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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아 ~

유안진 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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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方向

한 포기에서도 먼저 피는 꽃이 있다
별바른 쪽이다

한 나무에서도 더 잘 익는 과일이 있다
당신 쪽이다

한 하늘의 노을도 더 붉은 쪽이 있다
가슴 쓰라린 쪽이다
절두산 부활의 집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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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偏見

오를 수 없는 산 하나쯤은 있어줘야 살맛이지

그 산을 품고 사는 가슴이어야 사랑이지

사랑도 그 산에다가 강울음 바쳐야 절창絶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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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침번不寢番 

가끔, 때로는 자주 어지럽다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데
왜들 어지럽지 않다는가?
자전自轉에 공전公轉까지라
지친 나머지 튕겨나가거나 굴러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누구라도 있어야지
나 하나가 무슨 위안慰安이 될까마는
잠들 수가 없는데
10년 주치의는 약만 바꿔주거나
한두 알씩 보태주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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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각憑虛閣*

꼬부랑 벌레들 고치집을 짓듯이
나도 나를 집 짓는다
짓고 허물고 다시 짓는 거듭으로
소슬한 누각 옹색한 살림집
누려 살고 싶은 다만 한 채를
불면不眠으로 하여금 만 만 채씩 짓곤 한다

아득한 허공 나지막한 언덕아래
혼신으로 지어내는 오늘도 이 밤의
아흐 아흐 동동다리.

*빙허각은 조선후기 여성실학사상가
「규합총서閨閤叢書」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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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유화

왜란 호란 그 잦은 난리들, 생피 튀던 사화 정란 당할 때
마다
높이 이고 하늘 섬기는 모가지를 간수해야 할 때마다
"나를 밟고 지나가거라, 나는 짓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는
하늘 음성 들어내느라고, 하늘 가까운 첩첩산중에 든 패
배주의도
제법 곱게 자라 꽃들 조용히 피웠습니다
알아줘서 고맙다는 듯, 몰라줘서 더 고맙다는 듯
발등이 새하얗게 기울어진 쪽달과
한 눈 파는 사이로 조신스런 걸음걸이
족보는 커녕, 조상 함자銜字는 새까만 비밀
항렬 딷른 돌림자조차 새하얗게 몰라도
더러는 시들면서도 발그렇게 수줍음 타며
두 눈이 같이 웃는 야생화, 향기 마냥 드높습니다.

*일본 천주교 박애사 소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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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복음

ㅡ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ㅡ
제 가슴에 제 주먹질 하며
산하는 '자발적 가난'에 들어
추위와 굶주림과 목마름뿐인데

강설降雪은 내리 사흘째
하늘이 베푸시는 '거룩한 낭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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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 한 장

너 만나, 나 아직 세상에 있었구나
웃음 품어 오오래 익혀온
찢긴 자국 벌레구멍마다
가을도 깊었구나
내가 나를 제대로 만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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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하다

조개탕 속에는
죽어서도 입 다문 조개가 더러 있다
죽어서도 비밀秘密을 지켜낸
지사志士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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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일雪日 묵상

잘 한일 없는데
복 받을 짓 못했는데
악몽뿐인 내 세상의
비루鄙陋와 남루襤褸
간 데 없네
다만 무릎 꿇고 싶어라

ㅡ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
하느님은 사랑이시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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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시간

얼음이 녹으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물어요 물!
아이들의 합창

봄인데, 봄이 오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린 한 아이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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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春雪일기

늦었다니요?
하늘 땅을 돌고 돌아봐도
나 같은 나는 둘도 없더라고
뒤늦은 고백도 하늘 땅이 모자라
생애를 두고 꿈꾸어 마지않던 언제 적의 이 순간이여
조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새날이고
설날마다 첫날이고
사랑마다 첫사랑일진데
고백 더욱 그럴진데
ㅡ나의 잔이 넘치나이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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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시더라

빗줄기가 다녀간 낙서落書같이
달빛이 다녀간 얼룩자국같이
나를 다녀간 눈짓 몇 번
산길 벼랑바위에
입술이 문드러진 마애磨崖부처님
혹시 그대였다면
혹시 나였다면
아득한 시간 너머에서도
기다리는 서로 중中 하나라면
기막혀라, 새삼 기막혀 죽고만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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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에게

아직도 모르겠어?
한번 발들이면 절대로 못 빠져나오는
사이비似而非종교가 '나'라는 것을
<ㄴ> 받침 하나가 모자라서
<말씀> 이신 신神이 못 되는 어눌한 말인 걸
쓸수록 배고파지는 끝없는 허기虛飢
쓰고 보면 제정신이 아닌 남루襤褸뿐인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다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 와는
달라서
만 번을 고쳐죽어도 일가는 못되느니
시 쓰며 인간이나 되라고 <시인詩人> 아닌가
꿈 깨게, 문여기인文如其人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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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목한천落木寒天에서

긴히 전할말이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기다림을 기다리는
낙목한천의 까치밥 하나
대낮에도 불 밝힌 알전등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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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 동동다리

먹구름 저녁에도 달맞이 꽃 피어
먹구름 너머에서 달뜨는 줄 안다하네

비 오는 아침에도 해바라기 꽃피어
비구름 너머에서 해 뜨는 줄 믿는다는
아흐 동동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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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젊고 싶냐

시험試驗 치는 꿈을 또 꿨다
답答을 다 쓰고 보니 영어 아닌 한글로 써졌다
둘러보니 시험장에는 아무도 없다
감독교수는 빙긋이 웃어주었으나
그의 인내심에 폭발되는 나의 수치심에
시험지를 싸들고 일어서다가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깼다
꿈은 깨어져야 하는구나
꿈에서 해방解放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누운 채로 성호聖號가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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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고독 가시밭길

프랑스 어느 봉쇄 수도원 수녀님들이
온몸으로 농사지어 짜낸 포도주
미사용만 우선하고 남은 몇 명을
후원자들에게만 답례한다는 포도주 <가시밭길>
그 한 모금에 혼절한 적 있었지
그렇게 혼절하고 싶은 첫 눈 오는 날
투덜투덜 발자국소리를 따라가서
중국 어느 산간 오지마을
입향조入鄕祖 이래로
한 번도 마을 밖을 나가본 적 없는 노인들의 먼먼 후손
들이
몇 안남은 그 노인 몇이 담갔다는 독주 <백년고독>
그 한 모금에 입술 적셔 같이 죽자고 발길 재촉하는
가시밭길 백년고독, 백년고독 가시밭길에
눈발도 가루눈이 겸손히 겸손히 내려 쌓이는 날.


=====2>
+ 뿔고考

이슬 먹고 사는 풀여치 귀뚜라미는
더듬이라는 우아한 뿔을 둘씩이나 가졌다
풀잎과 꽃잎을 먹고사는
사슴 소 염소 순록은
하늘글자 닮든 뿔이 정수리에 돋았다
경의敬意의 뜻으로 관冠이라고 하지만
가히 면류관冕旒冠급인데

사람에게는 왜 뿔이 없을까?
더러는 있지, 엉덩이에
하늘땅을 거꾸로 사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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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구름 몇 점 묻어있어야
내 하늘같고
물결 파도 출렁거려야
내 바다 같고
지팡이노인도 걷고 있어야
우리 동네 같고
군살에 주름살 지글지글거려야
내 이웃 같아
말도 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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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曹操

ㅡ넘쳐나도 부족하고 모자라도 충분한 게 인생이지ㅡ
ㅡ인생, 뭐 있나 술이나 마실 일이지, 푸른 옷자락 펄럭
거리며ㅡ
라고, 중얼거린 시인 조조가 도달한 거기는 어디였나?

20살 즈음에 찾아간 교현은 허소에게나 가라고 피했고,
허소는 시달리다 못해
"치세의 능신能臣이요 난세의 간옹"이라고 써줬는데
도, 웃으며 받았다는 조조
환관의 자손이라서 평생 더 힘껏 살았지만, 후세는 간웅
으로 매도한
시인 조조가 이상하게도 유비나 제갈량보다 부쩍 좋아
졌다

후대의 루쉰은 새로운 문체의 시인으로 그를 평했지만,
남의 아내를 자주 빼앗았다지, 또 잘 우는 유비와 대비되
어 잘 웃었다지, 너무 웃느라고 음식그릇에 고개를 처박기
도 했다는데, 그 웃음이었을까?

그의 사후 재빨리 등위한 조비에게서, 칠보시로
목숨을 구한 동생조식이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지, 아비 조
조가 가장 총애한 천재급 막내동생에게 왕위를 뺏길까 봐,
막내동생을 독살한 확실한 증거에도, 장자 조비의 죄를 눈
감아야 했던 아비 조조

평생 두통발작에 시달린 그는, 너무 잘못 살아서 더 깊
고 광활한 드높은 무엇에 도달했을까?" 죄 많은 곳에 은
혜도 많다"는, "많이 빚진 자를 많이 탕감해 주었다"는 쇠망
치말씀이 가라사대, 나 같은 게 바로 바라사이나 율법교사
에 다름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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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종李士宗

대감 이사종, 가객 이사종, 국창 이사종....
모두 다 가당찮다
내 영광 내 큰 자랑은
시인 황진이의 이사종이다

기생질로 모은 전 재산 싸말아
첩질로 탕진하며 사랑했던 그 남자

명월이 기생이 아닌
황진이 시인의 서방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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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식

가시로 말하는 장미처럼
가시털로 말하는 엉겅퀴처럼
사랑의 언어는 반어적反語的
내 식式이었지

안 보이는 가시는 더 치명적致命的
물 컵의 물 술잔의 술
밍밍 능글능글 당신식이었지

알았건 몰랐건 선택 아닌
하늘식이었지
마르코복음 10장이던가?\
결혼기념일 오늘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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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이룰 수 없는 꿈을 꿨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싸웠다
딸 수 없는 별을 노렸다
마지막 웃음이 참 웃음이라고 믿어
조무래기 잔챙이들의 잔성공을 비웃었다

뻔한 걸 의심했다
아는 길을 외면했다
모르는 길 찾느라고 생애를 던졌다
그렇게 발버둥치는 싸나이 돈키호테
마상의 기사님께 일어서 박수를
세르반테스께는 더 큰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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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털구름

저녁하늘의 은회색글자
우리만의 암호문자로
하느림 몰래 써 보낸
당신의 편지

멋 부려 비껴 꼬불친 필체
손 글씨 두루마리가 구만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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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기도

남도의 소녀들은
동백꽃이 필 무렵에 초경을 맞았다지
그 말을 듣고부터는
바닥에 이마를 내려놓고 기도드린다
오묘奧妙이신 창조주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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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맛 싱거워

사투리처럼 고불거리던 시골 길들
표준어처럼 뻗어
걷기는 편한데 걷는 맛없어
시詩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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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브란트

바르샤바에서 유대인 위령탑을 지나다가
서독 총리(70년대)가 넘어졌다
넘어진 게 아니라 무릎을 꿇고
목고개를 꺾은 것이다
어떤 기자는 이 기사를 이렇게 썼다
무릎 꿇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무릎 꿇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릎 꿇지 않는 이들을 대신하여 무릎을 꿇었다
그는 17세기에 사회민주주의 당원이 되어
노르웨이로 건너가 반反 나치 투쟁했지만
유대인의 게토에서 무릎을 꿇었다
독일은 이렇게 도덕성을 회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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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眼目이 크면

구석에 앉아도
중심인물中心人物이라
지구는 둥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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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

광활한 요동벌판은
통곡痛哭 한번 목 놓은 데라고
등줄기 식은 땀 달래며 외쳤던 신음소리

조선국 대장부다운
중천금의 딱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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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할미꽃*

처녀공출 피하느라
70 노인의 3취聚로 시집가서
하나 얻은 아들은 한국동란 전사자戰死者

오늘 현충일은 국군묘지에
내일은 일본관광 간다는 토종할미꽃.

*일본군 위안부로 조선의 미혼여성을
강제 징용한 일제강점기의 유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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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설잠雪岑길

세상 바꿀 꿈에 벅차
오르고 올랐던 꿈길
시대가 버린 천재가 제 자신을 버렸던 길
시대와 싸워 살았던
금오신화 시선의 길
머물러서 없고
없어서 산이 된 남자
그 시대의 환기통換氣筒 절대 자유인의 길

내 사랑  김시습의 발고린 냄새
진동하는 설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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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 가야국

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가야금소리가 들렀다
두리번두리번 저만치에
벽오동이 두 그루
기러기 울음 같은 저녁별이 돋는 하늘로
뻗은 가지가 열둘(12)이라

다시 보니 가실왕과 약사 우륵을 빼닮았다
가야국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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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달도 멈춰 섰다

풀여치 귀뚜라미 메뚜기 방아깨비
같은 풀밭에서 나고 자라며
같이 꿈꾸었던 죽마고우竹馬故友

북간도 봉오동 밀림에 숨어
삼베옷에 얼어붙은 주먹밥 껴안고
고국의 대보름달을 같이 울었던
독립군 홍범도洪範圖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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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국시로 먹다

밀가루와 날콩가루를 반반씩
간간 매지근한 소금물로 반죽
안반과 홍두깨로 비단처럼 얇게 밀어
실오리보다 가느다란 노리끼리 국수발의
안동국시, 를 찾아와 국수를 먹는다
늘어지다 끊어지는 국수발에도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니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니
유약이 승강강柔弱 勝剛强이니
지자약우智者若愚라느니
용자약겁 勇者若怯이라느니
옛날 귀 딱지가 이명 우는 국시
추억만으로도 힘이 될지어다.


=====3>
꽃비

꽃이 피면 하늘과 내가
꽃 앞에서 울어서

꽃과 하늘과 내가 혹독하게 치르는
사랑한 댓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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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과落果

땅바닥만 기며 살았으니
높은 것도 먹어보라고
가장 잘 익은 복숭아만 골라
아무도 모르게 차려놓으신 잔칫상 앞에
개미 노래기 땅가재 쥐며느리.....
벌레도감 한동네가 다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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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탑

산새들 우짖어 바위에 금이 가는 줄을

금 간  바위틈에서 석간수가 새는 줄을

석간수 한 방울도
바다를 꿈꾸며 흐르는 줄을

아는 이 없어 혼자 마냥 누리는 줄을
물 탑은 낮은 데로 자라는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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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언어는 떠나가고 휘파람 한 소절이 찾아와 준 입술이여
그 싸늘한 깊이를 깊이 알아 더 춥지
춥고 쓸쓸한 끄트머리는 바닥 없이 깊어질 뿐이지
생각 없이 살면 남들이 괴롭지
생각 깊게 살면 제자신만 괴롭지
깊어지지 말자, 깊어져 일상이 침몰되고
무의미 무책임 텅 빈 자유와 망각이 될 뿐
가슴 옥죄는 기다림을 기다리게 하지
슬픔도 깊어지면 황홀도 되지, 그래서 더 슬프다
오래전에 속속들이 알아버렸구나
인생이란 것에 다시 발 디밀어 다리 뻗기는 글러먹었으니
분수없지 말자, 끝이 곧 처음이라는 그럼에도 불구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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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꽃

푸나무는  해마다 열흘 정도 생리를 하고는
생리 끝에 씨앗과 열매를 맺는다고
화무십일홍이라고 한 게 아잇다 안카나
실인즉 넌즈시 몸통구절을 기다리케 하는 운떼기이지러
속셈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을 들이대려는 수작부리기이라
나는 글을 쓴다 카던데
이런 글법을 알고나 쓰냐 어이?
이 구절 들으면 아무 때나 할아버지 기일忌日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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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

80년,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나그네였을까?
80년, 풍찬노숙의 순례자였을까?
서러움과 고마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모르게 나를
잠시도 떠난 적 없었다는 시간이
제 이름을 세월로 바꿨다고
머지않아 세기世紀로 또 바꿀 거라는데
옛날과 예상은
있든 없든 터무니의 증거들
오늘도 혼신魂神에서 시끄럽다마다
더러는 비명悲鳴같기도
더러는 찬미讚美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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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질녘

누구나 전설이 되는 이 시간대
먼 나라 아득한 옛날이 내 것 되는 다저녁때
밤이면 심장과 간뎅이를 토막치고
낮이면 자원봉사 온 표정마저도
가장 슬픈 전설로 가장 멋지게 죽자고
귓볼 물고 늘어지는 이맘때
눈물의 깊이만큼 주름길이 더 깊은 갈래 길을 파내며
죽음도 만행이다, 첫발이 어렵지
첫발만 내디디면 세상도 부풀어 우주가 된단다
절반으로 접힌 몸채로 겸손이 되면서
뜻 모를 미소가 토막울음, 의미 심장 깊어지며
시커멓게 다가오는 검은 밤 이 나이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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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섯 같은

젖으면 무엇이나 선명해지는가
돌의 색깔 돌의 문양 찢어진 광고문도
젖어서야 깊어지는 사랑까지

이 봄밤 시 한 줄은
내가 젖는 일
젖어서 옛날로 뼛속까지 돌아가서
그냥 기쁘게 그냥 우는 일

그것 말고 뭐 있냐? 내가 할 일은
비 맞고 걷는 일
젖는 일로 요약되는 옛날 옛적에
젖는 데서 돋는 버섯 간날 갓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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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여성

허둥허둥 직장여성에게는
남편보다 마누라가 더 필요하다, 더니
챙겨줄 마누라 얻으라고 먼저 가 주었나

은퇴했는데
시는 직업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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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마법

흙냄새를 맡으면
낙방 서생들도 김삿갓들이 되었더라고
벼슬길 떨어져야 낙향 훈장되었다라고
시 쓰는 민초들이 되었더라고
죽은 독사뱀도 살모사가 되더라고
떨어진 송진도 호박 보석이 되더라고
떨어진 꽃잎들 마그마가 되더라고
불기둥 치솟는 활화산이 되더라고

땅속 깊이  묻혀볼까 해
값진 뭔가가 되고 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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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 속에는

선악과 사건만이 아니다
하드리아누스황제와 유대노인이
뉴턴이 
스피노자가
스티브 잡스도 들어있다

과수원이 들어있다
꽃가지 사이로 첫 키스도 들어있다
잉잉잉 소문꾼 벌 나비도 많고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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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같은 옛날

죽음이 왜 산자만의 몫인가
날마다 치사량致死量의 자해를 숨겨 웃고 떠들어도
세상이 나만 버려두고 어디론가 버려서
낯선 허공 앞뒤 좌우 다 없어진 어디에서
들어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닫힌 목청
피멍 익고 익어 문드러졌는데도
소음들 잘도 웃고 지나가는 여기는 어디인가
문득 조난당했음을 알아차리는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확실해지지
옛 세상이 새 세상으로 보이는 신비
죽음이전 처음 만났던 처음 같은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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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개벽에서

가끔씩은 지구가 남에서 북으로
가끔씩은 동에서 서으로도 돌기를
저혈압 저체온 느려터진 심박동 탓만이 아니다
미세 먼지 때문만은 아니다

내 몸 어디에도 없는 내 마음의 실존처럼
내 우주 어디에도 없는 우주마음
세상도 가끔씩 화들짝 정신 좀 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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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서체 겨울비

자리보고 불 끄자 비로소 빗소리
창밖 흐린 불빛은 세로체로 쓰네
혼자된 초로의 엄니 낮은 목청 사친가思親歌

사모친 곡조는 시리고도 차가워
먼 듯이 가까웁다가 다시 또 멀어지는
내간체 내방가사內房歌辭는 끝도 없는 두루마리

고였다 풀어지다 휘어져 꼬불치다
아래 ㅇ. 자字에는 기어코 목이 메어
주르륵 내리닫이로 쓰며 읽는 초서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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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우뚱 만난 고개

풀벌레 달밤을 울어
무너진 산봉우리 몇 개인가
보름달도 허기져서
고갯마루 넘다가 쉬어 앉을 그 자리
그대는 뉘기시며 나 또한 누구인가
떴다가도 지고 말걸 해와 달은 왜 또 뜨나
그대는 무슨 일로 어디로 너머를 갔고
왜 남은 나의 여기는 또 어디라는가
휘어져 시름도 몇 번이나 구부러져
기우뚱기우뚱 가파른 비탈로
세상은 닿아 이어졌는가
세상은 애당초 잘려나가 버렸는가.

----------------------------
코스모스 서울남자

수백 년 누대累代를 살아온 서울을
잃는 줄도 모르게 잃었다는 소년
그늘이 되어주는 그늘 없이 허우대만 희멀건 청소년
영문도 모르고 흑백의 광란 삭풍 치는 눈보라에
신앙 없이 신과 하늘을 신앙信仰했던가
득도 해탈 모른 채로 해탈했던 청년

인왕산 누하樓下 언덕을 부모님 기일보다 잘 기억하며
서울을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업적이라던
서울 코스모스cosmos
코스모스 그 남자가
산골 구절초의 우주cosmos일 줄이야.

================
+ 키루스왕의 사랑공부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이 생포 적장에게 물었다

너를 살려주면 무얼 주겠느냐?
저의 계산 절반을 드리지요
네 아들을 살려주면 무얼 주겠느냐?
나머지 재산을 다 드리지요
네 아내를 살려주면 무얼 주겠느냐?
제 목숨을 드리지요

이 대답에 감동한 왕은 그에게 다 주었다

이일 때문인지 왕은 모든 포로가 본국생환이라는 포용
정책으로
페르시아 대제국시대를 열었다.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
아가던 유대인들은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도 생각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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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스콜로도프스키카

난데없는 라일락 향이 후욱 지나갔다
교복 여학생들이 재잘재잘 지나갔다
교복을 입어야 여학생인 기억 속에
교복 입은 여학생 나도 어깨 나란히

점령당한 폴란드의 어린 딸 교복여학생도
부르면 입속 가득 향기 도는 이름
마담 퀴리 이전以前 더 사랑스러웠던 이름
마니아 스콜로도프스키가
마니아 스콜로도프스키다


====4>
가족

태어나 보니 땀이라고 했지
딸이 왜 잘못이야?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지

나도 내 가족을 이루었지
딸도 손녀도 얻었지
골고루 얻었으니 혼자가 아니지 따뜻하지
때때로 감기 들면 너머가 보여
야속하고 미웠던 부모조상의 자애慈愛는
진실로 진실로는 시적에 반어적이었네
나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지
시와 함께 옛날과 함께, 더 따뜻하지.

----------
무릎

생나무들 선채로 불붙는 폭염에도
귀뚜라미 떼로 난리법석 자네들 공화국 세우는
내 무르팍을
왜 둘씩이나 주셨나요?

ㅡ절대絶對 앞에 꿇어 엎드리라고
그리고 하나 더
넘어졌을 때마다 일어서라고ㅡ.

---------
밤참

ㅡ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ㅡ
시편 127편 2절을 붙잡는 밤마다
기도와 알약이 밤참이다

기도는 짧아지고
알약은 더해지며
체력이 되나 체중이 되나
아무려면 어때 잠만 자면 되지.

----------------------
기일기忌日記

음담패설에서 고담준론까지
온갖 위선 위악 바닥에서 천정까지
허물없이 허물자루
뒤집어쓰고 뒤집어씌우며
눈보라 태풍 해일 거슬러 거슬러
반세기였는데
이렇게 오래 집 비운 적 없었는데

내가 이겨낸 유일한 사람
대한민국이 서울의 수도라니까
바뀐 줄 몰랐다고 정색하던 핫바지
이대로 ㅡ함께ㅡ라는
한 시대가 요약 정리되고 말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정말로 되는 건가?

=======
나리꽃

한양 길 등진 갈래길목에서
벼슬길 돌아앉은 나리
죽은깨 드문드문 눈인사만 건네산다

초동初童목아牧兒도 올려 부른 존칭 나리
한 생애 백면서생께오서
나 하나를 기다리셨다
나의 나리께오서 날 기다려 계오셨다.

------------
낭비벽

미래는 빌려다 쓰는 빚이라는데
차용증도 없이 빼앗기는 나의 미래는
왜 불평 한마디 없을까
어쨌든 쓰고 보자고
나는 상상한다 희망한다
나의 미래는 가난해질수록 부요해지는가
나의 기도가 미래를 갈취하는 파렴치인 것을
알면서도 참고 속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찬란한 미래가 재건축을 기다리는 과거이기 때문입
니까
아무튼 당신이 나의 무궁無窮이기를
바라고 믿어 마지않으려는
이 낭비벽을 계속 모른 채 눈감아 주십시오.

--------------
+ 가족모임

다들 모른다
당신 하나로 가득 찼던 집에
당신만 없는 줄로

몰라서
슬프다가 아프다가 쾌씸하다가 다행스럽다가....
모른 체하는 지도
나만 아직 이별하지 못했나?

----------------------
기일忌日 묵상

마음은 왜 안 보이나
사랑은 왜 안보이나
하느님도 왜 안보이나

본질本質은 안 보이니까
어마어마해서
모습에 담길 수 없으니까

본질 아닌 모습으로
보고 싶다 그대 너무.

=========
남자신발

현관문 열리면 제일 먼저 보이도록
맞은편 가득히 늘어놓았다, 슬리퍼까지
항상 벗어두던 그 자리에다
남은 자를 걱정하는
떠난 자의 갸륵한 배려
죽음과 삶의 동거방법이구나
날마다 이 구두로 나갔다가
돌아와 제자리에 벗어둔다고
뭔지도 모르는 온갖 상상공포에서
독거獨居를 지켜주는 친숙한 발 냄새.

-----------------
경복궁붓꽃

글자 하나 획 하나에 목숨 걸었던
백척간두 사관史官의 위험천만 생애가
꽃 한 송이로 요약되었나요
사초史草 의 본분本分대로
붓끝의 본무本務대로
진실 사실 물음표가
뾰족하고 외동그란 꽃모양인가요
파란만장 실록처럼
아리송 야사처럼
아리까리 연막 친 진보라 색깔로 말미암아 말미암아
곰삭지 못한 피 냄새도 향기가 되는가요.

------------------
들국화에게

들녘의 이름으로 태어난 들꽃
가을의 이름으로 태어난 가을꽃
친. 외가 출생 신분이
천생 야생시인

웃음 스민 울음
울음 깃든 웃음 누리며
우리 다만 향기로울 자
눈부시지 않게.

----------------------
필요 밖의 필요

ㅡ남편은 아내를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ㅡ는
창세 이래 3대 진리 중에
첫 번째는 당신이 가져간 지 2년도 지났는데
그 2년간 한평생을 백번 넘게 살았던 듯
아직도 필요는 고통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불필요*였다는데
그 사이 불필요만 살아냈나요
불필요도 죽기 살기 어찌 살아냈나? 믿기지 않는데
허물며 필요를 어떻게 더 살아내란 말인가요.

*-그자는 틀림없이 고향이 뒷간일 거라-고 하며, 자기를 모욕한 백인들을 용서한 
넬슨 만델라. 40세부터 27년을 감옥에서 
살았고,
96세에 선종한 남아공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퇴직 후 시골 농부 할아버지로
죽기까지 줄기차게 주장했다는 명언.

==============
기우뚱 만난 고개

풀벌레 달밤을 울어
무너진 산봉우리 몇 개인가
보름달도 허기져서
고갯마루 넘다가 쉬어 앉을 그 자리
그대는 뉘기시며 나 또한 누구인가
떴다가도 지고 말걸 해와 달은 왜 또 뜨냐
그대는 무슨 일로 어디로 너머를 갔고
왜 남은 나의 여기는 또 어디라는가
휘어져 시름도 몇 번이나 구부러져
기우뚱 기우뚱 가파른 비탈로
세상은 닿아 이어졌는가
세상은 애당초 잘려나가 버렸는가.

------------------------
밤마다 부활전야

그 많던 질문質問과 대답對答이 무슨  소용 있습디까
가빠 오르는 호흡이 숨통꼭지 비틀기 전에
두어 개 더 먹어 둡니다
요즘에 약이 좋아서 별문제 없다고들 했지요
밥상에서 두어 숟갈 더 먹는 셈 치는
나에게는 나밖에 없어
누구에게도 짜증과 골칫거리 안 돼야 해서
감사기도도 생략省略합니다
어젯밤을 잘 자고 일어나는 태양太陽처럼
날마다 같은 이브자리에서 부활復活합니다
이 신비神秘가 대답對答입니까
ㅡ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ㅡ.

------------------------
지옥이 필요했다

결혼 75년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는 노부부

왜 동고同苦가 먼저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옥地獄부터 살아서
동락同樂하는 여기라고
지옥을 안 살고 어찌 극락에 왔겠냐는
아흐 동동다리.

------------------------
첫걸음마 서체로

오직 나만을 위해서
틈틈히 배워 익힌 한글로
가로 세로 뒤엉킨 서체로
위태위태 아슬아슬, 젖아기 첫걸음마
넘어질 듯 일어서는 글씨로
닭 모이 뿌린 듯 낱자들 사이사이
능란하게 기어 다니는 영어단어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는 고백을
추사체가 부끄릴 독창적 초예술적 서체로
사랑하는 할머니 나의 할머니께
내 평생이 누리는 최고 호강편지의
중학생 손자가 보낸 한 장짜리의 편지의.

================
철쭉이든 진달래든

남의 아내로서
남의 남편으로 늙어온 유부남 들으라고
아무리 혼잣말이라 해도 그렇지

늙어도 귀는 밝아
몸짓 더욱 밝아
천인절벽千仞絕壁일수록 재주부리기 더욱 밝아

받으소서 이 꽃이 그 꽃이니이다
야할대로 야해지며 해도 너무하게
아무데서나 풍기문란
유부녀 수로首露의 꽃이 막막 막 핀다.

 


========5>
+ 삼여三餘

밤과
비 오는 날과
겨울은
그냥 쉬라고
하늘이 내린 여유餘裕라 했지

이 셋이 겹치는
비 오는 겨울밤
등燈심지 돋우어 책 읽는 문밖에는
귀 모아 서 있는 처녀귀신 하나.

----------
+ 한몸

꽃팔매를 맞아 죽고 싶던 시절 다 갔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풋열매들 동그랗다
구석도 모서리도 없다
지구도 우주의 열매하나
나 또한 그 열매 속 버러지 하나
언제 어디서나 중심자리이니
동그랗게 말아서 구르기 하란다
11도 기울어진 지구만큼 기운 척추에
유일한 처방은 구르뿐이라고?
내 척추 바로 서는 그날에
지구도 바로 서게 되나요?

-------------
꽃집 앞

지나면서 문득
받았던
주었던
주고 싶었던
얼굴들

가족도 청춘도 로맨스 우정도
있었구나 내게도
아름다웠구나, 겨울철의 혼자미소.

---------------
민간요법

바라건대
끊어진 듯 이어진 어설픈 명맥命脈
눈먼 몇몇
귀먹은 몇몇
죽었다가 깨어나 본 몇몇만이 아는
임사臨死체험 같은
밀교密敎의 주문도 같은
허황된 처방
내가 써온 시詩나부랭이여
그렇게 시답잖은 민간요법
멋대로 변덕무쌍 더욱 영험스러울지어다.

===========
더 잘 보려고

한발 물러서니
미소가 보였고
두발 물러서니
차림새가 보였고
더 물러서니
눈물이 보였다

사랑아. 무엇을 더 보랴.

-------------------
맨 정신으로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로
하나만 청합니다

"제 입에는 그저 아멘만 담으소서."

------------------------
+ 발자국 와불臥佛

오가는 발에 밟히던 막 돌멩이
조막손이 주워와 흙먼지를 털었더니
무수한 부처님들.

----------------------
나로 말미암아

하느님아버지!
저는요 오래전에 무용지물無用之物 되었는데
왜 아직 살아있나요?

너는 쓸모 계산해서
자식 낳아 키웠느냐?

나도 그렇다
잘못 뭉치라서 너는 늘 내 근심
너로 말미암아 제대로 웃고 싶구나.
파안대소破顔大笑도 누려보고 싶다.

==============
신神을 재판하다

히틀러시대에 숨어 사는 유대인들이 모여 재판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체포->구금->독가스실->비누가 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조상 적부터의 계약위반과 불순종 배반 등등
증거입증과 긴 변론을 거쳐 선고가 내려졌다
그래도 죄목은 자녀를 버린 부모
하느님은 유죄有罪! 였다
그리고는 손잡고 둘러앉아 감사기도를 드렸단다
ㅡ아도나이시여ㅡ
일식은 태양이 없어진 게 아니라
잠시 캄캄할 따름인 줄 알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ㅡ하고.

-----------------------
아무것도 안 해

뭐하세요? 전화에
암 것도 안 해요, TV봐요
무슨 프로인데?
글쎄 뭣이더랴?
너무 많이 해버려서
안했어야 좋았을 것을
저지레만 해서
밥보다 약을 더 먹어야 하는
참회만 해야 하는 까닭인데.

----------------------
재탄생의 기회

나에게 오면
고요도 적막이 되고 말다니, 땡볕도 캄캄이라니
적막과 어둠이야말로 태초太初 아닌가
안경을 벗고 안약을 넣고 눈을 감고
나 지금 돌아가는 중, 어제에서 엊그제 과거의 미래로
싱글 솔로 다 아닌 새 독립자로
뒤돌아 긴 길을 돌고 돌아서 머나먼 태초
부디 한 덩이 진흙이 되어지이다
그분 손에 올라앉은 작은 진흙덩이
새 숨결 불어넣어 주실 거다. 아담 하와 다 아인
인간의 오감을 뛰어넘는
다만 처음의 다만 새것, 무엇으로.

---------------------------------
부활의 집(墓所)에 와서

세월에 지고
일상에도 지고
병病마다 지고
올 데라곤 여기 밖에요
미안함과 부끄러움만 갖고 왔네요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애쓰지 마요
같은 말을 또 듣는다
들을수록 좋은 말.

=================
모든 시인을 2월에 태어났다

그 흔한
명절 국경일 임시휴일... 하나도 없다
이렇게 무시당하게 놔 둘 순 없다고
시인들을 보내셨다
2월(異월 伊월 易월 耳월 裏월)....
졸업 없는 학생
월급 없는 작업인
모든 시인은 2월생 동일씨족이다.




____*67
터무니
===1>
방향
편견
불침번 
빙허각
--------
산유화
겨울복음
낙엽 한 장
묵념하다
------------
설일 묵상
자연시간
춘설일기
누구시더라
--------------
시가 나에게
낙목한천에서
아흐 동동다리
이래도 젊고 싶냐
---------------------
백년고독 가시밭길


====2>
뿔고考
얼룩
조조
이사종
--------
하늘식
돈키호테
양털구름
이마기도
--------------
말맛 싱거워
빌린 브란트
안목이 크면
연암 박지원
---------------
토종할미꽃
금오산 설잠길
우리 동네 가야국
가던 달도 멈춰 섰다
------------------------
국수를 국시로 먹다

===3>
꽃비
낙과
물탑
연말
-------
열흘 꽃
터무니
해질녘
버섯 같은
------------
직장여성
흙의 마법
사과씨 속에는
처음 같은 옛날
-----------------
천지개벽에서
초서체 겨울비
기우뚱 만난 고개
코스모스 서울남자
------------------------
키루스왕의 사랑공부
마니아 스콜로도프스키카

===4>
가족
무릎
밤참
기일기
--------
나리꽃
낭비벽
가족모임
기일 묵상
------------
남자신발
경복궁붓꽃
들국화에게
필요 밖의 필요
--------------------
기우뚱 만난 고개
밤마다 부활전야
지옥이 필요했다
첫걸음마 서체로
--------------------
철쭉이든 진달래든

===5>
삼여
한몸
꽃집 앞
민간요법
-------------
더 잘 보려고
맨 정신으로
발자국 와불
나로 말미암아
-----------------
신을 재판하다
아무것도 안 해
재탄생의 기회
부활의 집에 와서
----------------------
모든 시인을 2월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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