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문득 돌을 던진다 아마 나를 던진 것이리라 그대 뜻이라면 할 수 없지 중얼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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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캄캄한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만
났을 때도 캄캄했다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났고 캄캄한
밤 허공에 글을 쓰며 살았다 오늘도 캄캄한 대낮 마당
에 글을 쓰며 산다 아마 돌들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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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
물고기가 되기도 하고 통곡이 되기도 한다 아니다 닭은 몰려오는
비행기 저렇게 굶주리는 비행기 하아얀 닭은 하아얀 물고기 하아얀
통곡 온통 고독하다 비행기가 몰려온다 굶주림이 몰려온다 나는 방
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러면 방안에 가득 차는 하아얀 닭
들이 밤새도록 푸드득거리고 나도 덩달아 푸드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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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숲은 방송국
청명한 목소리가 비트처럼 몸을 일으킨다
음악 방송이 시작된 아침
휘파람새 소리 수레국화 밭으로 새어 나온다
하얀 구름이 너울너울 줄지어
양 떼처럼 푸른 목장에 떠 간다
대나무 숲 근처 튤립나무 잎사귀
하늘을 반 가리면
청명한 목소리 콘서트장이다
기타도 피아노도 없이
아카펠라 선율이 드레스를 입은 듯
매끄럽고 부드럽게 사랑의 언덕을 오른다
그 숲속에는 내 아껴둔 연민이
솔솔 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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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배
그리운 마음
꽃배에 실어 보내리.
물에 젖어 가라앉은 꽃잎에
아직 그대향기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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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발
목월 선생님이 내려오셨다. 춘천교대 교수 시절. 서울에서 택시로 모시고 오는 동안 계속 기분이 좋으셨다. 택시가 교문으로 들어갈 때 선생님은 “이군! 자네 연구실부터 가 보세.” 하신다. 난 작은 연구실로 선생님을 모셨지. 선생님은 의자에 앉으시더니 “이군! 연구실이 한양대보다 좋군.” 웃으시며 기분이 좋으셨다. 그때는 아프시기 전이다. 선생님은 학장실에 들려 잠시 학장님과 말씀을 나누고 곧장 강당에서 시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겨울 저녁 문득 눈이 내리고 눈발이 머리칼에 닿던 느낌에 대해! 오늘 저녁에도 눈이 내린다. 머리칼에 닿는 눈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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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
깊은 밤 술에 취해 택시를 타면 담배 생각이 나고 난 기
사 옆 자리에 앉아 기사에게 말한다 담배 한 대만 피웁시
다 그러세요 어떤 기사는 허락하고 에이 좀 참으세요 어
떤 기사는 참으란다 깊은 밤엔 많은 기사들이 담배를 허
락하고 난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가
떨어져 기사에게 담배를 빌릴 때도 있다 어느 해던가? 성
냥을 켜던 나를 보고 기사가 말했지 선생님 이상하네요
아니 켜기 쉬운 라이터를 두고 왜 성냥을 넣고 다니십니
까? 네 성냥이 좋아서요 라이터는 무겁고 성냥은 가볍잖
아요? 그런 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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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은 피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 부는 왕십리를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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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독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토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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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 그는 출발한다 출발이라?
그렇다 그는 어제도 출발하고 그저께도 출발했다
내일도 출발한다 모레도 출발할 것이다
오늘의 출발이 어제의 출발이고
어제의 출발이 내일의 출발이다 출발은 좋은 일이다
눈 내리는 저녁 그는 출발한다
모자를 쓰고 출발한다
이놈의 출발은 언제 끝나려는지 그건 신(?)만이 아는 일!
그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출발은 언제나 출발이므로 약을 먹고 출발하지만
바람이 불고 출발은 무수히 많다
그도 무수히 많다
무수히 많은 그가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외로우면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다
너와 함께라면 소나타를 타고 출발할 것이다
완행열차도 있지. 코스모스도 있을 거다
출발은 그의 삶의 형식이다
아직도 그는 그의 터미널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의 정류장에 그의 정박지에 그의 항구에
그의 여인숙에 비가 내린다
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
출발이 빛이고 절망이다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나절 출발합시다
진눈깨비가 치는 저녁나절 출발합시다
안개가 끼는 밤에 출발합시다
출발은 숙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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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어제도 혼자 오늘도 혼자 내일도 혼자입니다.
기대지 마십시오. 홀로 태어나 홀로 죽습니다.
혼자 길을 가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웃고 무소의 뿔처럼 가십시오.
부지런히 밤길을 가고 서리길을 가고 새벽길을 가십시오.
모든 행은 무상입니다. 어디에도 당신은 없습니다.
소 발자국은 눈에 덮이고 흙에 덮이고 먼지에 덮이고
저 나무도 혼자 들판도 혼자 당신도 혼자입니다.
그러므로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가 천둥 번개 우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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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안
머리를 빡빡 깎고 싶은 밤이 있지
어제도 거실에서 술 마시다 말고 스님처럼
머리 빡빡 밀고 싶어 화장실 들어가 거울보고
그래 빙판을 머리에 얹고 다니는 거야
검은 머리칼이 아귀다 중얼대고 나왔지
어느 날 머리 빡빡 깎고 집에 오면
아내는 내가 이젠 완전히 미쳤다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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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지
요만한 여유가 고맙다 여유는 나를 버리는 일 오오 욕
심 욕심 고정관념을 버리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담배
피운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러니까 망각이다 처음엔
말보로를 피우다가 도라지로 바꾼 건 인후염 탓이지
만 오늘 저녁 도라지도 있고 파아란 도라지꽃도 있고
갑자기 도라지꽃 생각이 난다 도라지 도라지 산도라
지 내가 피우는 당신 요만한 여유라도 생긴 건 모두가
당신 때문이고 저녁에 마시는 하이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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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빈이
신기했던 것은 황당하고 뻔뻔한
질문에 답하는 선생님들의 방식
이었다 시창작 강의 시간에 이
승훈 선생님은 유년기의 트라우
마를 날 것으로 들이밀며 과장
된 고통과 절망의 해결책을 묻
는 데 대해 “나도 그런 게 늘
문제야.”라고 말씀하셨다 이건
국문과 졸업생 윤빈이가 쓴 대
학시절 추억담에 나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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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와 나
A는 고통이다.
A가 증대하면서 지상을 가득히 채운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A는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밤이다. A와 나는 관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새벽에.
A와 나는 어떻게 결혼을 취소할 것인가 대낮에.
나는 A를 없애려 권총을 만든다.
물론 나의 권총에는 총구가 없다.
죽여야 할 놈은 이미 시체이기 때문이다.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나 아아 시체여 시체여 시체여.
밤에도 낮에도 지상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A는
결코 죽을 가능성이라곤 없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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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방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있다.
비인 술병이 있고 피우다 만 담배가 있고
의자도 있다.
그녀의 방에는 의자 두 개가 있다.
그녀는 반바지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겨울 오후 다시 바람이 분다.
아니 겨울 오전 같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의 코가 있고
그녀의 커단 눈이 있고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있고 구름 한 장이 있다.
그녀는 화장을 한다.
그녀의 뒤에는 한 남자가 있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다.
그녀의 머리칼도 말이 없다.
그녀의 입술도 말이 없다
그녀의 커단 눈이 말한다. 밖에 비가 와요?
그녀의 커단 눈은 그대로 활활 타는 불이다.
그녀의 눈을 보면서 그는 사라진다.
그는 그녀의 눈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의 눈 속으로 사라지는 그에 대해 생각하시오.
이제 그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사라진 그를 보고 그녀가 말한다.
사라진 그가 의자에 앉아 있다.
아아 이건 꿈이로구나.
그는 꿈속을 헤매는구나.
그녀의 방에는 커튼도 있고 탁자도 있고
의자도 있고 여긴 서울이다.
사라진 그가 의자에 있고
그녀의 방에 있고 다시 비가 오려나 보다.
그녀는 내일 떠난다. 가지 마!
사라진 그가 소리친다.
그녀의 방이 와르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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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한 너
길을 가다가
문득 살펴보면
이 팔도
이 머리도
무수한 너로 덮인다
그렇다
내가
걷는 게 아니다
거리를 걸어가는 너
시장을 보러 가는 너
운전을 하는 너
친구들 속에서 더욱
외로워지는 너
해질 무렵 유리창에
물고기를 그리는 너
편지를 쓰는 너
기다리는 너
돌아눕는 너
그런 네가
나를 이룬다
나를 이루고
나를 부수고
다시 이루는
끝없이 돌아가는
무수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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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기쁨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듯이
-타르디유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이건 이미지가 아니다
이건 시가 아니다
그런 밤이 있다
그런 새벽이 있다
그런 저녁이 있다
그가 시쓸 때
그가 목욕할 때
그가 술에 취해
앉아 있을 때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눈다
과연 그런가?
의심스럽다면
독자들도 연습삼아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힘든 일이 아니지요
수동적인 상태로
기다리는 일이지요
사랑하는 남자의 몸을
조용히 기다리듯이
능동적인 상태로
기다리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기다림 속엔
포기와 노력이 있지요
없는 사람과
없는 물건이
이 밤 속에
나타난다
사라진다
나타남과
사라짐은
결국 하나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노이로제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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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 새끼
강으로 바다로 바닷가로 가재처럼 물고기처럼 떠돌아야 합니다.
이런 저녁엔 장마가 시작되는 저녁엔
나비 연구 곤충 연구 물새 연구나 하며 살아야 합니다.
거울 연구는 끝났습니다.
30년 동안 나를 괴롭힌 연구는,
거울 연구 기차 연구 방 연구 모두가 죽음 연구지요.
무기물 연구입니다. 생명이 없지요.
그러나 오늘 저녁 내리는 비를 보시오.
저 비가 거울을 적시고 기차를 적시고 방을 적십니다.
지름 내리는 비가 전부입니다.
저 비가 거울이고 기차이고 방입니다.
모두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비도 나비가 아니고 곤충도 곤충이 아니고
물새도 물새가 아닙니다.
마침내 마침내 모두가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므로 모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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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종이에
이 종이에
무얼 쓸까
이 하얀
이 창백한
이 물보라치는
얇은 종이에
너의 이름을 쓸까
가을의 뼈에 대해 쓸까
네가 찾아온 날의
환희에 대해 쓸까
지나가는 가느다란 바람에
날려 버릴까
푸른 건 가냘프다고 쓸까
이 하얀
이 부끄러운
이 죄많은
얇은 가슴에
가을은 스미건만
무슨 목적이 있느냐
오는 부는바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시간이 정지한
가을 햇살에
발을 담그면
발은 그대로
폭포가 되는
이 가을
하얀 종이에
슬픈 에세이를 쓸까
슬픈 독수리 하나
떠 있다고 쓸까
이 병든
이 하얀
이 펄럭이는 가슴에
정말 무얼 쓸까
===========
+ 따뜻한 빵
그대와 함께 떠난 겨울은
따뜻한 빵이었네
그대와 함께 달리던 길은
호수였고
그대와 함께 들른 도시는
의자였고
그 집 유리창은
침대였네
그대의 벨트는 살구나무였고
내 모자는 구름이었네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은
3천 년이었네
추운 겨울 저녁
우울병에 시달리는 남자 하나
아직도
그 집에 누워 있으리라
---------------------
+ 내 친구 개미
넌 카페가 무언지 알 거다 내가 자주 들르는 카페는
두 곳이다 하나는 인사동(천도교 회관 지나 고려원
옆)에 있고 하나는 내가 사는 서초동에 있다 인사동
(아아 아닌지 모른다 인사동이 아닐 거다 난 시를
쓰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나 생각해 본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승훈 씨가 편집한, 고려원에서 나온 책을
서가에서 뽑아 살펴본다 종로구 경운동 70 그래
경운동이로군) 카페에는 길을 향해 난 커단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 앞 나무 의자에 앉으면 유리창 너머 길이
보이고 해가 지는 골목도 보이고 가을 저녁 낙엽이
지는 나무도 보인다 고려원에 들르는 날은 야간
강의가 있는 목요일 저녁이다 시간이 남으면 해질
무렵 그 카페에 앉아 저무는 길을 보고 지나가는
미인들도 보고 나처럼 못생긴 중년 남자들도 보고
책도 보고 담배도 피우고 서초동 카페는 목요일 야간
강의를 마치고 허전해서 들른다 넌 허전하다는 게
무언지 알 거다 작은 카페 벽엔 검은 거울이 있고
빠에 앉으면 거울 속에 내 얼굴이 흐리게 나타난다
흐린 흐린 가을밤 혼자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공상도 한다 술에 취하면 거울 속에 흐린 얼굴이
또렷이 드러나고 난 갑자기 부끄러워 일어선다 이런
밤의 심정을 시로 쓴 적이 있지만 이 시를 읽은
제자는 너무 감상적이라고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
난 그의 말을 따랐다 이 시는
술 마시는 밤이 외롭더라
야간 강의를 마치고
동대문을 지날 때
동호대교를 지날 때
사는 게 외롭더라
너무 피곤하더라
아파트 앞 카페에
말없이 앉아
담배를 피우는 밤이 외롭더라
밤 열두시가 외롭더라
1년이 외롭고 10년이 외롭더라
의미가 없으면 없는 대로
만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나는 게 외롭더라
처럼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해도 감상적이다 아아 난
이다지도 감상적인가? 어린애들도 아닌 대학교수가
이다지도 감상적이라니 쯧쯧 그러나 넌 감상이 무언지
알 거다 벽거울이 있는 카페에 앉아 늦은 밤 맥주를
마시는 이승훈 씨는 지친 모양이다 넌 지쳤다는 말이
무언지 알 거다 지친 다음에 지친 다음에 찾아오던
오한도 웃음도 알 거다 난 지금 보도블록 위에서
만난 너를 생각하며 이 시를 쓴다 넌 내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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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라는 햇빛
나는 네 속에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 부는 세상 너라는
꽃잎 속에 활활 불타고 싶었다 비 오는 세상 너라는
햇빛 속에 너라는 제비 속에 너라는 물결 속에 파묻히
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세상 너라는 봄날 속에 너라는
안갯속에 너라는 거울 속에 잠들고 싶었다 천둥 치는
세상 너라는 감옥에 갇히고 싶었다 네가 피안이었으
므로
그러나 이제 너는 터미널 겨울저녁 여섯 시 서초동에
켜지는 가로등 내가 너를 괴롭혔다 인연은 바람이다
이제 나 같은 인간은 안된다 나 같은 주정뱅이, 취생
몽사, 술 나그네, 황혼 나그네 책을 읽지만 억지로 억
지로 책장을 넘기지만 난 삶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
도 떠돌다 가리라 그래도 생은 아름다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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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만나고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너한테 너한테 배웠다
사는 게 난리지만 그동안
너를 만나고
난리가 끝난 줄 알았지
그러나 아니야
네가 떠난 다음 또 난리가 나고
이 난리는
내가 만든 난리
겨울저녁에 시작된 난리가
봄이 오는 저녁에도 계속되고
난리는 난리는 불이 아니야
불이라면 끌 수도 있지만
난리는 사랑이야
사랑은 저주받은 사람들의 직업이야
겨울저녁 싯벌건 노을이야
밤새도록 부는 바람이야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고역
이 업보 이 가난
하얀 닭이나 백 마리 기르면
난리가 끝날까?
이 난리가 지금도 계속되는 난리가
끝이 없네
천 마리 닭이나 기르면 끝나리
어젯밤에도 술만 마시고
돌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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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시작
피범벅 겨울이 가고
넌 커단 가방 하나 들고 나타났지
아니 커단 기차를 들고 나타났지
그 기차에 타라고 말했지
난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떠났다
지금도 떠난다
계속 떠난다
이 기차, 이 구름, 이 항아리 속에
내가 있으므로
이 방 속엔 내가 없다
이 학교에도 없다
이 거리에도 없다
그럼 어디로 간 거야?
아마 네가 들고 온 기차 속에 있겠지
이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네가 온 다음
난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니야
네가 오다니?
다신 오지 않으리라 믿었지
너, 이 봄, 이 아련한 날들, 이 도취의 날들,
이 피안의 날들,
이제 네 속에 내가 있다
이제 내 밖은 온통 너다
꽃으로 뒤덮인 들판,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은 날들,
모두가 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
내가 몰고 가는 쏘나타,
내가 들고 가는 가방,
내가 들리는 술집,
내가 시를 쓰는 이 볼펜,
이 백지,
지금 차 밖에 내리는 어둠,
왕십리의 불빛,
깊은 밤 의왕 터널을 지나 나타나던
수원의 불빛,
깊은 밤 찾아간 카페,
카페 유리창에 떨어지던 빗방울,
내가 걸치고 간 겨울 바바리,
모두가 너다
피투성이 황혼 다음에
문득 네가 오고
이제 내가 보는 것,
내가 만지는 것,
내가 듣는 것,
모두가 너다 난 사라지고
요란한 폭음 속에 폭음 속에
하얀 비행기 하나 떠 간다
넌 다리 없는 새라고 말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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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눈물
새로운 눈물은
깊은 밤에 왔다
산을 넘어 왔다
불안을 이긴 밤에
문득 찾아왔다
새로운 눈물은
어느 날 그립다는 말속에
불타며 왔다
눈에 덮인 산과 함께
불 꺼진 밤과 함께
갑자기 왔다
새로운 눈물 속에
너는 작은 역(驛)이었고
너는 작은 새였고
너는 작은 바다였다
작은 바다 속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불안을 이긴 밤에
산너머 산너머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눈물은
나를 감싸고 가슴에
쾅쾅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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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 고맙소
아무 나무나 보고 말한다.
"선생, 고맙소"
겨울 아침,
겨울 아침 보고도
"선생, 고맙소" 말한다.
빈 휴게소 지나간다.
오늘은 모두가 고맙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 두 마리,
작은 이발소에 서서 일하는 아저씨,
고맙소.
다리는 절지만 거울 앞에 서서 일하는
아저씨 보고도 인사해야지.
눈이 내리네.
"선생, 고맙소"
눈 보고 인사할 때
그래 고마워 고맙다.
산길 간다.
참새 한 마리,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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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비의 수첩
애비의 수첩에는
상처와
도깨비 같던 삶과
밤의 눈물과
괴롬의 얼룩만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단다
영이야 상규야
너희들은 모르겠지
그냥 가슴팍에 숨겨온
이 수첩
손때만 반지르르한
이 수첩
꿈같은 수첩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애비의 수첩이 서러운 걸
너희들은 모르겠지
나이 마흔에 비로소
꺼내 놓고 돋보기를 쓰고
너희들 애미가 외출한 동안
봄이 오고 봄이 올 때마다
튓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펼쳐 보는
이 수첩
죽을 고생을 하며
견디어 온 날들의 포탄과
진드기 같던 고독과
죽은 애인의 코와
일손을 멈출 때마다
못 견디게 찾아오던 잠이
그래 휴식이 휴식이
너무 고단한 인생이
서럽게 번쩍이고 있단다
영이야 상규야
너희들은 모르겠지
이 수첩
시커멓게 닳아 버린 수첩
뭐라고 쓸 수는 있었지만
글은 배웠지만
그냥 살아온 세월
마흔 해는 사실 이 땅에선
얼마나 기인 세월이던가
허리가 휘이게 기인 세월이던가
너희들은 모르겠지
봄이 올 것만 같아
오늘도 툇마루에 앉아
몰래 펴 보는 수첩
=============
+ 당신은 그동안
당신은 그동안
너무 무겁게 살았지
이젠 가볍게 살아야 해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순진하게 되는 것
아름답게 되는 것
향기롭게 되는 것
고통보다 환희
분노보다 용서
절망보다 희망
복잡한 건 단순하게
당신은 쉰이 넘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실수도 많았지만
머리도 세었지만
당신 머리엔 새가 날아와
놀아야 해
봄이 한창일 때
꽃이 한창일 때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신은 그때를 잊어야 해
오늘은 화창한 날
오늘은 여름이 오는 날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여름이 오는 날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시간은 많지 않아
공부할 시간도
술 마실 시간도
좋은 사람과 만날 시간도
그러니까 순진하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무엇보다 아름답게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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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구비 만 구비
천 구비 만 구비 돌아 그대 만나면 그대 말없이 선물만 주네 푸른 바람도 그대 선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그대 선물 카페 창 너머 맑은 하늘도 그대 선물 카페도 카페도 그대 선물이다 나 그대 선물 받고 한 세상 사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천 구비 만 구비가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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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계절
괴롭지만 신나던 계절
너를 만난 계절
꽃이 피던 계절
그러나 꽃이 지고
갑자기 슬픔이 찾아왔네
오늘 저녁 슬픔이 찾아왔네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괴롭지만 신나던 계절
너를 만난 계절
네가 웃던 계절
그러나 너의 미소가 사라지고
갑가지 슬픔이 찾아왔네
오늘 저녁 슬픔이 찾아왔네
살다 보면 슬플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슬플 수도 있지
그러나 네 목소리 들리지 않고
난 휴지조각 위에
시를 쓰네
이 흐린 저녁에
시를 쓰네
하얀 종이 위에 쓰는 게 아니야
난 지금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휴지조각 위에
그러니까 휴지가 된 마음 위에
감기에 시달리며
시를 쓰는 거야
너의 미소가 태어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시를 쓰는 거야
너를 위해
실의에 빠진 봄 너를 위해
이 시를 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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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심한 사랑
당신에게 매달렸던 세월
아름답다 쓸쓸하다 참혹하다
가을 저녁이다
이 한심한 사랑이
회오리 속에 안개 속에
증오 속에 납 속에
술 속에 구름 속에
이 한심한 사랑이
아파트 속에 서랍 속에
상처 속에 상처 속에
약 속에 하아얀 약 속에
이 한심한 사랑이
빌어먹을 세월 속에
햇살 속에 감옥 속에
빌딩 속에 은행 속에
소나타 속에 소나타 속에
그가 몰고 다니는 하아얀
소나타 속에
거울 속에 거울 속에
이 한심한 사랑이
추운 저녁 카사블랑카에서
나를 만났다고 시를 쓴
하혜의 노트 속에
추운 밤 속에 벽 속에
깊은 밤 속에 트렁크 속에
술에 취한 나를 부르던
너의 목소리 속에
이 한심한 사랑이
죽어 가는 섹스 속에
그림자 속에 한 여자 속에
가을 속에 가을 속에
간신히 간신히 넘어가는
이 세월 속에 미련 속에
바람 속에 바람 속에
병든 밤 속에 기러기 속에
오! 그가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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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무우도 좋아
하얀 무우
버석버석 베어 먹는
너의 입이 좋아
너의 코도 좋아
웃지 않는
너의 눈도 좋아
난 기차가 좋아
가을 기차는 더욱 좋아
난 철늦은 여행도 좋아
너하고 떠나면 더욱 좋아
난 룸펜이니까
난 알콜 중독 자니까
난 너의 파아란 자켓이 좋아
난 저녁에 피곤한 네가
말없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좋아
해골같은 인생도
그때는 따뜻해
한번 타면 다시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좋아
난 가을 닭장 앞에
머리를 숙이고
모이를 주는
네가 좋아
난 가을 바닷가에
모자를 쓰고
갈매기 밥을 주는
네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그런데 달팽이는 밤에
어떻게 사랑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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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몽이 계속된다
악몽이 끝나고 악몽이 계속된다
너는 악몽이었다 악몽이 끝나고
지금도 계속된다
너는 끝나고 지금도 계속된다
그 밤이 끝나고 그 밤이 계속된다
그 밤에 구토가 생기고
구토가 구토가 계속된다
그 밤에 개가 있었다
개는 끝나고 지금도 계속된다
개가 개가 계속된다
나는 마당에 무덤을 파고
개를 묻는다 썩은 희망을 묻는다
나무 아래 묻는다 달이 뜬 밤에
삽으로 땅을 파고 굴을 파듯이
개를 사랑하듯이 개를 묻는다
그러나 개는 계속되고
삽을 들고 계속되고
땅을 파며 계속된다
개를 묻는 일이 계속된다
악몽이 계속된다
그것은 끝나고 지금도 계속된다
가을밤이 계속되고 나의 주정이 끝나고
다시 계속된다 택시가 떠나고
개가 계속되고 삽질이 계속되고
더러운 추억이 끝나고
더러운 추억이 계속된다
가을이 계속된다
땅이 계속된다 땅이 끝나고
무덤이 계속된다 삽질이 계속된다
이 저녁에 계속된다 끝난 건 없다
끝남이 계속된다 지루하게 계속되고
그런 게 인생이다 뻔뻔한 X
그것은 끝나고 지금도 계속된다
약을 먹으며 계속된다
그것은 매장이었다 매장이 끝나고
매장이 계속된다 이번엔 내가 매장되고
그것은 악몽이었다 매장이 계속되고
악몽이 계속되고 악몽이 아니라
개한테 물리고 개한테 물리고
그것은 계속된다 그것은 끝났지만
그것은 끝났지만 그것은 끝났지만
가을도 계속되고 너도 계속된다
너라는 악몽도 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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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팝나무꽃 필 때
야윈 내 안쪽을 아는 듯
식량이 떨어질 즈음
이팝나무는 밥 공양하라고
수북하니 가로수에 올려놓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자동차들
숨 막히는 선착순인가?
즐비한 꼬리물기
바람은 지나치지 않고 휘두른다
하늘에 닿은 묵상의 시간이
고여서 이루어진 기다림으로
이불솜 같이 깔리는 유월에
가슴 시린 구름이 떠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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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린 밤 볼펜으로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흐리게 흐리게 무엇을 쓰랴
무엇을 찾아
무엇을 찾아 쓰랴
서럽던 날들을 쓰랴
사라진 바다를
바다 위의 구름을 쓰랴
용서하랴 부서지랴
축복받은 날들은
모조리 아름답던 날들
이렇게 흐린 밤
목메이는 밤
무엇을 쓰랴
이 백지같은 외롬
마음껏 찢어지는 외롬
하염없는 날들만 하염없으니
영원히 저무는 병원 하나만
노적처럼 흔들리는 방에서
사랑했던 사람아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떠날 수 없고
머물 수 없으니
바위같은 가슴이나 울리면서
이제 무엇을 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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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방에 대한 회상
겨울 저녁이면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언제던가 그해 겨울 저녁에도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방에 갔다고 시를 썼다 당신은 없고 빈
방에 모자를 걸어두고 왔다는 내용이다 그때만 해도
시적이었군! 당신 없는 방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밖에는 눈이 내리고 당신 혼자 사는 작은 방 벽에
모자를 걸어놓고 돌아왔다고
그해 겨울 어머니는 개포동 독신자 아파트(13평)에
혼자 사셨다 난 일요일이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작은 방에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뒷산에
산책을 나가신 날도 있었다 난 어머니가 없는 빈 방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어머니가 읽다 둔 원불교 경전도
보고 혼자 돌아온 날도 많다 어머니는 지난해 겨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밤에 난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겨울 저녁이면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당신은
겨울 오후 작은 방에 누워 있었지 밖엔 바람이 불고
난 목에 마후라를 하고 눈 내린 골목을 돌아갔다 아아
옛날 춘천에서다 난 당신을 찾아갔다 어머니도 겨울
오후 작은 방에 누워 계셨지 일요일이면 차를 몰고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도
난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물론 당신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모든 당신은 어머니다 춘천은 너무 멀다
개포동도 너무 멀다 아무튼 난 누군가를 따라 이 세상에
왔다 내가 노래한 작은 방은 모두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내가 그동안 방에 대해 시를 쓴 건 어머니, 그리고
당신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 모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난 시를 쓰다 말고 책상에
이마를 처박는다 오 언제나 겨울 저녁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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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
그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 그가 웃으면 울고 그가 울면
웃었다 그가 망하면 웃고 그가 팔을 쳐들면 웃고 그가
걸어가면 웃고 너를 안을 때뿐이다 인생이 그를 속이지
않은 건 너를 안을 때 해가 질 때 너의 눈을 볼 때
너와 차를 마실 때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 인생은 그를
속였다 추운 골목을 돌아가면 골목의 상점에서 담배를
사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인생은 속였다 밤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으면
밖에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돌아누우면 잠이 안 와
문득 일어나면 새벽 두 시 캄캄한 무덤에 불을 켜면 무덤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책 상 위 전기스탠드를 켜면
위통이 찾아오면 다시 불을 끄면 캄캄한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 책상 위의 냉수를 마시면 책상 위의 사과를 먹으면
아아 <나>를 먹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머언
무적이 울면 새벽 연필을 깎으면 이마에 술기운이 남아
있으면 다시 잠이 안 오면 문득 무섭다는 느낌이 들면
턱을 고이면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쓰면 돌덩어리
우울 황폐한 새벽 인생은 그를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를 속이고 그를 감시하는 이 인생이라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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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저녁 일곱 시의 풍경
이승훈 씨 계시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이승훈 씨가 깜짝 놀라 일어선다.
시를 쓰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준다.
겨울 저녁 일곱 시.
낯선 남자가 이승훈 씨 방으로 들어온다.
웬일이시요? 이승훈 씨가 묻는다.
낯선 남자는 의자에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도대체 당신 시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무얼 말하려는 거요?
이승훈 씨가 대답한다.
내가 쓰는 시는 나를 찾아가는,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그러니까
타자를 찾아가는, 말하자면 일종의 여행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시작만 알고 끝은 모르는, 따라서 미지의
빙하 같은 개와 개 같은 빙하의, 해질 무렵의 광기가…
알아요, 알아!
낯선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이승훈 씨가 쓰다 만
원고를 책상에서 집어 주머니에 넣고는 문을 열고 사라진다.
겨울 저녁 일곱 시,
이승훈 씨의 방에는 얼음 같은 노을이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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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너
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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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배
눈발
담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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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독
출발
편지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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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윤빈이
A와 나
그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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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너
사는 기쁨
사자 새끼
이 종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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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빵
내 친구 개미
너라는 햇빛
너를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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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
새로운 눈물
선생, 고맙소
애비의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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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동안
천 구비 만 구비
아름다운 계절
이 한심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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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달팽이가 좋아
악몽이 계속된다
이팝나무꽃 필 때
흐린 밤 볼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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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에 대한 회상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겨울 저녁 일곱 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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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