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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자 ~

최두석 시 3

+ 등칡

벌목이 금지된
오대산 계곡 천년의 숲에서
등칡을 본다

등칡은 버드나무와
거재수나무를 타고 올라가
승리의 색소폰을 불고 있다
아니 색소폰처럼 둥글게 굽은
꽃을 한창 피우고 있다

등칡은 자기가 감고 올라가
신세 진 나무를 옥죄어 죽인다
등나무나 칡덩굴보다도
훨씬 거칠고 모질다
등칡이 감고 올라간 버드나무와
거재수나무는 온몸이 뒤틀린 채
신음을 뱉어내고 있다

톱과 도끼를 든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은
등칡의 모습에서 생생하게
나무의 폭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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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살구 먹고 싶다고
누구에겐가 가만히 말하고 싶은 날 있다
뱃속에 애가 생긴 것도 아닌데
살구 먹고 풋풋해지고 싶은 날 있다

시다고 하기엔 달콤하고
달콤하다고 하기엔 신 살구
도시로 나가 학교 다니던 시절
살구 먹고 싶어 시골집에 간 적도 있다

슬슬 더워져 부채 찾을 때가 되면
무르익어 군침 삼키게 하는 살구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무 때나 먹고 싶어지는 살구

나무 아래에서 살구를 따 손에 쥐면
나무로부터 귀한 선물 받은 것 같다
벗겨낼 껍질도 없이 먹기에 좋고
매끈하게 발라낸 씨는 곧바로 흙에 묻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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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

웅녀는 어진 왕이 될 아기를 품에 안고
태백산 동서남북의 강산을 순례하였다

길을 걷다 헐벗은 땅을 보면 씨 뿌리고
허기진 새나 짐승의 새끼 만나면 젖을 먹였다

웅녀는 사람만을 위해 사람이 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을 두루 품은 것이 소망이었다

웅녀가 머물며 젖을 먹인 곳에서
더욱 어여쁜 꽃 피고 튼실한 열매 맺혔다

웅녀가 강물에 들어가 몸 씻으면
젖 냄새 맡고 온갖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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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의 금빛 노랫소리 들으면
나는 왜 호기심 이기지 못하는
술래가 되어 둥지를 찾고 싶은 걸까

우람하게 잘 자란 상수리나무
높은 가지에 매달린 밥사발 같은
풀줄기를 엮어 만든 둥지를 보고
마구 가슴이 뛴 적이 있다

나는 몰래 훔쳐본 것이지만
꾀꼬리는 날카로운 경계음을 냈고
둥지에서는 새끼 네 마리가 자라고 있었다
한껏 부리를 벌려 먹이를 받아먹고 있었다

무성한 여름숲이 꼬꼬리를 기르냐?
암수 꾀꼬리는 온갖 벌레와 열매 물어와
새끼들 입속에 넣어주었고
부지런히 똥을 받아내었다

무럭무럭 새끼들은 자라
며칠을 두고 날개를 파닥거리더니
뒤뚱뒤뚱 둥지를 매단 가지를 타고 올라가
이웃 나무로 날아갔다

그렇게 네 마리의 새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둥지를 떠났고
마지막 새끼가 떠나자
어미도 새끼도 둥지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꾀꼬리가 사는 숲은 풍요롭다
둥지는 찾기 어려워도
귀만 있다면 이 땅의 숲 곳곳에서
생의 찬가 같은 꾀꼬리의 노래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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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도둑

매화가 한창인 섬진강변에서
직박구리가 꽃을 따 꿀 먹는 걸 보며
무심코 꿀도둑이라 하니

함께 꽃구경 온 이가 웃으며
도둑이라니 말이 심하다고
매실이 너무 많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솎아주는 거라고 직박구리를 두둔하며
벌통에서 꿀을 훔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꿀도둑이라고 한다

생계로 벌을 치는 이는 죄가 없고
목이 칼칼하면 꿀차 마시는 내가
진범이라고 자백하니
죗값 치르려면 앞으로 붓을 가지고 다니며
꽃을 볼 때마다 가루받이하라고 한다

나도 웃으며 응답한다
꽃이 인공수분을 싫어한다고
향내까지 풍기며 꽃이 반기는 건 벌나비이지
사람의 붓질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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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치

늘 새로운 놀이를 찾던
시골 아이의 개구마리가
나이 들어 때까치로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때까치라고 하니
나도 그 이름을 쓸 수밖에 없는
아릿한 아픔이 있다

날카롭게 굽은 구부리로
개구리를 잘 잡아
개구마리라는 이름이 생겼으리라

개구리를 잡으면
나뭇가지에 꿰어두고 뜯어먹는
엽기적 습성이 있다

개구마리 소리 유난한 날이 있었다
동네 형이 둥지에서 새끼를 꺼내와
파리를 잡아 먹이고  있었다

논에서 개구리가 사라진 후
눈에 띄지 않는 개구마리를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요즘은 자주 가는 강둑에서
때까치를 만나곤 한다
빙글빙글 꽁치를 돌리며 추억을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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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복

꽃샘 추위가 닥쳐 눈 내리는 날
눈 속에 핀 복수초 보겠다고
한 나절이나 산속을 뒤지고 다녔다

낙엽 이불 위로 살며시 고개 내밀어
금빛 햇살 한 잔 권하던 꽃 그리며
눈이 내려 쌓이는 명지산 속을 걷고 걸었다

몇 해 전에 환하게 만났던
기억의 자리 더듬으며
혹시 복수초가 아예 사라진 것 아닐까 걱정하면서

설중복을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막연한 속신을 거의 믿는다는 듯이
나무뿌리에 차이고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헤매고 헤매다가 겨우 찾아낸 꽃 한 송이
하지만 그 꽃은 추위 견디느라
입을 잔뜩 오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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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초

코로나 후유증으로
무기력감에 시달리다 봄날
부러 찾아가 만난 꽃이 있다

깊은 산
울창한 숲속
맑은 시냇가에 뿌리내린 연령초

세 장의 잎과 세 장의 꽃받침과
세 장의 꽃잎으로 산뜻하게 균형을 잡으면서
앙증맞게 꽃술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수명을 늘려준다는 
이름을 믿는다는 듯
콧 속 깊이 스미는 향내를 음미하였다

잠시나마 연령초를
신화 속 숨살이꽃이라 여기며
깊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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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부도

금강이 흘러내리는 군산 앞바다
유부도는 작지만
드넓은 갯별이 살아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이 숨 쉬는 땅

유부도에 가서
도요새와 불떼새의 군무를 보면
세상에 더 이상의 춤은 없을 것 같다
봄이면 툰드라의 번식지까지 
가을이면 적도 아래 월동지까지 날아가는
수만 마리 도요새와 불 떼새의 날갯짓을
과연 어떤 춤꾼이 흉내낼 수 있을까

유부도에 가서
도요새와 물떼새의 울음소리 들으면
세상에 더 이상의 음악을 없을 것 같다
수만 년 동안 습지에서 먹이를 찾느라
서로 다르게 진화한 부리로 연주하는
수만 마리 도요새와 불떼새의 합주를
과연 어떤 명인이 따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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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리

겨울날 팔당댐 아래 길가에는
대포 렌즈 끼운 카메라 앞에 두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진쟁이들이 있다
강 건너 산자락 나무에 앉아 쉬는
참수리를 쌍안경으로 확인하며

두툼한 방한복에 뺨까지 가리는 털모자로
맵찬 강바람 견디면서
가끔은 짜장면도 배달시켜 먹기도 하면서
한 나절이고 두 나절이고 기다린다
참수리가 강으로 날아와
잉어나 누치 같은 물고기를
잡아채는 순간을 찍기 위해서
먹이를 찢어발기는
피 묻은 발톱과 부리를 찍기 위해서

황금빛 뿌리의 위용이
새 나라의 제왕이라 할 만한
참수리의 사냥 장면에 맞추어
숨죽이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쟁이들은 잠시나마 온몸에 전류처럼 찌르르
사냥꾼의 피가 도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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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호

네가 생겨나기 위해 원죄처럼
얼마나 많은 샘과 여울을 삼켰는가
얼마나 오래된 길과 마음을 지웠는가
벋어나간 산맥으로 둘러싸인 호수여

네가 생겨나기 전 오래 세월의
수많은 이야기는 물속에 잠기고
이주한 아이가 늙은이가 되는 동안
너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는가

댐의 수명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젖을 적시고
얼마나 많은 목숨을 품어 기르면
네가 태어나면서 지은 죄 씻을 수 있을까

물아래 잠겨 있는 강마을 느티나무와
돌담집 살구나무의 그림자 어른대고
우물가 처녀들의 웃음소리 환청으로 들려서
차마 함부로 유람선을 탈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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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족령

영월 동가가 재장마을에 옻나무를 심어 가꾸던 이가 있
었다. 그는 옻나무에 칼집을 내 상처에 고이는 진액을 채
취하였다. 그는 칠장이었고 소중하게 모은 옻액을 걸러
옹배기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장난치며 뛰놀던 누렁이
가 옹배기를 엎질러 칠액을 뒤집어썼다. 불같이 화가 난
칠장이는 부지깽이로 개를 두들겨 팼다. 졸지에 검둥이
가 된 누렁이는 산으로 도망쳤다. 개의 행방이 궁금한 칠
장이는 개 발자국을 따라 산에 올랐고 바위 위에 검둥개
가 앉아 있었다. 칠장이가 개의 곁에 다가가 주위를 둘러
보니 동강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강이 백운산 자
락을 휘감아 흐르며 굽이굽이 세워놓은 뼝대가 하늘 아
래 절경이었다. 절경을 보며 개는 슬픔을 다스렸고 칠장
이는 화를 다스렸다. 이후 칠장이는 다시 누렁이가 되었다.
칠장이와 누렁이가 나란히 앉아 있곤 했던 자리는 훗날
칠족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산 너머 문희마을로 가는 길
도 그들이 처음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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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투티

노거수 느티나무의 옹이에
후두티가 둥지 틀었다
웅이의 입구가 반질거린다
느티나무의 오래된 흉터가
후투티에게는 오붓한 보금자리이다

후투티 어미가 새끼에게
지렁이를 물어다 먹인다
한껏 벌린 새끼의 입에서 지렁이가 꿈틀댄다
땅속을 누비며 살던 지렁이가
후투티를 날아오르게 한다

느티나무와 지렁이  사이를 잇는
생명의 끈 붙잡고
어린 후투티는 무럭무럭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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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깽애풀

남편은 꽃 보러 산으로 가고
아내는 해금 배우러 학원에 다니는
함께와 따로가 분명한
엇갈린 취향의 노부부가 있다

손발에 힘이 빠지기 전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보자고
남편은 산에 올라 꽃사진 찍고
아내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농현을 한다

그냥 취미에 그치지 않고
남편은 멋진 사진 전시회를 꿈꾸고
아내는 무대에 올라 보란 듯이 연주를 하고 싶은
동상이몽의 염원도 있다

깽깽이는 자생지에서 만나기 힘든 꽃
봄바람에 춤을 추는 귀하고 어여쁜 꽃 보며
남편은 끊길 듯 이어지는 해금 소리 듣는다
왜 하필 이름이 깽깽이인가 생각하며

그러면서 다시 생각한다
풀꽃과 악기의 이름이 같은 이유에 대하여
잠시 잠깐인 풀꽃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들으면 사라지는 해금소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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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원앙

김포 장릉에는 원앙이 산다
오래된  숲과 못이 있어야 사는 원앙
수컷의 번식깃이 휘황하게 화사한 원앙
원앙의 노는 모습 보러 나는 간혹
장릉 숲 속 못가에 앉아 있곤 한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
그가 이미 죽은 부모를
왕과 왕비로 만들어 모신 무덤이 장릉이지만
원앙에겐 그저 도토리가 많은 숲과
아늑한 못이 좋은 것이다

수시로 김포공항을 오가는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도 모른척하고
원앙은 나뭇가지에 앉아 쉬다가
못에 내려 유유히 헤엄치다가 자맥질하고
수면에 몸을 세워 힘껏 날개를 털기도 한다

"참 다정한 원앙 한 쌍이야"
"실제로 원앙은 천하의 바람둥이래"
지나는 사람들이 던지는 말 귓등으로 흘리며
나무에 앉고 못에서 헤엄치고 하늘을 나는
원앙의 자유로운 몸짓 눈여겨본다

원앙침 베고 잔 추억이 있는 자로서
짝을 지어 미끄러지듯 유영하다가
다정히 부리를 맞대는 모습 본다
대책 없이 명나라를 받들다가
호란을 부른 인조와 그의 신하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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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 이야기

누렁이가 마당 구석을 쉴 새 없이 발로 파내며 낑낑대던
날이 있었다. 아버지는 삽질로 도왔고 털도 안 난 쥐새끼
여남은 마리가 햇볕 속으로 끌려 나왔다. 누렁이는 쥐잡
기 선수였고 쥐꼬리는 삽날로 잘라 학교에 숙제로 내었
다. 어느 날 누렁이가 마친 듯이 울부짖으며 마당을 맴돌
았다. 쥐약 먹은 쥐를 먹은 거라 했다. 이후에도 두어 번
쥐약 먹은 쥐를 먹고 개가 죽었고 그 후에는 집안에 강아
지를 들이지 않았다.

신혼시절 쥐들이 출몰하는 셋방에서 산 적이 있다. 밤
중에 쥐가 나오기도 하였고 쥐덫에 걸린 쥐를 치우는 게
일과가 되었다. 갑자기 불을 켜서 구석에 몰린 쥐를 쫓는
건 당연히 가장인 나의 몫이었다. 유아원에 다니던 딸은
선생님께 아빠는 '쥐 잡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한다.

달걀을 훔쳐먹는 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엄마 쥐
가 네 발로 달걀을 안고 누우면 아빠 쥐가 꼬리를 물고
집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슬그머니 달걀로 다가가 이
빨로 구멍을 내서 빨아먹는 거 아니냐 했더니 아마도 새
끼들 있는 곳으로 먹이를 나르는 모양이라고 했다. 닭을
그리기 위해 닭을 기른 그의 말을 나는 고스란히 믿기로
했다.

검은어깨매가 쥐를 사냥해서 뜯어먹는 걸 본 적이 있
다. 한강 하구의 철책, 전깃줄에 앉아 털가족을 부리로 찢
어 먹는데 쥐꼬리가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거렸다. 매는
두 발로 먹이를 움켜쥔 채 살점 하나 흘리지 않고 말끔히
먹어치웠다. 쥐의 짧은 생을 지탱했던 쥐꼬리는 먹을 수
없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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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논병아리

버드나무 새잎 내미는 봄날
북한강에서 멋진 공연을 본다
탱고의 선율을 타는 듯한
뿔논병아리의 춤

쫑긋하게 머리깃을 세운 암수 한 쌍이
경쾌하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목을 맞대기도 하고 부리를 맞대기도 하면서
물 위에서 미끄러지듯 추는 춤

유혹과 매혹이 교차하는 몸짓을 보며
탱고의 연원을  생각하는 사이
춤을 마친 뿔논병아리 한 쌍은
재빨리 물가 수초들 사이로 들어간다

암컷은 얕은 물에 엎드리고
수컷은 물방울 튀기며 등뒤에 올라탄다
그냥 짝짓기라고 덤덤하게 말할 수 없는
희열의 표정으로 사랑 행위에 몰입한다

어느새 뿔논병아리의 사랑을 훔쳐보게 된 나는
섹스에 몰입하는 수컷의 등에
자꾸만 눈이 간다
숙연하고도 처연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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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천강 수달

나는 엄천강 수달이어요
지리산 뱀사골 백무동 칠선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이는 엄천강

맑은 물에서만 사는
꺽지 갈겨니 동사리 등을 먹고 살지요
어떤 체조선수보다 부드럽게
어떤 수영선수보다 힘차게
몸을 놀려 물살을 가르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 갑자기
굴착기가 굉음 울리며 강바닥을 파헤치네요
제발 여울과 모래톱과 바윗돌을 그냥 그대로 두세요
제발 나의 가족과 친척들의
집과 밥상과 놀이터를 뒤덮지 마세요

자연이 수백만 년 조화롭게 한 일
함부로 망가뜨리는 망나니짓 그만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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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암에서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요선암 돌개구멍에 누워
주천강 여울물 소리 들으며
떠가는 뭉게구름 하염없이 바라본다

도원리 근처 무릉리에 있는
요선암은 신선을 맞이하는 너럭바위
하지만 나는 신선이나
옛사람들이 상상한 낙원
무릉도원에는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다

사진가들이 누드를 찍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곡선이 이리저리 벋어나간
돌개구멍에 웅크리고 누워 오래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돌개구멍에
알을 낳아 품었을까이다

돌개구멍에 들어가 누워 있고 싶은 것은
구멍 하나하나가 마치 둥지 같아서이다
지상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기 전에
대지의 여신이 만들어놓은 둥지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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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물꿩

물꿩은 물풀 위에서 산다
수면을 가득 덮을 정도로
무성한 마름과 가시연 위를
유난히 긴 꼬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유난히 긴 발가락으로 사뿐사뿐 걷는다
물풀 위에 알을 낳고
물풀 위에서 새끼를 기른다

물꿩은 암컷 한 마리가
여러 수컷을 거느린다
암컷은 알만 낳고
수컷은 제각기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른다
암컷은 넓은 우포늪을 순회하고
수컷은 찾아온 암컷을 깃을 세워 반기며
황홀하게 짝짓기 한다

근래에 우포늪에 찾아오게 된
물꿩은 원래 아열대의 새이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날아갔다가
물풀이 수면을 채울 때 다시 온다
이제 대를 이어 찾아와
새끼를 기르게 되었으니
우포늪은 물꿩의 어엿한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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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의 환생

함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곁에 고사한 주목 한 그루,
비록 잎은 없어도 줄기뿐만 아니라 가지도 얼추 갖춘 모
습으로 비바람 맞고 서 있었다. 원래 자장이 석가의 사
리를 모셔온 뒤 꽃아준 지팡이였다는 전설과 다시 살아
난다는 예언이 오랜 세월 신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였다.
한동안 고사목은 새들의 쉼터가 되었다. 온갖 새들이
날아와 쉬다가 똥 싸고 날아가기를 되풀이하였다. 새똥
은 고사목의 텅 빈 몸통을 통과하여 떨어져 쌓였고 그
똥무더기 속에서 씨앗이 싹을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고 나니 어엿한 주목이었다. 고사목 몸통 뚫고 활개 치
듯 벋어 나왔고 다시 세월이 흘러 줄기는 고사목의 우듬
지 높이로 자랐다.
이제 새 주목은 옛 고사목과 한 몸처럼 껴안고 있다.
산 붉은 살결이 죽은 잿빛 뼈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신
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합장하는 불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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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조롱이

따사로운 봄날 백령도에 와
비둘기조롱이를 본다
경운기로 쟁기질하는 논 위에서
정지비행하며
움직이는 곤충을 찾고 있다

비둘기조롱이를 보러
백령도에 온 것은 아닌데
아득히 먼 데로부터 날아와
다시 먼 데로 날아갈
비둘기조롱이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비둘기조롱이는 전붓대 위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정지비행하며 먹이를 찾는다
나는 비둘기조롱을 보느라
다른이 일정을 접는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가서 겨울을 나고
인도와 남중국 거쳐
번식지로 가는 이 비둘기조롱이가
아무르강을 건널지 안 건널지
어디에서 짝을 만날지 나는 모른다

가만히 두근거리는 가슴 다독이며
비둘기조롱이를 만난
뜻밖의 행운에 고마워한다
세상을 살며 이렇듯 해맑게 빛나는 날이
얼마나 될까 새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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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교역 밤나무

꽃 필 때 떠나
열매 익을 때 돌아가고 싶은
그늘이 넓고 깊은 나무가 있다
평창 운교역 밤나무

꽃 피는 철이면
바람 부는 대로
한량처럼 세상 떠돌다가
단풍 드는 철이면 돌아가
다람쥐처럼 밤톨을 발겨 먹고
남은 알밤 한 주먹씩
여기저기 몰래
숨겨두고 싶은 나무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관동대로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행인의 땀내 맡고
말방울 소리 듣게 되는
운교역 터
굵은 줄기가 오래된 추억처럼
사방으로 벋은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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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물떼새

아름다움의 원천은 무엇일까
장다리물떼새들 보며 품은 의문이다

장다리물떼새가 유난히 길고 붉은 다리로
얕은 물속에 들어가 사뿐사뿐 걷는 모습은
마치 발레를 추는 것 같다
새하얀 꽁지깃과 검푸른 날개 펼치며
도약하듯 날아오르는 모습은
어떤 발레리나도 부러워할 것 같다

얼핏 멋진 춤사위처럼 보이지만
장다리물떼새가 물을 찰방거리고 다니면서
긴 부리를 끊임없이 까닥거리는 것은
부지런히 먹잇감을 찾는 몸짓이다
그러다가 잽싸게 망둥이를 찍어 올려
몇 번이고 패대기친 후에
머리부터 통째로 욱여넣어 삼킨다

먹지 않고 사는 새가 어디 있으랴
모름지기 생명력이 솟구치는 장다리물떼새라야
갈대밭 위를 아름답게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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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당호 큰고니

검은 물갈퀴 발 앞으로 내밀며
고니 한 쌍이 수면에 미끄러져 내린다
날개를 앞으로 모아 바람맞으며
마치 수상스키 즐기는 듯한 표정 짓는다

고니 한 쌍이 서로 부르며 다가와
애무하듯 목을 부비다가 함께 하트를 그린다
수컷은 날개를 활짝 퍼서 힘차게 파닥거리고
암컷은 부리를 반쯤 물에 잠그며 엎드린다

고니 한 쌍이 엉덩이만 수면에 내민 채
몸은 물속에 거꾸로 잠그고
긴 목을 늘려 줄풀의 뿌리를 뜯는다
세상에 먹고살기 만만한 새가 어디 있으랴

머리를 깃 위에 얹고 잠자던 고니 한 쌍이
유유히 호수 가운데로 헤엄쳐 나아가더니
바람 타고 날아오른다

고니 날아간 자취 더듬어 나는 하릴없이
바다 건너로 떠나버린 여자를 회상한다
혹시 그녀는 고니가 변해 내게 왔다가
다시 고니로 변해 날아간 것 아닐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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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울음소리

평양에서 남북 국가대표가 맞붙은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가 관중도 없이
중계도 없이 치러진 소식 들은 날
휴전선  쇠울타리 너머
한강을 건너 날아오는 기러기떼 본다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축구선수 손흥민의
다치지 않고 돌아와 다행이라는
소감이 뉴스를 장식한 날
멀리 개성 천마산이 보이는 김포의 끝자락에서
기러기떼 자욱한 울음소리 듣는다

영어로는 늘 노래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맨날 운다고 하나
불만이 많았던 나도
오늘은 그냥 울음소리로 듣는다
새삼 이루어내기 힘든 소망을 생각하며

뚜루루루 끼룩끼룩
봄이면 새잎 돋는 북으로 날아가고
가을이면 곡식 여무는 남으로 내려오는
수백수천의 기러기 울음소리를
평화와 상생의 합창소리로 들을 날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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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논병아리 가족

연두가 초록으로 변하는 봄날
뿔논병아리 어미가 뿔깃을 쫑긋 세우고
고개 돌려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새끼들을 업은 채 호수 위에 떠서

잠수하여 물고기를 사냥하던 아비가
버들치를 물고 다가오고
어미의 깃 속에 숨어 있던 새끼들은
다투어 고개를 내민다

어미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민
새끼의 입속으로 버들치가 들어간다
새끼들의 삐약거리는 소리 물결 따라 퍼지고
아비는 다시 먹이를 찾아 잠수한다

어미와 아비는 서로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아비가 등에 새끼들을 업고 있으면
어미가 잠수해서 물고기를 잡아온다
참으로 애특하게 정겨운 장면이다

나도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민 적이 있다
엄마는 무얼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엄마의 등에 업혀 담장 밖을 본
아기 때의 원초적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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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재두루미

얼어붙은 임진강에서
잠자는 재두루미들을 본다
불침번을 제외하곤
모두 깃 속에 머리를 묻고
웅크린 채 잠자는 재두루미들

이윽고 날이 밝자
목을 세우고 깃을 털고
울음소리로 간밤의 안부를 묻더니
몇 마리씩 무리에서 벗어나 자세를 잡고서는
빙판을 차고 날아오른다

잠은 떼로 모여 자고
먹이터는 가족끼리 찾는 재두루미가
시차를 두고 차례로 날아오른다
어느새 이백여 마리의 재두루미가
감쪽같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남북의 경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터를 찾아가는 재두루미들에게
새삼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새삼 자유의 의미를 묻는다
가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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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과 흰뺨검둥오리

닻처럼 생긴 마름 열매는
진흙에 박혀 뿌리를 내리고  순을 내민다
순은 자라나 수면에 촘촘히 잎을 펼친다
수면 위에 꽃대를 밀어 올려 흰 꽃 피운다
마름은 잎과 꽃으로 늪을 수놓는다
열매는 자라면서 물에 잡기고
토실토실 잘 여물어
다시 닻처럼 진흙 속에 박힌다

흰뺨검둥오리가 마름의 새잎 먹고
갓 피어난 꽃 날름날름 따 먹는다
요리할 필요 없이 바로 먹는
수면 위의 식사이다
사람들이 물밤이라 부르며 먹는 마름 열매는
흰뺨검둥오리가 늪에 터 잡고 사는 것은
물밤 맛을 잊지 못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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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와 여의나루 사이

어기여차 어기야디여
노 젓는 소리도 없이
넘실거리는 강물도 보지 않고
마포에서 여의나루로 간다

무감각한 일상의 2분 22초
노곤한 몸을 전철 의장에 부린  채
마포역에서 여의나루역으로 간다

감각이 무뎌진다는 것
그것은 생명에 반하는 죄
나는 얼마나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사는 것인가

하잘것없는 볼 일이 많아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 5호선
강바닥 밑 터널을 통과하는 전철 칸에서
버릇처럼 숨을 참고
몇 초나 버티나 시험한다

잠시 잠녀의 마음이 되어
전복을 찾고 문어를 찾는다
잠시 가방을 안고
숨비소리 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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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목련이 백목련에게

너는 잎도 없이 꽃망울 터트리지
수백수천의 꽃눈 붓끝처럼 세우고
추운 겨울을 견디면서
벼르고 벼르다가
온몸으로 봄볕을 느끼며 한꺼번에
수백 수천의 꽃망울 터트리지
사람들은 너의 환한 꽃그늘 아래 서서
마음껏 봄날을 즐기곤 하지

하지만 나는 떨군 꽃잎이
쓰레기가 되어 발길에 밟히는 게  싫어
산속에 산다네
햇볕 가릴 만큼 가득 잎을 펼친 다음에
꽃은 한 송이씩 차례로 피운다네
사람들의 번거로운 눈길에서 벗어나
아는 이만 맡게 되는 향내는
한층 그윽하고 깊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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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나스와 멧비둘기

때로는 나의 상처가 다른 이에게는 위로가 것을 
본다
때로는 나의 흉터가 다른 이에게는 보금자리가  되는
것을 본다

나는 우장산 공원에 뿌리내린 플라타나스, 철봉 평해
봉 역기 등의 운동기구가 놓여 있는 언덕 위에 서 있다.
낮에는 윗몸을 일으키거나 평행봉에 오르거나 바벨을 드
는 이들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별빛 대신 도
시의 깜박이는 불빛을 구경하다가 잠들곤 한다.

나도 젊은 날에는 마음껏 활개 치며 자라고 싶었다. 우
뚝 솟은 줄기에 사방으로 가지를 펼친 늠름한 모습을 원
하였으나 재앙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사다리차에
전기톱을 싣고 나타난 사람들이 가지뿐만 아니라 우듬지
까지 마구잡이고 잘라내었다. 이후 전붓대 같은 몰골의
나는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새 가지를 내밀었고 그러
다보니 상처는 흉터가 되었다. 아무래도 흉한 몰골은 감
출 수 없었지만 조촐하게 다시 그늘도 드리우게 되었다.

어느 날 뭉툭하게 잘린 줄기의 흉터 위에 멧비둘기가
가느다란 삭정이들을 물어와 집을 지었다. 그 집 위에서
애틋하게 부리를 맞대고 사랑도 나누었다. 뽀얗게 하얀
알도 두 개 낳아 품었다. 나는 흉터를 둘러 내민 가지들
의 잎을 무성하게 펼쳐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주었다. 멧
비둘기 어미가 가슴과 배를 밀착시켜 알 품을 때 나의 흉
터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와 발가락
으로 흉터를 디딜 때 생의 전율 같은 것이 나의 온몸에
퍼져나갔다. 부모새들은 부지런히 벌레와 열매 물어와
새끼들을 길렀고 나는 더욱 넓게 잎을 펼쳐 따가운 햇볕
을 가려주었다 부지런히 나는 연습하던 새끼 두 마리가 
무사히 떠나던 날 나는 더 이상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
기로 다짐하였다.


______ * 36

ㅡ두루미의 잠 

등칠
살구
웅녀
꾀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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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도둑
때까치
설중복
연령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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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도
참수리
충주호
칠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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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투티
깽깽애풀
장릉 원앙
쥐 이야기
--------------
뿔논병아리
엄천강 수달
요선암에서
우포늪 물꿩
---------------
주목의 환생
비둘기조롱이
운교역 밤나무
장다리물떼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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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 큰고니
기러기 울음소리
뿔논병아리 가족
임진강 재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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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과 흰뺨검둥오리
마포와 여의나루 사이
산목련이 백목련에게
플라타너스와 멧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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