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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사인 시 3

+ 그날
  ㅡ1980년 봄을 위한 비망록

갔지 흔들리며,
가슴속에 초조히 엇갈리는 기대와 불안을 애써 불지
르며
목이 쉬도록 소리소리 외쳤지.
이제 그만, 그만이라고
더러운 것들의 더러움과 또 비굴함을 온몸으로 소리
치며
갔지, 가슴은 부풀어 터질 것 같았어.
우리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서.
우리의 손으로 만든 기폭을 높이 들고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이제 아니라고
마침내 외쳤을 때, 우리
새벽이슬보다 곱고 순하게 빛났지.
빛났지 그날
쓰디쓴 굴욕과 알 수 없는 막막함의 멱살을 움켜잡고
혼신의 힘으로, 흔들리며
일어서 
폭탄이  되어 달려갔던 
그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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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 

산 이들 남아
흰옷 입고 절 올리니
하늘은 말게도 개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한평생이 아득도 합니다.
그 굽이굽이 돌아
당신은 내 앞에 누워 계시고
살아남은 우리는 또 목숨 이어갈 궁리를 해야  합니다.
많은 돈도 벌지 못했고
남부러운 벼슬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현고학생부룬신위' 작은 위패가 초라해도 보입니다만
사느라고 살아왔습니다.
아름답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영영 이별입니다.
다시는 손도 잡아볼 수 없습니다.
당신을 만나던 날 처음으로 큰절을 올렸지요.
희끗한 머리 가다듬고
내 남은 것 모두 모아
마지막 절을 올리오니
받으소서.
이제 우리가 무엇으로 또 만나겠습니까.
다시 만나들 어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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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이 끝 모르는 어둠의 깊이로부터
모진 눈빛으로부터
두려원 끝내 잠조차 들 수 없는 목 졸림의 악몽으로부터
또한 아끼고 싶은 더 많은 눈빛의 애틋함으로부터
그러나 손쉬운 사랑으로부터
빼앗긴 논밭들의 말라붙은 앙가슴으로부터
삭막한 얼굴과 햇볕에 바스러진 머리칼, 거친 두 손의
기억으로부터
루핑 지붕으로부터 창백한 얼굴들로부터
희망의 어디에도 없음으로부터
아득한 옛날의 푸르던 하늘빛의 기억으로부터
병든 육신가 때에 전 소매로부터
모든 추억으로부터
모든미소로부터
모든 부질없는 기대로부터
모든 따스함으로부터
모든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자유의 기억으로부터
아름다웠던, 그러나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로부터
속수무책으로부터 비명과 핏자국 옆에서의
아아 눈 뒤집힘으로부터
끝내 서로 믿지 못함으로부터
따뜻한 잠자리의 가시밭길로부터
고운 웃음의 저 소름끼침으로부터
저 유혹으로부터
철모르는 어린것들의 저 무구함으로부터
그 애틋함의 끈질김으로부터
죄지은 얼굴 피 묻은 손들의 뉘우치지 않음으로부터
아득함으로부터

오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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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훈(招魂) 
 ㅡ이을호에게

넋이여 돌아오너라.
모두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저 버려져 초라한 풀과 나무들
숨죽여 어두운 골목 서성거리는
풀 죽은 바람소리
듣고 있으냐.

머물던 자리에 온기 여전하고
헝클어진 머리칼과 땀냄새, 불타던 눈빛의 기억이 
그대 거기 있는 듯 생생하다.
여한 없이 큰 사랑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면
돌아오라 다시,
아직도 피 뜨거운 이들은 큰 근심으로 몸이 마르고,
그대의 사랑은 죽음에 닿을 만큼 단단히 익어야 한다.

그대 깊은 곳 눈 시린 속살
눈 있는 이들은 이제 보아 그 결곡함 알았으리.
그대 지상의 끈을 놓아
어느 어둠 속을 헤매느냐.
죽음도 삶도 아닌 곳으로
스스로를 흩어버리다니.

행여 쓰러진 자신이 부끄러워 선가.
우리가 하나씩 목숨을 업고 세상에 와서
이미 엎어지고 자빠지기를 밥먹듯 했다.
이제 더 무엇이 쓰러짐이며 부끄러움이겠느냐.
넋이여,
욕심이다.
부끄러움도 욕심이다.
그 욕심마저 놓고
돌아오너라.
그대를 위해 마련한 음식과 의복도
빛을 잃었다.
벗들은안타까워 흐느끼고 있다.
돌아와라 넋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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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

한 사내 걸어간다 후미진 골목
뒷모습 서거프다 하루 세 끼니
피 뜨거운 나이에
처자식 입 속에 밥을 넣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은 외로운 일
몸 팔아야 하는 것은 막막한 일
그 아내 자다깨다 기다리고 있으리
차소리도 흉흉한 두시
고개 들고 살아내기 어찌 이리 고달파
비칠 비칠 쓰레기통 곁에 소변을 보고
한 사내가 걸어간다 어둠 속으로
구겨진 바바리 끝엔 고추장 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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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의 춤
 ㅡ이애주님께

피가 튀네
선열 하여라 저 응어리
외마디와 안간힘의
목울대 퉁겨쳐오르는 이 푸른 힘줄의 절망이여
캄캄하네
쫓기고 쫓겨 마침내 끝 간 데
한 몸 더는 돌이킬 곳 없어
쓰러지네
쓰러지네 그러나
남은 한 뼘 목숨 모질게도 있어
꿈틀
먼 데서 오는 새벽 징소리에 들려
한 서린 뭇것들 신음 소리에 홀려 꿈틀
다시 꿈틀 일어서 흔들리며
몸 추슬러
다시 한번
청룡도 드는 칼로
제 배 제가 가른다
뿌려라, 저 불의한 무리들에게
정한 피, 저 욕심 많은 무리들에게 눈 흡뜨고

불꽃이 튀네
외마디와 안간함의
이 숨 막히는 절망의 외줄 타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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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년을 안고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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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에서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 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비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야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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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전상서

형님, 한심한 짓만 골라 저지르며 남의 덕에 밥 먹고 사는 저는
속 편한 소리 탕탕합니다
사람 사는 게 어디 돈만 가지고 되는 거냐고
떳떳이 살아가다 보면
밥은 굶지 않게 되어 있다고
배부른 소리만 씨도 안 먹게 지껄이고 앉았습니다
임마, 넌 이 새끼 고생을 덜 해서 몰라,
그러며 내게 말씀합니다
집구석 와장창 거덜 나고
형님과 나 대전으로 유학 나와
밭둑의 쑥 뜯어 국 끓여 먹고
눌어붙은 엊저녁 국수가락 몇 건져 입맛 다시며
학교길 시오리 걸어 다니던
중고등학교 자취 시절 말씀합니다
웬수 같지만 하나뿐인 동생인지라
내 수업료 먼저 주고 형님은 등교 정지 먹고
속 모르는 담임한테 뺨때기 얻어맞던 날은
분해서 분해서
독하게 참아온 눈물보가 터지더라는
그 시절 말씀합니다
가슴에 사무치는 그 시절 얘기
꺼낼 적마다 형님은 목이 메고
나도 눈물 핑 돌아
에유, 그만 됐어유, 합니다
그래두 너무 돈 돈 그러지 마유
형님은 돈에 포원이 졌지만
나는 돈에 디귿자도 진저리가 나유,
싸가지 없이 쭝얼거립니다
그러다 괜히 서먹해져 형님은 일어서시고
꾀죄죄한 동생 놈 꼬라지가 그래도 안쓰러워
눈물겨운 돈 일이만 원 부시럭부시럭 꺼내놓으며
야 임마, 너 담배 좀 어지간히 펴
한마디 쥐어박고 횡 나가십니다
형님의 자린고비 타령도 제 어여쁜 말들도
끝판에는 이 모양으로 다 도루묵이니
이게 바로 그 더럽고 지긋지긋하다는
동기간 정인 모양입니다

까짓 놈의 돈이야 번들 대수며 안 번들 별 겁니까
이 더럽고 지긋지긋한 것에 몸 푹 담그고 있으면
못 견디게 세상 살맛 나고 든든하고
아시겠지요, 그래서 저는 자꾸 어깃장 놓습니다
깐족깐족 형님께 달려듭니다
가끔은 형님도 그 재미에 억지소리 보태시는 줄
제가 압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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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보며

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때
그러나 눈 있는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 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한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는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 쓰림을 부둥켜안고
가거라 속 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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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1

그대로 하여
저에게 이런 밤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비까지 내려
오가는 사람들을 더 바삐 서두르고
우산이 없는 여학생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울상입니다
팔다리가 있는 짐승들은 모두
어디로 총총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기
몇 안 남은 잎을 바람에 마저 맡기고
묵묵히 밤을 견디는 나무들 있습니다
빛바랜 머리칼로 찬비 견디는 풀잎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하여
저에게 쓰거운 희망의 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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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2
  ㅡ'반고문전'에 붙여


아버지
저희가 캄캄한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대의 볕으로 자란 풀과 꽃
성한 목숨들이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개들이, 어둠 속에서 더러운 개들이
X 지를 홀딱 까고
아무 데에나
낄낄거리며 그걸 들이밀고 있습니다
어린 풀들은 소스라치고
차가운 시멘트 위에서
사금파리들은 다시 또 산산이 부서져
아뜩한 비명으로 하늘을 찢습니다
이 무량수겁 어둠의
추운 윗목 발치에
처자식 데리고 쥐새끼처럼 꼬부려 앉아
아아 숨죽인 제 통곡 덧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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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3

한강아
강가에 나아가 가만히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나 값싼 눈물 몇 낱으로
저 큰 슬픔을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큰 분노와 슬픔으로 흐르는 것인 줄을
진즉 알고는 있었습니다
한강아
부르면서 나는 저 소리 없는 흐름에게 무엇을 또 기대했던 것인지요
큰 손바닥과 다정한 목소리를 기다렸던 것인지요
나도 한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그 곁에 서서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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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4 
 
아버님, 안쓰러워 마십시오
누워도 잠 못 들어 뒤척거리고
선잠 들었다가는 소스라쳐 잠을 깨는
못난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불면증이라고, 자꾸 병이름 붙이지 마십시오
밤에 잠들지 못하겠습니다 아버님
제 어린 새끼들의 무구한 잠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저희보다 더 살기가 어려운
건너편 집 가장의 끊일 듯 말 듯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또 저는 지키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많은 사내들이 감기는 눈 억지로 뜨며
이 밤에 곳곳에서 깨어 있습니다
잠든 식구들을 애잔하게 지켜보며
또는 영영 걷히지 않을 듯한 이 어둠의 끝을 고대하며
혹은 기계를 돌리고 혹은 차가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습니다
저도 두렵습니다 밤은
시커먼 손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제 식구들과 병든 벗들을 길가로 내몰 것만 같습니다
잠들고도 싶습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밤은 저를 꾀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세상엔 소리 없이 깨어있는 많은 이들이 있어
비록 흐릿하지만 하늘엔 별들도 저렇게 반짝입니다
저보다 세상 오래 사신
아버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병이 아닌 줄을
아버님 너무 안쓰러워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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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강을 보며

멀리서 보면 고요한데
가까이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면
흐른다.
돌에 이마를 부딪치며
오만 잡쓰레기들끼리 얼크러져
서로 기대고 또 감싸 안고
피 튀기며 거칠게.
비켜서서 숨 돌릴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깊은 설움은 더 깊어 다스리고
처받는 신명은 소용돌이쳐 푼다.
간발의 틈도 없이
사정없이 부닥쳐
박살이 나면 다시 몸 추슬러  더욱 세차게.

삶의 이 진저리 나는 격렬함.
그러나 다시 멀리서 보면
한강은 백치같이 무심한 얼굴로
또 한 번 우리를 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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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의 한 아이에게       

춥지 않으냐.
외진 신작로 마른 먼짓길
오똑하게 혼자서 가고 있는 아이야.
해진 팔꿈치와 옷소매
찍찍 터 갈라진 네 조그만 주먹을 보며
꼬옥 옴켜쥔 낡은 책가방을 보며
내 가슴은  사정없이 무너지는데,
코끝에 성가신 콧물을 문지르며
씩 웃는 네 얼굴은 말 못 할 맑음으로 눈부시다

목숨의 소중함과 사랑을 떳떳이 말하지 못하여,
이제 내가 할 말은 
'춥지 않으냐'는 물음뿐.

추위와 가난을 썩 앞질러 야무지게 걸음을 옮기는
조금만 등에 대고,
네가 자라 더 거센 추위가 닥칠지라도
오늘의 이 눈빛 잃지 말고
힘차게 북을 치며 나아가라고
속으로만.
그러나 목이 터져라 나는 외치는데

들리느냐, 아하 우리의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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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길
죽음으로 닿는 길
피할 수 있다면
도리질 치며 그러잡을 그 누구라도 있다며.
저 길 
내 지나간 발자국 바람 속에 흔적도 없을
참혹한 절망과 자유의 길.
끝없는 잠들어 꿈속으로도
그러나 피해 못 갈 길.
차라리 이대로 죽음일 수 있다면,
새 한 마리 해거름을 비껴 나는데
내 몸부림의 길이만큼 뻗어 있는 길
피해 못 갈 저 헛된 갈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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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ㅡ1977년 영등포 구치소

너는 거기서 오고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나는 거기서 허전하게
나는 여기서 손 비비며

책 세 권을 넣어주고
너는 돌아갈 테지

나는 파리를 잡아 벽에 붙여놓고
장난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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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에라 이 천하에 무정한 놈아
글줄 쓴다는 자들 모두
사십 년을 그 타령으로 네 이름 염불했지 않느냐.

네놈이 사람  손으로 빚어진 것일진대
이토록 청맹과니 두억시니 시늉으로
일자  소식 없기냐.

다들 지쳐 이제 염불 소리 힘없고
듣는 이도 목구멍에 신물 난다.

달려가 
내 생이마빡으로 네놈  잘난 면상을 들이받을란다.
눈앞에 불이 번쩍
붉은 피 주르르
묵은 따지 우수수
사십 년 불감증 시멘트 거푸집을 우지끈 때려 부수고
너 아직 죽은 목숨 아님을 증거 하리라.

나 죽거든 너 살아라
이노옴 통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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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산모퉁이 잡초 욱은 길로
땡볕 맞으며 가네 흙투성이 늙은이 하나
황소 한 마리
새소리도 없네 바람 한 점 없네
저 풍경, 아무도 말하지 않네.
실한 팔다리들 다 어디로 가고
이 빠진 늙은 것들만
기침에 넘어오는 가래를 우물우물 되씹어 넘기네.
말하는 이 없네
세월은 홀로 저만큼 앞서가고
금 간 사발 몇 개 남아 있네.
땀 흘러
해진 샤쓰는 등에 붙었네.

=========6
+ 개나리

한 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러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소리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
 
몇 날 몇 밤을 그대
눈 흡떠 기다렸을 것이나
어쩔거나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4월 하늘
현기증 나는 비수로다
그대 아뜩한 절망의 유혹 이기고
내가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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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가 2

이 분을 어디에 풀까
광화문 복판에서 깽매기나 두들길까
길 가는 아무나 잡고 욕이나 퍼부을까
한강으로 나가 하나씩 돌이나 던져볼까
아흐 얼쑤 날라리 장단에 교보빌딩 쳐들어가 각설이짓
이나 해볼까

누가 날 속였나 오가는 사람들  눈여겨봐도
하나같이 착한 얼굴
사느라 힘들어도 고달픈 얼굴
웃고 찡그리며 바삐 지나가는데
누가 날  속였나, 어디에도 없는 죄지은 얼굴

어디에 풀까 나는 미쳐 돌아가는데
어디에 풀까 사람들은 어디론가 자꾸만 가는데
어디에 풀까 무서워  숨은 컥컥 막히는데
어디에 풀까 모두 다 선한 사람들
이 서대문 네거리
이 무서움 풀 길 없어 달아날
이 서대문 네거리
이 무서움 풀 길 없어 달아날
길 없어 분을 풀
길 없어
없어, 아아 어디에 있나 너
죄지은 얼굴 나약한 얼굴 폭력을 부르는 얼굴 피바람
부르는 얼굴 순진한 얼굴 무서운 얼굴 이미 지나간 얼굴
아흐 나는 미쳐가는데
내 사랑의 약속 만발하던 옛날 그 자리에 다시 섰어도
없어졌어라 길은 
미친 이 사랑 풀 길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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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림(徐林)이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서림이를 생각한다.
괴로워겠지
배신이 식은밥 물 말아먹듯 쉬운 일은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두려움 앞에서 자신이 미치게 모멸스럽
기도 했겠지.
가장을 기다려 풀 죽어 있을 아내와 새끼들 생각에
호적한 곳을 찾아 피눈물 쏟았으리.
낯 두껍게 뻔뻔스럽지 못하여
차라리 비굴을 택했던가.
삼강과 오륜의 허망함은 알았다 하나
아사리 판 세월에 지닌 건 다만 먹물 몇 방울.
거친 산도적을 틈에 몸을 던진 것은
사내의 호기가 아니라 도피가 아니었던가.

서림이를 생각한다.
그 비굴과 눈물겨운 교활함을 
마침내 비명횡사하는 서툰 배신의 끝을
욕만 해서는 안 될 일 같아서
개운해해서만은 안 될 일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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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한봄 졸리움 속에
그대마저 스러지고 나면 어쩌리.

푸른 보리밭 지나
가느다란 흙길 끝난 데 산밑
홀태바지 가랑이도 땀에 젖고
깨진 옹기 조각들 햇빛에 날 서네.

부황 든 그대 참꽃물 파란 입술 가리고
고개 돌리면 어쩌리.

죽어가던 이들의 파란 입술 가리고
고개 돌리면 어쩌리.

죽어가던 이들의 아득한 눈빛
지난겨울 하얗게 잦아들던 눈들의 비명이 아직 생생한데
가고 또 가서
돌아 못 오면 어쩌리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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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

내 벗은 어깨 위에
모양 없이 시든 오뉴월 흉년 꺽정 보릿대 위에
마른 쑥대 위에
보람 없는 여름 긴 한낮 위에 
노랑나비

길가에 앉아 끝내 내 못 간다 사랑아
네 웃음 얼굴마저 이제 눈앞에 흐리고
고개 들면 쏟아지는 허연 살비듬
파란 하늘에 얼비치는 낯익은 사내 하나
길가에 앉아 

굽은 어깨 위에
그리움의 녹슨 반쪽 거울 위에
짓무른 눈꺼풀 위에 눈물 위에
초라한 풀꽃의 늙은 이마 위에 덧없는 졸음 위에
노랑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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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도기차

기차가 가네 새마을호 특실로 가네
금테 안경 배 내밀고 먼 산 보며 가네
맵시 있게 산모롱이로 꼬리를 사리는 기차.

우리는 목 터지게 짖었으나
저 기차 자알 굴러가고
똥개야 악을 쓰건 까무러치건 결국 가고 말지만,

갈 테만 가거라 개 같은 기차야
가는 곳마다 가이 있어 또 짖으리.
수원 삽살이 대전 찐달이 대구 순천 전주 메리들 목포
워리 광주 부산 왕눈이들
내일모레 글피 그글피
대를 물려 짖으리라.

쫓으면 도망가고 돌아서면 되따라가
때리면 얻어맞고 똥 뿌리면 먹어가며
캥캥 컹컹 멍멍 왕왕
다성 합창 우리 짓는 법을

아직도 몰지각한 기차가 간다.
금테 안경 너머로 먼산만 보며
산모롱이 뒤로 급히 내빼는
가련한 기차
우아한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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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부장수

진눈깨비는 허천나게 쏟아지고
니미 
욕만 나오고,
어디로 갈까
평촌을 거쳐 옥동으로 가볼까.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앞에 밟혀오는데
즈어매는 이제쯤 돌아왔을지.

빈속에 들이부은 막걸리 몇 잔에
실없이 웃음만 헤퍼지누나.

어디로 가서
몇 개 남은 밥솥을 마치 멕이나.

바람은 바짓가락을 붙잡고 펑펑 울어쌓는데
꺼출하게 떨고 섰네.
저무는 길가엔 철 놓친 수레국화 몇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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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산

애잔하다 할까
죄스러움 그러면 덜할까
남의 산.

오랜만인데 막걸리나 한잔하자고 제법 호탕하게, 네가 넥타이도 매고 왔다시피 서울 가서 주눅만 들어온 것
은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너를 얕보듯 그렇게
한잔하자고 인사를 건네면
이제 여기서도 맥주를 많이 먹는다고 술며시 냉장고
문을 여는 
나의 서툰 손.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호적 초본 떼러 온 길에 잠깐 들렀다는 듯이 그렇게
곁눈으로만 너를 만나며.
이렇게 몇 해가 가면
참말 남남이 되겠다고,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
다고 생각하며 가슴이 저린
비겁한 나에게
두어 달 뒤에는 칼라텔레비를 하나 들여다놓을까 한다고
너는 떠듬떠듬 말하는구간.

이미 옛날의 네가 아니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네 앞에서
무어라 할까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고 너를 붙잡고
차마 통곡하지 못하는 나는
무어라 할까 네게 
버리고 온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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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 동네

내 고향 동네 썩 들어서면
첫째 집에는
큰아들은 백령도 가서 고기 잡고 작은아들은 사람 때
려  징역에 들락날락
더 썩을 속도 없는 유씨네 막걸리 판다.
둘째 집에는
고등도시 한다는 큰 아들 뒷바라지에 속아 한 살림 말
아올리고 밑에 애들은 다 국민학교만 
끄을러 객지로 떠나 
보낸
문씨네 늙은 내외가 점방을 한다.
셋째 집은 
마누라 바람나서 내뺀 지 삼 년째인 홀아지네 칼판집
아직 앳된 맏딸이 제 남편 데리고 들어와서 술도 팔고
고기도 판다.
넷째 집에는
일곱 동생 제금 내주랴 자식들 학비 대랴 등골이 빠져
키조차 작달만한 박대목네 내외가 면서기 지서 순경
하숙 쳐서 산다.
다섯째 집에는
서른 전에 혼자된 동네 누님 하나가 애들 둘 바라보며
가게를 하고
여섯째 집은
데모쟁이 대학생 이들놈 덕에 십 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내외.
옛 마을은 다 물속으로 거꾸러지고
산날망 한 귀퉁이로 쪼그라 붙은
내 고향 동네 휘둘러보면.
하늘은 더 낮게 내려앉아 있고
사람들의 눈은 더 깊이 꺼져 있고
무너지고 남은 부스러기들만 꺼칠하게 산다.
한 바지저고리
삭막한 바람과 때 없이 젖어대는 똥개 몇 마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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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에 대하여

내 뒷모습으로 온다.
담벼락에 기대 소피를 보고
부르르 떠는 내 취한 어깨로 온다.
오스스 돋는 몇 알 소름으로 온다.
멋대로 팔을 뻗고 잠든
딸아이의 납작한 코로 온다.
말려 올라간 종아리오 온다.
마른버짐  돋는 아내의 텅 빈 눈빛으로 온다.
내 애미 애비의 바랜 얼굴과 그 석자 이름으로 온다.
벗들, 벗들의 처진 어깨로 온다.
눈꺼풀 덮어 누르는 야속한 졸음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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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대하여
  ㅡ온산 주민들을 생각함

여기는 어디인가
끝없는 밤의 복판에 요사한 불빛 몇 점 반
짝이는 곳.
초조한 담배 연기 속에
걱정하는 식구들 얼굴 흐릿해 
몸 뒤척여 돌아놉네.
내 두 손 뒤틀리고 내 두 발, 내 온몸
그대 앞에 미친 듯 뒤틀리고 뒤틀리고,
진물 흐르는 이 몸뚱이로
차마 그대 만날 수 없네.
자식들 앞에 설 수 없네.
어디인가 이곳
사람이기 위해 병들어야 하는 곳
숨 쉬고 물 마시어 병드는 곳.
떠날 수도 없네 이 몸으로는
이따이 이따이
아파라 아파라
어디인가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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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역 풍경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검표원의 입가에도
냉차 장수 아줌마의 땀 배인 콧등에도
그늘에 죽친 막벌이 짐꾼들의 낡은 샤스 앞자락에도

지리한 여름 한낮
길은 땡볕에 녹아나고
땀 젖어 거치적거리는 사타구니와 늘어진 몸짓들
그 속에 기다림은 숨어 엿보고 있었다.
올림픽  속보나 실업은 풍년 소식
지나가는 소나기 한 줄금이 아니라

그 소식!
그 소식을 기다려
애가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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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길은 이제 끝났습니다.
아무도 아무 데로 가지 않습니다.
아무 데에도 아무 데가 없습니다.
길은 이제 끝났습니다.
식장에 선 남녀들이 아무도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깨질 그릇도 쏟아질 물도 이제 없습니다.
길은 끝났습니다.
일어선 사람들이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앉은 사람들은 일어서지 않습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깨려 하지 않습니다.
걸어갈 다리와 앉을 엉덩이가 끝났습니다.
누울 등과 뜰 눈이 끝났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이제 어떻게 사랑하나
두 팔이 있어 껴안을 수 있나
입이 있어 서로 핥아볼 수 있나
방이 있어 뒹굴 수가 있나
죽음조차 모두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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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기(殺氣)

이런 육시랄 살
벌벌 떨림,
하이얀 대낮이네 광화문 네거리.
내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단숨에 뚫고 내리꽃히는
총알 같은
대검 같은
땡볕의 이 눈앞 캄캄함.
외마디 비명 아니고는 비킬 곳
없어, 한 몸
가릴 길 없어
눈 뒤집하는데,

어떻게 가나
제발,
가만히 스며 지하도 지나고
유령처럼 육교를 스쳐 건너면
저 살기 어린 눈들 피해 갈 수 있을지,
아무데건좋아먼곳에닿을때까지만불을끝때까지만잠
자리에숨어들어눈감을때까지만
제발,

소용없이 이 피비린내,
버러지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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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길

어디로 가면 되나
내 살아 홀로 그대 만나러 가는 길

어디로 가면 닿는가
남녘으로 남녘으로만 가면 우리 만나는가
북으로 북으로 치달으면 만나는가
한 목숨 내가 버리면 우리 만나는가

피 젖은 헌 가머니에도 나도 가 누워
그대 묻힌 어느 시궁에 따라 묻혀서
한 시절 묵묵히 순한 지렁이 떼 키우고 나면
그러면 비로소 만나질 건가

아아 언제까지 이렇게만 살 수는 없어
그대 찾아 나선 길
나는 갈 곳이 없다
그대의 이름을 물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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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서 1

방언 기도를 올리는 자들아
잘린 혀 말 못하는 한으로
이 강가에서 나는 너희를 위해 울었다.
이교도에게 몸을 팔아
너희들 값진 패물과 향유로 치장하고
낯선 우상 옆에 엎드릴 때
배다른 네 형재들은 눈 덮인 벌판에 버려져 있었다.
너희들 하늘과 땅에 가득한 은혜를 입 모아 찬양할 때
너희 살진 포도밭 앞에 네 형제들은
보아도 볼 수 없는 너희를 위하여
눈물에 적셔 칼을 간다.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으로
차마 저버릴 수 없는 너희 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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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2

내가 기어코 너희를 멸하리라.
형제의 피가 제단 위에서 마르기도 전에
돌아앉아 단 포도주를 입에 붓는 자들.
제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첫닭이 울기 전에 거룩한 이름을 모독한 자들.
내가 기어코 너희 두 눈을 빼고 두 귀를 잘라 벌판으로
내몰리라.
벌판의 까마귀 떼로 하여 너희 염통을 쪼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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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서 3

나는 그대 눈부신 이름 부르지 못합니다.
몸 더러워지고 넋마저 바스러져
외마디 비명도 이제 내 것 아닙니다.
부르지 않아도
부르지 않아도 오실 줄을 믿습니다.
이 참담한 흔들림 사이에
그대 서늘한 눈매 깃들 것을 믿고 믿습니다.
부르튼 발과 깨진 무릎
어루만져주실 것을 믿고 또 믿습니다.

--------------
타령조

똥개처럼 우리는 꼬리만 사릴 것이냐,
저 넉넉한 비와 바람, 억센 추위와 따스한 봄볕, 숨죽인
채 기다리는 논밭과 야산들
다 주고 남 다 주고
찌그러진 냄비 바닥 멸치 대가리만 핥을 것이냐.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지쳐 돌아오는 길
식은땀만 허깨비처럼 흘러.
저물었나 우리도
어느덧 입은 단것에 맛을 붙여
아픈 이야기는 피해 가게 되었나.
딱하다 반도의  술 한잔이여.

땡볕 아래 뒤얼크러져
흐벅지게 온몸으로 비벼주지 못하고
우리의 사랑 맞닿아
저 광화문 한복판 번갯불로 후려 때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헤매기만 하다가
빈손으로 
지쳐 돌아오는 길.
변두리 포장집에 구겨져서
싸구려로만 울다 웃다 말 것이냐
비루먹은 똥개처럼 뒷길로만 돌 것이냐
숨어서만 울 것이냐
때 없이 숨은 턱턱 막히고
시간은 총알처럼 심장을 관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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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오늘은 
우리, 꽃이 아니어도 좋지,
잠조차 들 수 없는 가위눌림 속에서
우리는 울음을 삼키며 서로를 버렸다.
이제는 휴지처럼 구겨진 그날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지 않으리가.
새삼스러운 나약함인가
죽지 못하고, 차라리 죽음이지 못하고 비겁하게도 나약
함일까
치사한 불면증일까.
니기미, 하나 개판으로 좀 젖혀도 좋지 오늘은.
우리가 다시 그 네거리에서 만날 수는 없다 해도 친구여,
쉼 없이 타고 있는 우리의 피 속 독한 그리움 속에서
더 멀고 큰 약속 안에서
우리는 
뜨겁게 만나고 있는 것을.
오늘은 우리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긴장의
칼날 위에 짐승처럼
물구나무를 서도 좋지
짐승이어도 좋아.

============
시를 쓰며 1

아저씨 
쥐새끼처럼 치사하게 살고 싶어요.
시 같은  것이야 뉘 집 개아저씨들이 물어가도 상관 안 하고
살고 싶네요 불온하고 고상하게.

고급 향수 같은 불란서 영화 같은,
곱고도 아련한 시 쓰고 싶어요 천진무구하고 싶어요
환장하겠어요.

낙골 판자촌 날라리 공동변소에 똥 떨어지는  소리 같
은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고 싶어요.
싹 없애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만  살다가
쥐새끼처럼 밟혀 죽고 싶어요.

------------------
종로에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취했는데
어디로 가나
호주머니는 텅텅 비었고 차들은 저렇게 달려가는데.
어디로 가나
그리운 하늘은 다시 뵈지 않는데
여긴 어딘지.
끝나지 않은 노래가 마저 끝나며
어디론가 가야 한다.
그날의 종가아 지하철아
빛나던 우리야.
어디로 가나
연극은 끝났는데
우리는 가야하는데
우리는 어디로든 가야  하는데.

---------------
친구에게

아아 이대로 떠날 수는 없나.
가진 것 다 버리고 
친구도 적도 웃음도 울음도 없이
펄펄 뛰는 가슴끼리 만나는 땅으로
미쳐 떠날 수는 없나.

그늘로 숨어 다니며 아니라고 아니라고 외쳐봐도
남은 것은 부끄러움.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지고 자도 자도 가위만 눌리는데
저마다 옳다고 지조 높은 개들이 새벽을 짓어댈 때
죄 많은 우리는 차라리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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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병사

껌 짝짝 씹으며
황인종 훑어보는
거기, 검은 친구
다리 긴 그대,
고향이 어디인지 장가는 들었는지
부모는 무얼 하는 양반들이며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
는지
알 수 없다면
체신없이 까불어대는 그대 긴 다리와 커다란 신발이
아무래도 비애인 것만 같애 비애인 것만 같애.
수말처럼 싱싱한 팔다리를 가지고
그대의 먼 조상들은 얼마나 당당한 그 땅의 주인이었
던가.
조상의 옛 땅 어디에 두고
얄궂다, 남의 나라 주둔군으로 팔려와 유에스 아미 금색
수도 천박한
잠바 속에 구겨져 추잉 껌이나 씹어대고 있다니.
노려보는 내 눈빛이 조금은 불편한가.
늦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다오.
가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돌려주고
냄새나는 빠다 통과 그따위 잠바 때기 돌려주고
차라리 그대의 가난과 슬픔을 들고
빈손으로 찾아오라.
우리도 우리의 남루와 상처를 부끄럼 없이 들고나가
그대 맞으리니
마주 잡을 우리 두 손을 얼마나 눈부시리.

============
내 친구 이군

늙은 어머니를 업고
뼈만 남은  사내가

간다 
모질고 갈증 나는 세월을 등에 업고
산갈대 들꽃도 무심한 남도 땅
간다.

뼈만 남아 간다 사내의 여자야
울지 마라.

졌지만 
고층 아파트 시멘트벽에 기대어
외롭게 외롭게 쓰러졌지만
간다
뼈만 남은 사내
때에 전 천  원짜리 몇 장.
혁명도 버리고 긴긴 몸 쓸 꿈 숨 막히는 여름 다 버리고
간다 그 깊고 아득한 땅
몸 누이러,
아니라고, 우리는 아니라고 소리치며
사내의 여자야 울지 마라.
돌아올 것을
늙은 어머니 등에 업고 흙먼지 헤치며
펄펄 살아
다시 돌아올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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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비에나'

술집 '비에나'
친구들과 들어앉아 마시다가
앞에 앉은 백 번 아가씨의 큰 눈에서 보았다.
비엔나처럼 생긴 의자와 비엔나처럼 생긴 조명등 비엔
나처럼 생긴 칸막이 속에서
나도 비엔나 시민이 되어 우아하게 술을 먹다가
어쩌다 실수하여 나는 그만 보았다.
백 번 아가씨의 설움을 보았다
나의 것을 엿보고 있는 그녀의 설움을 보았다.
나는 왜 모르고 있었나
비엔나는 기껏해야 이 땅의 술집일 뿐인걸.
그 앞에서 왜 나는 피에로처럼 꺽꺽 헛웃음만 웃었나.
나는 왜 모르고 있었나
비엔나는 기껏해야 발음하기 매끄러운 이 집 간판인 
것을.
초미니 제복 옆구리 터진 실밥 새로도 비어지는 백 번
아가씨의 설움은
비엔나가 아니라
비엔나가 아니라
이 땅의 제품인 것을.
비엔나처럼 요리된 김치를 떨리는 맨손으로 집어먹으며
그녀와 나의  설움이 맞닿는 거대한 뿌리를 보았다
술값 비싼
술집 '비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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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변기 앞에서

안 된다
저 뻔뻔스러운 그릇 앞에서
져서는 안 되지.
어지러워 대가리를 쑤셔 박고 바닥에 고꾸라질지라도
양놈 사타리처럼 허여 멀쑥 웅큼한 저 물건을 붙잡고
무릎을 꿇을 수는 차마 없는 일.
사기성 농후한 저놈
이 땅의 살진 거름 다 먹어치우는 입 큰 저놈
김치찌게 쇠주 한잔에 얼근한 이 설움을
퀴퀴한 땀냄새 갈증에 찌들어진 이  사랑을 토악질을
저놈 알겠어.
이 똥 저 똥 다 먹어 챙기고
구린내 지린내 날 틈도 없이 촌놈들 뒤퉁수 후려치는 
우구르르 쏴아 소리,
입 싸악 닦고 앉아 있는
에라, 이 교활한 놈,
안 된다 저 물건 앞에서는
마려워도 참는 것이다.
울컥울컥 넘어오는 것들을 되씹어 넘기고
찰찰 물 고인 저 뱃속에다
우리도 교활하게
손이나 설렁설렁 씻고 나오는 것이다
입 쓰윽 닦고 그냥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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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기다리다       

허깨비 떠돈다.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캄캄한 밤만 있네 끝없는 악몽만 있네
막다른 길만 있네.

머물지 않으리라 머물 곳도 없는 땅.
어둠의 한끝에 매달려 가위눌려 나는.
이제 부르지 않으리라. 부를 이름도 끝난 땅
그이후 목메일 흙 한 줌 없는 땅.
서울 막다른 길 여기는 영등포
차가운 역 광장 바닥에 누워.

별빛이 아니네.
사라진 우리의 꿈도, 뜨겁던 우리의 손잡음도 아니네.
기다리는 것은
내 이름, 허깨비로 떠도는
내 이름이 돌아오기를
돌아와 이 육신을 불러주기를.

===========
+ 조율(調律)

1. 사내의 말
기다리다 기다리다
문설주 비쩍 마른 등걸에 피 배어 나오게 기다리다
깜빡 내가 죽으면
저만치 문밖에 그대 신발을  신고
내가 오네

2. 유혹
내 마법의 요령 소리 짤랑이면
그대의 잠은 아득히고 깊어지고
어느 물 사내의 몸 냄새 가득한 그대의 
꿈을 꾀어
나는 거울 속으로 달아난다
향기로워라
산호 수풀에 그대 넋을 뉘어두고
해초 묻은 맨발로 잠 속에 숨어든다
그대는 내 꿈을 꾼다
덧니와 다친 손가락과 허리를 꿈꾼다

3. 배신
그중 긴 손금 하나가
내 손바닥에서 기어 나와 지네가 된다
그대의 긴 머리칼 하나
꿈틀 따라 일어서 지네가 된다
빛나는 뻘건 등이 
유월 청청한 하늘에 섧게 가 박힌다

4. 불꽃
사내아이를 밴 여자는 뱀이 두렵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두 손이
뒷걸음치며 뒷걸음치며 뱃속의 아이를 부른다
핏빛 이름을 가진 아이를

5. 섬
보름달이 구름 속에서 푼다
얼마나 귀여운 짐승을 하나씩 낳아
작약도 모래벌판에 뉘어두고
저는 돌아가 고달픈 머리를 산에서 쉰다

오월에 죽은 내 애인은
그 참한 맨발로 종일 물가를 첨벙 대곤 했었다

저승의 어느 바다에도
이맘때 해당화 하나 몸 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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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ㅡ 여자의 말

내 뜰에 내리던 비가
대문을 넘어 사람들 오가는 행길가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내려요.
그대가 돌아오면 갈아입힐 옷가지 몇 품에 안고
손 비비며 손 비비며 기다려요.
저번 날은 강 복판 흐름 위에 앉아 흘러가시더니
날 못 보고 혼자 강물 되어 흐르시더니
이제쯤 바다에 닿으셨나요.
지쳐 돌아올 그대를 위해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더 머리를 빗어요.
열 번도 더 마당을 쓸어요.
내 나무들은 밤마다 강가로 걸어나가
푸르르 푸르른 울다 돌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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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잔

들게,
세계의 사내들이 강가에 모여
웅얼거리며 웅얼거리며 제 어머니를 찾는데
어머니의 자궁 속에 남아 있는 탯줄을 찾는데
자, 한잔
여자들은 남아  빈집 지키고
여자들은 긴 치맛자락 아래 외간 바람을 숨겨들이고
여자들의 꽃밭엔 꿈결처럼 목련이 지고
오, 익사한 사내들의 목숨은 차례로 바람이 되어 강을 
안고 돌아오는데
몸은 강가에 묻고 유월  하늘을 바람으로 돌아오는데
누구를 위해 둥근 술잔인가
붓게,
사내의 여자들은 입덧하고
바람이 닿기도 전에 목련이 지네
여자보다 고운 자네여
자,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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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지내기 

1
고즈넉이 기다리마
치통을 앓듯, 치통 뒤에 오는 어지럼증을 앓듯
힘센 바람이 내 수줍은 눈꺼풀에 닿아주기를.
기다리마
처녀인 내 꿈이 깨어나기를.
자정 넘어
길가의 전붓대가 두 눈 번쩍 뜨고 걸어오기를.
걸어와 뜰 앞 사철나무 곁에 멈춰 서면
비로소 아침 되기를.

2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풀잎의 밤
손금 사이에서 길어 올린 물로
어머니인 땅은 새로운 식탁을 준비한다.
포식을 끝내면 나는 또 당신의 손금 속으로 들어가 잠
드는 것이지만,
웬일인가 처녀인 어머니
당신의 흰 머리칼이
피 속에 섞인 눈물처럼 이제야 내 잇몸에 저린 것은.

당신의 어는 아들도 먼저 말하려 하지 않는다.
해사하게  꽃내 설레는 바람이
어느 풀잎도 반갑자 않다.

3
들어야 하지
강가 여뀌 떼 푸르르 떨며 그늘로 그늘로 전해준 소문.
사내란 사내는 다 산으로 가고
저 소리,
누군가 하나는 남아 앓아야 하지.
이마에 듣는 빗방울이 마침내 날 버리고 땅으로 스미
는 것도,
죽은 것들 다 살아 술 취하는 밤에
홀로 나를 어둠 속에 남기는 것도 다 저 소리, 저 소리
때문.

사내들은 죄다 산으로 가
돌 베고 드러눕고
남아 지키는 내 얼굴도
졸음 속에 듣는 허무한 약속.

차라리 강가로 나아가
나도 거친 종아리로 푸르르 푸르른 울면
그제야 저 소리,
내 치통 속에서도 무엇인가 반짝이게 하여
편안히 날 채워줄까.

4
저 사내,
죽어서도 산 것처럼 걸어가네.
강물처럼 곳곳에 그림자 끄을며 걸어가네.
사내의 여자야, 덮쳐 물어라  저 모가지,
불면의 눈썹 떨어지면 붉은 꽃이라도 필라
참았던 기침이 이슬처럼 이라도 맺힐라.

저 사내 수상하다,
저녁마다 강가에서 떼죽음 하고
아침이면 부끄러움도 없이 다시 눈뜨고
쫓기듯 쫓기듯 걸으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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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위하여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강의 잔해만이 초라할 뿐
시는 쓰여지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슴에 강물이 고일 때를
강물이 몸을 일으켜 제 아랫도리를 굽어볼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혼자 떠나는 강물의 뒷모습을
떠난 강물이 남긴 발자국들을
그 발자국에 남아 잠든 새끼 강물들까지를.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떠난 강물을 만나러.
대신 강물이 되어 비우고 간 자리에 눕지 못한다
새끼 강물을 떼지 못한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
시가 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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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저 길로 간다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아래 물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도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 한 무더기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는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 울음 울며 굴러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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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2반 교실에서


5학년 2반 여자아이네 교실 오른쪽 벽
기억하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사내아이 슬픈 눈
하나가 뒷짐 지고 하늘을 보던 액자 하나.
금모래 뜰 갈잎 숲으로 나를 불러 나도 그림 속으로 좇
아 들어가 뒷짐 지면, 슬프게 하늘 보면,  강물 소리도 날 따라와 저희 엄마 누나 생각 얼굴 흐려져 차라리 눈감고
흐르데.
5학년 2반 여자아이, 땋아 내린 갈래머리 꿈처럼도 흰
살빛으로 액자 속 들여다보다가, 강변에 사는 나를 못 알
아보고 조개껍데기만 주워 들고 돌아가면, 나는 소리소리
지르고 몸부림치고, 그래도 뒷짐 진 사내아이 꿈쩍 않고
의젓하게 강변에 살데, 강변에 비 내리는데 , 비 내려갈
잎 소리 교실에 그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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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에 다녀오며

캄캄한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며
철썩철썩
물소리 들었다.

멀고 먼 신작로 따라
너를 생각하며 나는 허공으로 불을 비추는데 
어디서 너는 하늘을 보느냐.

저 불빛 별과 별 사이를 끝없이 돌아서
훗날 이 산골 물소리로 살아와 설렐 때,
너도 이곳을 지나다가
내 불빛을 알아보고 얼굴 붉힐까.

외갓집에 다녀오는 길
철썩철썩 네가 비춘 불빛 만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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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로 가는 길      

그에  내 이 길로 가네.
이 길 끝까지 나아가
원통한 죽음들
하나씩 이름 불러야 되겠네.
그 이름 불러 내 목청 터지고
정한 피 다시 흘러야겠네.
이 땅에 큰 근심 끝없다 사람들아.
개망초꽃 하나도 왠지 적막하고
꽃술 밑엔 불길한 그늘
내 그에 이 산길 타네.
벗들 서로 말없고
바람 함께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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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戀詩)를 위한 이미지 연습

1. 고백(告白)
골목을 돌아 나왔다
바람을 죽이고 
바람의 흰 알몸을 죽이고 대신 바람이 되어 돌아 나왔다.
죽은 머리칼 하나가 암호처럼 이마에 붙어 서서
나를 흔든다.
머리칼은 꿈틀거리며 슬퍼하라 슬퍼하라 말한다.

슬픔은 꿈속에서나 오는 것이라 하기에
나는 흔들릴 때마다 넘어지려 애썼다.
넘어져  잠들려고 애썼다.
넘어져서도 이젠 어릴 때처럼 울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야 몰래 울었다.
머리칼도 소리 죽여 따라 울었다.

서투르게 잠든다.
바람을 만나 이 알몸을 돌려주리라. 이 머리칼을 돌려
주리라.
하나 아무도 내게 빈손을 보여주지 않는다.
꿈속에도 나는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 나오고
그러다 비가 되어
아무 집 담장에나 무심히 얼룩진다.
비로소 바람은
담장에 분다.

2. 우산 속의 꿈
이리와
남루한 우산 속에
우리의 두 손이 부딪치도록.
저것 봐, 우리의 눈빛이 빗물에 씻겨가는 걸.
한데, 우리의 발자국 속엔 무엇이 고여 잠시나마 빛나
며 남아 있는  것일가.

잃어버린 온갖 것들은 풀잎 위에 찬란히 반짝이는데
뒤에 숨어 우리가 만나는 것은 부끄러운 졸음뿐.
숨어야지 우리는
우산 속으로.
숨어, 저 빗속에서도 우리의 맑은 모음을 거두어들이고
매끄러운 허리를 그대에게 보여줘야지
그대의 흰 이를 옆구리 연한 살점 위에 얼마나 아프게
느껴보고 싶은 내 몸인데.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저 작은 빛다발이 기어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
마지막 잠자리를 밝혀주다가
결 고운 머리카로 우리의 꿈속을 저도 꿈꾸며 헤집고
다니려나.
우리 두 손이 닿았던 자리에 남은 저릿한 아픔, 스러져
잠들지 못하는 저 아픔은
이제 누구의 것이 되어 빛보다 밝은 어둠으로 빗속에
서 있는 것일까.

내 추운 이마가 그대의 가슴에 닿을 때
보인다 우리의 뒷모습이
버릇처럼 팔을 젓다가
저녁이면 빈 바다만 하나씩 안고 돌아눕는
우산의 뒷모습이.

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조가 다가오는 인천 뻘밭에
옆으로 가는 새끼 게 되어 만나랴.
갑각의 등은 잠시 벗어두고 속살낄리 만나랴.
그렇게 어우러져 꽃불 틔우고 살과 피 한테 엉켜 한 이
불 덮으면
벗은 우리의 등이 시럽지 않으랴.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서로 불러도
우리의 등에는 인천 뻘밭 찬비 내리고,
두고 온 껍데기의 울음소리에
부끄러우리. 잠이 깨도 꺽지 않을 이 목마름.
신탄(新灘) 강가에  두 마리 모래무지 되어 만나지.
한 모래 먹고 한 물 마시고
종일 꿈꾸는 얼굴로 만나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둘 다 죽어버리면
빈 강은 남아 외로워할 거다.
아하, 바람처럼 소리를 낼 거다.
뚜벅뚜벅 말을 할 거다.

흘러가자 우리.
물이 되어 흐르노라면
지난날 흘리고 온
우리의 목소리와 몸짓들도
함께 젖어 흐르겠지
그 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만나
부끄러움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키워 저 어둠 속으로 또 흐르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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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나서는 두 사람을 위하여  
 ㅡ장기영에게

너희들 
모두 이리 와서 보아라.
춥긴 이 겨울에 펄펄 뛰는 두 가슴이 만나
손 맞잡고 시집 장가가는 것 좀 보아라.
아직 사랑을 모르는 조급한 사람들아
눈물의 뜨거움과 기다림의 끈끈함을 아직 모르는 사
람들아
모두 이리 와서
이 사랑을 보아라.
모진 세월 슬근슬근 톱질하는
이 슬기 좀 보아라.
한기는 으슬으슬 뼛속을 파고들고
돌아봐도 어두운 세상 겁만나는데,
서로 감싸 안고 내딛는 이 걸음이 보퉁 일이냐
빙판 위로 솟는 불꽃이 보통 일이냐.

세상 거친 굽이 팍팍하게 넘는 사람들아
모두 이리 와서 이 사랑을 보아라
이 탄탄한 뿌리를 보아라.
똥개들은 짖어대도 슬슬 떠나는
이 기차를 보아라.

_____________ *63

그날
영결 
자유
초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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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
목숨의 춤
딸년을 안고
주왕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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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전상서
한강을 보며
밤에 쓰는 편지 1
밤에 쓰는 편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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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3
밤에 쓰는 편지 4
다시 한강을 보며
옥동의 한 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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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통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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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사랑가 2
서림이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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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
애도기차
월부장수
고향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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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동네
설움에 대하여
어둠에 대하여
동인천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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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가는 길
예언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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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2
예언서 3
타령조
그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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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며 1
종로에서 
친구에게
흑인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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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이군
술집 '비에나'
양변기 앞에서
이름을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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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
기다림
자, 한잔
밤 지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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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위하여
눈물이 저 길로 간다
5학년 2반 교실에서
외갓집에 다녀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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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로 가는 길
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
먼 길 나서는 두 사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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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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