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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꾼
땅꾼은
뱀처럼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
뱀의 독이 가장 오른다는 늦가을
땅꾼은 산에 오른다.
막대기 하나로 온 산을 들쑤시고 다닌다.
뱀이 독을 품고 편히 잠들지 못하게
저희들끼리 얽히고설켜 깊은 꿈 못 꾸게
땅꾼은 눈에 시뻘건 핏발을 세우고
홀로라도 산에 오른다.
한번 물리면 약도 없다는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만다는
독이 창끝처럼 오른 늦가을 뱀을 찾아
땅꾼은 생명을 걸고 산에 오른다.
그런데 뱀들은 꽁꽁 숨어 땅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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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
맨 나중까지 가지를 붙들고 있는
감처럼 빨갛게 익은
막내의 동그만 얼굴.
어느 겨울 아침 배고픈 까치가 날아와서
그걸 다 쪼아먹으면
그다음 해엔 열 배 스무 배로
더 많이 열리는
막내의 슬픈 얼굴.
어디까지 따라왔나.
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려
나 사는 서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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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향失鄕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얼마나 숱하게 우리는
고향을 배웠는가.
아니 고향을
부르짓었는가.
구호처럼.
구원처럼
하지만 고향엔 더 이상
주름진 어머니도
뻐꾸기 우는 풀숲도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옛 조상의 무덤도
소꼽놀이하던
그리운 순이도 없다
스스로 고향을 버린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므로
고향을 노래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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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매
맑은 혼은 다 날아가버리고
빈 그릇만
남았네요
싸리꽃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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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주인
개가 밤새 새끼를 낳았다.
달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그만치 여덟 마리나 되는 어린 새끼들.
이 엄동설한에 한 마리도 얼어 죽이지 않고
혼자 고스란히 순산했다.
새끼를 낳느라
훌쭉해진 어미 개는
젖이 모자란다.
앵두처럼 빨갛게 익은
부풀은 꼭지가 애린다.
찬바람 막으며 끙얼댄다.
개 주인은 일어나가 무섭게 아침 일찍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읍내 시장으로 개 사료를 사러 간다.
들판엔 어느새 흰 눈이 가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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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배
ㅡ 내 친구 최상에게
무심코 나주에 갔당게요.
너무 외로운 놈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아마 군락을 이
룬다지요.
온통 배밭이드라고요. 하얀 배꽃 져부리고
한입 베물면 눈보다 흰 속살, 나주 배만 한 광주리 담아
서울 오는데. 네 얼굴 질긴 나주 배 나무뿌리처럼
내 얼굴 따라 얽혀오고 허는디, 그때가 하마
어는 가을날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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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당꽃
어릴 적
귀신을 불러들이고
귀신을 물러가게 했던 무당은
무당꽃처럼 무서우면서도 예뼜다.
그 무당 딸도 무당이 되어
작두를 타고 귀신과도 이야기하며
그 무당 엄마같이 무서우면서 예뼜다
그렇지 않으면 붉은 무당꽃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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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갓집
소가 새끼를 낳았다. 찬물 한 그릇 떠서 누렁콩도 소
복이 담아 외양간 앞에 놓았다. 이틀밖에 안 된 송아지가
머리로 툭툭 차면서 퉁퉁 불은 젖을 빨아먹는다. 눈이 선
한 어미는 마른 지푸라기를 소리 없이 새김질하며 이따
금 꼬리를 흔들어 쇠파리를 쫓는다. 오래된 낡은 대문에
는 한지를 잘라 끼운 쌍줄을 쳤다. 지나가던 이웃 사람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복만이 있는가. 큰 소리로 삼촌
이름만 부르곤 한다. 거기에는 한쪽 다리를 끌고 일흔이
넘은 외할머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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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꽃
아직 기억의 꽃은 피어
싸늘히 비가 내린다
공장 쓰레기 더미 위에 날리던
그 붉은 핏덩이의 울음
아무도 죽고 없었다.
그 여름의 불볕 말고는
나는 누렇게 타버린 잎사귀같이
얼굴이 말라비틀어져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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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끝의 집
더는 갈 데 없이 찾아든 외곽의 남루, 눈이 사계절 머
루알처럼 익은 청년, 폐허가 돈사, 키 큰 잡초가 피운
꽃에선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고, 이제 더 이상 잡초가 아
닌 당당한 주인 행세, 다람쥐도 손님처럼 방문하고, 가끔
늙은 뱀이 선禪하다 가는 곳, 옛날에 젊은 처녀가 목을
매 죽었다는 돈사 옆 오두막에 사는 청년, 육이오 난리통
에는 해방촌이었다는 끔찍한 이곳, 수절하는 거미가 밤
낮 뿔난 세월을 한숨으로 칭칭 동여매며 산다는 길 끝의
그 집, 청년은 밤이면 피 묻은 낫을 들고 미친 듯 꿈속을
뛰어다니고. 아침엔 피부 묻은 똥을 누며 발정 난 수돼지처
럼 꿀꿀 운다는 전설의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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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산 금지
가을 산은
우리 어머니 같다.
저 피멍 든 가슴을 보라
한 잎 한 잎이 모두 아픈 생체기다.
누가 감히 그 산에 들어갈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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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마차
나도 한 마리 말이 되어 우리나라 포장마차란 포장마
차는 다 끌고 저 광활한 광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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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엿장수 가위
나도 한때 엿장수 가위가 되고 싶은 적 있다
우리나라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는, 눈물 마를 날 없는
동네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세상의 슬픔도 싹둑싹둑 자르는
그 낡고 못생긴 엿장수 가위가
되고 싶은 적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싶은 적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저만치 울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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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겨울
할아버지 산소가 멀리 보이는 무너져 내린 언덕에
어머니는 몇천 년 눈물로 헹구어 온 보리 씨를
조선朝鮮의 한 뼘 가슴을 파고
그 기인 어둠 홀로 찍어 삼키며
박속같은 얼굴로 뿌리 시었다.
건넌 들에 마른 이마 때리는 눈발이 내리기 전
우리들은 서둘러 우리들의 연鳶을 만들어야 했다.
생전 할아버지의 숨결 푸른 마음으로
대쪽을 가르고 다시 잘라 다듬어서
산맥처럼 이어온 끈끈한 인정의 밥풀을 먹여
새 날개 같은 흰 옷의 한지韓紙에 붙이면
그대로 살아오신 우리들 어머니 모습
우리들은 언덕보다 커다란 연에 따순 핏불 같은 연줄
을 매달아
보리밭 위로 날리기 시작했다.
감나무 깨죽나무를 지나 시암골 너벙바위를 넘어
하늘 높이 마악 솟구쳐 올랐을 때
활처럼 보리밭에 서서 먼산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흰모시 수건이 보였고.
여름 한낮 날빛 번개가 휘두르고 간
어머니의 그 갈라진 발바닥 틈으로
가을 하늘보다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아니 그보다도 그 하늘보다도 겨울의 언덕을 넘어
어머니의 보리밭이 불길처럼 새파랗게 타고 있음을
마을로 마을로 더 큰 마을로 타들어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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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복사에 와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라도 떠날 수 있는 게 아닌가
마음만 먹다 정작 떠나지 못하고 여기 흥복사까지 왔네
흥복사는 떠나려고 하는 자에게는 더욱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은 곳, 길 옆에 따사로운 햇볕처럼 졸고 있
었네.
서울에서 혹은 근방에서 차를 몰고 와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 소풍 나온 듯 목을 축이고
어린 동자치들이 외는 불경 소리나 귀에 담고
다시 시동을 걸어 붕붕 왔던 길로 돌아서면
됐지, 이곳 흥복사에 와서도 어디론가 떠나려고
마음을 벼르는 자, 홍븍사 절 마당에 있는 탱자나무를
보게.
속은 비어 썩었으면서도 새파란 가지 돋아나
그 위에 제 몸을 찔려 노오란 열매를 맺는
탱자나무의 해탈한 듯 푸르른 머리 위를 보게.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렇게 떠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저렇듯 자기를 비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가를.
흥복사에 와서 떠나고 싶은 자 더욱 떠나지 못하네.
=====2>
+ 개망초
이 고개 저 고개
개망초 꽃 피었대
밥풀같이 방울방울 피었대
낮이나 밤이나 무섭지도 않은지
지지배들 얼굴마냥 누가 데려가주지 않아도
왜정 때 큰 고모 밥풀 주워 먹다 들키었다는
그 눈망울 얼크러지듯 그냥 그렇게 피었대
-------------
+ 그 술집
그 술집
이름도 없네.
이름 붙이기조차 힘에 겨운
늙은 할매 혼자 술을 판다네.
가난도 크나큰 복으로 알고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애시당초 슬픔이란 것도 가끔 꺼내어 보는
어릴 적 흑백사진처럼 정겹게만 느껴지는 걸까.
그 할매가 조는 듯 마는 듯 새벽까지 술을 파는
동네 어귀, 세상의 가장 어두운 삶의 모퉁이에서
길 잃은 고양이처럼 밤거리를 헤매다
스스로 지쳐 찾아드는 외로운 이들을
반갑게 기다려 따스한 불빛으로 맞아준다네.
이때쯤 할매의 눈도 어둠보다 깊어진다네.
모든 크고 작은 고통과 시퍼런 분노까지도
품안에 다독여 마침내 빈 술잔 속에 녹여버리네.
귀여운 개, 누렁이가 그 할매와 함께 산다네.
세미라는 슬픈 이름을 가진 그 개가
술에 찌든 탁자 밑 조용히 웅숭그리고 앉아 있네.
할매는 고향이 광주라 하네.
광주 하면 그 무서운 1980년 봄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처녀적 소월 시를 연애편지에 적어 보낸 이야기며
진달래꽃 피기 전의 나물 뜯던 사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자 녀석에게 말하듯 얘기해 주네.
산유화山有花 시를 너무 좋아해 지금도 외운다는 할
매의 눈가엔
잊혀 지낸 고향의 따사로운 햇볕과 맑은 시냇물이 반
짝이며 흐르네.
누군가가 갑자기 장닭처럼 지저귀듯 외쳤네.
<브스트레침샤 뽀드 스탈롬>
러시아말로 취할 때까지 마지자는 뜻인데
러시아말을 모르는 우리는 큰 소리로 웃음으로써 화답
하네.
천엽을 시켜놓고 옆자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실연당한 여자는 갑자기 눈물을 흐느끼며
밤늦게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고
그 건너 자리의 열렬한 젊은 음악도들은
며칠 전에 자살한 김광석을 추모하느라 소란하네.
한때 문학을 지망했던 교사도 있고
이제는 백수가 되어 취직을 걱정하는
젊은 사내의 쇳소리 같은 기침소리도 이 술집 안에 있네.
우리나라의 겨울 달은 모조 상아처럼 차가운데
할매가 가져다주는 콩나물국은
그냥 설렁설렁 끓인 것 같아도
말 못 할 한스러운 정이 듬뿍 배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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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창포
무지한 울음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입추立秋를 보여달라.
길은 거기서 시작되고 거기서 끝난다.
길 위로가 아니라 길 속으로 간다는 느낌.
비인에서 눈물처럼 몇 개의 낚시를 사고
가게 주인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부득불, 무창포는 저 혼자 타고 있는
빈 들의 불과 같이 해방이다.
겁도 없이 쳐들어오는 바다 위에
파도 꽃으로 높이 서서 낚시를 던져놓고
무엇을 낚는다는 심사도 없이
우리가 미처 걸려들기 위해
물속으로 섬이 되어 기우뚱 내려간다.
우리를 고이 받아 잠재우는
우리보다 더 시퍼런 멍울의 무창포.
봄보다 늦게 온다는 겨울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저녁 해를 삼킨 채 하혈하는
소라고둥, 하나의 모래알에도 집을 짓는다.
------------
+ 무창포
사랑을 잃은 자는
사랑을 얻기 위해
무창포에 간다.
혀를 빼물은 개 한 마리 지나간다.
=======
+ 전주천
1
그 방천에 여름 되면
오염으로 죽은 잉어 떼가 풀밭에 나뒹굴었다.
처녀 허벅지만한 잉어가 사람처럼 썩어갔다.
파리떼와 구더기떼가 그 몸에 들끓었다.
누구 하나 잉어를 살리지 못했다.
우리는 그 잉어를 막대기로 때리며 놀았다.
그 잉어의 비늘마다 노을은 아름다움 때까지 피 흘렀다.
2
실연당한 처녀가 약을 먹고 누워 있었다.
과수원집 큰아들이 리어카에 싣고 방천을 따라갔다.
그리고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송아지 귀가 선인장처럼 까칠한 가을이었다.
3
겨울 둑길에 두더지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내장이 몽땅 파먹힌 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땅속의 두더지를 잡아먹은
그 어떤 누구는 누구일까.
그 겨울 방천엔 바람만 오사게 불어쌓다.
4
냉이꽃이 방천에 한창이다.
냉이꽃보다 못한 삶들이 굴속에서 기어나와
햇볕을 쬔다. 냉이 모가지가 쟁강 부러진다.
시퍼런 칼이다. 드디어 이곳에도 진짜 봄이 왔다.
------------
+ 조선낫
지금 내게 시퍼런 조산낫 한 자루 있다면
절망 끝, 희망이에요.
그것은 생때같은 그리움으로
날 저물고 해 뜨는
깊은 강물 속 오롯이 살아 있는 우리들의 신화지요.
어디 조선낫이 그냥 낫인가요
이빨도 잘 나가지 않는 진짜 낫이지요.
대장간에서 무쇠로 담금질해 만든 슬픔이니까요
웬만한 바위에도 끄떡 안 하고
오히려 바위를 베려하지요
그뿐인가요, 울 아버지는
그 조선낫 하나로
한평생을 살아왔다지요.
산에 가선 나무를 하고
들에 가선 풀을 베었다지요.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웠다지요.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먼 아버지 때는
그 조선낫으로 또 왜놈들의 등골을 서늘하도록 찍었다
지요
슬픔을 먹고 자라는 조선낫은
그래서 강하지요.
햇빛도 쨍하고 부딪히면 금이 가지요.
그런 조선낫 한 자루 내게 있다면
당장 나의 거짓 양심과
거짓 노래부터 베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진짜 조선낫이 어디 그리 흔한가요.
지금 어느 빈집 시렁 위에 걸린 채로 빨갛게 녹슬고 있
는지도
그 누가 알겠어요. 차마 누가 믿겠어요.
그 조선낫으로 무의 시퍼런 슬픔도 깎어먹던
즐거운 시절이 우리에게도 하냥 있었다는 것을.
-------------
+ 파도리*
한칼에
슬픔을 밸 수 없다면
별수 없는 일, 이렇게 온종일 죽치고 앉아서
치는 파도나 구경하는 수밖에
파도리엔 세상의 이쪽과
세상의 저쪽이 서로 사이좋게 맞닿아 있다.
갈매기는 끝끝내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물 가까운 곳에서 온 힘으로 발돋움하며
길길이 제 가슴을 때리듯 울어대지만
굴 따는 아주매는 아예 파도 소리마저 삼켰는지
파도가 파도리를 덮치는 줄도 까마득히 모른다.
*파도가 많이 친다고 해서 붙은 서해의 작은 마을 이름
--------------
+ 눈이 온다
아랍 문자처럼 눈이 온다.
초등학교 빈 운동장엔 모래들이 따스하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남기고 간 웃음소리로,
급히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풍향제.
회기 시장 언덕배기
튀밥을 튀기며 사는 할아버지 머리 위에도
옛날을 그리워할 사이도 없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만큼이나 많은 할 말을
사람들은 그저 가슴에 묻고 눈을 맞으며 간다.
고향집 갚은 산속 고슴도치도
눈을 바라보며 나와 같이 눈을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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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탄 연탄
겨울
초입의 골목,
다 탄 연탄들이 문 앞에 나와 있네.
푸석한 얼굴, 한 가족처럼
층층이 탑을 이루며 눈을 맞고 있네.
외등은 서울의 달보다 쓸쓸하게
골목길을 지키고 있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도 없네.
어쩌다 메밀묵 사려, 찹쌀떡 사려,
외치는 추억이 가난한 사람의 목쉰 소리.
아니 단돈 몇 푼이 그리운
동화 속의 고깔 쓴 난쟁이들인지도 모르네.
들려올 듯 멀어지는 그림자 뒤로
쫓아오는 개 짖는 소리도 없이
시퍼렇게 젊은 한 사람이
골목 끝으로 막 사라지려는데,
등뒤에선 다 탄 연탄들 어깨동무하고
오래도록 눈 속에서 가족사진 찍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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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 공주
얼음 속에
그 공주 누워 있다.
아름다운 문양 팔에 새기고
전설 속의 새처럼
죽어서도 승천을 꿈꾸었을까.
2천 년 전의 햇빛과 바람가 풀내음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지나온
2천 년 후의 잠 못 드는 누군가의
노래 하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세라도 두 팔 벌려 가지개 켜고 일어날 듯
얼어붙은 두 볼에 상기도 파란 숨결이
오히려 봄꽃보다 수줍게 아롱져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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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거북이
휘경역, 퇴근 시간
사람들이 한꺼번에 튀밥처럼 쏟아져 나온다.
역 계단엔
웬 낯선 아주머니.
플라스틱 수족관 앞에 앉아 있다.
아기 주먹보다 작은
청거북이들 그 안에서
서로의 멍든 등을 기어오르며
저희들끼리 소리 없이 붐빈다.
남태평양
어느 작은 섬에서
애꿎게 잡혀 온 청거북이들,
그 산홋빛 고향 바다며
늘 햇빛 눈부신 하늘이
그 깨알 같은 눈에도 어려 있다.
그 청거북이
한 쌍에 5천 원이라고
볼펜으로 꾹꾹 수족관 위에 저 혼자 꽂혀 있다.
사람들은 한꺼번에
우르르르 튀밥처럼 쏟아져 나오고....
막상 어디로 갈 줄 몰라하다
두리번 눈을 번뜩여보는 또 다른 슬픈 청거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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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하구에서
객지에 나가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
여기서 다시 모두 모이는구나
즐거운 명절도 아닌데
젖은 날개 그대로
끼륵끼륵 그리워
끼륵끼륵 서해 바다에
얼마나 큰 슬픔의 물결들이 간대
울음 끝에 꺼져가는 붉은 피의 노을.
하구에서 만난
11월의 시계풀꽃은
끼륵끼륵
무릎이 시리다.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너무 깊숙이 닻을 내려버린
삶.
자, 이제 그만
여기쯤에서 잡았던 손을 풀고
더 큰 바다를 향해
우리가 스스로 힘이 될 때까지
끼륵끼륵 헤엄쳐 가야지
==============
+ 감잎 하나의 옛집
늙은 흑염소가 커다란 감나무에 매여 있었다.
산그림자보다 서늘히 혼자 울고 있던 날들이
많이 있었던 까닭으로
나는 그 기력이 다한 염소의
희미한 뿔만 바라보아도
온몸이 파르르 아파오곤 했다.
며칠 후 염소는 소리 한번 못 지르고
아버지가 휘두른 한 번의 쇠망치에 조용히 죽었다.
그 뼈를 고아 어머니의 약으로 쓴다는
것. 이. 었. 다.
그날부터 감나무의 감잎이
더욱 푸르게 빛나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아껴둔 푸르름으로
아예 생각의 옛집도 덮어버린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알 수 있었다.
------------------------
+ 무덤을 파는 여우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에서는
날마다 여우가 무덤을 판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을 먹는다.
시퍼런 간을 빼먹는다.
죽어도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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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 가시 위에 쓴 유서遺書
나는 한평생 노래 부르기 위해 이 지상에 왔다.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영혼들이 세상의 모서리를
그런 식으로 남겼다.
한겨울,
불이 나간 장미꽃밭.
정점頂點의 끝만이
너를 찌르겠다.
활활활, 불의 혀보다 뜨거운 칼날
사막의 피라미드보다 슬픔이 크다.
피도 눈물도 없는 너는
장미의 적敵
에미 에비도 모르는 후레자식.
===3>
+ 1년
앓아누운 병든 짐승의 세월이었네.
가까스로 소리쳐보지만 언제나 메아리는
하늘의 저편에 가닿아 별빛이 되어 얼어붙었네.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떠나지 말아야 했음을
떠난 사람들은 이제 아주 돌아오지 못함을
새들은 밤낮 마음의 빈 근처에 와서 쩡쩡 울어주었네.
문을 닫고 문고리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살아 있다는 슬픔만으로 살생殺生을 꿈꾼 날들이었네.
모두가 내 아픈 상처가 되어주지는 못했네.
나 또한 모두의 기쁨이 되어주지는 못했네.
그 언제였던가 내 겨드랑이에서 차고 시린 물방울이
떨어졌던 때가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그 길 위에서 길과 함께 잠들기도 했었네.
꽃은 소리 없이 피고 소리 없이 진다네.
우리도 삶도 봄 갈 없이 나날이 지속된다네
아 그러고 보니 나의 1년은 별의 생일처럼 축복이었네.
---------
+ 산불
ㄱ
내가 아주 어려서
나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겨울에
무서운 산불을 보았다.
그때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중이었다.
지게가 사람과 함께 살던 때였다
나와 아직 이마가 퍼런 형은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산에 갔다.
산에는 조상처럼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지게를 지기에는
내 키가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나는 다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렀다.
그러면 착한 형은 지게 위에 날 꽃덤불처럼 태우고
그 험한 산길도 힘 하나 안 들이고 올라갔다.
아마도 형은 그때 힘이 무척 셌고
세상이 무섭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꽤 꾸불꾸불한 산길은 족보처럼 끝 간 데 없이 이어졌
는데
조상의 음악을 입어서인지 제법 콧노래 부르며
산속으로 산속으로 형은 즐겁게 보일 듯 말 듯 가고 있었다.
ㄴ
나는 그땐 잘 몰랐지만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거북이 등에 업혀 용궁을 찾아가는
한 마리 귀가 쫑긋한 토끼였을 것이다.
나의 서러운 설화는 그로부터 생겨났다.
ㄷ
응달진 산등성이마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이 쌓여 있
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한이라고 형이 말했다.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위에 찍혀 있는 산짐승들의 희미한 발자국을 발견
하고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운 적이 있다.
봄이 오고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그 발자국들은 지워지지 않고 저 혼자 외롭게 추위를
견뎌내야 하므로
그때는 정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중이었다.
ㄹ
나는 그때 하늘을 찌를 듯한 무시무시한 산불이 아랫
녘에서부터 쳐들어오는 걸 보았다.
시퍼런 생나무들도 그대로 통째로 쓰러졌다.
푸른 비명만이 소리 없는 메아리로 귓속까지 쟁쟁 울
려왔다.
나와 형은 너무 무서워 곧장 마을로 도망쳐 내려왔다.
나무도 기게도 다 산속에 팽개치고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도 깊은 골짜기에 그냥 남겨둔
채로
그 뒤 지게는 까맣게 타 재가 되고
낫은 녹슬고
두고 온 노래만이 꿈속에서도 불길처럼 날 에워싸고
뜨겁게 타오를 뿐,
ㅁ
누가 그때 그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산불을 다 껐는가
이젠 기억에도 없다.
---------
+ 학살
학살이 되었다.
총칼로 공화국을 세운 독사의 무리가
다시 한번 이브를 유혹했다.
아, 야, 야, 야, 야, 야, 야, 야, 야, 야
절규하는 입속의 붉은 모가지들.
댕강댕강 꽃잎처럼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총칼은 하늘 아래 보란 듯이 썩고
그 위에 새로 돋은 아름다운 빛살, 광주
------------
+ 강천사
이 세상의 슬픔이 많으면
얼마나 하랴.
강천사 비구니만 하랴.
가을이 오기 전, 마음이 먼저 가
산나리꽃 하나 피워둘까.
하찮은 길도 또아리를 틀며
타는 듯 앵겨서, 저기 저 골자짝
나 어린 비구니의 머루알 같은 눈알도
가벼이 무등 태아고 찰찰찰刹刹刹 푸르기만 하니.
=======
+ 양서점
헌책방의 주인인 두 늙은 내외는
더 이상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어 있었다.
좀이 슨 얼굴에다
만지면 금방 먼지로 앉을 것 같은
흰 머리카락이 아슬하게 박혀 있다.
중자가 떨어져 나간 간판엔
양서점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그 늙은 주인 내외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세상의 중심에
서본 적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중가가 없는데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새로 중자를 달려고도 하지 않는다.
헌책처럼 그들의 생도 저물 대로 저문 것일까.
팔아야 할 책이 두 권만 넘어도
아직도 알이 굵은 주판을 튕겨야 하는
그 늙은 두 내외에게
삶이란 결국 거추장스러운 옷만큼의 의미만도 못한 것
이었을까.
헌책방의 헌책들은 제 몸을 갉아먹으며 견딘다.
헌책이 더욱 헌책이 될 때까지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
는다.
어느새 두 늙은 내외마저
헌책을 닮아 있다.
헌책의 냄새가 두 내외의 손바닥에서도 묻어난다.
그건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오랜 역사의 혈흔과도 같다.
------------
+ 외딴방
내가 사는 방은
처음이자 맨 끝방.
아이들의 그림 속에서만 자라는 방.
검은곰팡이, 검은 노래, 검은 해.
벌레들이 소풍 갔다 비를 만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방.
칼로 가슴을 긋는 방.
그녀는 백수광부白首狂夫
왜 나를 따라와 외딴방에
갇혀 있나요.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사방의 벽뿐.
벽은 언제부터 벽이었을까.
어머니는 세상에 먼저 벽을 낳고
그 안에 다시 이무기처럼 날 낳았지만
나는 벽 속에도 방을 꿈꾸다 죽은
어떤 외로운 시인의 눈물새.
그 새들이 귀향처럼 쫓겨와, 외딴방에다
살림을 차리고, 퍼런 멍들은 저희들끼리
아비규환, 하늘에 둥둥 떠다닙니다.
----------------
+ 나무의 피
이제 봄이 온다.
나무는 아이처럼 가지를 벌려 기지개를 켠다.
둥근 대지로부터 새로운 피의 수혈을 받는다.
나무는 머리끝까지 상쾌해진다.
머리를 한번 종처럼 흔들어본다.
그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깊은 산속 절의 쇠 종이 울리듯이 고요하게
작은 마을의 교회 종이 울리듯이 분주하게
나무는 하늘 아래서 거룩해진다.
성자의 눈처럼 신비로운 푸른 싹이 여기저기 가지 끝
에서
팝콘처럼 터진다.
그것은 오래 기다려온 대지의 잔치다.
냇물도 얼음을 밀치고 소리 내어 흐른다.
얼음 위에 쓴 시들이 떠내려간다.
겨우내 도시의 변두리 셋방에서
이름도 없는 시인이 끄적거리던 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가 되어 산과 들을 어루만지며
하찮은 풀꽃 하나도 그냥 스치지 않고
빛의 향기를 후ㅡ 불어넣어 준다.
생명 있는 것들은 일제히 솟아오르며 소리쳐 날뛴다.
생명 없는 것들도 세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
병든 개가 길 옆에 눈 똥 무더기에도
생명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나무는 신부처럼 수줍은 채 하늘을 우러러 높아진다.
도시의 먼지로 더러워진 나무의 머리를 감겨준다.
햇빛은 하루가 다르게 마을들을 감싸고
푸르디푸른 불잎을 작은 엽서처럼 마구 토해낸다.
------------------
+ 거울 숲에서
손금을 보여주는, 나무들도, 불안한 것이다.
그물을 치듯 하늘에 펼쳐놓은 앙상한 나뭇가지들
새들은 어디로 숨어야 하는지
겨울 숲은 대책이 없다.
새들은 대체 어디로 숨은 것일까.
부러진 검은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낙엽이 눈보다 더 깊게 쌓여 있다.
사악한 뱀들은 미리 땅속에 길을 지었으리라
날개 있는 새들은, 맨몸인 나무들은
제 몸이 집임을 보여주기 위해
따로 집을 갖지 않은 것일까.
눈비를 맞으며 눈비가 집임을
아, 겨울 숲은 그래서 무덤보다 깊어지는 골짜기를
저렇듯 칼날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일까.
버린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의 차이란
겨울 숲에선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죽고 싶도록 사랑한 단 한 사람이
아직도 그리운 이름으로 남아 있다면
내 고달픈 손금도 즐거이 보여주리라.
이제 쪼그려 앉아 피우던 마지막 담배도
저 겨울 숲에 회한처럼 던지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될 시간,
어디서 굴러왔는지 발등 위에 떨어진 낯선 솔방울 하나
더는 떨어질 곳이 없어 겨울 숲을 팔 없이 껴안으려 한다.
===========
+ 불태운 시집
그 시집은 불태워져야 마땅하다.
오적烏賊을 화형 시켜야 하듯이
나는 망나니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칼춤을 추고
너는 황금 사자 작두 메고
천산天山을 헤매라.
어디에도
나의 노래는 없고
화엄華嚴의 불만 있다.
화엄 속에 타는
오만잡시집五萬雜詩集.
-----------------
+ 서해훼리호
기도를 하자
오늘 아침 여객선이 침몰했다
그 시간 나는 세상모르고 늦잠을 자고 있었다.
너무도 평온한 일요일 아침 끔찍한 사고는
뉴스 속보를 타고 전국으로 파발마처럼 달려간다.
금세 엄청난 재난의 소식은
사람들의 눈에 번개처럼 가 박힌다.
아이스박스나 널빤지에 매달려
기적적으로 구출된 사람들은
동물처럼 화면 속에서 울부짖는다.
그 참혹했던 순간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영영 물속에 갇힌 사람들은
선장과 함께 말이 없다.
책임 소재를 묻는 신문과 방송은
연일 앵무새처럼 떠들어대고
정부의 보상 대책이 발표되고
그러나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위해
아무 말이 없다. 바다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잠잠하고
우리는 서해를 향하여
단지 고개 숙이고
기도를 할 뿐이다.
우리 모두 기도를 하자.
----------------------
+ 아버지 없는 봄
이제 만 일곱 살이 된 보경이는
생애 처음 아버지 없는 봄을 맞았다.
그 애의 아버지는 지난가을
스물아홉이란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몸이 다부졌던 전라도 사내였고
누구보다 정직한 육체노동자였다.
그가 간암으로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병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걸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 한 살 아래인 아내와
어린 두 딸만을 이 세상에 남겨놓은 채
그는 한 줌 뼈가 되어 어머니 무덤가에 뿌려졌다.
마지막까지 검붉은 피를 토하며 죽어간 그 전라도 사내.
오늘도 그가 지은 아파트는 봄 햇빛 속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내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단칸 셋방 문을 아침 일찍 어질어질 나선다.
봉제 공장에 뜯겨진 생활을 깁기 위해 간다.
----------------------------
+ 죽은 누이를 위하여
성에 눈뜬 누이는 밤이 와도 뒤안의 댓잎처럼 잠을 이
루지 못했다.
바람은 이미 오래전에 큰 전설을 데리고 갔다.
의붓자식처럼 버림받은 누이는
돌에 새겨진 해와 달을 손금
가서 보고 또 보고
가슴이 꽃물결처럼 일렁이는 걸
간신히 손톱 끝으로 눌러 끈다.
생피 나는 누이, 더 잠 이루지 못한다
몸이 열 개라도 어둠을 다 덮지 못하는 것처럼
누이의 목이 날로 파 대궁처럼 가늘어진다. 파래진다.
여름 나무 그늘에 누이의 틉틉한 눈썹이 떠다닌다.
누이가 한지韓紙에 박힌 엷은 무늬를 긴 손가락으로
끄집어낸다.
무늬가 우는 건 처음 본다.
슬픔도 더러 타고나는 것일까.
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타나고
구름을 따라가면 누이가 쓰다 만 편지.
누이의 붉은 댕기만이 하늘에 걸려 있다.
저건 울음인가, 귀신의 제사인가.
누이는 성에 눈뜨면서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보고
거울 속의 누이는 점점 말을 잃어
누이가 죽은 건 무덤을 어머니 자궁 속으로 알고 나서다
우리나라 지천의 무덤들은 누이의 슬픈 성을 닮아 있다.
=================
+ 라일락 나무를 위하여
오늘 아침 나는 라일락 나무의 몸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았다. 마치 아픈 애인의 마른 이마를 조용히 어루만지
기라도 하듯이, 심장은 뛰고 땀이 솟았다. 나의 가는 손
가락에 감전되는 열, 나는 놀랐다. 저 땅속 깊은 뿌리로
부터 끌어올린 따뜻한 온기, 겨우내 라일락의 나무는 그 외
로운 일에 홀로 열심이었구나. 두꺼운 껍질 속에 어둠을
걸러 빛의 노래를 흐르게 하다니. 스스로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 우물처럼 몸속 마디마디에 저장할 줄을 안 라일
락 나무여, 그리하여 4월과 5월 사이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향기를 우리에 나누어주는가. 늙어갈수록 아름
다운 수도승처럼 그렇게.
---------------------------------------
+ 어느 날의 바다는 내게 이렇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집을 나온 아이가 공을 찬다.
공은 갈매기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모래 속에 얼굴을 처박고 떨어진다.
불량소년들이 그 아이의 공을 뺏으러 떼로 몰려온다.
아이는 그래도 계속 공을 찬다.
아이의 집은 도회지.
바다와 멀어 아이의 부모는 걱정을 한다.
부모는 아이 걱정에 잠도 못 이룬다.
그런데 결사적으로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바다 멀리 공을 날려버린다.
공이 수천 마리의 갈매기떼가 되어 바다를 뒤덮는다.
이제 아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바다는 아무렴 여전히 잘살고 있다.
====4>
+ 노인
주름의 집이 기우뚱 하수구 위로 기운다.
금방 쓰러져 캄캄한 하수구 맨홀 속으로
빨려들 것처럼 구부린다.
아주 주저앉는다.
집이, 오랜 세월을 견뎌온 주름의 집이.
그러고는
차창에 스치는 붉은 꽃을 마구 토해낸다.
환한 대낮, 수많은 주름이 집을 의지한 채
길가에 비틀비틀 부지런히 방향을 찾고 있다.
----------
+ 별빛
갈 수 없는 나라
오지 않는 애인
부치지 못한 편지
빗물에 쓸려간 새 무덤
지금도 누군가 만들고 있을 나무 십자가
물에 빠져 죽은 아이
나뭇잎 하나 스치지 못하는 바람
울고 있는 꽃과 나무
쓰다 만 슬픈 시
죽고 싶은 밤
살고 싶은 아침
요절한 가수의 노래
너무 많이 오는 비
자살한 시인의 유고 시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
운동장에서 주운 해골
하얀 긴 손가락
아무도 없는 첫눈
문득 문 앞에 11월
장밋빛 인생이란 이름의 술집
아기 돌아온 연애편지
벽에 붙은 흑백사진
떨어지지 않는 눈물
겨울의 이사
태워 죽인 바퀴벌레
바다에서 사는 섬
바닥에서 사는 불가사리
처음 타본 기차
봄날 아침의 늙은 거지
상장보다 빛나던 단풍나무
엽총에 맞은 비둘기가 신음하는
늦가을의 은행나무 숲
엿장수의 둔탁한 가위질 소리
연탄불이 꺼진 방
술에 절은 아버지의 붉은 수염
할머니의 어린 날
아우의 큰 손
형의 가출
세월보다 먼저 늙은 어머니
고향에 버려진 나
무엇도 안 되는 별빛
----------
+ 수탉
수탉은 타오르는 노래를 붉은 벼슬에 가둔다.
수탉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노랠 잘 부르는 노래꾼
마을에서 제일 높이 매단 횃대는
온전히 수탉의 차지다.
수탉은 지붕을 횃대로 착각한다.
지붕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마을은 오늘도 안녕한가, 깃발은 내려졌는가.
수탉이 짖는다. 목을 뱀처럼 길게 빼고 노래를 짖는다.
수탉이 마을의 선지자先知者가 된 이래로
사람들은 부지런해졌고 눈빛은 무쇠처럼 강해졌다.
수탉은 알을 낳지 않는 대신 노래를 낳는다.
노래가 마을을 지배한다.
교회 종소리보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보다
더 은은하고 더 길게 울려 퍼진다.
수탉은 인디언의 족장보다도 예지豫知가 빛난다.
새벽이 오기 전 수탉은 날개를 퍼득여 목소리를 가다
듬는다.
수탉의 날카로운 부리는 권위의 상징.
전쟁에도 한번 훼손된 적이 없다.
몸이 허약한 나는 그 수탉의 벼슬을 구워 먹고
비로소 세상의 밤이 무섭지 않았다.
수탉 한 마리가 천 개의 새벽을 오게 하고
수탉의 벼슬은 그래서 날마다 뜨거운 노래로 붉은빛을
더한다.
-------------
+ 이쁜 풀
풀이 예쁘다.
귀여운 풀.
가을이면 말라비틀어져 누렇게 죽는 풀.
산에서 들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모든 곳에서 모든 이름을 대신해서
기꺼이 용서하며 제자리를 기쁘게
비워주는 강철보다 강한 풀.
풀은 바람이 불어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
+ 절寺에서
절에 모기가 극성이다.
불상에도 모기들이 앉는다.
피를 빨아먹기 위해 모기들을 성聖과 속俗을 가리
지 않는다.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하지 않는다.
나도 한 마리 모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타.
나는 아버지의 피부터 선조들의 피까지 빨아먹으며
절에 와서 불경은 안 외고 먼산만 바라보고 있으니
편지를 쓴들 무어라고 쓸 것인가
나는 아랫마을에 가서 빈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보고
오고
1970년대식 주막에 들러 막걸리나 마시며
절 밑의 옹덩이에 가선 낚시질을 한다.
황금빛 금붕어의 비늘을 하나하나 떼어
나의 빛나는 어의御衣를 만들려고 한다.
진흙 속의 연꽃은 아예 신경도 안 쓴다.
풍경도 제 마음대로인데
중은 소정小亭의 그림같이 휘적휘적 밤에 왔다 가고
새벽엔 얼굴만 희뜩 내비친다.
녹음기錄音器가 알아서 대신 염불을 해준다.
편지는 끝까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머니와 누이는 복숭아와 수박을 광주리 가득
머리에 이고
그 험한 산길도 마다 않고 땀 뻘뻘 흘리며 기어오른다.
-------------------
+ 아름다운 손
둘째 형은
도장공.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한 평이 될까 말까 한 도장방.
형은 전구 알처럼 웅크리고 앉아
밤낮으로 애써 도장을 판다.
가난이 죄가 아닌 사람들의 이름을
무딘 칼도 어머니 정성으로 갈아
좁은 나무의 공간에 별빛으로 판다.
힘줄이 슬픔처럼 새파랗게 돋은
연약한 그렇지만 바위보다 강한
상처투성이 거친 손으로
어둠에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웅덩이처럼 깊게, 또렷이
사람들의 거룩한 이름을
온몸을 기울여 시인이 시를 쓰듯
손가락보다 작은 나무에 날마다 눈물로 아로새긴다.
--------------------
+ 가문을 위하여
가문은 울창한 폐허다.
가문은 폐허를 위해
하염없는 세월을
능욕으로 견뎠다.
능욕이 스친 자리
수치처럼, 내가
더러움으로
꽃피어
만발하다.
----------------------
+ 가문을 위하여
할애비는 고박머리 머슴이었다고 하고
아버지는 전대를 찬 소장수였다고
어머니는 전한다.
어머니는 나의 밥
어머니를 먹고
어머니를 누고
일곱 손가락
마디마다
훈장처럼
고루 긁었다.
---------------------
+ 가문을 위하여
어느 날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보았다.
관棺도 옷도 화化했다.
뼈도 살도 화했다.
검은 부스러기
흙 한 줌.
무엇으로도
화하지 못한 채
검劍처럼 혼자 울고 있었다.
--------------------
+ 가문을 위하여
200자 원고지 한 칸 한 칸이
모두 생지옥이듯이
나의 가문은
나의 감옥.
가문은 또한
진창을 더 좋아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이蟲 새끼라고
족히 우상한다.
미치광이여.
마침내
가문을 위한다면
먼저 자기부터 처형해라.
--------------------
+ 큰 나무 밑에서
큰 나무 밑은 그늘도 크고 깊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 큰 나무의 나이를 읽고 간다.
큰 나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이를 알려준 적 없건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큰 나무의 나이가 몇백 살은 족히
될 거라고
큰 나무 밑에서 비밀스럽게 이야기한다.
큰 나무는 그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큰 나무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다.
큰 바위나 큰 바다라고 불러도 좋다.
사람들은 큰 나무니까 그렇겠거니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큰 나무는 정말 큰 바람에도
큰 눈에도 끄덕 안 하고 사시사철 큰 나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말하면 큰 나무는
말없이 거룩한 성자와 같다.
하찮은 것이라도 절대 큰 나무 밖으로 밀어내는 법이
없다.
가난한 새에게도 쉴 자리를 내주고
가끔 나에게는 큰 나무의 큰 눈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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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묘지공원
외국인
묘지공원에서
나 혼자서 간 적 있다.
악어의 등처럼 검푸른 한강이 옆에 흐르고
언덕엔 세월이 주름을 그은 나무들이 덜덜 떨며 서 있
었다.
성당엔 가마솥만한 커다란 쇠 종을 달아놓았다.
누구든 와서 한번 시퍼런 이마로 부딪혀볼 테면 부딪
쳐보라고.
나, 이마를 칼날 세월 부딪쳐보고 싶었지만
땅에 너무 깊이 발을 내리고 있어
하늘의 종까지는 너무 멀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측백나무들만이
제 나라의 모국어로 쓰여진 비문碑文들을
불꽃처럼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 그곳
외국인 묘지공원에서 가서 보았다.
삶의 명세서같이 어두워오는 저녁 무렵. 허공에서
아직 닻을 내리지 못한 채 희끗희끗 떠도는 가엾은 눈
발의 무리들
그때 한강이 저만치서 어디론가 바삐 흘러가고 있었다.
---------------------------
+ 계단을 고치는 사람
이른 아침 두 노인이 계단을 고치려 왔다.
이 집이 버텨온 세월만큼이나 계단 또한 그 노인처럼
늙었다.
모래와 시멘트와 물의 적당한 비율과 어떠한 체중에도
견딜 수 없는
단단한 돌들을 골라 계단 깊숙이 박아넣었음에도
너무 오랜 시간 지상의 무게를 견디느라
계단의 피부가 벗겨지고 마침내 바닥은 움푹 패어 비
가 오면 그대로 눈물이 되어 고였다.
흉터처럼 지나온 발길에 가장 고통스러웠을 계단의 모
서리는
어느 바닷가 뒷골목 이제는 팔리지 않는 늙은 창녀의
손톱처럼 문드러져 보기 흉했다.
삶을 다 살아버린 듯한 표정의 노인 둘이 뒷호주머니에
낡은 목수건을 찌른 채 부지런히 삽과 괭이를 움직인다.
우리 앞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계단을
고치는 것이다. 마치
그 계단이 고쳐지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자신들이
그 계단을 밟고
지금보다 더 나은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듯이 땀
을 힘껏 밀어내며
담배 한 대 태우지 않고 그렇게 열심인 것은 정말 기적
에 가깝다.
----------------------------
+ 나무를 때리는 사람
누가 어둠 속에서 투닥투닥 나무를 때리고 있다
그는 전주식당의 주인 박씨, 나는 깜짝 놀란다.
웬 밤중에 나무에게 매질이라니.
그 나무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은행나무.
노란 은행을 주렁주렁 메달처럼 달고 있는
이 도시를 나처럼 힘겹게 견디고 있는 가로수.
지독한 매연과 형벌 같은 소음에도
아름답게 물들 줄 안 노오란 이파리들, 그 속에
알알이 열매 맺은 은행까지
은행나무는 여태 용케도 잘 참고 살아왔구나.
그런데 왠 아닌 밤중에 매질이라니.
그 은행 따서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혈액순환이 잘돼 혈색도 좋아진다고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은행나무 밑에서
그 박씨 아저씨 밤새 끙끙댄다.
산다는 게 타산打算이 안 맞아
일하는 아줌마도 두지 못한다는 전주식당.
낮에는 마누라 등쌀에
50이 넘은 그가 쟁반을 들고 배달을 나가지만
그 은행 구워 먹어서인지 혈색만은 젊은 사람 뺨친다.
________*59
불태운 시집
===1>
땅꾼
막내
실향
할매
-------
개 주인
나주 배
무당꽃
외갓집
---------
기억의 꽃
길 끝의 집
입산 금지
포장마차
-------------
엿장수 가위
어머니의 겨울
흥복사에 와서
===2>
개망초
그 술집
무창포
무창포
---------
전주천
조선낫
파도리
눈이 온다
-----------
다 탄 연탄
얼음 공주
청거북이
금강 하구에서
------------------
감잎 하나의 옛집
무덤을 파는 여우
장미 가시 위에 쓴 유서
===3>
1년
산불
학살
강천사
--------
양서점
외딴방
나무의 피
거울 숲에서
--------------
불태운 시집
서해훼리호
아버지 없는 봄
죽은 누이를 위하여
-----------------------
라일락 나무를 위하여
어느 날의 바다는 내게 이렇다
===4>
노인
별빛
수탉
이쁜 풀
---------
절에서
아름다운 손
가문을 위하여
가문을 위하여
-----------------
가문을 위하여
가문을 위하여
큰 나무 밑에서
외국인 묘지공원
---------------------
계단을 고치는 사람
나무를 때리는 사람
시인 마당/시인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