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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리
흐린 창밖에 희끗희끗 성긴 눈발이 날리고
마당 끝의 옷 벗은 나무들이 쓸쓸하다
무슨 까닭으로 서글픈 여러 생각들이
여기까지 따라오는 것이냐
살을 에는 찬바람이 언 늪을 휘저으며 건너오듯이
거듭하여 길 위에 넘어져 파인 상처들마저도
차라리 문들 걸고 한 시절을 소리 없이
이 비탈에 숨을까
어느 한 곳 마음을 둘 곳이 없어 헤매다가
잠시 머무는 외진 남포리
아무리 지우려고 몸부림처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 얼굴들....
마치 잠든 것처럼 고즈넉한 마을에
희끗희끗 성긴 눈발이 날리고
뒷 숲에서 우는 새소리가 들을수록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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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호천
오늘도 고기비늘같이 햇살에 반짝이며
미호천 물은 흐르는구나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지난날들이여
뒤돌아보면 후회스러운 것이 어디 한두 가지냐
까닭도 모르는 이별이라든지 눈물,
그리고 오랫동안 아물지 않는 상처들....
어두운 한때 벼랑 끝을 함께 걷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오직 듯 하나에 목숨을 건 사람에게는
흰 모래톱처럼 무더기로 쌓인 슬픔을
징검다리 건너듯이 건너온 것이 인생이리
그리워하지 말자
다시 돌아오지 않은 모든 시간 속에서는
무엇이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흐르는 물 위에 잠시 어리는
옛사랑의 그림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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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의 시
온 땅 위에 가득히 내리는 햇살이 오늘따라 새롭다
움도 안 튼 나뭇가지들 사이로 문득 스치는
희미한 연초록의 잔물결들 까지도
처음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어느 누구 한 사람 어디에 잠깐 서 있다가 사라질지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슬방울 하나 떨어진 뒤에도 숲은 아무 말이 없듯이
산다는 것은 어쩌면 모래밭에 발자국을 새기는 것
바람이 그것을 장난처럼 다 지운들 어찌 탓하리
오오, 놀라워라
어차피 죽은 풀잎들은 죽은 풀잎들에게 맡기고
땅 밑에서 들썩거리는 것들을 비롯하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다시 살리는 신비한 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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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생각
여기에는 가랑비 내리고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내 안에 언제나 변함없이 절절히 뜨겁게
가득히 있는 그대여
사무치는 내 마음을 그대에게 보낸다
몸부림치며 떨어져 겹으로 누운 젖은 잎들에 살아서
바람은 스산하고 비가 오고 어스름이 깔리고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옷 벗은 나무처럼 쓸쓸히 우두커니 홀로 서서
내 안에 잔잔히 이슬 묻은 흰 꽃같이 함초롬히
눈물겹게 머누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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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에서
바람도 없는데 누가 숨어서 나무들을 흔드는가
온갖 생각들이 마음 안에 어지럽게 흩날리듯이
이곳에는 하루 종일 나뭇잎이 지는 중이다
어찌하여 세상에는 괴로움이 이렇게 많을까
저 잎새들이 스스로 떨어져 땅에 눕는 것처럼
언젠가는 누구나 잠들어 흙에 묻힐 뿐인 것을
밤안개 속에 고갯길을 넘는 일 같은 것이 인생이다
오직 꺼지지 않는 꿈 하나를 등불 삼고
때로는 뒤돌아보며 회관에 잠긴들 어떠리
모질게 살아온 날들만큼 설움이 크거든
이 가을 사람들 서로 등이라도 쓰다듬어 주어야지
산은 붉고 하루 종일 햇살이 눈부시고 나뭇잎이
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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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산 입춘
창밖의 저 낮은 흙산 개화산으로부터 나의 봄은 온다
희부연 물안개에 묻혀서 설렘과 함께
깊은 옹달에도 눈이 녹고 얼음이 풀렸느냐
산등에 더부륵이 선 나무들 마치 죽은 것 같았지만
지난 한 철 한 그루도 말라죽지 않았듯이
내 마음에 이미 다 지운 꿈 자락들이 웬일인지
꿈틀대며 낱낱이 되살아나는구나
보아라, 여기저기 내 몸에 상처를 남긴 것은
세월만이 아니다
비스듬히 누운 작은 산 개화산을 끼고 흐르는
앞 강물 위에 문득 푸르스름한 잔물결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바람만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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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찾아서
나는 오늘도 나의 그를 만나러 간다
그는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아무래도 그는 나의 인생이다
내가 살아서 서로 사랑을 말할 때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그를 만나러 내가 가는 운명의 길,
그 앞에서 드디어 내 몸이 부서진들
무엇이 아까울까
날마다 만나도 또다시 그리운 이
나는 오늘도 나의 그를 만나러 간다
그는 어디에나 분부시게 서 있거나
어디에도 흔적도 없으리라
가시밭의 백합꽃, 혹은 그의 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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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내 기쁨
너는 검붉은 구름장들 사이로 문득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아침 햇살
너는 희뿌연 물안개 피우며 잔잔히 흐르는 강물
너는 오래 잠든 나뭇가지 끝에서 비로소 움트는 새순
너는 빈 들녘의 작고 여린 풀잎들을
일일이 다 쓰다듬고 오는 부드러운 바람결
너는 짙게 어두운 산허리에 떠오르는 둥근달처럼
온갖 내 슬픔들 위에 불현듯이 찾아온 기쁨
너는 끝도 없는 거친 모래벌판 한 자락에 솟는
맑은 샘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너
너는 내가 밤마다 한가운데에서 방향도 없이 헤맬 때
등불처럼 반짝이는 남쪽 하늘의 눈부신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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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패리에서
일찍 마른 옥수수 잎사귀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뙤약볕은 눈부시다
지나간 여름 동안에 내가 일부러 남은 꿈들을
낱낱이 지운 것은
아직은 몸 하나 이곳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쉬움을 다 채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지켜주는 이가 있음을 안다면
도대체 내가 그 무엇을 염려할 것인가
때가 되면 누구나 돌아오지 못할 길을
홀로 떠나는 것
쑥부쟁이 어우러진 꽃잎들도 시들어
땅에 질 때에는 혼자이듯이
언젠가는 내 넋이 산안개처럼 허공에 흩어지기까지
내게 남은 시간에 세상을 더욱 사랑할 일이다
이름만 두고 이미 가고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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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 강에 나가
강은 얼고 눈보라가 치고 나는 홀로 서글프다
푸른 물에 자맥질하던 그 많은 흰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오래전에 멀리 떠나간 사람은 소식도 없고
얼음 위에 눈이 쌓이듯이 그리움만 쌓이는구나
나는 어쩌면 이 추운 날 절대로 지우지 못할
꿈 자락을 품고 잠든 한 척의 빈 배
넋으로라도 내가 가리라 오지 않는 이에게
몸은 차라리 이곳에 묶어두고
온 들에 소리도 없이 어스름히 내리는데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붉게 타는
저녁 해를 등지고 무수히 반짝이던 잔물결들은
다 어디에 숨었을까
언 강에 눈보라가 치고 이미 인적은 끊어지고
내 안에 눈물은 차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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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어디에나
풀잎 속에도 모래알에도 흙먼지 속에도 그가 있다
아직은 잎도 안 난 가지 끝에 눈부신 흰 꽃잎들을
밀어 올리는 그
한동안 그가 저 멀리 햇살을 옮겨 놓았다가
때가 되어 적당히 땅으로 잡아당기니
숨 쉬는 온갖 것들이 눈을 뜨고 꿈틀대는구나
물결치듯이 해마다 다시 오는 초록은 그의 옷자락
따뜻한 바람결은 보이지 않는 그의 입김
돌 틈에도 숲 그늘에도 여울의 바닥에도 그가 있다
이슬방울 하나에도
그가 문득 여기저기 물처럼 스며들고
그렇게 하여 사물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봄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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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 가는 길에
내 마음은 어디에서 무엇이 변하여 내 안으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몸은 본래 물이었던 것
밤새 이슬방울로 맺혀 있다가 때로는 흥건히
땅을 적시고 여울 져서 소리 내며 흐르는 물
내 몸은 저 가을산 등성이에 피어오르는 안개였던 것
그림자도 없이 단풍나무 숲길을 지나가는
바람이었던 것
나는 어느 쓸쓸한 날, 비에 젖은 가랑잎이나
눈 시린 햇살에 바스러지는 꽃잎이었던 것
풀이고 먼지였던 것
나에게 오기 전의 내 몸은 한 줌 흙이었던 것
============
+ 흐린 날 조천리
나도 역시 흐린 날 조천리에 있네
이름만 불러도 눈물 나는 그와 함께
물안개 피어오르는 외진 바닷가
눈먼 보리숭어 뛰는 곳
듬성듬성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며
곰보딱지 검은 돌담을 짚고 서서
해오라기 흰 새들만 오가는
한낮에도 고즈넉한 그의 집
보자기만 한 통유리 창문으로 스치는
쓸쓸함이여
울지 마라 외로운 것도 인생이라니까
사는 것이 궁금하여 문득 찾아온 길
한나절도 그의 곁에 못 머물지도
나도 역시 흐린 날 조천리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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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포에서 하룻밤
내 마음이 외지고 잔잔한 저 바다이고저
때를 맞춰서 밀었다가 써도 소리 내지 않고
붉은 달빛 아래 반짝이면서도 다소곳하고
그윽한 오늘 밤 격포의 바다
세상의 그리움들이 여기 다 모였는가
아직도 내 손으로 내 마음을 누르지 못하니
바닷가 젖무덤 같은 낮은 산으로 눕거나
깎아지른 벼랑 아래 물풀이 되어 숨을까
눈비바람 물결치던 지나온 길을 지우리라
나에게 남은 마지마 날들을 위하여
슬픈 내 발자국들을 기억에서 지우리라
내 마음이 고요하고 아늑한 저 바다이고저
잠 안 오른 오늘 밤 창밖의 바다
거울이듯이 티 없고 비어 있으면 쓸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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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나무 아래서
무엇에게나 절정은 있다
흰 목련꽃들에게도
겨우내 그 입술 앙다물고 움츠려 있다가는
햇살 가득한 오늘 하루 화들짝 피어나다니
살다 보면 사람에게도 이런 때가 있을까
순간에 질지라도 지금은 온몸으로 피는 저들처럼
화사한 꽃 이파리를 드리울 날이
눈물의 밤을 새우며 뒤척이는 기다림의 뒤에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자
오던 길을 마음안에서 흔적도 없이 지우려무나
누구에게나 절정은 있다
바람이 자고 구름이 걷히면 어느 틈에
곱고 흰 목련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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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어느 날 오후
저 초록이 나를 살게 하네 초록의 숲이
저 초록의 숲이 나를 살게 하네 숲에 이는
바람결이
잎마다 열린 이슬방울들이 나를 살리네
여울물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물아래 여럿이 떠다니는 모래알들이
숨어서 우는 새소리가 나를 살리네
작은 새들이
가난한 마을에도 무지개는 뜨는가
해를 지고 노는 저 아이들이 나를 살게 하네
저 하늘이 나를 살게 하네 저 푸른 하늘이
저 초록이 나를 살게 하네 초록의 숲이
저 초록의 숲이 나를 살게 하네 숲에 이는
바람결이
바람결에 묻어져 오는 꿈의 조각들이
===============
+ 어느 가을날 저녁에
알 수 없는 사랑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아무도 없이 누구나 홀로 빈 들에 오래
서 있지 못하리
숲을 이루는 나무들에서부터 아주 작은
풀잎에 이르기까지
붉고 낮은 초저녁달이 살며시 굽어보는
달 그늘 아래서 귀뚜라미는 왜 우는가
지상의 영원하지 않은 시간 위에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들이
삶을 만드로 슬픔을 만든다
때가 되면 어느 곳에나 물안개처럼 그윽하게
피어오르고 밀물처럼 넘치는
신비한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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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소화 한 송이가 나에게
너를 볼 때에는 마지막 보듯이 하마
어느 시간인들 잠시라도 머문 적이 있더냐
무시로 휘몰아쳐 오는 비바람에
언제 질지 모르니
내가 능소화 한 송이로 피어 있는 동안에는
너를 볼 때마다 마지막 보듯이 하마
별도 없는 어두운 밤 홀로 이슬에 젖어 있다가도
아침 햇살 아래 너를 볼 때에는 언제나
그러다가 시들어 소리도 없이 사라진들
슬퍼하지 마라
내가 올 때처럼 가만히 떠나는 것은
또다시 불꽃 같은 주황이 꽃잎으로 너에게
돌아오기 위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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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뗏목
아내와 내가 탄 뗏목이 급한 물살에도 부서지지 않고
여기까지 떠내려왔으니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마치 축복이듯이 아이들이 오고,
하루가 달리 자라는 것을 보는 동안에는
어느 거친 강굽이에서도 우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몸은 지치고 살림살이가 거듭하려 물속에 가라앉을지라도
저 허공의 새들로 그러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이들은 품을 떠나고
아내와 내가 또다시 둘이 되어 뗏목을 젖고 가는 물길
유난히 푸른 달빛 아래서는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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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
하염없이 비가 내리네
지난날 내가 군인들의 총부리에 떠밀려서 광주 감옥에
오래 갇혔을 때
면회도 안 시켜주는 감옥 앞에 날마다 오셔서
담장을 주먹으로 때리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우시던
어머니의 눈물 같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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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
나는 바람일까 먼지일까 지푸라기일까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일까
사람이 어차피 죽는 것이라면 선한 흔적을 넘겨야지
그것이 비록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일지라도
오랜 시간의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못한다
본래 그림자였거나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것같이
그래도 내가 이 별에 잠시 머물 뿐이면서도
한사코 긴 노래를 그치지 못하는 것은
살아서 잔물결의 하나이고 싶은 까닭이겠거니
이제 와서 지나온 먼 길을 돌아본들 무엇하리
더욱이 깊은 수풀 속에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회한에 잠길 일이다
내가 마치 키 큰 나무인 것처럼 돌인 것처럼
물 위에 떨어지는 물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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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하나
먼 산 하나 내 마음속에 있네
내 어린 날의 낮은 흙산
비탈에 분홍 꽃잎 흐드러지고
왕소나무 구부정히 선
그 산 하나 내 마음속에 있네
정겹고 아늑한 작은 마을 뒤에
가만히 두고 온 산
그 산이 내 마음 속에 있네
굽은 강물 애돌아 흐르는 곳
연둣빛들을 건너 낮은 산 하나
세월이 아득히 지나도 뚜렷이
먼 산 하나 내 마음속에 있네
=======
+ 하얀 강
하얀 강을 건너서 너에게 가리
노래가 되어 꿈이 되어 너에게 가리
두꺼운 얼음을 밟고 눈밭을 지나서
붉은 가슴 하나로 너를 만나리
목이 쉬도록 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너에게 가리
새들도 안 오는 길
한낮에도 고요한 언 강을 건너서
올 때처럼 혼자서 너에게 가리
하얀 강을 건너서 너에게 가리
송곳 같은 바람 끝에 내 몸이 부서지고
으스러져도
---------------
+ 마음의 길
길이 없는 곳에 가서 길이 되고 싶다
물이 없는 곳에 가서 물이 되고
바람이 없는 곳에 가서 바람이 되고 싶다
누가 저 벌판에 손금처럼 줄을 그었다
강이 없는 곳에 가서 강이 되고 싶다
영혼들만 모여 사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산그늘을 따라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
끝도 없는 모래밭에 발자국을 찍고 싶다
새들이 다투어 어지럽게 진흙을 밟듯이
길을 만나면 길이 되고 물을 만나면
물이 되고 바람은 만나면 바람이 되리
가다가 지치면 차라리 마음의 길을 가라
아무도 없이 혼자서 맨몸으로 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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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한 철
여름 한 철 너에게 사로잡혀서 나는
푸른 잎이 누렇게 변한 줄도 몰랐다
네 앞에서 눈이 멀고 듣지도 못하고
넋 나간 듯이 네 모습만 바라보다가
저 하늘이 파랗게 높아진 줄도 나는
몰랐다
여름 한 철 너에게 사로잡혀서 나는
저녁 안개 걷히는 숲 깊은 산허리에
붉은 달이 기우뚱 뜨는 것도 몰랐다.
네 눈빛에 거듭하려 자지러지고
네 목소리에 가슴이 뛰는 동안에
백날 열흘이 하루같이 지나간 줄도
나는 몰랐다
창밖에 귀뚜라미 풀벌레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옷깃을 여미기 전에는
---------------
+ 하늘의 산
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
그들은 거기에 산으로 있었다
해 지는 쪽으로 길게 늘어서서
무슨 말인가를 나누며
거기에 겹겹히 모여 있었다
흰 눈을 쓰고
산 너머 산으로 아득히 서 있으면서도
손에 닿을 듯 가까운
하늘의 산*
거친 바람을 앞세우고 물결치듯이
서둘러 모래밭을 건너와서는
깎아지른 벼랑으로 멈추었을까
여럿의 크고 다소곳한 민둥산들을
발아래 거느리고
땅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어느 봉우리 하나도 땅이 아닌
신의 산으로
무척 오래되고 신비한 전설처럼
*카자흐스탄 알마타 남쪽에 높이 늘어선
천산
==========
+ 나를 보낸다
불타오르는 듯이 흐드러진 붉은 꽃잎들을
너에게 보낸다
나는 아침 햇살을 받고 피어난 넝쿨장미의 꽃잎이다
너의 깊고 그윽한 가슴이 아니라면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결을 너에게 보낸다
나는 키 넘게 자란 갈댓잎을 눕히는
여러 갈래의 얄궂은 바람이다
까마득히 구름이 터진 틈으로 하늘이 보이다가는
잠깐 동안 닫히면서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너에게 보낸다
나는 화설처럼 땅 위에 꽂히는 빗방울이다
어디에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느냐
나는 일그러진 숲 그림자를 안고
네가 누운 산자락을 적시며 흐르는 여울물이다
------------------
+ 너에게 간다
내 마음을 주려고 너에게 간다
칙칙한 수풀을 지나 들을 건너서
내 마음을 주려고 너에게 간다
너에 대한 깊고 간절한 생각 하나로
나 이미 세상에 눈멀었으니
내 마음을 주려고 너에게 간다
억새풀 가시밭도 나를 막지 못하리
건듯 부는 한 가닥 바람결같이
무수한 나뭇잎들을 스치며
사랑을 주려고 너에게 간다
가다가 산비탈에 홀로 누운들
무엇이 아까우랴 너에게 가는 길에
입 속으로 가만히 그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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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교동에서
내 힘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이의 손에 움직이는 것을
저 은행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지는 것마저도
사람의 시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세상을 사랑해야지
온몸이 바스러져서 흩어질 때까지
어느덧 무교동 거리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뜻을 나눈 이들마저도 하나둘씩 떠나는구나
못 돌아오는 길을 갔다가 다시 돌아올 듯이
차마 이루지 못할 꿈을 안고 산다는 것이
그다지도 힘들고 괴롭더냐
온갖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시간,
가느다란 내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저무는 길을
혼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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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가면서
오늘 하루 산들은 유난히 조용하고
숲은 어디나 깊고 고즈넉하다
누가 세월이 물처럼 흐른다고 했는가
세상은 이곳저곳 속절없이 변하고
하루도 등 떠밀지 않아도
때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 갈 길로 가는구나
뒤돌아보지 마라
멀고 먼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어찌 회한의 눈물들뿐이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우연 속에서
하필이면 이 순간에
절절히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오래된 운명의 한 끝인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골짜기에도
여름날이 오고
오늘 하루 산들은 유난히 조용하고
==========
+ 청령포에서
축지법을 쓰듯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자동차로
나는 반나절 만에 달려왔는데
어린 왕은 울며불며 몇 날 며칠을 길도 없는
이 산골짜기에 끌려오는 동안에
이미 지쳐서 초주검이 다 되었겠네
그 어린 왕 청령포 푸른 물 건너 소나무 숲에
홀로 갇힌 날 밤에는
두견새 우는 소리에 얼마나 가슴을 죄고
물소리 바람 소리에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지금 내가 대낮에 스치듯이 둘러보아도
외지고 그늘져 으슥하기만 한데
그 어린 왕 이 산속 깊은 물가 어둠 속에서
한밤중도 되기 전에 반죽음이 다 되었겠네
까마득히 오백 년이 훨씬 지나갔어도
어린 왕을 죽인 손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외롭고 슬픈 어린 왕의 울음소리 내 귀에 들리네
어린 왕의 울음소리 내 귀에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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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숨어서 홀로
물은 숨어서 홀로 꽃잎을 피우듯이
바람은 떠돌며 영혼을 쓰다듬고
수풀을 만나면 수풀에 오래 머물듯이
나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만 사랑하고 기뻐하듯이
그의 손이 내 몸에 닿는지도 몰라
나도 모르게 그의 손길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 마음만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을까
나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만 사랑하고 기뻐하듯이
물은 숨어서 홀로 꽃잎을 피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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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라도 그윽이
길 위에 누운 햇살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다
지나간 겨울날이 너무나도 길었더냐
여기저기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게 놓아두고
종일토록 외진 들녘을 홀로 헤매고 싶구나
희고 노란 저 꽃잎들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쏟아지듯이 한꺼번에 텨져 나오는 것일까
이런 날에도 새들이 드물게 나는 것을 보면
저들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다는 것도 옛말
무엇이 서운하여 떠나간 이는 소식이 없는가
보드라운 푸른 풀잎을 밟고 오는 그 모습을
멀리 서라도 그윽이 바라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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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 변하여 밝은 아침이 되는 것
단단한 나무껍질을 트고 꽃잎이 피어나고
새순이 돋는 것
지붕 낮은 마을에 왁자지껄 아이들이 놀고
작은 새들이 수풀에서 지저귀는 것
바람은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느 곳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가
때가 되면 나뭇잎들도 떨어져서 흙이 되고
물이 되는 것
잔물결 이는 긴 강물 위에 산 그림자
홀로 일그러지는 것
어느 세상에서나 아름다움이 더러움을 누르고
기쁨이 슬픔을 지우는 것
놀라워라,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드는 이
아주 멀리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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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송이 꽃이 다른 꽃송이에게
여기 거친 비바람 속에 내가 꽃으로 피는 것은
오직 남에게 나를 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리
그래도 내 안에 가득히 오래된 말들이 있고
그 말들이 살아서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을 어찌할까
더욱이 조금도 그을리지 않은 깨끗한 말들이라면
무엇이거나 아름다움은 땅 위에 머무는 시간에
반비례하는 것
차라리 이 자리에 눈을 감고도 돌이 되고 싶어라
아무리 흔들어도 꺾이지 않는 돌에 새긴 꽃송이
언젠가는 내가 시들고 꽃잎들이 바람에 날리면
그땐 네가 나인 줄 알려무나
여기 거친 비바람 속에 내가 꽃으로 피는 것은
내 아픔을 내 몸 안에 감추기 위해서만은 아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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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
내가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
나의 노래의 샘은 마르고 기쁨은 사라졌다
내가 생각으로 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는 동안에
유리로 쌓은 티 없는 꿈의 탑은 무너지고
저무는 바다의 밀물처럼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하루 새끼 굶주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득히 그릇이 넘치는 것을
그래도 나는 왜 무엇인가를 더 가지려 하고
무엇이 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인가
내가 굳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세상에 홀로 맞서는 동안에
나의 혀는 굳어지고 영혼은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하얗게 부서졌다
마치 내가 죽으려고 사는 것같이
생각으로 무수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
====3>
+ 날개
내 등에 비로소 날개가 돋으려나 보다
온종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깻죽지가 간지러우니
나에게 만일 날개가 있다면
아득히 날아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리
긴 날개를 펴고 유유히 푸른 하늘을 날아서
지는 해를 따라서 저쪽으로 갈거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한가운데로
그곳에서는 무엇이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을
바람이 오는 쪽으로부터 흰 꽃잎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동안에
내 몸이 불같이 뜨거우니
드디어 내가 새가 되려나 보다
울면서 날아가는 새들에게도 길이 있을까
------------
+ 나비춤*
사랑하다가 죽은 이들이 나비가 되었나
비 내리는 구름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순간에
하나가 된 두 사람
연잎 같은 우산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싶었으리
오직 몸부림으로 오는 이별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 누가 한 낱의 전설로 그리 마음이 아플까
반달처럼 끊어져 보이는 다리 아래 잔물결 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뱃노래 소리만 구슬프구나
언제까지나 가르지 못할 두 사람의 애틋한 정이라면
아무리 두꺼운 무덤마저도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아라, 저 수천수만의 호랑나비 떼!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은 이들이 나비가 되었나
*중국 항주에서 "송성가무극'을 보고
쓴 시다. 이 극의 3막은 '서호'를
무대로 한 양산백과 축영대의 슬픈
사랑이야기로, 축영대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고 결국 두 사람이 이별 후에
죽어서 한 쌍의 호랑나비가 되었다는
전설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
+ 꽃 앞에서
저 검고 딱딱한 나뭇가지 끝에서 희고 붉은
꽃잎들이 터져 나오다니!
벌써 누군가의 은근한 손짓이 있었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투어 화들짝 피어나는
곱고 예쁜 것들
저것은 그의 숨결일까 기지개일까
무척 밝고 따듯한 햇살 아래서는
아무도 지나간 날들을 되돌리지 못하고
모든 내일은 남김없이 그의 시간일 뿐
여러 모양의 눈부신 꽃잎들은
오직 그를 기쁘게 하려고 피어나는 것이리
그리고 그는 언제나 내 마음의 깊은 곳에 있으니
봄날로 오는 그는 나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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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 팔당에
바람 불고 꽃 지는 날 하루
구리 팔당으로 가네
내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구리 팔당으로 가네
가다가 지치면 풀잎 위에 누울까
산을 넘고 들을 건너
구리 팔당으로 가네
해가 뜨면 해 그림자를 밟고
달이 뜨면 달그림자를 밟고
구리 팔당으로 가네
구리 팔당으로 내가 가리
내 발자국소리를 혼자 들으며
내가 가리 구리 팔당에
내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구리 팔당으로 가네
구리 팔당에 내가 가리
강 건너 푸르른 구리 팔당에
==========
+ 설날 대포리
세월이 오래가면 바윗돌들도 닳아지고 부서진다
돌에 새긴 옛 글자들이라면 더욱 일찍이
지나간 날들을 사람의 손으로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모든 어제는 아무도 바꾸지 못하고
내일은 오직 보이지 않는 이의 시간일 뿐인 것을
아직도 이곳 대포리의 산과 들에 떠도는 넋이란
죽어서 흙이 된 몸들과
살아서 흙 위에 서 있거나 걷는 몸들을 묶는 끄나풀
조상의 무덤 앞에서 제 인생을 서글퍼 하지 마라
누구나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을 터이니까
땅이 돈 안 되는 시절에는 겨울에도 검푸른 나무들이
가득히 어우러져서 봄을 기다리건 산비탈에
오늘은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느냐
마을로 가는 신작로는 파여서 이미 끊어지고
비스듬히 누운 쇠 울타리를 따라서 점점이 눈 위에
찍히는 설날 성묘길의 발자국들이
마치 종이 꽃잎 붉고 흰 꽃잎들 같아서 안쓰럽다
-------------------
+ 오직 그의 것
세상에는 그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풀잎들의 영혼에서부터 모래알들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무심코 스쳐 가는 바람결에 지는 꽃잎,
여울에 비추이는 달그림자도
오직 그의 것
하늘 아래 아무 곳에도 내 것은 없다
어떤 몸짓으로든지 드러나서
땅 위에 놓여 있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그의 것
오는 듯이 사라지는 꿈 자락들과
죽으나 사나 그를 붙들고 사랑하는
이 애틋하고 절절한 내 마음속까지도
------------------
+ 우연이듯이
모든 것은 홀로 우연히 지나가는 곳
살았거나 죽었거나 하나같이 우연히 지나가게
하라
사람의 마음 안에 수없이 스치는
밝고 어두운 여러 갈래의 생각들은 물론이요
바람이나 빗방울 흙먼지 모래일까지도
그렇지만 아무 뜻도 없이 풀잎 끝에 이슬이
맺히고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것일까
보아라 깊고 깊은 슬픔을 슬픔이 아니게 하고
우연을 우연이 아니게 하는 이는 따로 있다
어디에선가 마치 우연이듯이 번갯불을 보내고
천둥소리를 훨씬 나중에 보내는 그
------------------
+ 월롱역에서
이른 봄날 우연히 파주 월롱리에 왔다 가는 길
햇살 밝은 시골역의 플랫폼에서
빈 들을 가로질러 달려올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어느 시간의 한 굽이에서 기차는 마치
꿈결처럼 덜커덩거리며 내 앞에 다가오고
나는 쫓기듯이 차 속으로 스며들리라
몸은 비록 아득히 서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그리운 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또렷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일까
너무 적막하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 이곳의
고즈넉함이 오히려 내 마음을 휘젓는구나
길은 멀고 산모통이에 아직은 기적소리 들리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오직 한 가지,
그의 기쁨이 되는 것!
===========
+ 추운 날 밤길
둥글고 흐린 달이 걱정스러운 듯이 나를
내려다보는구나
길가에 늘어선 옷 벗은 나무들까지도
거듭하는 낙심도 어쩌면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운명이 손금처럼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면 더욱이
인생이 때로는 뜻밖의 길로 나를 이끌고
얼음 위에 눕혀도
내가 마지막 한 가닥이라도 꿈을 버리지 않음은,
누구인가 나의 영혼을 이끌고 있음을
믿는 까닭이라
살 속에 파고드는 찬바람을 보내오고
가로등 불빛으로 나의 긴 그림자를 만드는 이
그렇지만 이곳에서 내가 홀로 어찌할까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내 마음을 둘 곳이 없고 발걸음은 무거우니
---------------------
+ 누구나의 인생
한여름 날의 백담사 절 아랫동네인 용대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난밤의 드높은 하늘에 반짝이던 별빛이라든지
불 켜진 방으로 들어오려고 안달하던
하루살이 나방이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구나
어쩌면 사람도 그런 날벌레들과 다르지 않아서,
그것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머리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오로지 꿈을 향하여 온몸을 던지는 것이라
살아 있다는 뜻으로 모두들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혹은 바위틈에 하얗게 부서지다가 혹은
시퍼렇게 흐르면서 숨을 고르는 그곳 내린천의
참 맑은 물줄기를 따라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디쯤에서는 차들이 밀려서 꼼짝 못 하다가
어디쯤에서부터 인가는 무척 시원하게 달려왔는데,
이를 어찌할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누구나의 인생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
+ 즐거운 그의 집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곳이 얼마나 귀한 곳인지 비로소 깨달은 다음에
오던 길을 따라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두 번 다시 못 볼 듯이 떠나온 곳일지라도
때 묻고 상처 나고 눈물만 가득한 내 몸을
얼싸안고 반겨주는 이가 있는 집
지난날처럼 그의 품 안에서 날마다 함께 사는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죽어서 가는 먼 곳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즐거운
그의 집
------------------------
+ 모래알 하나에도
온갖 꽃잎마다 그윽한 그의 눈길이 스치고
잎사귀 하나에도 그의 영혼이 머물 듯이
여울의 잔물결들이 낱낱이 그의 뒤척임이고
숲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어느 한 가닥이라도
그의 숨결이듯이
그의 마음의 다른 모양이고
비 그친 뒤의 산안개는 아무리 보아도
그의 흰 옷자락이듯이
내가 걷는 발걸음 걸음마다 언제나 그가
함께하기를
산이나 바위, 나무들은 물론이여
모래알 하나에도 그의 영혼이 머물 듯이
=============
+ 안영천변 저녁놀
내 키보다 더 높이 옷자란 갈대 수풀 속에서 숨어서
갈댓잎이나 될까
갈대 수풀가에 피어나는 패랭이꽃 흰 꽃잎이나 될까
장난이듯이 저 냇물을 일그러뜨리는 산들바람이나 될까
내가 기다랗게 솟아난 갈대라면 풀꽃이라면
검은 산 앞산을 넘어 사라지는 저녁놀을 보겠네
저녁놀을 보겠네
시퍼렇게 우거져 칙칙한 갈대라면
이 깊은 갈대밭에 잔물결을 이루는 산들바람이라면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새들이 우짖는 소리를 들겠네
아무렇게나 모여 서서 몸을 흔드는 갈댓잎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따라 흔드는 갈댓잎이나 될까
갈대 수풀가에 피어나는 패랭이꽃 흰 꽃잎이나 될까
----------------------------
+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이미 그가 내 안에서 가득 찼으니
어디에선가 화살이 날아오고
누가 나를 밀고 넘어뜨려도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내 발끝이 시리도록 찬물 흐르고 얼음이 얼어도
나는 아무 곳으로도 떠나지 않으리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으리
그가 나를 송두리째 사로잡았으므로
해는 땅의 건너편에도 내 마음을 끌어당기듯이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바람이 불고 물결 이 쳐도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
+ 그의 노래가 허공에 남아서
그의 노래가 허공에 남아서 나를 울리네
남 다 잠든 사이 홀로 깨어 부르던
그의 슬픈 노래가 나를 울리네
그의 노래가 물결이 되어 나에게 오네
먼 하늘에 구름처럼 떠돌다가 나에게 오네
그가 부른 노래가 허공에 남아 있다가
달빛으로 별빛으로 나에게 오네
그의 노래가 빗방울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시고
바람이 되어 내 몸을 떨리게 하네
땅을 걷듯이 물 위를 걷고 거친 바다를
잠잠케 하면서도
그 어디에 머리를 두를 곳도 없던 이
그의 노래가 지금도 허공 중에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나를 울리네
어둡고 가파른 산언덕에 선 나무 끝에서
넋으로만 부르던 그의 노래가
---------------------------------
+ 내 주머니에 티끌만 있을 때
내 주머니에 티끌만 있을 때
내 앞길에 풀은 시들고
가시나무 넝쿨 우거져 있을 때
찬바람이 불고 밤하늘에
별도 없을 때
그가 왔다 거친 들을 건너서
여럿 속에서도 혼자이듯이
쓸쓸하고
갑자기 눈물이 넘쳐흐를 때
깊은 바다 한가운데 물결은 높고
배는 기울 때
흰 옷자락 날리며 그가 왔다
물 위를 걸어서
내 앞길에 안개는 자욱하고
내 주머니에 티끌만 있을 때
까닭 모를 슬픔이 내 가슴에
가득히 차오를 때
====================
+ 내가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살아서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못 오는 길 밤길을 따라
쫓기듯이 넘어온 저 높은 산을 넘어
내가 살아서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은 거기에 풀잎들은 시들고
온 들에 눈물만 강물이 되어 흐르는가
허물어진 옛 집터에 늙은 나무의 그림자 지고
가랑잎 지푸라기 날린 들 무슨 상관이랴
슬픈 살붙이들 이미 떠나 흔적이 없어도
내가 살아서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찬바람 숨 죽은 오래 마른 수풀에 눕고
절절한 마음을 엮은 붉고 푸른 헝겊들
검은흙 돌무더기에도 입을 맟주리
저 눈 쌓인 흰 산 얼음의 산을 넘어서
내가 이 몸으로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
+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그가 어느 날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결로 와서는
일일이 나뭇가지들을 매만져서 꽃을 피우고
새 잎들을 움트게 하면서도
내게는 눈길 한번 주저 않았지만
모처럼 그가 가느다란 빗줄기로 마른땅을 적시고
잠든 벌레들까지 깨워서 움직이게 하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못 본 듯이 내 몸을 비켜갔지만
그가 진한 향기로 숲 속의 새들을 취하게 하고
입김으로 들의 풀잎들을 일으켜 세우면서도
일부러 그런 것같이 네게는 손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먼빛으로라도 그의 모습은 보면 언제나
가슴이 설레고 나도 몰래 얼굴이 붉어진 채로
===4>
+ 신기루
따가운 햇살이 풀잎들을 시들게 하고
돌을 쪼개서 모래알을 만든다
어디에서나 사람은 누구든지 혼자다
네가 힘센 쌍봉낙타가 아니라도
사막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아야지
물 한 모금으로 잠깐 목을 적신 뒤에
얼음같이 차고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이
소리 없이 흩어지는 것을 보느냐
네 몸이 지치고 마음이 아플 때
먼 길을 함께 가는 어진 이에게
운명을 걸어야지
아무것이나 함부로 바라보지 마라
그것이 너에게는 신기루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 가을 풀밭
저기 가을 풀밭이 무척이나 어수선하다
어떤 놈은 일찍이 땅에 드러눕고
어떤 놈은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연신
머리를 주억거린다
비록 하찮은 풀 이파리들일지라도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은
제 몸으로 영원을 지우는 일일까
눈 시린 햇살을 잘게 부수며 강물은
굽이돌아 흐르고
마른 들꽃 잎들이 깃털처럼 허공에 흩날려도
서글퍼하지 마라
누구나 홀로 길 위에 쓰러지고
몹시 외롭고 쓸쓸할 때에
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니까
--------------
+ 달맞이꽃
누구를 기다리나
강 언덕 풀숲에 핀 달맞이꽃
어둠에 그을릴라
샛노란 슬픈 꽃잎
달빛이 흐르듯이 지나간 자리
여린 바람에도 살포시 기우는
수줍은 꽃대
새 우는 소리 그치고
아무도 안 오는 곳
강 언덕 풀숲에 핀 달맞이꽃
------------------
+ 거리의 역사
그의 청아한 대피리 소리가 을지로 입구역
부근을 깨운다
까마득히 먼바다 너머 안데스 산자락에서
울려 퍼지던 그 소뢰
작달막한 키에 댕기머리를 쓴 가무잡잡한
인디오 사내의 뛰어난 연주 솜씨라니
저것은 남아메리카의 바람 소리일까
새 짐승 소리일까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일까
저 혼자 제 흥에 취해서 그는 몸을 흔들며
이것저것 연신 대피리들을 바꾸어 불면서도
그 소리를 누가 듣거나 안 듣거나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이곳 서울 한복판의 그늘 깊은 지하도를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거저 공으로
들려주는 것이니까
=========
+ 사당역에서
나는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저곳에서 전차를 갈아타듯이
모든 인생도 때로는 가는 길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우연히 사랑이 찾아오고,
이어지는 것들이 한결같이 넘치는 기쁨의
긴 시간들이라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어쩌면 또 다른 어제일 뿐인 오늘의 한 끝에서
내가 남들을 따라서 바쁘게 걷는 것은,
오직 하나 먹고 마실 것을 줍기 위함만은
아니리라
지금 여기 환승역 좁은 땅속 길을 오고 가는
뭇사람들을 비롯하여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꿈이 있고 그 꿈의 힘을 믿는다
그것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과는 상관없이
-----------------
+ 아무개에게
누구에게나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매우 거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네가 아픈 만큼이나 웃어보라
때로는 아무 뜻도 없는 헛웃음마저도
조금은 약이 되느니
일없이 너 자신을 남에게 견주느냐
거기에서 결국 불행의 싹이 돋는 것을
네가 아주 낮게 내려오고
몸을 다 비웠으니 얼마나 좋으냐
막다른 길 벼랑 위에서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라
허공의 까마귀들보다 너를 더 귀하게
여기서는 이 있으니
---------------------
+ 가을비 속에서
잎이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그리움이 깊고
내 마음을 달래려고 혼자 나선 길 위에
슬픔처럼 가득히 어스름이 내리고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이여
무엇이나 하나같이 끝이 있는 것이라면
내 기다림의 끝은 어디인가
진실로 내 살이 녹아서 깃털이 되어
허공을 가를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인가는 기어코 사랑의 불길로
내 넋을 태우리라
여기저기 가랑잎이 날리고 비가 오고
그리움이 깊고
내 마음을 달래려고 혼자 나선 길 위에
슬픔처럼 가득히 어스름이 내리고
-------------------
+ 나는 바람일까
이 순간에 나는 햇살을 받고 은빛으로 부서지는
잔물결인지도 모라
잔물결들 위에 까닭도 없이 스며드는 미루나무의
긴 그림자인지도 몰라
나는 바람인지도 몰라 가볍게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인지도 몰라 바람에 날리는 먼지인지도 몰라
어느 때인가는 사라지기 위해서 내가 이곳에 왔다면
처음부터 오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또다시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썰물이 되려고
애써 밀고 올라오는 흐른 밀물인지도 몰라
나는 어쩌면 안개인지도 몰라 이슬인지도 몰라
그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지도 몰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 위에서는 더욱 아무것도 아닌
헛것인지도 몰라
============
+ 문득 그가 와서
세상의 어느 때이든지 너의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이 잠깐 동안 이곳을 스쳐 지나가거나
조금 오래 머무는 것일 뿐이다
그 어디에나 필연으로 오고 가는 것이 그의
시간이다
달이 기울고 바닷물이 밀려오고
찬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지는 때도 오직 그의 때
그래도 너에게는 쉬지 않고 출렁이는
네 가슴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푸른 물 위에 산 그림자가 일그러져도
서글퍼하지 마라
너의 남은 날에 거침없이 살며 사랑하려무나
이 가을이 한때 문득 그가 와서 너를 수령에서
건지고 쓴잔을 거두리라
-------------------
+ 물가에 앉아서
아침 안갯속에 사방은 고즈넉하고
물은 잔잔하다
꿈쩍도 하지 않고 홀로 서 있는
해오라기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키 넘는 풀숲을 지나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자여
어느 곳으로든지 돌아가서 멀리
푸른 산등성이로 솟을 기다림의 끝은
언제인가
아무리 앞뒤가 막히고 캄캄할지라도
흔들리지 말자
저 강물이 소리도 없이 흐르듯이
인생도 그렇게 흐르는 것
마음 안에 가득한 것들이 눈에 쉽게
보인다고 했던가
바람 한 점 없고 아직 들 끝에
안개도 걷히지 않았는데
이따금씩 일그러지는 미루나무의
흐린 물그림자가 애처롭다
---------------------
+ 요즘 그의 하루
요즘 그의 하루는 바쁘고 부산하다
마른 풀잎들을 눕히고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꽃씨들을 멀리 날려 보내느라고
그래서 바람은 한사코 몸으로 말하고
새들만 왁자지껄 지저귀는 것일까
먼 곳에서 온종일 눈부신 햇살을 내려보내고
밤에는 달빛으로 풀숲을 덮는 그
오직 생각 하나만으로 이 세상의 초록을
지우느라고 그는 날마다 즐겁다
해마다 넉넉히 곡식의 낱알들을 여물게 하고
열매들을 향긋이 움직이는 것들 중에서
그 무엇이 영원하리
때가 되면 언제나 그렇듯이 어떤 것은
그 자리에 남겨 두고 어떤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느라고
요즘 그의 가을 하루는 쉴 틈이 없다
------------------------
+ 갈대꽃에 대하여
갈댓잎들도 저마다 기다란 꽃을 피운다
늙어서 센 머리카락처럼 불그죽죽하게
너무도 긴 여름의 한 끝에서 조용히
물은 잔잔하고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데
홀로 몸을 흔들며
얼마나 짓궂은 바람결들이
저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며 스쳐 갔던가
때로는 못 견뎌서 몸을 부려 땅 위에
눕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제는 그 안에 산처럼 쌓인 아픔들이
넘쳐서 밖으로 솟는 것이리
비 안 오고 햇살이 따가운 어느 한낮,
누구에겐가 꺾여서 구부러진 갈댓잎들도
꽃을 피운다
아무리 봐도 겉으로는 꽃이 아닌 슬픈 꽃
===============
+ 세월이 지난 뒤에는
세월이 지난 뒤에는 지금 여기 숲으로 서 있는 것들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들과 함께 변하여
가랑잎처럼 길 위에 누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사랑의 불길까지도
어디에서나 물처럼 흐르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면,
눈부신 꿈으로 와서 언제나 나를 속이는 것들도
때가 되면 머물던 자국도 없이 사라져 버리겠지
바람에 날리고 물에 씻겨서 지워지는 것들을 비롯하여
무엇이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올까
내가 한 그루 나무처럼 쓸쓸히 서 있는 곳마저도 변하여
보이지 않을 만큼 세월이 지난 뒤에는
-------------------------------
+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나를 낙심케 하지 마라
여기까지 오는 길에 수렁에 빠진 적이
몇 번이었고 얼음 위에 누운 적이
몇 번이었던가
내 가슴의 상처들이 시가 되었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까지도
웬일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온몸에 멍들고 응어리진 것들이
시가 되었다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들어보라
내 모든 슬픔이 시가 되었다
눈비바람 어둡고 거친 길,
발끝에 차이는 잔 돌멩이 지푸라기들도
--------------------------------
+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풀잎에게도 벌레들에게도 혼자만 아는
비밀이 있다
달이 기울고 하룻밤 사이에 나뭇잎이
다 지는 곳, 쓸쓸한 골짜기를 덮는
산그늘 뒤에도 비밀은 있다
그 누가 저 강물을 흔들어서 물결을
일으키는가
보아라 어느 곳의 무엇에게나 비밀은 있다
잔 돌멩이에서부터 먼지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 상관없이
그리고 나에게도 역시 비밀은 있다
머리카락 하나도 안 보이는 이를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것을 비롯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여러 가지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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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들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리
숲의 외로움이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구슬픈 풀벌레 소리 여울물 소리가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소리 없이 떨어지는 마른 나뭇잎들이
색 바랜 꽃잎들이 바람보다 앞서서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때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과
숨어서 우는 새들의 슬픔이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저 산의 새들처럼 울고 싶어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맨발로 가시나무를 덤불을 태우는 불길
앞에 서고
풀 한 포기 없는 빈 골짜기에서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끝 모르는 숲의 외로움을 따라서 나는
그에게 가리
________*70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1>
남포리
미호천
3월의 시
그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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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서
개화산 입춘
그를 찾아서
너는 내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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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패리에서
언 강에 나가
그는 어디에나
인제 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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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조천리
격포에서 하룻밤
목련나무 아래서
초록, 어느 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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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 저녁에
능소화 한 송이가 나에게
===2>
뗏목
봄비
흔적
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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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마음의 길
여름 한 철
하늘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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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낸다
너에게 간다
무교동에서
이천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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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에서
물은 숨어서 홀로
멀리 서라도 그윽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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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이 다른 꽃송이에게
내가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
===3>
날개
나비춤
꽃 앞에서
구리 팔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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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대포리
오직 그의 것
우연이듯이
월롱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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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 밤길
누구나의 인생
즐거운 그의 집
모래알 하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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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천변 저녁놀
오늘은 안 무너지겠네
그의 노래가 허공에 남아서
내 주머니에 티끌만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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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4>
신기루
가을 풀밭
달맞이꽃
거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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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역에서
아무개에게
가을비 속에서
나는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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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가 와서
물가에 앉아서
요즘 그의 하루
갈대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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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뒤에는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새들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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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 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