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겨울 a
콩새가 산수유나무 밑을 뒤지고
오목눈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에서 풀씨를 뒤질 때
식탁 위의 감자튀김(올리브융에 튀긴)
내가 뒤지는
-----------
+ 겨울 b
배추김치를 텃밭 한구석에 묻고
파김치를 그 옆에 묻고
언덕에서는 잡목림 밑에
발자국을 묻고 있는 지빠귀
---------
+ 여름
잡목림의 가장자리에
바지를 내린 젊은 여자가
쪼그리고 있다
여자 엉덩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덤불 속의 산몽화山夢花
---------
+ 저녁
저녁 허공을
가로질려 가다
질긴
들불의 연기 한 줄기
군용 헬리콥터
발목을 감고 가네
======
+ 한낮
허름한
농가에 털썩 기대놓은
우편물 집배원의
빨간 오토바이
그 위로 매미 울음소리 하나 지나가다
잠시 걸터앉아
'매ㅡ' 해보고 가네
-------------
+ 강 건너
벗고개에는
산오리나무
갈림길에는
표지판 위의 문호와
서후
그리고 대지에는
애기똥풀과
조팝나무
-------------
+ 봄과 밤
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 놓았네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놓았네
------------
+ 빗소리
후두두두둑 ㅡ
뜰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동과 서
남과 북
사방으로 튀는
깝죽새의 울음
========
+ 산과 길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
+ 그대와 산
ㅡ서시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
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
+ 봄과 나비
나비 한 마리 급하게 내려와
뜰의 돌 하나를 껴안았습니다
----------------
+ 봄날과 돌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잠에 단단하게 들어 있네
봄날 하고도 발끝마다 따스한
햇볕 묻어나는 아침
=========
+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
+ 아이와 강
아이 하나 있습니다
강가에
아이 앞에는 강
아이 뒤에는 길
------------------
+ 4월과 아침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
+ 꽃과 꽃나무
노오란 산수유꽃이
푹푹, 푹
박히고 있다
자기 몸의 맨살에
===========
+ 길과 길바닥
풀 한 포기와 나 사이
가을의
둘
하나
------------------
+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
+ 나무와 햇볕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
+ 덤불과 덩굴
강 건너 돌무덤
강 건너 돌무덤 옆에
돌무덤
옆에
강 건너 여자
옆에
강 건너 애기똥풀
===========
+ 발자국과 길
나무 밑에는 그늘과
그늘에서 뭉개지다가 남은 발자국
그곳으로 가는 길
-------------------
+ 새와 그림자
딱새 한 마리가 잡목림의
산뽕나무에 앉아
가지를 두 발로 내리누르고 있다
딱새의 그림자도
산뽕나무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가까운 줄기에 바짝 붙어 있다
-------------------
+ 식빵과 소리
식빵을 얕게 썰어
살짝 굽는다
한 조각 위에
버터를 바르고
한 조각을 덧씌워
종이 냅킨을 감싸 쥔 뒤
아, 하고
입 가득 넣고 깨문다
바싹!
오후
그리고
4시
------------------
+ 풀과 돌멩이
길 위의 돌멩이 하나
무심하게 발이 차네
발에 차인 돌멩이
길 옆 풀들이
몸으로 가려 숨기네
그 순간
내 발 아프네
============
+ 눈과 물걸레질
눈송들이 조심조심 가지에 앉아 쉬다가
몸을 바꾸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떠나갈 때는 앉았던 자리 모두
깨끗이 치워
물걸레질한 흔적이 한나절 더
남아 있다
--------------------
+ 라일락과 그늘
수놈 강아지가 뒷다리 한쪽을 들고
머리는 아랫배에 붙이고
성기를 핥고 있다
라일락 나무의 보랏빛
그늘에
혼자 누워
---------------------
+ 바람과 발자국
눈이 자기 몸에 있는 발자국의
깊이를 챙겨간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깊이를 바람이
땅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
+ 여자와 굴삭기
밭에서 일하는 여자의
치마 밑까지 피며
굴삭기 소리 천천히 강을 건너온다
============
+ 층층나무와 길
바위 옆에는 바위가
자기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몸 밖에 내놓은
층층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붉나무도
한 그루 있습니다
------------------------
+ 쥐똥나무와 바람
쥐똥나무 울타리에 9월이 세워둔 바람이
나무와 나무 사이 서늘한 그늘에
빳빳하게 서 있다
------------------------
+ 지빠귀와 잡목림
바스락 소리 한 번에 한 발짝씩
겨울을 가던 잡목림의 지빠귀
문득 사라진 바스락 소리 밑에
잔설에 젖고 있는 낙엽
--------------------------
+ 베고니아와 제라늄
햇살 환한 베란다의
창턱에는
베고니아와
아이비 제라늄
그리고
캡이 찌그러진
브래지어
================
+ 조팝나무와 새떼들
ㅡC형에게
조팝나무에게 흰 피가 도는
사월
그리고
하순
하늘에
쏟아지는 새떼들
====2>
+ 길
길에 그림자는 눕고 사내는 서 있다
앞으로 뻗은 길은 하늘로 들어가고 있다
사내는 그러나 길을 보지 않고 산을 보고
사내의 몸에는 허공이 달라붙어 있다
옷에 붙은 허공이 바람에 펄럭인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되어 있다
---------
+ 강변
잠자리들이 허공에 몸을 올려놓고 있다
뜰에는 고요가 꽉 차 있다
잠자리들이 몸으로 부딪쳐도 뜰의 고요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쓰르라미가 쓰ㅡ 하고 올려다 그만두어버린다
----------
+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
+ 부처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더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뉘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
+ 여름
강변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집배원이
소변을 보고 있다
물줄기가 들찔레를 흔들면서 떨어진다
근처에 있던 뱀이 슬그머니
몸을 감춘다
강은 물이 많이 불었다
---------
+ 오후
아침에는 비가 왔었다
마른번개가 몇 번 치고
아이가 하나 가고
그리고
사방에서 오후가 왔었다
돌풍이 한 번 불고
다시 한 번 불고
아이가 간 그 길로
젖은 옷을 입고 여자가 갔다
----------
+ 처서
오후 2시 생협에서 야채 배달을 왔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박새가 햇볕을 비집고 솟아올
랐다
3시에는 집배원이 오토바이 굉음을 울리며 왔다
우리 집 우편함에 무엇인가 넣었다
집배원이 가자 새로 이사 온 앞집 아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우편함을 덜컥 열었다
그러다가 비가 아주 잠깐 왔다
----------------
+ 구멍 하나
구멍이 하나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
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지는 구멍이 하나 있다
때로 바람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둘이 모두 자취를 감추는 구멍이 하나 있다
=========
+ 아이와 새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 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 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흡-흡-흡-흡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
+ 쑥부쟁이
길 위로 옆집 여자가 소리 지르며 갔다
여자 뒤를 그 집 개가 짖으며 따라갔다
잠시 후 옆집 사내가 슬리퍼를 끌며 뛰어갔다
옆집 아이가 따라갔다 가다가 길 옆
쑥부쟁이를 발로 툭 차 꺾어놓고 갔다
그리고 길 위로 사람 없는 오후가 왔다
-------------------
+ 가을이 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
+ 빛과 그림자
외딴 집이 자기 그림자를 길게 깔아놓고 있다
햇빛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조심조심 떨어지고 있다
바람도 그림자를 밀고 가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림자 한쪽 위로 굴러가던 낙엽들도 몸에 묻은
그림자를 제자리에 두고 간다
==========
+ 잣나무와 나
뜰 앞의 잣나무로 한 무리의 새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잣나무는 잣나무로 서 있고
잣나무 앞에서 나는 피가 붉다
뒷짐 진 손에 단추가 들어 있다
내 앞에서 눈이 눈이 온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몸이 따뜻하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입이 있다
-------------------------
+ 해가 지고 있었다
이름 모를 새가 와서 울었다
배롱나무에서 울었다
배롱나무는 죽었지만 반짝였다
울고 난 새가 그늘에 묻힌
작약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
서산을 반쯤 가린 불두화를 보았다
반쯤 남은 서산을 보았다
그리고 새가 다시 울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
+ 새가 울지 않고 지나갔다
오전 내내 그는 갈참나무에 기대고 앉아
허공에 잠긴 갈참나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돌들도 조용했다
오후 내내 그는 갈참나무 근처를 오가며
서성거리는 갈참나무가 되어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새 한 마리 울지 않고 지나갔다
지는 해가 잠깐 눈부셨다
-----------------------------------
+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와 다른 한 통의 사랑편지
그는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와
다른 한 통의 사랑편지를 남겼다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와
다른 한 통의 사랑편지는
그의 책상 오른쪽
둘째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마흔여덟 퉁의 사랑편지는
편지지는 간혹 달랐지만
사랑하는 그대여 로 시작해새
그대를 사랑하는 JS로 모두 끝났다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는
글씨와 색깔은 간혹 달랐지만
사랑하는 그대여 로 시작해서
그대를 사랑하는 JS 로 모두 끝났다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는
내용이 간혹 덧붙여지고
또 간혹 지워졌지만
사랑하는 그대여 로 시작해서
그대를 사랑하는 JS 로 모두 끝났다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와는 달리
다른 한 통의 사랑편지는
나의 사랑 그대여 안녕히 로 시작해서
나의 사랑 그대여 안녕히 JS 로 끝났다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와
다른 한 통의 사랑편지는
편지봉투는 간혹 달랐지만
사랑하는 그대의 주소는 모두 같았다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은
우표가 붙어 있었다
____*45
두두
====1>
겨울 a
겨울 b
여름
저녁
------
한낮
강 건너
봄과 밤
빗소리
---------
산과 길
그대와 산
봄과 나비
봄날과 돌
------------
새와 날개
아이와 강
4월과 아침
꽃과 꽃나무
--------------
길과 길바닥
나무와 햇볕
나무와 허공
덤불과 덩굴
--------------
발자국과 길
새와 그림자
식빵과 소리
풀과 돌멩이
----------------
눈과 물걸레질
라일락과 그늘
바람과 발자국
여자와 굴삭기
-----------------
층층나무와 길
쥐똥나무와 바람
지빠귀와 잡목림
베고니아와 제라늄
----------------------
조팝나무와 새떼들
==2>
길
강변
고요
부처
------
여름
오후
처서
구멍 하나
------------
아이와 새
쑥부쟁이
가을이 왔다
빛과 그림자
--------------
잣나무와 나
해가 지고 있었다
새가 울지 않고 지나갔다
마흔여덟 통의 사랑편지와 다른 한 통의 사랑편지
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