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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남조 시 3

+ 가을에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해바라기 씨앗 검게 여물고
이산 저산 솔바람에 곤충들 제집에 숨느니
꽃은 무덤에만 피고
가랑잎 불속에 던지며 던지며
도무지 제실(祭室)같은 마음

그리운 당신이여
이 사모를 길러 고이 당신께 드리기 위해
나는 채어났다고 믿어 왔습니다

당신을 낳으시던 날
당신 어머니께서 땀 흘리시고 이윽고 기뻐하신
그러한 수고와 기쁨이
당신과 늘 함께 하기를
그곳에 나도 있기를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내 손을 이끌어 주시겠지요
열손가락 낱낱이
지환(指環)처럼 당신의 사랑을 감아 주시겠지요

마지막인 양
모든 일이 귀하면서
첫시작인 듯
모든 일 공손하게

그리운 이여
지금은 우리가 떠나 있다 해도
멀잖아 모든 슬픔을 잊을 것입니다
내 두 팔에 머리를 뉘이고
당신은 그냥 편히 쉬십시오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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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2

잎들이 진다
생명의 귀의(歸依) 그 유순으로
뛰어내리는 가을잎들,
하늘은 버릴 것을 만들지 않으시니
떨구는 잎들조차
제뿌리에 순밀의 꿀을 따르고
어머니신 대지(大地)에
귀한 소금맛을 바치리

여름의 화로는
물의 신성(神聖)을 다 담아내고
재와 그스름도 씻어
오늘은
어린이 같은 살결

가을이여
돌아온 딸들과 그네의 자식들의
축제일(祝祭日) 같음이니
신(神)은 지난 봄철부터
이들을 위해
짙은 단맛의 과물(果物)을
영글려 오셨니라

진실로
무엇을 더 바라리
마지막 시절에
꿈같은 처음으로
사람 하나의 그 항구(港口)에
나도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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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잠

네 이름에 이어진 건
여기 잠들어라
가을의 가슴 안에 쉬어라
죽을 뻔 죽을 뻔 그쯤이나 하다가
얼마 헐거워진
너를 풀어 뉘이련다
자거라 자거라,
잠의 노래 부르리라

가을이 이렇게 큰 몸인 줄
내 몰랐어라
온누리 복되고 위안인 줄
내 몰랐어라

네 마음에 이러진 건
모두 잠들어라
어머니의 품이니 쉬어라

아흔아홉 가파른 고개
너를 등에 지고 온
여윈 빈 지게 비스듬히 세워두고
나도 잠들어 쉬련다
쉬련다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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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꽃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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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햇볕 쪼이는 푸성귀의 기쁨이
제일로 부러운 여자.
문고리 덜컹대지 않아도
한밤의 바람손님을 아는 여자.
마음에도 날개를 달아
고달파라 고달파라 날갯짓 쉬지 못하고
옛사람 옛산수와도 길을 터
저들에게 찻상 내미는 여자.
나막신 짚신 갈아 신으며
궂은날 개인 날에 길 걷는 여자.
잉태와 해산이 제일의 장기라
그러자니 어느 땐 광야에서
혼자 애 낳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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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

보아라
나무들은 이별의 준비로
더욱 사랑하고만 있어
한 나무 안에서
잎들과 가지들이
혼인하고 있어
언제나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이들이 사랑하는 줄
나는 알았지

오늘은
비를 맞으며
한 주름 큰 눈물에
온몸 차례로
씻기 우네

아아 아름다와라
잎이 가지를 사랑하고
가지가 잎을 사랑하는 거
둘이 함께
뿌리를 사랑하는 거

밤이면 밤마다
금줄 뻗치는 별빛을
지하로 지하로 부어 내림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지

보아라 
지순무구
나무들의 사랑을 보아라
머잖아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남게 될 일을
이들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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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 4

보아라
나무들은 이별의 준비로
더욱 사랑하고만 있어
한 나무 안에서
잎들과 가지들이
혼인(婚姻)하고 있어
언제나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이들이 사랑하는 줄
나는 알았지

오늘은
비를 맞으며
한 주름 큰 눈물에
온몸 차례로
씻기우네

아아 아름다와라
잎이 가지를 사랑하고
가지가 잎을 사랑하는 거
둘이 함께
뿌리를 사랑하는 거
밤이면 밤마다
금(金) 줄이 뻗치는 별빛을
지하로 지하로 부어 내림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지

보아라
지순무구(至純無垢)
나무들의 사랑을 보아라
멀잖아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남게 될 일을
이들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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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아슴한 어느 옛날
겁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 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 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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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깃발

하나의 깃발보다
둘의 깃발이 더 외롭고 심각하다
공중에 소슬히 당겨져
따로 묶였으면서
온몸으로 마주 펄럭이다니

옥양목 한 폭의 모세혈관이
올올이 거문고 울리는 게 분명해
노을을 가로지른 새떼가
진홍깃털 그림자 흘린 걸로
온 가슴 문신 그은 게 분명해

하나의 깃발보다
둘의 깃발이 더 아프고 숙연하다
저들이 사람을 닮았거나
사람이 저들을 닮은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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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활

4월(四月)엔
십자가(십자가) 생 형틀을 짜고
물오른 가시의 가시관(冠)을 엮는다
그러면
신(神)이 와 못 박히신다

올해도
주님은 죽어주실까
성(聖)금요일,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고

살아서
살은 채로
실날같은 긴 보혈(寶血)
흘려주실까

올해도
주님은 절망해 주실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이해 나를 버리시옵니까
아아 더 훨씬 절망 이상이다
목숨을 번제(燔祭)하는 사랑으로서만이
오직 이길 수 있는
슬픔

4월엔
십자가 새 형틀을 짜고
죽으러오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부활의
너무 밝은 새벽
그 먼저
사흘 낮 사흘 밤을 넘쳐
내 품에 안겨주실
절망의 하느님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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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전화

지도에서 못 찾을
허름한 먼 나라에서
걸려온 전화,
어서 돌아오세요라고 했더니
햇살 반 소낙비 반 같은
모순의 웃음소리가
전화 목소리 걸어오는 길가에
좌르르 깔린다
왜 웃느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라는 그 말이
행복해서라나 뭐라나

반년만에 일 년 만에
잊을만하면 걸려오는 전화
어서 돌아오세요라고 하면
그 말 한 번 듣는
천금 같은 재미 탓에
못 온다나 어쩐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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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 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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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편지

편지를 쓰게 해 다오

이날의 할 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 다오

밤 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빛에 풀리는
나직히 습한 악곡(樂曲)들을
겨울 침상(枕上)에 적시게 해 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 저려 가슴 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 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두게 해 다오

눈 오는 날엔 눈발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
봄노래

1
좋은 옛친구 하나
땅 끝에서 살다가
서로의 백발 무렵에 돌아왔다
이 서름하고 신선한 감격
감추어두고
몹시 외로운 날
파도치게 하리

2
무쇠못 아니면서
언 땅 어이 뚫었나
신기루에 이슬 반짝임을 더한
연둣빛 새순밭이네
갑자기 겁먹노니
혹여 불날까
마음의 산불 될까

3
말하려다 말고
웃으려다 말고
눈 감아
습습한 물안개에 적시 우느니
천길 벼랑 밑에서
오랜 세월 디밀어 오른
마침내의 분수이어니

4
어느 명의가 나를 고치리요
그대 아니고선
그 누가 명의리요

------------
봄에게

1
아무도 안 데려오고
무엇 하나 들고 오지 않은
봄아,
해마다 해마다
혼자서 빈 손으로만
다녀가는
봄아,
오십년 살고 나서 바라보니
맨손 맨발에
포스스한 맨머리결
정녕 그뿐인데도
참 어여쁘게
잘도 생겼구나
봄아,

2
잠시 만나
수삼년 마른 목을 축이고
잠시찰나에
평생의 마른 목을 축이고
봄햇살 질펀한 데서
인사하고 나뉘니
인젠
저승길 목마름만
남았구나

봄이여
이승에선 제일로
꿈만 같은 햇빛 안에
나는 왔는가 싶어

--------------
설동백

내가 불러서
예까지 오신 분
닫힌 문 사이로
설동백 한 가지를 드리오니
받아 가옵소서

아기를 잉태해 본 몸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전중량 그 기막힌 숙명(宿命)을
한 몸 남김없이 품어본 몸으로야
사랑을 주려면
자그마치 대보름달 달덩어리만 하여
무섬증만 나요

진종일
호스터의 합창
이 도취와 전율

어린것이 자라면 그애들이랑
애아버지가 돌아오면 애아버지랑
물빛 같은 정으로 살까
서러운 나는.....

내가 불러서
내 문앞에 오신 분
저 황송한 배회
오랫동안
무지개 서로 눈물
저 외로운 뒷모습

아아 너무 커서 차라리
눈 감은 사랑
이 소중한 여광(餘光)

검은 머리 한 움큼 잘라 바치듯
설동백 한가지를 드리오니
받아 가옵소서

=========
새벽에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
십자로

「누굴 기다립니까 」「아닙니다 」
「길을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
「그럼 어디로든 걸어가세요 」
「네. 글쎄요 」

새하얀 종이새 날아와
내 손에 닿은 종이살결에
햇솔잎으로 그은
연둣빛 사연 몇 줄 …
나는 답신을 써서 청명한 하늘 저편으로
익명의 편지를 날려 보낸다

「기다림은 끝났습니다
길을 찾는 일도 마쳤습니다
이제 봄볕 속에 도착하여
가만히 서 있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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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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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鍊金術) 3

사람아 너 어쩔래
연금(鍊金) 불가마에 십년 사철 불만 맨
불귀신이네
금은 아니 나고
금의 뼛가루 백회(白灰)뿐인 걸
별수 없이 나도 바람이나 날린다
눈먼 바람 나 홀려가면
금도 아닌 돌도 아닌
내 도령(道令)아
넌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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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하장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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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작은 집입니다
지붕 실하여 비바람 막아주고
벽은 사방 유리입니다
구김 없이 펼쳐지는
두루마리 병풍 그림,
금단추 반짝이며
줄을 선 가로등,
우수와 고독의 안개 자욱한
대도시 한가운데
잠시 지금은
그대와 내가 이 집에 삽니다
기죽은 사람의 우수도
손잡고 함께 있습니다

후일 이 주소로
편지 쓰고 싶을 겁니다

--------------
평행선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 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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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 

누군가가 나에게
순백의 새를 보내 주었다

첫날의 새는
편지처럼 정감 어려 노래했고
다음 날의 새는
날개에 묻혀 온 햇빛가루로
주변을 반짝이게 하더니
세 번째 새는 섧게 울어
하늘 그리워함을 일깨웠다

광활한 하늘 벌판으로
돌아가거라 돌아가거라고
새들을 날려 보내니
저들 중천에서 선회하다 사라지고
가슴 안 추억의 새들까지

희고 빛부시게 푸드득이노니
세월 너머
오래오래 이러하리니
 
===========
+ 가을의 기도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당신 앞에 벌 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을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느니
이제금 홀로인 그 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보다 경건히
적요의 눈짓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랏빛과 흰빛의 소담스러운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저마다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돌리옵소서

---------------------
가을의 노래

"나 그만
알리지 않고 다녀갑니다"
밤에 이러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어째도
그만 알리지 않고
이대로 영 가렵니다"
이렇게도 말하는 것이다
더 깊은 밤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구 가라신 말씀으로
단풍 한 잎새만한
불을 댕겨 주는 이도
지금은 없는데

사위어가는
가슴 속 새하얀 잿더미는
무엇을 불사른
무(無)의 형적(形跡)일까

사랑하며 번민하는
더운 눈물쯤이야 흔하기도 할 텐데
내겐 그것도 없다네

"나 그만
알리지 않고 다녀갑니다"
가랑잎이 지는 밤이래서일까
오랜만에 슬픈 환상이 있어
사치스러운 시간이다
조그마한 숨소리로
마른 잎과 잎들이 모이는
음향 속에
은은한 메아리로 울려오는 소리

"어째도 그만 알리지 않고
이대로 영 가렵니다"

---------------------
가을 햇볕에 

보고싶은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 지고

보고 싶은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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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그리스도

오늘은
눈 덮인 산야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흰 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유리와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한기(寒氣)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慄然)한 추위에
뭍과 바다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올리시는
설일(雪日)의 주님 

===========
+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그 젊음에게

 서로가 찾았더니
우리 예 와서 만나는구나
별떨기 꽃떨기의 큰 아기들아
만남을 점지하시는 분이
광명한 등불을 비추니
니네의 어여쁨 눈도 부셔라
젊은 날 유혈의 진실들엔
가슴 쓰려라

서로가 찾았더니
만나 즉시 알아보겠구나
먼저 세상서부터
아마도 훗세상까지
핏줄 줄곧 당기는 우리

지나온 나의 세월
목이 타던 땡볕보다
더욱 더한 시금 용광로에
구워져 보검 되는 니네의 의용,
장하고 아름답게 용솟음치거라
사랑하거라
아..아,, 젊은 이들아 

---------------------
나의 시에게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주언(呪言)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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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하여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노래 있기에

줄기 자라니 잎새 무성하리
가지 우거지면 새들 날아들리라
찰나에 사위는 반딧불이의 촉광도
빛이여 빛이여라 이름하느니

더디게 자라는 희망
손 끝에서 한참 먼 위안마저도
내게 노래 있기에
진실로 노래 있기에
나의 한 생을
과분한 분배로 받드노니

암암히 깊은 샘물
일렁이는 물무늬로
주야 사철 허리 아픈
나의 노래여

--------------------
다시 봄에게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
따뜻한 음악

바다 건너 더 먼 곳
그의 집으로 나는 가리
세월의 가룻발도 내릴 만큼은 내려
투명한 적설이 되었으리
그는 의자에 앉아 있고
어린아이가 하듯이
내 몸을 그의 무릎 위에 얹으리
한 생의 무게를 제상에 올리는
적멸한 예식에
온 세상 잠잠하리
그 사이 흐르는 눈물은
눈물의 끝까지 흘리리라
이윽고 작별하여
나의 지정석으로 되돌아올 때
가장 따뜻한 음악 하나가
동행하여 오고
이후
언제나 언제나 울리리라

---------------------
마지막 장미

지숨한 정에 넘치고
애오라지 잘 되기를 비는
연한 새순 같은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주겠는가

반생을 지운
삶의 산마루에서
불현듯 느껴오는 보랏빛 광망의
달밤 같은 그리움이 있다면
누구에게 주겠는가

순은 뻗어 잎새 무성하고
멀잖아 눈무신 꽃숭어리를 펴 바칠
기찬 동경과 바라옴으로
검은 살눈썹이
젖어든다면.....

여인이여
우리 생애에서 가장 쓸쓸한 시간이
언제 올지는 모른다
생명의 잔을 비우고 돌아가는 길은
우모인 양 내려 쌓이는
하얀 눈벌일지도 모르는데

숙연하여 몸서리칠 그때
마지막 누구의 이름을
부르겠는가

여인이여
도금한 금붙이의 값싼 자랑이나
지난날의 치의스런 욕망들을
흘려버리고

씻은 구슬같은 마음밭에
하나의 사랑만이
있는 대로의 깊이로 깃들인다면
그 사랑을 누구에게 주겠는가

한 송이의
뜨거운 장미,
마지막인 장미를
가진다며는

===========
마지막 편지

내 마지막 편지는
못 보낸 봉서
사계절 몇 둘레가
젖은 맨발로 이슬 털며 다녀가도
아직 아니라
흰 살결 먹물 문신
옷 벗을 날 그 아니라

실타래 길게 푸는
바람과 햇빛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처음 물꼬를 트는
강물이
붉은 흙탕물 갈아입고 갈아입어
기어이 수정물빛 되듯이
천만번뇌
다 갚아주고 남는
사람들의 사랑

그 하나의 사연을
여기 담았으되
아직 아니라, 아니라고
봉함 속에
옷깃 여미고 누웠느니

아아 너무나 늙고
영원히 젊은
내 마지막 편지

---------------------
베틀에 앉아

대문 밖에서
애들끼리 어울려 잘 놀다가
슬며시 혼자 집에 들어
엄마 얼굴 한 번 보곤
공연히 물마시고
웃으며 다시 나가 노는
옛 시절의 한국 아이 같은
얄궂은 도령 있어
늘그막 내 얼굴을
더러 꼭 보자 하네

봄 한철 베틀에 앉아
햇살에서 잣은 실로 비단을 짜서
내 몰골은 가려두고
옷 한 벌 지어 내밀까나

--------------------  
사랑도 쉬게

이 슬픔
기름으로 부어
불을 켜게 하롭 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눈물
오늘은 눈물을 용서하시고
번뇌를 용서하옵소서

여인의 생애는 기다림으로 흐르는 강이옵니다
인내와 그리움으로 닦는
청동(靑銅)의 거울 이옵니다
..... 아베 마리아

이 슬픔 익으면
그를 먹이는
술이라도 되게 하옵소서
옥빛 우물이라도
되게 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며지의 고독
오늘은 고독을 허락하시고
위로를 허락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피곤
오늘은 안식을 불러 주시고
편안한 긴 잠에
사랑도 쉬게 하옵소서
아베 마리아

--------------------
사랑합니다

가시 돋친
그러나 눈부신 장미의 관(冠)입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이 가파로운 천인(千?)의 준령을
그 이름 섬기려 왔겠습니까

샘물이 잠잠히 고이듯
외딴 숲그늘 네 소리 없이 지운
허구헌 날의
눈물

당신으로 인해
슬픔도 이처럼 현란하고
당신으로 인해
쓸쓸함도 느껴워 간절하거니
당신으로 인해
부디 나의 이름이
쓸모 있게 하십시오

당신은
내 영혼에 열린
최초의 창문
내 눈이 바라보는
최초의 새벽

잊으려던 마음은
오히려 더 못 잊는 마음인 줄을
그리운 당신은 아셨는지요
눈보라 산허리를 치고
빙실(氷室)의 인어(人魚)들 더욱 해심(海心)으로
돌아눕던 밤

불시에 백만의 별들이 솟고
별빛 아래 돌아와
내 눈빛을 살피시면 당신은
한 줄기 금이 간
아픈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달밤엔 달빛에 부서지고
바다의 물결도 깨어져 비치건만
그러나 여전히
내 사랑의 사람

곱디 고운
길 하나의 베퍼 주십시오
푸르른 초원(草原)을 함께 가고
함께 넘으리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
+ 산에 이르러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
새 달력 첫날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 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
새로운 공부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 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 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 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 후
온 세상 노을 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
섣달 그믐날

새해 와서 앉으라고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는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을
당신이라 부르련다
제야의 고갯마루에서
당신이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길
뚫어서 구멍내는 눈짓으로
나는 바라봐야겠어

세상은
새해맞이 흥분으로 출렁이는데
당신은 눈 침침, 귀도 멍멍하니
나와 잘 어울리는
내 사랑 어찌 아니겠는가

마지막이란
심오한 사상이다 
누구라도 그의 생의
섣달 그믐날을 향해 달려가거늘
이야말로
평등의 완성이다

조금 남은 시간을
시금처럼 귀하게 나누어주고
여윈 몸 훠이훠이 가고 있는 당신은
가장 정직한 청빈이다

하여 나는
가난한 예배를 바치노라

============
+ 올해의 성탄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 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
요람의 노래

우리 애기는 귀여운 열매여요
엄마 나무에 열린
엄마 나무의 귀여운 열매라고
불러 주세요

버려져 이름도 잊힌
외로운 섬에
아롱아롱 걸려 잇는 무지개 오니
우리 애기는 엄마의 무지개라
불러 주세요

우리 애기는 어여쁜
언제나의 그 애기 언 만
엄마의 가슴에선
풋풋한 사랑이 날마다
새로 피어나요

우리 애기는
엄마의 거울이라
불러 주세요
새맑은 두 눈의 눈 빛을 헤치면
속속들이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있으니까요

우리 애기는
엄마의 전부라고
불러 주세요
촛불이 없는
빈 촛대라며는
엄마는 얼마나 가엾겠어요
남김없이 부어 준
빈 잔

우리 애기는
엄마의 전부라고
불러 주세요

---------------------
이 바람속에

바람은 찢겨진 피리의 소리
하설은 파적(破笛)의 피울음이 아니고야
바람은 분명 찢겨진 피리

나도 바람처럼 울던 날을 가졌더랍니다.
달밤에 벗은 맨몸과도 같은
염치없고도 어쩔 수 없는 이 회상

견뎌 낸 슬픔도 지나고
못 견딘 슬픔도 지나고
모두 물처럼 이젠 흘러갔는데

잊어버리노라 죽을 뻔하고
잊히움에서 못내 쓰라린 가슴
왜 아직 이런 것이 남았답니까 

---------------------
작은 이쁜 이

전등 빛 그리도 기쁜가
날갯짓 그리도 즐거운가
깨알보다 더 작은 날벌레들,

연필 끝으로 점 하나 찍은 심장
맥박 울리고
현미경에나 드러날
두 눈으로
하늘과 태양 모두 보았는가
하루뿐인 생애
유순히 지족 하는가

하느님의 유전공학으로
축소된
아주 아주 예쁜 천사들인 게야
놀라운 니네는

============
저무는 날에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 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 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 지던 그 마음도
세월 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 안에
눈감는 것

-------------------
+ 태양의 각문

가을을 감고 우리 산(山) 속에 있었습니다
하늘이 기(旗) 폭처럼 펄럭이고 눈 들 때마다 태양은 익은
석류처럼 파열했습니다

당신은 낙엽을 깔고 향수를 처음 안 소년처럼 구름을 모아
동자(瞳子)에 띄웠으며 나는 한아름 벅찬 바다를 품은 듯이
당신과 가을을 느끼기에 한때 죄를 잊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벗었음을 알던 옛날 에덴의 경
이(驚異) 같은 것이 분수처럼 가슴에 뿜어 오르고

만산(滿山) 피 같은 홍엽(紅葉)
만산(滿山) 불 같은 홍엽(紅葉)
아니 아니 만산 그리움 같은 그리움같은 홍엽에서 모든 사랑
의 전설들이 검붉은 포도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청량한 과즙(果汁)처럼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스쳐갈 뿐
사변 광 박한 하루의 천지가 다만 가을과 당신만으로 가득 차
고 나는 차라리 열병 앓는 소녀였음이여

사랑한다는 건 참말 사랑한다는 건 또 하나의 나, 또 하나
의 내 목숨을, 숨 막히도록 숨막히도록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 목숨 아아 응혈(凝血)처럼 뜨
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나는 비수(匕首)처럼 한 이름을 던져 저기 피 흐르게 태양
을 찔렀으니 그것은 이 커다란 우주 속에서 내가 사랑한 그
으뜸의 이름이었습니다

______________

          * 50

가을에
가을에 2
가을잠
겨울 꽃
-----------
그 여자
나무들
나무들 4
너에게
------------
두 깃발
망부활
먼 전화
물망초
-----------
밤편지
봄노래
봄에게
설동백
-----------
새벽에 
십자로
아버지
연금술 3
-----------
연하장
자동차
평행선
하얀 새 
------------
가을의 기도
가을의 노래
가을 햇볕에 
겨울 그리스도
-----------------
그대 있음에 
그 젊음에게
나의 시에게 
너를 위하여 
----------------
노래 있기에
다시 봄에게 
따뜻한 음악
마지막 장미
----------------
마지막 편지
베틀에 앉아
사랑도 쉬게
사랑합니다
----------------
산에 이르러 
새 달력 첫날 
새로운 공부 
섣달 그믐날
----------------
올해의 성탄 
요람의 노래
이 바람 속에
작은 이쁜 이
-----------------
저무는 날에 
태양의 각문

 

_________

 

김남조 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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