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2
그 말이 없던 사람 평생 외톨박이 떠돌이였다. 그가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한 곳은 해발 1,000미터의
광산마을이었다. 오랜 장마 끝 맑게 갠 날, 쏟아지는
빛 속에 눈부신 듯 서 있다가 나무토막 쓰러지듯 그는
그렇게 갔다. 한동안 같이 살던 여자도 있었다. 지은
죄가 있어 고향이 가지 못한 그는 길 위에서 살다 길
위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서 흘러들어온 지 모른 것처럼
그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그가 쓰러
진 곳이 그의 고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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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잃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쌓여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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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부정한 마음아
밤이 밤의 창을 때리는구나
너는 이런 밤을 무수한 거부 속에 헛되이 보냈구나
또 지금 헛되이 보내고 있구나
하늘아래 비치는 별이 아깝구나
사랑이여
무된 밤에는 무된 사람을 축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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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榮譽)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 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 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도 넘어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게
물 어제 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 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뜩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또 속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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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신앙(信仰)이 動하지 않는 건지
動하지 않는 게
신앙(信仰)인지 모르겠다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
어제의 詩를 다시 쓰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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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敵 1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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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敵 2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바위의 아량이다
날이 흐릴 때 정신의 집중이 생긴다
신의 아량이다
그는 사지의 관절에 힘이 빠져서
특히 무릎하고 대퇴골에 힘이 빠져서
사람들과
특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련을 해체시킨다
시는 쨍쨍한 날씨에 청랑한 들에
환락의 개울가에 바늘돋친 숲에
버려진 우산
망각의 想起다
성인은 차를 적으로 삼았다
이 한국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여사는 처와 처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다
이조시대의 장안에 깔린 개왓장 수만큼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가장 피로할 때 가장 귀한
것을 버린다
흐린 날에는 연극은 없다
모든 게 쉰다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뿐이다
혹은 버림받으려는 애인뿐이다
넝마뿐이다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
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
가장 가까운 적에 대한다
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
우연한 싸움에 이겨보려고
======
+ 책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 한 작은 책이지요. 첫 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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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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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췄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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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잎 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革命)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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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잎 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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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사일구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革命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罪있는 몸의 억천만개의 털구멍에
罪라는 罪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
+ 길들
떠나는 것들은 커브를 그린다
보내는 것들도 커브를 그린다
사라질 때까지 돌아다보며 간다
그 사이가 길이다
얼어붙은 하얀 해의 한가운데로 날아갈 이유는
없겠지만,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까지
그 빛나는 사이로 가기 위해
벼랑에서 몸을 던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가운데는 텅 비어
중력에 굴복한다
-----------
+ 낙타
내 몸의 형체를 이룬 모든 선들을 깎고
깎아버린다면
나는 견고해지는가
내 몸이 소진되어버린다면
꿰뚫을 수 있는가
저 사막을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되고 싶은
미련한 내 희망이라는 것까지도
꿰뚫어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노역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이 세상 밖을 묵묵히 걸어가려 하는
가혹한 믿음이란 것을
깨닫게 할 수는 없는가
허리의 뼈가 많아지고
완만한 구릉을 이룬
가늘고 긴 다리 사이로 사막이 보인다
사막 한가운데서
사막을 이어갈 때
모래의 단담함과 부드러움을 가진
누군가의 눈을 보았다
========
+ 미인
-Y 여사에게
미인을 보고 좋다고들 하지만
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그렇지 않고야 미인일까
미인이면 미인일수록 그럴 것이니
미인과 앉은 방에선 무심코
따놓는 방문이나 창문이
담배연기만 내보내려는 것은
아니렷다
----------------
+ 병풍(屛風)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醉)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虛僞)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 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
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
+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을 넘어가는
이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 사령(死靈)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이십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
+ 석류
어두운 방 안에 화로만 달구어져
젖빛으로 젖어올 새벽을 기다리는데
그 밤 누가 온다고 할머니와 나는
화롯가에 앉아 있고
지난 가을 따 놓은 석류는 반닫이 위에
얌전히 놓여 있다
잿더미를 뒤적이면 툭 튀어나와
빨갛게 익어가던 잉걸
그해 봄 붉은 불길 속으로
까맣게 마른 할머니를 보내놓고
어린 나는 그 겨울밤을 떠올렸다
십 년도 더 전에 늙은 아버지 대신 벌초 가서
술과 포 대신 붉게 익은
석류 한 알 놓고 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혼자 산에 두고 돌아오는 길
입술을 깨물고 삼킬 수밖에 없는
쓰고 달고 비리고 신맛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
+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 간이역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부드러운 능선 위로
갑자기 쏟아지는 붉은빛
어디까지나 파고드는 고요함
녹슨 철길에 뻗는다
한때나마 나도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기차가 지나가듯이 벌판이 흔들리고
잘 익은 들녘이 타오른다
지는 해가 따가운 듯 부풀어오르는 뭉게구름
기차를 기다린다
지나간 일조차 쓰리고 아플 때에는
길 위가 편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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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謀利輩(모리배)
言語는 나의 가슴에 있다
나는 謀利輩들한테서
言語의 단련을 받는다
그들은 나의 팔을 支配하고 나의
밥을 支配하고 나의 慾心을 지배한다
그래서 나는 愚鈍한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이덱거를
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生活과 言語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친밀해진 일이 없다
言語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謀利輩여 謀利輩여
나의 化身이여
-------------
+ 빈의자
가난뱅이 고흐는 의자를 열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앉지 않은 팔걸이가 달린 의자들
파이프를 얹어둔 낡은 밀짚의자는
내 방구석에 걸려 있다.
빵을 굶어가며 마련한 새 의자
그는 누구를 기다리며 의자를 비워두었을까
한밤중 신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광부를 위해
어두컴컴한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농부를 위해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를 위해
창을 열 듯 제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해바라기를 위해
그리고, 쪽창으로 들어오는 별빛을 바라보는
그 자신을 위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은 의자에 앉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처럼 그를 에워싸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초대한 손님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의 쓸쓸함이 부른 손님들인 것이다.
========
+ 강가에서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 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 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 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월씩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
+ 고래처럼
깊은 바다, 빛이라 해도 이르지 못하는 어둠
그 깊은 곳의 고래
어둠 속을 살기 위해
실핏줄들이 얼마나 팽팽한 현이 되는지
얼마나 많은 피가 소용돌이치며
제 몸을 바닥에서 밀어 올리는지
고동소리만으로도 세상이 폭풍 치는 듯하다
태아 적 어머니의 몸속에서 듣던
폭풍의 눈과도 같은 고요
떠오르기 위한 삶의 한가운데에는 폭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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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일생
- 배 만드는 사람 2
그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것은 갈매기가 바람을 가르는
바다였다. 그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조금씩 커갔고, 아버지가
배를 만들고 있는 포구의 모래톱까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그는 뼈가 굵고 근육이 튼튼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어느 날인가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러 늙은 아버지가 바다로
간 뒤, 그는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연장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그 후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모래톱에서 그렇게 늙어갔다.
세월이 흘러 그가 더 이상 일을 하기 힘들 정도로 쇠잔해
졌을 때,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새로 조그마한 배를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배가 완성된 날. 그는 배에 가
벼워진 자신의 몸을 싣고, 이제 까지 바라보기만 하던 황혼
이 붉게 물들어 있는 바다로 갔다.
-----------------------
+ 矜持(긍지)의 날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
+ 나의 가족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새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느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함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한 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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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행시초 1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 년 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 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는 마을의 불빛
눈알 뒤집으며 주먹다짐하기도 하면서
파도가 높음, 파도가 높음, 긴급구조 요망 긴급구조
깜박깜박 이 많은 골짜기를 감춘 세파에 자물쳐도
기다려라, 또 계속 가라
바람 없는 낮엔 뜬 구름만 쇠주병에 담아 띄우기도 했어
때로는 잊혀지기도 해야 할 젊은 날들처럼요
아버지에게도 바다는 길흉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을까
이미 예정된 깊이가 보이는 여정이었을까
하루 필요한 물과 기름을 받으면서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가
언제 덜컹 무심한 돌섬에 묻힐지 모르는 일
나는 같이 늙어가는 박 씨의 사투리가 좋다
살아갈 날이 아침 안갯속 첩첩으로 걸리믄
달포씩 밭그늘에 묵었던 지게가 낙락장송으로 뵈이고
지겟다리에 걸쳐둔 호멩이도 학모가지로 보이능거
아버지의 그리움도 갈수록 바람의 주먹이 매운
물주름으로 되돌아왔었을까
한순간 바라다보고 있던 황량한 벌이
손바닥을 펴서 보여준
풀씨들의 집만 무수히 뚫린 외길로 통한 끝없는 황혼
담배만 되새김질하던 염소새끼까지도
흙먼지에 섞여 놓여나기만 하면
같은 피붙이를 기막히게도 찾아가는
떠도는 것만이 제 몫인 뿌리들은
이제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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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우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 무려(億萬無慮)의 모욕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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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아케팅
비니루, 파리통,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아무튼 구질구레한 生活必需品
오 注射器
2cc짜리 國産슈빙지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오이, 고춧가루, 후춧가루는 너무나 창하니까
고만두고라도
그중에 좀 점잖은 品目으로 또 있었는데
아이구 무어던가?
오 도배紙 천장紙, 茶色 白色 靑色의 모란꽃이
茶色의 主色 위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천장지
아니 그건 천장지가 아냐(壁紙지!)
전장지는 푸른 바탕에
아니 흰 바탕에
엇걸린 벽돌처럼 삘딩 창문처럼
바로 그런 무늬겠다
아냐 틀렸다
벽지가 아니라
아냐 틀렸다
그건 천장지가 아니라
벽지이겠다
더 사오라는 건 벽지이겠다
그러니까 모란이다 모란이다 모란 모란...
그리고 또 하나 있는 것 같다
주요한 本論이 네 개는 있었다
비니루, 파리통, 도배지...?
주요한 本論이 四項目은 있는 것 같다
四項目 四項目 四項目...(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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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산 아래
멀리 능선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몇년 정든 사
람과 살고 싶지, 바람이 많은 그곳에서 염소 몇 마리
구름이나 뜯게 하고, 한 번씩 산꼭대기로 올라가 고사
목 그루터기를 파서 꿀단지개미들을 건드려도 보고,
깊은 골짜기에 달그림자 고이면 천둥벌거숭이로 누워
꿈을 꾸고 싶지, 가을이 다 갈 무렵 허물어진 무덤 곁
을 지나다 들꽃다발도 놓고, 울새나 휘파람새가 쪼다
남긴 마가목 열매로 겨우내 차를 끓여야지, 벌 치는
사람이 살다 간 토담집 언저리 토담 속엔 아직도 장수
말벌들이 꿀을 따고 있을지도 몰라, 그곳에서 밭을 일
구어 배추와 옥수수를 심고, 해마다 울밑에 해바라기
접시꽃도 가꾸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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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
성속(聖俗)이 같다는 원효대사가
텔레비에 텔레비에 들어오고 말았다
배우이름은 모르지만 대사는
대사보다도 배우에 가까웠다
그 배우는 식모까지도 싫어하고
신이 나서 보는 것은 나 하나뿐이고
원효대사가 나오는 날이면
익살맞은 어린놈은 활극이 되나 하고
조바심을 하고 식모아가씨나 가게
아가씨는 연애가 되나 하고
애타하고 원효의 염불소리까지도
잊고 - 죄를 짓고 싶다
돌부리를 차듯 서투른 원효로
분장한 놈이 돌부리를 차고 풀을
뽑듯 죄를 짓고 싶어 죄를
짓고 얼굴을 붉히고
죄를 짓고 얼굴을 붉히고-
성속이 같다는 원효대사가
텔레비에 나온 것을 뉘우치지 않고
춘원 대신의 원작자가 된다
우주시대의 마이크로웨이브에 탄
원효대사의 민활성 바늘 끝에
묻은 죄와 먼지 그리고 모방
술에 취해서 쓰는 시여
텔레비 속의 텔레비에 취한
아아 원효여 이제 그대는 낡지
않았다 타동적으로 자동적으로
낡지 않았고
원효 대신 원효 대신 마이크로가
간다 '제니의 꿈'의 허깨비가
간다 연기가 가고 연기가 나타나고
마술의 원효가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제니'와 대사가
왔다 갔다 앞뒤로 좌우로
왔다갔다 웃고 울고 왔다갔다
파우스트처럼 모든 상징이
상징이 된다 성속이 같다는 원효
대사가 이런 기계의 영광을 누릴
줄이야 '제니'의 덕택을 입을
줄이야 '제니'를 '제니'를 사랑할 줄이야
긴 것을 긴 것을 사랑할 줄이야
긴 것 중에 숨어있는 것을 사랑할 줄이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긴 것 가운데
있을 줄이야
그것을 찾아보지 않을 줄이야 찾아보지
않아도 있을 줄이야 긴 것 중에는
있을 줄이야 어련히 어련히 있을
줄이야 나도 모르게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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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살이
나는 일손을 멈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있는 보람이란 이것뿐이라고----
하루살이의 狂舞여
하루살이는 지금 나의 일을 방해한다
----나는 확실히 하루살이에게 졌다고 생각한다----
하루살이의 유희여
너의 모습과 너의 몸짓은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우냐
소리 없이 기고 소리없이 날으다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는 무수한 하루살이
----그러나 나의 머리 위의 천장에서는 너의 소리가 들린다----
하루살이의 반복이여
불옆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벽을 사랑하는 하루살이여
감정을 잊어버린 시인에게로
모여드는 모여드는 하루살이여
----나의 視覺을 쉬이게 하라----
하루살이의 황활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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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리콥터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밖에는 못해왔기 때문이다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젊은 시절보다도 더 젊은것이
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이다
1950년 7월 이후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이었고
이것은 처음 탄생한 것은 물론 그 이전이지만
그래도 제트기나 카아고보다는 늦게 나왔다
그렇지만 린드버어그가 헬리콥터를 타고서
대서양을 횡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동양의 풍자를 그의 기체 안에 느끼고야 만다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우리는 좁은 뜰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을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자유
----비애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이 무제한의 시간 우에서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과감한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너의 조상들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손을 잡고 超동물세계 속에서 영위하던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너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규정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에 네가 전하는 자유의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
+ 거대한 뿌리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 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사·일구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면상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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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슬픈 육체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땀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너무나 멀리 잊어버려 천상의 무슨 등대같이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 귀중한 생활들이여
말없는 생활들이여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혹은 책상에 붙은 민민한 판때기처럼 무감각하게 될 생활이여
조화가 없어 아름다웠던 생활을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조화를 원하는 심장으로 찾을 것은 아니로나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 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아아 아아 아아
불은 켜지고
나는 쉴사이없이 가야 하는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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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절리에서
사는 건 얼마나 많은 구멍으로 이루어진 어둠일까
그들 사이에 비치지도 않을 빛을 찾아
먼 곳에서 돌아오는 끝이 뾰죽한 나무들
더 먼곳에서 돌아오는 외로운 새들의 가벼운 그림자
어느 돌밭을 헤맨 사랑인지
어둠이 감춘 수천 개의 눈이
초점에 갇힌 뜨거운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아직도 날아오르는 캄캄한 새들이
강이 던진 수많은 밧줄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는 검은 산을 끌고 간다
함께 흐르므로 고요한 저 반짝거림
어둠의 깊은 구멍 속을 본다
어둠의 씨앗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눈동자가 박힌
어둠 속에서만 사는 짐승이 있을 듯
구멍 속의 폭풍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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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도서관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누구나 어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구태여 달관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 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모독당한 과거일까
약탈된 所有權일까
그대들 어린 학도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연령의 넘지 못할 차이일까…
전쟁의 모든 파괴 속에서
不死鳥같이 살아난 너의 몸뚱아리 ―
우주의 파편같이
혹은 혜성같이 반짝이는
무수한 잔재 속에 담겨있는 또 이 무수한 몸뚱아리―들은
지금 무엇을 예의 연마하고 있는가
흥분할 줄 모르는 나의 생리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서있는 書架 사이에서
도적질이나 하듯이 희끗희끗 내어 다보는 저 흰 壁들은
무슨 鳥類의 분뇨와도 같다
오 죽어있는 방대한 書冊들
너를 보는 설움은 피폐한 고향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예언자가 나지 않는
시인 마당/시인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