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동규의 시
풍장 1 ㅣ 풍장 2 ㅣ 풍장 3 ㅣ 風葬 4
풍장 6 ㅣ 풍장 7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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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11ㅣ풍장 12 ㅣ풍장 14 ㅣ풍장 15 ㅣ
풍장 16 ㅣ풍장 17 ㅣ 풍장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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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20 ㅣ 풍장 21 ㅣ풍장 22 ㅣ 풍장 24
풍장 25ㅣ풍장 26 ㅣ풍장 26 ㅣ풍장 27
풍장 28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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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30 ㅣ 풍장 31 ㅣ 풍장 34 ㅣ 풍장 35
풍장 36 ㅣ 풍장 37 ㅣ 풍장 38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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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40 ㅣ 풍장 42 ㅣ 풍장 44 ㅣ 풍장 46
풍장 47 ㅣ 풍장48 ㅣ 풍장 49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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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50 ㅣ풍장 52ㅣ풍장 54 ㅣ 풍장 58 ㅣ
풍장 59 ㅣ
풍장 63 ㅣ 풍장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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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적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도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도 해탈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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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
아 색깔들의 장마비!
바람 속에 판자 휘듯
목이 뒤틀려
퀭하니 눈뜨고 바라보는
저 옷벗는 색깔들
흙과 담싼 모래 그너머
바다빛 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가을 햇살의 알갱이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술의 숨길 되듯
바싹 바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속에 둥실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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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
희미한 길 하나
골목에 들어가 길 잃었다가
환한 한길로 열리듯
아픈 이 하나
턱 속에 사라졌다가 바람 불 때
확하고 뇌 속으로 타오르듯이
세상이 세워지다 말고
헐리다 말고 외롭다 말고,
세상이 우리 모여 떠들던 광교 술집과
잠 못 들라 홀로 몸 붙이고 잠든
방 사이 어디선가 타오른다
인왕산일까 남산쯤 혹은 낙산 그 너머일까
낙산 밑에 밀주 팔던 그 술집일까
암방에 담요 뒤집어 쓰고 화끈 달던
술 항아리일까
혹은 우리들보다 더 뜨거운 우리의 골목일까
그런 골목, 우리 코드 버리고
웃웃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
불타는 마루를 빠져나와
마당을 빠져나와
대문턱에 걸려 넘어져 엎어진 채로
세상이 마른고, 세상을 태우고,
세상에 물뿌리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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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風葬 4
쓸쓸한 화령길
어려운 길 석천길
반야사는 초행길
황간지나 막눈길
돌다리 위에 뜬 어리숙한 달
(그 달?)
등지고
난간 위에 눈을 조금 쓸고
목숨 내려놓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루카치 만나면 루카칠
바슐라르 만나면 바슐라를
놀부를 만나면 흥부를....
이번엔 달을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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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6
그대와 나 숨을 곳은
숨죽이고 헤매다 광도 낮은 저녁 도착한
명왕성 밖 폭포 소리 그치고
싸락눈 조심히 뿌리는 곳.
옷 벗은 버드나무들이
무릎까지 머리칼 늘어뜨리고
신비하고 쓸쓸하게 눈을 맞는 곳.
누군가 전보를 치고
DDD 전화를 걸어오고
밤하늘 별자리 통해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모두 용서한 돌아오라 돌아오래."
용서라니!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문득 속력을 내는
저 그림자 나라의 빠른 말들 가운데
가장 이쁜 말 "용서"를 타고
돌아갈 수는 없겠지.
말을 내리며 둘 다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떨굴 수는 없겠지.
차라리 태양을 향해 분별없이 달려가
겁나는 꼬리를 하나씩 달고
이른 저녁 하늘에 나타나
생채기처럼, 낙인처럼, 아물다 말다 사라질 것인가?
겁없이 하늘에 뛰어든 우리
아 하늘 귀신 못 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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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7
풍란이 터진다
손가락을 넣으면
빵꾸난 주머니
시원 너덜너덜 너덜
옷꿰멘 곳 터져
살 드러나고
살 꿰멘 곳 터져
뼈 드러나는가
가만,
말 꿰맨 곳 터질 때
드러나는 말의 뼈
실과 바람 사이
바람과 蘭(난) 사이
풍란과 향기 사이에서
흰 빛갈과 초록 빛깔에
알록알록
가벼이 춤추는 뼈들이
골수 속에 코를 박고
벌름대는 이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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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1
여기가 어딘가?
봄 산이 햇살 속에
겉옷 슬쩍 걸어놓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배의 솜털을 보여준다.
저 칼로 썰오논
구름장 위에
날리는 햇살!
살아있는 것이
겁 없이 황홀해
더 앉아 가지 못하고
슬며시 일어서서
버스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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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2
이 세상 가볍게 떠돌기란
양말 몇 컬레면 족한 것을.
해어지면
기워 신고
귀찮아지면
해어지고
(소금쟁이처럼 가볍게
길 위에 떠서.)
아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콘크리트 터진 틈새로
노란 꽃대를 단 푸른 싹이
간질간질 비집고 나온다.
공중에선
조그만 동작을 하면서
기쁨에 떠는 새들.
호랑나비 바람에 달려와
마음의 바탕에
호랑무늬를 찍는다.
찍어라, 삶의 무늬를,
어느 날 누워 깊은 잠 들 때
머릿속을 꽉 채울 숨결 무늬를,
그 무늬 밖에서 숨죽인 가을비 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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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4
오늘 낮에 새들한테 당했다
섬 밖 사방에서 날아와
떼지어 멤돌다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든
저 갈매기표 갈새표 심장들
두둥 두둥둥
마싹 마른 다리로 벌떡 일어나
뒤를 보며 달리다
바닷가에 널어논 그물에 걸려
벌렁 나자빠져 춤추듯 누웠다
온통 맥박투성이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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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5
숲에서 나와
가까이,
땅의 얼굴에 얼굴 가까이,
그 얼굴에 볼에 가볍게 볼 비비고
그 얼굴에 입에 입 가까이
혀 가까이
목구멍 가까이,
가볍게
몸이 가벼워져 가꾸로 빙빙 돌며 떠오른 곳
회오리 바람이는 곳 내 죽음 통하지 않고 고장 승천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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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6
어젯밤에는
흐르는 별을 세 채나 만났다
서로 다른 하늘에서
세 편의 생이 시작되다가
확 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오늘 오후 만조때는
좁은 포구에 봄물이 밀어오고
죽었던 나무토막들이 되살아나
이리저리 헤험쳐 다녔다
허리께 해파리를 띠로 두른 놈도 있었다
맥을 놓고 있는 사이
밤비 뿌리는 소리가 왜 이리 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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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7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뛰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으로 한 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하게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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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19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저 허옇게 깔린 갈대 위로
환히 타고 있는
단풍 숲의 색깔을
생각을 줄줄이 끄집어내
매듭진 줄 들고 껴내
그 위에 얹어
그냥 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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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0
바다는 젖어 있었다.
바다와 해가 맞물려 출렁거려
그 속에서 해당화가
왕보석처럼 빛났다.
색의 창을 슬쩍 여닫는 색의 눈,
해당화를 보다 말고
인간을 향해
그냥 인간의 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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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1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에 사는,
미물(微物) 속에서도 쉬지 않고 숨쉬는,
혹은 채 살아 있지 않은 신소재도
날카로이 깎아놓으면
원래의 편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본능!
바람에 흔들리는 저 나무, 저 꽃, 저 풀,
도토이를 먹는 다람쥐의 오르내리는 저 목젖이
동식물도감의 정밀한 사진들 속에 숨지 않으려는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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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2
무작정 떠 있다
멍텅구리배,
오늘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허리 근질거림 참다보면
바다에 떴는지 하늘에 떴는지
열에 떴는지,
처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에 정신없이 발디딘 원숭이처럼
땅 위에 떴는지,
인간으로 그냥 낡 싫어
뒤로 돌아
생명의 최초로 되밟아가려다
생명 속에 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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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4
베란다에 함박꽃 필 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친구 하나 죽었다는 편지 쓰고
편지 속에 죽은 친구 욕 좀 쓰려다
대신 함박꽃이 피었다는
얘기를 자세히 적었다.
밤 세수 하고 머리 새로 씻으니
달이 막 지고 지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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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5
회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 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걸음 멈추면
소리 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은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회양산 봉우리,
소리 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분광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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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6
달마는 면벽 구 년에 왜 마르지 않았는가?
달마는 마르는 대신 왜 사지의 퇴화를 택했는가?
사지는 말업이 그의 고통과 법열 속에
(저 소리없는 신음소리, 아악 소리,
내장의 웃음소리, 생명의 폭발소리)
그 모두를 참으며 세포 하나하나에
미소 보내며 기다렸을까?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퇴화란 무엇인가?
혹시 진화란 퇴화로부터 뒷걸음치는 것?
발 헛디디면 계속 뒷걸음치다
벽에 등대고 선 나의 머리와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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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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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며 웃기 위해
지니고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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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0
함박꽃 가지에
사마귀가 성교 도중 암컷에게 먹히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
하늘과 땅 사이에 기댈 마른 풀 한 가닥 없이
몸뚱아리 몽땅 꺼내놓고
우주의 공간 전부와 한번 몸 부비는
저 경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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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1
마른 국화를 비며서
향내를 낸다.
꽃의 체취가
그토록 가벼울 수 있는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쏟아진다.
나비나 하루살이 몸에
식물의 마음 심은
가벼운 것이 되어
떠돌리라
비벼진 꽃 냄새 살짝 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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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4
옷을 벗어버린 눈송이들이
지구의 하늘에서보다 더 살아 춤추는
우주의 변두리,
혹은 서울의 변두리 밖으로,
가고 싶다.
확대경 속에서처럼
큰 눈송이들이
공해에 찌든 몸의 옷 벗어버리고
속옷도 모두 벗어버리고
속살 그대로 날으며 춤추는
춤추다 춤추다 몸째 춤이 되는 그곳으로,
여섯 개의 수정(水晶)깃만 단 눈송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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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5
친구 사진 앞에서 두 번 절을 한다.
친구 사진이 웃는다,
달라진 게 없다고.
몸 속 원자들 자리 좀 바꿨을 뿐,
영안실 밖에 내리는 빗소리도
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
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
다 그대로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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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6
내 마지막 기쁨은
시의 액설레이터
밟고 또 밟아
시계(視界) 좁아질 만큼 내리밟아
한 무리 환한 참 단풍에
눈이 열려
벨트 맨 채
한계령 절벽 너머로
환한 다이빙.
몸과 허공
0밀리 간격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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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7
땅속에 발목뼈 채 묻히지 못해
한없이 떠도는 원혼이 된들 어떠리.
원혼 가운데서도
새처럼 가벼운 원혼,
슬피 울지도 못하고
잠투정하듯
초저녁에 잠시 우는,
울다 문득 고막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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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38
아침에 커피 끓여 마실 때
내입은 위와 통화한다.
"지금 커피 한잔 발송한다."
조금 있다가 위는 창자와 통화할 것이다.
"점막질에 약간 유해한 액체 바로 통과했음."
저녁쯤 항문은 입에게 팩시를 보낼 것이다.
"숙주에 불면증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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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0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별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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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2
부어주고 왔다 마음 태반을,
무주 구천동 백련사
비비추에.
줄기마다 십여 개씩
불 막 끈 보랏빛 초롱들을 달고
바람처럼 모여 있는 비비추,
초롱 하나하나엔 어린 초승달,
하얀 손잡이 하나씩.
비비추, 날 마셔라
나는 널 마실 수가 없다.
길섶에 끌려가 너를 향해 폭발할 뿐,
엄동설한 수도관 터지듯.
뿜어나오는 나를
마셔라, 비비추.
내 다시는 나를 담을 수 없는
관(館)이 되어 돌아왔다.
너글너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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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4
바람 소리.
저 마을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산,
낯익어 고향 같다.
개울 간신히 건너는 돌다리
낯익어 돌다리 같다.
눈 반쯤 감고 보면 모두 낯익다.
바람 소리에 흔들릴까 말까 주저하는
저 나무의 몸짓도,
언젠가 하루 구름 갠 날
눈 한번 아주 감으면
모든 게 몸서리치게 낯익어지지 않을까?
아 환한 사람 소리.
눈 지긋 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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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6
며칠 병없이 앓았다.
책장문들이 모두 열렸고
책들은 길 떠날 채비하고 줄 서 있었다.
더러 외투 껴입고 있는 놈도 있었다.
문밖을 나서니 시야의 초점 계속 녹이는 가을 햇빛
간판들이 선명해라
지나치는 사람들도 선명해라
책을 들고 걷는 저 여자의 긴 손.
차도에 바싹 나와 아슬아슬 서 있는
저 흙덩이의 어깨까지 선명해라.
눈이 밝아졌구나.
아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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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7
서가에 꽃힌 책 위에도 얹어 놓을 때,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꺼내 놓으라면
관악산부터 내어 놓으리
다녀온 암자들도
암자의 약수그릇도 내어 놓고,
가을 저녁 어둡기 직전
남 보지 않을 때
땅을 더듬다 말던
가랑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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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8
바람의 손길 한결 서늘해지고
날이 저문다.
마른 풀잎에 포근히 싸여
혼자 잠들고 싶을 때.
피여 잠들지 마라,
피여 잠들지 마라,
정상 코빼기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해발 561미터 칠감산에만 가도
별은 하늘 가득
별은 하늘 가득
하늘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면
지평선 넘어서까지
하늘에 마음 뺏겨 붙박이된 불꽃처럼
주렁주렁 주렁주렁 달려 번쩍인다.
피여 잠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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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49
늦가을 저녁 아우라지강을 혼자 만나노니
나의 유해 예까지 끌고 와 부릴 만하이.
앞산 한가운덴 잎갈이나무들 위통 벗고 모여
마지막 햇빛 쪼이고 있고,
주위로 침엽수들 침착히 서서
두 강이 약속 없이 만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다
껄끄러운 두 강 만나
고요한 강 하나 이룬다
빈 배 하나 흔들리며 떠 있다
시간이 고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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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50
오늘 서가의 지도를 모두 버렸다.
바닷가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눈부신 눈을 맞으리.
건너편 섬이
은색 익명으로 바뀌다가
내리는 눈발 사이로
넌지시 사라지는 것을 보리.
사라진 섬을 두고,
마음에 박혔던 섬도 몇 뽑고
마음에 들던 섬부터 뽑고
섬처럼 박혀 있던 사간들도
모두 뽑아버리고 돌아오리.
오늘 지도를 모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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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52
싸락눈 내리는 늦가을 저녁
꽃도 병(病)도 없어
기계적으로 물 주며 잊고 살던 소심과
최근 들어서는 늘 곁에 놓아두고 두리번 찾던 시간을
(내 안경 어디 있지?)
다시 만나리.
한번 만나고 나면 세상의 온갖 선(線)들이 시들해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가벼이 살짝 쳐든 처마의 선을
받침기둥 하나와 수인사하고
서로 자리 슬쩍 바꿔
두 팔로 받치고 서 있으리.
싸락눈 맞으며.
다음엔 마음놓고 금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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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54
그대 강을 건넜는가?
낮선 밤여행 길에서
전조등을 허리로 때로는 무릎으로 받으며
이른봄 성긴 눈발 속에 나타났다 숨었다
눈인사하다 건너는
길이 먼저 건너는
그런 강이 아니고
갑자기 자갈 위에 그대를 올려놓고 문득 내려놓는,
귀기울이면
타이어 무게 받으려고
등에 힘주고 움츠렸던 자갈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소리.
그대 강을 건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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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58
달개비떼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는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
흔들리면
나비의 턱더듬이 같은 수술!
그 하나에는 작다작은 이슬 한 방울이 달려 있다.
혼처럼 박혀 있는 진노란 암술
그 뒤로 세상 어느 나비보다도 파란 나비!
금방 손끝에서 날 것 같다.
그래, 그 흔한 달개비꽃 하나가
이 세상 모든 꽃들의 감촉을......
상아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풀잎 끝에서 꼭 한 바퀴 구르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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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59
그대는 상자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낡은 티셔츠, 벙어리장갑 한 짝,
흑백 사진 몇 장,
몽당연필 한 자루,
붉은 연필로 겉장에 X표 친 노우트,
벙어리장갑 또 한 짝,
을 들치고 속을 보면
어느날 들어간 인사동 골목길
연탄 난로 위에 우동이 끓고 있는 조그만 노점 앞에서
키 큰 소녀 하나가 떡볶이를 먹고 있다.
단발머리 위로
담장 위로
벌겋게 녹슬고 있는 철조망 끝으로
타고 오른
끝이 살짝 말려 있는 나팔꽃 한 줄기
그 위론 예쁘달 것도 귀엽달 것도 없는
낮달 하나
구역질
소녀는 계속 먹고 있다.
시간이 새어나가고
아무런 부피도 무게도 자리 뜬
한줌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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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63
하루살이 하나 가물가물 내려온다.
길을 잃었는가
생각에 잡혔는가
발 헛디뎠는가
혼자 헛것처럼
가물가물 돌며 내려온다.
하루살이 떨어진 점 위로
풀잎 한 장 가벼이 날려온다.
혈관 알맞게 마른
풀잎 한 장 날려온다.
풀잎이여
하루살이의 얼굴을 덮어다오
그의 귀와 귀 사이를 덮어다오
그의 죄그만 입술과 입술 사이의 숨을 덮어 다오
그의 삶의 느낌을 덮어다오
이 하루살이를 덮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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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장 70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
저녁 햇빛 속에
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
수척한 물새 하나
생각에 잠겼는가
냇물을 굽어보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
조으는가
조으는가
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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