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술 번쩍 깨리
두고 온 이들 떠올라 목은 메아리
밥 한 그릇의 묵묵한 의관정제!
그 곁에서
흩어지는 몸 겨우 추슬러봄
풀린 눈 다시 힘주어 뜨고 무릎 꿇어봄
복받쳐 오름이여
오오 나는 죄 많은 사람이로다
저 흰밥 고봉 너머 고향의 강물 넘실대고
낫질하던 팔뚝들
적적하게 돌아눕는 노모의 좁은 어깨
대체 나는 어디에 엎질러져 있단 말인가
돌아앉아 담배만 빨고 있는 굽은 등
밥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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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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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숙 2
몸이 있으나 몸을 부려둘 공간이 없다 그들에게는
소비할 공간이 없다 먹고 죽을 공간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발을 두나 머리를 두나 먹을 입과 담아둘 위장과 배설할 항문을 어디에 두나 똥은
또 어디에 내려놓나
모든 가능 공간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은
존재일 수 없음
그러므로 그들의 시간도 꽃필 수 없음 나프탈린처럼
또는 유령처럼 생으로 졸아들다가 증발한다
그러니 그들의 시간도 튀긴 구정물처럼 길가 담벼락이나
애꿎은 바지자락 같은 곳에 묻어 오갈들 뿐
그 떳떳하던 공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정말로
그 싱싱한 공간들을 다 먹어치운 것인가 소문처럼
그 착한 공간들을 어디에나 똥 눠 치운 것인가
마이너스 공간에서 반(反)물질을 소비하며 그들은 있다
아닌 공간의 그들을 인 공간에서 보면
없다, 떼먹은 공간을 변제하고 그들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는 오직 게워냄에 있다 제 안을 밖으로
뒤집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운다 제 목구멍을 제 내장을 제 항문을 항문 바깥의 우수마발(牛搜馬勃) 장삼이사 돗긴갯긴을 피눈물을 마지막으로 게우는 제 입까지를 게운다
구강에서 항문까지 속통의 안팎이 홀딱 뒤집힌 채
그들은 있다, 있음인 체해본다 한사코
그들은 완성이자 죽음인 블랙홀이다 모든 공간은 몰수 되고
우리는 그들의 내장 위에 붙어있다
우리는 그들이 게워낸 공간 위에 다시 게워져 있다
우리는 그들의 항문을 지나 그 다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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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필(遺筆)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인 중지마다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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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긴 긴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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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상
영정을 고여놓고
떡 고기 전 괴고
조율시이 홍동백서 진설하고
메 올리고 삽시(揷匙)하고 나서
땅 땅 땅 세 번 정저소리 울리고
유세차 축도 읽고
일곱살짜리 상주
꾸벅 절하고 잔 올리고
미망의 여윈 아내 울먹
절하고 잔 올리고 큰 동생 절하고
친구들 하나둘 절하고
막내여동생도 잔 올리고
밖은 어느덧 어둡고
안개비 깔리고
그대 육신 이제 흙 속에서
많이 상했으리
잘 가라 그대
이승의 마지막 밥이니
배불리 들고
술 취해 흔들흔들
잘 가라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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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L
덧없다고 말하네 저 바람이
늙은 부랑자의 웅크린 겨울 꿈자리 한구석 어디
두고 온 어린날의 추억
어머니 앞 치맛자락 냄새에 잠이 깨던 그 새벽,
그런 새벽은
결국, 아득히 흘러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저 바람과 눈보라의 길이 말하네 이제
차갑게 이마에 와닿는 시골 버스와 유리창이 말하네
이 끝없는 길 위에 찍힐 점 하나로도 남지 못한다고 덜
컹거리네
세상은 변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네
아이들은 자라
수염자리 거뭇한 낯선 얼굴이 돼도
흰칠하던 어른들은 하나둘 떠나갔다네
저 눈보라 죽음의 길 십 년 백 년을
걷고 또 걸어, 우스워라, 다시 제자리
감옥과 무덤과 증오의 길
아아아아 게 누구 없소! 거기 누구 없소! 소리쳐봐도
있은들 무엇이겠냐
절망으로 칠갑한 너와 같은 자
눈썹에 수염에 혹한의 고드름 달고 제 부모 처자 눈 속
에 까마귀밥으로 장사지낸 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육신 하나 지고 갈 곳도 머물
곳도 땅위에는 없는 자
바랜 흑백사진 속의 풍경과도 같이
저 끝없는 눈보라의 시간이 묵묵히 말하네
모든 길은 죽음 속에 갇혔노라고
말하네, 지상의 길은 사라졌으니
갈 테면 새가 되어 날아가라고
*YOL(길)은 터키의 윌마츠 규네이(Yllmaz Giney) 감독이 1982년에 만든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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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행
내 딸년은 제 사촌들과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슬슬 이 땅 떠나 이륙하고
손바닥만한 창으로 엄마! 아빠!
소리치며 빠이빠이 하고
밑에 남은 부모 일동들도
새끼들 얼굴 창에 비칠 때마다
'오냐 잘 댕겨온나' '편지해라'
같이 소리 지르며 손 흔들어대는데
한 바퀴 돌 때마다
열심히 고개 내밀고 에미 애비 찾아 쌌는
그것들 보니
하이고야, 제법 그럴듯하게
코 찡하고 가슴 써늘하더라.
그러다 슬며시 겁나더라야
부산행 서울행보다
뉴욕행 파리행 타겠다고 떼쓰는 저것들
나중에 참말 뉴욕행 파리행 해가지고
오도 가도 안 하면
그때 심정 어떨까나
어디다 말도 못 하고 걱정되더라
부산 금강공원
500원 짜리 뺑뺑이 비행기에
딸년은 실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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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 고무신 옮겨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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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평장
세 개뿐인 손가락이 민망하다
면봉과 일회용 밴드뭉치를 들고
천 원이요 외쳐보나
사는 사람 적다
땡볕에 눈이 따갑다
도토리묵 과부 윤 씨가
같이 한술 뜨자고 소릴 지른다
묵국수를 말아내는 윤씨의
젖은 손엔
생기가 돈다
떨이옷 김씨가 농협 모퉁이에서
전대를 철럭거리며 쫓아온다
무친 닭발과 소주를
양손에 들었다
장사 참 어지간하네
차양모자 밑으로 땀을 흝으며
연신 엄살이다
잠긴 목에 거푸 몇잔을 부으니
나른해진다
받지 않는 줄 알면서도
번번이 지전 두어 장을 내밀어본다
윤 씨의 환한 팔뚝이며 가슴께로
애써 외면하며
다시 거두는 몽당손이 열쩍다
내일 장에는
도루코쎄트나 칫솔을 더 떼어가나 어쩌나
해는 아직 길고
한 보따리에 천 원
문득
한번
소리를 돋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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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가
1
여뀌풀처럼 강가 사랑 퍼렇게 자라고
철 지남 멱감고 푸르 동동 소름 돋은 아이들은 한 알 오디
따라오지 마 물귀신 어머니 검푸른 입술 새빨간 치마 입고
따라오지 마
아이들 돌아가 배탈 앓고
고추 내놓고 설사하는 뒷간 후미진 곳에
물귀신 어머니 긴 손톱 눈물 글썽글썽
따라오지 마
우리는 푸르청청 하늘에 별빛 귀신 푸르 청청 강변에 여뀌풀 귀신
푸르 청청 강가에서 어머니 젖줄 찾는 사랑 사랑 사랑귀신
2
얘들아 얘들아 문 열어라 내가 왔다
차마 못 감은 눈 차마 못 뗀 걸음
무주 허공중에 둥둥둥 떠돌다가 아득한 황천길 목이 메어
에미가 왔다
문 열어라
3
햇빛 보고 자랐소 별빛 먹고 자랐소
산에는 독사풀 강가에 여뀌풀
우리는 다 죽어서 사랑귀신 되었는데
말라붙은 젖가슴 젖은 누굴 주고
비녀는 누굴 주고 머리칼은 천만 갈래
돌아가소 어머니
문설주 마른 등걸 피가 배어도
밥 한입 못 준 엄마 젖 한입 못 준 엄마
기다리다 기다리다 내 살 베어 내 먹었소
푸르 청청 하늘엔 별빛도 좋아라
가소 어머니
다시는 오지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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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
ㅡ마구간 시절
신용카드 한 장 변변찮은 헌털뱅이들이다
헌털뱅이 파카나 걸치고
이번엔 누구를 약 올려줄까
눈에 개구가 반짝반짝 올라서들 온다
개구진 헌털뱅이들은 화투도 반은 입으로 친다
판에 오천원 내기 바둑이 하도나 꼬수워
낄낄낄 어쩔 줄을 모른다
구경하는 치들도 낄낄낄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쇠죽 쑤는 아랫목인 듯
그 낄낄낄 위로 모두 같이 등을 지진다
푹 삶은 누룽지처럼 서로를 한 대접씩 마시고
속을 데우는 것이다
오늘도 수세미수염에 부스스한 머리들을 해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담배 냄새를 구수하게 풍기며 이 어둑한 구석으로
옛날 아버지들처럼 모여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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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가을 빛 부신 산길에
꿩 한 마리
아이는 외조모 손을 잡고
재를 넘는데
꿩 ㅡ 꿩 ㅡ
부서지는 햇살 너머로
목이 매는 식구들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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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정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할 사람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 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은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일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깔때기가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 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 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 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서 다리 긴 귀뚜라미처럼 살았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 달에 오만 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 초본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은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 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을 하지는 않겠다.
*김태정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오백만 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았다. 그의 넋은 미황사가 거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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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근
너무 무서워서 자꾸만 자꾸만 술을 마시는 것.
그렇게 술에 절어 손도 발도 얼굴도 나날이 늙은 거미같이
까맣게 타고 말라서 모두 잠든 어느 시간 짚검불처럼 바
람에 불려 세상 바깥으로 가고 싶은 것.
그 적의 어느 으슥한 밤 쪽으로
선운사 동백 몇송이도 눈 가리고 떨어졌으리.
받아주세요 두 손으로 고이
어디 죄짓지 않은 마른땅 있거든 잠시 쉬어가게 해 주세요.
젊은 스님의 애잔한 뒤통수와 어린 연두빛 잎들과 살구
꽃 지는 봄밤 같은 것을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것이니까요.
*시인 박영근은 전북 부안 사람으로, 다섯권의 시집을 남기고
2006년 5월11일(48세) 세상을 떠났다. 눈물과 노래가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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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우물
늙은 거미처럼이라고 적는다.
버려진 집에 뒹구는 이 빠진 종지처럼 이라고
서리 덮인 새벽 둑방 길처럼
섣달 저녁의 까마귀처럼이라고 적는다.
폐분교의 엉터리 충무공 동상처럼
변두리 차부의 헌 재떨이처럼이라고
찾는 이 없는 옛 우물과
오래전 버려진 그 곁의 수세미처럼
문을 닫고 힘없이 돌아서는 처용이처럼이라고 적는다.
선득 종아리에 감기다 가는 개 울음소리처럼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이라고 적는다.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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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소리
알이 아홉 달린 대추나무 단주 하나
어디서 덕원 수좌가 훔쳐다 나를 주었는데
딩 딩 딩 맑은 소리가
마음 안으로 울려오는 것 같아
여자를 만날 때도 술을 먹을 때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쪼물거렸는데
어느날부턴가
아무 소리 안 들린다
나는 얼씨구
비로소 개잡놈이 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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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뒤에 칼을 감추고 나는
계면조 뒤에 핏발 선 눈을 감추고 나는
비겁하게도
비겁하게도
사랑을 말하네
역수(易水)를 건너던 자객쯤이나 되나
비장의 이 허장장세
칼은 이미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네
있는지 없는 지도 다 잊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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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 바쁜
바쁜 너는 무섭다
바쁜 너는 성난 사람처럼 보인다
너는 땅을 팍팍 걷어차며 걸어간다
너는 발가락과 뒤꿈치와 종아리의 힘줄과
무릎뼈에게 감사할 겨를이 없다
너는 '급한 일이니 힘들겠지만 같이 좀 애써다오'하고
다리에게 발에게 신발에게 땅에게 바람에게
부탁할 틈이 없다
오직 너는 바쁘고 바쁜 너는 무섭다
너는 한대 올려치러 가는 사람처럼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너는 마침내 한 대 올려친다
코뼈가 휘고 턱이 금 간 사람은 울 것이다
네 손가락들과 팔도 아플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주먹에게도
미안해할 틈이 없다
중차대한 일로 바쁜 까닭에
맞은 유색인 사내의 치욕과
그의 가난한 아내와 못 배운 부형들과
땟국 흐르는 그의 자식들의 설움을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너는 세계를 좀 더 안전하게 지켜야 하므로
사실을 말하자면
네가 바쁜 만큼 세계는 흔들리고,
세계가 불안해 너는 또 바쁠 것이므로
바쁨의 명분은 영원히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바쁨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바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 얼마나 당당한 일인가
바쁘기 위해서는 얼마나 바쁘게 애써야 하는가
얼마나 무섭게 애써야 하는가
바쁘다는 것은 고독한 일 그러나 너는
다행히 울 줄 모른다
바쁜 너는 밤 숲의 쏙독새 울음을 들어서는 안된다
봄 산의 애기똥풀꽃을 보아서는 안된다
늙은 어머니의 가늘게 코고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된다
비애와 평화와 휴식은
바쁜 영혼을 좀먹는 병균과 같으므로
먹어치우기 위해 밥은 있고
쉬어치우기 위해 숨은 있을 뿐
너는 오늘도 오직 바쁘고
바쁜 네 눈은 사납다
나는 다만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 사이 호두 두 알이
영문도 모르고 얼마나 시달릴까를 생각하며
다소간 딱해한다
===========
+ 아카시아
먼 별에서 향기는 오나
그 별에서 두 마리 순한 짐승으로
우리 뒹굴던 날이 있기는 했나
나는 기억 안 나네
아카시아
허기진 이마여
정맥이 파르랗던 손등
두고 온 고향의 막내누이여
-----------------
+ 영월에서
무엇을 기다리나 산들은
해마다 목을 빼고 나무들은
우두커니 물들은 모래들은
밤마다 어디로 가서 무너지나 한 번씩
어둠 속 가로질러
온통 가슴이 주저앉나 무엇을 기다려
옥수수 벌판을 헤매다
아침이면 돌아오나 우수수 바람으로
기다림이 아니고야
이렇게 있을 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살이 마르고 가죽 쪼그라들 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어떻게 죽을 수나 있을까
헌데 무엇을?
이렇게 있다는 것이
기다림인 줄을 까맣게 잊고
모든 길 끊어진 영월에서
나는 대체 누구의 잠을 대신 자는가
누구의 밥을 대신 먹는가
누구의 걸음을 대신 걷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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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 무렵
노루목 지나 심학산 넘어가면
조강나루
겨우내 맨살로 버틴 교각 사이를
허옇게 쳐내려 오는
얼음조각들
전봉준처럼 도도하게 머리를 세우고
그 우에 올라앉아
죽기 아니면 살기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까맣게 떠내려가는
청둥오리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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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군하리
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있다
쓰다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몹시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주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 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
+ 길이 다하다
풀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저 야윈 실핏줄들
빗방울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
완성된 실수여
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
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
잠시 사랑했던 이름들
이제 나에게 어떤 몸이 용납될 것인가
설움에 놀란 발바닥과 무릎뼈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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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버리다
죽은 이는 죽었으나 산 이는 또 살았으므로
불을 피운다 동짓달 한복판
잔가지는 빨리 붙어 잠깐 불타고
굵은 것은 오래 타지만 늦게 붙는다
마른 잎들은 여럿이 모여 화르르 타오르고
큰 나무는 외로이 혼자서 탄다
묵묵히 솟아오은 봉분
가슴에 박힌 못만 같아서
서성거리고 서성거리고 그러나
다만 서성거릴 뿐
불 꺼진 뒤의 새삼 허전함이여
용서하라
빈 호주머니만 자꾸 뒤지는 것을
차가운 땅에 그대를 혼자 묻고
그 곁에서 불을 피우고
그 곁에서 바람에 옷깃 여미고
용서하라
우리만 산을 내려가는 것을
우리만 돌아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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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거리에서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 돌려도 솟구쳐 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
+ 때늦은 사랑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 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
+ 사랑이 왔나?
꿈인가, 무슨 이런 꿈이
저기 저 혈혈단신 죽음 같은 어둠
앞뒤로 지고
연꽃 하나,
오롯하게도 돌올하게도 아니고, 저기 그 왜
연꽃 하나 그냥 새하야니 떠오를 수도 있나
사랑이 왔나? (아이고 참, 한심도 해라)
그런데 저 백납빛 얼굴과 젖어 긴 머리채
익사한 심청인가 심청이 그이,
죽어서야 이제 돌아온 건가
저 죽음의 캄캄한 물 우흐로
물에 불은 연꽃 하나
칠순에 자식을 보다니
(아이고 참, )
--------------------
+ 윤중호 죽다
‘죽’은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글자일까
윤중호 석자 뒤엔 아무래도 설다
‘ㅈ’이 ‘ㄱ’에 가닿을 동안
길가엔 어허이 에하 상두소리 울리라는 걸까
산 모양의 저 ‘죽’ 자 날망에는
고봉밥처럼 황토 봉분만 외로우란 걸까
‘ㅈ’과 ‘ㅜㄱ’ 사이 나지막한 비탈길
고통도 시름도 내려놓고
문지방 너머 가벼이 넋은 있으리
‘주’의 복판 웅덩이엔
차마 못다 한 말들 썩어 고여 우울하리
우울하여 마침내 긴 주름 아득한 ‘ㅈ’이겠네
‘주’와 ‘ㄱ’ 사이 어느 고샅에
산동네 자취의 날들 있으리
떠나간 아버지와 삭발하는 여동생 있으리
눈물 훔치며 돌아 나오던 옛 동네도 숨어 있으리
그 고산 끝에서 새 옷 갈아입고
쌀 세 알 물고
다락같은 일주문 ‘ㄱ’ 자 문턱에 덜컥 걸려 넘어지면
문득 저승이리
왈칵 쏟는 뜨거운 국솔같이 통곡 있으리
기어이 일어나 버린 저 ’ 죽’ 자의 식은 정강이를 붙잡고
감꽃처럼 툭 떨어진 몸 허물 앞에서
어머니는 우시리
그저 우시리
*충북 영동 사람 윤중호는 2004년 가을 48세를 일기로 세상 떠났다.
아내와 아이 둘, 시집 3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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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욕의 기억
영화배우 전지현을 닮은 처녀가 환하게 온다 발랄무쌍 목발을 짚고 ( 다만 목발을 짚고 ) 스커트에 하이힐 스카프는 옥빛 하늘도 쾌청 그런데 ( 뭔지 생소하다 그런데 )
오른쪽 하이힐이 없다
오른쪽 스타킹이 없다
오른쪽 종아리가 무릎이 허벅지가 없다
나는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지 못한다
묻건대
이러고도 生은 과연 싸가지가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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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에 대하여
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기면
퍼렇게 날 선 칼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살은 거멓게 타고 말고
눈에는 핏발이 오른 뒤
그것도 지나면 차라리 다시 누레지는 것이다
악물고 악물어 어금니가 주저 않고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나면
칼이 된다.
입은 웃은 것처럼 잇바다가 드러나고
한기가 피식피식 웃음처럼 주저앉고
무딘 듯 누더기인 듯 온몸이 서는 것이다.
한두십년에 오지 않는다
진펄에 멍석말이로 뒹굴며
피덕이 되어 이백 년 삼백 년
비로소 칼이 서는 것이다.
꺼먼 칼이 되는 것이다.
김남주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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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서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 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 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그 어느 생애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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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의 깊이 2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 번씩 먼 데를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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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적으로
비 오고, 술은 오르고, 속은 메슥거려 식은땀 배고, 비는 오는데, 어디 마른땅 한 귀퉁이 있다면 이 육신 벗어던졌으면 좋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은 자꾸 아련해지나, 양손에는 우산과 가방 하나씩 쥐고, 자꾸 까부라지려 하네, 비는 오고, 오는데, 몸뚱이는 젖은 창호지처럼 척척 늘어지는데, 기억에도 희미한 옛 벗들 그림자, 환등(幻燈)과도 같이, 가슴에 예리한 칼금 긋고 지나가네. 한 손에 우산, 또 한 손엔 내용불상(內容不詳)의 가방을 쥐고 필사적으로, 달리 마땅한 폼이 없으므로 다만 필사적으로, 신발에 물은 스미고, 신호는 영영 안 바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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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가 없다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미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세지를 찍어대는 노랑머리 대학생의 구멍 난 청바지 틈엔 허연 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며 큰집 작은집이며 논둑길이며 앞산 밑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하고 위엄 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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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곡동 블루스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뭐랄 수도 없는 국정원은 내곡동에나 있고
모두 무서워만 하는 국정원은 알 사람이나 아는 내곡동에 박혀 있고
국정원은 내 친구 박정원과 이름이 같고
제자 전정원은 아직도 시집을 못 갔을 것 같고
최정원 김정원도 여럿이었고
성이 국 씨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러나 정원이란 이름은 얼마나 품위 있고 서정적인가
정다울 정 집 원, 비원 곁에 있음 직한 이름
나라 국은 또 얼마나 장중한 관형어인가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내곡동에는 비가 내리고
바바리 깃을 세운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사내가
지포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좌우를 빠르게 훑어볼 것 같은 국정원의 정문에는
「007 두 번 산다」의 그런 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비가 내리고
어깨에 뽕을 넣은 깍둑머리 젊은 병사가
충성을 외칠 뿐이고
할 수만 있다면
저 우울하고 뻣뻣한 목과 어깨와 눈빛에 대고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위로하고 싶은 것이고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하니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과 같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하니
좀 음산하지만 또 겸허하게도 느껴지고
아무튼 모른다 아무도
다만 비가 내릴 뿐
우울히 비가 내릴 뿐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 밖의 삼인칭 우수마발(牛?馬勃)도
알 리 없고
원격 투시하는 천안통 빅 브라더께서는?
그러나 그이야 관심이나 있을까
내곡동의 비에 대해
내뿜는 담배연기에 대해
우수 어린 내곡동 바바리코트에 대해
신경질적인 가래침에 대해
하느님은 아실까
그러나 그걸 알 사람도 또한 국정원뿐
그러나 내곡동엔 다만 비가 내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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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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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쓰는 편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면 나는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인적 드문 소로길 스적스적 걸어
날이 저무는 일
비 오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으로 꼴똘히 서 있기도 하는 일
다 공부라고 하면 좀 낫지요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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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른다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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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동 밤안개
ㅡ여운화백
키만 훌쩍 컸지.
뒷 사연 쓸쓸한 거야
인생 칠십의 빌어먹을 항다반사.
바바리는 걸치고서
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
인사동 고샅을
밤마다 순찰 돌았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수몰 앞둔 시골 면소
충직한 총무계장처럼.
한사코 집으로
안 가려 했네.
탑골에 이모집에 있으려 했네.
불가에서 소담에서 버티려 했네.
깰까 두려워
자꾸 마셨네.
울적한 어둠이 마곡동 빈집 마루에 어떻게 새낄 쳤는지
묻지 않았네.
아무도 말하지 않았네.
바바리는 걸치고서
돌아가는 새벽 뒷모습이
알 슬은 방아깨비 같았네.
물그릇 엎고 꾸중 들은 워리 같았네.
식은땀만 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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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비사막 어머니
1
잘 가셨을라나.
길 떠나신 지 벌써 다섯 해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 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 줌 덜어주며
이제 그곳에 닿으셨을라나.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살과 뼈 터럭들 제 갈 길로 보내고
당신만 남아 잠시 호젓하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이게 뭐지, 화들짝 놀라시다가
그 순간 남은 공부 다 이루어
높이 오른 연기처럼 문득 흩어지셨을까.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하는 아들 대견해하며, 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 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물어봐도 주세요.
너 피곤한데 내가 자꾸 붙잡고 얘기가 길다, 멋쩍게 웃으시며, 그래도 담배 하나 더 태우고 건너가세요 어머니.
3.
혹시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낙타들과 놀고 계시나요.
꾀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나요.
빨갛게 그을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나요.
그럼 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꼭 당신을 만나자는 건 아니지만
달아나는 돌들과 자꾸만 뒤로 숨는 풀들과
봉분 위로 부는 바람 하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가시고도 밥솥의 밥은 따뜻하고
못난 아들 형과 나는 있고
아이들은 눈싸움을 조르고
어머니 가시고도 꽃 피고 잎 지고
꺼끄러운 수염은 자라고
술도 있고요.
그곳은 그곳대로
모쪼록 그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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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이 씨 효열비
딸 하나 남기고 남편 방수고리(方數古里)가 세상을 떠
나자 선영에 장사 지내고 삯방아 삯바느질로 젖먹이와
늙은 시모를 봉양하다. 마침 9년 큰 가뭄 들자 생계를
찾아 늙은 시모 업고 먼 영남 땅으로 가다. 1년이 채 안
되어 시모가 세상을 떠나자, 시신 수습해 업고 700리를
걸어 고향 선영에 돌아와 장사 지내다. 묘막을 짓고 3년
을 애통해하며 시묘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자신마저
세상을 뜨니 경주 이 씨 나이 47세였다.
라고 적힌 정문(旌門) 곁 잡초는 우거지고
큼큼한 얼굴로 자동차 우릉우릉 지나가는데
하느님은 아직까지 잘 돌봐주고 계실까
쓸쓸하다, 이름들이여
방수고리여
경주 이 씨여
그의 시모여
*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신왕리 소재 조선중기의 효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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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격 훈련장 부근
산꿩 운다 멧비둘기 운다
솔꽃을 가득이고 소나무는 무료하다
숲은 아직 연초록 순진해 보인다
열두 살 이라크 소녀 같다 폐허 속의
진한 눈썹과 큰 눈에도 초록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규한 피곤일까 아니면 죽음 같은 절망일까
산꿩이 또 운다 궁상이다
혐오도 연민도 없이 다만 유규무언으로
부시와 럼스펠드라는 미국 사내들을 나는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소나무도 연초록일까? 그것은 무슨 뜻으로?
유구무언의, 울음도 채 이루지 못한 울음을 껑 껑 산꿩
은운다
열두 살 소녀와 그의 젊은 아비의 나라에도 꿩은 있을까
공중은 날파리떼의 잔치판이다
운동장에 풀어놓은 초등학교 3학년들 같다
철부지를 우리는 참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뻔뻔한 무지에는 희망이 없다
비사야 팔리는 백화점의 풍습과 29만 원이 전재산이라
는 어느 전직 대통령과 텔레비전과 프로스포츠 같은 것
들을 부득불 떠올린다
고요를 깨고 새 한 마리가 푸드득 솟구친다
아무래도 좋다(아니 좋지는 않다)
누구도 탓할 마음은 없다 이제 와서
우리는 사이좋게 오래 꿈꾸어온 그 무엇과 닮아가고
있는 중(말하자면 돼지나 하이에나 같은)
풀들은 여전히 순진하고 나른한 표정
개미들은 우왕좌왕 부산을 떨지만
그다지 탐욕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버려진 지 오래인 담배꽁초 하나가 그것들 사이에
한식구인 듯 때 묻어 같이 누워 있다
산꿩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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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금강 공원에서
그날
개인 하늘 아래 식구들은
갓 핀 해바라기처럼 맑았다 그때
등디로 지나간 찬 바람 한 줄기를
어찌 몰랐던가
주전부리 파는 아주머니의 치맛자락 끝이었던가
사진사 노인의 낡은 구두 뒷굽이었던가
숱 많은 아내의 머리칼 속이었던가
허공 뒤편 어는 한 점었던가
오호, 숨어, 뱀 같은 눈으로,
어둠이, 우릴, 겨누고 있던 곳은!
왜 못 알아들을까
그 음험한 바람 사이로 나뭇잎새들이 외치던 말들을
돌계단들이 순한 등으로 받쳐 올리던 귀띔을
키 튼 선인장의 우울한 그늘을
딸아이 손을 놓친,
순간을 스쳐가던 철렁함의 뜻을 두려움을
몇 해 지나 새끼들 안부도 모르는 채
먹는지 겨르는지 애써 모르는 채
용케 이 항구까지 살아 떠내려와
혼자 다시 찾아온 곳
딸아이 좋아하던 뺑뺑이 비행기는 없고
이제 임진 동래의총 사당이 푸르다
쪼그라든 산수유 묵은 열매가 쓸쓸하게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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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솜틀 하늘 지점
그런데 오 씨 영감
언제 사바사바는 잘해가지고
아이고야, 하늘님한테 새로 빈터 사용권 얻어가지고
이렇게 뽀얀 새 솜을 뭉글뭉글 타 가지고
한도 끝도 없이 볕에 널어놓으셨나.
한쪽 다리 잘름거리며
큰소리로 마누라 지청구하며
여전히 온 동네 으스대는 꼴 좀 보라지, 흥.
대전시 가양동 420 부여솜틀집
철컥철컥 솜틀 기계 밟아대면
미시시피 강물처럼 흘러나오던 새 솜
깃털같이 풀어주던 오직동 씨.
마스크 위로 눈을 부라리며
'카시미롱 그까짓 게 무슨 이불이여?'
장한 일 추진하는 지도자같이 심오한 실험 하는 과학자 같이
솜먼지 속에서 뚱뚱한 마누라 달달 볶던
오직동 씨.
산업대한 카시미롱 바람에 한방 먹고
마누라 곗돈 빵꾸 냈다는 소문 뒤로
다신 시장통에 안 보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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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풍천장어집
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
고요하고 환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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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인 차부 고진각 씨
체육 선생님이나 쓰던 흰 호각을 휘리릭 휙 불면서
보기 좋게도 부산하던 사람.
버스래야 하루 서너번
몽탁한 몸을 하고 노타이를 걸치고,
안으로 굽은 오른손에 개찰기를 멋지게 쥐고서
차가 들어오면 와랑와랑한 목청으로
오라이 오라이
사람들 이리 몰고 저리 쫓고
그냥 탄 할배는 표 끊어오게 하고
차비 깎는 할매들 지청구도 하면서
면장보다 바빴네.
눈빛 더 빳빳했네.
콩 두어되 닭 한마리 안고 장에 가던 시절
두루막에 중절모면 의젓하던 시절,
그가 한바탕 수선을 떨고 나면
나른하던 장터에 코끝 쨍한 생기가 잠깐은 돌았네.
자다 깬 동네 똥개들도 갑자기 쬐끔 영리한 얼굴이 되기도 했네.
(그 집 부인과 자제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미루는 것이 예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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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ㅡ고교 졸업 30주년
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
그는 퍼뜩 꿈에서 깬다
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야 할 시간
웬 생시 같은 꿈!
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외선
생으로 돌다가 군대 3년 푹 썩는 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박박 기는 꿈 돌아와 눈매 고운 여자 얻어 장가드는 꿈
그 여자와 집 장만하는 꿈 그 여자와 자식 낳는 꿈 아이
자라는 꿈 그 아이 대학생 되도록 애 끓이며 지켜보는 꿈
직장생활 여의치 않은 꿈 뒤늦게 승진하는 꿈 주식으로
한몫 잡는 꿈 다시 꼬라박는 꿈 피신하는 꿈 외로워 우는
꿈 부모님 편찮은 꿈 한 분 먼저 가시는 꿈 남은 분 모시
는 일로 집안 뒤집히는 꿈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차마 갈
라는 못 서는 꿈 집 넓히는 꿈 승용차 커지는 꿈 접대에
골프에 허덕이는 꿈 어느날 명예퇴직도 하는 꿈 그러다
그러다 아내 먼조 먼 길 떠나기도 하는 꿈 처자식 뒤로
하고 가기도 하는 꿈 졸업 30주년 안내장 받는 꿈 ‘무슨
내라는 돈이 이렇게 많대요’ 마누라 잔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면서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마음 아득해지는 꿈
30년, 하고 중얼거리며 차가운 거울 앞에 서면
헐거워진 머리칼 너머 주름살 너머 먼 저곳
수1의 정석과 정통종합영어를 우겨넣은 가방을 끼고
발갛게 상기된 까까마리 앳된 그가 달려간다
30년, 하고 다시 가만히 말해보면
명치끝 어디선가 화아한 박하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삭은 젓국냄새 도는 듯하다
궂은 저녁의 쓰디쓴 한 잔과 뉘우침의 냄새가 나
는 듯하다
마른 고춧대 태우는 냄새가 도는 듯하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고 교실로 뛰어가는
거울 속 까까머리
그의 새벽 꿈자리가
기뻤는지 슬펐는지
알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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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다음 생은 노르웨이쯤에서 살겠네.
바다를 낀 베르겐의 한산한 길
인색한 볕을 쬐며 나, 당년 마흔일곱여덟 배불뚝이 요한
센이고 싶네.
일찍 벗어진 머리에 큰 키를 하고
청어와 치즈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
좀 춥군, 어시장 냉동탑 그림자 더욱 길어질 때
늘어나 덜걱거리는 헌 구두를 끌며 걸으리
브뤼겐 지나 어시장 옆 좌판에서
딸기와 버찌도 좀 사겠네
싱겁게 몇낱씩 눈이 날리는 저녁.
성당 지나 시장 골목 입구도 좋고
오래된 다리 부근도 좋고
새벽 두 시
숙소를 못 찾은 부랑자가 윗도리를 귀 끝까지 올리는 시간
다리 옆 둔덕을 타고 비틀비틀 강가로 내려가는 그 사내
이겠네.
미끄러질 듯하지만 절대 넘어지지 않지.
적막 속의 새로 두시
물결만 강둑에 꿀럭거려
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는
나 요한센(아니면 귈라 유하츠도 괜찮은 이름)
오줌을 누며 잠시 막막한 느낌에 잠기리.
북쪽 산골의 늙은 부모와 엇나가기만 하는 작은아이 생각
진저리 치고 머리를 긁으며
다시 둑 위로 올라서네.
자, 어디로 갈까.
뜨개질은 건성인 채 밖을 자주 내다보는,
눈발 속 키 큰 그림자를 보고
달려 나오는 여자가 하나쯤 있어도 좋아.
‘요한나’
전쟁에서 살아온 제대군인처럼
내가 팔을 벌리겠지 술 냄새를 풍기며.
눈 덮인 내 등을 털며 맞아들이는
집이 하나
저쪽
노르웨이나 핀란드
아니면 그린란드쯤에라도.
____________________ *51
밥
노숙
노숙 2
유필
--------
장마
탈상
YOL
뉴욕행
----------
늦가을
덕평장
사랑가
친구들
---------
60년대
김태정
달팽이
박영근
---------
옛 우물
맑은 소리
소리장도
부시, 바쁜
---------------
아카시아
영월에서
해동 무렵
겨울 군하리
----------------
길이 다하다
그를 버리다
네거리에서
때늦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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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왔나?
윤중호 죽다
적막에 바침
치욕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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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대하여
풍경의 깊이
풍경의 깊이
필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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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없다
내곡동 블루스
바짝 붙어서다
밤에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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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인사동 밤안개
고비사막 어머니
경주 이 씨 효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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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훈련장 부근
다시 금강 공원에서
부여 솜틀 하늘 지점
선운사 풍천장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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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 차부 고진각 씨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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