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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바 ~

박노해

# 박노해 시

침묵이 말을 한다 ㅣ한 밥상에

겨울이 온다 ㅣ 가을 몸 ㅣ 겨울 사랑
사람만이 희망이다 ㅣ 사랑

그대 나 죽거든 ㅣ아직과 이미 사이
준비 없는 희망 ㅣ동그란 길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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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말을 한다

때로 침묵이 말을 한다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
이상이 몸을 잃은 시대에는
차라리 침묵이 주장을 한다

침묵으로 소리치는 말들,
말이 없어도 귓속의 귀로
마음속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목숨의 말들

아 피묻은 흰옷들 참혹하여라
아직 말을 구하지 못한 이 백치울음
그러나 살아있는 가슴들은 알지
삶은 불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진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침묵속에 익어가고 침묵 속에 키워지고
마침내 긴 참묵이 빛을 터트리는 날
푸른 사람들, 소리치며 일어설 것이다

침묵이 말을 한다
침묵이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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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밥상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침침한 독방에 홀로 앉아서
벽에 뚫린 식구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습니다
푸실한 밥 한 술 입에 떠넣고
눈을 감고 꼭꼭 씹었습니다
담장 너머 경주 남산 어느 암자에선지
저녁 공양 알리는 소리인 듯 종 울림소리
더엉 더엉 더엉
문득 가슴 받히는 한 슬픔이 있어
그냥 목이, 목이 메입니다
함께 밥 먹고 싶어!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한 밥상에 둘러 앉아서
사는 게 별거야
혁명이 별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늘 땅에 떳떳이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거지
나 생을 바쳐 얼마나 열망해 왔어
온 지상의 식구들이 아무나 차별 없이
한 밥상에 둘러 앉은 평화로운 세상을
아 함께 밥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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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온다

와수수
가랑잎 쓰는 바람에
삭발한 머리 쳐드니
나는 이만큼 낮아져 있는데

시린 하늘 흰 구름은
옥담 질러 사라지고
나는 컴컴한 독방으로 사라지고

맑은 가을볕도 잠깐
여위어가는 가을 설움도 잠깐
벌써 독방 마루 바닥이 차갑다
으시시 몸 웅크리며
겨울 보따리 풀어 해진 옷 꿰맨다

아 어느듯 저만큼
겨울이 온다 겨울이 온다

벽 속에 시퍼렇게 정좌한 채
겨울 정진 깊어가는 날 온다
대낮에도 침침한 독거방 불빛 아래
갑자기 바느질  손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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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몸

비어가는 들녘이 보이는
가을 언덕에 홀로 앉아
빈 몸에 맑은 별 받는다

이 몸 안에
무엇이 익어가느라
이리 아픈가

이 몸 안에
무엇이 비워 가느라
이리 쓸쓸한가

이 몸 안에
무엇이 태어나느라
이리 몸부림인가

가을 나무들은 제 몸을
지상의 식구들에게 열매를 떨구고
억새 바람은 가자가자
여윈 어깨를 떠미는데

가을이 물들어서 
빛 바래 가는 이 몸에
무슨 빛 하나 깨어나느라
이리 아픈가
이리 슬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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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을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으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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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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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처절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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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 죽거든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보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나 언 땅 속에 길게 뿌리누워
못다 한 푸른 꿈과 노래로 흐를 테요
겨울 가고 해가 가고 나 흙으로 사라지고
호올로 야위어가는그대.. 어느 봄 새벽,
수련한 함박꽃으로 피어 날 부르시면은
나 목메인 푸르른 깃발 펄럭이면서
잠든 땅 흔들어 깨우며 살아날 테요

아영아영 나 죽거든
손톱 발톱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서
그대가 빨아 말린 흰옷 이쁘게 입혀주오
싸늘한 살과 뼈 험한 내 상처도
그대 다순 숨결로다 호야호야 어루만져
하아- 평온한 그대 품안에 꼬옥 보듬어 묻어주오
자지러진 통곡도 피 섞인 눈물도 모질게 거두시고
우리 맹세한 붉은 별 사랑으로, 눈부신 그 봄철로
슬픔 이겨야해. 아영 강인해야 해

어느 날인가 그대 날 찾아 땅속으로 오시는 날
나 보드란 흙가슴에 영원히 그댈 껴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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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살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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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 없는 희망

준비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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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그란 길로 가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면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갈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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