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ㅣ
너를 기다리는 동안 ㅣ
너무 오랜 기다림 ㅣ 겨울 산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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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ㅣ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ㅣ
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ㅣ 길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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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서 ㅣ 발작 ㅣ
붉은 우체통 ㅣ 상실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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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고요 ㅣ 아직은 바깥이 있다 ㅣ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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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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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욱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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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 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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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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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 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 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공원 뒤편 순대 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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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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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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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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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서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 장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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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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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우체통
버짐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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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귀밑머리 허옇도록 放心한 노교수도
시집간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상실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 가버린 낙타여
이 모래 바다 가는 길손이란!
어쩌면 이 鹿苑은
굴절되어 바람에 떠밀려 온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래밭과 풀밭이 갈리는 境界에 이르러
나는 기를 쓰고 抄錄으로 들어가려 하고
낙타는 두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완강히 버티고
결국, 어느 華嚴 나무 그늘에서
나는 고삐를 놓아버렸지
기슭에 게으르게 뒹구는 사슴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도
물의 찬 혓소리 듣는 법을 알고
목마름이 없으므로
'목마름'이 없는 뜨락
멋모르고 처음 돌아오는 자에게도
돌아왔다고 푸른
큰 나무 우뢰소리 金剛 옷을 입혀 주는구나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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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고요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 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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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바깥이 있다
논에 물 넣는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커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 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 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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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 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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