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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김이듬

# 김이듬 시

옻그릇 ㅣ달리는 집 ㅣ간주곡ㅣ 결별

12월ㅣ권할 수 없는 기쁨ㅣ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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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성 호우ㅣ 날마다 설날
너는 우연히 연두ㅣ나는 세상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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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움 ㅣ몽유도원 ㅣ 호명 
말할 수 없는 애인 ㅣ시골창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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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이상한 사람 ㅣ도플갱어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ㅣ서머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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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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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그릇

옻그릇을 선물 받았다
검붉은 피가 잔뜩 묻은, 파헤쳐진 심장 같다
한국에서도 써보지 않은 건데
프랑크푸르트에 오신 할아버지가 선물해 주셨다
파독 광부로 오셔서 여기서 청춘을 다 보냈고 귀국할 곳이 없으시다
나를 자기 딸처럼 안고 우셨다
라면을 끓여 옻그릇에 붓는데 넘쳐 버렸다
눅눅해진다 눈이
이런  상태가 말라 가는 중이란다
옻칠은 습한 곳에서 건조된다고 하셨다
나는 미끄러운 습지가 되어 타지에 있다
헤어 드라이가를 산 일요일 오후
한국학 연구소 마당 작은 연못에 앉아 있다
노르웨이 밴드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만 계속 듣지만
옻칠한 미운 국내산으로 서럽게 꾸덕꾸덕 마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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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집

차 탔다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타고 있는 한
어떤 버스는 이미 돌아왔다
난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얼떨결에 팔목에 고무줄을 감는다
학교 동료들 모두 참전병처럼 비참하게 쓰러졌기 때문에
언어교육원이 폭격을 맡고 교정은 화염에 휩싸인다
나는 바벨탑 아래 불시착해서 비틀거린다
핏물을 뒤집어쓰고 광장을 마구 달린다
수혈과 동시에 영혼은 감염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낄낄거린다
일어나세요 여기가 안방인 줄 아나 봐
부상당한 병사는 어느새 출혈이 멈췄나 보다
왜 나한텐 영화 티켓 안 주는 겁니까?

주사기를 대자마자 나는 잠잠해졌ㄱ
헤모 글리 빈이 부족하대나 뭐래나
순간적인 기절과 참전과
누굴 위해 피 바치겠다는 갸륵한 착각을 지나
나는 버스에서 내려온다

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세상을 누비고 싶었던 때
그런 게 없었고 지금은 뭐가 없는 거야?
헌혈 버스와 이동도서관과 이동식 카메라 말고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것들과 함께
하드를 먹고 싶은 약골의 한여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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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

어둠이 다시 퍼지면
너는 방에서 나온다
골목에서 기다릴게

저만치 네가 걸어오는 복도 내려오는
계단 불빛이 켜졌다가 꺼지는 동안
몇 개의 건반으로 만든 무한한 음악이

너와 걸으면 내 몸에서 리듬이 분비된다
느리고 평안하게
차가워져

마치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처럼
그때는 드러내여 사랑할 수 있을 듯이 
몇 줄의  소리로 온 세계에 알릴 듯이

왜 넌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거니

밤의 카페에서 책에 홀린 너를
그 둘레를 감싼 따뜻하고 투명한 막을

마치 내 몸이 내 몸인 것처럼
마치 우주를 느끼는 것처럼
소름과 시름 따위 구름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다
썰렁하지

우리 사이에 흐르는 빙수
검은건반 아래 새하얀 날의 살결

얼음이 녹기 전에
긁는다 숟가락은 왜
손가락이 아닌가 부딪친다
간신히 나는 희박하게 우리는 있다
스테인리스 드레스 팬시 성에 다이아몬드 결빙 만발한 정원
유리창 너머
손을 들어 흔드는 너

나는 간주된다 울리지 않는 전축
이 신음이 노래인 줄 모르고
마저 이 세상을 사랑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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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

흘러가야 강이다
느리게 때로 빠르고 격렬하게

그렇게 이별해야 강물이다
멀찍이 한 떨기 각시원추리와
반들거리는 갯돌들과
흰 새들과
착한 어부와
몸을 씻으며 신성을 비는 사람들과

돌아선 발이 뻘밭인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우리들 할 말이야 저 강물 같아도

너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난 손을 모아 그 물을 마신다
흘러가니까 괜찮은 일이다

우리는 취향이 다른 음악처럼
마주 보고 흐르거나
다른 지류로
알 수 없는 유형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흐르고 흘러 너와 내가 우연히 다시 만나다면
그래서 오늘의 모습을 까마득히 잊고
반갑게 서로 포옹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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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저녁이라서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 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과 망신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 떼가 죽을 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라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이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을 가자
그냥 여깃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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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할 수 없는 기쁨

내 친구는 스피드광
오토바이 레이싱을 즐기는 사람
그런 그가 사고를 당했다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 나한테 놀러 오겠다더니
자동차를 들이받아 오토바이는 박살 났지만
자기 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며 껄껄 웃는다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데 그물 같은 게 받쳐주는 것 같았다며
타고난 바아커란다

전화 끊고 저수지 주변을 서성거린다
수위를 조절할 수 있으면서도 열렬히
그런 건 없을까 피로 물든 바위틈
고원의 당나귀든 상인의 낙타든 모래알에 이르도록 걸으리
묵직하게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검은 얼음판 위에 앉아 있던 새
날개가 있는 슬픔

퇴화한 다리 아래
높은 곳으로 떨어져 죽어 가는 예감
날 수 있어서
날아야 하니까
버려지지 않는 능력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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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나는 변하겠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게
뼈를 톱으로 갈 때는 아프겠지
아픈 건 아포리즘만큼 싫다
성형 전문의가 검정 펜으로 여자 얼굴에 직선 곡선을 그은 사진이
버스 손잡이 앞에 있다
전후의 사람이 동일인이라며
나도 하고 싶다

손님에게만 화장실 열쇠를 주는 카페가 싫다
수만 마리 구더기가 되어 주방을 허옇게 뒤덮고 싶다

나는 긴 목을 더 길게 빼고 들어가서 눕는다
목에서 허리에서 뼈 부러지는 살벌한 소리
내장을 터트리려는 듯 주므르다 압박
위는 딱딱하고 장은 다른 사람에 비해 아주 짧습니다
맹인 안마사의 부모는 젖소를 키웠다고 한다
펭귄이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나와 동갑이 미혼
고3 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시력으로 이젠 거의 형체만 어슴푸레 보인다는 말을
왜 내가 길게 들어주어야 하나
인생 고백이  싫다
다른 감각이 발달되었다는 말을 믿어주어야 하나
그의 눈앞에서 나는 손을 흔들어보고 혓바닥을 날름거려보지만
웃지 않는 사람
자신의 굽은 등을 어쩔 수 없는
논산에서 순천 가는 길의 서른 개도 넘는 터널에 짜증 낼 수 없는
언제나 어두운 낮과 밤
들쭉날쭉하는 내가 싫다

이미 누군가 다 말해 버렸다 쓸 게 없다
가슴이 아프다
작아서 

금천동 사거리 금요일 저녁 봄날
아무도 안 오는데 명성은 무슨
명성부동산 위층 명성지압원 간이침대에 엎드린 신세
잠들면 어딜 만질지 모르니까 정신 차리고
시를 쓴다
(화분에 씨를 심고 뭐가 될지 모르는 씨앗을 심고 흙에다 눈물을 떨어뜨려요.
눈물로만 물을 주겠어요, 그런데 씨가 그러길 바랄게요. 까지 쓰는데)

뭐 합니까 돌아누우세요
싸알도 안 먹힐 시도되지 않고
야하게 꾸며 나가고 깊은 저녁이 간다
지압사에 세 나를 넘긴다
눈멀어가는 남자가 인세엥 복수하듯 나를 때리고 비틀고 주무른다 이러다
변신은 못 하고 병신 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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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성 호우

거리의 비는 잠시 아름다웠다
위에서 보는 우산들은 평화로이 떠가는 잠깐의 행성의 된다

곧 어마어마한 욕설이 들려오고 뭔가 또 깨고 부수는 소리
옆집 아저씨는 일주일에 몇 번 미치는 것 같다
한여름에도 창문을 꼭꼭 닫을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나는 오늘 한마디도 안 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면서 아아 했지만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는 말이 아니니까
홑이불처럼 잠시 사각거리다가 나는 치워질 것이다
직업도 친구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훌륭하다는 생각도 했다

작은 배드민턴 라켓 모양의 전자파로 모기를 죽였다
더 줄일 게 없나 찾아보았다
호흡을 멈추면서 언제까지나 숨 쉴 수 있다는 듯이

자정 무렵 택배 기사가 책을 가지고 왔다
그것이 땀인 줄 알면서 아직 비가 오냐고 물어봤다
내륙에는 돌풍이 불어야 했다

굳이 이 밤에 누군가가 달려야 할 때

너를  이용하여 가만히 편리해도 되는지
내 모든 의욕들을 깨뜨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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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설날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지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 이 목쉰 소리오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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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우연히 연두

암흑 한가운데서 눈이 사라진
두개골로 물살을 가르는 심해어에게
물의 흐름과 진동을 감지하는
감각 수용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면
어두운 시간이 준 노래를 들었다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이, 여기 술 더 줘
술꾼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들은 손님인 나를 착각한다
주인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사람의 진동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다를 거야....
나는 나든 아니면 또 다른 한 사람 일생으로
그 짧은 한 순간 다르게 불릴 때
암흑 한가운데서 내 가 두리번거릴 때
너에게로 이행할 감각이 생겨난다
기뻐하며 누가 맡아도 상관없을 배역을 맡자
너는 우연히 연두,
엎드린 아이, 아름다운 검은 나비
뭐든 되거나 아무것도 되지 않을
이 소리 없는 유령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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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믿는다


밤에 걸어도
골목길을 가만히 누가 뒤따라와도
나는 믿는다

꽃필 것을 믿고
그 지독한 냄새와 부스러기에 과민증이 도질 것을 믿는다
흐드러진 흰 꽃의 가치는 스러지는 데 있고
꽃나무 아래 하얀 목덜미를 젖힌 소녀에게
무자비한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다

가구와 수집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커튼을 뜯어 젖히고
네 마음을 건드린 소리와 색채에 묻혀 있던 내 몸뚱이를
보라
사랑이여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는 믿는다
오늘의 뉴스를 믿고
유랑극단을 믿고
노래와 서커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
사랑아, 너는 파리처럼 날아왔다 떠날 것이다
대충 이러다 멈춰줄 걸 믿는다

뜸하게 물을 줘도 꽃은 피고
물 주지 않았는데 흙에서 반쯤 나와 피어나는 꽃도 있다
그런 꽃일수록 끔찍하다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온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던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치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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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쿠아리움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나는 생각한다
실연한 사람에게 권한 책으로 뭐가 있을까
그가 푸른 바다거북이 곁에서 읽을 채을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웃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나는 참는 동물이기 때문에
대형어류를 키우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최근에 그는사람을 잃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상어와 흑가오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내가 헤엄치는 것을 논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한다
해저터널로 들어온 아이들도 죽음을 앞둔 어른처럼 돈을 안다
유리백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나는 산호 사이를 헤엄쳐 주다가 모래 비탈면에 누워 사색한다
나는 몸통이 가는 편이고 무리 짓지 않는다
사라진 지느러미가 기억하는 움직임에 따라 쉬기도 한다
누가 가까이 와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곁에서 책을 읽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팔지 않는 책이 내게는 있다
궁핍하지만 대담하게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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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

불 꺼진 방이 편하다
혼자 먹는 저녁과 말 붙이지 않는 이웃들 텅 빈 우체통
오지 않는 전황에 아무 느낌이 없다
여기 오래 살 것처럼
아주 오랜 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베를린 변두리 작은 방에서
나는 이곳에 아무렇지도 않다
십오 주 동안
창밖의 사과나무가 변하는 동안
진초록이 옅어지다 엷어지다 연두가 아니라 붉은색이 되는구나
그  사과가 하루하루 붉어 가는 동안
해는 짧아진다
오늘 낮은 더웠다
눈동자가 하늘색인 한국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시에 나오는
정화사를 설명하는데 그데 정화조에 담긴 물이냐는 질문에
장독대 어쩌고 하다가 시간이 끝나 버렸다 내가 칠판에 우물을 그린 후
그 물이 정화수가 되는 신비를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어도
여기 애들은 정확하게 시계를 보고 나가 버린다
목이 타서 
정화수라도 마셔 버릴 것 같은데
수도에서 석회수만 나온다
슈퍼 입구에 수박을 쌓아놓고 팔던데 못 사 먹고  있다
수박이 천도복숭아만 하다면 좋을 텐데
통째 썰어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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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

당신이 부르시면
사랑스런 당신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면
한숨을 쉬며 나는 달아납니다

자꾸 말을 시켰죠
내 혀는 말랐는데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이웃집 개와 맞바꿉니다
그 개를 끌고 산으로 가 엄나무에 매달았어요
마당에는 커다란 솥이 준비되었어요
버둥거리던 개와 도망칩니다

이리 와 이리 와
느릿한 톤 불확실한 리듬
어딘가 숨었을 개가 주인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향해 사랑이라 믿는 걸까요
날 이해하는 사람은 나를 묶어버립니다
호명의 피 냄새가 납니다

개 주인은 그 개를 다시 흥분한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이번에 맞아 죽을 때까지 지켜봅니다

평상에서 서로 밀치고 당기는 사람들
비어 가는 접시와 술잔
빈 개집 앞에 마른밥 몇 숟가락

아버지는 나를 부르고 나는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옥수수 밭 너머 신작로가 보입니다
흐르는 구름 너머 골짜기 개구리 소리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아요

당신이 부르시면
날개 달린 당신이 부르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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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수 없는 애인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거나 영 돌아오지 않겠지
가까운 곳에서 찾았어
우리는 모였지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청년들의 표류처럼 불규칙적이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휘와 문법을 습득하는 그들이 참 신기하더라
물이 무색해서 팔다리를 브이자로 벌렸지
매일매일 뱃멀미가 났어
멀리서 돈 벌러 온 한 이방인에게 나는 미약했지만
그의 까만 손가락이 내 얼굴을 두드렸지
장난스럽게 단지 두드리는 시늉만 했는지  몰라
전혀 두드리지 않았는지 몰라
적절한 문장을 못 찾겠어 도무지 사랑할 수밖에
그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음악소리로 듣는 마을에 가서
내 갈색 귀에 다 털어버렸지 코 고는 소리도 뭔가 이상했어
외국인 남자는 어떨까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 못 할 관계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생면부지의 것들은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닌 건 아니지만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야 했어
시험문항을 만들고
혼혈의 아이들을 낳아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모국어를 섞어 말할지도 몰라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날 그를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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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창녀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오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 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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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이상한 사람

자두가 열렸다
자두나무니까
자두와 자두나무 사이에는 가느다란 꼭지가 있다
가장 연약하게
처음부터 가는 금을 그어놓고
두 개의 세계는 분리를 기다린다
이것이 최고의 완성이라는 듯이

난 말이지
정신적인 사랑, 이런 말 안 믿어

다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카페 루이제에서 자두나무가 있는 정원까지 오는 동안
혼자 흐릿하게 떨리는 게 순수한 사랑이라고
나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시시각가 자두가 붉어지고 멀어지고
노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

최고의 선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
그러나 가끔 이상하게
멈춘 채 돌아보게 된다

자두나무는 자두를 열심히 사랑하여 익히고 떨어뜨리고
나는 사랑을 붉히고 보내야 한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망설일 줄 아는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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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나는 투표소에 가는 사람
주민등록증 가지러 도로 와서는 안 나가는 사람
내가 믿는 바를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
나는 검은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
거침없이 말하며 후회하기를 타고난 사람
나는 슬리퍼 끌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는 한밤중 바코드의  사람
나는 도로 위에 흰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
빈둥거리며 지척에 흩날리는 나
꿈에 늑대를 타고 달리지만 대부분 걸어 다니는 사람
음악이 없으면 금방 다리가 아픈 사람
죽느냐 사느냐 고뇌하는 사람들의 성장기를 거치지 않고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망설임조차 결여된  사람
정부는 출산여성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데, 그깟 놈들 말 듣지 않는 사람
나는 콩나물해장국을 마구 퍼먹는 사람
대가리 떨어지고 뿌리도 시들시들 말라가는 사람
내가 던진 막대기를 물고 뛰어오는 사람
공원에서 주운 개모걸이에 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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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이었고
박수를 칠 때도 박자르 맞췄다
수상작에 대한 논란은 애초부터 없었고
술자리에서 사고 치지 않았으며
요절한 시인들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연애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죽어비릴 테다
이 문장을 애용하던 그는
외국으로 나다니더니
여행책자를 출간해 한턱 쏘았다 안 취할 만큼 마셨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빠진 이들
그 시인들은 제 밥그릇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신촌의 작업실에서 애들이 기어 다니는 방구석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한찮아지고 있는지
뭔가 놀라운 한 줄이 흘러나오고 손끝에서
줄기와 꽃봉우리가 환해지는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없다는 것
아무도 안 죽고 난 애도의 시도 쓸 수 없고
수술을 받으며 난 애도의 시도 쓸 수 없고
수술을 받으며 우리들은 오래 살 것이다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
중요한 것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
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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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타임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넌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을 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는 내 무릎을 베고

아니, 널 따라하지 않아
왜 남은 날들을 신경 써야 하니
잘하려니까 심장을 멈춤고 싶잖아
난 일광을 낭비할 거야 낭비할 거야
낮에는 커튼을 치지
많이 걷지 않고 버스에서 곧잘 자
뭘 찾으려고 넌 거기까지 갔었니

내 모닝콜은 거슈인의 자장가
내일 못 일어나도
여름은 살기 좋은 계절
여름은 죽기 좋은 계절
그럴 리 없지만
물고기는 수면 위를 날고 목화는 익어가는데
아빠는 부자 엄마는 멋쟁이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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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차을 얻어 탔다
나는 뒤에서 논다

신호대기에 걸렸다
한꺼번에 여름이 갔다

대장간에 칼이 논다
이때 '논다'의 말뜻은 '귀하다'라고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말한다

신나게 
내 안의 앙상한 신들이 튀어나올 정도
노는 년은 아니어도

사랑받지 못하여
끝나는 계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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