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 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 흙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 가시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
+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
+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
+ 독거
나하고 나뿐이다
뼛속에 유빙(遊氷)이 떠다닌다
나는 나이테 없는 식물 같은 동물
피다 증발해버린 빙하기를 사는
독거의 꽃
불가해한 선사(先史)에서 흘러온
소금 기둥이다
불꽃의 순간을 두들기는
허공의 하루살이이다
나하고 나하고 나뿐이다
----------
+ 등불
네가 처음 외박한 밤엔
모든 피들이 털 끝에 매달려
뜨거운 커어튼을 찢었고
네가 두 번째 외박한 밤엔
바람 헤매이는 언덕을
백지장처럼 홀로 넘었다.
네가 세 번째 외박한 밤엔
가늘게 파닥이는 나래로
긴 긴 이슬을 손에 받았는데
오늘 네가 들어오지 않아도
그래? 괜찮다!
노란 목소리로
기분 좋게 추운 옷깃을 여며 내린다.
----------
+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차지한
우리 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
+ 유방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
+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
+ 치마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 탯줄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
+ 늙은 꽃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
+ 비망록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 오십세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글쎄 내가 콩떡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
========
+ 자살법
마녀와도 같이
화장하고 잠들면
잠든 사이
놀러 나갔던 혼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요.
돌아오긴 오는데
제 얼굴 도로 찾지 못해
그만 그대로
허공을 헤맨다고 해요.
밤이면 홀로 일어나
짙게 짙게 화장을 해요.
벼랑 끝에 바쳐질 붉은 꽃처럼
화장한 몸뚱아리 하나 던져 놓아요.
이러이 그만 깨어나지 말기를
황홀히 기도하며.
-------------
+ 통행서
내가 만난 모든 장미에는
가시가 있었다
먹이를 물고 보면 거기에는 또
어김없이 낚싯바늘이 들어 있었다
안락하고 즐거운 나의 집 속에
무덤이 또한 들어 있었다
가족들과 나눠 먹은 음식 속에도
하루하루가 조용히 사라지는
두려운 사약이 섞여 있었다
사랑도 깊이 들어가 보면
짐승이 날뛰고 있었다
가시에 찔리며
낚싯바늘 입에 물고 파득거리며
내가 가는 길
그래도 나는 시 몇 편을
통행세로 바치고 싶다
--------------
+ 흐린 날
흐린 날은 절에 가고 싶다
석연꽃 아래
북이 울리고
목어가 우는
절에 가면
나는 연등이 되리라
펄럭이는 하늘 끝에 걸리리라
무슨 새의 혼을 쓰고 태어났기에
날아도 날아도 허공이 남을까
흐린 날은
그 허공 절에 갖다 아낌없이 바치고
나는 연등이 되리라
펄럭이는 하늘 끝에
무색이 되리라.
---------------
+ 공중전화
눈 쌓여
하얀 공원 어귀에
홀로 서 있는 공중전화를 보면
나는
길고 긴 고백을 하고 싶어요.
"당신을 살아하게 될 것 같아요"
기억의 그대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고 싶어요
천지는 유리알로 얼어 있어도
당신의 영혼에
인주빛 문신을 새기고 싶어요
해가 지면
이 공원의 전화통에는
낙엽처럼 수북이 동전이 쌓이고
사람들의 가슴엔
노을이 쌓이겠지요
나는 길고 긴 고백을 하고 싶어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
+ 소꿉장난
사랑하는 그 애
오래 물속에 같이 살고 싶은
물고기 같은 남자
글쎄, 일곱 살에 벌써 사내가 된
미운 그 남자.
"너는 엄마고 나는 아빠다"
꽃잎 빻아 김치 담아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리고 그담엔 할 일이 없어
조금 생각해 보다가
엄마 아빠처럼 포개 자버린 애
사랑하는 그 애
맹수 같은 한숨 후루룩 몰아쉬며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폭풍우
글쎄 그 속에 내 생애를 사납게 가둬 버린
미운 그 남자.
=========
+ 성공시대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
+ 나를 낳은 달
나를 낳은 건 흙이나 학교가 아니었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소리치며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달, 그녀의
깊은 주름살을 오늘은 어머니라 부른다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의 꿈과
날마다 알을 낳는 힘과
밤마다 사랑을 만드는 눈물을
그녀가 아니면 어디에서 배웠으랴
모든 생명을 온기로 품어
살아있는 대지의 체온
모든 상처를 맑게 씻어
결국은 빛나는 생명의 눈부심을
나를 낳은 달,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으랴
지난여름 매미채 하나씩 들고
도회로 떠난 아이들은
고향에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거인이 되었다지만
그래서 기쁘고 쓸쓸한
나를 낳은 달
가을 창가에 홀로 핀 꽃처럼
환한 웃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
+ 당신의 냄새
말갈기 날리며 천 리를 달려온 말이
별빛 땀을 뿌리며
멈춰 설 때
풀밭에서 쏴아 하니 풍기는 냄새
숲 속에 살고 있는 안개가
나무들의 겨드랑이를 간지를 때
푸른 목신들이 간지럼을 타며
소소리바람을 일으키는 냄새
물속에서 물고기들의 비늘이
하늘을 나는 새들의 깃털과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출 때
땅 속의 뿌리들도 그걸 알고
저절로 어깨를 들썩이는 냄새
꽃이 필 때
발그레 탄성을 지르며
진흙들이 내뿜는 냄새
당신의 냄새는
내가 최초로 입술을 가진 신이 되어
당신의 입술과 만날 때
하늘과 땅 사이로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 냄새
-------------------
+ 떠오르는 방
허허벌판에 누워
깨끗한 남자를 기다린다
불꽃이 울면서 짐승같이
젖무덤 속으로 기어든다
나무들은 간지러워
푸른 소리를 지르고
드디어 그 남자가
길을 무찔러오는 소리
부끄러운 머리채를 이끌며
내가 어둠과 함께 도망친다
바람 지나가면
날개가 크게 걸리는
거미줄을 타고
얼굴 모르는 산과 만난다
뱀과 미친 깃털이
낄낄거리며 흩어진다
모든 것을 용납하는
그 야수의 무덤 속으로
나는 바삐 숨는다
---------------------
+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 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 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
+ 알 수 없었다
진실로 내가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매끄러운 떨림은 무엇인가
방울뱀처럼
나는 늘 내가 두려웠다
내가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군집을 벗어나
뱀처럼 자갈밭을 온몸으로 밀고 가 보아도
맹독(猛毒)으로 꽈리를 틀고
시간을 통째로 녹이며 허공을 울어 보아도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오직 빛나는 질주가 되고 싶은
아름답고 시퍼런 비늘
알 수 없었다
입술 붉은 장미를 씹으며 방울 소리를 내며
빗금 찬란한 상처가 전부일뿐이었다
진실로 내가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눈에는 안 보이는 이 슬픔의 덜미는 무엇인가
왜 치명의 고독 속에 꿈틀거려야 싱싱한 생명일까
언제나 나 홀로가 전부여야 할까
-------------------
+ 어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셔요.
그 하나
그것은 生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들은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습니다
--------------------
+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 축복의 노래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 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
+ 감옥문을 열며
그가 다녀온 감옥은 어떤 곳일까
내가 알기로는
감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인데
그는 그곳을 다녀온 죄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면 재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젊잖게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를 보면 가끔 감옥은 그리운 곳이 될 때가 있다
그는 거기서 살아 있었고
밖에 있는 우리들이 그물에 갇혀
죽은 듯이 입 다물고 있었으니까
우리들이 잘 길든
고기떼들이 되어 있는 동안
그는 키가 훌쩍 커지고
눈빛 맑은 수말이 되어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감옥을 지니고 있다는데
오늘은 내 감옥 문부터 활짝 열어 버릴까 보다
위험한 나를 놓아줄까 보다
=============
+ 꼬리를 흔들며
비밀이지만 나의 엉덩이에 꼬리가 하나 생겼네
이렇게 고백하면 사람들은
당신도 이젠 기교가 제법 늘었다고
말하겠지만
엉덩이를 직접 보여드릴 수도 없고
안 보이는 것은 그냥 믿어주는 게 상책이지
결국 날개는 안 생기고 꼬리가 생겼네
나는 이 꼬리가 싫지 않네
은근히 한 번씩 건드려보기도 하지
날개는 위험하지만
꼬리는 잘 흔들면 출세도 한다지 않는가
꼬리라는 말이 우선 맘에 드네
꼬리 꼬리 하고 입술을 자꾸 오므렸다 펴면
매우 인간적인 재미에다
꼴찌나 밑바닥이 주는 안도감마저 있어
본질에 닿은 듯
패잔병의 흉터 같은
아니 귀여운 여우 같은 꼬리
사랑하는 이 앞에서 슬쩍 흔들면
이 꼬리 붙잡으며 제발 떠나지 마라
애원해 줄까
오, 비너스에게도 없는 꼬리
나에게 생겼네
이제 이 꼬리 흔들어 당신을 잡아볼까
-----------------------
+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
+ 사과를 먹듯이
가령 사과를 먹듯이
시간을 그렇게 먹다 보면
1년 내내 땅이 보호하고
햇살이 길러낸
한 알의 붉은 사과를 먹듯이
그렇게 조금씩 향기를 먹다 보면
그 향기로 사랑을 시작하고
그 빛깔로 사랑을 껴안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처럼
푸르게 다시 태어날 수도 있으리
또한 그 힘으로
지상의 우울을 조금씩 치유하고
고즈넉한 웃음들을 만들기도 하리
가령 한 알의 사과를 먹듯이
그렇게 조금씩 향기를 먹다 보면
한 권의 책을 먹다 보면
열다섯 해쯤 그렇게 맛있게 먹다 보면
-----------------------
+ 새우와의 만남
손에 쥔 칼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에게 선뜻 칼을 댈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 속에
그는 분홍 반달로 누워 있었다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대와
하늘 한가운데 3만 5000피트
짙푸른 은하수 안에서 만난 것은
오늘이 칠월 칠석이어서가 아니다
그대의 그리움과 나의 간절함이
사람의 눈에는 잘 안 보이는
구름 같은 인연의 실들을 풀고 풀어서
드디어 이렇게 만난 것이다
나는 끝내 칼과 삼지창을 대지 못하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부드럽고 뜨거운
나의 입술을 그대의 알몸에 갖다 대었다
내 사랑 견우여
-----------------------
+ 커피 가는 시간
아직도 쓸데없는 것만 사랑하고 있어요
가령 노래라든가 그리움 같은 것
상처와 빗방울을
그리고 가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
밥보다 시커먼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몇 권의 책을 끼고 잠들며
직업보다 떠돌기를 더 좋아하고 있어요
바람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홀로 가는 별과 사막을
미친 폭풍우를 사랑하고 있어요
전쟁터나 하수구에 돈이 있다는 것쯤 알긴 하지만
그래서 친구 중엔 도회로 떠나
하수구에 손을 넣고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단 한 구절의 성경도
단 한 소절의 반야심경도 못 외는 사람들이
성자처럼 흰옷을 입고
땅 파며 살고 있는 고향 같은 나라를 그리며
오늘도 마른 흙을 갈고 있어요, 어머니
=============
+ 황진이의 노래
나는 바람인가 봐요.
담도 높은 대궐 안엔
문도 많은데
문마다 모두 열어젖히고 싶어요.
닿는 것마다
흔들고 싶어요
지체 있는 뭇별들을
죄다 따고 싶어요
아니어요
작은 햇살에도 얼굴 부끄러운
풀꽃 같은
사랑 하나로
높은 벽에 온몸 부딪고
스러지고 싶어요.
--------------------------
+ 갈대숲을 지나며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었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지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 버릴 뿐이지
---------------------------
+ 땅에서 나온 사람
아들아, 너를 어이 땅에 묻으리
꽝꽝한 땅에다 네 맑은 눈을
아침 햇살 빛나던 은구슬 치아를
벌써 책장 넘기던 의젓한 일곱 살
아까운 내 보배를 어이 묻으리
하늘이 가라앉고
땅 위의 모든 온기가 사라졌도다
이 목숨 끊어지는 날까지
다시는 입을 일 없는 아비의 비단 도포
언 땅에 깔고
올올이 애통한 어미의 속저고리 벗어
너를 싸노니
너 죽인 병도 여기까진 따라오지 못하리
어미 아비 검은 숯이 되어
천 길 절벽 굴러 떨어질 때
해와 달도 함께 꺼져버렸으니
시간이 어디 있어
내 아들을 범접할까
-------------------------
+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한다.
--------------------------
+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 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십 년 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 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
+ 중년 여자의 노래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이상한 계절이 왔다.
아찔한 뾰족구두도 낮기만 해서
코까지 치켜들고 돌아다녔는데
낮고 편한 신발 하나
되는 대로 끄집어도
세상이 반쯤은 보이는 계절이 왔다.
예쁜 옷 화려한 장식 다 귀찮고
숨 막히게 가슴 조이던 그리움도 오기도
모두 벗어버려
노브라 된 가슴
동해바다로 출렁이든가 말든가
쳐다보는 이 없어 좋은 계절이 왔다.
입만 열면 자식 얘기 신경통 얘기가
열매보다 더 크게 낙엽보다 더 붉게
무성해가는
살찌고 기막힌 계절이 왔다.
---------------------------
+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 할머니와 어머니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조심” 성가시게 한다
----------------------------
+ 남한강을 바라보며
나 떠난 후에도 저 술들은 남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겠지
나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술에 취해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이겠지
혀끝에 타오르는 불로
아무렇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쓸쓸함으로
시를 쓰겠지, 나 떠난 후에도
꿀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거리를 비틀거리며
오늘 나처럼 돌아다니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
+ 첼로처럼 살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
+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 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
+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
+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으로 들어와
부질없는 나뭇잎들
한쪽으로 쓱쓱 치워주세요
언뜻 보면 아까워 보이지만
습관뿐인 저 거실의 꽃병
먼지 앉는 의자를 치워주세요
추억만을 되감는 시계가
다시 새 비둘기를 낳을 수 있도록
태엽에도 숨결을 불어놓아 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깊고 쓸쓸한 뒷모습들
쓸어내 버리고
눈부신 새 물길을 내어주세요
-------------------------------------------
+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 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 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 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
+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___ * 50
응
흙
가시
고독
남편
-------
독거
등불
오빠
유방
찬밥
--------
치마
탯줄
늙은 꽃
비망록
오십 세
----------
자살법
통행서
흐린 날
공중전화
소꿉장난
-------------
성공시대
나를 낳은 달
당신의 냄새
떠오르는 방
마흔 살의 시
-----------------
알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율포의 기억
축복의 노래
감옥문을 열며
--------------------
꼬리를 흔들며
남자를 위하여
사과를 먹듯이
새우와의 만남
커피 가는 시간
---------------------
황진이의 노래
갈대숲을 지나며
땅에서 나온 사람
유리창을 닦으며
조등이 있는 풍경
------------------------
중년 여자의 노래
키 큰 남자를 보면
할머니와 어머니
남한강을 바라보며
첼로처럼 살고 싶다
----------------------------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