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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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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 시 + 꽃 갈라진 일도 오라 가라 함도 없이 거기 섰다가 꿈처럼 가던 길 다시 돌아와 비인 자리에 고이 피네 만물 속에 홀로 웃는 미소 사랑의 증건가 옛 빛 새로 있음 꽃은 빛 꽃은 마음 꽃의 아름다움 마음의 아름다움 그렇다 떨어진들 어떠리 우리 사이엔 겨울에도 꽃이 있는 걸 ----------- + 등(燈) 벌레 소리는 고운 설움을 달빛에 뿜는다. 여윈 손길을 내어 젓는다. 방안에 돌아와 등불을 끄다. 자욱--한 어둠 저쪽을 목쉰 기적이 지나간다. 비인 가슴 하잔히 울리어 논 채 혼곤한 벼개머리 고이 적시며 어둔 천정에 희부연 영창 위에 차단--한 내 꿈 위에 밤새 퍼붓다. -----------+ 고향 하늘은 내 넋의 슬픈 고향 늙은 홀어머니의 지팽이 같이 한줄기 여윈 구름이 있어 가을바람과 함께 소슬하더..
김광섭 시 + 봄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 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은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距離)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 해를 따라 몇 천 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
고은 시 3 + 귀 차라리 위리안치 몇 십 년으로 오로지  듣는 일이 전부인 곳 그곳으로 간다 함거 속 갇혔건만 내 마음속 물구나무서고 싶도록 차라리 기뻐라 피딱지 아직 그대로 복되도다 복되도다 복되되다 이로부터 거짓말 참말 없는 행복 그곳으로 간다 산 설고 물 설었다 제주도 산방산 기슭 거기 돌담에 갇혀 위리안치 가시울타리 갇혀 헛바닥 없이 이빨 없이 하루 이틀 굶어가며 끝내 굶어 죽어가며 그곳의 성난 바람 소리 뒤 생시인 듯 꿈인 듯 남은 새 새끼 소리 듣는다 들었을 뿐 들을 뿐 들을 뿐 세상의 유언이었다 아이고, 나의 유언 끝내 없었다 -------- + 말 어제 나는 나의 말보다 컸다 말세였다 오늘  나의 말이  나보다 크다 태초의 태초이다 후광(後光) 사절 내일  나의 말도 나이다 어떤 나이다 -------..
고은 시 2 + 땀 땀 흘리지 않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하물며 방금 벤 풀냄새의 진리이랴 사랑하는 그대가 말했지 땀을 흘리고 나면 실컷 울고 난 것보다 더 새롭다고 이 세상이 새롭다고 ---------+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 숨 막 숨 거둔 사람의 얼굴 고요타 그 얼굴 기슭 아직 남아 있는 숨 꼬리 고요타 애통 사절---------- + 곡비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
김남조 시 3 + 가을에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해바라기 씨앗 검게 여물고 이산 저산 솔바람에 곤충들 제집에 숨느니 꽃은 무덤에만 피고 가랑잎 불속에 던지며 던지며 도무지 제실(祭室)같은 마음 그리운 당신이여 이 사모를 길러 고이 당신께 드리기 위해 나는 채어났다고 믿어 왔습니다 당신을 낳으시던 날 당신 어머니께서 땀 흘리시고 이윽고 기뻐하신 그러한 수고와 기쁨이 당신과 늘 함께 하기를 그곳에 나도 있기를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내 손을 이끌어 주시겠지요 열손가락 낱낱이 지환(指環)처럼 당신의 사랑을 감아 주시겠지요 마지막인 양 모든 일이 귀하면서 첫시작인 듯 모든 일 공손하게 그리운 이여 지금은 우리가 떠나 있다 해도 멀잖아 모든 슬픔을 잊을 것입니다 내 두 팔에 머리를 뉘이고 당신은 그냥 편..
김남조 시 2 + 가을 2 어느 때 침묵의 전령(傳令)이 와서 내 안에 머물렀다 말없는 세계, 무변한 벌판에 내가 살았음은 그 때문이지 안으로 더 안으로 줄곧 검은 층계를 밟아 내리던 어둠의 충동 무엇 때문에 그래야만 했었는진 나 자신 아는 바도 없다 흐르는 사계(四季) 그건 기다란 몸짓으로 드러눕곤 했는데 어느 것이나 침묵의 봉인(封印)에 가을이 왔다 하늘에서 시든 잎들이 흘러내리고 공중의 배가 침몰하듯 아찔한 무게의 사유(思惟)가 쏟아져 오고 참 이상하지 소리에 굶주리던 만상(萬象) 한가운데 갑자기 음악이 흘러 넘쳤다 다른 일도 또 있다 청징(淸澄)한, 선인(仙人)들의 시심(詩心)이 순금의 망사를 짜서 천지 사방에 걸어두는 일이. 저들이 내쏘는 빛의 한 줌 여광(餘光)을 두 손에 받으며 울어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김남조 시 1 + 꽃 나는 당신의 옥토(沃土) 무심히 뿌리신 씨앗이 이렇게 곱게 꽃 폈습니다 자 어서 여기 와 당신의 꽃을 안아 보십시오 입술 갖다 대면 연지(嚥脂)처럼 수줍은 꽃이랍니다 ----------- + 눈 천국엔 주일(主日)뿐인가 천국사람들아 비행기 타고 못 가는 하늘 꼭두에서 희디하얀 편지, 눈이 오네 이 세상에선 못 만드는 깨끗한 반짝거림 빛나면서 얼어버린 눈물 눈이 오네 천국엔 주일(主日)뿐인가 주일(主日)의 촛불 밝히어 주일(主日)의 풍금(風琴) 울리어 조용하게 꿈꾸는 유순으로 눈이오네 아무 말도 못 하겠는 그저 아득한 마음에 불의 밀씨 뿌리는 눈이 오네 깃을 치는 것을 치는 유리의 새떼 오네 ------------ + 비 내 유정한 시절 다 가는 밤에 억만 줄기의 비가 내린다 세월의 밑바닥에 차례로..
김현승 시 + 길 나의 길은 발을 여이고 배로 기어간다 五月의 가시밭을. 너의 길은 빵을 잃고, 마른 혀로 입 맞춘다 七月의 황톳길을. 그대의 길은 사랑을 잃고, 꿈으로만 떠오른다 十月의 푸른 하늘을. 우리의 길은 머리를 잃고, 가는 꼬리를 휘저으며 간다 산하에 머흘한 구름 속으로. ------ + 꿈 내가 四月에 피는 수선(水仙)을 사랑함은 내가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 기억하여 잊지 못함도 내 꿈의 그리매를 어렴풋이나마 저 자연과 그대의 얼굴에서 바라볼 수 있기에...... 내 꿈이 사라질 때 나의 사랑도 나의 언어도 나의 온갖은 비인 것뿐 이렇듯 빛나고 아름다운 그곳에 서서 언제나 내 갈 길을 손짓하여 주는 내 꿈은 나의 영원한 깃발 나의 영원한 품! ------- + 창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