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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아 ~

양균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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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

나무그늘
무게에 가슴이 눌리는 언뜻
무수히 얻어맞는다
장맛비 잠시 그친 후
접은 우산 짚고 돌계단 오르려는데
잊고 지내던 하늘에서 누군가
물벼락 서늘히 쏟아낸다
수천 잎이 한꺼번에 부리는 물통
늙은 은행나무가 오직 내게 베푸는 세례
그리하여 느닷없이 씻기면 좋으련만
지난가을에도 그랬다
몰래 영근 과실들
늦은 태풍에 허공을 치더니
누런 과육으로
바닥에 드러눕더니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겨우내 시간을 쟀다
고요를 흔드는 한 그루 팬터마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흉중흉내를 아무래도 감상할 수 없다
오락가락 날씨가 형성하는
여름 한낮 불협화음
조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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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초저녁 나무그늘을 딛고 내게 왔다
가누지 못할 무게에
뒤뚱대는 몇 발짝
너는 달려들고
나는 얼결에
무릎 한짝 땅에 붙였다
엉덩방아 찧기 바로 전
품에 안았다
안아 올리는 방긋
억누름에 맞서는 가벼움
흔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나뭇가지 흔들거나 물결 일렁이게 하는
그게 내 가슴팍에 있다
두 팔은 순하게 내 목을 안고
떡잎이 허공에 열리 듯
내 등 뒤 무얼 더 안으려는데
너의 두 팔 사이에서
내가 서녘 하늘로 번졌다
무서움 모르는 포옹에서 마침내
내가 어딘가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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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걸리* 1

초여름 메타세콰이어
그림자 한 채씩 자운영 논두렁에 내려놓으면

패인 골마다 튀어 오르던 시외버스를 따라가 보자
뒷좌석 차창을 좇아

마른 돌가루가 신작로에 보얗게 일어나면
아버지 등에 업혀 흔들리던 십리, 이 길에는

먼 들빛만 데리고 가겠다

*전남 담양군 석현리, 동무들은 이곳을 시걸리라고 불렀다. 
이것을 마음으로 불러내면 식은 밥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걸로 빚은 막걸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 현학적으로 시가 배고픈 마을이라고
억지로 써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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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걸리 2

기억은 자꾸 제멋대로 흘러

야생 밤송이 칡넝쿨 하늘에 살짝 벌어지던
금성산 첫 원정에서

빈 도시락 반도 못 채운 덜 여문 밤톨로
우물가 엄니 곁에 돌아와 섰다

주머니칼로 벗긴 마늘쪽
한입에 털어 넣은 매운 무표정으로

다가서고 싶었던 곳
석현다리 난간에 기대 흑점으로 일렁이는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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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걸리 3

불씨에서 눈물어린 입김을
아니라면 느리고 완전한 잿빛 연소를

기억이란 
보듬고 갈수록 가벼워지지만

빗속에 더 선명한
도서실 창밖 칸나 꽃잎이 아닐까?

더 차가워질 수 없는
마지막 체온이 아닐까?

작아진 교정에서
나무가 저리 크고 실한 것은

사라진 것들이 아직
근처 어딘가에 거름을 주기 때문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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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그친 비가 다시 오지 않는다
산사의 망중한은 여기까지
처마 밑 나서려는데
들리나요, 수국 꽃잎에 잠기는 저녁 어스름
갈참나무 떠난 깃털 족속의 날갯짓
배후나 언저리에서
아주 사소하게 일어나는 파동
들리나요, 종이 없는데 종소리를 내는 것
젖고 싶은 마음에 물이 빠지면
소란했던 빗소리 뒤로 정적이 따라오면
잠깐 살아나는 것
들리나요, 바람에 부대끼는 내가
훌쩍 날아가도 털썩 내려앉아도
여전히 남은 잎으로 떨고 있는 떡갈나무
숭숭 뚫린 수천 벌레 구멍에서
빗소리 그치자 으스스 떨고 있는
금 간 종소리
들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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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폭포水鍾瀑布

여름에는 들리지 않았다

물 참 갈참 물푸레 나뭇잎이 지고
찬 이슬에 오그라들다 멍들다

가끔은 장승바위 품은 늙은 소나무
누런 솔잎으로 사락사락 갈 길 태우고 있는데

골짝 한 굽이 낭떠러지

거센 물살이 잦아들고
바람마저 제풀에 지쳐 나앉은 후

물소리 그치고 쇳소리 난다
산채만 한 돌덩이가 느릿하게 흘려보내는 소리

바닥 비치는 용소로
낙하하다가
햇살에 산화하는 늦가을 울음소리

저리 단단히 제 몸 다잡아 안고 있어도
돌부처를 새기기엔
너무 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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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살리스

풀 한 가닥 옮겨왔다
다 자란 잎이 핏빛 심장을 닮았다
쥐면 바스러질 꽃빛
산그늘 쪽으로 흔들리는 교태
그리하여 붙여졌을 꽃말이 싫어
멀리했던 것인데
날씨만 흐려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풀
소슬바람에 옮겨줄 신경증이 두려워
주변만 맴돌았던 것인데
뚝배기 해장국집 창밖
오래 방치된 무성한 화분들 틈에서
딱 한 뿌리 뽑아냈다
장맛이 그친 초가을 어디쯤에선가
나도 모르게 슬쩍 솎아냈다
잔뿌리도 변변치 못하게
마음만 희멀겋게 자란 풀대 꼭지에서
자줏빛 잎사귀 셋
나비 세마리로 맺혔다
거꾸로 매달려 날개를 접었다
밥집에서 훔쳐온 사랑초
창가 물병에 꽃았다
한 마리라도 떠나지 않기를
혹시 늦은 햇살에
날지는 못해도 날개 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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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 밴 다인

헌책이 태평양을 건너왔다
더 이상 서점에 진열되지 않는 것
책값보다 배송로가 세 배 비쌌다
붉은 속지에 아직 튼튼하게
도서카드 붙여 있다
좌측 상단 분류기호 811.54
4자에 숨은 세모는 리본잉크로 뭉개졌다
혹시 더럽혀질까
1973년 뉴욕 산 초판본
커버에 비닐이 씌워졌다
마지막 거주지는 캘리포니아 주
나파 카운터 공립도서관
거기서 오래 제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러다 쫓겨났을 것이다. 관심 밖으로
서가 머지 내려앉은 책 여기저기
제호보다 더 큰 대문자로
DISCARD 도장이 찍혔다
저가에 폐기된 시집
부제 <발표 및 미발표 시>가 알려준다
한 시인이 일생의 시를 여기에 모았다는 걸
지향紙香 배나오는 묵은 책갈피
활자는 그만두고 체취를 맡고 싶은데
먼저 그어진 밑줄에게 손끝이라도 내주려는데
찾아다니는 여백에 사람이 없다
행간 어디엔들 누군가 낙서를 남겼어도 좋으련만
전미 저작상과 볼링겐상에 빛나는
버려진 시집
내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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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교

잘 웃는 게
뭐 대수인가요
어깨 몇 번 더 들썩인다고
가문에 누가 되나요
꾸며서 하는 짓도 아닌데
마주 앉아서 이마 좁혀 살짝
나란히 걷다가 고개 돌려 슬쩍
어서 말하라고 듣고 싶다고
그렇게 몸이 절로 움직이는 게
남자답지 못한 건가요
오늘도 줏대 버리고
실실 눈웃음 보내는 나에게
지상의 연인은
기껏 인상 좋다 해놓고
주저 없이 지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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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찾는 곳

음식 때문만은 아니다
가지런히 묶인 귀밑머리 탓도 아니다
저만치 어쩔 줄 모르는
나이 든 수줍음일 리도 없다
세상의 빛이 소리 없이 잠기고 있는
흰 손에게 묻지 않는다
반찬 그릇 사이로 환영幻影인 듯 스쳐간 약지
젖은 마디에 찍힌 더 흰 반지 자국에
이유를 물을 수 없다
조신함이란 먼 데서 아무도 모르게 온다
다시 찾고 싶은 느낌은
선뜻 다가서지 못하면서 머무는 마음은
단지, 어색한 낯익음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생을 살면서
어깨너머로 돌아보는 닮은 시간 탓일 것이다
고깃살이 익어가는 석판에
묵은지 눈물이 찔끔 배어나는 동안
누나의 식당에는 찾아갈 용기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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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물 52호

있다고 해도
굳이 찾지 않는 것이다
없는 듯 있는 것
아울렛 세일에서 구입한 철 지난 외투
주머니 속 좁은 비닐봉지에
처음부터 갇혀 있는 것
훗날 내가 소식도 없이 지상을 떠난 후
DNA 조사를 위한
손톱과 머리칼 같은 것
미해결 사건 보관소에 남겨진
증거물 52호
누군가의 가슴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장맛비에도 끄떡하지 않은 것
세탁소에서 돌아와
옷장 깊은 곳에 덩그마니 숨어 있는 것
철이 바뀌어도
어둠 속 손길이 간혹 스쳐도
도통 먼저 모습이 드러내지 않는다
단추가 떨어진다,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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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 꽃 피는 겨울

겨울 꽃 수만 다발이
아침 안개에게 노란 입김을 분다
가을 쌀농사는 이미 잊었다
네팔 망고나무에서 인도 금잔화에게
외줄기 들길로 바람이 분다
가고 가더니 나지막이 뱀 꼬리를 감춘다
물소 두 마리도 따라간다
두 혹 곱사등이 끌고 가는 달구지에서
노적가리 썩어가는 시간 쪽으로
포대 짐이 비죽 쳐진다
바이라와 평원은 수리야의 영토였을 터
터주 까마귀 떼 어딘선가 돌아온다
수평 잡는 날갯짓에
무너진 대문 대신 활짝 열리는
열두 짝 바나나 잎
먼지 인 채 삐걱
곡물상회 저울추가 기우뚱
무게를 다는 것은
놋쇠접시 녹 문양인지
마을 언저리로 건너오는 초원의 향기인지
흙벽에다 쇠똥 붙여 말리고 있는
차도르 아낙을 본다
땅 끝까지 무성한 겨자 꽃무늬의 비춤
이모작 대지를 어깨에 두르고
붉은 팔찌를 칭칭 감는다
이대로 나풀나풀 나비가 될 수 없다면
콧등에 땀이 솟은
어린 싯다르타이고 싶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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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줄을 긋다

비가 내린다
때 앉은 눈금 띠를 따라
삼십센티 대나무 자로 세로줄을 긋는다
한 곳에 잠시라도 머물지 않게
다만 지나감의 흔적으로
줄을 긋는다
낮은 처마와 먼 산 계곡 사이
구겨지다 만 하늘
재생 용지에
살 같은 직선이 세세히 그어지면
연필심에 침을 묻혀 내리쓸 것이다
팽팽한 줄 사이 흔들리는 시공에
시를 쓸 것이다
먼 강바람에 기울지 않도록
옆 밧줄에 씻겨 흘러가지 않도록
이번엔 분명한 말씨로
허리 세우고 시선은 앞에 두고
그렇게 너에게 곧바로 가게
마음을 쓸 것이다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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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아쇼카 인터내셔널

좌변기에 앉아
세면대에 머리를 얹는다
거기 새벽 두 시의 잠을 풀어놓고
잠시 혼자가 되면
세상에 개 짖는 소리 요란하다
싯다르타 하이웨이 누런 먼지 속에
철갑 트럭이 뀌어대던 경적도
발전기 모터 이빨 가는 소리도 다 사라지고
마침내 짐승의 시간이 돌아왔다
울음소리가 포카라의 계곡처럼 깊고 길다
바이라와의 평원처럼 넓고 멀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것이다
맨땅에 발바닥 붙이고 사는 삶
흙의 얼굴로 겨울 햇볕 쬐고 있어도
품속 어딘가
고르카의 칼자루를 쥐고 있을 것이다
어둔 정적을 찢는 소리는
본능적이고 직접적이다
전력공급이 끊긴 가난한 시간
한 동이 더운 물이 이층까지 배달되는 동안
짐승의 외침이 유성처럼 꺼져간다
저러다 지치더라도
누군가 어디선가 여전히
젖고 있을 것이다


====2>
가교假橋

건널 수 있어요?

속에서 차올라 넘치려는지
겉에서 맴돌다 잠기려는지

섬뜩 이어지다 무수하 갈라서는 것들
하나에서 여럿으로 다시 하나로

물마루마다 굽은 그늘 끝에
걸려 자빠지는 백치白痴의 빛살들
거슬러 오르려는 채 떠내려가는데

무엇인들 건너올 수 있을까요?

찬 노을이 다리를 놓고 있어요
곧 사라질 빛살들이 때 낀 물살들을 엮어
강물에 잠시 띄우는 저 가교
누군가가
내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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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지

그대로 있다
거친 물살 입질에
찌처럼 떠 있는 두 봉우리
간조가 열어준 길 저쪽에

함께 걸을 이가 없어 편리하다
젖은 모래가 너의 밤샘 거처를 알려준다

폭죽이 떠난 자리에
슬리퍼 한 짝이 다음 디딜 곳을 버린 모래톱에
'프렌치 카페'의 약속
붉은 빨대가 찌르던 '악마의 유혹'이
턱 밑까지 묻혔다
수박 한 조각이 떠밀려와
씨를 토한다

걷다 보면
둘은 곧 겹칠 것이다
바위가 바위에게
나앉은 등대까지도 언젠가 하나가 될 것이다

끓는 자갈
뜨물 가라앉는 모래집
발길에 눌려도 밟히지 않는 것이 있다
쇄골이나 관절쯤으로 해체된 것들
조개무지의 바닥 아래
공복 속으로
헛, 헛디디면

짠물 게우며 깨어나는
꽃지

---------------
겨울 세차

씻기 싫은 계절이다
살갗 같은 것
애써 벗겨내지 않겠다
해도, 세상이 불현듯 맨얼굴로 마음에 비치면
누구나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가 보다
설운주유소 세차장에
아침나절부터 차들이 늘어앉았다
고무장화 신은 사내가
세월의 때쯤은 안중에 없다는 듯
입시울 염소수염에서 털 귀마개로
다시 벙거지 언저리 흐린 안경알로
담배연기 연거푸 말아 올린다
내게 온 모든 것을 씻어 내리라
고압물총으로 훈김을 쏜다
알루미늄 바큇살에 계곡들이 범람한다
씻기고 다시 들러붙은 것들
씻기다 못내 남아 떨어지지 않은 것들
씻으려도 아예 한 몸이 되어버린 것들
폭우가 그 위에 내리리라
내려 스치면서 제 때마저 그 위에 입히리라
"안테나는 꼭 내려주세요"
내게 떠오르는 생각들도 이제 접어야 할 듯
갈 길이 멀다면
씻어도 씻기지 않는 것을 씻겠다면
시동은 잠시 꺼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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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의자

지천명은 지났을 거야
층 지어 올라간 죽지 마다 날개가 처진
붉은 몸통 삼나무
십여 길 올곧이 끄떡 않고 서서
먼 산 정상에 한눈을 팔아도
나지막이 긴 팔뚝을 늘여
정작 품어 가리는 것은
나무 의자 하나
그 위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초저녁 어스름
누군가 차지했다 떠나버린 그 자리에서
좀 먹은 나뭇결을 따라
연둣빛 이끼가 습하고 곱게 핀다
늦은 햇살 마른 헛기침에
잿빛 부스럼으로 말라간다
늙은 삼나무
그 발치에 빈 나무 의자
그 마른버짐 꽃이 핀 곳에 앉으면
함께 바라볼 무엇이 있을까?
함께 기다릴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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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교란

구름이 하얗게 노랗고 빨갛다
여기에 답할 내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
견뎌야 할 것은 눈에 비치는 것만이 아니다
               *
바다가 하루 종일 옷을 벗는다
모래사장은 이미 알몸이다
               *
갑자기 시작되는 것은 최대 셔터 속도로도 잡을 수 없다
                *
서른여섯 번째 컷은 감도 400으로 찍겠다
광각에 잡힌 수평선이 황금분활로 멀어진다
                *
진실은 흔들림의 제로에서도 잡음을 일으킨다
사랑에도 백색잡음이 존재한다
                 *
오늘 그리운 당신이  내일 그리울 거라 생각할 이유
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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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큰 외눈

두리번거리면서
아니, 두리번거리는 정도는 아니고
뭔가 찾고 있는데
그게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래 잠깐씩 시선을 주지만
오래 두는 것은 아니고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하더니
설핏 다른 곳을 옮기는
빈둥대는 움직임으로
뭔가 찾으려는데
그래도 그걸 대하면 내내 찾아온 것이라고
분명 확인하게 될
무엇인가를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언 듯 녹은 듯 강변 습지가
겨울이 곧 갈 거라는
다음을 향한 욕망에 불안을 일으키는
모호한 순간인데
때가 되면  뭔가를 포착하겠다고
고개를 저곳으로 뺐다가 이곳으로 당기면서
강과 습지 사이를 한 여인이
걷다 서다 시간을 늘리고 있는데
고무줄로 동여맨 뒷머리 곁에
삼각대에 얹힌 카메라
망원렌즈, 저 큰 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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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시린 악수

왜 그러냐고
두 팔로 붙잡았어, 엉겁결에
까칠한 등짝을 껴안고 다독였어
어찌나 요란하게 울어대던지
곤두선 머리채가 어찌나 흩날리던지
선 채로 기우는 네게 가슴마저 밀착했을 때
가까운 어디에선가
목이 매어 질러대는 소리가 들렸어
볼이 감지하는 목덜미 맥박
귀를 바짝 가져다 댔어
심장이 살아나는 걸까, 내장이 뒤집힌 걸까
갖다 댄 귓바퀴로
점차 또렷하게 몰려오는 소리들
냇물이 불어 고구마 밭이 쓸려가는 것인지
팽나무 잔가지에 노을이 찢기는 것인지
계곡 바람이 잠깐 숨을 고를 땐
호숫가에 한두 방울
할 말 잃은 빗물이 떨어지기도 했어
더 바짝 마음을 갖다 대자, 거기 깊게 팬
용비늘이 굽이에 여름밤 하늘이 서성이다 사라졌어
손 시린 악수마저 굳은살에 묻혔어
초겨울 된바람에 요동치는
못생긴 소나무에 볼을 대고 있으면
적갈색으로 익어가는 달콤한 흙냄새
그걸 따라 자꾸 안으로 향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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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밭 풍경

고무 바가지들이
풀밭에 점선을 그려요
사이마다 어른들이 한둘씩 서 있어요
깃대만 달랑 꽃힌 문전에서
아라비아 숫자들이 격돌하고 있네요
뽀얀 무릎이 시간 밖으로 걷어내는 햇살들
자작나무 숲에 난 바람길 같아요
한 곳을 향해 반짝여 흘러가요
공에게 해대는 저 순한 걷어차기가
어떤  헛발질인들 두려워할까요?
풍경 속으로 풀잎 그늘을 차 넣을 뿐이에요
빈손으로 스윙 연습을 하던 사내
누군가의 눈길을 찾던 아이
다들 두 편으로 흩어져 물을 마시네요
호루라기 줄을 휘돌리며 심판이
걸어가고 있어요
그릴 수 없는 중앙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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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크로키

가장 낮은 하늘가
아직 어둠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놈

기운 햇살이 세상을 바꿔요

하나둘 이목구비를 지워요
물이랑 그늘에 올라탄 노을 조각
산 자의 실루엣으로 서 있는 수천 마른 풀잎
서로 엉겨 이내 뭉개져요

강둑이 한가닥 굵은 눈썹으로 짙어져 가요

왜 그랬냐고
겨울나무 잔가지 돋은 가시로
아직 남은 하늘빛에 누군가 수화를 건네는 내내

노을빛이 잠깐 차갑게 살아나는데
물속 철탑에 전선이 없어요

다 흔들려 흐려져 사라지고
나사도 죔쇠도 없고 흔들리는 기둥만이
흐르지 않는 어느 깊이를 향해
내려가고 있어요

전신주의 운명을 지우고
돌탑의 크로키를 그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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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저 햇살로

글쎄, 직접 만나야 좋은 것은 아닐 듯
석양, 저 햇살을 오래 응시할 수 있는 것은
눈부시지 않으니까
다만 안으로 타들어가니까
어둠에 섞여 타는 빛
눈물 바람이 들춰낸 숯불의 내연
군고구마 불탄 껍질 벗기면 피어날
누런 엄니 젖무덤
그 너머 빈 들녘 먼 산이 자꾸 오르내리니까
그걸 멀리 보고 있으면
달궈진 자갈밭에 맨발 물 자국들이 지워져가고
물억새 밭에서 참새 떼가 서녘 하늘로 씨 뿌려지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쩐지 저건 내게 곧바로 오지 않고
몇 번은 스쳐가고 몇 번은 망설이다가
이젠 따져 확인할 것도
마음 안에 가둬 둘 것도 다 잊은 듯
마냥 바라보다가 그저 물 한잔 건네려는 듯
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어느새 함께 걸어가는 누군가로
혹은 내 안의 그 사람의 그림자로
왜 석양은 내게 저 햇살로 오는 걸까?
낮익은 필체의 엽서가 성큼 도착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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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석고개에 잠들다

날 따라오는구나
산마루에 오르는 내내
날 가리키고
하늘을 가리키고
자꾸 내 갈 길을 가리키는 저것
잊기 위해 세워졌던 것이리라
누군가를 대신해
그 자리에 서 있어 줄 무엇으로
조형되어 버려졌으리라
직선으로 기운 돌 기념비
이 땅이 삼킨 청녕의 피에 대한 기억
일천구백오십 년 비망록
낯선 잠에 대한 비망록
돌칼 끝이 숲 위로 하늘을 겨누는구나
자꾸 어깨를 돌려
고갯길 나를 바라보는구나

축석고개에 오르면
날 막아 세우는 늬들
삼거리 검문소 신호등에 앞서
군경 손짓보다 먼저
정지 신호를 보내는 마음
광릉숲이 잠긴 목을 풀어
아침잠을 뿜어내는 것일까
누군가 자꾸 하품을 한다
토해내는 잠 속으로 뒤섞이는 빛과 어둠
뭉침이 없는 헤어짐
다만 뒤섞일 뿐인 그 공간에서
늬들, 날 세우고 창을 내리게 하려는 늬들
북으로 가는 사삼번 국도에서
오리걸음  연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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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에게 먹이를 주지마

새가 왜
흰 날개 펼친 채 내게로 와
지친 여행객의 한 끼 밥값보다
전망값이 더 나갈 바닷가 식당 테라스에서
태평양 잡어 튀김으로
통역이 어려운 입맛을 달래는 동안
시애틀의 낯선 선창가 구릿빛 무숙자에서
언어 없이 건넨 일 불이 잠깐
마음에 걸리는 동안
조개 스튜 종이컵에
마른 비스킷을 담그는 내게
새가 와
먼바다 햇살을 등지고 새가 와
물이끼 핀 난간에
살진, 날개를 접어....

...... 고귀함이란 저런 것이다
손길 내밀수록 멀어지는 것

새에게 먹이를 주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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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에게 길을 묻다

누가 내게 흰 눈을 던지는 걸까
길 따라 걷는 내게
자꾸 누가 눈을 던지는 걸까
고개를 돌리면
잘려나간 가지가 있던 자리
톱날의 상흔이 웅어려진 곳 너머
저 잿빛 하늘 터진 틈새에서 누가
성긴 내 머리로
흰 눈을 마구 던지는 걸까
도산공원 가는 길가
해마다 절지 당하는 플라타너스에게 길을 묻는다
늬 배후에서 내게 날아오는 것들
헛디딘 발길로 와락, 내게 안기는 것들
사라진 것들의 희미한 유령들
누가 저들의 등을 저리 사정없이 떠미는 것이냐
플라타너스 갈라진 살갗에 입김을 불다가
골목 새 나오는 차향에
옛 시인 다형茶兄의 절대고독을 기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찾아든 공원에서
돌에 새겨진 도산이 묻기를
"청년의 낙망"이란, 그런 청년의 나라란
누가 보내는 것일까
저 무수한 흰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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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1


그늘 너울대는 창가
벨기에 영사가 일지를 기록한다
1905년, 대한제국은 맑고 따듯하다
저녁놀이  지고 또 지던 삼층 집무실에서
영원마저 누군가의 소유물인 듯
창밖의 세상을 장부에 기입한다

모쪼록 길을 잃으시게
잃은 자만이 찾으려 할 것이므로
그대 안에 오래 유폐시킨 어느 역사를 더듬어
울창한 간판 사이로
숨겨진 옛길을 찾게

잃어버린 시간을 누구에게 물을까
숲은 사라져도 산의 형상은 남았으려니
골목이 기역니은 이어져
길에 갇히면, 거기
폐허에 곧추선 오동나무처럼

무너지는 것들 붙잡고 홀로 자라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 한 채
잠깐만이라도
거기에 쉬어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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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2

마냥 지켜주고 싶은
누군가 있다면

묻지 않고
다만 돌기둥으로
떠받치고 싶은  누군가 있다면

현관 내걸지 않고
우편함마저 아예 떼어내고
움직임과 소리의 정지로
덩그마니 서  있는
누군가

더러는 안에 두고
더러는 밖에 내고

창은 닫아도
커튼은 드리우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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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3

누가 살고 있을까
아침 미소를 닦아내던 한 장 수건에서
따라 흥얼거리던 거실 라디오까지
삶의 도구가 모두 사라진 방에서
천장의 어둠
가볍게 흔들며 오가는 것들
저들은 누구일까

아주 옛날엔
벨기에 영사관 집무실이었지
사람들이 연이어 찾아들어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이었다가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였다가
다음엔 해군 헌병대
다음엔 상업은행
어느덧 지정문화제 사적 제254호

일본 회사가 떠나고 일본 군대가 떠나고
한국 군대가 떠나고 한국 회사가 떠나고

아무도 살지 않는 지금
다시  다음엔 누구의 것이라 할까

=====================4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4

금고가 서 있을 거야
옛 벨기에 영사관 바깥 회랑 돌기동 사이
키는 대략 170 센티미터
색깔은 먼지 앉은 검정
몇 번을 덧칠하고 다시 말라갔을 터
갈라진 페인트에 바람이 불면
세월이 석판 되어 겹겹이 떨어질 거네
고물덩이 옆구리엔 횡서로
사전에 없을 영어 YAMATO가
양산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아래
安全金庫안전금고란 한자가
햇살을 피하여 서 있을 걸세

와락 열어주기를
둘레에 잔금이 새겨지고
가운데 굵은 유두가 솟은
원판, 비밀스런 숫자의 조합을
누군가 맞춰주기를
굽은 두 손잡이
산적 같은 사내가 맞잡아주기를

쇠문 한 짝이 열릴 거야
바람이 열었는지 그대가 열었는지
아니면 쇳덩이 스스로 저를 열었는지
아무도 비밀번호를 모르는데
어디에도 열쇠가 없는데

무엇이 있었을까
누가 무엇을 보호하려 했을까
들 수 없는 무게 속에
얼마나 무거운 것이 숨어 있었을까
백 년 가까운 세월에
숱한 주인들이 바뀌어 떠나가고
이제 빈 집만 남아 있는 시간에서
다시 그 시간 밖에 내놓아진 쇳덩이 안에서
집 밖은 아니고 다만 돌기둥 사이 바깥 회랑에

덩그마니 바람을 쐬고 있는
안전금고에서
고물상에 주려는 것은 아닐 것이
전시물도 아닌 것이
저 위치에서 저게
문을 열어 이미 다 버렸다고
보여주려는 것이
그게 무엇일까

쇠문은 
어깨로 밀어내고
다시 한 겹 나무 문은
한 손으로 젖혀서
비로소 드러나는 수납장, 그 속내
두 줄 삼단으로 쌓아 올린 여섯 개 서랍
매달린 다섯 녹슨 손잡이
사라진 여섯 번째 손잡이
거기, 점유된 빈 공간들
갇힌 공기를 가만히 꺼내
허고에 놓아주게


===3>


대나무 평상에 맥없이 널브러졌다
갈 햇살이 서릿발과 작당하여
저지른 범행일 것이다
온몸이 검붉다

언젠가 다 내줄 것이다
그래도 오그라들고 졸아 안으로 넘는 것은
거두고 펼치고 담고 다시 쏟아내고
실핏줄 여러 정련까지
바짝 말릴 것이다

그냥 보내는 시간
내놓을 것은 이미 세상으로 향했다
귓속의 메아리가 살아 있는 소리를 지운다

엄니가 내미는 것
말리고 다듬어 곱게 빵아 내놓는 것
알겠다, 고향 김치가 왜
가슴이 떨리고, 맵고, 조금은 눈물이 나는지
검붉게 굳어가는 손등 살갗
내가 씹은 것은 주름살이다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못하고
엇박자로 스치는 손끝
단추와 구멍

고추가 뇌경색을 앓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는다

---------
귀가

바퀴 수가 다른 자전거 두 대가
장승처럼 입구를 지키는
닫힌 문 앞
한 꾸러미 얼음 포장 아이스크림과
한 가방 깊숙한 하룻날의 흔적을
왼손에 물아 쥐고
잠깐의 숨 고르기
문 너머에선
요요 놀이에 넋이 나간 채
등 너머로 바깥 기척을 살필
아이들의 쫑긋한 귀
터지는 함성과 함께
배 높이 둘째가
목 높이로 뛰어올라 안길까?
첫째는 잠시 빙긋거리다
못내 등이라도 타고 오를 걸
구두끈을 풀기 전으로
내가 안아야 할 무언가를 위해
오른손은 꼭 비워둘 일

---------
내가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가만히 안을 수 있는 게
그런 마음 한 자리라는 것이
내가, 어떤 소리도 믿지 못하는
내가, 어떤 색도 온전히 보지 못하는
내가, 나잇살을 씻어내는
물대야 거울 속 얼굴 뒤로
겨울 호랑가시나무 들판이 너무 멀어
이제 잠들면 얼굴 없는 동무를 만나겠지
내 안에 내가 움직이지 않아
몸살 불질에도 땀구멍이 열리지 않아
그리워, 어린 볼 살의 접촉
아이 입가에 남은 마지막 벌거숭이 웃음
머지않아 사라질 네 응석에
자꾸 널 안아주려는 것인데
추워, 집으로 가는 겨울 논두렁
흔들리는 아버지 등짝
그 자리인들 걸음마다 주름져
내 이마에 다소곳이 접히는데
너무 가까운 내가
너무 멀어진 그 자리에 대한 기억으로
오늘, 상처 입고 돌아와 기도마저 못하는
아내에게, 나 하나 세상 속에 데우지 못하는
내가, 아직 씩씩하여 행복한 아이에게
어찌 사랑을 말할까, 내가

---------
우산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숱한 빗줄기
너흰 어디서 오지
가로등 너머 어둠에서
부지런히 건너오는 너희
네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냐
갑자기 나타나는 너흰
어딘가 언제나 있었을지 몰라 도둑놈처럼
보이지 않음으로 다만 잊혔을 뿐
너희가 간절히 생각날 때쯤
완전히 젖겠지
우산을 퍼면
나만을 감싸는 청색 우산을 펼치면
어느 세상을 가릴 수 있을까
지킨다는 것은
밖으로 등을 구부리고
안으로 허공을 끌어안는 것
술에 취하고 깨기를 기다리는 것
헛구역질 서너 번에 집 쪽으로 돌아서는 것
볼 수 없는 하늘을 향해
우산을 세운다
숱하게 두들기는 빗줄기에
가만히 곱사들을 내미는 우산
채 젖지 않은 품 안에
얼굴을 묻는다

======
유산

마흔 고개를 넘었다
뒷머리가 무겁다
특이한 질병은 발견되지 않는다
선천성 고혈압이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병
알 수 없다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삼사 분 짧은 진료 시간에도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안위를 묻는다
관심의 형광 불빛에 드러난 아버지는 문득
삼십 대 후반부터 이제껏 날마다
혈압강하제를 들어왔다
괘씸한 노릇이다
아무리 이유를 알 수  없기로
전화도 자주  하지  않는 자식
저 혼자 멋대로 늙어가는 몸 병의 근원을
칠순을 넘긴 아비에게 찾더니
어쩌면 고마운 노릇이다
떨어져 보낸 세월의 그늘이 마음 뒤쪽으로
함께 한 세월보다 더 길어져 가는 날에
아버지와 내가
이렇게 하나 될 수도 있다니

---------------
괘종시계

시간이란
눈앞에 왔다 갔다

대청마루 비질하는 대숲 바람에
쉴 새 없이 좌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떠나는 자의 심장박동
속에 가둬 오고 가는
괘종시계, 노부모의 방에 갇히는 것이다

자다 깨는 아내를 위해
섣달그믐방 괘종시계를 열고
건전지를 떼어내면

시간이란
삼각산 눈썹에다 낙엽 눈물을 그린 어릿광대

눈 내리는 풍경 쪽으로
서 있는 그대로 넘어지는 것이다

---------------
아침 식탁

아침 다섯 시 오십이 분
오십 분에 울던 새가 다시 운다

건넛방 새가
록 버전으로 화답하는 여섯 시
씻고 먹고 싸는 일쯤은 삼십 분이면 족하다

삼십일 분에 째깍 닫히는 현관
안에서 아내가
존재 밖으로
다시 드러눕는다

혼자 맞이한
아침식탁에 남겨진 것들
아직 식지 않은 크루아상
그 가운데 아무도
손대지 않은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고 있는 게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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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척도

딱딱함이 나를 바닥에 눕힌다
걸레질을 마친 그곳에 사지를 올려놓으면
수평저울이 내 몸을 잰다
성장이 멈춘 동작은 계산이 쉽다
경추의 짧은 통증
빌린 편지지 한 장 마지막 줄이 너무 길다
어깻죽지에 난 뾰루지의 반란
잡히지 않는 가려움이
몸의 소식을 전하는 밤새
살과 뼈의 지도가 방바닥에 찍힌다

중흥동 이층 양옥
계단에서 난간으로 열 지어 놓인 볼그레한 화분들
조롱 물줄기 사이로 스러지던 역전 해넘이
옛집 바닥에 누워 벽을 향하면
검정 옻칠 십장생 자개농에서
누런 조개껍질 만월이 떨어져 내린다
아버지의 머리맡에 오래 떠 있던
그 둥근 공백이 내 둘레에 달빛을 던진다
그림자의 치수가 줄다가 커지다가

==========
오래된 사진

떨어져 누운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화장대에 세워졌다가
냉장실 문짝에서 자석 지압을 받다가
이제 흔들리는 책갈피 해방되어
모여 앉은 한 가족
갑자기 터진 불빛에
어둑하게 물러서는 것들 앞으로
지지 않은 풍선 꽃이 핀다
패밀리 레스토랑 창 가 식탁
내가 더 이상 메지 않는 넥타이
촛불을 헤아려보니 아홉이고
내 키를 넘긴 더벅머리 첫째가 
젊은 엄마 옆에 토끼마냥 앉는다
둘째 머리띠엔 리본이 매여 있다
밴드의 음악은 들리지 않는다
멕시코 의상을 걸치고 김치를 연발하는
종업원 즉석 사진기를 향해
우린 행복을 외쳤을 것이다
다들 오늘도 안녕

------------------------
+ 새잎이 돋는 날에

새잎이 돋는 것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내 등의 때를 미는 것 같다
잠깐의 봄비에 얼굴을 닦고
수천 잎들이 내비치는 연두의 햇살
순하게 내쉬는 숨소리에
호흡을 맞추다 보면
누군가 내 겨드랑이의 때를 미는 것 같다
안에서 밖으로
조금씩 뚫고 나오는 땀들의 힘
온몸이 가렵다
늙으신 아버지의 어깨에서
처진 뱃살 밑 장작 같은 허벅지까지
한 생의 주름을 밀다가
아직 곱고 붉게 피어나는 속살에서
묽은 땀방울 배어 나오면
마른 나뭇가지에 연두색 잎이 송알송알 돋아나면
누군가 내 가려운 등을 자꾸 미는 것 같아
햇빛에 드러날 녹색의 숨결을 그리며
내 손은 어느새 벌건 대낮에
아버지의 등을 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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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은 애매해

오빠를 따라
일곱 시에 일어날까 말까
오늘 입을 것을 직접 고를까
엄마를 불러 코디를 시킬까 애매해
혼자 일어나는 것은 재미없어
누군가 깨워주길 바래
수저를 들고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밥에 반찬에 잔소리에
이것저것 뒤섞어 떠 먹여줄 거야
난 목이 멘 소리로 한두 방울의 눈물
밥알 몇 톨만 흘리면 돼
칫솔길은 아빠를 불러 뒤에 세우고
치카푸카 푸카치가 노래 부르게 해야 돼
심부름도 혼자 하는 건 싫어
오빠는 나 몰래 친구 만나러 가지만
아빠는 전화선  저쪽에서
한 밤만 자면 온다고 하지만
엄마는 옆집 아줌마와 재건축 타령이지만
혼자 있는 건 참을 수 없어
혼자와 여럿 사이에서 항상 애매해
여섯 살은 애매해

------------------------
혹 아내에게 나는

가장 가까운 것이 반란을 일으켰다
크림 얹힌 모카커피처럼 흰 거품에 싸여 맴도는 검
붉은 띠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내 살갗을 비볐을까

역한 것들
헛구역질 두세 번 후에
잠시 문질러 이내 향긋한 거품으로
냉수에 섞어 뱉어내려니

숙취의 잠 끝에서 내 손아귀에 붙잡히던 너
마구잡이로 내 악취 속에 처박히던 너

아무렇게나 잊혔다가
세상 속으로 떠나는 날 열어
사랑니와 어금니 사이 밤새 삭인 것을 애써 파냈을 뿐

소름 돋은 손잡이로
물이끼가 베어든 아침에
닮은 솔모들이 굽은 허리를 젖혀 은밀히
살 속에 파고들더니

지나간 접촉의 징표로 날카로워진 네 모발의 반란
잇몸에서 심장으로 피가 번지고

버릇처럼 가까워진 너를 버려야 할까
네가 거기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네 드러난 존재를 이제 부재로 바꿔야 할까

혹 아내에게 나는 칫솔일까

==================
선뜻 다가설 수 없습니다

아침 세상은
낯익어도 어쩐지
선뜻 다가설 수 없습니다
내 품에서 소리쳐 흥분한 적 없는
저 세상이 오늘
누가 씻어도 더 이상 깨끗해지기를 못할
백치 얼굴로 날 대합니다
침실 후미진 곳에서 겨우내
백내장처럼 자라 버린 솜털 먼지가
흐리게 풍경 위에 날리더니
어젯밤 내린 늦가을 비에
쉴 새 없이 살갗 저미던 빗물의 칼질에
잘게 씻겨나갔나 봅니다
계절의 환등기가 절로 돌아
보자기가 사물을 풀어내듯
세상이 철컥 내던져집니다
햇살마저 어디에고 눈 둘 모르고
가는 것 깊이 잠길 뿐입니다
저게 마누라 얼굴이면 좋겠습니다


===4>
새는

자작나무들이
은가루를 사방에 뿌려
반짝이는 숲
심장을 향해
비수로 날아가 박힌다
산 언덕이 바지춤을 내려
비스듬히 드러나는 하늘
말간 엉덩이를
신중한 책망으로
너무 아프지 않게 때리려는
은빛 회초리
잔가지 아래에, 새는
뒤에 저쳐 따라오는 흔적으로
밑줄을 긋는다

---------
허물

여름밤 둥근 정원 등에
매미가 붙었다

그걸 잡겠다고
신발 한 짝 던져 올려

보름달에 금이 가고
깨진 한 조각이 지상으로 내려와

토끼 귀처럼 열리는 틈새
놀란 알전구

떠나고 없다
등 터진 허물만 선반에 남았다

------------
+ 산그늘

해가 진다
능선 넘어가는 햇살
어제인 듯 가깝고 멀다
가려진 빛이 드러난 빛에게
내밀려다 접는 손
닿을 수 없는 접촉을 좇아
물 담긴 조롱박째 얼굴을 든다
빛의 먼지를 털며
느티나무 둥지로 날아든 까치
날개 밑 솜털에 어둠이 부푼다
어딘들 부러진 나뭇가지 없으랴
두 마리 까치가 세우는
나무속 나무집
지붕이 없고 기둥이 없고
앙상한 가지들만 서로 엮는다
새잎이 듣기 전 초봄
산 가지가 죽은 가지와 깍지를 끼는
저무는 하늘 한 모서리
까치집 주변

-----------
실루엣

널 보기 위해
지는 해를 손으로 가린다
지나쳐 다시 돌아선 나와
골목길 햇살 사이에 넌 서 있다
첫 먹물을 내리기 전 붓처럼
마음 끝을 모아 세운 수백 꽃망울들이
제 키 높이에 점을 찍는다
계절의 굳은 약속에서 넌
서산 너머 펼쳐진 노을의 화선지에
차고 흰 꽃잎으로 번져가겠지
언젠가 그려지고 다시 지워질
어느 먼 구도에서
아직 열리지 않는 순백의 영혼들
그 닫힌 봉우리마다 세세히 일어선 잔털 사이로
햇살이 네 개로 온다
정지한 시간 안에 느리고 가벼이
사방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내게 올 때 넌
빛에 싸일수록
자꾸 어두워지는 실루엣이다

========
괜찮아요

비가 와도
멈추지 않아요
미처 피지 못한 과꽃
흰털 잔가지가 달라붙어도
괜찮아요
물보라가 지는 저 큰 교각들
배수구마다 흙탕물 분사하면서
시야 밖으로 하나, 둘, 셋 떠나면
저절로 빗금 지는 수목화 속으로
그냥 걸어가요
몸서리치는 다릿목 물살들
등에 꽂히는 빗살들
위로하지 않겠어요
잡초에 누운 능소화 붉은 취기
차이는 방앗잎 부침개 향기
발길마다 꼬인 이야기가 술술 풀리네요
거칠 것 없이 흐르는 강
빗물 닿는 곳마다
개망초꽃이 피고 지고 피고
수만 마리 붕어가 하품을 터뜨리고
혼자, 빗길을 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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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

한껏 펼친 잎으로
한 사연 담기가 충분하다
더 넓은 산자락 가리고 있다
먼저 와 쉬었다 떠난
누군가의 엉덩이 자국일까?
건기의 사막을 지나 초지로 향하는
코끼리 발자국일까?
힘에 지친 높이마다
큰 몸을 끌고 아주 더디게
한 바퀴 원을 돌아 그 무거운 발자국
핏줄 돋은 녹색 잎으로
빙 둘러 남겨둔 허공
오동나무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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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행로行路

누군가 떠나가고 있네
떠도는 것들이 천지에 가득 차서
끝이 안 보이는 공간의 한켠으로
사람하나 뚜덕뚜덕 걸어가고 있네
꿈의 잣대만큼 팔 벌려 다가서면
상실의 잣대만큼 고개 저어 물러서는
갈꽃 군무 속으로
창마다 내어 걸린 흐린 불빛을 따라
뒷모습 어렴풋이 지워져 각
어쩌면 사람은
그토록 짧은 시력으로
앞도 뒤도 없이 다만 제 발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쓰린 공복公腹 다독이며
어디선가 황급히 개 짖는 소리
골목 가득 부서져 오네
이제 야 귀가하는 야근의 사내들이
배를 채우는 해장국집
그 허름한 종착지 밖으로
스물스물 전신을 흔들며 가는
회색 기류의 행로여
끝내 확인할 길 없는 그대
손짓의 저쪽은
보이지 않음으로 아름답거니
두고 온 들녘 타오른 들불처럼
쾌락의 빛깔을 태워
오직 하나 잿빛 혼돈으로 서성이거나
어둠의 한쪽 끝을 깨물다
술렁이며 깨어나는 이 새벽
상심의 유리창에 차가운 볼을 부비며
그대 또한 떠나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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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돌아와

콧속으로 몰려드는 것들
먼지인지 열기인지 냄새인지
콧물에 엉겨 바싹 말라붙는 놈들
콧구멍을 파고 귓구멍을 후벼야 할
새벽 한 시의 간지럼에서
밖은 아직 싸늘한 초봄
방바닥 구석에 접힌 요를 그대로 폈건만
마침내 누울 자릴 찾았건만
물에 적신 수건 한 장으로
며칠째 말라비틀어진 것들
그 건조함 그 목마름을 축일 순 없었어
살갗을 가르고 일어나는 각질
허공을 껴안게 하는 맨살의 기억
창문을 열 수밖에 없었어
나를 가두는 것은 쉽지 않아
한껏 열어젖힌 창문 다시 한 겹의 방충망
그 작은 격자들 틈새로
달궈졌던 공기
수천의 미립자가 일시에 밀려나가더군
낸들 그 바깥 어둠에 코를 박지 않을 수 있나
그렇게 서 있는 한동안 찬 공기에
아랫배가 탈을 예고할 즈음
거기 밤하늘에 날 버린 병신 같은 달이 떠 있었어
누군가의 창문을 닮은 마름모꼴 달빛이
불 껴진 방바닥에 어느새 누워 있었어
오늘 그 달빛을 베고 감기에 걸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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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는 것은

초겨울 나무
무심히 서 있는 것
사실은 무수한 잔가지로 떨다
열 길 깊이로 하늘에 잠겨버렸을 것
너를 보는 것은
나잇살 굳은 어깨에 기대려는 것은
아닐 것, 성긴 그늘에
마음을 안기려는 것은
아닐 것, 너를 보는 것은
기다림의 종적이 묘연하여도, 너를
올려다보는 것은
잔가지 숱한 흔들림 어딘가에
시끄럽게 매달린
까마귀 울음, 그게 혹
배설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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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유영游泳

누가 공간을 비어 있다 했는가
출입문이 닫히면서
무대는 열리고
어둠에 에워싸인 빛 속으로
부지런히 제 위치를 바꾸는 먼지들
분장 없이 대사 없이
더 분명한 배역으로 움직이는 것들
떼 지어 헤엄치고 있다
자리를 지켜 어두워진 것들 앞에서
빛의 간지럼에
너무도 유연하게 몸을 뒤집는다
기억 속의 망각처럼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다가
따라오는 스포트라이트에 몸을 돌려
갈기를 세우는 것을
뒤꿈치 굳은살처럼 발밑에 밝히다가
살아가는 나날의 틈새에 켜켜이 쌓아다가
언제고 홀로 일어나
머무른 자리에 연을 끊고
아무렇게나 떠돌 수 있는 가벼움
저 아름다운 유영

---------------------
안경을 닦다가

그간 내게 충직하였다

근시의 정체란
가까운 것을 잘 봐서일까 못 봐서일까
채 경험으로 깨닫기 전인데
원시란 또 무엇인가

맞춘 지 벌써 일 년
안경이 내게 봉사를 거부하는지
두 눈알이 숨은 성깔을 부리는지
읽기가 절반도 끝나지 않아
쓰면 어지럽고 안 쓰면 흐리고

혹시 세상의 초점이 흐려지면
내 안의 초점이 맑아질까
했지만 착각이다

분명해지는 게 있다면 오직
알았던 것들의 알 수 없는 속

안개가 자욱하여 세상이 보이지  않아도
그 보이지 않음을 보았던 것인데

절로 물안개를 피우고
그간의 헌신을 그만두려는 두 눈

-------------------------
+ 아직 길 위에 있다

안기고 싶다
소주병 내려놓고, 다시 그립고
싶다, 그런 저녁에게, 중간에 빠져나온
이모집, 시장 골목에게
꽝, 쉼표를 찍는다
도끼날, 장작 패는 소리가
단절을 꾀한다
속살의 폭포, 일생이
반생으로, 다시 반 반으로
쏟아진다, 나이테가 나뉜다
전붓대 마주한 시간을 지나
누가 먼저, 골목에 작별을 고할 것인가
사내가, 방화 유리문을 연다
먼저 뜨거워진 것들에게
속살을 넣어주자
날아오르는 꽃의 씨앗들
언 손을 당기는 붉은 내홍
대가리는 없는 닭들이
날개 접고 꽁지마저 내린다
쇠줄에 꾀여 나란히
돌아간다. 깊이 그을린 것들
오래 돌아 어지러운 것들
찹쌀, 인삼, 대추, 마늘, 빈 가슴에 채우고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어디로 갈까
아직 길 위에 있다

==============
혼자 깨어나는 들

새벽은 늘
혼자서 눈뜨는 들녘의 대기에
고적한 가슴팍을 열어
안개를 지핀다

누군가
남루한 신발 소리를 끌며
어둠의 한쪽 끝을 기웃거리면
길은 타인처럼
낯선 곳에 이르렀다

그리움보다 깊은 수심으로
심장 근처 어느 강물이
숱한 연대기에 기억을 부대끼며
마냥 흘러가는 
하구

결별을 선언하면서
눕고 싶어도
눕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돌아다보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흐르고 있다
 
----------------------------
물에 풀린 첫 연두색

차창이 흐려요
안개가 날 찾은 것도 아닌데
세상이 반투명이 망사에 가려요
사나흘 봄비가 내려
황사의 흔적일랑 말끔히 씻었는데
다시 온 햇살에 이슬이 말라가는데
어쩐 일인지 차창이 설핏 흐려져
빈 하늘을 가리고 있어요
손가락을 내밀어요
가만히 묻어나는 파리한 가루들
역마가 일으킨 먼지는 아닌가 봐요
잠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밤새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었을 것들
떠돌 때는 내내 보이지 않다가
마음 닿은 거리에 와서 비로소
물에 풀린 첫 연두색으로 빛나는 것들
뒷산 등 굽은 나무들이 보내온
봄의 전언들

---------------------------
산근처에 집이 있다

산에서
집으로 향기가 온다
휘젓지 않아도
어둠의 고운 입자들이 골고루 섞여
은밀한 향기가 사방으로 번진다
심장에서 심장으로 곧장 이어지는 향기
실핏줄 여린 떨림으로 온몸을 흘러가는
어느 해 오월 시냇물의 느낌
바람마저 가만히 움직이는
세상 한 몽퉁이에서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고
들리던 것들이 들리지 않고
모두가 제 빛깔을 버린 그 자리에
향기가 고여 고여서 차오른다
그래도 비어 있는 무엇을 채우기 위해
낮고 길게 들이쉬는 호흡
홀로 남은 후각의 미로를 따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한 걸음씩 
줄지어 건너오는 떠나간 날들의 체취
온 산을 덮고
온 마을 덮는
이 어둠
이 아카시아 향



_______*D7(60)
허공에 줄을 긋다
===1>
조율
포옹
시걸리 1
시걸리 2
-----------
시걸리 3
종소리
수종폭포
옥살리스
------------
모나 밴 다인
사랑의 기교
자주 찾는 곳
증거물 52호
------------------
겨자 꽃 피는 겨울
허공에 줄을 긋다
호텔 아쇼카 인터내셔널

===2>
가교
꽃지
겨울 세차
나무 의자
------------
빛의 교란
저 큰 외눈
손 시린 악수
잔디밭 풍경
--------------
저녁크로키
석양 저 햇살로
축석고개에 잠들다
새에게 먹이를 주지 마
--------------------------
플라타너스에게 길을 묻다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1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2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3
-------------------------------
옛 벨기에 영사관에 관한 안내 4

==3>

귀가
내가
우산
------
유산
괘종시계
아침 식탁
바닥의 척도
--------------
오래된 사진
새잎이 돋는 날에
여섯 살은 애매해
혹 아내에게 나는
----------------------
선뜻 다가설 수 없습니다

===4>
새는
허물
산그늘
실루엣
---------
괜찮아요
오동나무
안개의 행로
내 방에 돌아와
----------------
너를 보는 것은
아름다운 유영
안경을 닦다가
아직 길 위에 있다
--------------------
혼자 깨어나는 들
물에 풀린 첫 연두색
산근처에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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