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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순옥 시 ==>+ 벽 크고 작은 상처 가슴에 안고 저 산들의 고요처럼 착하게 엎드려 살다 보면 슬픔처럼 슬픈 울음도 보고 어둠으로도 지울 수 없고 투명한 마음으로도 가릴 수 없어 헤매이길 반백년 산처럼 그대를 품었습니다 진종일 할 일 없는 비가 내려도 하루를 침묵으로 보내고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베인 상처까지도 감싸 안는 그런 산이 되었습니다 ------- + 5월 그 먼 길 누군가 사뭇 올 것만 같아 연한 상추꽃 한아름 안고 -------- + 사월 생명이 보고 싶어 삽질을 하다가 지렁이 한 마리 캐냈다 머리는 지구 안으로 꼬리는 지구 밖으로 봄볕이 그들을 세상으로 불러내고 있다 거기 초록이 서 있었다 -----------+ 목련꽃 흰 옥양목이 이불 홑청 뜯어 양잿물 넣고 푹푹 삶아 넓은 마당 빨래줄 한가..
양현근 시 ====>+ 감꽃 1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 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 + 감꽃 2 내게 추억이란 고작 담배를 꼬나물고 입안에 고인 말을 허공에 잠시 적어두는 일 봄볕에 젖은 오후를 끌어와 펄쳐보는 일 동네 아이들과 달작지근한 감꽃을 ..
박경리 시 2 ===>+ 꿈 1 원주 와서 넓은 집에 혼자 살아온 것도 칠팔 년 늘 참말 같지도 않았다 방문 열면 마루방 덧신 발에 걸면서 한숨 쉬고 댕그마니 매달린 전등불 믿기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정수리 자르며 지나가는 시간 저승길 헤매고 있는 거나 아닐까 글을 쓸 때는 살아 있다 풀을 뽑고 씨앗 뿌릴 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서쪽에서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 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 나는 내가 죽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 + 감성感性 다 그렇게 살다 갔을 거야 응어리 삼키는 강가 구름 한 점 내 마음 한 점 한 점 점만큼 줄어든 영혼 펴보면 갈청같이 엷을 거야 찢어지겠지 ---------- + 문학 나는 겁쟁이다 성문을 결코 열지 않는다 나는 소심한 이기주의주다 때린 사람은 발 웅그려..
박경리 시 1 ===>+ 밤 밤이 깊은데 잠이 안 올 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방 수술 후 뜨개질은 접어 버렸고 옷 짓는 일도 이제는 눈이 어두워 재봉틀 덮개를 씌운 지가 오래다 따라서 내가 입은 의복은 신선도를 잃게 되었는데 십 년, 십오 년 전에 지어 입은 옷들이라 하기는 의복 속에 들어갈 육신인들 아니 낡았다 어찌 말하리 책도 확대경 없이는 못 읽고 이렇게 되고 보니 내 육신 속의 능동성은 외친다 자꾸 외친다 일을 달라고 세상의 게으름뱅이들 놀고먹는 족속들 생각하라 육신이 녹슬고 마음이 녹슬고 폐물이 되어 간다는 것을 생명은 오로지 능성동의 활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은 보배다 밤은 깊어 가고 밤소리가 귀에 쟁쟁 올린다 ---------- + ..
양동림 시 ===>+ 거울 1 제가 궁금하나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싶나요? 저를 들여다보세요 온통 당신뿐입니다 당신이 저를 바라봐 준다면 저는 언제나 당신만을 따를게요 ---------- + 거울 2 나는 알고 있다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는 관심이 없음을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나를 감추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의 좋은 점을 찾기를 원하지만 나의 역할은 그들의 단점을 비춰주어 그들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것 거기서 보람을 느끼는 나는 거울이다 -------- + 나이 뱃살이 두꺼워지는 만큼 돋보기가 불룩해지는 만큼 부고 알림이 점점 빈번해지는 만큼 내 생각보다 아이들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만큼 ---------- + ..
양균원 시 ===>+ 조율 나무그늘 무게에 가슴이 눌리는 언뜻 무수히 얻어맞는다 장맛비 잠시 그친 후 접은 우산 짚고 돌계단 오르려는데 잊고 지내던 하늘에서 누군가 물벼락 서늘히 쏟아낸다 수천 잎이 한꺼번에 부리는 물통 늙은 은행나무가 오직 내게 베푸는 세례 그리하여 느닷없이 씻기면 좋으련만 지난가을에도 그랬다 몰래 영근 과실들 늦은 태풍에 허공을 치더니 누런 과육으로 바닥에 드러눕더니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겨우내 시간을 쟀다 고요를 흔드는 한 그루 팬터마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흉중흉내를 아무래도 감상할 수 없다 오락가락 날씨가 형성하는 여름 한낮 불협화음 조율이 필요하다 -------- + 포옹 초저녁 나무그늘을 딛고 내게 왔다 가누지 못할 무게에 뒤뚱대는 몇 발짝 너는 달려들고 나는 얼결에 무릎 한짝 땅에..
유영금 시 ===>+ 새 누가 흐린 하늘을 자꾸 닦아내고 있다 무섭게 파래진다 새파란 물줄기가 주르륵 산마을을 흠뻑 물들이겠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희끗희끗 숨은 깃털 놀랄 일이다 사월 저무는 날,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울다 날아오르던 한 마리 새, 새가 푸른 가난을 질끈 짜 하늘을 닦고 있다 ---------+ 속달 그리움 나풀나풀 머리에 꽂고 초벽 사이 아슬아슬한 풀다리를 건너 숨이 노랗게 달려오는 누이야 어쩌자고 내 집 앞을 서성이느냐 일곱 살 네 마당에 가마니에 감겨 깨지 않던 나를 찾는 거냐 빨간 머리핀을 받으러 온 거냐 돌아가라 네게 줄 초막은 아직 짖지 않았다 머리핀도 준비하지 못했다 초막 빼곡히 앵속자를 심어 꽃내가 시끄러울 때까지 시인의 강에 함께 흘러라 아부용 넌출넌출..
서상규 시 ===>+ 박쥐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검게 때 낀 옷을 비막飛膜으로 접고 막대그래프로 다리를 세워 발자국들이 지나는 지하도 바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생이 뒤집힌 빈 주머니로 허기가 일상이 되어 쥐의 몸통으로 엎드려 있다 햇살이 고양이 털 무늬로 발톱을 숨긴 바깥세상을 피해 그림자의 동굴 속에서 마른 쥐꼬리 같은 손을 내밀고 있다 손금에 절망의 궤적이 음각된 굴레를 드러내놓고 있다 마치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는 그가 꿈속에서 날개를 펼친다 철길에 뻗은 회귀선을 따라 관자놀이에 새파란 정맥을 일구며 유년시절을 향해 날아간다 밤하늘이 따스하게 품은 달빛으로 앙상한 흉곽 가득 양력을 부풀려 닿은 간이역 어둠의 발음으로 쉰 목젖을 감싸며 사투리가 정겹게 흘러나온다 어머니가 청색으로 물든 눈물을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