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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로
몸 부릴 곳은
도처에 널려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폭풍에 날리는 나뭇잎이구나
오래 마음을 싣고 달려온
몸이여,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로
아우성치는 팔다리 끌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느 길모퉁이에
사나운 마음 부러 놓고
군데군데 칠 벗겨지고 녹슨
빈 수레로 서있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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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에서
때늦은 가을 태풍 몰아치는 아침
신도림역 지하도 빠져나와
길 건너는 한 떼의 처녀들
반바지, 혹은 치마 사이를 빠져나온
늘씬한, 미끈한, 탱탱한 허벅지
울돌목 거슬러 오르는 숭어 떼처럼
빗방울 헤치고 가는 맨 종아리들
종종걸음 쳐서 제 삶터로 흩어져 간다
거기 문 묶어둔 채
막 한 마리 연어처럼
헌화가獻花歌 부르던 노인의 시간으로
거슬러 오르려는 참인데
눈치 없이 등을 떠미는 경적 소리
마지못해 내가 떠난 자리에는
힘을 모으고 자세를 잡는 동안
떨어져 나간 비늘 몇 개 흩어져
비에 젖고 있겠지만
그게 날개 꺾인 꿈의 흔적이란 걸
알아차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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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보살
나무 한 그루가 온전히 한 세상이다
가지는 지친 새에게 내어주고
썩은 구멍 다람쥐에게 세놓고도
월세 한 번 독촉하는 법 없다
딱따구리 한 상 잘 차려 먹고 간
나무 구멍에 깃든 딱새 울부짖는 사이
알을 삼킨 누룩뱀 유유히 사라지고
개미들은 먹이를 나르느라 분주하다
고단한 누구에게든
기꺼이 그늘 한 뼘 내주고
서로 쫓고 쫒기다 먹고 먹히다
밤이면 한 나무 위에서 잠드는
가여운 것들 품고 한 생 견디다가
쓰러져 썩어가면서도 사슴벌레 애벌레 키우고
마침내 토막토막 시린 마음 덥히는
불꽃으로 피어나는 나무
나누 한 그루가 온전히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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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별곡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육십 년을 헤매고도
마음 내려놓을 곳 찾지 못해
생의 가장자리를 서성대는 밤
아무리 삭제 버튼을 눌러도 지워지지 않고
꺼버릴 수도 리셋할 수도 없는 인생
동동動動으로도 만전춘滿殿春으로도 살아보지 못하고
청산별곡으로 사는 사내의
숨죽인 울음소리처럼 가랑비 내리는 밤
이런 밤에는 무쇠같은 사내도
제 눈물에 익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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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많은
너무 많은 불빛 속에서 별빛을 잃고
너무 많은 길 안에서 갈 길 잃고
너무 많은 말들 속에서 할 말 잃고
너무 많은 사랑 속에서 사랑을 잃었다
말을 전하고 퍼뜨리는
너무 많은 도구들 사이에서
눈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읽는 법
침묵에 귀 기울이고 법을 잊어버렸다
그러니 너무 많은 사람 속에
숨어있는 너여
나는 무엇에 기대여
너를 찾을 수 있을까
네 가슴 빈자리에 스며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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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싸움
말다툼이라도 한 날이면
한 평도 못 되는 이부자리는
폭풍 이는 난바다가 된다
까마득한 절벽으로
솟아오른 그대에게 가기 위해
몇 개의 파도를 건너야 하나
몇 번이나 전복되고
침몰해야 하나
날 선 목소리에 놀라 날아간
까막까막 불러 모으기 위해
또 얼마나 목청이 쉬게
노래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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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길에서
오랜만에 동네 뒷산 올라가는데
문득 무릎에서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세상이 나를 밟고 가는 건지
내가 세상을 밟고 가는 건지
내가 나를 밟고 가는 건지 알 수 없다
몸이 마음을 끌고 다니던 시간 지나고
이제는 마음이 몸을 끌고 가는 걸까
하기는 몸과 대화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여기저기서 SOS를 타전하는
몸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본 것은
혼자 우두커니 서서
내가 끌고 온 길들 돌아보다가
추파 던지고 달아나는 여인처럼
끝이 보이지 않은
산길을 따라 마음이 흐르고
무거운 몸이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간다
그렇게 뒤뚱거리며 걷는 산길
사람의 마을 아득한 지점에서
문득 평생 낮설어하던 마음과 몸이
비로소 손잡고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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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처방
어쩐지 온몸이 으슬거리고
뼈마디마다 한기가 드는 저녁
나도 이제 한물간 모양이라고
슬쩍 엄살 피워보는 것은,
깊이 감추었던 상처 한 자락
내보이고 싶다는 얘긴데
아내는 공연히 병 키우지 말고
병원에 가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가벼운 감기는 그저 몸으로 때우고 마는
내 미련한 습관을 단칼에 무찌르는
아내의 합리주의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나는 문득 그게 서운하다
아직 병이 아닌 이 시점에 절실한 것은
열에 뜬 이마 위에
첫눈처럼 서늘하게 얹히는 손길
어두운 창가에 내리는 별빛처럼
가만히 굽어보는 그윽한 눈길인데
더할 수도 뺄 수도 없고
흠잡을 데 없는 아내의 합리주의여
오늘 저녁 내가 발 뻗을 자리는
어디, 누구 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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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무중五里霧中
나는 우화羽化한 나비가 남겨 놓은
빈 고치 같은 경전 속에
길 잃고 헤매는 중이다
온갖 달콤한 약속으로 나를 가둔
숱한 우리들을 부수는 중이다
자본이 불 지핀 욕망이 피워낸
자욱한 연기煙氣에 중독된 채
희미한 연기緣起의 끈을 더듬어
집 나간 소의 발자국을 찾고 있는 중이다
아직 내게로 오지 않은 것들과
나를 거쳐 세상으로 돌아간 것들 사이에서
입맛 다시고 있는 중이다
죽음을 연기延期하기 위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연기演技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굳어버린 전생을 밟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승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를 딛고
내생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모든 것을 허무는 허무와 싸우는 중이다
내가 걷는 길은 첩첩산중이고
내 앞에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나는 낯익은 나를 버리고
여전히 멀기만 한 내게로 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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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부 유감遺憾
속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빼앗지 않고
두 손 비벼 아부하지 않고
머리 숙여 구걸하지 않고
이만큼 살았으니 그만하면
잘 산 것 아니냐고 큰소리치다가도
함께 전장을 헤쳐온 전우
아내와 눈 마주치면 웬일인지
목소리에 영 힘이 실리지 않는다
물려줄 회사도 교회도
땅도 나라도 없는 애비의 자식으로
출정을 준비하는 아이 앞에서는
아예 하고 싶은 말도 접고
그저 헛기침만 할 뿐
몇 번이고 쓰러지고 상처 입는다 해도
속 끓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을 터이니
이따금 등이나 두드려주는 수밖에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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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부른다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무른 쇠였던 나를
푸른 날의 칼로 벼려낸 것은 너였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무찔러야 할 네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울타리 뒤에 숨어
겁먹은 눈으로 세상을 엿보는 어린 짐승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 만든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너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어찌 너에게서 배우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나를 넘기 위하여
안간힘 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 사랑하는 너여, 여전히 굳세어라
행여 쓰러지더라도
더 질기고 강한 채찍으로
더 크고 날카로운 칼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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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격수에게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있는 것은
틈틈이 운동으로 기동하고
온갖 음식과 약을 은폐, 엄폐
툭하면 병원으로 도피한 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
언제나 나를 놓쳤을 리 없지
아마 일찌감치 조준선 정렬 끝내고
가늠쇠 위에 내 몸통 올려놓은 뒤
시시각각 조준점 옮겨 가면서
병목 걸린 혈관 굳어지는 간
찐득이는 타르가 숨을 붙잡는 폐
고장 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심장
어디를 맞출까 언제쯤 방아쇠를 당길까
고민하고 있었겠지
느닷없이 당신의 방문을 받은
전우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말하더군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서
온갖 생존법, 도피 및 탈출법
부비 트랩과 지뢰를 피하는 방법을 익혔어도
도저히 당신의 가늠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지금까지 당신의 조준 빗나간 적 한 번도 없었다더군
그러니 조만간 너도 그를 만나게 될 거라고
운수 사납게 나를 앞지른 전우가
환히 웃으며 알려 주더군
그러니 어느 날 불쑥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겠네
호시탐탐 나를 노린 당신을 미워하지도 않겠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조그만 더 시간을 주실 수는 없겠나
아직 멎지 않은 겨드랑이의 근질거림 멎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할 염치는 없지만
치러야 할 셈 가려야 할 빛
하나라도 더 가릴 때까지만이라도
비장과 골계 사이의 어디쯤 일지 알 수 없는
이 고단하고 아름다운 형역形役을 끝내줄 시간
잠깐, 아주 잠깐만, 늦춰 주시기를
그리고 당신의 바지가랑이에 매달려 울부짖지 않도록
제대로 된 단 한 방으로 끝내주시기를
나뭇잎 끝에 부서지는 저녁 햇살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홀가분하게 길 떠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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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기다리며
ㅡ옛 노래의 운을 빌려
네가 길 떠날 채비 끝내고
막 첫 발자국 떼어놓았다면
나, 자리 걷고 일어나
마당 정하게 쓸어놓으리
울바자 밖 하염없이 내다보리
해 지난 자리 채우는
구름으로 너의 얼굴 그려보리
아침이면 까치 울음소리
저녁이면 동구 밖 개 짖는 소리
온몸으로 귀 기울이리
깃털 같은 너의 걸음에
귀를 쫑긋대던 개들이 컹컹대기 시작하면
조만간 사립 밀치고 들어설 너를 위하여
저녁 안치고 국 끓이리
미리 술 거르고 등불 심지 잘라두리
몇 날 밤 깁고 누벼 하나로 엮으리
암만 볼 때도 냉기 가시지 않는 방에
가려 딴 댓잎으로 자리 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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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잠 깨어
달도 진 새벽
향림사* 쇠북 소리는
돌부리에 발 걸리는 일 없이
누구에게 길 묻는 법도 없이
잘도 길을 찾는다
등 시린 잠 깨어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내
용케도 찾아내서
살포시 어깨 끌어안고
가만가만 법문 들려준다
쇠북 소리 풀잎 위에 내려앉고도
해 뜨기까지는 아직 한참인데
어쩐지 눈 밝아지는 듯
마음 한구석 따뜻해지는 듯
*향림사 : 신라 시대에 창건된 송광사의
말사로 전라남도 순천사.
정확히 말하자면
순천대학교 후문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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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시난테를 타고
무수한 말들이 나고 섞이고
피 흘리며 싸우다 죽는 전장을 헤매며
내 마음 오롯이 담을 말
나를 네게 실어 나를 말을 찾아 헤맨다
허다한 말을 버리고 죽인 끝에
욕망과 기억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겨우 건져 올린 말
입에는 침 마르고 혀는 굳고 목은 쉬었으니
온전히 몸을 받기나 했는지 모를 말
듬성듬성한 갈기 닳아버린 발굽
주저앉을 듯 비틀거리는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
둘 시 네야, 네가 갇힌 곳은
세이렌이 머리 빗으며 노래 부르는
얼마나 거칠지 알 수 없는 바다 건너
대체 몇이지 헤아릴 수 없는 거인들이
길을 막고 있는 광야 저편 어디쯤
노래를 멈추지 마라 둘시네아
이어지는 노래가 앞선 노래를 밀어
그 한 자락 마침내 내 가슴에 닿을 때까지
들끓는 그리움으로 키워낸 나의 애마 나의 애물
로시난테를 타고 네게로 간다 둘시네아
얼마나 더 길 잃고
얼마나 많이 패배해야 할지 모르지만
너를 찾아 나는 바람 부는 길에 나선다
갑옷도 칼과 방패도 없이
꺼지지 않은 꿈과 사랑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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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그 치명적인
치명적인 사고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랜 혼수에서 깨어난 뒤에다
비로소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사랑 또한 그렇다
취한 듯 중독된 듯
이마를 비추는 별빛을 따라 걷다
문득 가슴에 찍힌 화인火印울 더듬으며
내 생애가 멈출 수도 없이 돌이킬 수도 없이
너에게로 가파르게 기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생의 도처에는 너는 보석처럼 발굴된다
너의 눈길, 너의 목소리, 너의 온기
웃음기 머금은 입매 살짝 찌푸린 표정까지
유성우처럼 내 가슴속에 뛰어들던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늘 목마르게 했다
그러니 이 사랑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느냐고 묻지 마라
================
+ 길을 묻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 길 안에 갇혀
길 잃고 우는 아이들아
길 밖에서 길 잃고
헤매는 것 겁내지 마라
피어날지 걱정하지 마라
무릉武陵에 닿은 것도
실은 길 잃은 자였으니
낡은 지도에 목매지 말고
시효 지난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말고
피의 뜨거움에 너를 맡기고
너를 흔드는 마음의 설렘의 따라가라
네가 마주친 벽의 높이
네가 헤맨 골목의 깊이와
네가 헤쳐가는 광야의 넓이가
너의 지도로 살 속에 새겨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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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지하철역에서
철로 위를 미끄러지는 쇠바퀴 소리가
첼로의 저음을 갈갈이 헤쳐놓는다
한때는 천재, 혹은 신동이었음 직한
사내의 굽은 잔등 위에서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의 껍질들
갈채도 환호도 없이
헛헛한 속처럼 입 벌린 낡은 악기 케이스에
가랑잎처럼 떨어져 쌓이는 지폐들
이상하게도 그게
물 마른 지 오래인
눈물샘을 툭 건드린 모양이다
중년의 사내가
제 인생을 활로 문지르며
낮은 울음을 토해 내는
낮선 도시의 지하철역에서
나는 눈물 속에 발 담그고
채 피기도 전에 져버린
기억 속의 꽃들 한꺼번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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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늘 계산기 두드리고
따지고 조바심치는 머리와
아무렇지 않게 빚 문서 찢어버리는 가슴 사이
낯 붉히고 험하게 삿대질하는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으려면
아예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는 수밖에 없으리
내 이마를 비추던 서늘한 별빛 그대 가슴에 심고
그대가 빚어낸 꿈 내 차가운 뺨 덥히도록
뜨거운 가슴으로 따지고 차가운 머리로 껴안는,
아직 누구도 터득하지 못한 법 익히려면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하리
*김수희의 <애모>라는 노래의 첫 구절에서 따왔다.
====2>
+ 봄
ㅡ탈주하는 것들
눈과 얼음으로 문 닫아걸고
잿빛 묵언수행 하던 나 무들이
살랑이는 봄바람에 바람이라도 난 듯
아예 한꺼번에 환속하려는 모양이다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맨 가지 위에 꽃송이부터 매달고
한껏 맵시 부리는 생강꽃 산수유꽃 벚꽃
겨우내 쌓인 때와 먼지 털어내고
속 비칠 듯 엷은 연둣빛 옷 걸치느라 분주한
굴참나무, 때죽나무, 느릅나무
대체 찬바람 몰아치는 얼음 왕국에서
색 쓰는 법은 어떻게 배웠는지
가기 끝에 떨어지는 햇빛에서
색 캐내는 법 어떻게 배웠는지
어떻게 색 밝히는 즐거움 알게 됐는지
온갖 색으로 한껏 단장하고 속닥거리다
서로 몸 부딪히치고 깔깔거리며
산자락 감돌아 가는 강물에
몸맵시 비추어보는 저 싱싱한 몸뚱이들
이제 이것들 스미고 번지는 서슬에
이것들 퍼뜨린 살 내음에
겨우내 앞발을 핥던 곰들 깨어나
주린 배 채우러 산을 쏘다니고
사슴들은 여기저기서 뿔 맞대고 힘 겨를 테니
온 산이 시끌벅적, 야단법석이다
어떤 이름에도 갇히지 않으려는
산 것들의 이 몸부림을
대체 어떤 계율로 막고
어떤 울타리로 가둘 것이냐
한 생 넘어 다른 생으로
흘러넘치는 더운 피들이 펼치는
이 잔치판에 나도 슬쩍 한 발 걸치고
제대로 색 한번 써보고 싶다
--------
+ 숲
숲은 고요하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갈참나무가 소나무를 밀어내고
구렁이처럼 줄기를 휘감은 칡덩굴 가래 덩굴이
애써 둥치를 키운 가죽나무 몸통을 조인다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목숨 걸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거미줄에는 나비와 잠자리 빈껍데기가
깃발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솜털도 나지 않은 뻐꾸기 새끼는
오목눈이 알을 밀어내고 둥지를 차지하고
어미 새가 애타게 지저귀는 그 자리에서
뱀은 태연하게 알을 삼킨다
서로 먹고 먹히는 것들
쫓고 쫓기는 필사의 경주가 벌어지는 동안
숲 그늘 아래 벌레들은 알을 낳고
바위 잔등 위에 낙엽 위에
상수리 열매 떨어져 구르는 소리
밤송이 벌어지는 소리
썩은 나무등걸 위에서
갓을 펴고 포자를 날리는 버섯
주검을 딛고 일어서는 것들의 힘찬 숨소리
그 모든 소란과 뒤설렘 속에서
숲은 드디어 악을 품어
늘 그리운 마음의 풍경이 된다
---------------
+ 고가古家
적어도 한 번쯤은
힘찬 첫울음과 애도의 울음이
마당 가득 흘러넘친 뒤에야
집은 비로소 삶이 고이는 그릇이 된다
고지식하게 쌓인 시간 무게에 늘려
사개 틀어진 처마 밑엔
해마다 제비가 깃들고
이끼 낀 돌담 틈으로는
아따금 몸피 굵은 구렁이가 드나들고
온갖 데 거쳐 온 바람의 냄새가 쌓인 마당
달빛 아래 어슴푸레 빛나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아랫목 이불속에는 그리움처럼
따뜻한 밥 한 그릇 묻어둔,
어느 곳을 들춰도
짙은 녹이 덮인 유물 같은 기억들
느릿느릿 기지개 켜며 깨어나는 집
손때 묻고 모서리 닳아진 것들이
까칠한 손으로 손주 배 쓸어내리는 할머니 손길처럼
시린 마음 어루만지고 다독인다
오래 고이고 삭은 삶의 냄새
배어 나오는 그런 집에
지친 몸 다친 마음 부릴 수 있다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는 해 바라볼 수 있다면
---------
+ 나무
나무는 푹풍 속에 몸 흔들며
제 속에 숨은 나무를 캐내고 있다
흔들리는 서슬에
나무를 품고 있던 숲 그림자 흩어지고
그 그림자 속에 숨기고 있던
나뭇잎들 하나하나 기운차게 살아난다
나무는 나무 아닌 것과 싸우면서
제 안에서 저를 허물고 있는
저의 약함과 싸우면서
가지 꺾이고 아예 중동이 부러지기도 하면서
어둠 속에 좀 더 깊이 뿌리내려
비로소 나무가 된다
한바탕 비바람 지나간 뒤
빗방울 털어내고 일어선 나무들
새로 난 가지 뻗어
서로 어깨 비비고 상처 어루만지면서
저마다 좀 더 선명한 나이테를 두르고
한층 짙어진 잎 속에 저를 묻는다
========
+ 대춘待春
이제야 마음이 눈 뜨는가
애써 보지 않으려 해도
저만치 봄이 오는 게 보이니
새잎 날 자리 가려운지
나무들은 연신 바람에 몸 비비며
마른 우물에 두레박 던지는 처녀들처럼
조금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마른 풀숲 속에는 박새 몇 마리
까칠한 깃 고르느라 분주하다
아마 예사롭지 않은 이 숲의 움직임을
눈치챈 건 나만이 아닌 듯
숲이 깨어나는 그 모든 소란에도
먼 골짜기 얼음 깨지는 소리 들리니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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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冬柏
수자리 살려 간 사내
기다리는 아낙처럼
쨍한 추위를 견디고 있다가
눈발 휘날리는 아침
적장 껴안은 기생처럼
붉은 치마 뒤집어쓰고
단호하게 몸을 던지는 꽃송이
눈 위에 떨어진 각혈처럼
선명한 몇 개의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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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하盛夏
이것도 모르느냐고
책상 두드리며 호통치는 훈장처럼
마른천둥이 빈 하늘 두들기자
논물 위로 머리만 내놓은 채
자왈子曰 자왈 자왈 자왈
책 읽는 시늉하던 개구리 떼
깜짝 놀라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고
한바탕 하늘을 쓸어가는 바람에
벼는 벼대로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취한 듯 몸을 흔들어
뜻 모를 글자들을 쓰는 밤
논둑 콩깍지에는 알이 차고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지
벼 포기도 조금 고개를 숙인다
---------
+ 연꽃
비에도 젖지 않고
때와 먼지도 단호하게 떨쳐 내는 연잎
그 정갈한 법석法席을 피워내는 것은
염불도 아니고 독경 소리도 아니고
손톱 젖혀지는 줄도 모르고
여름내 연못 바닥 진흙탕 속을 더듬은
눈물과 한숨의 탁발행이다
그 야단법석野壇法席 위에
그윽한 미소로 가부좌 틀고 앉은
연꽃 한 송이
그 깊고 아찔한 색에 눈 붙들렸으니
산모퉁이 돌아간 소 울음소리 들려도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네
=====
+ 외설
어어, 저기 저 흐드러진 복사꽃들
색 쓰는 것 좀 보아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고운 속살 드러내고
꽃가루 받아들이고 있는
저 꽃들의 외설스러움
바람 한 점 없어도
용케 무르익은 살 내음 풀어내
지가나가는 벌 나비 죄 불러들이고
이 산 저 골짜기 숨은
길짐승이며 날짐승 깨우는
저 못 말리는 바람기
부러워라
저 색 쓰는 힘으로
마침내 주렁주렁 열매 맺어
주린 짐승들 먹이고
지금 여기 못 박힌 저를 넘어
또 다른 시간 속으로
힘차게 발 내딛을 터이니
---------------
+ 운석隕石
저를 불살라
길 찾는 누구에게나
고루 길 일러주던 별 하나
불타는 몸 그대로 어둠을 건너와
지구 한 귀퉁이에 몸 부렸으니
오래 마음 닦은 별의 사리舍利
그 속에 오롯이 담긴 깊고 그윽한 뜻
과연 누가 읽어낼 수 있을까
---------------
+ 조장鳥葬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티베트에서는
혼이 떠난 육신을 잘게 찢어
주린 독수리들에게 먹인다더군요
위생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제게 아낌없이 몸 내어준 세상에 진 빛
닭 한 마리로은 어림도 없는 그 빛
제 몸으로 제대로 갚으라는 뜻인 게지요
겨울 숲에 들어
육신을 보시한 스님처럼
이제껏 저를 실어 나른 낡은 몸
주린 것들에게 내어주고
다른 몸을 입으라는 축복인 거지요
인생이 축생이 되고
축생이 다시 인생으로 돌아오는
윤회의 바퀴가 그렇게 굴러가는 거지요
어둠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희디흰 산봉우리 위로 날아간 새는
언젠가 꿈꾸는 자의 이마에
눈 시린 별빛으로 내려앉을 테고요
---------------
+ 파적破寂
떼쓰고 어리광 부리는 녀석들
간신히 어르고 달래
헐렁한 승복 속에 가두어놓았더니
웬걸, 삼십 분도 못 돼
콩깍지를 뛰쳐나온 콩알처럼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절간 마당에 흩어진다
처마 밑 물고기 천천히 꼬리를 저어
맑은 소리의 바다를 건너는 동안
감은 듯 뜬 듯 실눈으로
달아나는 애기중들 바라보던 부처님
입꼬리에 흐뭇한 웃음 매달리고
산문 지키고 선 천왕은
풀어진 고리눈 부릅뜨느라 애쓰는데
바람도 없는 절간 한구석 배롱나무
누가 간질이기도 한 듯
제 홀로 가만가만 가지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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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편지
너를 향한 그리움
첫 단풍잎에 적어
시린 계곡물에 틔워 보낸다
네가 젖은 단풍잎으로
고단한 마음 씻어낼 즈음이면
가을은 이미 깊어지고
나는 저녁 햇살 속
마지막 이파리 떨구고 있겠지만
산이 울고 소쩍새 화답하는 밤
이 산 속 어딘가 창가에 불 밝히고
너를 기다리는 내가 있음을,
우두커니 서서 돌이 되어가고 있음을
부디,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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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샘잎샘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별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듯
한바탕 하늘 휘저어
공연히 눈발 나리고 비 뿌려
기어이 초저녁 별처럼 돋아난 꽃잎 떨구고
잎 틔울 가지도 몇 개 부러뜨리고서야
입맛 다시며 쫓겨 가는 심술궂은 바람
저희가 벌어놓은 모든 난장이
실은 숨죽이고 있던 꽃들
불러내는 신호인 줄도 모르고
시샘질해대는 바람의 헤적임에
뿌리는 더 단단하게 땅을 움켜쥐고
가지는 가지대로 서두러 잎을 틔워
빗방울보다 더 많이 꽃눈 틔워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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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전후
벌레들이 일제히 숨죽이고
풀잎도 살랑거림 멈추고
가랑잎도 버석대지 않는다
수풀 속에 몸 숨긴 삵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온몸의 힘을 모으고
먹이를 향해 몸 던지기 직전, 바로 그때
달은 구름 뒤에 숨고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아직 잠들지 않은 어린것들 눈을 가린다
아주 잠깐 진저리 친 산이
숨 돌리고 몸 추스르자
여치는 다시 날개 비벼 짝을 부르고
달빛은 아직 떨고 있는 나뭇잎
가만히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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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온臥溫* 낙조
첨산尖山* 마루턱에 걸터앉은 해가
긴 혀를 내밀어 뻘밭을 핥고 있다
뻘에서 나서 뻘에서 죽는 것들
서로 먹고 먹히는 게 한생인
서럽디서러운 것들
뿔뿔이 달아는 칠게 말똥게
혼인색으로 치장한 짱뚱어 등짝을 핥고
뻘밭에 얹힌 폐선 뱃머리를 핥고
길 잃은 고기들 가둔 웅덩이에 이르러
마침내 황금빛 서기로 빛나는
와온 바다 저녁 햇살
눈도 못 뜬 채 꿈틀거리는 새끼들
똥구멍까지 샅샅이 핥아준 늙은 어미 개가
깊고 부드러운 어둠의 날개로
제 새끼들이 품어 재운다
*와온臥溫 :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의 바닷가 마을.
*첨산尖山 : 와온 마을 갯벌 건너편에 있는 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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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토모리
나무마다 새잎 틔울 자리 내느라 분주하고
냉이, 달래, 쑥, 머위들이
앞다퉈 새싹 밀어 올리느라
들판과 산자락 온통 술렁거리는데
동네 복판 마을회관 화투판에는
또 빈자리가 생기고
손에 든 패를 들여다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늙은이들
버리 비린 몸 냄새만 떠도는 마을
밤에도 불 켜지지 않는 집이 늘어가자
산은 가슴 언저리까지 걷어 올려졌던
치맛자락 끌어내려
상처 입은 아랫도리 가리고
그 품 안에 길 잃은 짐승 거두고 있다
-------------------
+ 두루 돌아봄
어디쯤 오고 있는지
어디쯤에서 시린 발목 주무르며 쉬고 있는지
창틈으로 담장 너머로 내다봄
온몸이 눈이 되어
훈기 도는 산과 들 찬찬히 훑어봄
먼 골짜기 눈 녹아 흐르는
소리에 빼꼼 고개 내민
복수초 노란 꽃잎 지긋이 들여다봄
꽃샘잎샘 바람에 떨어지는
매화 꽃잎 하나둘 헤아려봄
휘날리는 벚꽃잎 사이를 걸어봄
넘치는 꽃향기 온몸으로 쓰다듬고 맡아봄
막 머리 내민 냉이 달래 맘껏 캐어봄
햇살 아래 환한 진달래 꽃잎 하나씩 따 먹어봄
새끼 품고 긴 겨울 견뎌낸 다람쥐
물오르기 시작한 가지 끝에 앉아
막 피어나는 모든 어린잎과 함께 나를 훔쳐봄
바람에 마음 실어
먼 그대에 날려 봄, 혹은
목 놓아 그대를 불러봄
그러고도 마음 차지 않아
자꾸만 뒤돌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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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꽃 단상
목련꽃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대신
고운 비상의 꿈에서 시작해서
끔찍한 추락으로 마무리되는
목련꽃의 서글픈 변검變儉을 보면서
환등幻燈같이 지나간 여자의 일생,
그 바닥 없는 유전流轉의 역사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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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이는 숲
솔씨 더덕씨 산마 씨앗이
바람에 몸을 싣고
골짜기를 건너고 산을 넘는다
다람쥐는 가랑잎 아래 도토리를 묻고
새들은 이 나무 저 가지 옮겨 다니며
온갖 씨앗 담아온 속을 비워낸다
늘어선 나무와 등걸 사이를 오가는
족제비 다람쥐 오소리 살쾡이 너구리
터럭 위에 슬그머니 올라탄
도꼬마리 도둑놈의 갈고리 엉겅퀴 씨앗이
산길 옆 풀숲에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물기 먹은 바람이 숲을
좀 더 깊이 흔드는 저녁
잡목 숲 속에 둥지 튼 어치는
숲 그림자를 물고 어디로 날아가는지
꿈틀거리며 일어선 숲은 그 그림자 쫓아
어디까지 발을 뻗고 있는지
또 어디쯤에서 그 발 잘리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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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하였느냐?
한 달 넘데 뒤가 막혀 생고생하던 상좌가
문득 한 소식 올 기미 알아차리고
급히 해우소로 달려가 서둘러 해의解衣하고 주저앉아
꽉 막힌 분문 열기 위해 바야흐로 심오한 표정으로
용쓰고 앉았는데 때마침 상좌 찾는 노장 호통 소리로
온 절간 고요가 깨어졌겠다 그 소란 끝에 겨우
상좌 행처 밝혀지기는 했는데 이 상좌 여전히
금심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잊을 만하면 통하였으냐 묻는 노장과
아직입니다 아뢰는 상좌 사이를 오가는 애기중만 애가
타는 판,
그러다 문득 통하였으냐, 일갈 다시 떨어지려던 바로 그
참에
예, 드디어 통하였습니다. 소식 전해지니
노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슴 죄던 절집 사람들
길게 숨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겠다
그 통한 것이 무엇이었던지 어디까지였던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지 않았을 터
그해 가을 절 농사는 물론 사하촌 농사 또한 풍성하였으니
이 모든 게 두루 통하였기 때문일 터인데
일단 몸이 막힘없이 통하였으니
막혔을 때는 시름이자 근심이었던 것이
땅으로 돌아가 푹 삭고 삭은 거름이 되어
땅을 살리고 땅속 벌레를 살리고
이어지는 인연의 법을 따라
목숨 가진 것 두루 살리고 살찌웠으니
이로써 몸은 물론, 몸과 몸 바깥이 통하였음은
삼척동자도 짐작하려니와
그 통함이 과연 어디까지였던가
그 통함의 깊은 뜻이 과연 무엇이었던가는
알 수 없으나 한 사람 통한 것으로 비롯해서
사람과 천지가 막힘없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해졌으니
어찌 유쾌, 통쾌, 상쾌하지 않을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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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봄 편지
벚꽃잎 나부끼는 섬진강 변
반주 곁들인 점심상 물리로 나자
얼굴은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처럼 불콰해지고
눈꺼풀에는 졸음이 꽃잎처럼 내려앉으니
아아, 이 나른한 봄기운에
투항하지 않을 사람 누가 있겠나
복사꽃 자취 더듬어 산으로 간
사내는 돌아올 줄 모르고
산으로 가는 길은 이미 지워졌으니
갈 길도 약속도 다 미뤄두고
차라리 벚꽃잎에 몸 싣고
잠깐 봄 바다 구경이나 가려하네
빨리빨리 저무는 세상에 묶인 그대,
잠깐 자리 털고 일어서서
먼 길 떠나는 내게 손 흔드는
아련한 풍경이 되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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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게으름
뭐, 굳이 생태주의자여서라고 하기는 그렇고
약간 게으른 데다 무심해서지만
한 번도 약 안 친 텃밭은
파 한 뿌리 부추 한 줌 캐려 해도
한참 풀 속을 더듬어야 하고
고추나 가지 그런 걸 따려면
아예 피 몇 방울 모기에게 헌납해야 하는데도
나는 그게 즐겁다, 이건 일이 아니니가
비 오는 날 고춧잎에 올라앉은 청개구리
내 한 걸음을 평생도록 기어가는
민달팽이 만나는 것
어쩌다 새 모종 심을 구덩이 파면
새끼 토막 같은 지렁이 꿈틀거리는 것
아침마다 그걸 먹으려 온 두더지가
땅속을 뒤진 흔적도 다 반갑고
모기가 잠자고 방아깨비가 방아 찧는
잔디밭에 식사하러 온 참개구리
펄쩍 뛰는 것도 신기하고 대견하다
이건 일이 아니고 생업이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천하의 근본을 엿본 것 같은
민망한 착각이 드니까 몸 적시는 땀도 기껍고
남은 인생 텃밭이나 가꾸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미안하게도 염치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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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숭아 꽃물 들이고
아따, 곱게 보일 영감도 없는데
먼 남사스러운 짓이여
손사래 치며 마다하다가
쌍과부 동서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굵게 마디진 손 내맡긴 구례댁
그저 손톱 끝에
꽃물 조금 들인 것뿐인데
어디 샛서방 들인 년같이
가슴은 왜 이리 콩닥거리는지 몰라
울타리 너머로 훔쳐보던 이웃집 사내에
환한 이마가 문득 떠오르고
떨리는 손으로 손목 잡아 오던 그 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들리는 것도 같고
살아서는 늘 저만치 앞서다가
멋쩍은 듯 헛기침하며 기다려주던 영감
마중 나온다는 기별이라도 온 건지
햇빛에 이리저리 손 비추어보며
환하게 웃음 짓던 구례댁
불쑥 한 말씀 던진다
아먼, 인자 나 저승길 환해지겄네
===============
+ 애기똥풀을 노래함
저것, 저 쬐끄맣고 노란 꽃이
그렇게 대단한 배후를 갖고 있었다니
수만 년 어둠 속을 달려온 별빛과 햇빛
온 세상 휩쓸어온 바람을 그 속에 품고도
아닌 척 시치미 떼고 있었다니
땅속 어둠 길어 올려
황금 꽃 피워내는 연금의 비법을
누구에게 털어놓은 적도 없이
아예 뿌리라도 뽑을 듯
목덜미 쥐고 흔들어대는
태풍에게도 자백한 적 없이
저희들끼리만 오롯이 전해 왔다니
외딴 길가 눈길 닿지 않는 곳
드문드문 흩어져서 가만히 꽃잎을 열고
세상 한 귀퉁이 밝히고 있었다니
저 깜찍한,
깨물어 주고 싶도록 이쁜 것
------------------------------
+ 어린것들은 힘이 세다
새순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기지개 켜고
새싹은 돌은 밀치고 고개를 쳐든다
푸우, 참았던 숨 내쉬는 소리
산에 들에 가득하다
죽은 것 같던 가지 위에서 돋아나는 새살들
어떤 물감으로도 그려내지 못할
어린것들의 저 고운 살빛
목숨 걸고 산도産道를 헤쳐 나온
어린것들은 힘이 세다
그 울음으로 세상을 흔들고
벙긋대는 웃음과 옹알이로
철들지 않던 사내를
널찍한 어깨의 아비로 일으켜 세우고
겁 많던 소녀를 무적의 어미로 키워낸다
수레바퀴 아래서건 포연 속에서건
어린것들은 쉬지 않고 자란다
잠시 눈 돌린 사이에
작은 상처에도 징징대던 철부지가
누가 웃거름이라도 준 것처럼 부쩍 커서
제 어깨로 세상을 짊어지기라도 할 듯
늙어가는 어미 아비 슬며시 밀어낸다
땅거죽 뚫고 나온 새싹들처럼
단단한 알을 깨고 나오는 새 새끼들처럼
어린것들은 모두 힘이 세다
저를 가둔 울타리를 넘어
탈주하는 힘으로 빛바랜 세상을
제 색깔로 바꾸어간다
----------------------------------
+ 어는 틈엔가 어느 틈으론가
아무리 굳게 문을 닫아놓아도
어느 틈으론가 기어든 거미가 천장 구석에 줄을 치고
어느 틈으로든 바람이 새어 들어와
집 안에 고인 독기를 밀어낸다
집은 그렇게 숨을 쉰다
물샐틈없고 숨 쉴 틈 없는 곳에서
대체 무엇이 자랄 수 있느냐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사이의 큰 틈에서 비롯되었으니
아스팔트 갈라진 틈에서는 민들레가 꽃을 피우고
바닷가 절벽 바위틈에서는 해소이 자라고
사람이 떠난 집에는
지붕이며 방바닥이며
갈라진 틈마다 풀씨가 싹을 틔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불온하다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다가
어느 틈엔가 어느 틈으로든가
스며들거나 빠져나가 팔 뻗고 기지개 켠다
아무리 높은 담장을 치고
눈 가리고 입 막고 숨통을 죄도
어느 틈엔가 어느 틈으로든가 아이들은
바람 부는 벌판으로 뛰쳐나가
스스로 꽃이 되고 별이 된다
=====3>
+ 그것
말하자면 저격수처럼, 혹은 카멜레온처럼
그것은 은신과 변신의 명수다
웬만해선 바로 코앞에 서있어도
알아채기 어렵다
편리하고 세련된 상품
달콤하고 맛난 음식으로 위장하고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로 변장하고
아름답고 섹시한 여인처럼 화장하고
사랑에 빠진 연인이나
행복에 겨운 가족으로 분장하고
화려한 조명발과 놀라운 성형발로
아예 변신하고 둔갑해서
허전한 당신 품을 파고든다
그러니 그것이 펼치는 눈부신 변검變儉에
환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의 빨판에 영혼까지 빨릴지라도
그것의 위장 안에서
눈사람처럼 솜사탕처럼 녹아내릴지라도
그런데 그것의 맨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 아귀
가만히 촉수를 세운 채
바위인 듯 숨죽이고 매복해 있다가
제 앞을 지나가는 것은
무엇이든 통째로 삼켜버리라는 아귀
포만의 즐거움에 취해 있다 그물에 걸린 아귀는
매콤한 콩나물 무덤에 묻혀
또 다른 아귀들의 먹이가 된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 사이
그 비좁은 틈에서 자란 온갖 것
산과 들과 바다에서 캐고 잡고 걷어 올린
온갖 것들의 토막 난 사체들
아귀아귀 먹어치워
마침내 물아일체의 황홀경에 오르는 먹성
그러고도 허기가 꺼지지 않아
사방 두리번거리며 입맛 다시는
아귀, 늘 배고프고 목마른 귀신
나도, 당신도 늘 배고프고 목마른 아귀다
하나라도 더 먹어치우려는 아귀다툼 속에서
누가 끝까지 남아 입맛을 다시게 될지는 모르지만
-----------
+ 여러님
하나님이라구요?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이 외롭고 쓸쓸한 세상에서 어떻게
늘 딴전 피우는 하나님에만 의지해 살겠어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이 다 님이에요,* 내게는
그러니까 나를 설레게 하고 두근거리레 하는
그 모든 것 말이지요
팩맨처럼 온 천지 돌아다니며
그 땅과 더불어 자란 작은 님들 모조리 집어삼키신
사납고 탐욕스러운 이방의 하나님 말고
모든 것 품고 계시면서도
굳이 손 내밀어 쓰다듬지 않고
야단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저 먼발치서 가만히 지켜보시는 하느님처럼
누구 눈길, 손길, 발길 미치지 않아도
제 힘으로 피어나 제 색으로 빛나는 모든 것들
천지간에 님 아닌 것 없어요 내게는
해도 달도 꽃도 나무도 풀도
지렁이도 달팽이도 개미도 버려진 개들도
다 내 님이에요
그러니 나, 한번 제대로 바람나고 싶어요
갖가지 색으로 내 꿈에 스며들거나
길모퉁이에 숨어서 나를 놀라게 하는
그 숱한 님들 품에 안겨
색색거리며 잠들고 싶어요
각기 다른 꿈으로 통정하고 싶어요
*만해의 「님의 침묵」 서문 격인 「군말」에서 빌려온 것이다.
------------
+ 청첩장
봄이면 꽃가루같이
가을이면 길 잘못 든 낙엽처럼
청첩장들이 우편함에 날아든다
어떤 도량형으로도
크기와 무게와 거리를
재기 어려운 이름들을 싣고
무슨 허기진 짐승처럼 입 벌리고 있는 종이쪽
그 속에는 손익을 기본으로 하고
정치를 함수로 하는
복잡한 방정식이 담겨 있지만
그걸 산뜻하게 풀 수 있는
고등수학을 나는 모른다
이 골짝 저 골짝
바위에 몸 부딪쳐 흐르던 산골 물
몸 섞어 한 강물로 흐르게 되었으니,
여름내 마주 서서 애태우던 상사화
드디어 고운 꽃 피우게 되었으니
함께 노래하고 춤추자는 소식
오래 마음의 책갈피에 끼워놓을
은행잎이나 단풍잎 같은 청첩 하나
가슴에 날아들었으면 좋겠다
=========
+ 고슴도치
막 세상에 눈뜬 어린것들 가슴에
위생과 안전을 위해
낯선 모든 것을 향해 날 세운
가시 하나 심어주고
절대로 네 것 빼앗기지 말고
당한 것은 반드시 되갚아 주라고
더 크고 억센 가시 달아준다
수상한 시절 무사히 건너도록
여기저기 가시를 달아주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왕손처럼 가시 속에 갇혀버렸다
맞잡을 손도 껴안을 팔도 없이
웅크릴수록 날카롭게 곤두서는
가시에 제 몸 묻은 채
추운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
---------------------------
+ 무상별곡無上別曲
발렌티노 베르사체 아르마니
디올 돌체 가바나 라울
샤넬 구찌 루이비통
프라다 바버리 에르메스
지방시 끌로에 입생로랑
로마네꽁티 샤토라투르 샤토마고 샤토무통로쉴드
로얄살루트 로얄로트나가 맥컬런 발베니
카뮈 헤네시 레미마틴 마르텔
롤렉스 오메가 태그호이어 브라이틀링
파택필립 리카아 오데마피게
까르띠에 불가리 로즈몽 브레게
람보르기니 포르쉐 부가티 페라리
벤틀리 롤스로이스 마이바흐 마세라티
경景 긔 엇더하니잇고
경 긔 엇더하니잇고
---------------
+ 서울 야곡
희디흰 구름은 찢어발기고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하늘을 능욕하려는 듯
우뚝 선 빌딩의 그림자 속에서
무성하게 돋아나는 크고 작은 음모들
그 가지 끝을 장식한 조화造花와
그걸 비추는 조명들로
모든 땀 냄새와 눈물 자국
오염과 타락의 증거들을
감쪽같이 지워버린
저 자본의 눈부신 조홧속
화려하고 장엄한 서울의 밤을 밝히던
조명이 꺼지고 맨얼굴 드러난
새벽 거리에 조화弔花를 바치는 자는 누구인가
--------------
+ 탑골공원
소풍도 잔치도 없이
여러 바다를 건너오면서
몸 안팍 절 대로 전 조기 떼
비명을 지를 참이었을까
풀어놓으면 소설책 열 권은 너끈히 될
사연들을 털어놓으려던 참이었을까
캄캄하게 벌어진 입
딱딱하게 굳은 혀 감지 못한 눈
굽은 등 그대로 해풍에 삭는다
눈물로든 땀으로든
가슴속에 소금밭 하나쯤
너끈히 품었을 늙은이들
부연 햇빛과 매연 섞인 바람 속에
곰삭아 가고 있는 탑골공원
만세도 함성도 사라진 자리에 앉아
차마 잊혀질세라 지워질세라
녹슨 훈장 같은 무용담 늘어놓으며
좋았던 왕년을 견주고 있는
늙은이들 머리 위에
늘어선 빌딩 그림자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
+ 백화점에서
홍등가 지나는 취객처럼
집어등 불빛에 홀린 물고기처럼
거미줄 친 꽃밭 위를 나는 꿀벌처럼
기갈 든 듯 허기진 듯 홀린 듯 취한 듯
온갖 상품들이 펼치는 포르노에 눈이 묶인채
백화점 매장을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쉴 새 없이 나를 밀어내고
내게 이식되는 욕망으로
넝쿨처럼 무성하게 뻗어가는 손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조명 아래 환히 드러난 상품들의
매끈한 속살을 눈으로 핥으며
그저 어색하게 입맛만 다실뿐이다
나의 허술한 수입으로는 열 수 없는
진열장 안에서 내 등급을 매기고 있는
저 상품들의 쌀쌀한 시신 아래
한여름에도 팔에 소름이 돋고
한겨울에도 등에 식은땀 흐른다
-------------------
+ 어떤 한국어
야 이 병신 같은 새끼
일 똑바로 못 해?
제 안의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그의 속에 잠든 괴물을 깨우는
주문인 줄도 모르고
말과 일 모두 서툰 외국인 노동자에게
함부로 욕을 퍼부은 사장이 있었다
적을 향해 쏜 총알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사수의 뒤퉁수에 구멍을 내듯
돌아서 가는 사장의 등 뒤에서
노동자가 갓 배운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병신 같은 새끼
욕심만 많아가지고.....
----------------------------
+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족한 줄 알면 욕될 일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리라*
이천오백 년 전
푸른 소를 타고
흙바람 속으로 사라져 간
노인을 그렇게 말했다
천오백 년 전 을지乙支 씨는
그 노인의 말을 빌려
그만하면 됐으니 그만하시라고
점잖게 적의 장수를 타일렀다
이제 나는 을지 씨의 말을 빌려 말한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는* 대신
담을 넘고 국경을 넘는
다국적 강도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모세혈관까지 빨판을 들이대고
골수를 빠는 문어발 도둑들
한 번도 형장에 서본 적 없는
왕과 그 졸개들을 향해
그만하면 됐으니 이제 그만하시라고
점잖게 타이른다
소귀에 경 읽기인 줄 알면서도
말 귀를 간지럽히는 바람인 줄 알면서도
*知足願云止 : 을지문덕의 「여수장우문 시」의
마지막 구절
*지족가이불욕 지지가이불태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88 올림픽의 주제가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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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말이 없다
짧은 혀의 즐거움을 위해
온 산과 들과 바다를 헤집어 캐어내고 건져낸 것들
끓이고 삶고 찌고 굽고 지지고 볶고 튀겨서
쉴 새 없이 게걸스럽게 먹어댔으니
먹은 만큼 싸댔으니
사막이 바닷속까지 영토를 넓힌대도
역병이 창궐한대도
사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숨 가쁘게 채워지는 멸종 목록 앞에서
아니, 그 어디쯤인가에
내 손자 이름이 기록된대도
나는 어떤 알리바이도 댈 수 없다
남겨진 모든 발자국과 지문들이
아직 맛보지 못한 것들 꼽아보며
군침 흘리며 입맛 다시고 있는
나를 가리킬 터이니
============
+ 여우와 호랑이
당장 무서운 건 시뻘건 입
새하얀 송곳니와 갈고리 같은 발톱이지만
진짜 끔찍한 것은 장막 뒤에 숨어서
호랑이 귓속에 더운 입김 불어넣는 여우들
상대가 누구인지 짚어주고
낮게 으르렁거려야 할 때와
이빨 드러내야 할 때
발톱으로 살점을 찢어발기고
숨통 끊어야 할 때를 일일이 일러주는
여우들의 핼끔대는 눈과 날름거리는 혀
여우 몇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입을 맞추면
강아지도 호랑이도 만들 수 있으니
저들이 키우고 길들인 호랑이 번갈아 내세우고
그 앞에 머리 조아리고 발등을 핥는 척하면서
뒤돌아서서 대대손손 이어질
제 곳간 채우느라 분주한 여우들
그러니 여우가 호랑이 위세 빌려 설치는 게 아니라
실은 머리가 손발을 부리듯
여우가 호랑이를 부리는 것
물론 너무 앞에서 나대다
제가 부리던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놈도 없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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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각하지 마라
착각하지 마라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파놓은 샘물로 목 축이고
다람쥐가 숨겨 놓은 도토리 찾아
배 채우는 멧돼지처럼
오목눈이 집에 알 낳는 뻐꾸기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이 세상에 낮을 익히기까지는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겁먹은 얼굴롤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나뭇가지 밟고 가는 바람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던
굶주리고 목마른 짐승이었으니
저기 어둠 속에서 문 두드리고 있는
낯선 이를 모른다고 하지 마라
그가 변장한 천사*가 아니라
보복할 힘도 보답할 능력도 없는
꽃제비거나 난민촌의 아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이 건넨 물 한 모금이
그의 가슴속에 깃든 신을 깨울 것이니
*빠리 노트르담 성당 건너편에 있는
Shakepeare & Company라는 오래된
서점 이 층 문설주에 적혀 있는 글귀.
"낯선 이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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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대금업자들
언제든 전화만 하세요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전화번호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햇살 같은 웃음으로 무장한 사내와 여인이
쉴 새 없이 먹음직한 밑밥 뿌리는 동안
멀찌감치 낚시 던져놓은 전주들은
곰비임비 계산기 두드리며
대출 장부와 입금표를 맞춰보면서
눈알을 파낼까 콩팥을 떼어낼까 간을 덜어낼까
아니면 통째로 팔아넘길까
저울질하고 있는데
행여 피라도 튈까 슬쩍 비켜서서
입맛 다시며 구경하던 관리들이
슬그머니 고개 돌리며 던지는 훈수
"저 좀 살살합시다, 밥상에 계속 계란 올리려면
일단 닭이 살아있어야 할 거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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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누구시길래
당신, 그거 있어?
그거 해봤어?
거기 가봤어?
그거 먹어봤어?
당신의 수준과 등급을 재기 위한
이 준엄한 질문 앞에서 쪽팔리지 않으려면
무조건 동그라미 쳐야 한다고 믿는 당신
염치없고 줏대 없고 배짱 없고 지조 없고
한마디로 사 가지가 없어
늘 불안하고 초조한 당신
추락의 공포로 밤잠 설치고
상승의 열망으로 눈이 벌게져
돈 냄새 풍기는 곳이면 어디든
하이에나처럼 몰려다니시고
아파트 값 사수를 위해서는
강철보다 단단하게 뭉치시고
구구팔팔이삼사의 야무진 꿈
보양을 위해서라면 불원천리
천리마처럼 달려가시는 당신
당신은 누구시길래
당신은 대체 누구시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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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가루에 관한 명상
가끔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던가
아니면 부침개를 부치는 데 썼던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씽크대 찬장 속에 방치되어 있던 밀가루는
마치 방금 개봉한 것처럼 생생하다
벌레가 꼬인 적도 곰팡이가 핀 적도 없고
썩으려는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피기 전의 목련처럼
순결한 것 같고
어떤 거짓도 없을 것 같고
모든 해충을 박멸하는 DDT 같고
어떤 고통도 잊게 만드는 마약 같고
사자의 얼굴에 칠한 분 같고
살육의 현장에 뿌려진 석회가루 같은
저 희디흰 밀가루 속엔
불 칼을 든 천사처럼
죽음과 부패,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린
모든 탁하고 어두운 죄의 침입을 물리치는
무언가가 숨어있는 게 분명하다
모든 빛을 튕겨내는 저 백색의 장막 뒤에서
사천왕처럼 부릅뜬 눈 부라리고
어둠을 쏘아보고 있는 무엇인가가
그러니 국수로 수제비로
빵, 과자, 케이크, 핏자로
끝없이 변신하고 둔갑하는
이 밀가루를 장복하면
어떤 벌레, 어떤 세균의 공격도 막을 수 있겠다
영영 썩지 않을 수 있겠다
약간의 소화불량을 견딜 수만 있다면
나를 갉아먹는 시간의 이빨을 이겨내고
좀비처럼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겠다
굳이 내장을 들어내고 붕대를 감지 않더라도
파라오보다 멋지게 다음 생을 기다릴 수 있겠다
오오 밀가루, 이 시대의 불사약
창백한 유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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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전한 이야기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긴 다 아시죠?
다 아신다구요? 그렇죠?
뭐 어렸을 때 골백번도 더 들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알고 계신 이야기가 겨우
반쪽짜리라는 거 혹시 알고 계셨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구요? 금시초문이라구요?
하지만 제 얘기 조그만 들어보시면
여러분도 금세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이 알고 계신 건
"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는 아이의 외침 때문에
임금이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는 게 전부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거든요
워낙 19금禁에 해당되는 이야기라
아는 사람들끼리만 쉬쉬해 온 얘기지만
들어보시면 대충 짐작이 가실 거예요
옛날에 왕이나 귀족들은
노예를 무슨 짐승처럼 생각해서
그 앞에서 태연히 옷 벗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아예 대놓고 그 짓을 하기도 했다잖아요
그러니까 임금이 아이의 외침 때문에 도망갔다는 건
뭘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 얘기지요
뭐, 쪽팔린다는 생각이야 했겠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임금은 고개 뻣뻣이 세워야 했지요
임금 노릇이란 거, 한번 쪽팔리고 나면
그걸로 끝장나거든요
왜 깡패들도 그러잖아요
쪽팔리는 순간 건달 노릇 끝장난다고
그러니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사기꾼과 아첨꾼이 모조리 튀고 난 뒤에도
혼자 남은 임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아니, 마치 무소의 뿔처럼 고개 빳빳이 들고 걸어가려 했지요
그럼 임금이 왜 도망을 갔느냐구요?
아이 참, 그건, ㅎㅎㅎ,
정말 이런 걸 얘기해도 좋을까 몰라
(이쯤에서 화자는 한 번쯤 몸을 꼬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뜸을 들여야 한다)
그건 말이죠, '애걔?!" 하는 소리 때문이었다우
글쎄, 그게 그 아이 엄마였는지
아니면 다른 여자였는지는 나는 모르지요
뭐, 거기다가 누군가가 한마디 덧붙였을 수도 있지요
무슨 얘기냐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사내들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상스러운 소리
"저건 뭣도 아니네"라는 말 있잖아요
그런 말로 화답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라는 거지요
쥐 죽은 듯 고요한 상황이었으니 그 중얼거림이
천둥소리처럼 사람들 귀를 울렸을 테고요
민망한 풍경 앞에서 혀를 차며 고개 돌리던 사람, 눈을
가리던 사람, 곁눈질 훔쳐보던 사람, 침 꼴깍 삼키며 입
맛 다시던 사람, 한숨 쉬던 사람, 행여 무슨 불똥이라도 뛸
까 해서 공연히 헛기침하며 딴전 피우던 사람, 아예 슬그머
니 자리를 뜨려던 사람,
온갖 사람들 눈이 그 소리 때문에 반짝이기 시작한 거지요
그러고는 똑바로 임금님을 쳐다보기 시작했지요
바람에 벼 이삭 흔들리듯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말이지요
뭐, 축 처진 뱃살 아래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임금이 기름기 빠진 엉덩이 볼품없는 뒷모습만 남긴 채
도망친 건 바로 그때였답니다 ㅎㅎㅎㅎ
말하자면 "애개"로 혼을 빼고
"저건 뭣도 아니여"로 KO를 시킨 거지요
그러니 이런 얘길 누가 어떻게 구구절절 전할 수 있었겠어요
쪽팔린 건달이 술병 깨고 주먹 휘두르는 것처럼
쪽팔린 임금이 이 악물고
저를 벌거벗긴 놈, 제가 벌거벗은 걸 본 놈,
손가락질하고 흉본 놈, 침 삼킨 놈, 입맛 다신 놈
소문낸 놈, 아니 그 옆에 있던 놈까지
잡아라, 꿇려라, 매우 쳐라 호령하는 판이니
사람들은 그저 쉬쉬하며 입단속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요
그럼 제가 어떻게 이런 얘기를 아느냐구요?
혹시 무슨 불순한 세력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냐구요?
에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저야 그저 바람 불 때마다
갈대들이 온몸 흔들어 풀어낸
얘기를 옮기는 것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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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 보행에 관하여
이제껏 좌측 보행을 하라고 하다가
갑자기 우측 보행을 하라니
그게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이라니
오른쪽이 바른쪽이고 옳은 쪽이라며
오른손으로 젓가락질하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라고
손등 때려가며 잡도리하던
그 시절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심장 있는 쪽이 옳은 쪽
머리보다는 심장의 고동을 따르는 것이
바른 쪽이라고 생각하고
내 왼쪽 어깨가 약간 내려앉은 것
걸을 땐 나도 모르게 왼발부터 내딛는 것
요컨대 온순한 식물적 자세를 접고
먼 길 떠나는 동물로 전환하는 극적인 순간에
언제나 왼쪽부터 시작하는 것은
모두 심장의 위치와 무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싸울 때 왼 주먹을 가볍게 내지르며 거리를 재다가
온몸의 체중을 왼발로 옮기면서
오른 주먹으로 결정타를 날리는 걸 보면
내가 진짜 왼손잡이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왼손잡이보다 더 왼쪽에 익숙한
오른손잡이, 혹은 양손잡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 새삼 오른쪽으로 걸으라니
그게 옳은 일이라니
그게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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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男乙女를 보는 새 개의 관점
갑이라는 남자와 을이라는 여자,
그러니까 내세울 것도 없고
별 볼 일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들
갑은 남자, 을은 여자
그러니까 안에서든 밖에서든, 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갑, 여자는 을로 산다는 것
물려받은 녹슨 갑옷 벗어던지려는 사내와
새장 문을 열려고 안간힘 쓰는 여자,
그러니까 남자가 남자에게 해방되고
여가가 여자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그런 세상 열기까지
서로 다투고 화해하고 토닥이며 가는
씩씩하고 아름다운 남자와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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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에 부쳐
매일 아침 가까스로 죽음에서 벗어나던
그가 깨어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부터
방이며 거실이며 주방에는
먼지가 하얗게 덮이고
천장 귀퉁이에는 거미가 겹겹 줄을 쳤다
우편함에 고지서와 광고 전달들이 낙엽처럼 쌓여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던 그의 안부
그의 몸을 빠져나간 추깃물이 방바닥에 고이고
터진 살가죽에서 새어 나온 냄새가
시나브로 문틈으로 새어 들자
비로소 그의 죽음이 발각되고
그의 인생을 요약한 한 줄짜리 기사가
마지못한 애도의 표정과
혀 차는 소리 몇 가닥을 불러냈다
차가운 눈길 무심한 손길 아래
그가 남긴 모든 흔적이 완전히 말소되고
집 안을 덮었던 소독약 냄새가 가시자
집값 하락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_______*68
로시난테를 타고
====1>
여로
경계에서
나무 보살
나의 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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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부부 싸움
산길에서
어떤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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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
필부 유감
너를 부른다
저격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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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며
새벽에 잠 깨어
로시난테를 타고
사랑, 그 치명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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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아이에게
뉴욕 지하철역에서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2>
봄
숲
고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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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춘
동백
성하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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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
운석
조장
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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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꽃샘잎샘
사건 전후
와온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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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토모리
두루 돌아봄
목련꽃 단상
움직이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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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였느냐?
섬진강 봄 편지
즐거운 게으름
봉숭아 꽃물 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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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을 노래함
어린것들은 힘이 세다
어는 틈엔가 어느 틈으론가
====3>
그것
아귀
여러님
청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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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침도치
무상별곡
서울 야곡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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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어떤 한국어
지족원운지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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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호랑이
착각하지 마라
고리대금업자들
당신은 누구시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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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에 관한 명상
바람이 전한 이야기
우측 보행에 관하여
갑남을녀를 보는 새 개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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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거노인의 죽음에 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