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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남조 시 2

+ 가을 2

어느 때
침묵의 전령(傳令)이 와서 내 안에 머물렀다
말없는 세계, 무변한 벌판에
내가 살았음은 그 때문이지

안으로 더 안으로
줄곧 검은 층계를 밟아 내리던 어둠의 충동
무엇 때문에 그래야만 했었는진
나 자신 아는 바도 없다

흐르는 사계(四季)
그건 기다란 몸짓으로 드러눕곤 했는데
어느 것이나 침묵의 봉인(封印)에

가을이 왔다
하늘에서 시든 잎들이 흘러내리고
공중의 배가 침몰하듯
아찔한 무게의 사유(思惟)가
쏟아져 오고
참 이상하지
소리에 굶주리던 만상(萬象) 한가운데
갑자기 음악이 흘러 넘쳤다

다른 일도 또 있다
청징(淸澄)한, 선인(仙人)들의 시심(詩心)이
순금의 망사를 짜서
천지 사방에 걸어두는 일이.

저들이 내쏘는 빛의
한 줌 여광(餘光)을 두 손에 받으며
울어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가을은 지금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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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3

불을 문
한 가치의 성냥에
치마끈 푸는
거푸거푸 풀어 던지는

단풍(丹楓)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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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                                          
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 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 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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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기어이 저질러 버렸구나
사랑의 고백 하나
산탄 되어 흩어졌느니
꽃 피어서 꽃 지듯이
후련히 절로 그리 되었느니
생의 이력서에
기록될
내 마지막 짝사랑이
이로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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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告別)

낙엽은 가을의 수기(手旗)
저리 흔들며 이별을 고한다

안녕히,
당신이 떠나는 길머리에
나도 작은 손을 흔들어 주마

가을은
뜨거운 마음을 숨기고
헤어지는 계절
버려진듯 서 있는 이정표(里程標) 앞에서
아픈 이별을 견디는 때란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함으로 하여
보내는 계절이란다

화평한 영혼은
신이 켜 주시는 성총(聖寵)의 등불
그 불빛 당신께 있으라
빌어 주마

사랑하면 무엇이나 주고 싶어진다
평생 바치며 살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나뉘는 일도 주는 거란다
더 섧게 더 많이 주는 거란다
당신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작은 손을 흔들며
하얀 꽃이파리만큼
웃음 지어 볼까

사랑은
멀리서도 가까이 사는
마음이라고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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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

이젠 
말을 버릴까 싶네
몇백 년 늙어버린
말과 울음에게
가서 쉬어라
가서 쉬어라고
거대한 하늘 물뿌리개
봄비 적시는 이날에
작별하고 싶네
겨우내 노래하던 새
묘지에서도 노래하던 새
몇백 년 그럴 양으로
성대가 더욱 트인
새여 노래여
날아가거라
날아가거라고
손짓해 보내고 싶네
소리 내는 모든 건
내 하늘에서
석양으로 저물어가고
청정한 고요 하나
남은 삶의
실한 고임돌이었으면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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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1
이 기쁨 처음엔
작은 꽃씨더니
밤낮으로 자라 큰 기쁨이 되고
위태한 꽃나무로 섰네

아, 이젠
불이어라
가책의 바람으로도
끌 수 없거니

2
새벽잠 깨면
벌써 출렁여 있는 마음
한 쌍의 은행(銀杏)같이
연한 슬픔과 또 하난
기쁨이래요

말하지 말아야지
나 이번엔
죽도록 말하지 말아야지
좌르르 하늘이 쏟아지던
옛날의 그 한마디
이 마음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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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일(落日)

알겠습니다, 지금 알겠구먼요
당신이 나의 누구이었나를

그 가슴 늑골(肋骨)하나로써
나를 빚던 날
숨쉬는 한점 살과 몸서리나는 피, 피
그 아픔을 먹여 나를 가르신
당신임을 아겠습니다

당신의 눈짓이
당신의 느낌과 생각함과 소리침이
차례로 내 몸에 옮겨오고
그 마음 그 영혼까지
거울 속처럼 환히 비치는
운명의 초상(肖像)으로
나를 기르신
당신 음을 알겠습니다

오늘은 내 키가
당신에게 빛고
나의 잉태마저도
그 전날 당신의 그것과 같음이어니
오오 낙일(落日)
인젠 피 흘리며 흘리며
당신이 죽어가심이여
하늘 온통 끌어 덮고
스스로 불사르는 정결한 불길

숙영 한 이 어둠 속에
지금은 내가
생명을 해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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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잠든 아가의 손을 쥐어 본다
흰 이마 귀여움 귀뿌리에 달빛이 머문다
달은 둥근 얼굴의 고요한 마음씨
눈썹으로 해서 나의 살결에도 스미느니

달빛이 댕기면 피부가 정결해지고
정결한 피부가 속으로 순화(醇化)의 깊이를 포개면
이로써 고운 꽃물이
적셔질지도 모르는데

아가 머리맡엔 흰 석고의 성모상
성모의 발이 출렁이는 물속에처럼
달빛이 잠겨 있다

잠자는 것들은
좋은 술에서처럼 잠에 취하는 시간
잠자지 않는 건
눈썹을 깜박이며 모여들 온다

내가 나눠져서
몇 개의 분신으로
만나는 시간

숨겼던 사랑을 차고 오는 나와
미진한 염원에 가슴이 더운 나와
가책의 질고를 앓고 잇는 나와
이렇게 여럿이서
원탁(圓卓)을 둘러앉는다

달은 둥근 얼굴의 상냥한 마음씨
닫힌 유리창을 넘어 와서
나의 눈앞에 유백(乳白)의 등(燈)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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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輓歌)

노래를 청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검은 밤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뭇별 눈감겨 주십시오
작은 틈새도 실오리만 한 빛도 막아 주십시오
구석진 나의 골방에서
홍건히 피를 쏟아야 할 시간입니다

까닭을 묻지 마십시오
내 병을 따지려 들지 마십시오
그저 긴긴밤이 있어야 한다고만 알아주십시오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고 죽고 싶던
야문 납덩이같은 외롬도
이 밤엔 내 피 속에 빠져 가녀린 나비처럼
숨져야 한다고만 알아 주십시오

죽어가는 사람이 거짓을 말하지 않듯이
나도 이 밤에 거짓말을 아니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내가 왔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내가 못간
그 한 가지밖에는
아무 설움도 보챈 일이 없었습니다

천심(天心)에 치솟던 피어린 연호(蓮呼)
지심(地心)으로 부어 보낸 한없는 눈물
나의 이름을 불러 주지 마십시오
나의 이름을 엿보려 들지 마십시오
지금은 내 편히 쉴 그곳으로 어서 가렵니다

이따금
동혈(洞穴)같이 허줄한 가슴 붙안고
어린 아들처럼 안기려 오던
착한 내 사람 착한 내 사람
아무래도 목숨은 졌고
꽃잎인 양 훌훌 목숨은 졌고
남은 건 부디 수정(水晶) 같은 체념(諦念)이어야
하겠습니다
뭇별 눈감겨 주십시오
영원히 어둠으로 두어 주십시오
무덤엔 아무 말도 새기지 말아 주십시오

행여 슬펐다고 말을 전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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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晩鐘)

목숨을 원하셨더면
목숨을 정히 바쳤겠지요

잡초처럼 쑥쑥 디밀던 것
서슬진 칼날처럼 손톱을 박고 서서 욕하고 불붙어
그 몇번 미친 듯 죽을 뻔한 목숨의 오뇌에서
당신을 휘젓고 주무르고
마침내 피를 묻혔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목숨을 주고받아야만 함일 줄로
알았던 잘못
그래도 못다 지은 죄는
신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성하(盛夏)의 푸른 파도 멀리
어두운 저녁길 위에
이렇듯 뉘우침을 안고 나 여기 돌아서 있음은
목숨을 달라지도 않고
짐짓 바다만치 사랑해 주시는
당신의 마음을 앎이옵니다

앙제뤼스의 기도 시간,
흰 돌층계에 성촉(聖燭)의 화심(火心)이 번져나고
아아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이 세찬 빛발 속에 명멸하며 있다지요

보람지는 일이 또는 보람 지지 않는 일이
사랑에선 문제가 아니됨을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스스릉 울려오는 만종의 그윽한 여운에서
그늘진 넓은 초원(草原)을
또 한번 품어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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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향(望鄕)

바라보지 마라
눈 감아도 환한
옥양목빛 하늘
이름 부르지마라
안 불러도 대답하는
마음의
산울림인 사람

반백 년 살아
이적지 중심이 안 잡히는
어설픔 이언만
봄눈 다녀간 후
모든 추위 덥히는 아지랑이만큼은
가슴으로 알겠네

삼라만상이
지척에 숨소리 들리고
얼어터진 속살에까지
봄햇살 기름 붓는
이 세상 아름다와라
따뜻하여라

사랑이여
우리 사이 보고짐도 과분하고
고향인들 웬만큼은 떨어져 그리는 일
이나마도 복된 줄을
잘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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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상(母像)

눈물이 많은 어머니로 말하면
눈물은
모성의 샘입니다
기다림에 사는 어머니로 말하면
시간 속에
모성은 섬입니다

하늘이야 차마
가난을 가르쳤으랴만도
굶주리는 어린애를 품에 안은 어머니에게
가난은 모성의 벌(罰)입니다
한평생 서릿발같던 노염도
마지막 길엔 풀고 가거니
용서는 모성의 화환(花環)입니다

세상엔 허구많은 이름이 있건만도
그 무상(無償)인 사랑의 의미에서
그 소소(素素)한 미소의 의미에서
이에 견줄 건 또 없으리

망각에 못 박으면
먼 세월 요요한 별밭에
다시 피어 오르리니
모성은 고독한 은총의
그 등(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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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모두 하늘이 낸 선선(先天)의 벌족(閥族)이
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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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산들바람 한 오리의 손짓으로
꽃잎들은 검은 땅에 뛰어 내립니다

어느 건 연분홍 패각(貝殼)의 빛깔
어느 건 눈이 부신 백합의 살결
더러는 불송인 양 타기도 하고

산들바람 한 오리의 손짓 속에
절로 오는 꽃의 내음
절로 가는 세월의 한때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의 모습이랴
사람의 마음이랴
어느 게 무엇일래 더 외롭고
어느 게 무엇일래 덜 설우랴

산들바람 한 오리가
덮은 그곳에
꽃잎들은 꽃잎들은
단잠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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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無題)

그 어디 한적한 섬으로 가도 좋다
게서 영영 산대도 좋다
돌아가는 백년 달빛과 너만이 타고
구애 없는 해풍 함께
나만이 거기에 남는 대두 좋다

너의 성명이 무엇이면 어떠리
너의 고향이 마무데면 뭐라나
죽어야 할 만치 슬픔이 있다는 점으로
넌 무작정 내 마음을 끈다

우리가 삶에게 바랐던 거란
고맙고 행긋한 한 줌의 인정
병석에서 목마른 아내라며는
한 그릇의 냉수를 사랑으로 먹여 주는
남편 있음으로 족하다 했었니라

건강과 이해와 믿음
그렇다, 결코 많은 걸 원하지 않았었다
손목에 감기는 쇠사슬을 풀어내듯
엄청난 배리(背理)를 끊어 버리라니

어디 한적한 섬에라도 가자
게서 겨웁도록
네 슬픔을 품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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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바다여
나의 좋으신 분을
수평선 저 너메
네가 업어 뫼신 후
날마다
천도(天桃) 한 알을
상(床)에 올리네

즈믄 날
만경창파
머리 풀어 바치던
나의 제사(祭祀)
어느덧 서리 묻은
내 귀밑머리

어쩔라나
어쩔라나

오늘은
영혼 안의 그 바다에도
하늘복숭아
가지만 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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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바람 부네
바람 가는 데 세상 끝까지
바람 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靑果) 연한 과육(果肉)에
수태(受胎)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課園) 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말지 하는 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이 바람이던 게야
바람이 의관(衣冠) 쓰고
나들이 온 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 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 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며
바람따라 나도 갈래
바람 가는 데 멀리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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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국(白菊)

그전날 누군지
핏줄기 더운 탓이라던
그 말 한마디는
백 년 형벌(刑罰)을 내다보았음인가

한평생 예서 끝난 듯이
훤하게 빈 마음 하나
내 몫으로 남아.....

손끝이 저려 오도록
희디 흰 국화를 보고 있으렵니다
하얀 이 꽃잎에
눈이 멎은 채
가만히 죽어간다 해도
부디 석양 같은 사랑으로
나를 회상해 주십시오

가을산 가자던 사람
저 혼자
삼삼히 가을산 보러 가고
거리로 가자던 사람
저 혼자
총총히 거리를 찾아들고

은행잎 뚝뚝 지는
해질녘 조락의 길을
저마다 아득한 이롬에 싸여서들
가고 갔는데

고요하게
고요하게
꽃을 바라보며 있으렵니다

눈도 무디고
귀도 무디었는지
명암(明暗)도 모를 곳에
백국은 홀로
피고 지누나

----------
사랑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 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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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1
이리 심각한 사나이는
처음 본다
천지개벽 이래
하느님처럼 혼자 살아온
옹고집 독신남자
그 뻑신 남자의 기를
모래바람에
스륵스륵 칼날 벼르며
스스로도 전율하다니

2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고요를
이에 뵈옵느니
초월과 영원성
그 상류층 혈통의 맏형님을
이에 뵈옵느니

순교 후에 또 순교하는
단두대와 이슬 내음의 기다림을
이에 뵈옵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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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想思)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 번 만 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에 전화 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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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녘

사람아
아무려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 보이면 어때
바다밑 더 패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 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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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瑞雪)

눈이 온다
손 시린 흰빛의
나비들

우렁찬 고함처럼 잘 들리는
갑작스러운 음악
이 황홀한 소낙비

눈이 온다
마법의 옷 갈아입는
하늘

불이 보고 싶어라
네 영혼이
눈물이 보고 싶어라
네 영혼이

사랑하지 않고는
잠시도 살지 못하는 이 피곤한 영광
이 줄기찬 미혹(迷惑)

눈이 온다
마음껏 채광(彩光)에 몸 적신
나비들

======
+ 서시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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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

성냥갑 속에서
너무 오래 불붙기를 기다리다
늙어버린 성냥개비들,
유황 바른 머리를
화약지에 확 그어
일순간의 맞불 한 번
그 환희로
화형도 겁 없이 환하게 환하게
몸 사루고 싶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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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일(雪日)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 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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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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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 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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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心火)

소녀가 있고 성당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화강석 층층계를 오르내리면서
아아 또 여기 선혈을 흘리는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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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雅歌)

가장 깊은 뿌리에서
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의
내 외로움을
사람아
너에게 드릴밖엔 없다
동쪽 비릿함에서
서녘 끝 너머까지
한 솔기에 둘러 낀
하늘가락지.
돌고 돌아서
다시 오는
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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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雅 歌) 1

하늘도 제일 높은 하늘에까지
너를 부르는
한 목소리뿐이다

선물로 받은
햇빛이라 여기며
비라 여기며
나날이 더운 손 잡아주며 산다
사랑을 가진 나는

진작에 몰랐던
눈물과 진실
너로 해 생긴 근심도 소중해라
사랑을 가진 나는

바다도 제일 깊은 바다에까지
너를 부르는
한 목소리 뿐이다

선물로 받은
빈 자리라 여기며
외롭다 여기며
약손 얻어 가슴 쓸어내리듯 산다

아아 내 눈이 본
가장 놀라운 빛으로
몸이 빛나고
영혼이 빛나는 너를
죽도록의 냐가 보고 싶은 마음도
훗세상에 심어
뿌리 깊은 연분의 나무 될
기도에 바치고 나면

딸의 제일 먼 땅끝에까지
너를 부르는
한 목소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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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雅歌) 2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 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 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네게로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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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雅歌) 4  

가장 깊은 뿌리에서
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의
내 외로움을
사람아 너에게 드릴 밖엔 없다
동쪽 비롯함에서
서녘 끝 너머까지
한 솔기에 둘러 낀
하늘가락지.
돌고 돌아서
다시 오는 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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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
오늘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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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어서 오십시오
해풍 오는 창변으로 당신은 오십시오
막달레나의 향유처럼
눈물과 묵언(默言)만으로
우리
손을 잡고 서 있습시다

햇빛을 물면 금시에 피가 도는
몇 갑절 꽃이피라보다야 미덥고
더 고운 초록 잎사귀

미움도 없이
갈라진 사람들의
그러한 설움이
모가지에 모가지에 감겨오는 시절
서로들 해면(海綿)처럼 가슴 습하고
산 어머 두고 온 어머니인듯
얼마나 보고싶던 보고 싶던
푸른 오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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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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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애상(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미혹(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러워

-----------
의자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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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隣人)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 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나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 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
주일(主日)

주일은
마음 흡족하다
아이들의 푸짐한 단잠부터
엄마에겐 안식일의 행복
다른 날은
출항한 배들을 기다리는
해저문 항구(港口)만 같았는데
주일은
꽃을 둔 식탁에
아침 목욕을 마친 아이들을 앉힌다
밝고도 유순한 눈매가
태어나던 그날의
내 자식으로 돌아들 왔구나

주일은
어버이도 그 어버이를
첮아 뵙는다
풍금소리에도 이슬떨기가 맺히는
아버지의 성당(聖堂)에 들면
아뢸 말씀 차라리 없고
탄생의 날 벌거숭이 나를
바쳐야 한다고
이 한 가지 알 뿐이다

일 주간은
작은 생애,
주일은
생금(生金)빛 창세기,
생명들이 눈뜨는
환희와 놀라움이
하늘에서 내려와
죄인의 온몸을 덮는다

---------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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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누구라도 그를 부르려면
속삭임으론 안 된다
자장가처럼 노래해도 안 된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평화여, 아니 더 크게
평화여, 천둥 울려야 한다

그 인격과 품위
그 아름다움
그가 만인의 연인인 점에서도
새 천년 이쪽저쪽의 최고인물인
평화여 평화여
부디 오십시오, 라고
사춘기의 순정으로
피멍 무릅쓰고 혼신으로 연호하며
그 이름 불러야 한다

======
참회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 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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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

1
촛불아
나의 어느 사랑노래로도
노래 너머 첩첩 산길 더욱 가는
그 사랑으로도
나의 삶 전부로도
불타고 재도 없는
너를
못 이기겠다

2
환하게 환하게
내 영혼을 지나가는 이의
지나 만 가시어도
눈물 나는 이의
바람도 못 흔드는
주홍(朱紅) 옷자락

6
한 덩이 백랍
불 만나 기름되고
맑아져 증류수 되었다가
다시 엉기어
기름되고 백랍되어
봇은 몸이 또
불붙네

7
옛날의
외롭던 사내아이와
외롭던 여자아이가
외로운 버릇대로 그냥 자라나
외로운 긴 세월 차례로 섬겨
이렇도록 늦은 날에
만났습니다
촛불 한 자루
예 밝히오니
조물주신 어른
소람(昭覽)하시옵소서

8
한번도
여자를 안아보지 못한
신선(新鮮)한
이 서투름을,
아아 동정(童貞)의
불 심지

9
물속
천길 만 길에
금두레박 타고 온 이는 없다
찬물찬물 밑바닥에
추워서
눈먼 여자
찾아준 이는 없다
너밖에는

10
지금 막
씻어 행군 영혼일 땐
촛불 육신(肉身)
가득한 방에
옷 벗고
혼자 든다

13
승천(昇天)한
촛불들은 별이 되었나요
별이 되어
밤새도록
빛의 비를
내리나요

------------
촛불 2

15
면도날로
불송이 자르며 운다
잘린 불송이
서로 이어붙는 거
한없이
눈물난다

16
몸 비추는
불빛일랑 말고
마음 비추는 불빛도 말고
너의 영혼
그 옆방의
빛그늘되고 지고

18
천일(千日)을 보고 싶던 이
천일을 오시쟎은 이
창호지에 여린 불빛 적시며
등불 설핏 비추면
천일 몇 갑절에도
나는
문 열을래

21
잠자려마
잠자려마
평생에도 잠 없는 순금(純金)의 눈시울
사랑처럼
고단한,
아아 죽음에만 눈감는
촛불

22
너만
울리진 않아요
혼자 노숙(露宿)하겐 결코 못해요
촉구(燭淚) 모두 불이 되는
너를
나 죽은 후라도
투명한 내 몸이
안아줄 거예요

24
둘의 영혼
다 열리옵고
그 다음은 촛불 같게 하소서
고요함과
불타는 일만을
알게 하소서

------------
하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날마다 슬퍼함으로
슬픔에 배부를 것이요
다른 굶주림은
모두 잊으리라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도 끝을 알 것이요
끝에선 하나가 먼저 떠나리로다
이날에 하늘을 보리니
수식어는 모두 죽고
다만 
하늘이리라

==========
하일(夏日)

날이 날마다
섬세한 날개짓으로 날아가고
돌아오는 새야

비 속에도
번개 속에서
산탄(散彈)처럼 내닫더니
오늘은 날개를 접어

한더위 긴긴 해
고단한 하루
부채로 바람을 일구어
눈썹이 시원한
아가는 잠들어

아무 일도 없는데
초록이 무거워서
솔잎 하나마저도 흔들지 못하는
나무, 나무, 나무들
마법의 고요

소나기같이 온
현기증에 이마를 짚고 서면
새야
새야
내 영혼 그 안에서
사막을 가는구나

=======
합원

나 정말 착하게 살으리라
촛불 하나 함께 두 목숨의 화재(火災)
밤이 홍수마냥 흘러나고

천년 푸르름에 길든 지극(地極)의 해초(海草)처럼 풋내 싱
싱한 머리털 끌어올리고 들여다보면 네 눈 속이 어인 화염
(火焰)의 동산

사랑은 아픔이라고 하던 것을
사랑은 하고 나면 또 거기 사랑은 남아 있어
이처럼 우린 고운 상흔(傷痕)이 늘어랑 갈 게지만
촛불 하나 그 아까운 백랍의 눈물을 태우고
밤은 눈썹까지 몰려왔다

나 정말 착한 이로 살으려기
헐벗고 굶주림이랑 정녕 견디며 살으려기
이 하늘 밑 오직 한 사람의
너를 지니고 싶음이라
설움과 아쉬움에 너를 지니고 싶음이라

아아 어느 세월에고
한번은 있어줄 거룩한 허용
눈물 펑펑 쏟아지는 태양의 자비를 믿고서
다시는 나뉘지 말자
그리하여
이로부터 우리들은 온갖 세상에
둘로써 살아가자

------------------
후조(候鳥)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 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 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
+ 화답

고요하여라
어린 초목(草木)들 위에
엉기는 이슬,
만상(萬象) 향유 입히는 햇빛,
안개와 아지랑이,
비단실 솔솔 푸는
바람도
아무말 없어라

다만 고요하여라
천둥소리도 하나 없이
마음이 문을 열고
영혼과 영혼 사이
왕래의 길을 트느니

진실로
한 탄생에마다
아득한 날
이름과 축복을 예비하신
분께서
무량으로 생수(生水)를 따르심이로다
고통에조차 단맛을 섞으시며
귀하게 조율(調律) 하심이로다

고요하여라
소리 내는 순서들은
저만치 지나가고
느낌과
뜻과
대답으로 간절한
침묵뿐이로다

====================
곤전도(坤殿圖)에 부쳐

추운 물오리처럼
연(蓮)이 폈네
시린 물결에 속살 담그어 펴 울리는
수련(水蓮)의 마음을 뉘 읽으리

연당 끼고
둥근 옷섶인 양 더욱 가는 곳
궁궐 지밀 안
아 심심유곡(深深幽谷) 샘물 같은
여심(女心)을 뉘 읽으리

무릇 높은 이름치고
뼈 마디 마디
한(恨)으로 멍들지 않은 이 있었을까
그 이름
황국(皇國)의 곤전(坤殿) 일래
시름도 하 많은지고
은바늘이 기워가는 당홍단(唐紅緞)
낱낱의 바늘 자욱
피가 묻어

감싸고 감싼
백옥의 가슴에는
하늘도 못다 헤일
정한(情恨)이랴
천형(天刑)이랴

봄 뜨락 고요 속에
황의홍상(黃依紅裳) 큰 머리의 용잠(龍簪)도
쓸쓸히 은회(銀灰)빛
그림자를 뉘었네라

-----------------------
겨울 그리스도

오늘은
눈 덮인 산야(山野)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휜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앴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광막한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한기(寒氣)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 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련한 추위에
물과 바다의
모든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寶血)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올리시는
설일(雪日)의 주님

-----------------------
나아드의 향유

거친 돌틈
몇 거풀 더 깊은 땅의 밑바닥에도
유원(悠遠)한 꿈과
억겁(億劫)의 묵념이 있어 왔습니다
마침내 천뢰(天雷)처럼 번득일
자하(紫霞) 빛 수정이며 화정(火精) 같은 홍옥(紅玉) 같은 홍옥(紅玉)들
흙 속의 긴 세월을 견뎌서

그리스도는
머쟎아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갈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태아를 품은 자궁(子宮)의
그 우람한 암울

밤의 강물처럼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이
굽이쳐 소리쳤음을
누구도 헤아려 알지 못했답니다
어둔 저류
그 적멸(寂滅)의 마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羊) 외에는
다른 아무 데도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고
표표히 흰 옷자락 나부끼며
적막한 광야에
홀로 천애(天涯)를 보고 계심 이러니

마지막 남은 인자(人子)의 붉은 피는
골고다의 등성길 위에
뿌리고 갈지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야훼 내 아버지만이
굽어 이를 보옵신다는
높은 절지(絶地)의
고독이셨음을

썸벅이는 눈자위
먼 해협(海峽)에서처럼
주의 마음을 따라온
한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날
처음으로 그 앞에 주의 모습을 뵈이신
이름이여
성총(聖寵)의 마리아 막달레나

풋미역처럼 윤나는
검은 머리채 눈물에 젖고
설백(雪白)의 두 손길 잠잠히 옥합을 열어
예수의 머리에 부어 바치는
오오 영묘(靈妙)한
동방의 향유

사람들은
기름값 삼백 대나리온을 시비하며
무위(無爲)한 낭비를 하는 여인이니라고
허름한 이방인의
눈짓으로 둘려 서 보고

대지를 태우는 모진 뙤약볕은
지지듯 내려쬐는데
여인은 긴 머리채 기름에 적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노니

음향도 없고
시간도 멈춘
오직 태초의 고요 속에
주를 뵈옵도소이다
여기 주를 뵈옵도소이다
아아 우러러 천상의 환희와
엎디어 지상의 여인인
이 절대의 절망.....

옳도다
나의 마음에서 심히 가까운 자여
처가 한 일은 곧 나의 장사(葬事)를
미리 준비함이로다
그리스도만이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 기름 향기롭고
향기롭더라 전합니다

-----------------------
낙엽은 쌓여라

돌 위에 돌을 뉘이자
돌 위에 돌처럼 굳어진 나를 뉘이자

낙엽은 쌓여라
낙엽은 쌓여라 죽은 나비야

그 위론 흰 눈이 깔리고
흰 눈 위에 연한 혈액(血液)처럼
붉은 노을은 흘러라
꽃잎은 문
시내처럼 흘러라

인생은 하나의 희사(喜捨)
사슴(砂金)과 같은 미소(微笑)가 나를 건드린다
오오 노래여
사랑은 보다 더 전심(全心)의 희사

돌 위에 돌을 뉘이자
돌 위에 돌처럼 굳어진 나를 뉘이자

이대로 시간이 못을 박아 주면
이 마음 영 이처럼 있겠지
인생은 하나의 참회

낙엽은 쌓여라
낙엽은 쌓여라 녹슨 동화(銅貨)처럼

==============
머리를 빗으며

머리를 빗는다
이밤
해일 수 없는 어둠의 실오락지를 벗어 내리듯
단념(丹念) 히 머리를 빗질한다

포실한 모발
올올이
순묵(純墨)의 윤광(潤光)이 맺히는 건
사람의 사념 그리도 어두운 탓인가

난로에 기름을 더 준다
소리지르며 불타는
순수(純粹),
마치도 충실을 아는 두 영혼이 만나
서로 한없이 껴안은 광경이다

가능의 여명(黎明)을
불의 불무더기로
처염(凄艶) 히 불사룬 정신사(精神史)를
인류는 가지고 있고
실상 충실을 익히는 일 그쯤에 쓰기론
누구도 그 시간이
적었다고야 못하련만

유한 수압을 가르며
심해어족(深海魚族)의 지느러미를 빗질하듯
긴 머리를 빗으며
이 밤 나는
쫓겨난 여자처럼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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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이야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 이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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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위하여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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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의  식탁

새천년에도
기도는 전날과 같으나이다
사랑의 누룩으로 부풀고
거룩한 불에 구워진 빵을
저희의 식탁에 허락하시되
저희 마음도 맛있는 빵이 되어
서로 나누게 하옵소서
새벽에 솟은 샘물에
이슬 한 켜 얹은 잔을
저희의 식탁에 허락하시되
저희 마음도 정갈한 식수되어
서로 대접하게 하옵소서

삼라만상, 보이는 것과
흐르는 시간, 안 보이는 것까지
피 순환하며 맥박 울리나이다
온누리 어른이시며
빵과 포도주의 주인께서
상머리에 함께 계심을
꿈처럼 어렴풋이 뵙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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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아프다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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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우리도

아가야 우리도
바다에 가면

다리 긴 네 아빠가
바다에 있더란다
면밀한 광채
검은 눈매의
우리 아기 보배아기 바다 뵈줄까

아무래도
아가야 바다야 가련

한 눈 보곤
영 못 본 그 아저씨가
해풍에 팔을 벌린
범선(帆船)으로 계실지

먼발치 저만치서
눈여겨 살펴 보기
가람 찾는 버릇에
엄마는 늙는댄다

숨어서 숨어서랴
밤마다에 섰다가
적멸한 해심(海心)을 후비고 가는
눈먼 메아리나
되어 보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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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을 위하여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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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성서(聖書)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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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그 안에선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 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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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피우듯

파랗게 언 유리창에
장미를 피우듯
고운 촛불을 밝혀 둡시다

창 밖은 사뭇 휘몰아치는 눈발
벗은 나무 가지들
찬 바람 속에 흐느끼며
거친 등결 밑에 무수히 금 긋는
아픔을 앓는 밤이옵기에

막 피어나는
장미 빛 등불을 밝혀 두며는
저들을 위해 자비스런 축도(祝禱)
우리에겐 소리 없는
갈채도 되리니

파랗게 언 유리창 앞에서
당신의 흰 손을 나에게 주십시오

바깥은 이적지 분분한 백설이나
첩첩한 물결 위를 넘어 오는 물새 모양
어디메쯤 오고 있을
회춘(回春)의 노래
연연한 첫가락을
맨 먼저 그 손에
감아 드리리니
파랗게 언 유리창에
장미를 피우듯
고운 촛불을 밝혀 둡시다

-----------------------
평안스런 그대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 쬐어 덥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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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동화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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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虛妄)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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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고백

1
침묵을 깼다
그 달가웠던 것을
그리하여
하늘만한 죄를 지고
허리 굽어 사노니
지는 해를 안고 간
사람 하나
그림자 하나
뒤따른 바람 하나
다시는 못 만났노니

2
그녀의 사랑
그가 용서하고
사랑 없는 그를
그녀도 용서하며
혹여는 이와 반대일 때도
그들 서로 용서하며
살아 있는 한
이렇게들 외로워보아라

______________

          * 70

가을 2
가을 3
고백
고백
--------
고별
고요
기쁨
낙일
---------
달밤
만가
만종
망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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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상
목숨
무심
무제
---------
바다
바람
백국
사랑
---------
사막
상사(想思)
서녘
서설
--------
서시
성냥
설일(雪日) 
생명
--------
시인
심화
아가
아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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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2
아가 4
안식
오늘
--------
오월
은혜
음악
의자
---------
인인
주일
편지
평화
---------
참회
촛불 1
촛불 2
하늘
--------
하일
합원
후조
화답
---------------
곤전도에 부쳐
겨울 그리스도
나아드의 향유
낙엽은 쌓여라
-------------------
머리를 빗으며
사랑한 이야기 
소녀를 위하여 
새 천년의  식탁
--------------------
심장이 아프다 
아가야 우리도
안식을 위하여 
어머니의 성서 
---------------------
영원 그 안에선 
장미를 피우듯
평안스런 그대 
하느님의 동화 
---------------------
허망(虛妄)에 관하여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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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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