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땀
땀 흘리지 않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하물며 방금 벤 풀냄새의 진리이랴
사랑하는 그대가 말했지
땀을 흘리고 나면
실컷 울고 난 것보다 더 새롭다고
이 세상이 새롭다고
---------
+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 숨
막 숨 거둔 사람의 얼굴 고요타
그 얼굴 기슭
아직 남아 있는 숨 꼬리
고요타
애통 사절
----------
+ 곡비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 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겠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 둥 마는 둥
하루 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
+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써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 들꽃
들에 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우리 겨레 은은한 품성 영락없지요
들꽃 몇천 가지 다 은은히 단색이지요
망초꽃 이 세상꽃
이것으로 한반도 꾸며놓고 살고지고요
금낭초 앵초꽃
해 질 무렵 원추리꽃
산들바람 가을에는 구절초 피지요
저 멀리 들국화 피어나지요
이런 꽃 피고 지고 복이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우리 겨레 복이지요
들에 나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
+ 만남
날마다 바다에서 수평선이 가라앉아 죽는다.
하나의 긍정과 부정 사잉에서
누군가가 하나의 직선으로 죽어서
아무도 몰래 바다를 그 너머로 이어준다.
다시 울음처럼 소생하기를 바라지만
저 스스로 바다는 넓게 넓게 밝혀서
어떤 그림자도 바다에는 떨어질 수 없다.
보라, 저 수평선에서 누가 지옥처럼 살고 있는가.
저 수평선에서 누가 소나기처럼 울고 있는가.
바다 위의 일망무제여 바다여 바다 실존이여
바라볼수록 떠오르는 위경련의 고독
모든 곳에 모인 고독이 비로서 아픔 너머 쉬고 있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고독은 또 기다린다.
하나의 첫날밤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고독은 바다 전체에 자유를 알알이 깐다.
드디어 나는 큰 소리로 자유를 불렀다.
누구처럼 어느 곳처럼 자유를 불렀다.
부르자마자 바다는 일제히 파도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기다렸던 바다 속의 어둠과
바다 위의 고독과 자유 모든 절망으로부터
바다는 큰 소리로 파도치기 시작한다.
죽음은 도저히 죽음만으로 엄숙하지 않고
죽음 속에서 삶이 먼동처럼 터지며
바다 전체의 파도마다 죽음을 나누어 준다.
이미 나의 부르는 소리는 천벌로 막혀버리고
바다 위로 긋는 마른 번개여 첫날밤이여
모든 바닷가에 일망부제의 고독이 감태처럼 밀린다.
보라 저 파도 위에 하나의 배가 떠오른다.
돛이 찟어지고 똧기둥이 잘린 채
언젠가 만나리라는 뜻만이 용골처럼 남아서
파도마다 그것을 삼키려 하지만
꼭 만나리라는 뜻은 삼킬 수 있겠는가.
죽음 속에서 삶은 먼동 트여서
파도 이랑에 숨었다가 떠오른 배를 만난다.
아아 배 위의 삶이 일어서서 손을 흔든다.
찢어진 돛으로 파도 속에서 흔들리면서
그토록 기다린 삶으로 배는 나간다.
모든 파도는 배가 가는 앞뒤에서 어둠에 덮인다.
그리하여 내일이 오면 만남은 또 무엇이 되는가
--------------------
+ 부활(復活)
동해 창망하라.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은 잠자라.
우리 동해 기슭의 몇 군데에
서로 부서지면서 모인 게 껍질 들아
지난밤에는 흰 구름의 울음을 울더니
오늘 아침 해돋이 붉은 햇빛으로
저마다 뼈 속의 살과
두어 개의 눈을 얻어서,
모든 외로운 거품을 내보내고
동해 기슭을 일제히 기어 나가라.
게들아 게들아 기어 나가라.
그리하여 동해 깊은 바다 밑바닥에 들어가서
가장 무서운 암초들을 물어뜯어라.
또한 그리하여 아픈 바다는
빛나는 아픔의 물결, 진노하는 물결과
서로 조각조각 사랑하는 물결로 물결쳐라.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도 깨어나서
모든 뼈에 살이 싸이고
떠난 넋들아 몸에 돌아오라.
가을에 어린 것들과 늙은 것이 돌아가듯 돌아오라.
동해 기슭 삼척 주문진 낙산사에
널린 오징어들아
다시 눈부신 물오징어로 헤엄쳐서
너희들의 자유와 슬기의 관능으로
울릉도 독도 근해 해조음의 햇빛을 받아라.
이 나라의 죽은 것들아
죽어서 집 없는 무주고혼들아
저마다 가엾게 살아나서
동해 기슭을 달밤의 모래알들로 사랑하고
너희들은 백의민족 인산인해의 춤으로 춤추어라.
동해 창망하라. 북과 쇠북아 울어라.
======
+ 썰매
칼바람 분다 저 건너 땅이 운다 달려가자
얼어붙은 얼음놈들아
아직 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네가 물이 되면
우리는 아울러 빠져죽는다
봄이 온단다
저 건너 땅이 운다 달려가자
칼바람 불어닥쳐도
건너가면 한잔술 볼바심할 데 있다
굳은 손 욱신욱신 녹여줄 봄이 온단다
어느 연놈 우리가 빠져죽기 원하느냐
어느 연놈 늘어붙어
우리가 다 얼어붙기를 원하느냐
저 건너 가면 있다
기다리는 순이가 있다
일송정 노래 부르는 아내가 있다
털벙거지 동만주 독립군의 넋이 있다
네가 낳을 누렁이 새끼 있다
봄이 온단다
두 팔 벌려서 해 뜨는 자유가 있다
봄이 온단다
달려가자
주저앉으면 얼어붙는다
봄이 오면 그냥 가라앉는다
칼바람 분다 달려가자
칼바람 채찍 맞으며
죽도록 달려가자
이 강을 건너가면 봄이 온단다
----------
+ 우물
그 집 안에는 우물이 있어요
열 길도 넘는 우물이 있어요
그윽한 분례네 집
분례 어머니 박꽃처럼 환한 분례 어머니하고
어린 분례하고 옥잠화하고
단 두 식구 살고 있어요
젊은 과수댁이라
말 한 마디도 삼가고
한여름 등물도 한 적 없어요
그 분례 어머니가
열 길 우물에 묵직한 두레박 내려뜨려
길어 올린 검푸른 물
그 물의 고요와 그 무서움
심부름 가서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온몸 떨려요 두근두근 대어요
-----------
+ 햇볕
어쩔 줄 모르겠구나
침을 삼키고
불행을 삼키자
9사상 반 평짜리 북창 감방에
고귀한 손님이 오신다
과장 순시가 아니라
저녁 무렵 한동안의 햇볕
접고 접은 딱지만 하게 햇볕이 오신다
환장하겠다 첫사랑
거기에 손바닥 놓아본다
수줍은 발벗어 발가락을 쪼인다
그러다가 엎드려
비종교적으로 마른 얼굴 대고 있으면
햇볕 조각은 덧없이 미끄러진다
쇠창살 넘어 손님은 덧없이 떠난 뒤
방안은 몇 곱으로 춥다 어둡다
육군교도소 특감은 암실이다
햇볕 없이 히히 웃었다
하루는 송장 넣은 관이었고
하루는 전혀 바다였다
용하도다 거기서 사람들 몇이 살아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돛단배 하나 없는 바다이기도 하구나
----------
+ 허공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 자락 구름이다가
자취 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 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 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 한 데 어디 있을까 보냐
=========
+ 그리움
잠 깨어
천둥소리 나머지를 듣는다
아버지 세상을 떠나신지
40년이 되어간다
어머니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어온다
천둥소리 뒤로 비가 온다 그제서야 잎사귀들 후두둑 깨어난다
--------------
+ 낯선 곳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
+ 대장경(大藏經)
한반도야 한 이삼백년만 가라앉아라
바다 밖에 없도록
아무리 찾아보아도
푸른 바다 밖에 없도록
그리하여 이 강산을
대장경 원목으로 소금에 절였다가
한 이삼백년 뒤에 떠오르게 하라
하늘의 일월성진이야
그대로 지긋지긋하게 두고
한반도의 온갖 힘을 죽여서
빈 땅으로 떠오르게 하라
거기에 새로 나라를 세우고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말하게 하라
삭지 않은 대장경을 남기게 하라
한반도야. 그냥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그냥 이대로는
풀 한 포기조차 나지 않겠구나
한반도야 한반도야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온갖 것 제대로 제대로 살게 하라
-----------------------
+ 묘지송(墓地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리라.
지난밤 모든 벌레 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재보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 봄의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 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지켰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사라지고 몇 군데의 묘비는 놀라면서 산다.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의 뼈가 까마귀 깃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男子)에게만
가을은 집없는 산길을 헤매이게 한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제일 하나를 남겼을 뿐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만 저 하늘에 뒤가 있다고 일러 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들은 이 무덤에 있을 뿐 그대 자손은 곧 오리라.
========
+ 어린 잠
가만
가만
귀 기울여 보세요
어느 놈의 천하장사도 못당할 힘으로
우리 어린것들 잠자는 숨소리에
큰 벼랑 무너지는 괌소리 들려요
아가
아가
네가 옳아요
어린것들 깨어나면
임진강 스무나루 이쪽저쪽 오가는 배에
고려 뱃노래 물도 울려 온몸에 들려요
------------
+ 어머니
하루 내내 뼈도 없고 뉘도 없는 만경강 갯벌에 가서
그 아득한 따라지 갯벌 나문재 찾아 발목 빠지다가 오니
북두칠성 푹 가라앉은 신새벽이구나 단내 나는구나
곤한 몸 누일 데 없이 보리쌀 아시 방아 찧어야지
도굿대 솟아 캄캄한 허공 치고 내려 찧어 땅 뚫는구나
비 오는 땀방울 보리쌀에 뚝뚝 떨어져 간 맞추니
에라 만수 그 밥맛에 어린것 쑥 자라나겠구나
여기 말고 어디메 복받치는 목숨 따로 부지하겠는가
이 땅의 한 아낙의 목숨이 어찌 만 목숨 살리지 않겠는가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그덕 가마 타고 시집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단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담아
첫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못할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리 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
+ 인당수
흰 구름 달려가는 북소리 울려라
몽구미나루 세찬 물결
너와바윗장 뜯어내어라
이팔청춘 아가씨야
인당수 짙푸르더라
아비 눈 뜨는 공양미 삼백석
그런 놈의 공양미 아니어라
목구멍 거미줄 걷어내고
하얀 이밥 한 그릇의 꿈이어라
매야 매야
성날수록 네 발톱 감추어라
아리따운 아가씨야
쌀 삼백석에 몸 던진 아가씨야
네 몸이 저승이어라
네 몸이 용궁이어라
네 몸이 바다 위 연꽃이어라
네 몸이 매 떠오른 하늘이어라
네 몸이 아비의 눈이어라
새 세상 가득 찬 새 눈이어라
싸우는 아가씨야
몸 하나로 죽어서
쌀과 임금과 싸우는 아가씨야
치마폭 쓰고 해진 바다에
네 몸 던져
네 몸이 뭉구미나루 북소리여라
소용돌이치는 싸낙배기 물결이어라
그 물결 속의 끝없는 조기 떼여라
온 백성 연장 들고 달려가는 싸움터여라
매야 매야
이팔청춘 물귀신 된 아가씨야
수령방백 모가지 할퀴는 아가씨야
--------------
+ 전등사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
+ 가사메댁
새터 두희봉이 마누라 가사메댁은
울음소리 청승맞기로 으뜸이어요
남원 운봉 지리산 물소리 받아왔다지요
그 울음소리 옆에서는
절구통도 절구공이도 따라 울게 되어요
한규 할아버지의 꼬부랑 자당께서
그 좁쌀여우 뒷호강하더니
여든여섯에 세상 떠났는데
고씨네 사촌 육촌 팔촌 아낙 가운데
울음소리 하나 변변한 것 없어서
한규 할아버지 끌끌 혀를 찼지요
할 수 살 수 없이
가사메댁 보리 한 말 주고 사다가 울었어요
그 울음소리
그 사설 풀어나가는 울음소리 판소리
꼬부랑 자당 한평생을
산등성이 기어오르다가 내려오다가
갖은양념 청승고개 다 떨어 엮어 내려가는데
그 울음소리 판소리
큰 초상 난 집 마당 한번 오젓 짭짤하구나
------------------------------
+ 교상기도(橋上祈禱)
오래, 새벽을 거닐어 간다.
안갯속에 나오는
다리 위를.
잠든 한강이 안개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안개처럼 여의도(汝矣島)로 사라져 간다.
안개에는 많은 그림자가 들어 있나니,
내가 돌 하나로 던진다.
한 점의 물소리가 나면
이어서 모여드는 고요,
환도 후
누이가 이곳에서 빠진 소리였다.
세월이 씻기어 적어진 그 소리로야 아
더 흐르면
안남을 그 소리로야
비로소 이곳이었나 보다
졸음을 깨우는 누이의 울음이듯이,
새벽은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와,
누이는 와서 내 앞에 비 맞은 빛 같이야
빛나게 그치어 있다.
옛 시절의 약속에 못 견디우 듯
우는 입술.
그러나 새벽이어
더 뚜렷이도 다가드는
내 누이의 낯선 모습을 아느냐.
오래, 안개에 새인
새벽 등불이 이제 보이면
누이는 또 가버리나,
안갯속에 눈 감기는 어둠이 되나.
이제는 어느 때인가
다리 위에서야
다리 아래의 강 위에
솟아 오는 깊음을 보는
내 소름으로
자는 바람은 일어나,
누이는 멀어져 간다.
잠든 한강의 안갯속에서
떠는 나의 눈은
얼마나 졸음을 새어왔느냐.
다리 위에서 나는 이제 쓰러지며
나를 사로잡는 누이여
나의 기도를 너는 다 앗아간다.
새벽은 말하지 않느냐.
-------------------
+ 그 할머니
몇 해 전 겨울이었지요 앞산 골짜기에서
울음소리 훌쩍훌쩍 들렸습니다
다가가서 우는 할머니 달래었습니다
남의 집 식모살이라 울 데도 없어
여기 나와서 혼자 우는 것이었지요
바로 어제가 세상 떠난 그 양반 제삿날이라
메 한 사발 올리지 못하고 밤을 새워서
오늘 아침 울음으로나 잠깐 제사 지내는 것이지요
나야 별소리로 더 달랠 수 있다지만
우는 할머니 따라 내 설움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
+ 나무의 앞
보아라 사람의 뒷모습
신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저것이 신의 모습인가
나무 한 그루에도
저렇게 앞과 뒤 있다
반드시 햇빛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남쪽과 북쪽 때문이 아니라
그 앞모습으로 나무를 만나고
그 뒷모습으로 헤어져
나무 한 그루 그리워하노라면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 들으면
바람에 잎새 더 흔들어대고
내년의 잎새
더욱 눈부시게 푸르러라
그리하여 이 세상의 여름 다하여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단풍
사람과 사람 사이
어떤 절교로도
아무도 끊어버릴 수 없는 단풍
거기 있어라
===========
+ 모 심는 날
못자리하고 본잎 나왔을 때 비닐 걷고 모판 바람 쏘일 때
모 쪄다가 모내기할 때 그 모 무럭무럭 자라나는 한더위 때
이윽고 황금물결 이루어 가을걷이 다가올 때 나락 벨 때
이 논농사로 먹은 것 없고 입은 것 없고 누릴 것 없이도
농사꾼은 능히 하늘에 있고 땅속 깊이 스며서 에렐루 상사디야
온갖 걱정 두고도 이토록 아비 어미 된 기쁨 어디 가랴
볍씨 담가 이렛동안 불려서 조심조심 방 아랫목에 싹 틔우며
이것이 어찌 태어나 쌀 되랴 했건만 보온못자리 잎새 나왔다
5월 들어 비닐 걷으니 파란 모 바깥세상에 나왔다
이 기쁨으로 지내다가 마정리 중터 삼모네와 삼모네 큰집
치욱이네와 용술이 처가집해서 네 집이나 같은 날 모 심는 날이구나
모 심는 날이래야 이제는 사람 열여섯열아홉 놉 얻지 않고
그저 이앙기 한 대가 모 모가지까지 꽂으면 되는 세상
그것도 한나절이면 웬만한 논배미야 진작 모내기 끝나 버린다
중터 사람들의 논도 버드실들이고 가죽우물골의 논도
내리 부암리 삼암리 논도 다 버드실들을 이루고 있구나
엣따 버드실들 넓은 들 한천의 물이 갈라서 두 개로구나
이쪽저쪽 대번에 모 심은 논으로 바꾸어서 살아났구나
긴 겨울 내내 흙바닥으로 잘도 견디어 내고
이제 모 심고 모 자라야 제 할 일 하는 나라가 아니냐
송홧가루 날리는데 영농자금 뒤늦게 찔끔 나와 보아야
서로 급하니 누구 하나 한몫으로 가져가도 성에 안 찬다
재산세 5천 원 되어야 일반자금 타낼 수 있는데
당최 농협이란 데가 병같이 쓰고 약같이 쓴 데가 돼 놓아서
농촌이 차 타고 바라보면 아무 일 없이 잘 되는 듯하건만
정작 아무개야 단 하루 세끼 살아 보아라 석탄 백탄 다 탄단다
삼암리 진태는 군대 가서 배운 운전기술로 트럭 타니
진태 하나 보고 몇십 년 수절한 진태 어머니 땡감 같은 어머니
어느덧 흰머리 양귀비 물들여서 뻔지르 검지만
몸은 옛 몸 아니라 거동도 수월할 때가 드물고말고
논 닷 마지기 모 심으니 마침 밥 때라 밥 이어 나르고 있다
삼대 며느리 잘 들어앉아야지 오사바사한 년 아니고 말이지
삼대는 고사하고 진태가 돌아와 어서 장가나 들어야 할 텐데
장가가던 머리로 떡 두꺼비 같은 손자 놈 하나 얼뚱아기 하나
평생 허전했던 품에 안고 두둥실 두둥실 떠나가 봐야 할 텐데
-----------------
+ 물캐똥이
다 일 나가고 없다 어린것 혼자
처마 밑에서 지렁이 건드리며 논다
그러다가 지렁이 가면
흙 파먹으며 논다 잘 논다
마을 전체가 텅 비었다
씨암탉이나 한 마리
그놈도 혼자 있고 어린것도 혼자 있다
아직 호적에도 안 올린 놈 이름도 없는 놈
물캐똥 잘 싸니 물캐똥아 물캐똥이라 부른다
혼자 놀다가 맨땅에서 자고
그늘 벗겨져 깨고 나서 한번 울어본다
아무도 운 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믿음이다
혼자 두어도 잘 자라는 믿음이다
혼자 놀아도 이 세상과 함께 있는 믿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것 물캐똥이
그러지 않고서야
그러지 않고서야
-----------------
+ 미류나무
큰 바람에 입 다물고 하루 내내 견디었소
큰 비에 두 눈 감고 지그시 견디었소
이윽고 비바람 자니 1만 잎새 일어나오
------------------
+ 벼를 털며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허깨비가 아니다
지은 가을 곡식 엄숙함이여
벼 눕혀 말리면 안 된다 해도
쌀에 싸라기 있고
밥맛이 가신다 해도
아서라 볏단 세우기에 어디 일손 남아돌더냐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논두렁에는
콩도 팥도 심지만 피가 성했다
때마침 찬바람에 벼 잘 말라
한 번 뒤집어 둔 다음
일찌감치 벼 타작하니
쉴 데 없는 마음 하나가 논 하나가 된다
탈곡기 먼지 속에서
늙어가는 안식구 일손 좋아
오직 두 눈만 뻥 뚫려 있다
고등학교 졸업반 큰 놈도
거드는 솜씨 제법 건실하여서
하루해 질 무렵까지는
어둑 발에 방아달 논 한 배미 다 털겠다
이 세상은 무슨 일로도 다른 세상 아니다
벌써 저녁 바람 찬 기운이 사납다
이 세상은 우리 세상 우리 자식이 아니더냐
된 일에 된 몸 쉬는 것도
건넛마을 어른 지나는 참이라
벌써 다 터는가
우선 한 배미지요
쌀 좋겠네
편히 건너가시지요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말 한마디에는 언제나 오늘이 어린아이 같다
옛날 옛적 타작에는 개상 탯돌이다가
옛날에는 홑태질로
하루 내내 훑어내다가
이제는 탈곡기에 벼 털
어
벼 한 가마 한 가마 곳간에 부리니
곳간 문 열면 웃음 울음 가득하다
며칠 지나 모진 공판장에 내볼지라도
오늘 흐뭇흐뭇한 바 어이할 줄 모른다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허깨비가 아니다
==========
+ 소와 함께
며칠 동안 건너 마을 객토 품 파느라고 너를 돌보지 못했다
바람도 불던 바람이 내 피붙이 같아서 덜 춥고
여물도 주던 사람이 주어야 네가 편하지
내가 말린 꼴 수북이 주고 더운 뜨물 퍼주니
너는 더없이 흡족해서 꼬리깨나 휘두르는구나
이랴 띨띨 밥 먹은 뒤 바깥 말뚝에 매어 두니
소가 웃는다더니 바로 네가 좋아하는 것 알겠다
외양간 쳐내어 쇠똥무더기 검불에 섞었다
네 집 뒤쪽은 샛바람 막게 두툼 두툼 떼적 치고
남쪽으로는 비닐창 달아내어 볕조각 들게 했다
따뜻한 날이라 송아지 두 놈 까불대며 다니며
무우말랭이 널어 둔 멍석 밟고 마구 논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잠자리 깨끗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동안 네 엉덩이 누룽지깨나 덕지덕지로구나
마른 똥 긁어 떼어내니 이놈 봐라 곧게 서 있다
송아지 두 놈 논 쪽으로 먼저 나간 김에
에따 너도 나도 개천 둔덕으로 놀러 나가자
외양간에만 죽치고 서서 새김질 거듭하다가
이렇게 마음 탁 터놓고 나오니 너 좋고 나도 좋다
바람에 한 번 멋지게 감긴다 무슨 회오리바람이냐
나와 너 단짝 동무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뜬다
얼씨구 양지쪽으로 조금씩 돋은 풀도 반갑다
이런 풀은 뜯지 말아라 네 새끼 송아지들 장난질한다
나도 너도 흐뭇한 것 하나도 하나가 아니다
햇볕 실컷 쪼여라 바람 쏘여라 바깥도 집안 아니냐
내 너를 두고 말한다 소만 한 덕 어디 있느냐
견디기로
는 사람 중에 백범이다 못 견디기로는 임꺽정이다
가자 오랫만에 나온 바깥 기쁨 몽땅 가지고 돌아가자
--------------------
+ 저녁 논길
벌써 별 하나 떠 이 세상이 우주이구나
마른 풀냄새 한철인 마을에도
아껴 쓰는 전등불빛 여기저기 돋아난다
나는 돌아가는 저녁 논길을 외오 걸으면서
달겨드는 밤 물것 이따금 쫓고
한편으로는 엊그제 흙에 묻힌 남동이 영감을 생각한다
죽음이 산 사람의 마음을 깊게 하는지
나도 그 영감 생시보다는 손톱만치 달라져야겠구나
어둠에 더욱 정든 논 두루 돌아다보아라
지난해보다 도열병 성해서 얼마나 품도 애도 더 먹었는지
여든여덟 번이나 손이 가는 농사가 1년 농사 아니냐
아무리 쌀농사 헛되고 빚지는 가을이건만
가을은 가을답게 부지깽이도 덤벙대도록 바쁘다
진정코 여기서 떠날 줄 모르고 놀 줄 몰랐다
살아 보면 세월은 사람에게 큰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가장 작은 것이다
돌아가는 길 저녁 논길이 오늘따라 으리으리하게 조용하구나
가물에도 뒷장마에도 병충해에도 실컷 커서
말없이 이삭 팬 벼가 우리에게 어른이 아니고 무어냐
어서 가자 가서 매흙냄새 나는 이 몸으로
내 새끼 한 번 겨드랑 받쳐 번쩍 어둠 속에
들어 올렸다 넉넉잡고 한 나라로 내려놓자꾸나
-----------------------------
+ 천은사운(泉隱寺韻)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위에도
그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그이들은
밤 솔바람소리,
바위보아
비인 산 허리.
가을이 오데.
바위를 골라
나앉아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그이들은 늙데.
돌아와 한번 잊은 제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 바람 진
산허리.
그이들은
살데.
------------------
+ 허허벌판
가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온 길 삼천리
서러운 약수삼천리
어느 세상에 꽃 하나 보랴.
뉘엿뉘엿 해 지면
나온 새 까막까치도 돌아간다.
가자.
하늘 아래 억겁 그믐이로다.
잠 못 이룬 별들이라면
내 가문 가슴에 재워주마.
피리젓대 무엇하랴
한 마디 가락 아직도 남았다면
부는 바람에 버리고 가자.
가자.
가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참다운 이 이 땅의 벙어리로다.
백도라지야 백도라지야
너 어느 세상에 피어있느냐.
만(萬) 원혼 잠든 벌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
+ 늦은 깨달음
뒷산 달빛 가랑잎새 없다면
마당귀
살구나무 살구꽃 봉오리들 없다면
저 칠산바다 파도 밑으로
나 모르게
우르르 몰려가는
참조기 떼 없다면
그 참조기떼 귀신들 없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못한다 옥아 순아
--------------------
+ 딸그마니네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그마니 아버지 홧술 먹고 와서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따 쓰러뜨리고 나서야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
그러나 딸그마니네 집 고추장맛 하나
어찌 그리 기막히게 단지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 배우러 온다지
그 집 알뜰살뜰 장독대
고추장독 뚜껑에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그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딸그마니네 어머니하고 함께 담근다고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그 집 고추장 한 대접 떠가다가
목물하는 그 집 딸 덕순이 육덕에 탄복하여
아이고 순철아 너 동네장가로 덕순이 데려다 살아라
세상에는 그런 년 흐벅진 년 처음 보았구나
--------------------
+ 동고티 무덤
입춘 무렵 보리밭 하나는 신명 나 푸르지만
중뜸 아이들 쇠정지 아이들 대여섯이
어디 갈 데 있나
걸핏하면 동고티 큰 무덤
매련퉁이 무덤에 가서
자치기도 하고 개씨름도 하다가
한두 놈은 끝내 울기 십상이지 십상이구말구
그런지라 그 무덤 배겨 나지 못해서
이제는 잔디밥 다 벗겨져 벌거숭이 되고 말았지
갈뫼 조송덕이 영감네
할아버지라나 증조할아버지라나
그 할아버지 금슬 좋게 합장한 무덤인데
송덕이 영감 간도로 떠나버리자
누구 하나 돌보지 않는
길가에 나앉은 상팔자 되었네
아이들이야 뭘 아나
그저 하루하루 닳아빠지는 무덤에서 까불어댈밖에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그 무덤 속에서 하얀 수염 할아버지 할머니 일어나서
이놈들아
우리가 고단하다 다른 데 가 놀아라
산 사람하고 죽은 사람하고 너무 가까워도 안 좋느니라
이 꿈꾼 봉식이가 글쎄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냥 약탕관 두고 숨 꼴칵 거두고 말았지 산 무덤이었나?
---------------------
+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 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 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
+ 대동강 앞에서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잠 못 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하러 여기 강물 앞에 와 있는가.
울음같이 떨리는 몸 하나로 서서
저 건너 동평양 문수릿 벌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하나의 민족이 되면
뼛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 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그런 것 깡그리 잊어버리고 아득히 거처를 떠돌리라.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 흉흉한 거지가 되어도 뭣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민족의 기호이다.
그때까지는
시퍼렇게 살아날 민족의 엄연한 씨앗이리라.
오늘 아침 평양 대동강가에 있다.
옛 시인 강물을 이별의 눈물로 노래했건만
오늘 나는 강 건너 바라보며
두고 온 한강의 날들을 오롯이 생각한다.
서해 남바다 거기
전혀 다른 하나의 바닷물이 되는
두 강물의 힘찬 만남을 생각한다.
해가 솟아오른다.
찢어진 두 동강 땅의 밤 헤치고
신 새벽어둠 뚫고
동트는 아픔이었다.
이윽고 저 건너 불끈 솟아오른
가멸찬 부챗살 햇살 찬란하게 퍼져간다.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지난 세월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념이었고
서로 다른 노래 부르며
나뉘어졌고 싸웠다
그 시절 증오 속에서 500만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그 시절 강산의 모든 곳 초토였고
여기저기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가 천지하고 있었다
싸우던 전선이 그대로 피범벅 휴전선이었다
총구멍 맞댄 철책은
서로 적과 적으로 담이 되고
울이 되어
그 울 안에 하루하루 길들여져 갔다
그리하여 둘이 둘인 줄도 몰랐다
절반인 줄도 몰랐다
둘은 셋으로 넷으로 더 나뉘어지는 줄도 몰라야 했다
아 장벽의 세월 술은 달디달더라
그러나 이대로 시멘트로 굳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멈춰
시대의 뒷전을 헤맬 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였다
천년 조국
하나의 말로 말하였다
사랑을 말하고 슬픔을 말하였다
하나의 심장이었고
어리석음까지도 하나의 지혜였다
지난 세월 분단 반세기는 골짜기인 것
그 골짜기 메워
하나의 조국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무엇하러 여기와 있는가
아침 대동강 강물에는
어제가 흘러갔고
오늘이 흘러가고
내일이 흘러가리라
그동안 서로 다른 것 분명할진대
먼저 같은 것 찾아내는 만남이어야 한다
큰 역사 마당 한가운데
작은 다른 것들을 달래는 만남의 정성이어야 한다
얼마나 끊어진 목숨의 허방이었더냐
흩어진 원혼들의 흔적이더냐
무엇하러 여기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묻고
전혀 새로운 민족의 세상을
우르르 모여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 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하러 여기와 있는가
무엇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 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 송이 꽃 들고 돌아간다
------------------------
+ 삼만이 할머니
중뜸 간지랑나무 목백일홍 나무에
느지감치 분홍꽃 덩어리 피어난 여름
첫물 모기에 어린 살 물리며 듣던 이야기
옛날옛적 이야기
옛날옛적 한 마을에 늙은 홀어머니 모시고
단둘이 사는 노총각이 있었는데
철종 때인지 고종 때인지 어느 때일 까닭도 없이
어느 이야기나 다 옛날옛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두리 넓적 얼금뱅이 삼만이 할머니
눈 펑펑 내리는 날
한없는 날
화롯불 삭아서 방안이 썰렁해도
옛날옛적 노총각 이야기
그 이야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명주실꾸리 이야기
옛날옛적 한 마을에 한 아이가 살고 있는데
그만 강도들에게 제 누나가 업혀갔는데
그 겨를에도 명주실꾸리에 실 매고 간 누나 찾아
명주실 따라 산 넘고 물 건너갔더니
이윽고 어느 우물 열 길 드리워져서
그 우물 밑으로 내려가 바윗장 들추었더니
아 그곳은 별천지라
이 세상은 엄동설한인데 그곳에는 복사꽃 핀 별천지라
내일이면 청사초롱 초례청 차려
강도 우두머리의 마누라 될 누나 찾아서
에그머니나 어서 돌아가야지
누나 업고 산 넘고 물 건너 돌아와
누나는 이웃마을 총각한테 시집가고
아우는 건넛마을 달덩이 같은 큰 애기한테 장가들어
잘 먹고 잘 살아서 백여든 다섯 살까지 갔다는 이야기
어찌도 그리 쩍쩍 눌어붙는 입담인지
우리들 어린아이들
산머루 눈동자에 온갖 세상 다 보여주고는 걷어갔지
그 할머니 죽을 때도 이야기하려고 그랬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죽었다지
아무리 입 닫아드려도 도로 벌어졌다지
-----------------------
+ 어둠과 더불어
만권(萬卷) 책이 눈을 감았다.
술 취한 새벽 세시!
내 방의 어둠만으로 살 수 없다.
문을 열자
문을 열자
모든 어둠 놈들이 들어와서
어떤 먹 그믐밤 개구리 운다.
문을 열자
문을 열자
모든 어둠놈들이 들어와서
벙어리귀신 가슴앓이.
새벽 세시 몇 분!
내 방의 어둠만으로 살 수 없다.
관음보살(觀音菩薩), 나에게 천수천안(千手千眼) 어둠 놈들을 보내다오.
------------------------
+ 저녁 숲길에서
어느 날보다도 일찍 미자르 별이 뜨고 나는 일을 마쳤다.
내 말이 방풍지대(防風地帶) 너머로 달려가서
해산(解散)하는 메밀밭을 버려 놓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끌고 사과하러 가야 한다.
그러나, 한두 번 잘못하는 일은 아름다움일까.
내가 가는 것은 뜻밖의 슬픔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밭 주인네 집은 숲 저쪽의 오지(奧地)에 있다.
버린 메밀밭은 저문 뒤에 더욱 역력하구나.
나는 따라오는 말더러 핀잔을 주지 않고
오직 숲길로 접어들자 말했을 뿐이다.
`이제 다 왔다. 네가 좀 더 겸손해지면
나도 또한 겸손해지리라.'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자 누가 뒤에서 일어서는 것 같다.
자꾸 돌아다보아도 말 꼬리에 채이는 것은 어둠이다.
저녁 숲길은 밭주인의 자취가 가득하고
나는 탄주(彈奏)하는 주인에게 할 말을 연거푸 연습해 본다.
`잘못했습니다. 제 말은 운 뒤 몹시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화를 낼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밭 주인의 막내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상하구나, 내 사과하는 손길이 굳어진다.
아무래도 그 애의 혀에 이끼가 끼고 곧 죽으리라.
나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집을 하직(下直)하였다.
그 숲 속의 집에서 너무나 멀리까지 야채(野菜) 썩은 냄새가 따라온다.
내 걸음은 훨씬 더디고 말 얼굴이 슬픔을 뿌리친다.
어서 나는 바시해협(海峽) 쪽으로 늙은 말과 돌아가야 한다.
오던 길이 아니었다. 내 눈은 오던 길을 사납게 찾는다.
그러나 낯선 길에서 마음이 쭈뼛쭈뼛 모지는구나.
말도 유가족(遺家族) 오여사(吳女史) 흉내를 내며 따라온다.
어디선가, 개울물 소리가 혼자 중얼거리고
단 한 번 죽을 까치가 별빛처럼 운다.
`이제 다 왔다. 밭주인 딸은 곧 죽으리라.'
내가 겨우 들리도록 말하자 말은 엉덩이를 낮춘다.
이 세상일은 죽음과 닿아 있고
우리들이 사과하고 오는 길에도 닿아 있다.
저녁 숲 속은 어둠이 바다 흑조(黑潮)로부터 돌아온다.
또한 그 애의 죽음이 몇 번인가 숨바꼭질도 하는구나.
어느 날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나는 잘못을 사과하였다.
우리가 돌아오는 길은 밭 주인네 집에서 멀어지고
이상하구나, 내일 일들이 많은 지류(支流)가 되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갑자기 영전(靈前)에 선 것 같이 말은 느끼고
오늘밤에 제 마구간에서 함께 자기를 바란다.
어서 가자. 집에서 누가 손을 씻는 소리가 나고 그 위에서 미자르 별이 기다린다.
==================
+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서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 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
+ 전화선 아래 지나가며
오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의 전화선 같은 영광 있으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이어져가고 있어라
온갖 사연들
그 아래로
눈 내린다
싸락눈이었다가 점점 함박눈으로 내린다
___________ * 42
땀
삶
숨
곡비
-------
눈길
들꽃
만남
부활
--------
썰매
우물
햇볕
허공
-----------
그리움
낯선 곳
대장경
묘지송
----------
어린 잠
어머니
인당수
전등사
------------
가사메댁
교상기도
그 할머니
나무의 앞
-------------
모 심는 날
물캐똥이
미류나무
벼를 털며
--------------
소와 함께
저녁 논길
천은사운
허허벌판
-----------------
늦은 깨달음
딸그마니네
동고티 무덤
머슴 대길이
------------------
대동강 앞에서
삼만이 할머니
어둠과 더불어
저녁 숲길에서
-------------------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전화선 아래 지나가며
___________
고은 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