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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고재종 시 4

+  곗집

지풀 널부러진 마당 가득
시래기에 돼지뼈를 고는 곰국 내 자욱하였다
따순 방안엔 발고랑내랑 두엄 묻은 옷 쉰내랑
온통 콧설추를 분질러대도
삭정이빛 얼골들 그저 발그작작허니
곰삭은 육담들로 자글자글하였다
때론 찬바람 씽씽 부는 쌀값 쌀수입 논설고
화들짝허니 열어놓은 장짓문 밖, 죄 없이 푸른 
마늘까지 삿대질 튀었지만
아무려나 오늘 하로쯤은 삼동네가 모여 북적하니
모처럼 사람 내 나는 곗집에
새뜸 북잡이 김생의 둥둥 북소리도 울렸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뒷산 서래봉에 걸린 노루
꼬리 해 다 정들도록 곰국 자꼬 끓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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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가

때 아닌 가랑비가 내리는구나
또 한 해의 갖은 수고와 희망을 팔고
목로의 몇 잔 술에 터벅거리는 귀갓길,
또 한 해 마지막 아쉬움으로 타는
길가 이곳저곳의 들국떨기가 젖고
슬픔 더한 외로움이 우리들 남루 속마다
먼 산의 뿌연 는개로 차오른다.
그렇구나, 일 년 열 달 삼백날의 목 타는 허덕임으로
빛 가리고 빛 가리고 남은 빈 손은
그예 죄도 없이 자꾸만 떨리고
그 노염 저녁새 되어 어둔 하늘을 갈랐다.
가랑비 또 자꾸 굵어져 마음까지 젖는데
속절없이 그래도 의지할 바는
차라리 입 다물어버린 서로의 눈빛들과
빈 논에 언뜻 거리는 낫날들의 번뜩임,
돌아간다. 천근 풀리는 그예 세우며
다만 살아있다는 자존심 하나로 허허허 웃음 짓고
알곡 귀한 우리의 텅 빈 둥지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엔 저렇듯 아득히 떨리며 걸리는
끝내 눈물 보이고 돌아앉을 아내들의 등불들, 
마침내 서러움의 귀갓길 비는 거세져
우리의 통곡인 양 황토 황토 적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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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질

맑은 가을볕 온 들에 환하다.
또 한 해 가뭄 장마 병충해 다 이기고
품앗이 이웃들 함께 나락 베는 날,
우리의 눈물처럼 애틋이 타오르는
논두렁의 방울방울 들국꽃이 새하얀 하고
산들산들 산들바람은 지극히 붙어
땀에 젖는 우리의 피로를 말끔 씻는다.
그렇다, 지난봄 여름 그토록 허덕여
우리 오늘 오진 나락 깎지 무게에 취하여
싹둑싹둑 날렵히 나락 베는 이 기쁨은
날갯짓 세찬 새 되어 하늘 깊숙히 치솟는다.
가을볕 너무 맑아 차라리 서러운데
추수도 전에 나온 영농자금상환서며
막내 공납금 걱정에 어머니는
지레 구시렁거리는 소리로 한나절이지만
마음 더욱 그래도 뿌듯하고 든든한 것은
막걸리잔 서로 돌리는 이웃들의 넉살과
들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소리들,
낫질을 한다. 우두둑거리는 뼈마디 세우며
천 날 만 날 빚과 허기에 지친 우리 농사꾼
슬픔도 노염도 일으키며 낫질을 한다.
베는 게 나락만이 아니 이 독한 그림움으로
날랜 낫질도 날렵히 나락 베는 날,
앞산 뒷산 사방의 단풍 드는 나뭇잎들은
저 노랗고 붉은 박수갈채를 끝없이 쳐대고
맑은 가을볕은 더욱 맑아 온 날을 닦아
저기 저렇게 하늘도 천년으로 시퍼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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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길

모내기 끝낸 들에
치자꽃 향기 퍼진다
그 향기 따라
어린 모 뿌리를 잡는 들길 걷는다
바람은  솔솔 불어
길 옆 가득 피어나는 개망초꽃
그 숱한 흔들림으로 걷는다
흔들리며 걷는데
어찌 또 들길뿐이랴
발자욱 저벅 일 때마다 뚝 우욱
그치는 개구리울음에 젖어 걷는다
울며 젖어 걷는 게
어찌 또 들길뿐이랴
걷다 보니, 보아라
바람은 자꾸 스쳐와
저 볏잎들 지극히 사운거린다
어린 모 땅맛에 젖어드는
저 기쁨의 떨림의 푸르른 몸짓
왜 우리에겐들 흐르지 않으랴
저만큼 산비얄의 나무들은
녹녹청청, 노을까지도 물들인다
그 물들임에 나도 물들어 걷노니
이제 산 우뚝 막아서서
돌아서 들 걸어든다
돌아서  걷는 이슬길에도
치자꽃 향기 그윽하여
모쪼록 그 꽃과 향기 몇 점
주막의 술잔에 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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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들

초겨울 볕 여린 들에 선다
이제 그 가슴에 비울 것 다 비우고
저 홀로 은은한 들판에 선다
이 논 저 논의 짚벼눌만은 저리 단정한데
저기 요수배미 갈다 어제 낮잠
뒷산 양지뜸에 묻힌 남평영감 생각난다
흙에서 왔다 흙에서 살다
올 거둔 햅쌀밥 먹고 흙으로 돌아간
그 영감 성성하던 백발이 저기
돈들막의 갈꽃으로 일렁인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마른 풀잎이 날고 지풀이 날고
논두렁의 늦은 들국 몇 송이가 눈물겹다
우리네 힘든 일엔 때가 있고
우리네 둑새풀 같은 삶도 때 되면
필경 허허로운 평야로 순명 다하는 것
곧이어 저 들에 보리씨 싹터 올지니
내일은 저 산 밑 찬샘논 가는 만근이
그간 서른도록 장가 못 가 안달이더니
남원 처녀 데려와 새살림 차린단다
그리움 안고 지고 초겨울 빈 들에 서니
흙으로 가고 오는 사람들의 역사가
정정한 눈물로 그리워 보이고
저다지 넉넉 평평한 들 아니면 결코
우리네 삶 뜻도 없을 진실이 보인다
그 진실이 오래오래 빈 들에 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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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

당산나무 빈 가지 사이에 까치집 한 채 썰렁하다
더는 누구 돌아오지 않는 동구에
우는 듯 노여운 얼굴 일그러뜨린 장승으로 서서
빰 때리는 바람을 맞는 외진 꿈 속으로
쏴아쏴아 대숲이 쓸린다

어느 엄동에 얼어붙어 못 오는지 사랑아,
우리 독한 그리움은
삭풍의 계절 저 조삽한 까치집에 
까악 까악 까치 두 마리 끝내 깃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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聯臂(연비)*

이 선홍 장미로 즙을 내리
장미 가시론 바늘을 삼으리

아, 저쪽에선 번개칼이라도 달궈야 할라나

하면 그대는
수밀도 같은 젖가슴 언저리거나
백설기빛 허벅지 속살이겠는지

시방은 우르르 꽝, 우레도 한 번 넘은 뒤라면

이윽고 한 땀 한 땀 장미송이든지
한 톨 한 톨 정금正金의 말씀이든지를

차마 거기,
차마 거기, 
차마 그렇게 서러워선 못 새길라나
그대의 잉걸볼 같은 밀어들만
뿌리지 뿌리지. 내게 화인 되어 찍힐라나

그런 그날 밤, 저쪽에서는
어디 千年木천년목 한 그루쯤은 새까맣게 지지는

그런 그날 밤은
어쩌리 하리, 장대 장대 장대비!

* 사랑하는 남녀끼리 몸의 은밀한 부분에 하는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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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그 몰린 중심으로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쪽별이 된 왕오색나비가 내려앉아
싸하니 이는 향기로
사방이 다시 환히 퍼진다, 퍼지는
그 장엄 속에선
시간의 여울이 서느럽고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청명청명 하늘로 열려선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놓친 길 바깥에서
비로소 파정破精을 하는 
이 깊은 죄의 싱그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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篆刻(전각)

푸르른 한때
애인의 이름을 나무둥치에 새기며
소리 죽여 운 적이 있다.

수천수만 나뭇잎이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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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

간밤 뒤란에서
뚝 우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그루 툭,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 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 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 번의 부딪힘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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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상

청개 묻은 가을빛 혼자 다 뒤집어쓰고
고추 고추 새빨간 고추 혼자 다 따다
머릿수건 벗어 패앵 코 풀고
펄적기근히 두렁에 앉아
푸푸 내뿜는 담배 연기로
어찌 다 가릴거나
어찌 다 가릴거나
젊어 죽은 남정네의 서늘한 이마 같은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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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창호지에 어리는
달빛에 몸 뒤척이다가
못내 설레는 가슴 마루 끝에 나서서
활짝 열린 사립을 넘어 보다가

사무치는 그리움
더욱 못 이겨
훤한  마당 질러 동구에 나섰다가
동구 옆 새하연 메밀밭 가를
옷고름에 눈물 적시며 온통 서성이다가

이윽고는 타는 가슴 불나서 불나서
먼 신작로까지 나갔다가
막차도 끊긴 신작로를
열 발 높은 수숫대로 종내 목 늘이다가

끝내는 오열 솟구쳐
길섶 새르래기 울음으로 스러지는 마음
차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그만 푸른 눈빛으로 우러르는 거기 
부처님 같은 어머님의 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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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안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받았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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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鳴

보길도 예송이 해안의 몽돌들은 요
무엇이 그리 반짝일 게 많아서
별빛 푸른 알알에 씻고 씻는가 했더니
소금기, 소금기, 소금기의
파도에 휩쓸리면 까맣게 반짝이면서
차르륵 차르륵 울어서 흑명,
흑명석이라고 불린다네요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뿐이라던
뮈세여, 알프레드 뒤 뮈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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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길

어둠 속의 길은 흩어져 버린 세월과 같다
길들은 내 핏속에서 질풍노도로 일었지만
내가 지나온 길 뒷자리는 늘 폐허였다
나는 길 위에서 또 길을 찾으러 다녔으니
나는 나 자신을 찾으러 다닌 셈인가
아침놀까지 더러워질 만큼의 하늘을 보았으나
악성의 하품 때문에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난장 난 계절의 억새밭을 지날 때
나는 거기 가장 황량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바다는 목쉰 파도로 끊임없이 부서져도
바다의 모든 고통을 아는 자만이 귀 기울었다
누구나 길에 나서나 다 같은 길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어서 배회했다
웃자란 형극 속에서 길을 헤치곤 했으나
나의 어려움은 되레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잃어버릴 수도 없는 길을 향해 내가 저지른 죄,
그건 길섶에 핀 산자고를 짓이겨버린 일이었다
근사한 말만 만나면 빛나는 잠언을 쏟아내며
길을 노래하곤 하는 무수한 시인들이여
조주도 물었다, 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平常心이 그것이다. 남전이 답 했으나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어서
나는 다시 피에 젖은 흙빛의 길 위에 섰다
길은 항상 저만큼의 풍광 속에서 일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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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기차는 마침내 빼액 소리를 지르며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고
사내는 그녀가 마지막 건네주고 간
구리반지 하나를 일그러뜨리며
털썩 철로변에 주저앉은 그 순간
사내의 가슴속에 가득 출렁이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라도 한 듯
그 앞에 흰 들국화 서리서리 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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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중

해거름 논두렁에 쥐불을 놓고
대보름 개와 같이 배고픈 우리
이 저녁 동구에서 만월을 빈다

냇가의 불꽃놀인 저리도 곱고
집집 돌며 풍물패는 신명 치는데
달 모양 달빛 보아 수한 점치며
몇몇이 동구에서 마음 씻는다

세월이 오명가명 비바람 치여
하나둘 곶감 줄듯 비워지는 땅
남은 우리 가슴은 눈물로 끓고
정정한 그림움은 지풀로 날려도

앞들 뒷들 휘영청 달빛은 밝다
앞들 뒷들 휘영청 달빛은 밝다

그 아래 새파란 겨울 보리씨
모진 혹한 즈려밟고 저리 맑으니
아무렴 올 한 해도 풍년 들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만월 드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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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

깬 소주병을 긋고 싶은 밤이었다 겁도 없이
돋는 별들의 벌판을 그는 혼자 걸었다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풀잎 끝마다 맺히는 새벽이슬은 불면이 짜낸 진액
같았다 해도 해도 또다시 안달하는 성기능항진증 
환자처럼 대책 없는 생의 과잉은 끝이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어쩌다 만난
수수모감처럼 그에겐 고개 숙이고 싶은 푸른 하늘이
없었다 아무도 몰래 끌려가서 아무도 몰래
들짐승들이 유린한 꽃의 비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죄의 눈물이 굳어서 벌판의 돌이 되고 그 돌돌이
그를 처음 보고 놀라서 산맥이 될지라도
오직 해석만이 있고 원문을 알 수 없는 생을 읽고자
운명을 유기해도 좋았다 운명에겐 모욕이었겠지만
미물짐승에게라도 밥그릇을 주었다가 빼앗지는 말아야
했다 빼앗은 그릇에 모래를 채우는 세상이거나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도둑을 맞은
애인 집에서 되레 도둑으로 몰린 사람의 경우처럼
도대체 아니 되는 그 고통의 독재를 안고 넘으며
그에겐 인간만 남았다 자신의 불행을 춤으로 추었던
조르바처럼 한 번이라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도 되는 것 같아 춤을 멈추지 않는 
사람처럼, 벌판의 황량경이 식품에 쓸리는 나날을 불러
그는 홀로움의 신전에 향촉을 피웠다 그처럼
무장무장 단순한 인간만 남아 보리수 아래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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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冬安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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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지 아픔과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 내는 댓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 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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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생

살얼음 친 고래실 미나리꽝에
청둥오리 떼의 붉은 발들이 내린다

그 발자국마다 살얼음 헤치는
새파란 미나리 줄기를 본다

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그 미나리르 건지는 여인이 있다

나 그녀에게서 건진  생의 무게가
청둥로리 발인 양 뜨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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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들

눈빛만이 
푹 꺼진 눈빛만이 시퍼렇게 살아
그만 목이 컥 메이고 뜨건 눈물 솟게 하는
저 아픈 얼굴들.
찌들 대로 찌들어 더는 내일 바리지 않는
흙빛 시커먼 얼굴들에
으르렁, 으르렁거리는 이빨만이 남아
이 땅의 오천 년 유사 이래 줄곧
땅으로 허리 굽혀 온 세월을 묻어 뜯어
오늘의 절망을 울고
삶다운  삶의 세상을 묻는 성난 얼굴들.
주먹 흔드는 얼굴들.
절규하는 얼굴들.
피골이 상접한 사이에 광대뼈 돋고
피댓줄 같은 심줄이 불끈불끈 불끈거리는
저 서럽고 모진 땅의 얼굴들이
이 땅의 주인의 얼굴로 별처럼 빛날 때
그리하여 모두가 넉넉 평평한 들판으로 누울
그때까지의 사랑의 싸움에 나서서
저 이글거리는 햇덩이 더불어 나아가는
저 우리의 흙빛 서늘한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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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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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

이녁들 밥 먹기는 쥐새끼 소금 먹듯 허는디
욱좍욱좍 칠남내 새끼들은
집기둥뿌리라도 빼어 먹으려 해서 
흉년에 논 서 마지기 사려 말고 입 하나 덜으랬다는
어쩜 그렇게도 지당한 말씀 있어
큰놈부터 차례차례 제 옷섶만 가릴 정도면
서울이건 부산이건 짜장집이건  쇳공장이건
모조리 몇 푼 차비 쥐어 쫓아 보내고
이윽고 올해는 차비 쥐어 쫓아 보내고
시원섭섭히 창원공단 취업시켜 보내고 마니
도대체 일 봐줄 손대 하나 없어
머리 희끗희끗 허리 부러지도록 내외가
그간 새끼들이 다들어먹고 남은 논
용수배미 서 마지기 논에
세월아 네월아 네가 그렇게 가느냐며
장님 징검다리 딛듯 어쩌다 한 번씩
뚬벙뚬벙 모를 꽃다가 모를 꽃다가
그만 식은 밥 한덩이씩 낮 참으로 삼키며
먼 하늘 한 번 보고 먼 산 한 번 보고
끝내는 목줄기 씰룩씰록 논두덩마저 붉히는 
아래뜸 당산나무집 남원영감 내외분
뒷산 소쩍새 울어 더욱 쓸쓸한 내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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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랜 사랑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을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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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明戀歌

흰 술잔무늬의 꽃치자꽃에
알록달록한 채색의
거꾸로 여덟팔나비 앉았네

나는 아직도 사랑을 모른다네

행여 저 꽃치자 같은
네 순결한 향기에 취하면
내 영혼도 한 번쯤은 
저 나비의 채색을 입을는지

보라. 생금빛 태양 아래
반짝이고 반짝이는 진초록들

나는 아직도 너를 기다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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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의 눈

설코기로 나눌 돼지를 잡고도
한사코 회한과 허망함으로 떨던 저물녘
눈은 동구 밖 주막집의 막걸리잔에나 붐비더니
귀향살 살붙이들 길 걱정하는 이 밤에
눈은, 플래시불을 밝히고 광에 나가
나락씨며 토란씨며 각종 씨오쟁이를 살피고 나오는
아버지의 호호백발 위에 지천으로 붐비나니
눈이여, 쓸쓸하고도 따뜻한 노여움의 눈이여
나는 봄에 빚은 매실주 한 병 챙겨 들고  네 속을 걸어
고향을 뜨겠다는 참등집 석현 형을 그예 말리려 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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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서
ㅡ 사방이 탁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다 <이규보>

나는 너를 보고 너를 나를 볼 때
옆에선 느티나무에 씻긴 바람도 감아 든다
너를 내게 말하고 나는 네게 말할 때
다른 옆에선 휘파람새 소리도 끼어든다
내가 네 안을 들여다보니 앞강물이 반짝이고
네가 내 밖을 넘어보면 뒷산정이 우뚝하다
사방이 탁 트이니 무논에서 쟁기질하던 노인이 
초록빛과 구름의 병풍을 치며  올라오고
심중이 텅 비니 아까 나갔던 나비 한 쌍이
바람과 수수꽃다리 향기를 몰고 들어온다

아래께선 요 근래 부시의 일방적 폭격이 있었다
이렇게 높다란 데서 우리는 두루두루 웃고
아래계로 다시 고추 모종 놓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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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충만

이제 비울 것 다 비우고, 저 둔덕에
아직 꺾이지 못한 억새꽃만
하얗게 꽃사래 치는 들판에 서면
웬일인지 눈시울은 자꾸만 젖는 것이다
지푸라기 덮은 논, 그 위에 버리는 
늦가을 햇살은 한량없이 따사롭고
발걸음 저벅 일 때마다 곧잘 마주치는
들국 떨기는 거기 그렇게 눈 시리게 피어
이 땅이 흘린 땀의 정갈함을
자꾸만 되뇌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간간 목덜미를  선득거리게 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스적이는 마른 풀잎조차
저 갈색으로 무너지는 산들 더불어
내 마음 순하게 순하게 다스리고
이 고요의 은은함 속에서 무엇인가로
나를, 내 가슴을 그만 벅차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청함을 딛고 청정함에 이른
물빛 하늘조차도 한순간에 그윽해져서는
지난여름 이 들판에서 벌어진
절망과 탄식과 아우성을 잠재우고
내 무슨 그리움 하나 고이 쓸게 하는 것이다
텅 빈 충만이랄까 뭐랄까. 그것이 그리하여
우리 생의 깊은 것들 높은 것들
생의 아득한 것들 잔잔한 것들
융융히 살아오게 하는 늦가을 들판엔
이제 때 만난 갈대만이 흰머리털 날리며
나를 더는 갈 데 없이 만들어 버리고
저기 겨울새 표표히 날아오는 들 끝으로
이윽고 허심의 고개나 들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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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빛 처녀

차암 이쁘네 딸기 따는 저 처녀
두엄 열기 후끈한 비닐하우스 속에서
하늘빛 참한 마음의 보석
고은 이마며 콧등의 땀방울로 떨구며
늙은 애비 함께 부지런한 저 처녀
어렵사리 읍내 여고를 나와 내
개건 고등이건 하나같이 떠나가는
꿈 많은 서울길 몰라라 하고
그 가슴 뭉싯한 꿈일랑 소담한 딸기로 피우며
죽은 에미 대신하여 집안 꾸리는 저 처녀
하우스 밖 봄 볕 눈부신 밭이랑엔
노오란 유채며 연보랏빛 장다리꽃
상그런 바람자락 너무 좋은데
이까짓 고향 좋은 게 무엇이냐며
죽도록 일만 하는 곳 어찌 살 곳이냐며
미국 간 애인 따라 벌써 이민수속을 밟아놓고
허구헌 날 무슨 영어 배운답시고
카세트 테잎과 뒹구는 옆집의 여대생보다
천 번은 더 이쁜네 딸기 따는 저 처녀
아무래도 가슴 바쳐 내 사랑
딸기빛 고운 사랑이라면
학교 갔다 코피 흘리고 돌아온 어린 막내를
씻어주고 닦아주고 딸기 한 움큼 주어 달래고
새하연  이 빛내며 웃는
옆집 건너 딸기밭집 딸기 따는 저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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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신 햇살 속

가을밭에 나가서
수수 모감지를 따 내니
남은 수숫대 창 되어
쪽빛 하늘 깊숙이 떨더러

언 눔이 모감지만 따가느냐고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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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등불

저 뒤란 댓이파리에 부서지는 달빛
그 맑은 반짝임을 내 홀로 어이 보리

섬돌 밑에 자지러지는 귀뚜리랑 풀여치
그 구슬 묻은 울음소리를 내 홀로 어이 들으리

누군가 금방 달려들 것 같은 저 사립 옆
젖어드는 이슬에 몸 무거워 오동잎도 툭툭 지는데

어허, 어찌 이리 서늘하고 푸르른 밤
주막집 달려가 막소주 한 잔 나눌 이 없어
마당가 홀로 서서 그리움에 애리다 보니

울 너머 저기 독집의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이
어찌 저리 따뜻한 지상의 노래인지  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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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향기

나는 보았네, 지난 봄날 지리산에서
나와 딱 마주쳤을 때 멀뚱멀뚱 거리다간
점점 호동 그래지던 고라니의 눈을,
내가 꽃발 꽃발을 딛고 다가가자
순간 후닥닥 산정으로 튀는데, 그와 동시에
주위에 아득아득 퍼저던 향기를.
그 날랜 발이 천리향 그루를 건드렸던 것인데
꽃가지가 찢기고 꽃들이 흩어진 나무는
그 향기를 마음속 천리까지 끼치더라니!

계곡에서 일던 생생한 바람이여
상처에서 일던 너의 그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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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길

샛노란 불꽃의
활활 거리는 은행나무가 
정녕 고요한데도 한 잎 두 잎
강가에 불똥을 떨군다

그 길을 머루빛 눈동자의
찰랑거리는
여인이 걷고 있다

그 길을 이따금
맑은 바람이 스쳐와
이제는 불비 꽃비
천지간 물들이고 있다

아직도 세상의 매혹당할
그 무엇인가를 찾아
우리가 또록또록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면
저토록 저토록 환해지는 걸까

시방 창공을 가르는
새의 날갯짓에도
하늘의 길이 열리고

내 글썽이는 눈동자 속엔
글썽임만큼의
우주가 탁!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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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 한 개

해종일 그대
강변 뙈기밭 일구어
오목조목 참깨시며 미영씨를 놓고
잔물결 이는 저녁강물에
뜨건 발을 담그고 앉아
거기 그처럼 오래오래 먼 산을 바라보는구나
그대 가난한 삶의
슬픔의 총량만큼
흐르는 물살 위로 노을은 가득 반짝이고
이따금 저녁 바람은 불어
가만가만 풀꽃들은 흔들리는데
그대  거친 두 뺨에 흐르는
해맑은 눈물 줄기는 어찌 그리 애틋한지,
예의 강물은 소리 죽여 흐르고
몇 마리 저녁새는
그대 바라보는 먼 산으로 날고
그대 혼곤히 젖은 마음 또한
무슨 아픈 그리움으로 가득할 해거름
서러움으로 더욱 깊어지는
그대 삶의 아름다운 강물 위로
빛나는 조약돌 한 개 던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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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

그에겐 거울 앞에서 수음에 떠는 에곤 실레가 있다
그의 방에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창문이 없어서
생이 외부로 확산되는 일이 없이 그는 그 자신이다
그는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어 나온 아이  같다는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 표지가 나달나달해진
지하생활자의 수기엔 역시 풍경에 대한 묘사가 없다
짓밟힌 쥐가 큰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은 공포의
절규가 아니었다면 석탄 빛 어둠 속으로 빨려버렸을 
뭉크도 일찍이 그의 계보에 속한다 그런 그를
그토록 지하 방으로 숨어들게 한 것은 놀랍게도
어느 날 문득 그가 던져주는 먹이 몇 점에 홀려
뛰어오르고 뒹굴고 아양 떨고 싹싹 비는 애완견이었다
그걸 보고 마치 자신을 보기라도 한 듯 내쳐버렸을 때
당신이 과연 살아야 할 권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라고 외친 아내는 누구던가 그날로부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법을 급격히 잃어버린 그가
모든 인간은 모두에게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외부의 지옥을 버리고 망명한 지하병, 거기엔
끔찍하고 무자비한 케르베로스가 먼저 와 있었다
푸른 안광도 없이 소리도 없어 짖어대는
없고도 있는 그 개는 세계와 교류 없이 살 수 있다는 
확신범들을 잠식하는 개였다 그 개에게 먹히기 전에
옥탑방으로 올라가서 찬란한 햇살을 받고 싶지만
벽에다 둥근 원 하나를 부적처럼 친 그는
다만  그 공을 어처구니처럼 뚫어져라 응시할 뿐
다나에처럼 천정의 항좀비를 기다리지도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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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위하여

꼭두새벽, 넉 점도 못 됐는데
눈빛 비쳐든 창호문 새하얘서
맑게 깨어난 정신, 서재에 들어
한기 뚝뚝 듣는 寒山詩 펼친다
봄에 논밭 갈아  가을에 씨 거두고
엄동삼동에  책 읽은 버릇
그 무슨 헌금을 줘도 못 바꿀레라
내 비록 가문 들판,  몇 줌 곡식 거둬
세안 양식에 못 미칠지라도
아내 몰래 쌀과 바꿔온 몇 권의  시집들
벌써 책장이 너덜너덜 닳았음이여
그 서책 닳은 만큼 깨이는 넋인 양
헛간 장태에선 수닭울음 청청하고
창호에 비쳐든 눈빛은하도 좋아
시 일편에 담고자 펜 끝 세우니
늙은 아버진 벌써 고샅길 샘길 내느라
쓱쓱 눈 쓰는 소리 바쁘시다
옳거니, 세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숫눈 쌓인 날 제때 기침하여
사람 내왕할 길부터 내는 데 또 있는 것
책 덮고 굽히 앞문을 차니
눈부셔라, 울 너머 큰 눈 얹힌 청대숲
그 휘적휘적 휘어진 대줄기에서
쪼르릉 눈 털며 일군의 새떼 치솟나니
마침내 나 사랑하리, 이 가난한 날들의 
천지 사계 공으로 누리는 사치며
거기에 죄 한점 더하지 않는 꿈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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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위하여

고요도 익으면
도토리 몇 톨을 떨구는가
쓸쓸함도 사무치면 
붉나무 잎새쯤은 물들이는가
오롯하다는 것
풀덤풀 헤치면 거기
새 새끼 다 날아가 버린 뒤의
텅 빈 둥지 같은 것
어미 새가 우짖고 나면
더욱 고요하리
풀줄기가 스적이고 나면
더욱더 쓸쓸하리
오롯하다는 것
푸른 항변에 지친 억새 밭은
이젠 잔광에 반짝이거나
소슬바람에 쓸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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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댁의 여름

살찔 틈 없이 살 마를 틈도 없이
닭장 밑에서 지낸 듯 새벽같이 일어나
솔가지 꺾어 밥 짓고 마당 쓸고
조반 차리기 전 빨래하고 텃밭 매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밭으로 나가
콩밭 깨밭 고추밭 미영밭 더터
골고지에 풀매기에 북 주기에 물 대기에
등짝이 죄 타도록 저 홀로 미쳐나다가
엉덩이에 불붙도록 짧아진 그림자 밟으며
풀 한 짐이고 돌아와 점심 차리고
갓난애 젖 주고 큰애는 목욕시키고
오후엔 논으로 나가 농약치고  피사리하고
웃는 아랫논과 물쌈하고 물꼬 막고
논두렁 풀 베고 한 벌 두 벌 거름 주고
산그늘 내리도록 저녁별 새하얗도록
이 손이 저 손인지 저 손이 이 손인지
아 그만 세월 모르게 헤매다가
또 풀 한 짐이고 돌아와 저녁밥 안치고
소밥 주고 쇠똥 치우고 돼지 닭 모이 주고
사랑방의 중풍 든 노인네 똥요강도 치우고
이윽고 오밤중 밥 먹고 샘가에 나 앉으면
에라 오살 헐 놈은 중동 떠난 남정네
여자 속 밴댕이 속이라 해도 좋으니
그래도 그리운 것은 이역만리 서방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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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통리의 여름

닷새 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잠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금때 묻은 머리로 하나둘 데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은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말길 떠난 할매
굴삭길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는
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이 사양의 마을
그 어디건 헐린 담장, 텅 빈 마당에
개망초 눈물꽃은 흐드러지고
뻐꾹새 피울음은 종일 쏟아지고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 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 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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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희고 둥근 세계

나 힐끗 보았네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딴 세상에서인 듯한
풍덩거리는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키득 거림이여

때마침 어디 마을에선
훅, 끼치는 밤꽃 향기가
밀려왔던가 말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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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에서 마을로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그림자 내려
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망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
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
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는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
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그
싱그러움에 이르러선 문득 들이 넓어진다. 그
넓어짐으로 난 아득히 안 보이는 지평선을
듣는다. 뿌듯하다. 이 뿌듯함은 또 어쩌려고
웬 쑥국새 울음까지 불러대니 아직도 참
모르겠다. 앞 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
움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여미며 저
노인과 나누고 싶은 탁배기 한 잔, 그거야
말로 금방 든 개밥바라기별보다도 고즈넉
하겠다.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 서늘하고 뜨겁고 교교하다.
난 아직도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게
좋으니, 그 어떤 길엔들 노래 없으랴. 그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밝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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綿綿(면면)함에 대하여

너 들어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 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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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스치다니! 

반바지 차림의 산행길,
풀밭에 다리 쭉 뻗고 쉬는데
지게 작대기만 한 뱀 한 마리가 스스륵
종아리를 스쳐 넘는 게 아닌가

이런 이런, 뱀에게 스치다니,
뱀에게 스치다니!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린 
뱀에게서 깨어난 순간
그 시리고 축축한 감촉이 으스스히
온몸을 휘어 감더니

눈앞에 웬걸 개불알꽃들이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린 그 순간에
멍빛으로 납작해져선
꽃방석을 깔고 있는 게 아닌가
뱀에게 스치다니,
아직도 시리고 축축한 뱀의 세상이
날 그렇게 통과하다니!

그 순간 내 영혼까지 까마득해 버린 건
뱀의 길이에 새겨진
태초 이래의 긴  시간에 들렸던 탓인가

그러기에 꽃방석 위엔
나비 떼도 새삼 준동하던 것인가

===============
수숫대 높이만큼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그림자 쓰윽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리 밖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 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 울음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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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을 즐기다

세상에 어린 강아지 하고요
세상에 어린 새끼까치가
마당의 밥그렁을 사이에 두고
가르릉 가르릉 엄포를 놓고
까아작 까아작 뽀짝거리네요

세상에 이쁜 강아지하고요
세상에 이쁜 새끼까치가
장난칠 치듯 밥다툼을 하는데
난 한편으론 강아지 편을 들다가
또 한편으로 새끼까치 편을 드네요

그러다가 이제 즈이야 글든 말든
난 괜히 벌개지도록 흥감하여선
대문 옆의 홍색 자색 연분홍
봉숭아꽃에 짐짓 눈길을 주데요
발 밑에 줄 지어가는 개미도 보네요
사람이 한가해서 개미도 보네요
하늘의 흰구름을 따르고 싶고
나뭇잎처럼 반짝이고도 싶은데
바쁜나바쁜 세상에
하느님이 뭐라 하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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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그 환한 자리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리오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 올리다니!

저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그만 더 높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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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떼가 돌아올 때

복사꽃이거나 아그배꽃이거나
새보얀 꽃그늘 강물에 어룽대던가
섬진강 상류 압록물에
달빛은 욜랑욜랑 바람은 살랑살랑
너와 난 마냥 설레었던가

그랬던가, 어느 순간
강물은 마냥 은빛으로 술렁이던가
그것이 물너울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은어 떼 돌아오는 짝짓기 하는
그 번뜩이는 번뜩이는 뒤설렘이었다니!

아, 아득해져서
너와 난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산은
반야봉이던가 왕시루봉 줄기던가
이것들이 죄 말해질 수 없는 것이어서
너와 난, 너도 아니게 나도 아니게
무량무량 젖어들던 것만 확실할 뿐,

그날 밤 그렇게 그렇게
밤꿩 소리까지 뒤흔드는 한 숨결 속에
그처럼 시리게 시리게
은어 떼는 돌아오긴 돌아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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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거림에 대하여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올에 내 가슴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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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내가 시방 어쩌려고 능금밭 앞에서 서성이며
내가 요렇듯이 바잡은 마음인 것은
저 가시 탱자 울의 삼엄한 경비 탓이 아니다

내가 차마 두려운 건, 저 금단의 탱자 울 너머
벌써 신신해진 앞 강물 소리와
벌써 쟁명해진 햇살을 먹고
이 봐라. 이 봐라. 입 딱! 벌게는 중얼거리며
빨갛게 볼을 밝히고 있을 능금알들의 황홀

어느 해 가을 저곳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볼이 달아오를 때로 올라선
그 능금알을 따는 처녀들과
그것을 한 광주리씩 들어 올리는
먹구릿빛 팔뚝의 사내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저 능금밭에 들러거든
두근두근 숨을 죽이고, 콩당콩당 숨을 되살리며
개구명을 뚫는 벌때추니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익을 대로 익은  빛깔이
그토록 견딜 수 없는 향기로 퍼지는
저 풍성한 축제를 누가 방자하게 바라볼  것인가

내가 능금밭 앞에서 여전히 두려운 것은
시방 무슨 장한 기운이 서리서리  둘러치는
저 금기의 신성의 공간, 그것을
내 차마 좀팽이로도 바잡는 마음 다하여
아직도 몰래 훔치고 싶은 이 황홀한 죄, 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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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죽가에서 느릿느릿

하늘의 정정한 것이 수면에 비친다. 네가
거기 흰구름으로 환하다. 산제비가 찰랑, 수면을
깨뜨린다. 너는 내 쓸쓸한 지경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그렇게 너를 꿈꾸겠다. 草露를 잊은 산봉우리로
서겠다. 미루나무가 길게 수면에 눕는다. 그건
내 기다림의 길이. 그 길이가 네게 닿을지
모르겠다. 꿩꿩 장닭꿩이 수면을 뒤흔든다. 너는
내 외로운 지경으로 다시 구불거린다. 나는 이제
너를 그렇게 기다리겠다. 길은 외줄기,
비잠飛潛
밖으로 멀어지듯 요요하겠다. 나는 한가로이 거닌다.
방죽가를 거닌다. 거기 원기 흐르는 까만 염소에게서
듣는다. 머리에 높은 뿔은 풀만 먹는 외골수의
단단함을. 너는 하마 그렇게 드높겠지. 일월 너머
에서도 뿔은 뿔이듯 너를 향하여 단단하겠다.
바람이 분다. 천리향 향기가 싱그럽다. 너는
그렇게 향기부터 보내오리라, 하면 거기 굼뜬
황소마저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렇게 아득하겠다. 그 향기 아득한 것으로
먼 곳을 보면, 삶에 대하여 무얼 더  바래
부산해질까, 물결 잔잔해져 수심이 깊어진다.
나는 네게로  자꾸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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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숲길에서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딛는 발작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나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無明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 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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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 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아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댓잎은 시퍼렇게 치솟아 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 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 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 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댓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같은 흰 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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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

"얼씨구, 긍께 지금 봄바람 나부렀구만잉!"
일곱 자식 죄다 서울 보내고 홀로 사는 홍도나무집
남원할매 그 반백머리에  청명햇살 뒤집어쓴 채
나물 태는 저편을 향해, 봇도랑 치러 나오던
마흔두 살 노총각 석현이 흰 이빨 드러내며
이죽거립니다.
"저런 오시럴 놈. 묵은 김치에 하도 물려서 나왔등만 뭔 소리 다냐. 늙은이 놀리면 그 가운뎃 다리가
실버들 돼야 불 줄은 왜 몰러?"
검게 삭은 대바구니에 벌써 냉이, 달래, 쑥.
곰방부리 등속을 수북이 캐담은 남원할매도
아나 해보자는 듯 바구니를 쑤욱 내밀며 만만
찮게 나옵니다.
"아따 동네 새암은 말라붙어도 여자들 마음
하나는 언제나 스무 살 처녀 맘으로 산다는 것인데
뭘 그려. 아 저그 보리밭은 무단히 차오르간디?"
"오매 오매 저 떡을 칠 놈 말뽄새 보소. 그려
그려. 저그 남원장 노류장화라도 좋을게요 꽃
피고 새우는 날, 꽃나부춤 훨훨 숨서 몸 한번
후끈 풀었으면 나도 원이 없겄다. 헌디 요런
호시절 다 까묵고 니 놈은 언제 상투 들테여?"
"이이고, 얘기가 고로코롬 나가분가?
허지만 사방천지에 살구꽃 펑펑 터진 들 저
저 봄날은 저 혼자만 깊어가는데 낸들 워쩔
것요, 흐흐흐, "
괜스레 이죽거렸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싶은 석현이 이내 말꼬리 사리며 멈추었던 발 슬금슬금 떼어가는 그 쓸쓸한 뒷모습에
남원 할매 그만 가슴이 애려와선 청명햇살
출렁하도록 후렴구 외칩니다.
"이따 저녁에 냉잇국 끓여 놓으께 
오그라이 우리 집 마당에 홍도꽃도 벌겋게
펴부렀어야!"


__________* 54


곗집
귀가
낫질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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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
세한
연비
장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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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직관
청상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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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안
흑명
길의 길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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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중
독학자
동안거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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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생
얼굴들
첫사랑
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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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랜 사랑
무명연가
세모의 눈
정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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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충만
딸기빛 처녀
부신 햇살 속
사람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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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향기
은행나무길
조약돌 한 개
지하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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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위하여
고요를 위하여
보성댁의 여름
분통리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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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희고 둥근 세계
들길에서 마을로
면면함에 대하여
뱀에게 스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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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숫대 높이만큼
한가함을 즐기다
수선화, 그 환한 자리
은어떼가 돌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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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거림에 대하여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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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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