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용 5
몸을 움직일 때마다
깊고 진하게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고통받고 있는 것 알면서도
평화는 돌아와주지 않던
무용수의 절망을 본 적이 있어.
몸부림칠수록 작아지고
어두움이 두껍게 칠해지던
무용수의 꿈을 본 적이 있어.
두 팔을 높이 울렸다.
두 손을 폈다.
머리를 치켜들었다.
온몸을 흔들었다.
어둡다, 어둡다.
흔들다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무대의 전면이 흔들리고
소름끼치게 무서운
무용수의 자유를 본 적이 있어.
두 눈에서는 불빛이 뻗던
자유의 뜨거운 얼굴을 본 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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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1
나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밀은 죽을 수가 없으니까
오래 숨막히게 숨겨온 비밀은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몸을 빠져나와 꽃에게 갈 것이다.
꽃잎이 아니고 그 향기에게 갈 것이다.
땀에 절어도 늙지 않는 비밀은
죽을 줄을 모르니까
해방이 되어 불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침내 잠들어도
세상은 아직 밖에서 밝게 빛나고
비밀은 묵묵한 장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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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2
우리들 비밀은 갈대밭이야.
바람보다 더 가벼운 갈대밭이야.
아무리 흔들려도 소리내지 않는
꺾어진 빈 대궁이의 없는 공기야.
그래서 그것은 보이지 않고
우리를 미행하는 그림자일 뿐,
미행하는 그림자의 없는 흔적이야.
겨울이 또 우리를 지나가는군.
안식의 깊은 겨울은 다 어디 갔는지,
이제는 말없이 매해 추위에 떨 뿐이지만
우리는 알아, 또 눈부시게 믿고 있지.
드디어 저 환한 비밀의 눈뜸.
내가 다시 영혼의 목마른 자유인의 되어
당신의 끝없는 갈대밭을 헤쳐가다가
내 눈을 뜨게 하는 당신의 몸짓.
꺾어진 비밀의 진한 육질이 흘러도
눈감지 않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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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3
비밀은 어디에 숨어 사는가.
보이지 않는 두 눈,
다갈색의 눈 속의 집,
우리들의 비밀은 다갈색이다.
그래서 우리 영생의 조각가는
수십 년 비밀같이 작아지면서
눈만 만들다가 눈이 부셔 죽었지.
그 무덤 근처를 걷는 비밀들의 속삭임.
불을 밝히는 우리들의 정체.
비밀은 어디에 숨어 사는가.
너와 나의 눈,
한세상의 속된 눈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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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1962년인가, 가을이있긴 하지만
경기도 고양군 손에 가득한 햇볕.
그 관사 앞에 핀 코스모스들에게
그해에 내가 약속한 게 있지.
졸업하면 나도 이 근체에 나와서
배운 재주로 꽃잎이라도 갈아
병난 아이들 돌보고 노래나 부르고.
천지의 정적이 잠자던 낮
새로 산 청진기를 목에 걸고 서서
그해에 내가 약속한 게 있지.
비록 이제는 갈가리 찢어졌지만
그 피는 아직도 내 몸에 숨어 흘러
가을이었긴 하지만 타국에서도
꽃잎에 앉아 있는 손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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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시
내가 내려가는 2병동 북쪽 의자에는
항상 장님 소녀가 그림같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미소하고 있다.
발소리에도 열일곱 살쯤의 미소,
2병동 북쪽 어두운 복도에서
소녀는 매일 무얼 보고 있을까.
나는 비행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책을 보고 있었다.
아니, 나는 물을 보고 있었다.
영등포 로터리에 아침부터 찬비 내리고
나는 비닐우산을 쓰고
간밤 숙취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진흙탕 군화에 고이는
빗물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무거워지고
오랫동안, 오랫동안 나는
빗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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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
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
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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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꽃
ㅡ영태에게
너는 나를 움직인다.
밤이거나 혹은 바람 볼 적마다
내 목을 가로 젓게 한다.
지천으로 핀 풀꽃의
이름은 아직도 모르지만
한 줄의 목마른 물이 되어
기억의 몸 속을 헤엄친다.
그렇구나.
짓밟혀진 꽃은
뿌리가 깊다.
어디고 깊은 곳에서는
모두 빈 가슴으로
힘들게 산다.
피해 없이는
사랑할 수 없구나.
피해 없는 것은
수채화일 뿐.
네 정신의 교회에서
지금도 흔들거리는
풀꽃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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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구리
1
예과 시절에는 개구리 잡아 목판에 사지를 못박고 산 채로 배를
째고 내장을 주물럭거리며 이것이 콩팥, 이것이 염통, 외워도 봤지
만, 개구리 뱃속의 구조를 알아보아야 그게 개구리와 무슨 상
관인가. 개구리는 자꾸 일찍 죽고 싶었겠지.
그때는 논발이었던 불광동에 나가 개구리 잡아 삶아서 뼈를 추
리고 그 뼈를 다시 탈색시키고 흰 매니큐어로 관절을 붙였지만. 그
희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골격도 역시 개구리와는 상관없는 것이었
군.
잘 가라, 눈에 문득 보이는 몇 개의 꽃들, 그 시절에 피 흘리고
물러나던 몇 개의 꽃들. 서로서로 상관없음을 알고 난 후에도 세련
되지 안았던 우리들의 아름다움과 용기여, 안녕!
2
개구리같이 산다.
배고플 때 먹고 밤 되면 자고
주말에는 뜨거운
찜질이나 하고.
적당히 낮은 물 속
적당히 높은 언덕
흰 머리칼이나 세어보고
잔주름 사이 로션이나 바르고
생각할 것도 없는 임기응변 연습.
목쉰 소리도 씻고 귀도 씻고
가끔 보리털이나 태워
숭늉이나 해 마시면서
맹물같이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연습.
개구리가 되어가는 수수께기
개구리가 되어가는 수수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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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낚시질
낚시질 한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 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평생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하다
문득 온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
+ 음악회
1
드뷔시의 등에
눈이 또 내린다.
1950년대의 막역한 친구들이
골방으이 외로움을 털고 일어나
백합을 본다.
젊은 여자는 대체로
동양이고 서양이고
나신이 더 매력적이지만
백합보다 어린 금발의 꽃을
나는고정시킨다.
2
청년이 된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크가
음악회장을 빠져나와
바이올린 모양의 정구채로
창창하게 정구를 친다.
나는 결정적으로 대결한다.
휴식 시간에는
戰亂의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닦는다.
3
내가 술만 마신 군대 시절에
분을 바른 고아들이
합창을 하면서 나를 위문했다.
모가지가 휘어지는 철모를 쓰고
나는 애매하게 위문을 받았다.
시뻘겋게 단 당직실 난로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혼이
벌써 석탄이 되어
뜨겁게 뜨겁게 타는 것을 보고
꽝꽝 얼어붙은 지상에도
불꽃이 퍼지기를 몰래 기다렸다.
-----------------------
+ 음악회 2
ㅡ피아니스트 패라이어
슬픔의 사랑스러움,
예감의 사랑스러움,
귓속에 가득 차는
소리의 사랑스러움,
발정의 사랑스러움.
사원과 호수와 요리, 혹은
십몇 년 전 명륜동 목욕탕 수증기.
졸소리와 숲의 정경, 혹은
서울 근교의 은행나무 이끼,
정경의 아름다움,
환청의 아름다움,
밤늦게 끝까지 들리는
발기한 소리의 아름다움.
=========
+ 음악회 3
근래의 마리지오 폴리니나
그 젊은 친구들의 음성은
이제 귀를 적시지 않고
머리털 끝에 이슬같이 묻어 있다가
내가 어두울 때 이마를 식혀준다.
많은 신경의 구름이여,
한때 못 견뎌한 사람 있었기로니
아직도 무심한 습기의 두 눈으로
깊고 먼 물 건너에서 흔들리기만 하고...
근래의 마리지오 폴리니나
그 젊은 친구들으이 율동은
온몸의 상처로만
나를 증가해준다.
-----------------
+ 가을 敍景
첩첩 깊은 산중 한구석에서 소리치고 찾아헤맨다. 비 맞고 눈 내
리고 바람 부는 온 계절을 헐어가는 짐승이 되어, 눈은 담아서 흐려
지고 발은 피멍이 들었네. 해가 바뀌고 아직 다 늙기 전에 나는 참
다가 이 가을에 모닥불을 붙인다. 바람이 분다. 불이 넓게 붙는다.
온 산에 외롭고 고달픈 영혼이 모두 불탄다. 산도 타고 나도 타고
천지를 깨끗이 한 뒤, 드디어 내 눈에 당신이 보이고 내가 연꽃의
밤낮을 뛰어 우리는 만나고 어루만지고 포기하고, 그러나 결국은
모두 타서 숯이 되어 우리가 손잡고 있으면 한 천년쯤 뒤에 그 숯을
태우는 젊은 애인들이 우리가 아직도 밝고 뜨겁게 타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리라.
-----------------
+ 겨울 약속
당신 허리 근처를
물어주겠다.
안식의 나이가 되면,
장갑을 껴도 까칠하게 트는
내 불면의 겨울손으로
당신 등을 쏠어내리겠다.
오래 내리겠다.
겨울밤의 정적 속으로
매해 참아오던 폭설처럼
당신을 덮어가겠다.
당신 기에 입을 대고
당신 입은 목에 대고
노래의 잔털도 보여주겟다.
그 겨울이 아무리 추울지라도
눈물은 눈물끼리 섞이게 하고
물은 물끼리 흔들리게 하고.
------------------
+ 꽃의 이유
1
어서 이리 오세요.
젖은 입으로 말해줄 때
나는 잠시 소년이 되어
당신의 나무에 오르는 이유는.
2
하느님의 꽃.
풀잎의 하느님.
살아 있는 꽃보다
꽃병에 선 꽃이
더 빛나고 아름다운 이유는.
3
그래서 우리도 헤어지고 말았네.
맹목이 될 수 없었으니까,
세상은 현명한 것보다 더 길군.
다시 머리를 빗질하고
바로크의 음악을 듣는.
==========
+ 꽃의 이유 2
내가 난 해는 1939년이지만
그보다 7,8년 전 내가 살던 곳에는
귀 아무리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가는 비가 며칠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러니까 창문이었겠지.
보랏빛 꽃이 안개같이 많아 보이고
빗속에서 그 꽃이 지고 있었다.
나는 문득 튼튼한 사내가 되고 싶었다.
-----------------
+ 나비의 꿈
1
남자.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헤매고 부딪치면서 늙어야지.
(외국은 잠시 여행에 빛나고
이삼 년 공부하기 알맞지
십 년이 넘으면 외국은
참으로 우습고 황랑하구나.)
자주 보는 꿈속의 나비
우리가 허송한 시간의 날개로
바다를 건너는 나비,
나는 매일 쉬지 않고 날았다.
절망하지 않고 사는 표정
절망하지 않고 들리는 노래.
2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몸으로
비가 오는 날 저녁
한국의 항구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낮선 길에 서 있는 목련은
꽃피기 전에 비에 지고
비 맞은 나비가 되어서라도
그날을 만나고 싶다.
------------------
+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네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피우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지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변경의 꽃
우리들의 의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흙 속에서
우리들은 매일 아침 눈떴다.
그러나 씨를 맺기 전에
바람에 날리는 꽃.
모든 열성의 꽃은
바람이다
모든 열성의 꽃은
바람의 연료다.
변경의 내막은
아직도 아픔이다.
만날 수 없는 망설임이
모두 깃발이 되어
높은 성루에서 계속
꺽이고 있었다.
우리들 몸 안에서 끝나는
열성 인자의 사랑.
아프지 않고는 아무도
불탈 수 없다.
===========
+ 善終 이후 1
1
밤에만 물래 박꽃이 피더라.
나이 들어 청명해지는 보름달.
아버지 만년의 불면증은
슴슴하게 숭늉 대접에도 보이고
몰래 숨어 보기에
오히려 마음 어두워지더라.
겨울에는 창호지 덧문을 닫고
질화로 잿가루를 자꾸자꾸
손끝으로 찍어내시더라.
불 꺼라, 이제 자자.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세상에서
크고 작은 세상의 煙滅.
2
당신을 본다.
당신을 본다.
만리 외국의 봄날 아침
낮은 안개의 속살거림,
밤새 흩어진 무변한 외로움을
두 손으로 빗어올리고
맑은 날 비상하는
새 한 마리.
-----------------
+ 善終 이후 2
1
피곤히 누우신 땅 주위로
작게 풀꽃으로 손짓하시다가
당신 영혼은 밤에 잠시
내 책상가로 산책 오셔
말씀을 주신다.
먼 길에도 숨결 고르시고
이승의 소리보다 몇 갑절 맑고 가볍게
당신은 미소하신다.
내 종신토록 더욱 가깝게 보이는
당신의 고운 늙으심.
2
등을 돌린다.
모든 사물의 의미에서
몸을 돌린다.
냉기의 잠자리가
아쉬운 꿈을 해산시킨다.
냉정하라.
꿈에 냉정하라.
문득 지표에도 없는 강신이
가슴 위에 서늘하게 선다.
--------------------
+ 善終 이후 3
당신의 웃음은
무기 물질이다.
불 태워도 타지 않고
땅에 묻어도 도저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악곡이 되어
깊이깊이 연주되는.
당신의 웃음은
내 거실의 창밖이다.
내가 당신을 내다볼 때
당신은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 안개도 하늘도 되는,
당신의 웃음은
어디에 가도 멀리 둘러싸는
내 풍경이다.
----------------
+ 善終 이후 4
가끔 당신을 만나요.
먼 나라 낯선 도시에
나는 지금 살지만
나늘 찾아온 환자 중에서도
비슷한 윤곽, 안경과 대머리
당신은 미소하시겠지만
나는 말없이 반가워서 속으로 울어요.
가끔 당신을 만나요.
외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고
가끔 당신의 살이 더 희어지고
눈이 파래지더라도
당신이 환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사이로
대견하게 나를 보시는 마음을 알아요.
고통을 끝없이 보는 고통을 아시지요.
두려움을 지키는 두려움의 계속
내가 그 안에서 세월 잃은 표정이 되면
어느 여가에 여기까지 오셔요.
창밖에서 빗속으로 불러주시는
한밤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 들어요.
==========
+ 善終 이후 5
혼자 계신 아버지를 꿈꾸다
잠이 깬다.
새벽 세시의 외국,
문득 창밖에는
오래 내리는 빗소리
내 잔등의 서늘함.
이해하기 힘들었다.
새벽꿈 어두움 속
내 잔등의 서늘함.
몇 해째 뜨거운 맹물을 마신다.
느끼지 못한 눈물이
물컵 위에 떨어진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떠나 있어도 편안했다.
잠 깨지 않은 시간에
돌아갈 짐을 싼다.
넣을 것 없는 보퉁이가
새벽비를 맞는다.
---------------
+ 아침 출근
이를 닦는다
지난밤을 닦아낸다.
경황 없이 경험한 꿈들을
하얗게 씻어낸다.
모든 밤의 장식을 씻어낸다.
밥상 앞에서도
허황하지 않기 이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동작으로
숟가락에 담는 현실.
출근, 출동 혹은 충돌!
하루의 모든 충돌이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상처가 만져지기 시작하는
우리들 나이의 이마.
피 흘리지 않고 모든 충돌이
볼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
+ 외지의 새
1
가까이 기대와
내가 만져줄게.
확실히 서 있던 두 귀 끝이
이제는 기운 없이 늘어지고
외면해도 젖은 눈시울은
내가 닦아줄게.
아무도 이해 못 할 거야.
갈수록 안정되는 생활
불안정한 외지의 정신.
이해 못하는 당신은 이리 와,
윤기 없는 날개지만
마음에서만 보이는 상처를
내갇 덮어줄게.
2
언제부턴가 매일 흐릿한 새벽 추운 창문가에 와서 내 잠을 깨워
주는 아침 새여. 귀환의 날을 놓친 후부터 삐삐삐 단조한 울음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는 새여, 형상할 수 없는 고통을 대신 울어주
는, 울어서 얼어붙은 하늘로 날려보내 구름을 만드는 새여, 나는 너
를 볼 수가 없어, 무너지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
어.
------------------
+ 일시 귀국
일시 귀국을 준비하는 손끝에
서울 골목길이 어른거린다.
광화문 막걸리 사발이 보인다.
담배값도 버스값도 냉면값도 모르니
간첩으로 오인받기 십상이겠지만
그런들 어떠리.
악수와 미소로 헤어진 아버지를
이제는 낮선 산자락 산소로 찾아가
눈물로 인사 올리고
아버지가 나가시던 성당을,
善終하신 언덕바지 건넌방을
구석구석 어루만져보고,
그리고 많이들 변했을 친구들 만나면
잡아끄는 대로 쫓아가야지
할 수 있나.
대답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할 만큼은 열심히 해야지.
그러나 가슴 차지 않는 이유는
너밖에 없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너밖에 없다.
=========
+ 장님의 눈
ㅡ자코메티전
당신은 죽었지만
당신 사랑은 남는다.
사랑 중에서도 가장 질긴
당신의 외로움만 남는다.
그 외로움의 골목길을 돌아가면
장님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생각하고
당신은 보이지 않는
몸으로 운다.
그리하여 쓰러졌던 우리들은
다시 머리 들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일어선다.
--------------------
+ 첼리스트 1
무릎 사이에 모이는
소리의 힘,
유연한 허리 밑을 통하는
손가락의 열기
여인은 비어 있다.
안아도 안아도
비어 있을 때의 눈,
드디어 공기의 바다를 넘쳐나는
끈끈한 음악,
흔들리는 몸에서
서서히 증발하는
우리들의 화음.
----------------
+ 첼리스트 2
고통의 손끝에서 터지는
음악은 아무래도 血戰이다.
이제 기억난다.
모든 것이 처음에는
불덩어리였다.
앞뒤없이 불타던 꽃,
꽃가루의 재.
긴 침묵의 이후에 핀
당신의 신생기.
눈을 뜬다.
내 벗은 몸 곳곳에
무진한 화상의 무늬들.
---------------------
+ 겨울 망중한
일과대로 저녁눈이 온다.
일찍이 온 어두움이
껍질째 거리에 눕는다.
침묵의 손으로
공기의 무게를 구속한다.
물기가 되는 부정향의 자유,
우리는 두려워하면서 만났다.
한떼의 새가 눈을 감는다.
방향이 무너지는 비상의 곡선.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모든 절망이 날린다.
아득하게 가벼운 빈혈의 몸으로
자꾸만 작아지는
우리의 반경을 산책했다.
============
+ 겨울 이야기 3
건넌방 솜이불 속
단내 나는 구들장을 그리며
두 칸 방을 주름잡는
이마 시린 외풍을 그리며
외도를 그리며
발치에서 겨울 만저 먹은
매화의 조그만 얼굴을 그리며
늦잠 끝에 나는
장롱의 늙은 쌍학을 그리며
밖에 나가면,
김치독 속의 곰팡이를 그리며
맞아, 쪼그리고 앉은 무릎에
이씨 조선의 곰팡이.
겨울이 오기 전의 아버지.
꼿꼿이 누운 골패짝에
흔들리던 양반의
새끼손가락.
---------------------
+ 겨울 이야기 4
새벽 세시의
고공
비행기.
불면증 빛나는
겨울 유리창
밖의 달빛.
수시로 흔들리는 체온.
물빛에 젖어 말이 없는
전생에의 과정을
너라도 부감하면
놀라우리.
잠자리에서는 자주
찬 꿈이 안다.
--------------------
+ 經學院 자리
경학원 자리. 마른 소나무에 동여매고 애매한 동장 아저씨를 총
살시켰지. 눈을 뜬 채 이마에서 피가 뻗더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 지켜본 국민학교 육학년, 6.25 사변 때였지만.
9.28 수복 전날 밤, 사방에서 불길이 큰 산같이 오르는데 경학원
자리, 숨겨둔 쌀가마를 훔치려 갔지. 도망가고 뒹굴어 죽고 총 쏘는
아귀 사이에서, 부대 자루에 쌀을 넣고 도망쳤었다. 우리는 하도 굶
었으니까.
몇 해 피난갔다가 돌아왔을 때, 경학원 자리, 그대로 앙상한 소
나무를 깔아놓은 채 있고, 조금은 춥고 무서웠지만, 눈 오는 밤을
혼자 걸으면서 사랑하려고 했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만이
좋은 시인이 되는 길인 줄 믿고 있었지.
엉성한 시인, 엉성한 의사가 된 뒤에도 가끔 찾아간 경학원 자
리, 메마르고 헐벗고 먼지 덮었지만 내 어린 땀방울이 뛰는 것 보면
마음 가라앉더니, 이제 그나마 외지 생활의 먼 나그네 되어 가끔 꿈
속에서나 만나면, 오너라, 오너라 하던 정겨운 소리 점점 멀리 들리
고, 베개 적시는 꿈 깨어난 한밤중, 다시 한번 눈여겨보는 경학원
자리.
-------------------
+ 그림 그리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겨울같이 단순해지기로 했다.
창밖의 나무는 잠들고
形象의 눈은
헤매는 자의 뼈 속에 쌓인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
남아 있던 것은 모두 썩어서
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
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
어둡고 긴 내면의 길을
핥기 시작했다.
===========
+ 몇 개의 허영
외국에 십 년도 넘게 살면서
향기도 방향도 없는 바람만 만나다 보면
헐값의 허영은 몇 개쯤 생길 수 있지.
호박잎 쌈을 싸먹고 싶다.
익은 호박잎 잔털 끝에
목구멍이 칼칼해지도록,
목표 앞바다의 생낙지도
동해의 팔팔한 물오징어도.
배가 부르면 마라톤도 뛰고 싶다.
6.25 전이었기는 하지만 매일 저녁 맨발로 뛰던
우물집 세천이와 생선 가게 광수랑 같이
창경원, 돈화문, 종로 삼가, 사가, 오가
숨이 차서 돌아오던 혜화동 로터리쯤.
이젠 그런 세월이 아니라면
산보라도 하고 싶다.
유난히 이쁜 계집애 많던 명륜동 뒷골목을
아침이나 저녁이나 비슷하게 끓던 골목,
팍팍한 그 된장찌게도 먹고 싶다.
이제 알 듯도 하다.
돌아가신 선친이 다 던지고 귀국하신 뒤
아쉬움 속에서도 즐기시던 당신의 가난을,
가난 속에서 알뜰히 즐기시던 몇 개의 허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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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에서
물이 물을 씻는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물을 비빈다.
당산의 부드러운
몸을 비빈다.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거울에 보이는
육신의 굴곡.
명확히 보이지 않는 외로움.
목욕을 마치면
비 마르는 주일 오후에
명륜동 골목을 빠져나가는
무지개같이.
다섯 색깔 정도읭 무지개같이
가볍고 산뜻한 현기증같이.
물이 물을 씻는다.
투명한 물이
투명하지 않은 물을
비빈다.
시간의 과거아 지금이
속살거리는 목욕물 소리.
내 육신의 모든 부분이
차고도 투명한 물이 다시 되어
명륜동 2가 3가에 내리는
초겨울의 비.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지금 체중에도
남아 있는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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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에서
나신의 조각을 겹겹히 덮은
눈빛 위의 저녁.
많이 젖은 눈동자의 물무늬,
젊은 뇌파가 출렁거리며
요철의 구석구석에서 해일하고,
그 북소리 같은 소리 들으면
엉성한 60년도 초반에 피던
신촌 등성이의 여름 들꽃,
들꽃의 몸부림.
언뜻 보이는 나신의 저녁,
오래 남아 있는
우리들의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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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면의 시절
다시 밤잠을 못 자게 해다오.
손에 땀을 쥐고 기대하던 열망으로
잠을 못 이루던 때의 얼굴을.
쉽게 잠들지 못하던 밤에
눈앞에 구슬같이 모이던 나라.
문학도 흙도 당신도
다시 살아나 은밀하게 말을 거는
귀중한 생각의 시간을 돌려다오.
돌려다오, 우리가 늙지 못하던 시간을,
머리 위에서는 한 실상이 되어 끓는
뜨거운 변화의 황홀을 돌려다오.
계산기로는 간단히 결산되는 이름,
그 이름으이 배경을 빠져나오는 미분자,
불면의 밤의 꽃들의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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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의 시
시가 흉허물 없는
친구가 마침내 되어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고
밤이 되어도 외룹지 않은
은근한 불빛으로 비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꽃이 피어도
매해 이른봄 수요일이면
有信한 친구가 되어 방문하리니
그때면 내 이마에도 재를 바르고
죽고 사는 이야기는 웃어넘겨야지.
이 길고 긴 갈증의 나날,
이마의 뜨거운 열과 방황이
마침내 재가 되어 날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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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년의 비밀
최후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한 나목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 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은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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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패자
ㅡ병익이에게
오늘의 패자는 너고
내일의 패자는 나다.
네 지헤는 요즈음 물거품되고
네 가슴에 꽃힌 물거품의 화살은
늦게야 내 원만한 식탁에 도착해
겨울 튤립으로 피어나서
가슴 저린 은은한 패자의 향기.
밤의 밤이 어두워져도
오늘은 네가 꽃이 되고
내일의 패자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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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의 도시
반백이 되어가는 겨울에도
움직이지 않는 도시,
유리의 바람을 호흡하고
유리의 피를 토한다.
보이지 않는 유년의 옷자락이
주름살을 남기고 흩어진다.
내가 사는 외국의 도시는
반응이 없는 뼈마다.
흔적의 상처만 오래오래 살아서
나머지 반생을 지켜본다.
이제는 유리에 찔려도
피나지 않는 피부,
피나지 않는 영혼
둔감해진 나이의 아픔이
떠나온 도시에서 퇴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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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병동 2
몸 속을 씻기 위해
양잿물을 마신
협착된 식도의 길을 걸어
우리는 만난다.
기교파가 되어가는 손,
고백할 수 없는 몸을 씻기 위해
강물에 뛰어든 골절의
아침 세례를 시작으로
우리는 만난다.
우리들 키보다 먼저 자라서
먼저 흩어지는
문명의 연기.
과거의 나이들이 웃고 있는
죽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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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층 가정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 주로 금곡 묘지 근처의 언덕의 중심으로
돌아다니시고 때때로 자식 걱정에 잠 못 드시겠지만, 어머니는 십
여 년 홀로 사시면서 요즈음은 남의 땅 신혼 시절의 골목길을 걸으
신다지. 남동생은 이민 와서 애리호 근처에 자주 나가 어처구니없
어 앉아 있다더니 여동생은 시카고 남쪽 흐린 연기 속에 무얼 하고
있을까.
한때는 우리도 따뜻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명륜동 집에서 매일
머리 맞대고 얼간 꽁치로 저녁을 먹고, 모여 앉아 텔레비 연속극도
보고 가끔은 식후의 과자도 나누어 먹었다. 십 년이 겨우 넘은 시
간 ㅡ십 년의 폭탄은 우리를 산산히 깨뜨리고 나는 한쪽 파편이 되
어 태평양 건너에서 굴러다닌다.
그렇다. 파편이라는 뜻을 버릴 수 없다. 긴장의 순간에 빛나던
시간은 사라져버리고 더 이상 소리낼 수도, 불을 지를
수도 없어서 자유로운, 자유로워서 아름다울 수 없는 침전의 생활
을, 그러나 한낮에도 미지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는 파편의 뜻
을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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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반주 소나타 1
복잡한 사거리에서, 혹은 세상에서
연쇄 자동차 사고가 나고(혹은 사람들이)
운전사들이 내려
서로 삿대질하고 욕을 하고(혹은 사람들이)
서로 남이 잘못하고
나는 잘했다고 떠더는 것을 보다가
(혹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충돌 사고아 행인의 피는
자꾸 흘러서 우리들 사이에 엉기고
(혹은 사람들이)
결국 싸움은 간신히 말렸지만
그는 계속 피 흘리고 있었다.
(혹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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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반주 소나타 2
아우성치고 있었다.
다방에서, 술집에서, 사무실에서
도저히 분간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소리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위에
구름이 또 아우성치면서 어둡게
비를 쏟고 있었다. 그 위에
기억하세요? 오래 전이긴 하지만,
구름 위로 우리가 올라왔을 때
모든 아우성이 빛이 되던 것을,
모든 소리가 빛이 되면
눈부시던 신비를 기억하세요.
꼭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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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하 시대의 불
1
날씨는 매일 흐렸다.
돌을 다듬던 손은 얼고
대신 빛나기 시작하는
날카로운 돌의 이빨을 본다.
길고 긴 빙하 시대.
도처에는 피할 수 없이
얼음산의 얼굴 커지고
불타다 남은 그림자를 거두어
우리들의 뼈를 덮는다.
2
아껴라, 아껴랴,
시대의 불.
살벌하고 냉엄한 때가 온다.
날카로운 석기의 연장도 재가 되고
불과 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원시인의 눈물로 감출 수 없던
어둡고 긴 밤의 우리들의 넋.
잊지 마라.
낮게 타는 불은 산 위에 지고
빙판에 붙는 불은
우리들의 끝없는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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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病後의 루마니아
1
내가 태어났다고 해보자.
흑해를 향한 작은 도시에서
자라났다고 해보자.
젊어서는 여자를 사랑하고 외식도 하고
늙어서는 베레모를 쓰는군.
신작로는 신작로, 대로는 대로,
다를 것 하나 없는 흑해의 도시에서
죽었다고 해보자.
2
내 신경의 가지에 매달린
몇 개의 열매도
무거웠다.
내 여정의 아무 곳에서도
설익은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생각할 것도 없지.
바빠서 구원받을 수 없는
오히려 날아다니는 새야.
病後에 필요한 것은 너야,
끝없이 다시 떠나는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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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의 귀향
1
비가 오는구나.
멀리 보이는 내 나라에서
예감의 실이 나를 감는구나.
어느 계절이면 어떠랴
젖어보자.
이제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귀향의 저녁 어두움.
2
기억해두자, 나를 납치한 내 나라보다 더 큰 것에 대한 미련. 기
억해두자, 계산 없이 고개 숙인 내 등뼈의 체념, 안락의 의자를. 얼
굴은 눈치만으로 화장하고 희미한 동자가이 방향 감각을 잃어도.
기억해두자, 내가 광활한 외지의 벌판에서 바람처럼 살다가 인연
없는 땅에 묻혀 드디어 메마르고 외로운 한 가지의 소리가 되어도.
기억해두자. 내가 같이 시작한 꿈, 같이 자란 꿈, 내가 집어던져버
린 꿈, 다시 집어서 같이 늙어가는 꿈, 같이 돌아가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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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겨 듣던 음악이
즐겨 듣던 음악이 나무가 되어
수만의 밝고 싱싱한 잎을 흔들면
구식의 서양 하늘을 떠나는 새처럼
떠나다오, 내가 그늘에 안주하기 전
더 많은 나무가 모여 아우성치는 숲으로.
즐겨 듣던 음악이 번개가 되어
추운 밤의 창가에서 불을 밝히면
보인다, 어색하던 그 밤의 인성의 불,
우리들의 건물은 숨은 손 끝에 뜨거워지고
눈에는 눈, 가벼운 구름에는 가벼운 구름
전신으로 마찰하며 소리나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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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을 네게 주면서
이 구름은 비기 될 거야.
산골에 내리는 빗물은
초여름에야 물소리를 내기 시작할 거야.
처음 내는 소리는 작고 어색하겠지만
시냇물 먹고 자라는 산새야.
네가 다 자리기 전에 죽어서 흘린 피,
땅 밑에 젖어들어 빨간 산꽃이 되고
산꽃이 썩어서 어지러워지고.
그러나 우리는 철저한 형식주의자,
곧 어두워지겠지.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떠나자.
정지된 모든 것은 죽음,
사랑은 단순한 놀라움이니까.
구름을 네게 주면서
산꽃의 구름을 네게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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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태인의 목관 악기
하여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반대다.
반대편에는 오보애를 부는 친구가
지금 각광받고 있지만
나는 군중 속에 숨어 있다.
숨어다니는 목관 악기 소리는
사랑보다 달지만
우리들의 고전은
머리부터 풀고 칼부터 물지.
자주 깨는 겨울밤,
잠속의 친구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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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평화한 시대가
그리고 평화한 시대가 오더라.
두등 선대의 북소리 들리고
인경 소리 천지에 차고
큰 형제가 어깨를 붙잡고 울더라.
수천 년 같은 말 쓰던
조상들이 흙을 털고 일어나더라.
바다에서 물에서 산지사방에서
눈멀고 귀먹고 목숨 잃은
귀신들이 귀먹고 목숨 잃은
거대한 예감이 나라에 넘치고
익숙지 못한 꽃더미의 진동에
반도의 허리가 어지러워 쓰러지더라.
나는 외국에서 나고 자라고
고국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다시 외국에 나와 있다.
내 사춘기의 여름에 남은 기억은
총과 창으로 죽은 시체들
천, 십만, 백만의 시체가
죽어서 씌어서, 우물 속에서 끓고
장작같이 쌓여서 태워서 탄화하고
그래서 내 사춘기는 탄화하고,
20년이 지나도, 새벽에도 꿈에도
내 사춘기는 우물 속에 빠지고
가해자들의 저음의 합창으로,
사춘기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고,
하룻밤만 지구의를 보며
재어보고, 다시 따져보면
새끼손톱보다 작은 금수강산에는
그 탐욕의 눈이 얼마나 치사한가 보리라.
다시 보며 다시 물어보라.
우리보다 불행한 나라
불쌍한 나라들을 손꼽아보라.
가슴을 쳐도 실패는 내 탓이다.
불행은 우리 탓이다.
가위눌린 새벽꿈을 깨고
문득 눈물의 흔적을 감촉하낟.
누가 모든 細雪을 막을 수 있으랴.
강토의 틈틈이에 죽은 시신,
그 뼛가루와 눈알의 黃憐, 赤憐을 모아
자꾸 꺼지고 자꾸 켜지는
수백만 개 촛불을 밝히리니ㅡ
그리고 평화한 시대가 오더랴.
고구려의 땅도 발해의 벌판도
마음이 착해서 주어버리고
국립 자연 공원이 된 완충 지대,
그 공원을 뛰어가는 토끼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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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소리를 찾어서
1. 소리의 발단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소리는
작고 큰 공기의 흔들림이
세 개의 흰 뼈의 다리를 지나
드디어 맑은 물에 닿을 때
피어나는 것.
장확하게 말하자면, 소리는
당신 가슴의 많은 떨림이
길고 은근한 여행에서 돌아와
드디어 벗은 몸의 밝은 눈을 뜰 때.
2. 새소리
마지막 남은 몇 잎의 낙엽이 총 맞은 작은 새가 되어 핏빛으로
비틀거리며 하강하는 소리 들으면서, 나는 손잡아 세워줄 사람도
없는 어두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도 여전히 눈 위에서 어는
어려운 새소리.
3. 물소리
소년은 종일 자갈들을 시냇가에 던졌다. 그소리가 천천
히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긴 나무 그림자가
시내의 한끝을 어루만지며 덮은 소리 들릴 때까지. 그래서 이제는
소리가 하늘보다 오히려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까지 유심히 보고
있었다.
4. 소리의 생태
손바닥에 장못을 박던 소리
발등을 겹쳐 못박던 소리
높고 메마른 입술에서 현기증 일으키며
피 흘리던 사람의 소리 이후
소리를 죽이는 소리,
작은 소리를 치는 큰 소리
큰 소리를 물어뜯는
여러 개의 작은 소리,
쓰러지는 소리,
소리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
빨리 일어나는 소리.
피 흘리던 사람이 떠난 후
고통을 받는자는 느낄 뿐
고통의 소리는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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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 제임스 밀러에게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네 묘한 조소로 끝나버리는
영등포가 아니다.
영자도 순자도 봉순이도 있겠지만
맘마상 어쩌구로 끝나버리는
영등포가 아니다.
피란을 가서 장바닥을 싸돌고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워보면 안다.
토마토가 고깃덩이가 휴지 조각이 함께
부글부글 오장이 끓던 꿀꿀이죽,
그 맛을 음미해봐서 안다.
다시는 고생 안 하리라고
낡은 열차에 실린 還都,
비록 어두웠고 열차는 오래 서 있었지만
도강증, 도강증, 도강증
내 열몇 살 핏기 없는 희망이
거기에 아직도 오래오래 남아 있다.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명랑한 가발 공장도 섰겠고
입체 교차로가 드라이브에 좋다지만
내 군대 3년의 영등포에는
소주와 한기만이 있었다.
초조와 열등감이 빗물에 늘어져 산발하고
공연한 내 정신의 무질서를 밤마다 토하고 나서
오만하게 모든 의미를 구둣발로 차버리던
그리고는 창피해서 골방의 이불을 덮던
우리들의 참으로 귀하고 진하던 시절.
행방불명이 된 우리의 한기가
닳아빠진 보도나 문방구점 근처로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고국을 떠난 지 벌써 수년,
모든 미스터 제임스 밀러여
내 상기되고 떨리는 목소리는
스무 살의 네 혈기 앞에서 중심을 잃는다.
-----------------------------
+ 내 심장에서 당신의 메아리까지
우리들의 슬픔은
그늘이다.
지워지지않는 상처의 사랑.
옛날에 옷 벗은 우리들의 상처도
메아리다.
오늘은 그늘에서
비가 잠을 잔다.
우리들의 몸 속이 젖는 소리.
젖은 나이의 보도 위에
우리들의 낙엽이 흙이 된다.
내 심장에서 흙까지,
오래 울리는 당신의 메아리까지.
_______*62
무용 5
비밀 1
비밀 2
비밀 3
--------
약속
응시
전화
풀꽃
-------
개구리
낚시질
음악화
음악화 2
---------
음악회 3
가을 敍景
겨울 약속
꽃의 이유
----------
꽃의 이유 2
나비의 꿈
바람의 말
변경의 꽃
-----------
善終 이후 1
善終 이후 2
善終 이후 3
善終 이후 4
------------
善終 이후 5
아침 출근
외지의 새
일시 귀국
-----------
장님의 눈
첼리스트 1
첼리스트 2
겨울 망중한
------------
겨울 이야기 3
겨울 이야기 4
經學院 자리
그림 그리기
----------------
몇 개의 허영
목욕탕에서
미술관에서
불면의 시절
---------------
수요일의 시
성년의 비밀
오늘의 패자
유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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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병동 2
중산층 가정
무반주 소나타 1
무반주 소나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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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시대의 불
病後의 루마니아
비 오는 날의 귀향
즐겨 듣던 음악이
----------------------
구름을 네게 주면서
유태인의 목관 악기
그리고 평화한 시대가
새로운 소리를 찾어서
--------------------------
미스터 제임스 밀러에게
내 심장에서 당신의 메아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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