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손을 잡자, 그대여
처음엔 시계처럼 두근거리며
다가서던 너
그렌데 어쩌자고
서른도 막바지에
여기
날 세워두고
새끼들까지 주루루 매달아 놓고
이렇게 뒷발길로 차버리는 거냐?
-------
+ 별
내가 별을 부르면
별은
아름답고 슬픈 응답을
보내온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선 채로
지상의 별이 된다
발 하나가 되고
별 둘이 되고
큰 별 하나로
함께 부서진다
-------
+ 새
새는 죽어서 무엇이 되는가
그의 날개는 자유가 되고
깃털은 부서져서 햇살이 되는가
하늘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적막이 되고
날카로운 부리는 아름다운 칼이 되는가
그의 울음은 무엇이 되는가
아침마다 나의 잠을 깨우던
그 슬픈 울음
새는 죽어 바람이 되고
그 울음은 남아
우리들의 오랜 시간이 되는가
--------
+ 섬
홀로 마시는
술잔 속에는
섬 하나 떠서 흐른다
거치른 희망
차가운 소용돌이
넘실대는 물살을 가르고
섬 하나 떠서
넓고 넓은 바다를 베어 먹는다
오늘 그 섬에
또 상여 나갔다
======
+ 고철
어느 해 겨울 김수영 무덤엘 갔었지
말라비틀어진 풀 위에
담배 한 대 피워 올려놓고
망연히 앉아 있었지
북풍에 산들은 얼어 두터운 외투를 입고
그래도 몸이 떨려
희끗희끗한 눈을 두르고 있었지
우리는 보았지
시비詩碑에 박힌 그의 얼굴이
휑하니 허공으로 뚫려 있는 것을
누군가 수영의 얼굴을 파내서
고철 값으로 팔어먹었지
황량한 겨울이 누르고 있는
마을 뒷산
풀들이 말라 비틀어진 무덤을 내려오며
우리들은 모두 말을 잃었지
뚫린 구멍 속을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안다는
그런 바람이 날고 있었지
----------
+ 권태
피 한 툴
끓는 여름날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배 위에
진종일 뱀눈으로 떠 있는 태양
그 징그런 사내
밀치고
드디어 도회로 도회로 돌진하였다
흰 뿌리가 솟도록 이를 깨물었다
----------
+ 귀향
오빠
그만 돌아갑시다
잔등 무너지는 피로와
코피 흐르는 노동
숨겨도 숨겨도 터져나오는
바튼 기침 소리 같은
그 굴욕 모두 끌어안고
그만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고향은 금의환향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니고
떠돌다 떠돌다
지쳐 돌아가는 그런 곳이지요
밑바닥 뒤지는 천덕꾸러기
혀 꼬부라진 재미교포
마천루처럼 허망한 백만장자 꿈
다 잊어버리고
재말랄 것
그만 고향 가서 우리끼리 찌들리며 삽시다
눈만 뜨면 낯선 물체들이 반짝이는
이 마법의 도시를 떠나
오빠
뱃속부터 낯익은 우리집으로 돌아갑시다
가서는 엉엉
서로 엉겨 붙어 한바탕 울고 나서
온갖 낯선 것들
이제는 제발 저만치 밀어버리고
오빠
찌들려도 우리끼리 살아갑시다
----------
+ 기타
내가 떠난 것은
세상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각형 속에 갇힌 추억, 잘 길들여진 날렵한 몸뚱이,
뿌우연 반공교육 따위...
그런 것들을 말갛게 헹구기 위해서였다
툇마루에 걸어놓은 사진틀 위에 닥지닥지
눌어붙은
파리똥처럼,
내 혀 위에 눌어붙은 날강도들을 없애기 위해
가슴 벅찬 처음의 그 순수한 이름자만 남기기 위해
투명한 하늘을 보기 위해
삐걱거리는 뼈를 이끌고
주저하며, 그러나 이를 깨물며
드라이크리닝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했다는 그곳 지상
의 밀키웨이로 떠나갔다
가서 나는 그만 멈춰 서버렸다
내겐 행굴 것이 없었다
추억도 피리똥도 땟국물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먼지조차 아닌, 아아 그곳에서
나는 기타였으므로
=====
+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 매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 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
+ 대창
ㅡ강원도 산골에서 죽은 소년에게
한 산골의 소년은
하룻밤에 난데없는
대창에 찔리워 죽었다
대창은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념을 찔렀지만
소년은
소년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글을 깨우칠 때부터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그는 그것이 죽음과 바꿔야 할
엄청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소년은 소년밖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한 산골의 소년은
하룻밤에 난데없는
대창에 찔리워 죽었다
소년은 죽어
동상이 되었지만
동상의 머리 위엔
수많은 상천이 걸렸지만
그에게는
강원도 산골에서 나서
하룻밤에 난데없는
대창에 찔리워 죽었다는
하얀 결 과만이 그의 것이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전한 것 때문이었다는
슬픔조차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소년밖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
+ 등산
ㅡ베어 마운틴에서
소나기 번개에도
꺼덕 없는
바위와도 같은
사랑
비로소 여기 와서 본다
봄날, 새 옷 갈아입어도
슬픈 어머니의 산천
-----------
+ 두엄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 삭아 내린다
폭영 아래
두엄이 삭아 내리듯
이렇게 삭아
무엇이 되는가
우리는
술이 되는가
배꼽이 되는가
사랑이 되는가
바람은 불고
======
+ 먼지
한국 냄새 그리워서
공항에 나간다
쏴아 하니
밀려오는 낯익은 방언
투박한 질그릇에
곰삭은 눈들
열여섯 하숙 시절
남광주역 대합실서
내 고향 보성 냄새 맡았었는데
서른여섯 그 여자는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점보기 은날개 퍼득이는
잔 케네디 공항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한국 먼지 하나 주워들고
혼자 서 있다.
이 먼지에 기대여
석 달 열흘은 또 살아 내리라
---------
+ 바닥
나는 바람이 나서 어느 날
대양 한가운데까지 떠밀려 갔다
이 세상 온갖 해를 씻어 올리는 곳이었다
맨 몸뚱이로 바닥에 가라앉았다
우울의 끝의 끝, 참패와 고독으로
나뒹굴었다. 뼈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그러나 죽지 않고 탕아처럼 돌아가리라
이왕이면
이 세상 처음인 길로 가리라
-----------
+ 박쥐
내 은가락지 속에 갇힌
박쥐 한 마리
조선 시대부터
두 날개를 펄치고
밤마다 허방을 파득이고 있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적부터
삼대 시대 오대를 퍼득이고 있다
----------
+ 배추
머리카락마다 매달린
무거운 소금기
그래
김치가 돼도 좋으리라
맵고 편한 사랑으로
아주 삭아도 좋으리라
훌훌대는 피로
속절없이
======
+ 소식
오늘도 세상의 기쁜 일은 많다
어느 집에는 아기가 태어나고
누구네 꽃밭에는
간신히 실눈 뜨고 꽃도 피었다
시간이 이글거리는 창가에서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새로 사랑을 시작하고
새벽녘에 마른 번개가
잠시 쳤던 것은
밤새 고통하던 시인이
드디어 그의 새 시편에
뚝! 하고 싱싱한 마침부호를
찍는 소리였다
오늘도 이렇게 기쁜 일은 참 많다
천길 낭떠러지
짐승들 우글거리는
이곳에서도
----------
+ 소포
이곳에 제일 흔한 거 하나 싸 보낸다
불고기가 햄버거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자유
햄버거가 불고기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자유
여름에 겨울옷을 입을 수 있는 자유
겨울에 여름옷을 입을 수 있는 자유
너는 내 애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유
나는 그의 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박수를 칠 수 있는 자유
박수를 안 칠 수 있는 자유
아우야, 다행히 너무 가벼워서
우편요금도 아주 싸구나, 그런데
보내는 마음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구나, 낯선 거리를 아무리 걸어 봐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다
혹시 수취거절이나 하지 않을까 저어 되는구나
미국에서 누이가
------------
+ 시간 1
너의 눈썹을 만져 본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찰나
언제나 숫처녀인 그대의 몸을
신 앞에 두 손 한 번 모은 적 없는
내게 무슨 은총으로
이러히 두려운 신방을 주는가
그 앞에 떠는
나는 짐승이다
손만 닿으면 눈 녹듯 옛날이 되고 마는
섬뜩한 촉감이 떼밀리어
나는 뜻 없이 깊어만 가는데
모르겠다
다만 아느니
어느 날 네 솜털 한 올 내 눈 쑤시어
나는 소멸하리라
------------
+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게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 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
+ 악몽
마른 번개를 맞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다
내 안에는
세계지도보다도
더 수많은 길이 있어
온 뼈마디 부서져
모래가 되도록
폭삭 무너져 내렸다
---------
+ 얼음
내 속마음을 모르겠다
이른 봄
새의 소리
흙의 설레임에도
몸을 풀고
햇살의 눈짓에도
그리움 그대로 어지로운
나를
끝내 옷을 입지 모사고
비수를 반쩍이는 이 살들을
나는 정말 모르겠다
---------------
+ 우기雨期
어머니
지금 어디를 걸고 계시나요?
백내장을 앓아
앞이 안 보이는 당신을 버려두고
나는 점보비행기 타고 떠나 왔어요
지팡이도 없이
허공 휘저으며
흰 고무신 타박거리는 당신을 두고
왜 여길 왔는지 나는 몰라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쌍둥이 빌딩
서양여자처럼 멋지게 굴러보는
꼬부랑 말도
밤낮으로 구경하는 브로드웨이도
이상해요
언제나 물기에 젖어 있는것은
당신의 눈에 맺힌 물기
세계의 비가 되어 흘러 내립니다
부러진 허리에 지팡이도 없는
허공 휘젖는 당신은
흰 고무신 타박거리며 바람을 재우지만
어머니
왠일일까요?
이곳은 제게 온통 우기입니다
-----------
+ 이응
빙판에 홀로 서 있었다
쉴 새 없이 흔드는 낯선 바람에
나는 처녀로 서 있었다
낯선 태아를
끝내 회임하지 않고
하늘의 달도 오(o)가 아니라
이응으로 걸어두고
노오랗게 수절했다
=====
+ 젊음
어서 오너라
두둑 맞듯이 있다 가거라
내 등에 뜨거이 얹혀 있을
소름 돋는 시간의 무게
피를 뽑아주라
검은 새에게 온통 먹히리라
마른 포처럼 바삭이는 손과
흐트러진 몇 날의 머리칼만 남기리라
무엇이 모자라서
아직도 온몸퉁이에 붙어
나를 달구는
아아, 이 원수 같은 햇살은
----------
+ 편지
ㅡ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여덟 어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 하나
그것은 생生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들은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습니다
----------
+ 풀빵
입만 벌리면
풀풀 시가 쏟아져
들키면 큰일나는
시가 쏟아져
풀빵이나 먹고
입은 봉하고
배나 채우자
시인아
-----------
+ 형제
별도 없는 밤
형제가 밤길을 간다
어디 만큼 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 만큼 ㅇ왔냐?
당당 멀었다
키 큰 산그림자
검게 드리운
무섬중 조여드는
소름 돋는 밤에
가슴은 타들어가
마른 씨앗이 되었는데
아우는 겁도 없이 하늘을 보며
끝없이 끝없이 소리 지른다
아우야
내게 늘 속았던 아우야
새벽은 언제쯤 떠오를 것이냐?
=======
+ 고양이
고양이가 눈가리고 아웅을 한다
누가 모르나
손바닥 같은 세상, 다 알지
고양이가 눈가리고 야웅을 하며
나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라 한다
아흐!
고양이가 호랑이라 하나도
야웅 야아오웅
천지에 가득한 고양이 울음소리
세상 눈가리웠다
-------------
+ 나팔꽃
둔덕에 나팔꽃이 하나 피어 있었다
고향집 뒷담에 피던 나팔꽃이
내 마음 알고 먼저 와 거기 피어 있었다
하관을 할 때
줄곧 나팔꽃에 눈 맞추고 있었다
"시詩란 저런 것일까...."
어머니를 땅 깊어 내려놓고
우리는 방부제 섞인 흙을
한 삼씩 떠 부었다
우리들의 마음은 방부제였다
"썩지 마세요 제발 썩지 마세요"
"썩으세요 부디 잘 썩으세요"
이 커다란 두 개의 하늘 사이를 비둘기들이
구구 울며 날아다녔다
어머니라고 하는 흙
어머니라고 하는 검은 인화지에다
우리는 절을 했다
나를 싸고 있던 배춧잎이 벗겨져서
나는 등이 시러워 떨기 시작했다
산역의 삽이 민첩하게 나팔꽃을 떠서
봉분 위에 거꾸로 쳐 울렸다
아아, 방부제 뿌려 놓고
나팔꽃 하나에다 마음을 묶어
아침저녁 바알밭 어머니를 끌어안으려던
나는 무참하게 찢기워져
울며 울며 산을 내려왔다
-------------
+ 무궁화
꽃을 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중중모리 삼삼한 가락 흔들고 있다
말 못할 몸짓
흰 꽃으로 피워 놓고
가슴속에 모닥불 피워 놓고
날 보고도 말도 걸지 못한다
이국땅 골목길에 무궁화가 피었다
-------------
+ 새 주소
가령 별이가거나
길이라거나
우리들의 시선이라거나 하는
낯익은 풍속에
그만 작별을 고하고 싶다
어느 나라 어느 산맥을
자비하신 신의 손길도
씻을 수 없는 죄의 여자
빛나는 칼날 위에 춤추며
맨살 흐려내는
푹풍 같은 무녀의 피
그런 속도 속에 서 있고 싶다
늘 불렀던 이름으로
부르지 말 것
친애하지 말 것
========
+ 조각달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피 말리는 기억으로
하얗게 뜬 새벽
거짓말처럼
죽은 자들 속으로
당신은 떠나가고
나는
하얀 과거 하나 더 가졌다
당신 묻을 때
내 반쪽도 떼어서 같이 묻었다
검은 하늘에
조각달이 피었다
-------------
+ 할미꽃
이곳에 이르러
목숨의 우레 소리를 듣는다
절망해 본 사람은 알리라
진실로 늙어본 이는 알고 있으리라
세상에서 제일 추운 무덤가에
허리 구부리고 피어 있는
할미꽃의 둘레
이곳에 이르면
언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꽃이란 이름은 또 얼마나
슬픈 벼랑인가
할미꽃
내 자줏빛 숨결에
태양이 가라앉는다
--------------
+ 흡혈귀
나는 흡혈귀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흡혈귀와 살고 있다
어릴 적 광주 천일극장에서 본
무서운 드라큘라가 그일까?
남의 피를 먹고 제 생명을 연장하고
남의 살에 박혀 살아가는 시뻘건 이빨
머리칼 하얗게 센
저녁마다 시시덕거리는 낙조 그늘에
그이 꼬리가 잠시 비칠 뿐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흡혈귀와 붙어
밤마디 지지지 전기를 일의킨다.
그에게 피를 빨리우고 나면
나는 어지러워
언제나 하얀 재가 된다
놓아다도 흡혈귀여
전지사방의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그곳에 서 있는
흡혈귀의 눈
무슨 부적을 붙여야 할까
무슨 울음을 울어야 할까
뼈까지 갖다 바칠까
불타버릴까
흡혈귀여
흡혈귀여
아흐흐흐! 나는 너의 흡혈귀이다
--------------
+ 검은 이브
ㅡ뉴욕의 수치스런 명물 타임스퀘어에서 라이브쇼를 하는 흑인 창녀
를 위하여
검은 이브를 아시나요?
발거 벗고 사는.....
조개를 긴 손톱으로 까발리면
오오 잔혹하게
떨어지는 장미
검은 대륙에 피어나는
한떨기 별을
그곳은 왕자 혼자 사는
고고한 성이 아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주소
홀로 돌보며
완전한 자유 부드러운 유영을 걷는
검은 이브를 아시나요?
신의 촉감을 쥐고 노는 그녀에게
사람들이 던져 올리는
온갖 색실의 밧줄
맨몸으로 받으며
밧줄은 오히려 세상을 감아
세상은 걷히고
그녀 혼자 남는
검은 이브
그녀와 한 번 죽고 싶지 않으세요?
=========
+ 돌아가면
돌아가면 전라도 살리
언 흙을 박차고 나오면서도
소리 한 번 치지 않는
풀꽃들 하며
못 하나 없이도
제 몸 뽑아
허공에 궁전 세우는
풀거미들 하며
이 세상 모든 행렬에서
짐짓 벗어난 느린 사투리 쓰며
흰 옷 입고 내 고향
전라도 살리
돌아가면
한 석 달 잠자고 일어나
내 고향 전라도 살리
---------------
+ 비의 사랑
몸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과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 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과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
+ 소꼽장난
사랑하는 그 애
오래 물속에 같이 살고 싶은
물고기 같은 남자
글쎄, 일곱 살에 벌써 사내가 된
미운 그 남자.
"너는 얼마고 나는 아빠다"
꽃잎 빵아 김치 담아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리고 그 담엔 할 일이 없어
조금 생각해 보다가
엄마 아빠처럼 포개 자버린 애
사랑하는 그 애
맹수 같은 한숨 후루룩 몰아쉬며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폭풍우
글쎄, 그 속에 내 생애를 사납게 가둬버린
미운 그 남자
-------------------
+ 시를 쓰며 1
수십 년 견디어 온 천수답에
남몰래 채워 놓은 푸른 수심
날 흔들지 마
나의 울음보
===========
+ 시를 쓰며 2
껍질을 벗는다
과육 속에 숨은
쓰라운 노을
꿈이 향기를 내뿜는다
-------------------
+ 시를 쓰며 3
산록 우거지니
소처럼 건강한
사투리로
사랑하고 싶구나
-------------------
+ 시를 쓰며 4
오, 파산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얼음장 갈라지듯 내 온몸에
아름다운 피금 그어지다
---------------
+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난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한 일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
+ 어느 시인
초식동물, 그는
장미와 새들에게
늘 쫓기었다
입에서 별들을
쏟아 놓으라고
늘 하얀 벙이리였다
----------------
+ 어느 침묵
서릿발 거두고
돌아서 버렸다
네 가슴 한 치를 쑤시고 나면
내 가슴에 두 치의 상처가 생기는
그 뜨겁고 날카론 칼
높은 시렁 위에 모두 올려놓고
사방에서 우는 징소리에도
나는 눈짓 하나 보내지 않는다
----------------
+ 일시 귀국
초가을 빗속에 돌아왔다
오래오래 참다가
함성도
노도도 되지 못하고
물이 된 비
공항에서 받아 든
모국어 신문 속에
그 비는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
+ 카페애서
무언가
출렁이고 있다
눈길만 닿아도
상처 입는다
시멘트 맨바닥에
내팽겨처진
담수어들
파득이며
파득이며
죽음처럼 무거운 찻잔을
들어 올린다
=========
+ 타국에서
친구여
나는 시방 답장을 쓸 수 없다
나라를 떠날 때에
나라 말도 함께 그곳에 두고 왔으므로
펄펄 살아서 뛰는 말은
위험해서
골방에 자물쇠로 깊이 잠가두었고
이곳저곳 떠돌아
거품이 된 것들만
편리한 친구에게 남겨 두었다
친구여
그래서 시방은 답장을 쓸 수 없다
해 뜨고
새가 나는
이곳에서도
내 말은 모두 그곳에 있으므로
---------------------
+ 가을이 왔다 1
가을
너 또 오는구나
그래 정면대결이다
무슨 원수처럼
너와 이렇게 몇 번만 더
대결하고 나면
소리도 없이 나는 가리라
그러면 가을
너는 남아
또 다른 타관의
빈 가슴을 적시우리라
태평양 대서양 다 건너도
마르지 않는
가을
너 참 낯익은 이름이구나
----------------------
+ 가을이 왔다 2
옆으로 서 주세요
무주 보면
너무 눈부셔요
머리칼 날리며
하늘은 자꾸 수척해 가요
저 유치한 것들이
조금 후면
글쎄, 모두 씨방이 있는
여인이 되고
그리고 조용히
대지에 누워요
-------------------
+ 만월 앞에서
술잔을 부딪듯이
그냥 그렇게 지나쳐 버릴까 보다
조금만 더 다가서면
쏟아져 내릴
우리들의 열광
위태하게 받쳐 온
목이 긴 유리잔에 그대로 담고
허세이듯
별을 떨구며 잔을 부딪고
입술을 조그만 추기듯이
그냥 그렇게 스쳐 버릴까 보다
이 어지러운 절벽
===========
+ 보석의 노래
만지지 말아요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오랫동안 숨죽여 울며
황금시간을 으깨 만든
이건 오직 나의 것이에요
시리도록 눈부신 광채
아무도 모르는
짐짓 별과도 같은
이 영롱한 슬픔 곁으로
그 누구도 다가서지 말아요
나는 이미 깊은 슬픔에 길들어
이제 그 없이는
그래요
나는 보석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
+ 어린이날에
별내음 나고
달매음 나는
우리 새끼들아
엠파이어스테이트보다 더 높은 집에서
나이아가라보다 더 큰 목청으로
자유의 종 따위보다 더 뜨거이 우는
에밀레....
우리 새끼들아
옹골진 씨앗 하나 터뜨리라
세계에서 제일 매운
나무로 자라거라
불쌍한 반도의
내 새끼들아
-------------------
+ 절망의 노래
하나하나
웃을 벗는다
처음 맞대 보는 하늘에
속살을 떨며
땅바닥에
깊은 배를 깐다
아, 몸이란 얼마나 슬프고
가벼운 것인가
두 다리로 서는 일이란
또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
아무 말도 말라
옷을 벗고 맨몸으로
언 땅바닥에 누워
부스스 깃털이 돋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지금 까만 헤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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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를 보며
동해로 동해로 동해
거기
새우처럼 누워 있는
우리나라
그래 안다
등 터지고 부서진 늑골
그러나, 하늘과 땅 사이
가장 슬픈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에 가서
나도 한 마리 귀신이 되리라
모든 기교와 그림자 벗어버리고
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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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국의 거리
꿈에도 본 적 없는
낯선 시간 낯선 햇빛을
툭툭 치며
빈 거리를 기웃거렸지
집 잃어 더러워진 위험한 개처럼
헐떡거리며
내팽겨쳐져 살았지
늑대가 계수나무를 잡아먹는
개기일식
고향에는 배반만이 무성했지
어깨 늘어진 떠돌이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주어
편안했지
하루에 스물네 번 하고도
서른 번이 더 추웠지
뼈가 삐걱거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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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기 속에서
불면이로다
허공 뛰어와
나를 때리는
수천 타래
수은水銀의 질타
비로소 열리는구나
그대의 얼굴
푸른 이마로 떠오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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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섣달 그믐달 밤에
ㅡ뉴욕에서
사랑하고
뜨거이 용서하고
고즈넉한 우리들의 삶
하나의 테이프로 눈뜨고 있다
두고 온 고향에는
먼 하늬바람 그치지 않고
아직도 이 거리엔
숨죽이며
끝없이 아픈 신설이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여
힘 모아 잡았던 우리들의 젊은 손목
열망으로 설레었던 얼굴
서로 지그시 올려다보며
이 밤엔
옷깃 여미고 기도해야 하리
창호에 불 켜듯
추억들을 불켜 놓고
그 곁에다 나란히 꿈도 걸어 놓고
이제
더 큰 종을 울리기 위해
하나의 나이테가 눈뜨고 있는
이 밤엔
조용히 기도를 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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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구리참외 먹으면
고향땅이 떠오른다
나는 늙은이들의
열두 살 난 막내딸
해는 떠서 노오랗고
거치른 보리가시
온 동네를 날아다니는데
뒷산 밤나무엔
칠푼이 노총각 알밤이가
목을 매달아
진종일 까마귀가 울던
고향땅이 떠오른다
개구리참외 먹으면
30년 생애가
불도저에 밀리듯 무너지고
개구리들이 악악 울고
옛날이
불끈불끈 힘줄처럼 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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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을 위한 처녀의 노래
나는 새인가 봐요
천년 묵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바다에 가고 싶어요
바다에 가서
그중 예쁜 짐승 하나 만나고 싶어요
지뢰가 묻혀 있는 들판에서
포로롱 거리며 살고 싶어요
독이 있는 빨간 열매도
따고 싶어요
아침이 오면
고압서 위에 두발을 얹고
이 세상 가장 슬픈 소리로 울고 싶어요
아니어요 아니어요
은으로 된 작은 새장에
그만 순하게 갇히고 싶어요
____ * 61
길
별
새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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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
권태
귀향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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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못
대창
등산
두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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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바닥
박쥐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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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소포
시간 1
시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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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얼음
우기
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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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
편지
풀빵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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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나팔꽃
무궁화
새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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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달
할미꽃
흡혈귀
검은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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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면
비의 사랑
소꼽장난
시를 쓰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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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며 2
시를 쓰며 3
시를 쓰며 4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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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
어느 침묵
일시 귀국
카페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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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
가을이 왔다 1
가을이 왔다 2
만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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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의 노래
어린이날에
절망의 노래
지도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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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의 거리
소나기 속에서
섣달 그믐달 밤에
개구리참외 먹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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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을 위한 처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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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