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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광규 시 2

+

낡은 혁대가 끊어졌다
파충류 무늬가 박힌 가죽 허리띠
아버지의 유품을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던 셈이다
스무 해 남짓 나의 허리를 버텨준 끈
행여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물에 빠지거나
땀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던 끈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의 허리띠를 넘겨야 할
차례가 가까이 왔는가
앙증스럽게 작은 손이 옹알거리면서
끈 자락을 만지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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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

모든 인연 뿌리치고
먼 길을 떠나
타박타박 오랜 세월
혼자 걸으며
오로지 외곬으로
잊기 위해 살았다

응달 속에 지나온 길
아득히 사라지고
흘러간 세월은
다시 오지 않는데
한 순간도 그의 몸을
잊지 못하고
한 발짝도 그의 몸을
떠나지 못한 채
서녘 하늘 바라보는
탑이 되었다

영원과 마주치는
그 짧은 시간
깨달음에 이르는
한 뼘의 깊이
이승에 주어진
그 좁은 우주를
끝내 겪지 못하고
가 버린 그의
태우지 못한 육신이
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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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길

언젠가 왔던 길을 누가
물보다 잘 기억하겠나
아무리 재주껏 가리고
깊숙이 숨겨놓아도
물은
어김없이 찾아와
자기의 몸을 담아보고
자기의 깊이를 주장하느니
여보게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게
제 가는 대로 꾸불꾸불 넓고 깊게
물 길 터주면
고인 곳마다 시원하고
흐를 때는 아름다운 것을
물과 함께 아니라면 어떻게
먼 길을 갈 수 있겠나
누가 혼자 살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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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눈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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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 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를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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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건강증진센터의 진단과 처방을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술을 끊었다
지나간 반세기 동안 즐겨온 술을
끊어버리자
술 마시던 나와
술 끊은 나 사이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어
괴롭다
오랫동안 술 마셔온 나는
이미 늙고 병들었으니 불쌍하고
얼마 전에 술 끊은 나는
아직 어리니까 손자처럼 귀엽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몸과 마음이 갈라져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 것 같다
쓰러져 건강하게 살기는
더욱 힘들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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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서

눈덮인 전나무숲을 지나
오스트리아로 달려가는 급행열차

민들레 가득한 들판에
암젤의 노랫소리

알프스를 넘어오는
지중해 바람의 넋

오버바이에른의 가을 마을에
나는 때때로 안개가 되어

가 버린 나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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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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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희망이란 말도 엄격히 말하면 외래어일까.
비를 맞으며 밤중에 찾아온 친구와 절망의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희망을 생각했다.
절망한 사람을 위하여 희망은 있는 것이라고
그는 벤야민을 인용했고, 나는 절망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데카르트를 흉내냈다.
그러나,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유태인의 말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망에 관해서 쫓기는 유태인처럼
밤새워 이야기하는 우리는 이미 절망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일까.
통근이 해제될 무렵 충혈된 두 눈을
절망으로 빛내며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
절망의 시간에도 희망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
어디선가 이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고 지켜야 할 희망은 절대로 외래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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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누가 부는지 뒷산에서
서투른 나팔 소리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피로 때문에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여름내 햇볕 즐기며
윤나는 잎사귀 반짝이던 감나무에
지금은 까치밥 몇 개
높다랗게 매달려 있고
땅에는 떨어진 열매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나는 어디쯤 떨어질 것인가
낯익은 골목길 모퉁이
어느 공원 벤치에도 이제는
기다릴 사람 없다
차라리 늦가을 벌레 소리에 묻혀
지난날의 꿈을 꾸고
꿈속에서 깨어나
손짓하는 코스모스에게 묻고 싶다
봄에는 너를 보지 못했다
여름에는 어디 있었니
때늦게 길가에 피어난 꽃들
함초롬히 입 가리고 웃을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 만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
굳게 입 다물고
두꺼운 안경으로 눈 가리고
앓고 싶지 않은 병
온몸에 간직한 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다
아득한 젊은 날을 되풀이하는
서투른 나팔 소리
참을 수 없는 졸음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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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꿈

막다른 복도였다
컴컴했다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 간다는 것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복도의 끝에서
마지막 문을 열고
천천히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로 문을 닫았다
서 있다는 의미도 없이
나는 혼자였다

끝이었다
어쩌면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간은 아니었다
전혀 의지할 데 없는
나의 속은 그렇게 생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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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아침 까치는 이미
아무런 기다림도 전하지 않는다
십원을 아껴 가며 참고 견뎌
이제는 모든 것을 샅샅이 알아 버렸다

몽툭한 콧날에 무뎌진 눈빛
안으로 닳아빠진 손끝으로
깡마른 여인은 연탄을 갈아 넣고
빈 사과궤짝을 한 손에 든 채
치맛자락 펄럭이며
철새들이 날아드는 들판으로 나간다

여름 햇빛에 수없이 빛나던 나뭇잎들
스산한 바람을 따라 몰려 가고
서녘에 지는 해가 등 뒤로
어머니의 긴 그림자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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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소화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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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맞이

소나무 우듬지 위로 커다란
열기구처럼 떠오르는 보름달
눈에 띈 순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
ㄷ으로 시작되었어
그다음에 ㅁ이 뒤따랐지!
달.... 마... 로 이어지는 그 이름
사흘 만에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반세기 동안 즐겨 마신 원두커피
그 상표가 왜 생각나지 않았을까
그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와
찬장 위 칸을 열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아니야 내 기억 속에서 찾아내야지
어제도 오늘도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혀끝을 뱅뱅 돌면서 그 이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앞서가는 동행에게 물어볼까
하던 참에 마침 인왕산 동쪽에서
둥근 달이 솟아오른 것이다
달맞이? 달마종?
Dall... mayr에 뒤이어 아라비카 커피 향
잠깐 코끝을 감돌았다
몇 해 전에 잃어버린 후각도
잊혀진 고유명사처럼 되살아나려나
평생 배우고 간직해 온
온갖 이름들이 하나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때로는
달과 함께 다시 떠오른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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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목凍死木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 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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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뒤

나는 여러 번 출발도 해 보고
도착도 해 보았다 그리하여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꾸려 놓고
여권을 주머니 속에 넣고
일찍부터 준비는 해 왔지만
이렇게 도착할 수 없는 곳을 향하여
갑자기 출발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해 주었다
웃으며 울며 손을 흔들고
또는 무관심하게 힐끗 바라보는
그들 가운데는 낯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나의 동시대인임을
나는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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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한 줄의 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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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귀찮은것
빼어 버리지
충치만 생기고
어금니를 괴롭히는
사랑니는 빼어버려
철이 들면 무엇해
씹지도 못하는 걸
(의사의 말은 언제나
의학적으로 옳다)
하지만 빼어 버리는 것도
고치는 것일까
(겁 많은 환자에겐 으레
어리석은 고집이 있으니까)

잠 못 자게 괴롭히는
미운 이빨을 그래도
나는 버리지 않을 테야
비록 귀찮은 사랑니지만
내 몫의 아픔을 주는
내 몸의 일부인 것을
내가 아니면 누가
씹으며 지긋이
참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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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

의주로와 연희로와 모래냇길
사이에 갇혀 자라지 못하는
고은산 골짜기에
용케도 여름마다 찾아오는
소쩍새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몇십 대를 이어오는 울음 소리
귀에 익었다
후박꽃 향기처럼 그윽한
음절을 밤새도록 되풀이하는
소쩍새 소리
창문 열어놓고
어둠 속 바라보려면
눈은 감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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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세

아득한 옛날 이름없는 원시림에서
둔중한 꼬리를 끌고 다니던
공룡에게도 머리가 있었다
길이 없는 질펀한 소택지에서
배를 끌고 기어다니던
파충류에게도 꿈이 있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울부짖으며 헤매다가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매달리며 떨어지고 가까스로
나뭇가지 위에 기어올라가서
언덕 너머를 바라보기도 했다
멀고 높은 곳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늘로
날아올라가 생명의 꿈을
화석에 남겼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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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구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 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 속을 흐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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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류離岸流 2

잔칫날이나 제삿날 다가오면 느닷없이
바닷가로 달려 나가곤 했다
밀물인지 썰물인지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가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땅 위의 모든 사람들 미워
부모, 형제, 자매, 친구, 이웃, 동료 들....
육지의 모든 사람들 욕하고 저주하면서
바닷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꼴깍꼴깍 짠물 삼키며
웩웩 오물 토해내며
해안에서 가물가물 멀어지다가 마침내
남해의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직도 어느 먼바다 떠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무인도에 표착했는지
끝없이 파도만 밀려올 뿐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래도
어딘가 살아 떠돌면서
버리고 온 반려견 그리워 가끔
눈물 글썽인다면 다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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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길

날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은 달리려 하지도 않는다
걷기조차 싫어 타려고 한다
(우리는 주로 버스나 전철에 실려 다니는데 )
타면 모두들 앉으려 한다
앉아서 졸며 기대려 한다
피곤해서가 아니다
돈벌이가 끝날때마다
머리는 퇴화하고
온 몸엔 비늘이 돋고
피는 식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익숙한 발걸음은 집으로 간다

우리는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다
파충류처럼 늪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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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言歌 

목병이 났다.
말을 해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밤에는 기관지가 간질거리며 기침이 자꾸 나와 잠을 깨게 된다.
너무 떠들어서 聲帶가 파열된 것이 아니다. 집을 오래 비워두면 못 쓰게 되듯, 최소한의 聲量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의사의 처방에 의하면 이 병을 치료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단다.
결국 내가 당분간 낼 수 있는 소리는 기침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기침은 말인가, 침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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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선 고향

땅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주유소가 제일 먼저 들어섰다
뒤따라 사철탕집이 생기고
아파트가 쭉쭉 솟아오르더니
크낙산을 가려버렸다
하늘도 다각형으로 잘려 나갔다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동네
나무 없는 거리에 울긋불긋
네온사인의 밤이 일찍 찾아온다
테크노사운드와 사이키델리 조명 속에서
콜라와 햄버거를 즐기면서
후손들이 쭉쭉 자란다
새로 뚫린 자동차 도보를 따라 곧
전자 상가와 아웃렛 매장이 들어설 터이다
집집마다 인터넷을 통하여
월마트에 드나드는 마을
몇 년 만에 찾아온 낯선 
고향에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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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목련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네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 더니
목련은 한잎두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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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지요

구름 없는 밤하늘
한가운데 환하게 떠 있는
둥그런 보름달보다
소나무 밤나무 감나무 가지들 헤치고
나뭇잎 사이로 수줍게 발돋움하는
초승달 일그러진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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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꽃 향기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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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서울

별빛도
달빛도
비켜 나는 고층 건물
서울빌딩 옥상에서
한밤중
내려다본
나의 고향
극동의 어둠
땅이 없는 도시의
캄캄한 냄새
연탄 가스 두려워
창문마다 깜빡이는
가난한 불빛들이 질펀하게
가라앉아
보기 좋은 야경이 된
나의 고향
밤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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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고 소리

하필이면 쇠가죽으로 만들었나
부처님 앞 법고
아침저녁 서녘 산에서 들려오는
둥 둥 둥 외로운 북소리
평생의 구업 갚을 길 없는
울음일가 아니면
묵언 공양일까
오늘도 가슴 깊이 울려오는
황갈색 법고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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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 공사

전기톱질로 사정없이
소나무 참나무 싸리나무 잘라버리는
금속성 비명에 귀 따갑다
뒷산 골짜기에 수로를 만든다고
포클레인이 바위를 부수고
언덕을 깎아내린다
물길 뚫기에 앞서 공사용
중장비가 오르내릴 통로 마련하기에
온 동네가 소란스럽고
뒷동산이 온통 망가진다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들으면서
그저 참아야 하나
산사태 막기 위하여
산을 통째로 무너 뜨리고
한 줄기 물기만 남을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만 하나
물이야 어차피 아래로 흘러가겠지만
동산을 다시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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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린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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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두 발

영화나 연극이나 오페라 보면서
두세 식간 객석에 앉았노라면
참으로 오래간만에 양쪽 발도
보행의 노고를 벗어나
적어도 예술을 감상하는 동안이라도
마음 놓고  쉬게 하자
쉴 틈 없이 신발 신겨 부려먹으면서
착한 두 발 주물러주지는 못할망정
육신의 프롤레타리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업신여기지 말자
흔히 손보다 앞서 나가면서도
악수 한번 못 해보고
언제나 당나귀처럼 순종하는
두 발 씻겨주지는 못할망정
그냥 내버려두기라도 하자
다행하게도 발을 다치지 않은
오늘 같은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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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의 나무

굵은 나뭇가지 커다란 잎사귀 자랑하면서
2층 서재 창밖에서 나를 
지켜준 나무
봄 늦게 황백색 꽃 탐스럽게 피어나
그윽한 향기 뿜어대고 여름내
짙은 그늘 시원한 바람 빗방울 소리
가을에는 낙엽 지는 기척에
귀 기울이며 눈을 쉬고
마음속으로 그 이름 때 없이 불러온
믿음직한 나무
외국어로 옮겨져 다른 나라에도
알려진 나무
무수한 보통명사 고유명사 추상명사 들
평생 익히고 쓰고 기억하고 망각해 왔지만
창밖에서 수런수런
바람과 이야기 하며
반세기 넘게 내 곁에서
함께 살아온 나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찌하여 오늘은
혀끝을 뱅뱅 돌면서 그 이름
떠오르지 않을까 오래된
가족과 친구들 이미 내 곁을 떠났고
오늘은 정든 나무의 이름까지
갑자기 잊어버렸나
비록 머릿속에서 사라진 듯해도
그 모습 잊힐 수 없는 
우람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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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거미 내릴 무렵

짙푸른 여름 숲이 깊어갑니다
텃새들의 저녁 인사도 뜸해지고
골목의 가로등 하나 둘 켜질 때
모기들 날아드는 마당 한구석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밀려오는 어둠에 잠깁니다
어둠이 스며들며 조금씩
온몸으로 퍼져가는 아픔과 회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지그시 견딥니다
남은 생애를 헤아리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몫이려니
나의 육신이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려니
그저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고
땅거미 내릴 무렵
마당 한구석에 나를 앉혀 둡니다
차츰 환해지는 어둠 속에서
한 점 검은 물체로 내가
멀어져 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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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다리를 먹으며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 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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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지 않는 강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허튼소리 하지 말게
모름지기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아야지...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화국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변함없이 중심을 맴도는 인물들
그 친구 말고도 얼마나 많은가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능숙하게
무자맥질하면서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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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리버만 길 

'겨울에는 가로 관리를 하지 않음'
이 공지사항은 이미 가을부터 유효하다
좁은 비탈길에
누렇게 물든 자작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자동차를 타고 이 길을
통행할 수는 없다
제각기 위험부담을 안고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올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울 것이라 한다
미끄러운 이 길을
누구나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겨울에는 가로 관리를 하지 않음'
이 공지사항은 이미 가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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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 없는 날

우리의 선인들 가운데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이 없기를"
노래한 시인이 있었고
소설을 써서 부끄러움 가르쳐준
작가도 있었다
하루 또 하루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헤아려보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어본 적도 많았다
우리의 바탕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믿어온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른다
부끄러운 데 가리고 이 세상으로
쫓겨난 그때부터 왜 곳곳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라는 말
욕설로 쓰이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바로 부끄러움 없는 날
우리는 가장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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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거지하는 남자

기숙사 공용 부엌에서 사용한
냄비나 프라이팬이나 수프 접시들
씻여서 물기를 말리고
윤이 나게 행주로 닦아서
찬반에 얹어놓게 되어 있었다
시설 및 비품 사용 규정도 그렇거니와
동숙자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누구나 뒤끝을  보기 좋게 정돈했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한 끼 때우고 설거지하는 동안 잠시
유학 생활의 중압감 벗어나
마음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지

오랫동안 어울려 살아온 가족들이
연휴를 맞아 모처럼 여행 떠난 날
혼자 남아 밀린 원고 정리하다가
창밖의 담쟁이넝쿨 바라보며
마신 포도주 잔 물에 헹구고
말려서 선반에 얹으려니 새삼
궁상스러운 홀아비 시절 떠오른다
계절이 바뀔 때면 객지 생활은
더욱 스산하기 마련이었지
기억은 언제나 혼자서 펴보는 앨범
홀가분하게 가을철 맞고 싶어
차디찬 걱정거리 씻어버리려 해도
마음은 뜻대로 비우기 힘든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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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돌의 태어남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도
돌이 있을까
아득한 옛날부터
홀로 있는 돌을 찾아
산으로 갔다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
늙은 소나무 밑에
돌이 있었다
이끼가 두둑이 덮인
이 돌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2천 년일까 2만 년일까 2억 년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 없다면 이 돌은
지금부터 여기에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이 돌은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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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과 다른 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콜로라도 고원을 달려가던 인디언이 갑자기 벌판 한가운데서 내려달라고 고집했다.
그렇게 고속을 달려가면, 영혼이 육신을 쫓아올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을 멈추어 서서 영혼을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점보제트기를 타고 유럽에서 한국까지 불과 열 시간만에 날아온 날, 현지 시간 적응한답시고, 반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에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는 호텔 방인가, 국제선 여객기 속인가, 어느새 집에 돌아왔나, 분별이 안 되어 어리둥절……
억지로 아침 먹고, 늠름하게 출근하니, 그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못 가고, 하품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은 서울에 돌아왔지만, 육체는 아직도 서양의 어느 도시를 헤매고 있구나
인디언과 다른 점인가
정신보다 느린 나의 육체가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고비 사막을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를 찾아오려면, 앞으로 두 주일은 더 걸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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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비망록

여권과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어둔 것은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고속전철에 짐을 옮겨 싣는 이삼 분 사이에
가죽서류가방이 없어졌다.
경찰에 신고하느라고, 기차 두 대를 놓쳤다.
도난품 명세서를 작성하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끄집어낼 물건들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험회사 손해사정 팀도 휴대품 목록을 요구했다.
품목과 수량은 그럭저럭 기입할 수 있었지만,
물품 가격과 구입 시기를 기억해내기는 힘들었다.

통째로 잃어버린 가죽서류가방과
싸구려 카메라 및 상비 약품은
비교적 최근에 산 것이라,
대략 비슷한 내용을 적어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상받을 수 없는 품목들이 사실은 더 많았다.
예컨대 일기장과 비망록, 사진촬영필름,
행사계약서와 여행경비 증빙서류,
각종 수집 자료와 명함 모음 등이
내게는 다할 나위 없이 중요한 분실물이었다.
특히 자잘한 생활 일정이 담긴 탁상 캘린더,
관찰과 느낌과 단상의 토막들을 적어둔
비망록이 없어진 것은 내 생애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나는 잃어버린 다음에야 깨닫게 된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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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차로 가는 길목

출국하기 전에 다친 무릎은
두 주일이 지났는데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자 빵과 볼빅 물 두 병을 사서
저녁거리로 배낭에 짊어지고 낯선 도시
비 오는 보도를 절뚝절뚝 걸어가다가
2백 년 전에 지었다는 목골 가옥
'추어 빈트뭘레' 앞에서 풀썩 넘어졌다
젖은 포석 사이에 발끝이 걸려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것이다
뒤에 오던 행인이 부축해 주어 겨우
일어섰는데 부끄러운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도와준 행인에게 고마워하기도 민망했다
놀러 온 관광객 처지도 못 되니
내일 행사를 준비하려면
이를 악물고 숙소에 돌아가
약속한 원고를 끝내야 할 터였다
택시를 부를 수도 전철을 탈 수도 없는 거리
한 발짝 두 발짝 다리르 끌며
걸어가던 뒷모습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________________ *44

김광규 시 2


돌탑
물길
밤눈
------
상행
술병
엽서
영산
--------
희망
가을날
검은 꿈
늦가을
----------
능소화
달맞이
동사목
떠난 뒤
----------
묘비명
사랑니
소쩍새
시조세
--------
여름날
이안류 2
저녁길
無言歌 
--------------
낯선 고향
다시 목련
모르지요
밤꽃 향기
--------------
밤의 서울
법고 소리
수로 공사
저녁나절
----------------
그대의 두 발
창밖의 나무
땅거미 내릴 무렵
도다리를 먹으며
----------------------
돌아오지 않는 강
막스 리버만 길 
부끄러움 없는 날
설거지하는 남자
-----------------------
어느 돌의 태어남
인디언과 다른 점
잃어버린 비망록
풍차로 가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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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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