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백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밀린 월급을 품고 귀가하는 가장처럼
가난한 옆구리에 낀 군고구마 봉지처럼
조금은 가볍고 따스해진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이 지상에서
그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가 잠든 새 그가 다녀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등불 아래 착한 편지 한 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내 기도에 날개를 씻고
큰 강과 저문 숲 건너 고요히 내 어깨에 내리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실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처럼 반짝이며 물고기처럼 명랑한 음성으로
오로지 내 오랜 슬픔을 위해서만 속삭여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끗한 울음 한 잎으로 피어나
그의 무릎에 고단했던 그리움과 상처들을 내려놓고
임종처럼 가벼워진 안식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젖은 눈썹 하나로 가릴 수 없는 작별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별
숫눈길* 위에 새겨진 종소리처럼
*숫눈길: 눈이 와서 쌓인 뒤에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獨酌(독작): 홀로 '독', 술 부을, 따를 '작' : 술을 따라 주거나 권하는 상대가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심
-----------
+ 법칙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허공에 흩어진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구름에 매달린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빗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허공에 흩어진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잎사귀에 매달린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물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사는것도 죽는 것도
한 몸
우주 안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
------------
+ 중독
내게 아무런 기쁨 없으니 나무들은 너희끼리
한 시절의 잎사귀를 불렀다 흩어놓고
몇 번씩 비가 내리는 저녁이 와서
더욱 캄캄해진 귀를 막게 했을까 세상에 오지 않는
노래와 약속들은 아프고 아무 데서나
쓰러지고 싶었던 나날들은 내게도 고통이었을 테지만
이젠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음으로 하여
나는 더 멀리 길 바깥으로 떠밀려간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뚜렷해서
귀를 막지 않아도 내 고통이 잘 들리고
잘 자란 벌레처럼 울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점점 더 깊은 곳에 나는 나를 버려두는 것이다
불타지 않는 기억들을 집으로 지은 사람답게
함부로 생애의 알 수 없는 힘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길과 빗방울이 오는 길과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그 바깥에서
파랗게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슨 괴로움이 되리
생에는 그런 것들과 영혼을 바꾸지 않아도 멀리 흐르고
아주 가까운 곳에 상처들은 무궁한 뿌리를 드리운다
거기 몸 박고 꽃을 피우면 이윽고 어쩔 수 없는
나날들이 오고 저녁이 와서 눈 뜰 때마다 더 멀리
더 멀리 떠밀려 가 있는 잎사귀와 만나고 나는
구름의 생멸보다 잦고 흔한 고통과 만나게 될 것을
-----------
+ 칠판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날마다 뼈를 허물어 등불을 매달았으나
당신 한 번도 내가 쓴 말들 보지 못했다
빈 정거장에 나아가 눈이 먼 은행나무처럼
그토록 가깝고 먼 자리에
무성히 가지를 뻗은 지우개가 늘 있었다
----------
+ 폭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 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
+ 황사
사막도 제몸을 비우고 싶은 것이다
너무 오래 버려진 그리움 따위
버리고 싶은 것이다
꽃 피고 비 내리는 세상 쪽으로
날아가 한꺼번에 봄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사막을 떠나 마침내 낙타처럼 떠도는
내 고단한 눈시울에
흐린 이마에
참았던 눈물 한 방울 건네주고 싶은 것이다
-------------
+ 시인들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찌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
+ 유부남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끔찍해 결혼은 천민들의 보험일 뿐이야 진부해 그냥 연애만 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자구 구속하는 일 따위 구역질 난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지 밤에 내게 전화하는 건 구속받는 기분이어서 싫더라 주말에 약속 잡는 사람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정서적 난민 같아 주말엔 책을 잃고 음악을 들어야지 당신은 내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참 마음에 들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야 천박해 그러니 우리 쿨하게 연애하자구 참, 내가 전화받기 곤란할 만큼 바쁜 사람이란 거 알지?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할게 사랑해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다 우리 좀 더 일찍 만날 걸 그랬지?
-----------------
+ 가족의 힘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
+ 반가사유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겠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 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향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 머나면 술집
요 몇 달 사이에 나는 피해서 돌아가야 할
술집이 또 두 군데 더 늘었다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들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저께는 친하게 지내오던 사채업자와 싸우고
어젯밤엔 학원 강사 하는 시인과 싸우고
오늘은 술병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낑낑 앓는 일에 다 바친다
억울하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없던 술버릇이 늘어날 때마다
그래도 다시 화해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맨 정신일 때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내 선량한 자존심
하지만 그들은 왜 하필 술 마실 때에만
인생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술자리에서만
별안간 인생이 생각나는 것인가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
술에서 풀려나면 다시 모른 체 껴안고 살아버려야 할
적이여 술집이여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이여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슬슬
피해서 돌아가고 싶어진다
---------------------
+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
+ 나에게 주는 시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
+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
+ 너무 아픈 사랑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 벌레처럼 울다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을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 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
+ 영화로운 나날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은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 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공연했다
심야 상영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 버린 영화였다
--------------------------
+ 지도에 없는 마을
지도에 없는 마을을 내게 가르쳐준 여자는 죽은 꽃나무였다 연인이었다가 독약이었다가 슬픔이었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 이었다 나는 지도에 있는 마을 어디에서도 산 적 없었지만 굳이 지도에 없는 마을로 가고 싶었고 거기서 높은 데 납작 엎드린 교회당 빨간 지붕이 되고 싶었으므로 맨 먼저 구름에게 물었던 것 같다
지도에 없는 마을은 지도에 없으므로 지도에 없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언어로는 물을 수도 없고 가르쳐줄 수도 없는 마을일 것이었다 구름은 그러나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잽싸게 입을 배꼽으로 바꿔버렸고 내가 투덜대기도 전에 귀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나는 지도에 없는 마을의 마음이 되어 떠돌았다 바람도 나무도 꽃도 승냥이도 송사리도 지도에 없는 마을을 알지 못했다 지도에 없는 마을에 사는 것들조차 지도에 없는 마을을 알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11월에 다녀갔다
그 끄트머리에 이르러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지도에 선명하게 점 찍힌 해거름의 술집이었다 그녀는 나무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땅에 박고서 그때 막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좀 외로워 보였던지 처음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당신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로군요. 깊은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날개를 갈아입어야 할 텐데요.
나는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오솔길이 되기도 하고 햇살에 기댄 돌담이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녀의 눈 속에 잠시 몸을 맡기고 난 뒤였다 그런 날은 내가 몹시 아름다워서 지도에 없는 마을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지도 위에 발 묶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 술집에 앉아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두워지면 꽃들을 데리고 잠들어야 했으므로 더 오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 별자리가 있어요. 이 별들이 당신에게 길을 데려다 줄 거에요. 머리카락을 땅에 박으며 그녀가 짧게 말했다 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었고 그녀의 눈은 다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선 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더 이상 내 입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녀의 꽃들이 한꺼번에 길을 따라 지도에 없는 마을 쪽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지도에 없는 마을은 결국 혼자서 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바람도 나무도 꽃도 승냥이도 송사리도 따를 수 없는 깊은 곳이었다
-----------------------------
+ 위독한 사랑의 찬가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한 여자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 구원은 없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검은 커튼 아래서 죽었다 나는 술집에서
낮술에 취해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술잔에 머리를 묻은 채 울었고 그날 함박눈이었는지
새 떼들이었는지 광장에 가득 내리던 무엇인가에 살의를 느꼈었다
삶에서 빛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겨울은 위독하다
술 마시다 단 한 번 입술을 빌려주었던 대학 친구도
겨울에 죽었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과 가난한 애인 사이에서 떠돌다
결국 오래 잠드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랜 잠이
그녀에게 어떤 빛을 데려다주었는지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아내가 사랑의 찬가를 듣는 한낮이 나는 무덤 같고
삶에서 아무런 빛을 꿈꾼 적 없는데도 위독해진다
사랑에 찬가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깊이 사랑한 사람이 아닐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의 남편이 되면서 내 사랑은
쉽게 불륜이 되었지만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는 삶만큼
구원 없는 세상이 또 있을까 싶어 나는 무서워진다 검은 커튼
아래서 짧은 유서를 쓰던 그녀 역시 무섭지 않았을까
여긴 내가 사랑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썼던
친구 역시 무서웠을 것이다 무서워서
결국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삶을 건너가기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깊어진 절망으로 빛을 기다린 것일까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겨울에 죽은 여자들의 생애를 생각한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일은 그녀들에게 생애의 모든 빛을 버리는 것이었고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어버린 나에게 겨울은 문득 위독한 빛으로
검은 커튼을 드리운다
-------------------------------
+ 햇살, 저 찬란한 햇살
미스 충북 선발대회 의상상 받고 와서
양장점 주인과 함께 카퍼레이드 하던 승출이네 누나는
지금쯤 시집가서 잘 살고 있을라?
종합병원 병동 앞에 펄럭이는 만국기를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삼표연탄 삼륜트럭 위에서 꽃종이를 흩날리며
소읍의 골목길을 누비던 풍경의
그 절묘한 보색대비가 떠올랐다
일부러 햇살이 잘 비치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꽃들의 만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주말 한때
살아있을 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누이와
살아가는 일이 순 견디는 자세로 움츠러든 나에게
봄날 이 햇살의 통속함이란 얼마나 깊고 감미로운가
벚꽃은 제 그늘마저 화냥기로 가리고
짜장면 배달 오토바이는 어느 벤치로든 어김없이
찾아든다 신기하지,
누이는 웃으며 공연히 먼 눈길을 햇살 속에 버려두지만
나는 안다 우리에게 찾아든 목숨 또한 얼마나
찬란하고 경이로운 인연이랴 그러나 죽어가는 시간과
살아가는 시간의 틈새에는 또 얼마나 머나먼 강물이
우리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랴
누이는 목숨을 걸고 죽어가고 나는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벚꽃,
저 까닭도 없는 축제의 몸매들,
햇살 흐드러진 벤치 위에서 우리들은 비로소 말을 버리고
목숨 하나로 고요하게 세상의 시간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살아갈 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누이와
살아가는 일이 순 견디는 자세로 움츠러든 나에게
속절없이 쏟아지는 햇살 저,
모든 살아있는 것들 위에 내리는 찬란한 햇살
--------------------------------
+ 도망간 여자 붙잡는 법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우선 몸의 부피부터 부풀려야 한다
태양계보다 커야 한다
지구 밖으로 물러나 좀 살펴보다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를 가볍게 제압한 후
태양 가까이 가져가서 자세히 관찰하도록 한다
그래도 도망간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도망간 여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집어등 밝힌 어선을 타고 오징어를 잡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강물과 바닷물을 비워낸다
너무 예리하지 않은 칼로 지구의 껍데기를 벗겨낸다
아, 지붕들만 살짝 벗겨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핀셋으로 남자들을 골라낸다
좀 작업이 더딜 것 같으면 도처에 싸움을 일으키면 된다
남자들은, 어쨌든 무엇을 위해서든 뛰쳐나가지 않고선
배겨내지 못할 테니까 그게 남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니까
이번엔 동네 구멍가게든 백화점이든 모든 상점마다
폭탄세일을 벌이도록 한다 도망간 여자가
설마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진 않을 테니까
홍당무와 감자의 무게를 달고 있진 않을 테니까
이제 좀 정리가 됐는가
그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한사코 귀를 막고 다시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를 주시하라 그녀는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고
내가 되었든 당신이 되었든 결코 다시 듣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그러나 도망간 여자를 붙잡는 일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다
그건 지구를 괴롭히는 일이니까
태양계를 비좁게 만드는 일이니까
---------------------------------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 었음을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 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고 지나가면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 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 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_________ * 24
독백
독작
법칙
중독
--------
칠판
폭설
황사
시인들
----------
유부남
가족의 힘
반가사유
머나먼 술집
-----------------
상처적 체질
나에게 주는 시
그리운 우체국
너무 아픈 사랑
--------------------
벌레처럼 울다
영화로운 나날
지도에 없는 마을
위독한 사랑의 찬가
----------------------------
햇살, 저 찬란한 햇살
도망간 여자 붙잡는 법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시인 마당/시인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