난다
이 아름다운 약속이
기쁘기도 해서 섧기도 해서
--------------------
+ 여수(麗水)
함바 구들장은 쩔쩔 끓고
순천 석수 정씨는 종일 잠만 잔다
신월동 바닷가 겨울 저녁
광주로 공부 나간 둘째는
끼니나 제대로 찾아먹는가
몸만 상하고
돈은 마음같이 모이질 않고
간조가 아직도 닷새나 남았는데
땡겨먹은 외상값은 쌓여만 간다
바다는 촐랑촐랑 무언가를 졸라대고
개들은 바람을 좇아 컹컹컹 짖고
잠이 깬 정씨가 바다 쪽으로 부스스 괴타리를 푼다
힘없이 오줌이 옆으로 날린다
========-
+ 옛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
+ 춘곤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
+ 화진(花津)
태풍 오면
철없는 어린 갈보처럼
마음은 펄럭이리
살 속으로 바람 가득 들고
먼 데 하늘 돛폭같이 부풀 때
늙은 노새의 나
끝내 花津 가리
굼실거리며 덮쳐오는
수만 코끼리떼 기다리리 말향고래떼 기다리리
쏟아지는 몸엣버캐 거친 숨소리
花津, 온몸 열어 새 사내 맞는
花津, 그 유정한 이름 복판에 서서
늙은 나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겠네 한번
초라한 갈기 곤두 세우고 부르르 떨겠네
기어이 나도 저 바다 하리
----------------
+ 공휴일
중량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쓰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 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
+ 늦가을
호두나무 잎에 싱거운 비 뿌린다
성큼 옮기는 황새다리가 더 길어졌다
물 말아 찬밥 한술 뜨고
이웃에 곶감이나 깎아주러 갈까
돋보기를 밀어올리며
어머님은 양말을 꿰메고 계시고
그런데 귀뚜라미들은 대체
어디서 이 비를 긋나
-------------
+ 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 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지고
길은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
+ 봄바다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
+ 시간들
48년 9개월의 시간 K가 엎질러져 있다
시원히 흐르지 못하고
코를 골며 모로 누워 있다
액체이면서 한사코 고체처럼 위장되어 있다
넝마의 바지 밖으로
시간의 더러운 발목이 부었다
소주에 오래 노출되어 시간 K는 벌겋다
끈끈한 침이 흘러
얼굴 부분을 땅바닥에 이어놓고 있다
시간 K는 옆구리와 가려운 겨드랑이 부위를 가지고 있다
잠결에 긁어보지만 쉬 터지지는 않는다
흘러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봉지에 갇혀 시간은 썩어간다
비닐이 터지면 시간 K도
힘없는 눈물처럼 주르르 흐를 것이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잠시 지하도 모퉁이를 적시다가
곧 마를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들이
밀걸레를 가지고 올 것이다
허깨비 같은 시간들, 시간 봉지들
==========
+ 여름날
풀들이 시드렁 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 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 오누이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 유리창
사랑하기로 한다
5분이 지나면
마른풀과 짚으로 만든 잠자리로 돌아가
혼자 눕기로 한다
긴 침묵 끝에
우리는 두 개의 강이 되기로 한다
만나면 몸짓으로만 사랑하기로
돌아가 먼 곳에 하나씩
어린 물고기를 키우기로 한다
------------
+ 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고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찍찍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잎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가다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
+ 깊이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깊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
+ 맨드라미
꺾인 맨드라미
허리 꺾인 맨드라미여
청 좋은 나훈아가
서운히도 돌아서던 돌담길이다
대추나무 퀭한 가지 너머
하늘은 잿빛으로 얼어붙었다
잘리다 만 모가지이냐
꺾인 허리여
잿간 구석 던져진
몽당비만도 못하다
한 시절 눈부시던 선홍의 빛이
피흘리며 흙바닥을 쓸고 있구나
파장 뒤 굴러다니는
헌 신문지만도 못하다 저 목덜미,
저 목덜미 적셔
겨울비 하염없고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
맨드라미
-----------------
+ 섣달그믐
또 한 잔을 부어 넣는다
술은 혀와 입안과 목젖을 어루만지며
몸 안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저도 이젠 옛날의
순진하던 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뜨겁고 쓰다
윗목에 웅크린 주모는
벌써 고향 가는 꿈을 꾸나 본데
다시 한 잔을 털어 넣으며
가만히 내 속에 대고 말한다
수다사(水多寺) 높은 문턱만 다는 아니다
싸구려 유곽의 어둑한 잠 속에도 길은 있다
이만하면 괜찮다
------------------
+ 아카시아
먼 별에서 향기는 오나
그 별에서 두 마리 순한 짐승으로
우리 뒹굴던 날이 있기는 했나
나는 기억 안 나네
아카시아
허기진 이마여
정맥이 파르랗던 손등
두고 온 고향의 막내누이여
============
+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 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 허공장경虛空藏經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 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장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
+ 고향의 누님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 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넝쿨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
+ 지상의 방 한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닿는
둘째 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 마른 쑥대에 부쳐
마른 쑥대여
해설핀 섣달 저녁의
성긴 눈발이여
어머님 산소는 먼 곳에 있다
알고나 있는가
마른 쑥대여
잊지는 않았겠지
컴컴한 호두나무 그늘이여
기계충 머리로 보채던 어린 누이여
손등에 사마귀 많던 동무들......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비명에 간 없는 집 종손이여
마른 쑥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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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래 바다에 묻다
눈 감고 내 눈 속 희디흰 바다를 보네
설핏 붉어진 낯이 자랑이었나 그대 알몸은
그리워 이가 갈리더라 하면 믿어는 줄거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하면 믿어는 줄거나
내 늙음 수줍어
아닌 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그댈 보느니
어쩔거나
그대 철없어 내 입안엔 신 살구내음만 가득하고
몸은 파계한 젊은 중 같아 신열이 오르니
그립다고 그립다고 몸써리치랴
오 빌어먹을, 나는 먼 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
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
상한 짐승처럼 속울음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
*예래는 제주 중문 서쪽 바닷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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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으로 가서 꽃이여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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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저 길로 간다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도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리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움 울며 굴러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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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삶은 보리 고두밥이 있었네.
달라붙던 쉬파리들 있었네.
한 줌 물고 우물거리던 아이도 있었네.
저녁마다 미주알을 우겨넣던 잿간
퍼런 쑥국과 흙내 나는 된장 있었네.
저녁 아궁이 앞에는 어둑한 한숨이 있었네.
괴어오르던 회충과 빈 놋숟가락과 무 장다리의
노란 봄날이 있었네.
자루 빠진 과도와 병뚜껑 빠꿈살이 몇 개가 울밑에 숨겨져 있었네.
어른들은 물을 떠서
꿀럭꿀럭 마셨네.
아이들도 물을 떠서 꼴깍꼴깍 마셨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
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
밤마다 오줌을 쌌네 죽고 싶었네.
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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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 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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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깼다. 눈 내리깐 채 몸의 제일 후미진 구석에 엎드려 있는 그것은 백만 년 인류사를 배경으로 갖는 것이어서,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으로는 감히 어리댈 수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림으로부터 정신대 끌려갔던 내 재당숙모에 이르는, 유구한 상치의 넋들이 그 숨죽인 다소곳함 속에는 서려 있다고 보였다
그래서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한순간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
아아,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는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을 조금 당기고 치맛자락을 끌어내려 슬며시 덮고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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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동 밤안개 -여운화백
키만 훌쩍 컸지.
뒷 사연 쓸쓸한 거야
인생 칠십의 빌어먹을 항다반사.
바바리는 걸치고서
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
인사동 고샅을
밤마다 순찰 돌았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수몰 앞둔 시골 면소
충직한 총무계장처럼.
한사코 집으로
안 가려 했네.
탑골에 이모집에 있으려 했네.
불가에서 소담에서 버티려 했네.
깰까 두려워
자꾸 마셨네.
울적한 어둠이 마곡동 빈집 마루에 어떻게 새낄 쳤는지
묻지 않았네.
아무도 말하지 않았네.
바바리는 걸치고서
돌아가는 새벽 뒷모습이
알 슬은 방아깨비 같았네.
물그릇 엎고 꾸중 들은 워리 같았네.
식은땀만 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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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 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석거리는 마른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________ *51
꽃
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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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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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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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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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別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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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西歸)
약혼
여수(麗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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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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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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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
코스모스
허공장경虛空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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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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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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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쑥대에 부쳐
예래 바다에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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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가서 꽃이여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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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인사동 밤안개 -여운화백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시인 마당/시인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