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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고은 시 3

+

차라리 위리안치 몇 십 년으로
오로지  듣는 일이 전부인 곳
그곳으로 간다

함거 속 갇혔건만
내 마음속
물구나무서고 싶도록
차라리 기뻐라

피딱지 아직 그대로
복되도다
복되도다
복되되다
이로부터 거짓말 참말 없는 행복
그곳으로 간다

산 설고
물 설었다
제주도 산방산 기슭
거기 돌담에 갇혀
위리안치
가시울타리 갇혀
헛바닥 없이
이빨 없이
하루 이틀 굶어가며

끝내 굶어 죽어가며
그곳의 성난 바람 소리 뒤
생시인 듯
꿈인 듯
남은 새 새끼 소리 듣는다

들었을 뿐
들을 뿐
들을 뿐
세상의 유언이었다
아이고, 나의 유언 끝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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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나의 말보다 컸다 말세였다

오늘 
나의 말이 
나보다 크다 태초의 태초이다

후광(後光) 사절

내일 
나의 말도 나이다 어떤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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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밑
이 세상의 답이다 한 줌의 재

너 몰라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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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피나 바우쉬

춤추어라
춤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갈 길 잃어버린다

네가 춤추므로
나도 춤춘다 백지 위에서 춤춘다

내년 여름
베네찌아 제비 새끼 춤추리라 광교산 제비 춤추리라

나도 춤추리라
그리하여 내 갈 길 겨우겨우 잃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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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상의 제사들이 여기저기서 다 끝났는가
밖으로 나와본다
기운 별이나
늦은 조각달은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두더지나 면해
마당의 어린 감나무와 고욤나무께를 본다
어둠 속이면
밖은 모조리 모조리
안이되어 있다

거기 
내 죽음이 보였다
십 분이나 십오 분이 남은
내 삶이 먼저 보았다

1차의 술집에서
2차의 술집으로 갈 때 
얼마나 환호작약이었던가

내 죽음은 그 이상이다 기탄없이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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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거기

누구 있어야
거기

거기

누구 대신
천년 전부터 누구의 자취 있어야
거기

여기 
천년 뒤의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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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가령 요시찰 특수격리감방
그 썰렁한 감방에 나와보아라
온몸이 한참 뜬다
그 미운 정 가득 찬 감방에서 나와보아라
잡된 머릿속이 텅 비어 온통 하얗다

그토록 모든 것이 무료이다 무료의 공허이다

다음 날의 돈이
그다음 날의 돈이 아직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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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이틀째 굶는 오막살이
일곱 식구 입에서 말 한마디 없다
어스름
어스름
낮은 굴뚝에서
생솔가지 쳐다 때는 텁텁한 냉갈이라도
수북수북하여라
솥에서 끓는 것은 정녕 밥물이 아닌
빈 물
그 데운 맹물 떠다
한 사발씩 밥으로 먹는 애저녁
벌써 샛별이 앞산 위로 가만히 왔다
내일 새벽에도
벌써 뒷산 위로 오리라

오천년을 그렇게 와 나의 별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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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언
 
단언한다

한바탕 꿈이라는 한마디도 군더더기
꿈도 아니다
그냥 허허망망한 초만원
생이나 
시나
그런 한토막도 
심한 군더더기

오늘 아침 아내의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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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어차피 무슨 독한 이데올리기 아니거든
아는 척
모르는 척
그대로 두라

갈매기는 안다
독한 넋이면
다음 세상 따위는 없다

여수 돌산도 낭떠러지
거기
완전무결의 동백꽃 모가지째 직선으로 떨어지는 
죽음이 아니거든
이번 세상
파도 소리 따위도 없다

꽉 찬 바다 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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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몇번쯤은 천년의 성벽이 무너진 듯 극명할 것

이렇게
오끼나와로 비바람 치는 날에는
이렇게
사무치게
뭇 사무치게 비바람 치는 날에는
그냥 팔다리 늘어뜨려
나란히 나란히 누워버린 내가 밉다

이렇게 
개마고원으로 눈보라 치는 날에는
이렇게 
아프게
아픈 줄도 모르게 눈보라 치는 날에는
심사숙고라든가
삼매라든가
그런 갖가지 핑계로
한나절이나 반나절 내내 주저앉은 내가 아주 밉다

나 대신 누가 책을 던지는가
쨍그랑
누가 술잔을 던지는가
나 대신 
누가 누대의 권력을 빈 잔으로 내던지는가

늦었다
벼랑으로 솟구쳐
저놈의 눈보라 속 두 다리 부들부들 떨리는 썩은 분노로
기어이 기어이 달려가야겠다

남은 세상
이렇게 비바람 쳐
이렇게 눈보라 쳐

어쩌자고 다 뚝 그친 밤
히말라야 상공 팔천개 별빛의 무지몽매로
눈 감아야겠다

그뒤에야 미풍이거나 나비의 요절이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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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환

시간은 하늘의 자유였다

밤하늘의 자유
밤하늘 별들의 자유였다
저 드높은
숙명의 자유야말로
자유이다

감히 
그 시간을
인간이 내려다가
내 운명의 자유로 삼아왔다

숙명 대신 
운명이었다

그 시간에 숨찼다
더 이상 그것은
내 운명의 자유가 아니었다

반환하라  하루속히
네 운명의 멍에를 쇠사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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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원

단도직입
파도처럼
시간 없이 살고 싶어라
새소리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리처럼
공간 없이  살고 싶어라
비유처럼
비유 없이 살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어서
죽어서
죽고 죽어서
바람으로 태어나고 싶어라
내일의 바람이 
오늘의 나를 모자란 비유로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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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

홍적세의 누가
충적세의 누구에게 왕림하셨소이다
먼 길손이시니
열렬 환영이시기를

어둠이 빛으로 왕림하셨소이다
비유가 아니시기를
비유가 싸가지없는 사기로 되는
서글픈 밤들이 아니시기를

캄브리아기
빛이 어둠의 전신이시듯
오늘따라
폭포 소리 없는 폭포같이 스파이같이
불현듯 여기 낙하하셨소이다

추우실 터이니 
옛날 옛적 춘궁기 이전 미지근한 온돌 아랫목에 앉으시도록
그동안
어둠의  수행이든 빛의 외설이든 두루두루 무방하셨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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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

지난 이른 봄날 파장동께
아지랑이 잠겨 있었어
전혀 지적일 수 없이
술 깬 아침
쓰라린 아지랑이였어
얼라
얼라
쓰라린 피 묻은 아지랑이였어 착각의 원근법이 남았어

올여름 첫여름
나뭇가지 쳐주었어
마가목 가지
층층나무 가지
산딸나무 가지 괜히 시건방진 것 쳐주었어
얼라
피가 났어
나뭇가지마다
일초의 허위도 없는 피가 났어
미안했어

슬그머니 
내 코에서 코피가 났어
육만 년 전의 피가 났어

얼라
얼라
저기 봐
내가 밟지 않은 모래톱
모래 알알이
백만 년 후의 피가 났어
다시 미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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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 2

눈동자 없는 눈 같은 날
멍한 날이 있지
맹물 끓어
뜨거운
뜨거운
멍한 백비탕이지

이런 날 내 염통도 소매치기에 털려
날개도 없이
일찍 나온 거지별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지

무위 자초(自招)
먹밤이지
누가 누구를 못 보는
그 무식한 어둠만이 완전무결이지
이제야 무위 뒤 유위인가
할 일 있지

세 살 때부터
철없는 소경으로
묵은 거문고 탔지
내 캄캄한 무르팍에 뉘어나 보지
꼴리누나
꼴리누나
궁상각치우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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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구글 알파고에게 없는 것
그것이 나에게 있다

슬픔 그리고 마음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고 뉘우친다
내 슬픔은 얼마나 슬픔인가
내 마음은 
얼마나 몹쓸 마음이던가

등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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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떨어지고 싶다
그래서 
떨어졌다

길 위에 누워 있는 잎새 몇 개

어디로 가고 싶다
바람이 와서
길 위의 잎새들
저만치
더 저만치 데려간다

하루가 다한다 누구네 집 등불이 밝혀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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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무위가 없다
거리에
또는 나에게
넘치는 무엇무엇을

산에도 빈 메아리가 없다

내 젖먹이 적 젖내 나는  무위여 네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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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상

한날 입자도 파동일진데
나의 명사는
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동사에게 가야 한다

나는 파동

나의 자동사는
먼 타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그리운
선사(先史) 타동사로 가야 한다

오늘밤 미래가 미래뿐이라면 그것을 거부한다
나는 입자이자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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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에

무슨 북극권 오로라 파열 같은 황홀경이야
어찌 내 앞에
택도 없이 와 있으리로

지금
명자나무 가시줄기에 달린
이쁘디이쁜 꽃에
좀스러이 추운 벌이와 떨리는 사랑이라면

더 묄 벌어 마지않으리오

--------------
삼거리

석주
아직껏
나는 진부하게시리
삼거리에서 쪽 못 쓰고 있네 그 언제까지나 이토록 진부할 따름이네

진눈깨비 아니고는
오도 가도 못하고 있네
화투 같은 것
여섯끗
일곱 끗 아니고는 그냥 죽치고 있네

하기사 
외길이야 한 곳으로만 쪼르르 가면 되네
허나 
이놈의 가슴 떨리는 삼거리에서는
가던 길을
문득 바꿔버릴 수 없네

필연이 있다면
어디 그뿐이랴
필연보다
우연이 훨씬 요염하네

아니 
나 또한 오지 않는 임종 같은 지긋지긋한 나이거나
후딱
누구의 의붓아비 되고도 남네
삼거리 술집
술 석잔
나그네 몸속에서
몸보다
맘속에서 먼저 취한 마몽의 노래 나오고 마네

더구나 
나는 나 아니라
찬란한 내년 봄날
그 누구라네
그 누구의 귀신이라네

삼거리 술집에서
나는야 죽고
나는야 사네
천만다행 다른 길로 가네

--------------
첫걸음

한 손바닥으로
자미성을 쓰다듬고
두 발이
하늘 벌판을 내디디나니 운운

이 해묵은 시 어때
호방하기만 한가
허황하기만 한가

그래서
고만고만한 골목길이나 뒷골목길에 가
너스레로 놀고 있는가

그래서 제 구덩이에 푹 빠져
뒤쳐 나올 줄 모르는가

별도 
푸른 하늘 밤하늘도 없는 삶이
어찌 삶의 첫걸음이겠는가 마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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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면

아직껏 
뒷산자락 으스스할 때
앞산자락 빈 발머리로
올해의 맨 처음으로 남시었다
내가 훔칠
뱀도 훔칠
똬리 튼 것 풀어서 부랴부랴 어디로 가버린다

한 자락 바람 도로 가버린다

어디 이뿐이더냐
뜨락의 작은 못 기슭 뒤늦은 개구리
내 인기척에 오싹
저쪽으로 뛰어가버린다

종일 나는 세상의 타인이었다 서글펐다

==========
내 그림자

오늘도 오래 걸었구나
해설피
내 지친 그림자를 본다
처음으로 
내 그림자에게
내가 잘한다

저 마을 
순한 개 짖는 소리가 건너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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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이후

붓다의 말 중에서
이런 시사한 말 하나둘 남아 있다
다른 말들은 팔만대장경 속에 드르렁드르렁 코를 곤다

한마디

잠 못 이루면
별들을 우러러보거라

또 한마디
달처럼 살거라

치매 이전 혹은 귀의 이전 팔십 화엄 따위는 영영 멀리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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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메에서

언제인가 온 듯한 곳이 있다
식은 가슴이
좀 더워지면서
온 듯
와서 산 듯한 곳이
나를 기다리는 듯한 곳이 있다

저 마루턱 넘으면
숨어
눈부신 철쭉꽃밭이 있으리라
거기 넘어가지 않고 돌아선다

물러나
개울 건너
누구네 집 얕은 잠 자는 멍멍이
괜히 깨우지 말아야겠디
잠 안 자는 염소나 닭 두어 마리도
느닷없이 놀라지 않게 해야겠디

돌아오는 길 지나치는 마을에도
더 삼가고 삼가는 하루이기를
모처럼 길어진 내 그림자도 조심스러워야겠지

저승 따위 없이
이승에서
이런 날이 일곱번 여덟 번쯤이라도
되었으며

죽은 사람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나는 살았다
열일곱살에 총 맞아 죽은
내 고향 동무 김봉태를 생가하는 저녁 무렵
지난날 같으며
저 마을의 난쟁이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 드높이 피어오르겠지

----------------
박태기꽃

날 좀 보소

이 박태기꽃 동남동녀들 피어나기까지
지지난해 지나
지난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
올봄으로
일 년 열두 달이나 걸렸다고?

누님이 죽었다고?
죽어
묵은 거울 속에 들어 있다고?

아니겄소
아니겄고

이도 아니면
이천 년이나 삼천 년이나
그런 아마득 아마득한 무작정의 밤낮들을 다 바쳐서
여기 박태기꽃 눈곱 법열에 이르렀다고?

정녕 그렇겄고소

==========
시시한 날

만고의 의미 어리석건만
의미 없이는 
너무
너무 
이 세상 남은 것 허전해버려

아쭈

돌맹이가
돌멩이가 의미이고
파도가
파도 소리의 의미일 터

그러므로
돌이 꿈꾸지 말라는 법 없어
돌은 돌의 꿈이여
파도는
영영 파도의 꿈이여

나 또한 아니꼽살스러이 나의 도도한 의미여
이 의미에 덤으로
나는 이루지 못한 나의 도도할 수 없는 꿈이여

애먼 담배를 끊은 적 있어 어언 사십 년 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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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직고

치매이시라
내 자식이 내 자식 아닌 것

미혹이사라
왠 놈의 진리가 진리 아닌 것

여름밤 일만 벌레 소리
귀 없이 들으시라
겨울밤 
소경으로 눈 내리는 것  실컷 보시라

한평생 육바라밀 순 도둑질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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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로라뚜라

저 벽공의 천사들 다 쫓아버린
몇 생의 저주였던
단 한 생의 아이
드높은
드높은
이 세계 문맹의 동정으로

내일 추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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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하여

물에서 
섬이 꿈이지
섬에서
물이 꿈이지

꿈 제발 이루어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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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 한 켤레

꿈속에서 멍한 신발 한 켤레를 샀다

백리는 가겠다
백오십 리는 가겠다
신철원 구철원에서
아직껏 가지 못한 금화읍내 거기
백오십 리쯤이면
신발도 내 혼백도 하룻밤 캄캄하게 쉴 만하겠다

때마침 밤새워 기다려준 그믐달 아래
온 길도
갈 길도 다 새로 태어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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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수선화

아침 조카 조카딸 수선화 피었구나
어젯밤 
연무동 철물상 사낙빼기 마누라 죽었구나

저녁 숙모 숙부 매화 꽃잎들 흩어졌구나
내일이나
모래
누가 태어나리라
장차 거지이거나 도둑이거나
탱크부대 쿠데타 일으킬
혹은 무명 칠십 년 고이 마칠
팔삭동이 아기로 태어나리라

생사밖에 없구나 생사밖에 없구나 아쭈 아쭈 수선화 한나절 피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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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에 대하여

종이 둘 다
어둑새벽으로 울다
지난밤의 침묵
아무도 열지 못하는 침묵을 지나
달려온 새벽으로 울다

종이 울다
지상의 침묵
또는 지하의 눈먼 침묵을 지나
꺼므꺼므
앞뒤 사라지는 
산기슭 저녁 어스름으로 울다

종이 울다
그 누구도 치지 않은 침묵을 지나
저 스스로
머나먼 종의 울음을 불러다가
아무도 모르게 울다

이 세상 다섯 바다의 귀머거리에 울다
팔백억 혼령에게
돌에게
흙에게
물의 환생에 울다
한낱 티끌인 내 치욕이던 내 쓰디쓴 영예이던 몸속 쓸개에게 울다

종이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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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 주막에서

그림 축에도 못 끼었으니 이 나쎄토록 설익은 환이 져
오던 날들이었습니다

저물어 
새들 제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내 마음도 사람을 닫는 들마로 몰래 슬펐습니다
이런 하루들이 씨가 되었던지
기어이
기어이
길손으로 나서고 말았습니다

식민지시대 그 뒤
분단시대였습니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남은 기운으로
누구누구의 넋으로 손짓해 오는 듯한 딴 길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길로 갔습니다
갔더니
떠다 놓은 주막인가
그런 급한 주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잔으로 얼른 목을 축였습니다
여자라면
두 번이나
세 번쯤 새각시 첫날밤이고 싶었습니다
첫 잔 다음으로는
물이
불로 바뀌어가
결국에는 발톱 밑에서 대갈기 정수리 터럭 끝까지
찬란한 모닥불 덩어리였습니다

주막 구석진 평상에 가로놓여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르고 불난 지귀 신세로 잠들었습니다

오밤중인가
아린 가슴속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와 있습니다 신새벽 숨이 찼습니다

이제 종이에 쓰지 않고 공중에서 씁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웁니다

지워버린 시가 시입니다
그런가요? 가버린 시가 시인가요? 아직 오지 않은 시가 시인가요?

==============
무위에 대하여

무엇을 하지 않다니

거지가 되거라
비굴한 도둑이 되거라

무엇을 하지 않다니

꽃 지거나
다음 해
꽃 피거라

두견새 오래 울어 무엇이거라

------------------------
알타이에 가리

알타이에 가리

내 가난한 조상의 조상으로
돌아가
하루에 세마디나 네 마디로 살리

내 지긋지긋한
말의 과잉과
욕망의 과잉을 때려 부수고 가리
울다가
울다가
울지 않고 가리

------------------------
온몸에 대하여

저 매미 보다
온몸의 매미 소리 아닌가
저 쓰르라미 보아
온몸 똥끝까지 떨며 나오는 소리 아닌가
저 태초 팔월 햇볕 온몸으로 퍼붓는 들녘보아

소원하나
저 햇볕으로 내 주검 썩어지고 싶어

오, 완벽이여

------------------------
유언에 대하여

인류 각위 그대들이 끝내 지켜야  할 것
아래와 같다

내 발가락부터
내 손가락부터 이미 특수성일 것

내 별 볼일 없는 얼굴로 하여금
그 누구의 보편성 아닐 것

태풍 뒤 무지개이거나
태풍 뒤 무지개 없거나
오늘이 
내일의 보편성 아닐 것

==============
조상에 대하여

선고(宣告)하노니

조상으로부터 나에게 내려오지 말 것
나로부터
천둥벌거숭이
나로부터
더듬더듬
까마아득 조상의 헛된 광야로 솟아올라 흩어질 것

조상이란
웬 놈 한놈 아닌
징그러운 억 겹의
그 허허 망망

아흐 조상이란 영영 무한

거기 눈물 나는 내 조상 9차원
그 어디쯤
독한 한대지방 블라지미르 백 년  송장 썩지 않는 술 한 모금
내내
기다리고 있을 것

------------------------
직유에 대하여

똥이다 할 때
똥에게 죄송하다
여우 같은 할 때
여우에게 죄송하다
독사의 자식 할 때
독사와 독사 조상에게 죄송하다
개 같은 할 때
개들에게
태어날 개들에게 죄송하다
쥐새끼 같은 할 때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버러지 같은 할 때
쥐새끼에게 
버러지에게 죄송하다
하이에나
늑대 할 때 
그들에게
그들의 탄자니아 초원에게 죄송하다
소위 잡초들에게 죄송하다
옥에 대한 
돌에게 바위에게 죄송하다
지옥이라니 이글이글 지옥 유황볼이라니
지하에게 죄송하다

언어는 이미 언어의 최악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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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 4월 5일

산 밑
도랑물에 왔다

도랑물 혼자 온전하디 온전하다

이백도
하퍼즈도
여기 올 것 없다

천오백 년 뒤
오백년 뒤
내 불쌍한 눈치코치도 얼른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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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하여

라마단의 길
머나먼 수니에 가리
가슴에 박힌 초승달로
수니에 가리
수니가 막아서면
돌아가리
시아에 가리
폭탄 몇백 발 퍼부은 곳
시아에서 죽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초승달 넋으로
수니의 하늘에 가리

수니에 가리
시아에 가리
거기 가서 하늘의 새끼 낳으리
시아에 가리
수니에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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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실 뭉치 앞에서

아이에게 맡겨라
털실 꾸러미라니
제발 알뜰살뜰 네 것으로 삼지 마라
헝클어져라
헝클어져
털실 꾸러미도 아니게 자포자기하라

아이에게 맡겨라
헝클어져
헝클어져
아이의 자포자기에 맡겨라

이렇게 자라나더라
아이도
오천 년 역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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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햇빛에 대하여   

겨울 햇빛 너는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가만가만 
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이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그것뿐
겨울 햇빛 너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
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
조금 어루만지고 간다
이 세상에서 충만이란 이런 섭섭함인가
겨울 햇빛 너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간다
지식이 무식보다 얼마나 유죄인가
정녕 그렇겠다
겨울 햇빛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얼간이들이
 
한동안 싸우지 않고
한동안 피 흘리지 않을 어느 날을 꿈꾸고 온
겨울 햇빛 너는
나를 지우지 않고 내 그림자를 지우고 간다

통곡인들
오열인들
내 절규인들 들어주는 곳 전혀 없다

겨울 햇빛 네가 간 뒤
내 쇄골로 겨울밤을 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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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무 리얼리즘에게

맘껏 손가락질하거라
큰절 파계승
명고출송(鳴鼓黜送)이거라
산문출송(山門黜送)이거라

나 케케묵은 신화 속으로 쫓겨간다
세속 열반
뱀 대가리 솟는 오욕칠정
그 미혹에 파묻히려고 간다

일만 개 부처 이름 내버리고
십만 개 보살 이름 내버리고 간다
언제쯤 빈털터리로
다시 오지 않으려고 간다

너덜너덜 내 팔구십 년대 하수아비 두고 간다

저 아래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은 신화 속으로
언어의 불륜으로
침묵의 모반 거기 쫓겨간다


__________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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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거기
그날
금성
-------
단언
동백
만년
반환
-------
소원
손님
일기 1
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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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하루
그리움
내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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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에
삼거리
첫걸음
첫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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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
대승 이후
두메에서
박태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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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한 날
이실직고
꼴로라뚜라
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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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켤레
아침 수선화
종에 대하여
두레 주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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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에 대하여
알타이에 가리
온몸에 대하여
유언에 대하여
-------------------
조상에 대하여
직유에 대하여
병신년 4월 5일
이슬람에 대하여  
------------------------
털실 뭉치 앞에서
겨울 햇빛에 대하여   
내 동무 리얼리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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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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