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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당/시인 가 ~

고은 시 1

+

 저 늙은 곰
겨울나고
세상에 나오는 것 봐

 제 새끼
등짝에 업고
나오는 것 봐

아득하여라 나도 언제였던가 저렇게 느린 걸음이었다
어슬렁
어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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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해도
봄이 와서 갔다 해도
욧골이나 황골 산시골에는
꽃 하나 없네
그 흔해빠진 목련도 벚꽃도 없네

다행이야 남새밭에 노란 장다리꽃 있네
이 얼마나 넘치는 기쁨이냐
산모퉁이 돌자
아 거기에 산싸리꽃 무더기 피어 있네
그러고 보니 밭 묵은 데
눈꼽 같은 냉이꽃 자욱하게 피어 있네
암 피어 있네 피어 있네

우리 산시골 꽃 구경이야 이로써 족하구말구
꽃도 쓸 만한 건 다 뽑혀 갔네
서울로 서울로
이 나라 산천에서 뽑혀 갔네

어디 꽃뿐인가
여자뿐인가
면사무소 마당 큰 나무 몇 그루
그놈들도
88올림픽에 어디에 뽑혀 가려고
밑둥 돌려놓았다네

봄이 와서 갔다 해도
허허 꽃 하나 없네
텔레비젼만 있네
텔레비젼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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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 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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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넘어
다른 세상에서 누가 온다

밤빗소리

누가 그 세상에 간다 꼭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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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지나 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이따금 형석(螢石)빛 습기 속으로
젖은 개똥벌레를 만나고
먼바다에서 십이음의 배들이 죽어서 불빛이 된다.
기다리는 것은 미지의 친척들,
그러나 그들을 만난 일이 없다.
차라리 잠든 세상에서 잠들지 않은 절도가 된다.
이 밤 세 시와 네 시 사이를
마시던 술잔은 그대로 놓여 있는 주택을 찾는다.
그리고 임자가 바뀔 개량종자의 밭들을 찾는다.
이제 나는 찾았다. 온갖 절교의 정적을

그리고 지나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밤 네 시의 국도에는
여름철의 말 끝들이 남아 있다.
`까' `요' `다' `요'……
어둠 속에서 의문부가 없어지고
전해진 뜻이 없어진 채 남아서 빛나고 있다.
지나왔다. 수레가 지나간 뒤,
말오줌 자국이 적셔진 곳을.
그리하여 가장 취할 진정제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주어서 던졌다.
어떤 뜻밖의 언덕에 가까스로 명중했느냐,
바다가 내 흉터를 모조리 빼앗아 갈 때,
아직 새벽은 멀고 말끝들이 남아 있다.

이윽고 바다가 죽은 어부들을 부른다.
새벽이다. `까' `요' `다' `요'
나는 지친 모자를 벗어 간조의 머리카락을 뿌린다.
새벽 배는 비어 있을 뿐,
지나왔다. 배들이 죽었다. 나는 말끝처럼 하얗게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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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누가 그냥 끌러둔 말없는 광목띠와도 같지요
산천초목을 마구 뚫고 난 사 차선 저쪽으로
요 샛사람 지방도로 느린 버스로 가며 철들고
고속도로 달리며 저마다 급한 사람 되지요
고향길이야 이곳저곳 지나는 데마다 정들어
또 더러는 빈 논 한 배미에 밀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파릇파릇 겨울 배추 밭두렁을 비껴서
서로 오손도손 나눠 먹고 사양하기도 하며 굽이치지요
삼천리강산 고생보다는 너무 작은 땅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거두는 대대의 겸허함이여
자투리 땅 한 조각이라도 크나큰 나라로 삼아
겨우 내 몸 하나 경운기길로 털털 감돌아 날 저물지요
어느새 땅거미는 어둑어둑 널리는데
이 나라에서 왜 내 고향만이 고향인가요
재 넘어가는 길에는 실바람 어느 설움에도
불현듯 어버이 계셔야 해요 그리운 내 동생들 달려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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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

바람 부는 날
바람에 빨래 펄럭이는 날
나는 걸레가 되고 싶다
비굴하지 않게 걸레가 되고 싶구나
우리나라 오욕과 오염
그 얼마냐고 묻지 않겠다
오로지 걸레가 되어
단 한 군데라도 겸허하게 닦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감방 닦던 시절
그 시절 잊어버리지 말자

나는 걸레가 되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더러운 한평생 닦고 싶구나

닦은 뒤 더러운 걸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못 견디도록 헹구어지고 싶구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걸레로 태어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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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내 봄 내 여름날로는
내 반생
내 껄렁껄렁한 여생으로는
도저히 네가 될 수 없어라

저 봐
저 봐

지는 떡깔나무잎새 넷다섯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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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奢侈)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빨랫줄은 너무 무거웠고 빨래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꽃의 폐장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가 없었고
오직 `하느님!' `하느님!'만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채, 누님의 혈맥은 갈대밭의 애내로 울렸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살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고 울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고 마을 뒤 넓은 간석농지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왔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찬 세면 물에 제 푸른 이마 주름이 떠오르고
그 수량을 피해 가을에는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소리는 확실하고 그 뒤에 가을은 깊었습니다.
모조리 벗은 나무에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
누님은 그 잎새들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더 푸르기 때문에 제 눈 빠는 버릇이 자고
그러나 어디선가 제 행선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적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노쇠로 복수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 아름의 치마폭으로 고히는 그것을 껴안았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 동정 안에 내숙(內宿)한 조석을.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내실에는 어떤 고막이 가득 찼고
저는 문 밖에서 순한 밤을 한 발자국씩 쓸었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바닷가를 헤매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 안개 묻은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혼을 따라가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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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그렇게도 익숙하건만……
늙은 떡깔나무는 외면한 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하고
길은 부유(腐乳) 냄새가
이제까지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구나.

이상하다.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어가면
내 발등은 먼저 간 자취로 떨리는구나.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외딴 곽새가 V자(字) 가지에서 날라 가 버릴 뿐이다.

어느 날 일몰(日沒)이 늦었다.
나의 산길에는 그때까지 아침 이슬이 마르지 않고 있다.
자꾸 둘레를 돌아다보면서
이윽고 부락암호(部落暗號)로 불러 보았다.
저 앞에서 누가 반말로 대꾸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줄 어떻게 알겠느냐.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이 산길은 간조(干潮) 바다까지 보다 멀고
먼 예리고 고개까지도 닿아 있다.
비록 다른 길이 있을지라도
나는 이 산길을 버릴 수 없구나.
왜냐하면, 여기서 누구인가 낯선 면모(面貌)를 만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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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싹

씨 뿌렸더니
여기
여기
저기 좀 보소

어제는 누가 흙으로 돌아가더니
오늘 아침 이렇게 태어나
이 세상 만년 파릇파릇 새싹이구려

결국 여기서는
나에게까지
나에게까지
급한 물에 떠내려온 나에게까지
곡식 익은 뒤의 추위 가운데
사랑밖에 없다

저기 저기 좀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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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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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사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십 년 동안 누린 것
몇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뽑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조국의  화살이여 전사의 정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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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잎

우리가 감히 가랑잎 하나에도
아무런 가책 없겠는가
분단 권세야
야 이놈아
이제 그만 멎어버려라
산등성이 바람 친다
누이야
네가 있구나
몇 천 년의 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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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벌

하고 많은 세월
하고 많이 별을 이야기해도
별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고
그냥 거기서
몇 억 광년 전의 별빛을 보낼 따름이다.

아무리 꽃을 노래해도
어린 시절 살구꽃을
뒷날 노래해도
그 꽃들은 좀 더 오래 피어 있거나
어쩌거나 하지 않고
그냥 거기서
며칠 동안 피어 있을 만큼 피었다가 져벌릴 따름이다
아니 바람에 한꺼번에 져버릴 따름이다.

이런 막막한 세상을 우리는
별을 이야기하고
꽃을 노래하면서
나의 별 너의 꽃이라고 가슴 뛰놀고 있다
얼마나 비릿비릿 어린아이들의 늙어빠진 천진난만 그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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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는 집

다섯식구
옥순이 아버지
옥순이 어머니
옥순이
옥순이 동생
옥순이 둘째 동생
더 낳을 힘없어 둘째가 막내인지
배고파서
하루 이틀 꼬박 굶고
물배만 채워
다섯식구
서로 얼굴보고 앉았다
옥순이 둘째 동생
그 어린 것이 한 마리
소가 되어 짚도 풀도 먹고
고구마 덩쿨도 먹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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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사랑방에는 전설이 있다
전설이 살아 있다
죽은 사람도 살아나 오늘이다
사랑방에는 옛과 오늘이 한 또래이다
택시에는 유언비어가 있다
그러므로 택시에는 진실이 있다
사랑방에는 역사가 있다
고려사절요 따위
이조실록 따위보다
훨씬 자유로운 역사가 있다
사랑방에는 영웅이 있다
택시에는 장영자 무슨 자 있다
사랑방에는 지배자가 아니라
백성의 꿈이 있다
사랑방에는 내일이 있다
전하고 전해져서
이윽고 일제히 일어나는
울창한 숲이 있다
선방에는 노승이 있다
노승과 노승의 부재가 하나이다
룸살롱에는 요지경이 돈다
영동에는 과연 육체가 있다
영동에는 강북의 수표가 있다
사랑방에는 호롱불이 있다
발고랑 내 땀내 찌들고
돼지기름 먹은 목침이 있고
빈대자국 요란하지만
거기에는 기나긴 인내가 있다
우리가 고려조선
역대로 견디어 온 된장이 있다
사랑방에는 백성의
이런저런 하잘나위 얘기가 있다
별난 뻥이 아니라
이웃마을 물쌈 얘기가 있다
내일 고된 일 앞두고
밤새는 줄 모르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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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

어머니
푸성귀 잉꼬리 장수로 데친 비름나물 몇 줌이나
콩밭김치거리 열무 몇 단 팔아서
어머니의 아들 새벽길 이슬차며 떠날 때
서울 가서 으리으리 잘되라고
주먹밥 노잣돈 주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 떠난 뒤
천년이나 영검없이 빤짝거리는
북두칠성 흰 머리에 이고
찬물 한 그릇에 정들도록 빌고 빈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은 술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일제 삼십육년의 서울
또다시 쪽바리 이십 년의 한강 끝에
썩은 호박 해가 집니다
아니 양코쟁이 삼십여년에 하우스뽀이 늙고 병들었습니다
술 마시면 수많은 전생 세상 가지고
언제나 새로 태어난 가슴
다음날은 그 가슴에 구멍 뚫려
뚫린 구멍에 지난날 새벽길 환히 보입니다
어머니
언제까지나 서낭당 마루에 서서
떠나는 아들 바라보시는 어머니 환히 보입니다
이제 그만 눈물 같은 집으로 들어가세요
이제 그만 어머니의 아들
해로써 달로써 손꼽아 기다리지 마세요
눈보라뿐이었습니다
비바람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술주정뱅이입니다
천 사람의 권리 몽땅 먹은 권세
만 사람의 돈벌이 다 삼킨 부자
단추 하나 누르면
누구요 하는 열두대문집 아니어요
어머니의 아들은
밤마다 발길로

채이는 술주정뱅이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한 마리 이백만원하는 금붕어 없더라도
바깥 경치 돌고도는 응접실 없더라도
문둥이 눈썹 다 빠지더라도
어머니의 아들 마흔살 되어
어느 날 술잔 꽉 쥐어 깨어버리고
새 세상 같은 붉은 피 흘렸습니다
가슴팍도 이마빡도 들이받아 피 흘렸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술주정뱅이로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천년을 기다려 온 그날
긴긴 세월 오백 년으로 오십 년으로
아니 남과 북 허리 잘려
총구멍 맞댄 세월
이놈도 저놈도 앞잡이 세월에
그날이 오리라고
꼭 오리라고 기다려 온 그날 다 지워버렸습니다
어머니
한 핏줄 서로 부둥켜 안을 그날
가슴마다 가슴마다 해 뜨는 그날이
언제냐고 묻지 마세요
어머니
술주정뱅이 어머니의 아들 이제야 싸움터로 떠납니다
싸워서 죽을 싸움터로 떠납니다
새벽길 찬 바람 속에
두 주먹 불끈 쥐어 어머니의 주먹밥 만들었어요
가슴에 원한 서려
어머니의 노잣돈 가득합니다
오늘 하루가 어머니의 오랜 세월입니다
먼동 찢어 새벽길 떠나며
날 선 칼로 몸뚱이 되어
싸워서 그날을 등에 지고 오렵니다
피 묻은 깃발 날리며
찢어진 깃발 날리며

다친 다리 싸매고 그날을 지고 오렵니다
그날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날이 모든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아닙니다
젊은 날 보리방아 찧을 적마다
쭉정이 젖통 출렁거리던 설움
어머니의 아들 죽어서
그 젖 달라고 울부짖으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 늙은 아들 싸움으로 죽어서
오천 년 역사의 그날 꼭 이루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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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술집

기원전 이천 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나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룰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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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續)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은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편력(遍歷)하고 와,
여기 있는 꿈나라를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고요한 눈 쌓이는 소리,
세상은 지금 기도의 끝이노라.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신의 모습들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오는 하늘은 오랜 믿음이 차고
내리는 눈 사이로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 귀를 뜨노라.
나는 기도하지 않노라.
나의 마음은 이 끝나는 기도를
지키고 있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이제 와 위대한 적막으로서
쌓이는 미래의 이 눈빛 앞에
나의 마음을 어둠으로 덮노라.

==============
+ 폐결핵(肺結核) 

1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짓드 병(甁)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기인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 버린다.
오늘 하루의 이 오후(午後)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은 기도(祈禱)와
아래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빛 연애(戀愛)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2
형수는 형의 말씀을 해준다.
형수의 묵은 젖을 빨으며
고향의 병풍(屛風)아래로 유혹된다.
그분보다도 이미 아는 형의 반생애(半生涯),
나는 모르는 척하고 눈 감아 버린다.
영웅(英雄)이 떠오르며
영웅을 잠 재우는 미인(美人),
형수에게 드넓은 우리 농지(農地)를 물어보려 한다.
쓸쓸히, 고개에 녹아가는
눈 허리의 명암(明暗)을 씻고 그분은 나를 본다.
혓바닥 작은 카나리아 핏방울을 구을리며

자고 싶도록 밤이 간다.
형의 사후(死後)를 잊는다.
형수는 밤의 부엌 램프를
나에게 맡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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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연풍(海軟風)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다.
저녁 풀밭이 말라서 비린 풀 냄새가 일어나고
처음부터 말 떼는 조심스럽게 돌아온다.
여러 산들은 제가끔 노을을 받아 혹은 가깝고 혹은 멀다.
또한 마을처녀가 밭에서 숨지는 햇살을 가장 넓은 등에 받고
이 고장에서 자라 이 고장에서 시집갈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의 뭉게구름이 그토록 아름다왔을지라도
그 구름은 오늘 바라볼 수 없으며 벌은 날아가다 죽는다.
이 땅에 묻힌 옛 피가 하루하루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아직 밭 일꾼과 귀 작은 소떼와 처녀들이 돌아오지 않은 채
화북(禾北) 마을의 갈치배는 희미 꾸레 한 돛을 올리고
제 마음에 따라 다른 바다를, 그러나 한마음으로 떠난다.
옛 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으며,
바다는 좀 더 북쪽 별 나타날 곳으로 기울었는지
성산포(城山浦) 우도(牛島) 배와 마주친 배들은 나비처럼 떠나간다.
그러나 먼 상하이는 밝을 것이고 서쪽 바다의 지평선엔
가까스로 돌아오는 애월(涯月)배들이 날카롭게 솟아 있고,
지는 해를 등지며 때로 바다는 오늘같이 인자하구나.
저 저녁 바다로 떠나지 않고 밭에서 돌아온 자여, 맞이하라.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노는 애들과 그대 적막한 가슴 앞을 적시고
이 고장의 질긴 협죽도(夾竹桃)꽃들을 마지막에 적시리라.
어느 돌담 앞에나 옛 노래인양 감태 잎새와 소라 껍데기가 있어도
가장 풍요한 빈 손으로 이 땅을 떠나지 않게 하고

저 깊은 밤 바다 위에서는 이미 별이 빛나기 시작하며
어여쁜 갈치 아씨가 잡혀 하느님처럼 실려 오리라.
밤은 알리라. 더구나 저 바다의 밤은 알고 있으리라.
어제는 사시나무였고 오늘은 마른 살 가죽에서 저물고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아득한 밤배 불빛을 씻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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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

그동안 시인 33년 동안
나는 아름다움을 규정해 왔다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것은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반역이다라고 규정해 왔다
몇 개의 미학에 열중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 미학 속에 있지 않았다
불을 끄지 않은 채
나는 잠들었다

아 내 지난날에 대한 공포여
나는 오늘부터
결코 아름다움을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규정하다니
규정하다니

아름다움을 어떻게 규정한단 말인가
긴 장마 때문에
호박넝쿨에 호박꽃이 피지 않았다
장마 뒤
나무나 늦게 호박꽃이 피어
그 안에 벌이 들어가 떨고 있고
그 밖에서 내가 떨고 있었다

아 삶으로 가득 찬 호박꽃이여 아름다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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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나비

보아라
저 어리석은 바다 위를
지혜귀신
한 마리 흰나비가 날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책들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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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억

나는 세 살 때부터 늙었다
어떤 놈은 피리를 불고 다녔다
어떤 놈은 북을 쳤다

어떤 놈은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는 동안
밤 강물이 흘렀다

나는 열 살 때도 늙어버렸다
오두막에도 평화가 없는 시절
가을벌레들아
가을벌레들아
밤새도록 나는 네 동무였다

항상 젊은 영혼을 꿈꾸며 노예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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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늘

어제를 반성하기보다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어제는 죽음일 따름
아 짐승들은 자유롭구나
반성 없는 그들의 하루하루와 함께
우리는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반성이 없는 것과
반성이 있는 것 사이
그 질곡의 배회에 맴도는
나는 무엇인가

벌써 아침해의 찬란한 빛은 낡아
얼어붙은 것을 다 녹이지 못하고
다시 얼기 시작하는 저녁이
저쪽에서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오늘을 때려죽이리라
나는 무엇인가
내가 몽둥이이기 전에
내가 벼락이기 전에
내일을 잉태한 몸으로
꽝 꽝 언 땅을 걸어간다
찬 별빛이 나로 하여금 반짝반짝 빛난다

아 그동안 오늘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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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날

정월 대보름날 단단히 추운 날
식전부터 바쁜 아낙네
밥손님 올 줄 알고
미리 오곡밥
질경이나물 한 가지
사립짝 언저리 확 위에 내다 놓는다
이윽고 환갑 거지 회오리처럼 나타나
한바탕 타령 늘어놓으려 하다가
오곡밥 넣어가지고 그냥 간다
삼백예순 날 오늘만 하여라 동냥자루 불룩하구나
한 바퀴 썩 돌고 동구 밖 나가는 판에
다른 거지 만나니
그네들끼리 무던히도 반갑구나
이 동네 갈 것 없네 다 돌았네
자 우리도 개보름 쇠세 하더니
마른 삭정이 꺾어다 불 놓고
그 불에 몸 녹이며
이 집 저 집 밥덩어리 꺼내 먹으며
두 거지 밥 한 입 가득히 웃다가 목멘다
어느새 까치 동무들 알고 와서 그 부근 얼쩡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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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뒤

고향에는 밤이 있다
한없이 환한 대보름 뒤의 달밤이 있다
잠 깨어 뒷간에 간다
벌써 요강 넘쳐서
바깥으로 나가 뒷간에 간다
자지러지게 환한 밤
건넛마을 수동이네 헛간 위
지붕 못 걷히게 얹어둔 헌 쟁기까지 보이는 밤
참수리가 공중에서 먼 데까지 보듯이
병아리 보듯이
멀리멀리 바위배기 상엿집까지 보이는 밤
보름 쇠고 치던 징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
가슴 설레어 천리길 나서고 싶다
과부 자식 아니랄까
소문난 건달 창섭이 오줌 싸고 진저리 치며
그 길로 휘영청 나서고 싶다
곰아 곰아 너 숨었거든
발바닥만 핥지 말고 너도 나와 성큼 나서 보아라
환한 달밤 아쉬워 어찌 잠자누 잠만 처자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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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뼈 이야기

산등성이마다 언덕마다 부랴사랴 밭머리마다
땅 가물에도 원두 부쳐먹던 사람들 죽어 묻혔구나
하루 내내 뻐꾸기 소리 듣는 구멍 하나 뚫리지 않았건만
순하디 순한 무덤들이여 살던 곳에서 죽은 복이여

허나 어찌 이런 복으로만 이 땅이 저승이겠는가
돌아보건대 너와 나 소나기같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왜놈들 총칼 게다짝 버리고 떠나간 뒤에 대고
당장 새 세상 좋은 세상 열어 장고 치려 하였건만
어언 40년 바람 잘 날 없이 우리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로도 모자란 땅덩이 두 놈으로 딱 갈라서서
서로 때려죽이고 쏴 죽이고 가시철망 울 치고
그 따위만 백 번 옳다고 무섭게도 헛되었구나
이 막된 미움 가지고는 천 년인들 열리는 문 없음이여
산 것들 자나새나 이 골이니 무덤인들 오죽하였겠느냐

이제 우리에게 숙연히 머리 들어 할 일인즉
남과 북쪽 오로지 원수였던 젊은이들 무덤을
따로따로 섬길 것 아니라 내 편이 아니라
저 팔월의 휴전선 비무장지대 풀밭에 합장하여
그 위에 마음껏 해와 달 별들 다니게 하고
산 사람 죽은 사람이 온 겨레로 뭉쳐 애끊이어라

아직도 이 땅에는 제대로 거두지 못한 뼈 있고
풋내기 인민군의 뼈 학도병의 뼈 버려져 있다면
어디 그뿐인가 온갖 사연으로 죽어간 목숨들이여
그것 하나하나 캐어다 그들도 함께 묻어서
보아라 이제 이 커다란 만인총이 비로소 하나이겠구나
이 하나 이 한 세상 이룩하기 얼마만인가
또한 어디 이뿐인가 해방 이래 40년 가 버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동포 끌려간 동포
만주땅 중국땅 버마 자바땅 비율빈 충승열도
왜놈의 구주탄광 아오모리탄광 또 어디 어디
그런 곳 풀더미 속에 땅 속에 묻힌 뼈 한 도막인들
단 한 도막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찾아다가
우리 7천만 품 안에 모시고 실컷 깨쳐야 하리라

내 어버이 무덤 한 쌍 소중하기 그지없거니와
이 겨레로 태어나 이 겨례 치욕으로 죽은 바
원통하고 절통하였던 동포들의 삶과 죽음이
어찌 내 아버지 아니던가 어머니 아니던가
이날 이때 우리 무엇을 하였던가 말았던가
겨레의 엄한 뼈 타국땅 구석에 그냥 버려두고
우리가 어디에 겨레인가 만 번 거짓 아닌가

보아라 산 사람이여 너와 나 살아 있음이 여기로구나
먼저 비명으로는 명으로든 죽은 겨레붙이 마음삼고
그들의 뼈를 이 땅의 정든 산천초목으로 더불어서
온 겨례 하나로 일어선 그날이 아기같이 오너라
그 날이 씩씩한 총각같이 오너라 새악시같이 오너라
삼천리강산 번쩍 들어 올려 우리 바이없는 자자손손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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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무슨 천벌로 
얼지도 못하는 시꺼먼 간장이란 말인가
다른 것들 얼다가 풀리다가
으스스히
빈 가지들
아직 그대로
그러다가 보일 듯 말 듯
노란 산수유꽃
여기 봄이 왔다고
여기 봄이 왔다고
돌아다보니
지난해인 듯 지지난해인 듯
강 건너 아지랑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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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밀회(密會)

또다시 나는 새벽마다 무덤에 가야 한다.
나와 함께 삼나무 묘판을 만들고
내 세수하는 물과 마실 물을 떠다 주고
기꺼이 먼 심부름도 해 준 애의 무덤에 가야 한다.

무덤은 질투의 바다가 일어나는 언덕에 있고
어제 다친 발을 나는 거기 가서 벗어야 한다.
내 약속과 돌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새벽 돌길은 매우 험하다.

그 무덤 가에서 벌써 연인은 기다린다.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냥
새벽 바다에서 온 바람을 치마에 받고 있다.
오오 그렇게도 단정한 연인아.

새벽마다 만나도 항상 바다는 그대 앞에 깨어 있고,
그렇게도 단정하게 자고 난 연인아.
그대가 무덤 가에서 미안한 듯 내 품 안을 밀고
어디선가 첫 수꿩 울음소리가 무덤을 깨우며 지나간다.

그러나 무덤은 나더러 아직 길이 멀다고
오래 있다가 오라고 부탁한다.
오오 새벽에 만나는 바다와
나의 심부름꾼 무덤과
나의 잉태한 연인아.

이제 마지막 별들이 찔끔찔끔 서두르고 있을 때
나는 바다로부터 솟아난 비가 되고
차라리 연인은 무덤에게 맡겨야 한다.
곧 말들이 모여 바쁜 꼬리로 나올 것이다.

새벽 연인아, 그대의 마을 일을 오늘 하루만 도울 수 없다.
나는 이사장네 배에 몇 백관의 햇빛을 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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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넙치

방금 낚싯바늘에 걸린
새끼 넙치의 절망
그 절망으로
물 위에 떠오르며
퍼덕이는
그 절망 속의 희망

오늘 친구의 아들에게 친구의 안부를 물었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퍼부어댈 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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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매기 소리

가을걷이 끝나고도
삼동네 풍장 칠일 없어요
반장 고갑룡이는
제 집 뒷방에 둔
깽매기 징 장고들이 궁금해서
그것들 꺼내다 늘어놓고
먼지도 털어주고
잿물 찍어 쇠 닦아주기도 하다가
어디 한 번 소리 내봐라 하고
오래오래 소리 못 낸 깽매기 냅다 쳐보니
그 소리 동네에 다 들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깽매기 소린가
도깨비 양반 장난인가
죽은 칠성이 혼백 돌아와 신명 나는가
그렇지 젊어서 죽은 칠성이
깽매기 자진모리 한 번 눈 지그시 감고 신들렸지
얼쑤 어깻죽지 뛰놀았지
무논갈이 소 모가지 고단하듯 고단한 세월 신들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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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 내는 날

내 앞에서 자란 자식
벌써 코밑에 잔털 난 자식
쇳내 나는 이놈 데리고
경운기 함께 탄다
아랫뜸 지나
꽤나 먼 길 거름을 낸다
갓난이 때 잘도 보채던 놈이
이제는 입이 굼떠
별반 성난 듯이 말도 없다
이 놈하고 가다가
상묵이네 논 둔치에서
까딱 엎어질 뻔했다가도
용케 경운기 손잡이 잘 휘어잡았다
추운 날도 느린 새는 느리게 난다
사뭇 점잖다
우리 짚뭇은 다 들여가고
다른 집 짚벼눌이 더러 논에 있다
올해는 객토 못하는 대신
여름내 만든 퇴비거름
맛있는 거름
논에 내니
논 좀 보아라
논이 헤헤 입 벌리고 좋아한다
남의 논들이야
너무 일직 방정 떤다 할지 모르나
우리 논이 좋아하니
나도 내 자식도 함께 좋구나
하늘이야 높아서 소 닭 보듯 하고
다섯 번 거름 실어내면
한나절이 넘어서
거름냄새 퀴퀴 쩐 몸으로
비로소 내 자식 입을 연다
아버지
내년 절충못자리는 내가 할게요
어느덧 덧없구나 내 자식이 자식 아니다
나와 내 자식 이 들판에서 비로소 나란히 형제다
어서 가자 가서 술 한잔 주고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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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앞에서

무지가 난초처럼 조용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지는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

이윽고 오늘 아침 난초꽃이 피어났다
괜히
밖에서 백합꽃도 피었다
긴 장마 동안
아무런 꽃도 필 수 없다가

오 무지여 암흑의 행위여 가거라
이 꽃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가
얼마나 영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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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눈 내린다
마을에서 개가 되고 싶다
마을 보리밭에서 개가 되고 싶다
아냐
깊은 산중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곰이 되고 싶다
눈 내린다
눈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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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영감

박판술 영감이 지나가면
우리는 육자배기가 지나간다고 했지
그가 논두렁에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육자배기가 뻗어 있다고 했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에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그 동지섣달이 뻗어 있다고 했지
육자배기하고
동지섣달하고 그렇게도 잘 부르더니
그 늙은 홀아비 판술 영감은
죽기 이틀 전에도
병든 몸 끌고 토방에 나와
한바탕 진도아리랑 불러댔지
죽 한 사발 끓여줄 사람도 없어서
혼자 기어 나와 죽 끓여 먹고 간장 먹고 앓은 영감
그러던 그 영감 토방에 나왔으니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저 영감 살아날라나보다 힘차다 했는데
다음다음날로
그만 힘차게 이 세상 후딱 떠나버렸지
동네사람들 새로 짠 가마니 두어 장 내다가
둘둘 말아
남생이언덕 바람 속에
홀아비 송장 묻으며
이구동성으로 날 좀 보소 불러주었지
그 뒤 괜히 바람 치는 밤이면
남생이언덕 평토장한 무덤에서
그 영감 육자배기도 진도아리랑도 들린다 했지
생전보다 더 기막히게 부르는 진도아리랑 들린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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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화상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국경이 있다
그 국경 언저리
오도 가도 못하는 무국적자가 있다

그 단어들의 사생아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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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썰물

우리는 기억하리라
이 세상을 폭풍우로 두들겨 패야 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을 성난 해일로 덮쳐야 할 때가 있다
비록 흰 거품 물고 물러서지만
오늘의 썰물로 오늘을 버리지 말자
오늘이야말로 과거와 미래의 엄연한 실재 아니냐
우리는 기억하리라
기억해 자식에게 전하리라
오 끝없는 파도의 민족이여
그러나 이 세상을 한밤중 우는 아이로 달랠 때가 있다
역사가 아버지가 아니라 내 자식일 때가 있다
오늘을 내 자식으로
멀어져 가는 썰물의 파도소리로 잠재우건만
그뿐 아니라 이 세상을 온몸으로 참회할 때가 있다
참회란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한 일을 끝내 해내는 데 있지 않느냐
지금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파도치면서 젊은 밀물로 돌아오리라
우리들의 생존 몇 천 년이 오늘이 되어
바다 전체로 온 누리로
우리들의 밤을 하나하나 드높은 별빛으로 기억하리라
바다는 만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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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농업

이미 날이 저문다.
시장기 든 해거름의 일꾼들이 돌아온다.
어떤 장님도 눈을 뜨게 한다.
풀밭에서 몰고 온 이웃집 목우는
긴 입안이 가득하게 헛새김질을
한다. 제 주인의 잘못을 오래오래 걱정할 때도 있다.
청과물 장에 짐을 부리고 온 내 만혼의 처음,
아직 아내는 들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미농무로 담은 깍두기와 찬밥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홍차를 마실 것이다.
첫딸의 이름은 아내의 허리에 달아 두려 한다.
러시아의 부칭을 넣지 않으련다.
이제 바다는 만조일 것이다.
아내의 수건 벗은 새벽머리로부터 이 세계는 어두워 온다.
이윽고 그네가 먼 들길을 건너올 때, 우리나라의
별똥이 그 위에 흐른다.
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망을 뒤늦게 표현한다.
아내의 손발이 얼마나 텄을까.
오늘 장에서 신 같은 크리임을 사 왔다.
이제 내가 찾을 아내의 가슴은 죄송한 내실에 있다.
오직 입을 다물고 해산을 기다릴 뿐, 아내의 농업은
어디로 떠날 수 없도록 교목을 섬긴다.
저 멀리 미혼의 기적소리가 들린다.
이제 내 아내는 한쪽 귀를 떨며 작은 문을 연다.
그네의 모습은 내가 끝없이 반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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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겨울 文義(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小白山脈(소백산맥)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文義(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正義(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文義(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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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호랑이타령

백 년 전까지는요
북악 인왕에 호랑이가 불쑥 나타났지요
대궐의 가여운 상궁아씨들도
호랑이 울음소리 들었다지요
아이구 무서워라 호랑이었지요
보아요 북악 바위바위 얼마나 뛰어나요
거기에 와 앞발 내디디면
멋지고 멋진 호랑이었지요
우리나라 통 큰 시악시 쩍 반했지요

예부터 허튼수작 관상에는 호식상이 있었지요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상이 그것이지요
한양 4대 문 밖 변방에서
걸핏하면 어린아이 물어 가는
그런 고얀 놈 없지 않았지요
쯧쯧 더러는 인수봉 스님도 하나 물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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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조(滿潮)에 노래하다

제주 만조여, 그대는 떠나는 배를
조금만 늦게 떠나게 하고
어제 밤배들을 돌아오게 한다.
어떻게 지킬 약속을 실어오는지,
한 척의 거룻배도 삐걱거리며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만조여, 그대는 한 물새가 조상할 것을 조상(弔喪)하게 한다.
돛받이에 다친 어부는 키 잡은 손을 풀고
온갖 그물코에 별들을 걸어야 한다.
잠깐이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여인이 낳을 것이다.
오늘까지 살아온 자는 그대 앞에 있고,
언젠가 오랜 땅보다도 오랜 바다를 소망하리라.

만조여, 누군들 그대 앞에 한낱 어린 길손이리라.
그러나 만조여,
그대가 이 마을을 가득하게 할 때
산지포 노인의 지는 숨은 빨리 지고
새 갓난애와 별똥이 탄생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자도 오는 자도
그대가 이 마을을 가득하게 할 때인지라
먼 곳으로부터 썰물 때는 서두를 수 없으리라.
저 북쪽 바다에는 동정녀의 어화를 수놓게 하고
한 물결만큼 바람을 쉬게 해도 물결은 찬란한 살로 일렁인다.
만조여, 고기떼는 좀 남아서 자지 않을 것이고,
여러 물새들은 제 날개를 재워야 한다.

제주 만조여, 이제 그대가 이 마을을 떠나려 할 때,
저 어둔 바다는 새끼 아지 와 소라를 키우지 않고
잠시 신을 키우지 않으리라.
이미 돌아온 배는 비어 있으나
어느 작은 갑판 위에 인기척이 남고
마지막 배가 죄 없이 돌아온다.
만조여, 저들 어부에게 목 축일 술을 허락하라.

그리하여 이 마을은 조심스럽게 썰물을 기다리게 하라.
모든 것은 가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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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귀성
걸레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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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
산길
새싹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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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가랑잎
꽃과 벌
굶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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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새벽길
선술집
속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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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결핵
해연풍
호박꽃
흰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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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억
다시 오늘
대보름날
대보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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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이야기
산수유꽃 
새벽 밀회
새끼 넙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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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매기 소리
거름 내는 날
난초 앞에서
눈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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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영감
어느 자화상
오늘의 썰물
내 아내의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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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마을에 가서
북악호랑이타령
이 만조에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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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 모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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